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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인간은 참 간사해서, 몇 개월을 코치님과 운동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매일 식단을 체크받는 게 조금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매일 무엇을 먹었는지 적어온 시간이 꽤 된다. 이제 한 5년 정도 됐으려나. 식단 일기를 쓰면서 다이어트 효과를 본 적도 있고,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한 기간도 있지만, 뭐가 됐든 습관이 돼서 계속 적어온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자신과의 싸움일 뿐이었다. 그와 달리 매번 다른 누군가에게 내 식단을 보여주고 관리를 받는 것이 어느 순간 조금 간섭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관리를 받는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는데, 이제 운동 좀 했다고 감시받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그것이 상당한 효과를 내게 준 것은 사실이고, 인정하는 바이다. PT가 끝나고 나서,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상황에 철저히 혼자 식단을 관리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조금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매번 식단을 코치님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 어차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먹을 때 굉장히 신경이 쓰이고 스트레스마저 받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아주 세세하게 적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날그날 내가 관리를 잘했는지 못 했는지를 가늠하게 할 만한 정도로는 적어놓기 때문에, 사실상 다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속여봤자 결과는 정직하니까. 이런 일종의 보고 체계가 식단을 관리하게 만드는 하나의 효과인 것은 맞지만, 스트레스의 원인이 강도 높은 운동만은 아닌 것도 확실하다.
지난주 월요일에는 바로 그 스트레스에 대한 일탈을 꿈꿨다. 그래서 일부러 운동을 하고 와서는 저녁을 먹었다. 심지어 피자. 일탈은 역시 정크푸드지. 다행히 후회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저녁을 먹어버린 것을 솔직하게 코치님에게 고백도 하려던 생각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코치님을 기만하려던 생각은 없다. 그냥 적지 않았다. 완점 범죄였고, 일탈의 완성이라면 완성이었다. 그런데 이제껏 축적해온 공복의 효과인지, 패턴의 효과인지 몰라도 체중의 증가 폭이 크지 않았다. 뭐 어쩌다 한번 먹었다고 갑자기 비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번 주 월요일에도 저녁을 먹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번 주 월요일은 계획된 일탈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음식에 손을 대다 보니 나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식단 일기에 적지 않았다. 나는 나쁘다.
다행스럽게 매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체지방량이 줄고 있는데, 이번 주는 사실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없다는 것은, 크게 늘지는 않았어도 지난주와 비교하면 감량 폭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이번 주도 역시 어마어마하게 감량되었다. 내가 정말 간사한 것이, 좋은 결과가 나오자 아, 코치님에게 굳이 2주 연속 월요일에 무너진 것을 얘기하지 않길 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내 몸은 월요일에만 무너지는 것을 또 한 번 패턴화시킨 것일까. 이제 다시 고삐를 쥐어야지. 연장했던 트레이닝도 이제 다시 거의 끝나간다.

두 가지 생각이 든다.

1. 그래도 방심하지는 말자.
