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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길드, 도제, 그리고 장인

참고 :
왜 길드가 형성되었는가부터 이해해야 왜 이런 행태가 나타났는지 납득할 수 있죠.

도시의 길드는 독점으로써 일종의 보증자 역할을 했습니다. 도시의 익명성이 증가되고 품질을 보증할 중앙집권정부가 사라진 상태에서, 사람들 사이에 신뢰를 얻기란 매우 힘들었고, 물건의 품질 또한 믿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길드는 자신이 독점권을 가진 품목에 대해 일정 품질 이상 만들 것을 강요하고, 그것을 집행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도시의 길드는 무너지기 직전을 제외하면 많은 경우 그 구성원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도제가 학대받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히려 길드는 '품질 관리'를 이유로 자신이 독점하는 산업 전체에 일정 시간 이상 하루에 일을 하지 못하도록 못박고 그것을 집행했습니다. 근대화는 길드의 이런 전근대적 보호장치를 깨부수고 법률을 만들지 않아 문제가 생깁니다.

도시의 길드는 도시를 경영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도시의 세부적인 행정은 각 분야의 수많은 위원회가 집행하였으나 원로(Alderman)와 시장을 비롯한 조언가들은 그 전문가들인 길드의 조언을 받았습니다.
+) 도시 길드의 도제가 되는 것은 자유로운 '시민'계급이 되기 위해 그나마 열린 루트 중 하나였습니다.

도시의 길드는 수많은 자선사업을 주관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도시 공동체에 기여했습니다.

그 외에도 길드는 자원자를 모아 치안을 유지하는등의 역할을 하죠.

길드가 중세 말이 되면 문제가 많아지는것은 사실이지만 길드의 독점적 체제에는 공과 과가 모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유익한 (남의 나라) 역사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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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과 베트남의 첫 만남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11월 11일, 미육군 항공대 제51 전투비행단 26비행대대 소속  루돌프 쇼(Rudolph C. Shaw) 중위는 P-51B 머스탱(기체번호 43-25244)을 몰고 동료들과 함께 중국 난닝시의 일본군 시설을 타격하는 임무를 수행 후 귀환중이었다. 쇼의 기체는 대공포에 피격된 탓인지 연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무전으로 상황을 알렸지만 결국 엔진이 꺼졌고, 정글속으로 추락했다. 당시 보고서에는 쇼가 실종됐다고 적혔다.(USAF MACR 10632) 낙하산 탈출에 성공한 쇼는 정글 한복판에 남겨졌다. 그는 지도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봤지만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아마도 중국 남부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L'Indochine française) 북부 사이라고 생각됐다. 인도차이나는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행정을 담당하던 비시 프랑스 식민정부도 연합군 포로에게 좋은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노이 병원의 프랑스인 의사가 잡혀온 연합군 파일럿들을 고문했다는 기록이 존재함.) 그러던 중에 정글을 헤집고 현지인 한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중 일부는 총을 들고 있었고 복장은 평범한 농민이었다 쇼는 등짝에 붙은 블러드 칫(blood chit)을 보여주며 자신이 연합군 파일럿이라는 것을 알렸다. 하지만 그들은 글씨를 읽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쇼를 정중하게 대우하며 어디론가 데려갔다. 현지인들은 쇼를 데리고 끝도 없이 이어진 산길을 며칠 동안 걸었다. 