2. 간섭받기 싫으면 역시 능동적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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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들끼리 사진집을 돌려본 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그 책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방의 책장 안쪽에, 책등이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놓았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198~99면)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난 서울의 여름, 이상한 열정으로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고 있는 열두 살의 내가 있다. 그건 평범한 동화책이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서는 놀랍게도 처음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엌의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픈 소년 칼에게, 그를 사랑하는 형 요나탄이 말한다. 네가 죽으면 하얀 새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거야. 나는 너를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얼마 뒤 집에 불이 나고, 칼을 업고 뛰어내린 요나탄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과연 하얀 새가 되어 창가로 날아온 요나탄이 들려준 말대로, 뒤이어 병으로 숨을 거둔 칼은 낭기열라라는 아름다운 세계에서 건강한 몸으로 다시 눈을 뜬다. 그러나 그곳은 아름답기만 한 세계가 아니다. 들장미 골짜기의 텡일이라는 무자비한 독재자가 괴물 카틀라의 힘을 등에 업은 채 사람들을 지배하고 핍박한다. 이웃한 벚나무 골짜기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그에게 맞서는데, 요나탄은 ‘사자왕’이라는 그곳에서의 별명대로 용감하고 순정하게 자신의 몫을 다해 싸우는 중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싸움의 과정에서 연약하고 겁 많은 칼이 서서히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 ‘사자왕 칼’이 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일인칭 화자인 칼이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으므로, 처음부터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그를 이해했다. 형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과 믿음,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까지. 거기에 더해, 칼이 관찰하는 독재자 텡일의 모습, 그가 조종하는 살인의 화신 카틀라, 그에 맞서 연약한 사람들이 연대하는 과정이 어째서인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이 결국 승리하기는 하지만, 그 싸움의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반군의 지도자 오르바르만은 울지 않는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불길한 예감을 기억한다. 그 어두운 예감과 폭력의 기억으로 그늘진―그러나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세계, 낭기열라에서 소년들이 다시 죽음의 형식으로 함께 떠나가는 마지막 장면을 읽다가, 어느새 해가 져서 캄캄해진 내 방의 서늘한 벽에 기대앉아 오래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 그 후 삼십여 년이 흘러, 오슬로로의 여행을 앞두고 이 책을 다시 완독한 지금에야 비로소 내가 왜 연도를 착각해 왔는지 깨달았다. 나의 내면에서 이 책이 80년 광주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1980년 아홉 살의 내가 문득 생각했던, 그 여름을 이미 건너지 못했으므로 그 가을로도 영영 함께 들어갈 수 없게 된 그 도시의 소년들의 넋이, 그로부터 삼 년 뒤 읽은 이 책에서 두 번의 죽음과 재생을 겪는 소년들에게로 연결되어 내 몸속 어딘가에 새겨졌다는 것을. 마치 운명의 실에 묶인 듯, 현실과 허구, 시간과 공간의 불투명한 벽을 단번에 관통해서. 2. 2012년 겨울부터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한 자료를 읽으면서 나는 내면의 투쟁을 치르고 있었다. 인간의 잔혹함을 증거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에서 인간의 존엄을 증거하는 자료들 사이에서 나는 분열을 겪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광주는 더 이상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극단적으로 공존한 시간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어 있었다. 신대륙의 학살,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관동과 난징의 학살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잔혹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그 폭력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던 연약한 몸짓들에 대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5월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것임을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기도의 형식을 하고 있는 그 일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 먼저 이 소설의 맨 앞과 맨 뒤에 촛불을 밝히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하고 싶었다. 촛불의 불꽃의 중심을 통과하여, 삼십여 년을 건너 우리에게 오는 넋들의 걸음걸이를 생각했다. 그 불가능한 재생을 단 한 순간이라도 가능케 하고 싶었다. 열다섯 살에 그곳에서 죽어 여름으로 건너오지 못한 소년 동호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으로 떠오르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다만 애도하고 온 힘을 다해 존엄에까지 가자고 결심은 했지만, 『소년이 온다』를 써 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스스로 흔들리곤 했다. 4장 ‘쇠와 피’ 같은 경우에는 내가 흔들리며 회의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소년에게 매달렸다. 그가 나를 밝은 쪽으로 이끌고 가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에게 끌려가듯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했다. 그러므로 만일 지금 누군가 나에게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폭력보다 먼저, 인간의 참혹보다 먼저, 6장에서 어린 동호가 엄마의 손을 잡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고 느낀다. 그 마음으로 에필로그에 이 대목을 썼다.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212~13면) 3. 고백하자면,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그 소년들을 거의 잊은 채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책들 중 한 권이라는 사실 외에는 실상 많은 것이 희미했다. 그러니 당연히,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이 오래된 책을 기억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삼십여 년이 흐른 뒤 다시 읽게 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불꽃에 손바닥을 덴 것처럼 놀라며 깨달았다. 열두 살의 내가 어두워져 가는 방의 벽에 기대앉아 이 책을 쥐고, 무엇이 내 눈과 목구멍을 뜨겁게 하는지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의 의미를. 그 질문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생생히 살아 어른어른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한국어로 번역된 린드그렌의 평전을 이어 읽다가, 생전의 작가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의 뉴스들에 유난히 민감했으며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했다는 대목을 발견하고 나는 조용히 짐작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을 그녀의 고통이 이 책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 배음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열두 살의 내가 비밀로서 품고 있었던 어렴풋한 사랑과 고통이, 먼 시간과 공간을 건너 그녀의 사랑과 고통에 잠시 맞닿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거의 불가능한 방식으로 때로 우리가 만남을 경험하는지도 모른다고. 그 경험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우리들의 심장과 목구멍에, 눈물이 고였던 눈에 뜨겁게 새겨지기도 하는 것이리라고. 허락된다면, 린드그렌의 이 아름다운 책의 한 대목을 읽으며 나의 이야기를 마치고 싶다. 우리는 시냇가 푸른 잔디밭에 누워 있었습니다. 텡일이라든가 그 밖의 끔찍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차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침나절이었습니다. 햇살은 맑고 따스했습니다. 어찌나 조용한지 들리는 거라고는 약간씩 거품을 일으키며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푸른 하늘 군데군데 흩어진 흰 구름을 바라보며 행복한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근심 걱정 없이 즐거운 기분이었는데 요나탄 형이 텡일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 “스코르판, 잠시 동안 너 혼자 기사의 농장에 남아 있어야겠어. 나는 들장미 골짜기에 다녀와야 하니까.” 요나탄 형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 혼자는 단 일 분도 기사의 농장에서 살 수 없다는 걸 형은 정말 모르는 걸까요? 만일 형이 텡일의 소굴로 가면 나도 따라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요나탄 형이 아주 야릇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습니다. “스코르판, 너는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야. 나는 모든 불행이나 위험으로부터 너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싶어. 하지만 이번엔 너를 돌볼 수가 없거든. 다른 일을 위해 있는 힘을 다 쏟아야 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너를 데려가니? 이건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야.” 나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슬프고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농장에 남아 있으라는 거야? 형은 이제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면서, 나보고 마냥 기다리기나 하란 말이지?” 나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습니다. (…)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해. 나는 꼭 돌아올 거야.” 형은 그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 더는 화가 나지 않았지만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요나탄 형도 내 마음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친절한 형은 새로 구운 버터 빵에다 꿀을 발라 주었습니다. 또 신기한 옛이야기도 해 주었는데 내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텡일이라는 악당만 자꾸 생각났습니다. 모든 괴물과 악당 중에서도 텡일이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것 같았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요나탄 형이 그처럼 위험한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기사의 농장 벽난로 앞에 앉아 편안히 살면 안 될 까닭이 뭐란 말입니까? 그러나 형은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래?” 내가 다그쳤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 어느덧 밤이 깊었습니다. 벽난로의 불길도 잦아들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문간에 서서 요나탄 형이 말을 타고 안개 속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벚나무 골짜기는 온통 새벽안개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형이 점점 멀어져, 안개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종이 동물원> / 켄 리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종이 동물원>, 꽤 두꺼운 켄 리우의 단편집이다. 총 열네 편의 소설이 들어있으며 열네 편 전부 SF 혹은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소설들이다. 