쇼는 손짓 발짓 다해가며 도대체 어디로 가는거냐고 물었으나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가량을 걸었을 무렵, 쇼는 마침내 그들의 대장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빼빼 마르고 수수한 옷차림에 긴 수염을 가진 노인이었다. 노인은 쇼를 보자마자 유창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시오? 어디서 오셨소?' 일주일만에 듣는 모국어에 쇼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 노인을 꽉 끌어안았다. 마치 고향 집의 아버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었다. 쇼는 이곳이 인도차이나 북부이고, 그를 구해준 이들이 베트민(Viet Minh)라는 무장단체라는 설명을 들었다. 노인은 자신이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쇼는 노인에게 자신을 중국 남부에 있는 미군기지까지 데려다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노인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승낙했다. 쇼는 베트민들의 도움을 받아 국경을 넘어 미군이 주둔한 쿤밍 비행장까지 갈 수 있었다. 기지에 도착하여 귀환을 보고한 쇼는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노인은 미군 장교들을 만나 자신들이 공산주의 계열 무장단체이며, 연합군과 공조하여 베트남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 허나 미군들은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듣더니 안색이 변하더니 노인과 베트민들을 본체만체 했다. 그리고 쇼의 수속을 순식간에 처리하고선 바로 다음 비행기에 태워 보내버렸다. 쇼는 노인에게 작별인사조차 못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미군은 노인과 베트민 대원들에게 '이제 볼 일 끝났으면 기지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노인은 미국인들의 무례한 행동에 화를 내지 않고 그냥 왔던 길을 돌아 터덜터덜 돌아갔다. 그들은 그저 미군들에게 자신들의 말을 들어준 것 자체에 만족하는 것 같아보였다. 이후 수개월이 지나 1945년 중순, 미국은 전략 사무국(OSS) 소속 아르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 요원을 보내 베트민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들은 뒤늦게서야 베트민이 우호적 조직이라고 판단했고, 낙하산으로 무기와 무전기를 투하해주었다. 이후 베트민 대원들은 OSS의 게릴라전 교육을 받으며 현지에 추락한 연합군 파일럿을 구조하는 임무와 일본군 기지에 대한 소규모 군사작전을 진행했다. 한번은 노인이 풍토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선 미국에서 의약품을 공수해 보내주어 노인의 생명을 구했다. 두 단체의 협력은 몇개월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면서 자연스레 끊겼다.   루돌프 쇼 중위를 구해준 노인은 훗날 북베트남 민주공화국의 국부가 된 호치민(Ho Chi Minh)이었다. 호치민은 일본이 항복한 뒤 다시 돌아온 프랑스 식민정부를 상대로 무력투쟁을 이어갔다.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이었기 때문에 호치민과 베트민을 적으로 규정했다. 호치민은 여러방법을 통해 백악관에 "우린 당신들과 적인 아닌 친구가 되고 싶다" 친서를 보냈으나, 결국 전부 묵살 당했다고 한다. 호치민은 차선책으로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공에게 지원을 받기 위해 손을 잡았다. 그가 이끈 베트민은 훗날 북베트남 인민공화국의 전신이 됐다. OSS에게서 정글 게릴라전 전술을 배운 베트민 대원들은 훗날 1차 인도차이나전쟁, 그리고 더 나아가 베트남전쟁에서 북베트남 장교, 장군으로 활약했다. 미국은 이후 몇십년 동안 자신들이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사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호치민과 베트민에게 구조된 루돌프 쇼는 이후 한국전쟁에도 참전했으며, 고향인 네바다로 돌아가서 평범하게 살았다. 