작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켄 리우는 중국인이다.(물론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긴 했지만) 그러다 보니 소설 속에서도 중국의 문화, 역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사실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 중, 일을 서로 떼 놓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한국, 조선에 대한 이야기들도 군데군데 출현한다. 어려운 과학적 설정이나 원리 같은 것도 그다지 없어서 한국 독자가 처음 SF 소설을 읽을 때 추천할 만한 소설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한국)의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몰입하기 쉬울 테니 말이다.(두껍긴 하지만 단편집이라서 시간 날 때 한편씩 읽기 딱 좋다) 켄 리우의 소설은 지난번에 리뷰했던 테드 창의 소설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테드 창의 소설이 소설을 빙자한 과학적 시뮬레이션(?)에 가깝다면 켄 리우의 소설은 Science "Fiction"이다. 켄 리우의 소설 속에서 과학은 Fiction의 설정이자 배경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을 바탕으로 한 배경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가라고 할 수 있다. 켄 리우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Science가 아니라 Fiction이므로 <종이 동물원>에 실린 소설들에는 SF가 아닌 소설도 많다. 심지어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부터가 SF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다른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다. <상태 변화>는 현대 판타지이고 <파자점술사>는 중국의 전통적 주술 문화, 파자점이 이야기의 주춧돌이 되며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중국의 요괴와 SF적 요소가 뒤섞여 매력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이게 켄 리우라는 작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SF 작가도 아니고 판타지 작가도 아니며 장르문학 작가라고 한정 짓기도 꺼림칙하다. 그는 장르의 경계나 영역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SF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SF를, 판타지적인 배경이 필요하다면 판타지를, 역사나 신화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그 또한 거리낌 없이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정통 SF 소설만을 애정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집에 오히려 실망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의 소설에는 경계도 제한도 없다. 개인적으로 켄 리우라는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배경을 바탕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설을 쓰게 된 데에는 그의 삶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많은 혼란과 의문이 그의 청소년기를 뒤덮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중국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이렇듯 수많은 의문 끝에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내가 어디 속하는지 혹은 어느 집단의 일원인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작가가 된 켄 리우는 마찬가지 생각으로 소설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쓰는 소설이 SF인지, 판타지인지, 역사나 신화 소설인지가 아니라 내가 쓰는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켄 리우는 머리말에서 위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들을 한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계속해서 위의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저 문장이 켄 리우의 소설들에 새로움과 놀라움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경계가 허물어질 때, 구분이 사라질 때,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합쳐질 때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기 마련이니까. SF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과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모노노아와레>를, 환상과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즐거운 사냥을 하길>과 <송사와 원숭이 왕>, <파자점술사>를, 소설 속 드라마를 느끼고픈 이들에게는 <종이 동물원>과 <레귤러>,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권하고 싶다. 만약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소설집 전체를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어나가길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
<유리문 안에서> 나쓰메 소세키
<유리문 안에서> / 나쓰메 소세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글은 처음 읽는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언젠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늘 다른 소설들에 밀려 읽지 못하던 중 엉뚱하게 수필로 나쓰메 소세키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다른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유리문 안에서>는 썩 마음에 들었다. 잔잔하고 차분한 문체와 마음이 편안해지는 문장들, 담담하게 쓰인 나쓰메 소세키의 생활과 생각들, 중간중간 터지는 어설픈 유머까지. 민음사 쏜살문고에서 나온 <유리문 안에서>는 1915년 1월 13일부터 2월 23일까지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나쓰메 소세키의 글을 엮은 책이다. 그에 더해 뒤편에는 서비스(??) 