그는 1944년 11월의 일을 절대 잊지 않았고 이때의 일을 일기로 남겼다. (출판은 안했다고 함.) 하지만 이후 반공정서와 베트남 전쟁으로 두 국가의 사이가 극악으로 치달아 그는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쿤밍으로 향하던 중 찍은 사진 1장, 호치민이 직접 서명한 빨간색 신분보장 카드와 그가 자신에게 준 편지 한장을 고이 간직했다. 이 물건들은 1995년 미국과 베트남의 국교가 재개 됐을 때 다시 세상에 공개됐다. 양측 정부는 이 일화를 들먹이며 우리들의 첫 만남은 매우 신사적이고 인류애가 넘쳤다고 주장했다. 2014년 이 서류들이 소더비 경매에 나오자, 베트남 외교부는 34375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이 서류들을 매입했다. 현재 이 서류들은 베트남 문화체육관광부가 보관중이다. (출처) 영어를 잘해야 하는 거군
하느님도 싫어하는 행위
다윗은 왕이 되고나서 한번은 자신의 궁전을 산책하다가 자기 궁전 앞에있는 집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봤음. 그 여인은 자신의 부하이자 군인중에서 하나였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그때가 목욕하던 순간이여서 그런지 아니면 자기 취향이여서 그런건지 ㅗㅜㅑ;;;;;; 해버린 다윗은 밧세바가 탐이나서 ntr을 시도하여 동침을 해버렸고. 아이가 생기더라도 자연스럽게 우리야가 자기 자식인줄 착각하게 하고 이 일을 숨기기 위해서 군인이였던 우리야를 불러 휴가라고 하면서 자기 마누라랑 동침을 하게 할려고했음.  그러나 뼛속까지 구닌이였던 우리야는 자기 전우들이 피땀흘리며 싸우는데 자기만 집에서 놀수는 없다고 거부. 이걸 들은 다윗은 결국에는 자신의 부하장군을 시켜서 전투의 최전선으로 우리야를 보내서 거의 강제로 전사하게 만들고 슬퍼하는 밧세바가 남편의 상을 다 치루자마자 자기 마누라로 삼았음.  "저런짓하지 말라고 십계명도 만들었는데 ㅅㅂ." 이걸 본 하나님은 당연히 극혐하여 이걸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가긴 그러므로 예언자를 보내서 왕을 꾸짓으니 그사람의 이름이 나단이였고 꾸짓은 내용은 이럼. "어이 다윗왕님." "예언자 어서오고." "그 이야기를 아십니까? 못된 부자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게 뭔데 하느님이 말한거라도 되냐." "이런 남자가 살았다고합니다. 예전에 어느 부자와 가난한이가 한동네에서 살았죠. 부자는 손님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손님을 맞이하면 예를 다해야하는데 부자는 자신이 가지고있는 수많은 말과 양을 잡기 아까웠다고합니다. 그래서 그 부자는 가난한자의 하나뿐인 암양을 뺏어서 손님을 대접해줬고 가난한이는 유일한 재산을 잃고 나중에는 굶어 죽었다고합니다." "그거 참 간사하고 나쁜자로다. 자신의 넘치는 재물을  밖에다가 뿌리고 다니지는 못하겠지만 손님을 대접하는데 남의것을 빼앗다니! 내 나라에 그자가 있었다면 반드시 벌을 받게 만들었을것이다." "그게 바로 너입니다." "뎃?" "너요 너 너 너 너 너 너이사람아 너 너 이 NTR충아 너!" 왕한테 눈깔에 힘 빡추고 혼낸게 상당히 인상적인데 다른 몆몆 그림은 저렇게까지는 안그렸을지라도 적어도 손가락질은 했음. 왕한테 이러는건 팔이 잘려도 용서못받을짓인데 나단은 바세바가 품고있는 다윗의 자식은 좋을일에 절대 못쓸것이라며 죽게될것이라고 저주를 부었고. 단도직입적으로다가 크게 혼이나서 혼이 빠진 다윗은 몆일내내 금식에 기도에 절까지 했지만 결국에는 자식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고함. 하나님도 NTR충은 역시 극혐하신다.  (출처) 제우스는 NTR 겁나 해대던데 그리스 라인을 탔더라면...
한국의 미 (in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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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본 덕분에 룰 갈아 엎어버리고 존나 핫해진 태권도 근황.jpg