같은 느낌으로 <입사의 말>과 <작가의 생활>, <이상한 소리>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입사의 말>은 나쓰메 소세키가 대학을 떠나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며 쓴 글이고 <작가의 생활>은 소세키가 작가로서 자신의 생활을 쓴 글이다. <이상한 소리>는 소세키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옆 병실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네 편의 글은 모두 나쓰메 소세키 스스로의 이야기를 쓴 수필이다. 소세키의 소설만 읽어본 이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허구의 이야기 속에 가려져 있던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어떤 사람인가를 엿볼 수 있다. <유리문 안에서>를 읽으며 그가 관계와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느꼈다. 이 수필 속에서는 소세키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 느끼는 어려움과 고민을 볼 수 있으며 다른 이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잡지에 실릴 사진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찍는 부분이나 모든 인간은 매일매일 창피를 당하기 위해 태어난 거라고 생각한다는 문장, 전혀 모르는 자들의 부탁과 그에 대한 자신의 불편함과 수고로움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는 그의 모습에서는 인간관계에 서툰 면을, 글쓰기에 도움을 받고자 하는 여인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예의만 차리거나 불리한 부분을 감춰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대목과 상상도 못 한 사연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여자에게 건네는 "그렇다면 죽지 말고 살아 계세요."라는 말에서는 그가 다른 사람과의 서툰 관계에 얼마나 진심을 담고 마음을 다해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이 글 속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또 하나의 단어는 죽음이다. 소세키는 주변인의 끊임없는 죽음, 존재의 사라짐을 실감하며 자신의 죽지 않음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라는 것, 당연하게도 세우고 있는 내일의 계획이란 것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삽시간에 사라질 수 있는지 깨닫는다. 전쟁터에 나간 경험이 있는 남자와 소세키의 대화에서 소세키가 묻는다. "그렇게 부대원이 잇달아 쓰러지는 걸 보면서도 자신만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나요?"라고. 남자는 대답한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요." 이 문답에서 나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를 느꼈다.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언제나 미래가 존재할 것이라고 태연하게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점을. 누구나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 토막글의 말미에서 소세키는 말한다. '이따금 생각하면, 나 자신이 살아 있는 게 부자연스러운 듯한 기분도 든다. 그리고 운명이 일부러 나를 우롱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싶어 진다.' 소세키는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 온갖 변화의 바람이 몰아닥치는 외부와 격리된 유리문 안에서 자신의 내부로 침잠한다. 인간,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의 삶, 과거의 기억과 알 수 없는 미래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시끄러운 외부와 단절된 유리문 안에서 고양이와 함께 툇마루에 앉아 있는 소세키가 쓴 글은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유리문 밖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폭력과 이권다툼에서 벗어난 유리문 안의 소세키가 쓰는 시시하고 한가로운 문장을 하염없이 읽고 싶어 진다. 돈과 이권과 폭력과 권력이 한심하다며 혀를 차는 그 문장들을. 책 속 한 문장 : 결국 우리는 스스로 꿈결에 제조한 폭탄을 제각기 품에 안은 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하면서 걸어가는 건 아닐까.
숨(Exhalation)
"숨(Exhalation)" / 테드 창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의도는 아니었으나 김초엽 작가의 SF 단편집에 이어서 또 SF 소설집을 읽게 되었다. 최근에 나온 테드 창의 신작인데 무려 17년 만에 나온 신작이라고 한다. SF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테드 창의 이름은 들어봤을 만큼 SF 소설계에서 유명한 작가라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다. 지금껏 읽어본 SF 소설 중에 가장 특이하고 독특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다. 총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아주 짧은 단편인 거대한 침묵이나 숨 같은 소설도 있고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긴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같은 소설들도 실려있다. 길이와 상관없이 하나 같이 놀라웠던 점은 과학적 정합성이었다. 모든 소설들이 실제로 어떤 가정 하에서 과학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소설적 상상력에 기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을 넘기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없다. 현대의 밝혀진 과학 지식 하에서 어떤 가정, 혹은 설정을 추가하였을 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보통 SF 소설들의 경우 과학적 허점에 신경이 쓰여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숨"은 전혀 그런 부분이 없었다.(필자의 경우 과학 쪽에 종사하다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일반인의 경우 오히려 과학 관련 용어들이나 정보들이 중간중간 흐름을 끊기게 할 수도....) 보통의 SF 소설들이 장르 소설의 특징을 가진 글에 SF적 요소들을 넣어서 버무린다면 이 소설집은 말 그대로 SF 소설이다. SF 자체가 중심이 되는 소설. 스타워즈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광선총과 최첨단 무기들을 들고 치고받고 싸우는 소설이 아니라 과학적인 사고와 아이디어, 그 자체가 중점이 된다. 