태권도 경기하는 두 선수 뒤로 보이는...? 어디서 많이 본 게이지.. ??그래.. 이거 아냐? 아니고 실제 태권도 선수 경기 현장임. 상대방 선수한테 맞을 때마다 게임처럼 뒤에 게이지가 줄어듦. (W O W) 게이지가 다 줄어들어 0이 되면 패배. 라운드가 종료됨. 8번 봐도 킹오파 같은 느낌인데 실제로 새로운 태권도 규칙 적용된 태권도 시범경기라고 함. 원래 태권도 점수 체계는 0점에서 시작해 가격 부위별로 점수를 얻는 득점제였다면 바뀐 룰은 100점에서 시작해 점수가 깎이는 감점제 방식. 그것을 게임처럼 게이지를 통해 표현해 경기 흐름와 내용을 쉽게 바로 알 수 있게 함 (아이디어 미침...역시 e-스포츠의 나라..) 이렇게 룰을 파격적으로 바꾼 이유는 한국을 성장하게 하는 힘(^^) 일본의 역할이 컸음. 원래 태권도는 특정 부위를 가격하기만 하면 점수를 따는 터치 개념의 방식이었음. 그렇다보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려한 기술(돌려차기 같은)이나 흥미 진진 타격전 대신  득점만을 위한 잔기술만 사용해 재미없단 비판이 많았었음. 그러던 중 도쿄 올림픽에 일본의 가라테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됨ㅋ 태권도협회: "감히 너네가...?!" IOC는 보통 비슷한 종목의 경우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종목을 없앤다고 함. 이렇게 될 경우 가라테에 태권도가 밀릴 가능성이 매우 큰 상황. 위기감을 느낌 대태협은 변화하기 시작했고 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전자 호구와 감점제를 도입해 새로운 룰을 만들어낸 것. (배 부분 가격 강도에 따라 최소 1점 ~최대 40점까지 차이가 난다고 함. 원래는 갖다 대기만 하몀 똑같은 점수 가져감) 또 경기를 방해하는 소극적 플레이나 반칙을 하는 경우 상태방 선수에게 10초간 파워 2배를 적용하는 '패널티 타임'도 적용. 패널티 타임에 상대방 선수들은 더 강한 공격을 시도해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음. 아직 시범경기만 치른 상태고 개선점도 많겠지만 새롭게 바뀐 태권도 룰과 경기 모습에 국내외 반응은 뜨거운 상황이라고 함..! 태권도 앞으로 더 더 흥하길..! 2차출처: 디미토리
우리나라 산에 나무가 많은 이유.txtjpg
1. 한국은 온돌로 난방을 하는 국가 였음. 2. 온돌 난방은 마른 나무인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해서 나무 소비가 엄청난 난방방식 이었음. 3. 한반도 기후도 나무가 크는데 장애가 됨 4. 한반도는 가을부터 봄까지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어서, 수시로 일어나는 산불에 산이 홀라당 타버리는 일이 계속 생김 5. 한국의 난방 방식은 변함이 없어서 해방 이후에도 지리산과 개마고원같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에 제대로된 숲이 사라져 갔음 6. 6.25전쟁이 터지자 그나마 남아있는 산림도 파괴되어버려 당시 유엔 보고서는 한국의 산림은 복구될 수 없다고 보고하였음 7. 당시 월드뱅크는 개발도상국들에게 나무를 심는 자금을 지원했었음. 8. 하지만, 개도국들은 나무를 심는 자금을 돈으로 주면 삥땅을 처먹어버리고, 돈 대신 묘목으로 주면 대충 심고 관리를 안해 나무가 죽지읺고 뿌리를 내리는 활착율이 10%도 안나오는 상황이었음. 9. 625전쟁으로 산림이 폐허가 된 한국에도 월드뱅크의 지원자금이 나옴. 10. 처음에 한국도 삥땅 의혹을 받았음. 11. 월드뱅크의 식목 지원자금으로 묘목을 사는게 아니라 석탄과 시멘트 탄광을 개발한 것임 12. 월드뱅크가 삥땅이라고 ㅈㄹ했지만, 한국의 설명을 듣고는 납득을 해버림. 13. 장작으로 난방을 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한국에 나무를 심기만 해서는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땔감이나 기둥이 된다.나무대신 땔감과 건출자재를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먼저 제공해 줘야 한다는 논리 였음. 14. 탄광들이 가동되기 시작하자 ,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목재 가옥은 시멘트 양옥으로 대체되기 시작함. 15. 두번째 한 일은 화전민을 없애는 것이었음. 16. 그나마 나무들이 있는 깊은 숲속에는 화전민들이 일부러 불을 질러 나무를 태워 없애고, 그 자리에 농사를 지어 먹고살고 있었음. 17. 화전민들을 산 밑으로 이주시킴. 18. 화전민들에게도 있는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을 자극하고, 먹고 살 일거리를 마련해 줌. 19. 어린 자식들까지 교육도 안시키고 화전민으로 키울거냐는 말이 화전민들에게 먹힘. 20. 화전민 정착촌을 근사한 양옥으로 지어주고, 그 곳에 학교를 만들어 줌. 21. 화전민 여자는 국가가 운영하는 묘목 키우는 농장에 일군으로 고용했고, 남자는 벌을 치는 양봉을 할 수 있게 지원했으며, 산에 있고 싶으면 산을 지키는 산지기로 채용해주고 임금을 줌. 22. 도시에 살고싶다는 화전민이 있으면, 환경미화원으로 고용해서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해주며 화전민을 줄여나감. 23. 당시 숲이 많은 강원도에만 3만명의 화전민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을 이렇게 정리함. 24. 이렇게 사전정비를 한 후 나무를 심기 시작함. 25. 공무원들을 활용했음. 26. 당시에도 공무원들은 해당 지역 출신들이 읍사무소, 면사무소를 장악하고 있어 묘목을 주고 나무를 심으라고 하면 민관이 한통속이 되어 제대로 정부 지시가 작동이 안되었음. 27. 교차 검사가 신의 한수 였음. 28. 경상도 공무원은 전라도로, 전라도 공무원은 경상도로 보내는등 타 지역으로 보내서 교차 검사를 하게 함. 29. 여기에 공무원들간에 경쟁을 붙임. 30. 묘목이 심어서 죽지않고 제대로 자라나는 활착율이 높은 지역의 공무원들에게는 특진과 성과급을 줬고, 낮은 지역의 공무원들은 성과평가를 까버림. 30. 자기가 속한 지자체가 성과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는 타지역 점수를 까내려야 함. 어설프게 술한잔 접대받고 타지역 점수를 잘 주면 자기 조직 평가가 망가지기때문에 공무원들이 눈에 불을 킴. 31. 이렇게 깐깐하게 검사를 하다보니, 활착율 100%라는 숫자가 나옴. 32. 월드뱅크는 활착율 100%라는 숫자를 믿지 않았음. 개도국들 평균 활착율이 10%도 안나오는데, 묘목 하나도 안죽이고 100% 다 키운다는 활착율은 사기라고 평가함. 33. 그런데 활착율 100%는 사실이었음. 34. 묘목을 공급할때 이동 과정이나 심는 과정에서 묘목이 죽는것을 감안해서 110%를 보통 공급했음. 35. 곰무원들은 110%의 묘목을 받으면 100%를 일단 지정된 장소에 심고, 남은 10%를 다른 곳에 심어서 키움. 36. 타지역 공무원들이 활착율을 점검하러 오는 시기가 되면, 나무를 심은곳에 다시 가서 말라죽거나 비실비실하는 나무가 있으면 딴곳에 짱박아 심은 나무로 교체를 해버림. 37. 해픙과 돌산으로 나무가 자랄수 없는곳으로 간주받던 포항시까지 녹화사업이 완료될 정도였음. 38. 포항 영일구의 경우 흙도 없이 암반층만 노출된 상태로 풀도 자라기 힘든 지역임. 이 가파른 암반층에 허리에 줄을 묶고 인부들이 올라가서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퇴적암반이 풍화되게 한 뒤 거름을 섞어 나무를 심고 가물면 물을 길어다 주고 매년 비료를 주는 생고생 끝에 산림이 복원됨 39. 당시 아카시나무 같은 외래종을 심어서 욕을 먹었으나, 아까시나무는 수명이 짧은 나무라 산림환경이 조성된후 자연적으로 죽으며 떡갈나무등 활엽수로 대체되고 있는 중임 40. 당시 녹화사업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산림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한 과정의 성격으로 당시의 척박한 토질환경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음 41. 60년대에 메마른 토양에서 잘 자라는 큰 키나무는 리기다소나무, 사방오리, 아카시나무 정도밖에 없었고, 아카시나무의 경우 뿌리혹박테리아의 질소고정으로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나무였음 42. 외래종을 심어 생태계 교란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외래종들이 나이를 먹어가며 말라죽고 자생 활엽수림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자연스럽게 산림 복원이 이뤄지게 됨 43. 최초 계획도 1차는 아카시나무등 생명력이 강한 픔종, 2차는 소나무등 중형목, 3차는 경제성이 좋은 대형종으로 10년씩 3차로 미리 게획된 초장기 프로젝트 였음 44. 하지만 정치적인 일로 인해 2차까지만 진행되었음 45. 여튼 1982년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한국은 2차 세계대전이후 산림녹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 라고 보고서를 발간함 한줄요약. 1970년대까지 한국 산에는 나무들이 거의 없었음. 100억 그루 이상 묘목을 심어 40년을 키워 울창한 한국 산이 됨. ㅊㅊ 더쿠 모야 대박신기함 ㅋㅋㅋ 교차검사 대박 머리 개 좋은듯 ㅇㅇ 역시 극한의 효율 민족 아니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