사고 실험을 하는 느낌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이 소설집 속 모든 소설에서 보통의 SF 영화에 기대하는 장면들은 나오지 않는다. 참고가 되기를.) 흥미로웠던 소설 몇 개를 꼽자면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는 가상의 인터넷 세상 속 인공지능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의 가상 반려 동물인 AI들에 대한 인간들의 여러 반응들을 실시간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의 반려 동물, 혹은 아이들을 대하듯 사랑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싫증 난다며 프로그램을 정지시켜버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예 다른 용도(고문, 성적 학대, 노예 등)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온갖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면서 과연 인간에 필적하는 지능과 존재 인식이 가능한 AI들이 나타난다면 인간은 그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또 대처해야 하는가를 독자가 스스로 고민하게 만든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의 경우 문자 문화가 없던 부족의 사람들이 문자를 대하는 방식과 먼 미래, 인간의 모든 기억을 영상으로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의 개발이 교차하며 진행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글이 없는 부족이 글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대하는 방식, 기억의 망각이 자연스럽던 인간들이 기억을 망각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모든 기억을 영상으로 저장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대하는 방식이 번갈아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새로운 기술이 과연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해 늘 벌어지는 가치관의 충돌이 먼 과거에도, 먼 미래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마지막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평행 세계를 다루는 소설이다. 이제껏 많은 이야기들이 평행 세계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뤄왔는데(마블 시리즈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평행 세계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인간의 행동에 있어 어떤 식으로 실제로 영향을 끼치게 될지를 보여준다. 엄밀히 말하자면 평행 세계를 과학적으로 해석하였을 때 인간이 평행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분석에 가깝다. 평행 세계에 있는 나의 행동은 현실 세계에 있는 나의 행동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 이 곳의 내가 사람을 구하고, 평행 세계의 내가 사람을 죽인다면 결국 윤리적 행동의 총합은 변하지 않을 텐데 내가 사람을 구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런 철학적이자 과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나름의 답을 제시하는 소설이다. 테드 창의 답이 궁금하다면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을 읽어보기 바란다. SF 소설, 아니 과학 소설에 가까운 작품이다. 이런 소설들이 조금 더 많이 세상에 나온다면 과학계가 아닌 다른 곳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과학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과학은 유난히 전문가들만의 고유 영역으로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과학에 대한 아주 약간의 지식만 있더라도 현혹되지 않을 거짓 뉴스들, 사기 범죄, 조작 등에 많은 대중들이 넘어가곤 한다. 과학 커뮤니케이터(이 단어 자체도 최근에 생겼다.)들이 일반인들에게 과학에 대해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그 효과는 많이 부족하다. "숨"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일단 재미는 충분하니 읽어볼 가치는 확보된 셈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레딧)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의 첫문장.txt
1 당신은 슈퍼히어로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보건교사입니다. 보건실에 방문하는 학생들의 부상 역시 슈퍼히어로에 걸맞는 부상입니다. 따라서 전형적인 미국 의료 시스템에 따라서 그들을 치료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제 치료는 공짜가 아닙니다. 2 당신은 불행한 사고로 인해 팔이 절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없어진 팔이 여전히 느껴지며 가끔은 희미하게 보이기 까지 합니다. 뇌의 어딘가가 잘못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희미한 팔로 귀신을 때릴 수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3 당신은 토론 수업중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심장질환으로 죽었습니다. 죽은 뒤 발할라로 간 당신을 본 북유럽 신들은 과연 이 죽음이 ‘전투에서 명예롭게 전사한 것인가’에 대해 맹렬히 토론하기 시작합니다. 4 당신은 열두 살 때 무작위로 녹색 선과 빨간색 선이 땅에 나타나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녹색 선을 따라가니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며 10년 뒤, 젊은 나이에 이미 원하던 일의 정점에 섰습니다. 그러나, 지루합니다. 이제 빨간 선을 따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궁금합니다. 5 한 조현병 환자는 머리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질려버렸습니다. 내 머리에서 살고 싶다면 집세를 내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다음날 아침 책상 위에 현금으로 가득 찬 봉투를 발견합니다. 6 당신은 개발하던 타임머신의 마무리 작업에 다다랐고, 마침내 마지막 코드를 해독했다고 믿습니다. 시험해보니 놀랍게도 타임머신은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시간을 똑같이 되돌린다는 사실만 빼면. 7 알 수 없는 이유로, 당신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누군가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때마다, 그 사람이 일주일 안에 죽어버리는 최악의 저주입니다. 실의에 빠져 살던 당신은 이미 이렇게 된 거, 가능한 죽어 마땅한 최악의 사람들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것을 임무로 삼았습니다. 8 당신에게는 지갑을 지키는 작은 애완 드래곤이 있습니다. 드래곤이 재물을 좋아하는 것은 상식이니까요. 작은 드래곤은 귀엽고 깜찍했습니다. 당신이 복권에 당첨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당첨된 이후에야, 드래곤은 자기가 지키는 재물의 가치만큼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9 스마트 폰이 울리고 화면을 보자, 생소하지만 어딘가 낯익은 번호가 보입니다. 생각해보니 어린시절 집의 유선 전화의 번호였습니다. 그리고 발신자의 이름은 당신의 이름입니다. 10 당신은 전생에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고 12번의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다시 환생하는데 나라에서는 그 즉시 추적하여 다시 체포하고 다시 감옥에 죽을 때까지 감금합니다. 이 과정을 12번을 반복 해야 하고 이번이 여섯번째 환생입니다. 그리고 추적조가 당신이 사는 곳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11 불멸은 이제 가능합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들과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에게만 불멸이 부여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현재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2 당신의 눈에는 사람들의 머리위에 이 사람이 어떤 식으로 죽을지 사인이 보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추락사, 익사, 노환, 병사 등등.. 그러던 어느 날, 당신에게 살해된 예정인 사람이 보입니다. 13 모든 세상과 단절되어 살고 있는 은둔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기 위해 한 시간 동안 뉴스를 시청합니다. 지난 주에는 별 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이번 주에는 모든 뉴스채널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14 작가들이 죽으면, 자신이 만든 세계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죽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신은 공포 소설을 쓰는데 평생을 보냈군요. 15 히틀러를 죽이는 것은 시간 여행자들 사이에서 경쟁적인 스포츠가 되어있었습니다. 창의적이고 어려울 수록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작년 챔피언입니다. 어떻게 우승할 수 있었나요? 16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가 무죄로 밝혀진 개인은 부당하게 구금된 기간과 비례하여 범죄 크레딧을 받습니다. 이 크레딧은 양도할 수 없으며, 크레딧을 소비한 만큼의 범죄는 무죄로 간주됩니다. 출처 : 레딧 와 이런 아이디어들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4, 12, 13번의 뒷얘기가 궁금하네요 핳핳
<세계문학 단편선 - 플래너리 오코너> 플래너리 오코너
<세계문학 단편선 - 플래너리 오코너> / 플래너리 오코너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1925년 미국 남부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 서른아홉 살에 루푸스 합병증으로 죽었다. 두 편의 장편소설과 여러 단편소설들을 남겼다. 그리 많지 않은 작품 수에도 그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생길 만큼 플래너리 오코너가 미국 문학계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현대문학에서 나온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선은 방대한 분량(700페이지가 넘어가는)을 자랑한다. 총 서른한 편의 중,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서른한 편 중 몇 편은 좋았고 몇 편은 굉장히 좋았으며 그중에서도 몇 편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났다. 좋지 않은 소설은 없었다. 미국 문학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는 레이먼드 카버, 줌파 라히리 등의 소설이 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있다. 명확하게 콕 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소설 속에서 인간의 인식과 세계가 확장되는 어떤 지점이 주는 삶과 동떨어진 듯한, 일상 너머의 진실을 조금 엿본 듯한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서 그러한 계시(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선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의 순간은 그녀가 경험해 온 미국 남부의 시대상, 가톨릭 신앙과 겹치며 독특한 울림을 자아낸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 울림을 지금까지 읽어온 소설 중 오로지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다. 오코너의 소설은 대부분 미국 남부에서 가치관이 뒤바뀌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법적으로는 흑인과 백인이 동등하지만 여전히 남부에서는 암묵적인 인종 분리가 행해지고 과학과 이성이 점점 종교와 신앙의 자리를 침범하며 미국 북부에서 인종과 종교, 합리를 대하는 관점과 남부에서 그것들을 대하는 관점 사이의 틈이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시대. 오코너의 소설들은 그 시대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늙은 군인도 있고 백인과 흑인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백인 또는 흑인도 있으며 종교에 충실한 인물이나 종교 따위는 믿지 않고 과학과 이성을 맹신하는 사람도 있다. 오코너의 소설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던 인물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 가치관과 인식의 흔들림을 경험하고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독자는 소설 속 인물과 그 순간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진실의 일부를 엿보게 된다. 그때의 감각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어떤 존재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체감하는 느낌과 약간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 경험만으로도 이 단편선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작품은 <제라늄>과 <행운>, <인조 검둥이>다. 소설 속 한 문장 "나는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 남자가 말하고 창문을 떠났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오리엔트 특급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생애 두 번째로 읽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이다. 첫 번째는 중학교 시절에 처음 읽었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인데 읽고 나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이런 트릭을 생각해내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결말이었다.(사실 그 이전에 추리소설을 별로 읽은 적이 없어서 더 충격이 컸던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명작은 명작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 입문하고 싶다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해보는 걸 추천한다.) 그 뒤로 한동안 추리소설과는 멀어진 채 지내다 오랜만에 읽게 된 게 바로 이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로 만들어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봤었다. 그래서 결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재미가 덜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역시 손에 꼽히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폭설로 도중에 멈춰버린 기차 안에서 한 남자가 살해당한다. 그것도 밀실에서. 그런데 하필 기차에는 위대한 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타고 있었고 그는 명석한 두뇌로 승객들의 증언, 그리고 증거를 통해 놀랄만한 추리를 해 나간다. 폭설에 갇힌 열차 안에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승객 중에 범인이 있을 것이 자명한 상황. 푸아로의 추리를 따라 진범에 도달하는 과정이 소설의 전부다. 사실 추리 소설에서 중요한 건 명석한 두뇌의 탐정이 증거와 증언을 통해 놀라운 추리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매우 뛰어난 추리소설이다. 먼저 모든 증언과 증거를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충분히 그것을 통해 진범을 추리해 볼 시간을 준다. 그러나 물론 대부분의 독자는 그것들에서 진실을 찾아내지 못한다. 혹 증거나 증언의 모순을 찾아내더라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뛰어난 논리력과 추리력,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자의 궁금증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고 그때 우리의 회색 뇌세포, 에르퀼 푸아로가 등장해 단 하나의 진실을 낱낱이 드러내는 추리를 보여준다. 결말의 추리에서 독자는 지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증언들 사이의 숨겨진 다리를 찾아내고, 여러 증거와 증언들의 모순을 단번에 깨버리는 논리적 설명을 보여주며 결국 단 하나의 진실에 다가가는 푸아로의 추리가 마치 논리 문제나 어려운 퍼즐을 해결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추리소설의 목적을 탁월하게 구현하며 독자에게 즐거운 독서를 제공한다. 하나 더 이 소설의 장점을 꼽자면 캐릭터 구성 능력이다. 소설 속에는 객차의 승객 열두명과 차장들, 주인공 푸아로, 의사인 콘스탄틴, 그리고 기차 회사의 중역 부크가 등장한다. 보통 이렇게 많은 인물이 등장하면 서로 헷갈리거나, 비중이 적은 인물은 기억을 하지 못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각 인물들의 외모, 성격, 나이, 국적 등이 전부 특색 있고 대부분의 인물이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말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화만 봐도 어떤 인물이 말하는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많은 인물이 각각의 매력을 가지도록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걸 해냈다. 추리와 진실의 놀라움과 별개로 이 소설이 가지는 또 하나의 놀라움이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국가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소설 속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점과 서술 상에서 너무 많은 인물의 시점을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어떤 인물의 시점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국가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현대의 독자가 읽을 때 아쉬운 부분인 것은 확실하다. 독자가 읽을 때 인물의 시점이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소설로써의 완성도를 조금 떨어트리는 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부분이 많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훌륭한 '추리'소설이자 추리'소설'이다. 추리의 재미와 놀라움도 확실히 잡았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의 면모도 충분히 갖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 관심이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독자라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추천하고 싶다.(물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추천한다.) 소설 속 한 문장 "그렇다면 두 번째 추리를 내놓아야겠군요. 하지만 첫 번째 추리를 너무 성급하게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나중에라도 그것에 동의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날짜 없음
'날짜 없음' / 장은진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게 온다고 한다. 179번부터 0번까지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들.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숫자의 크기는 점점 줄어든다. 시작인 179도, 끝인 0도, 그게 온다고 말한다. 과연 그건 정말 왔을까? 와서 세계를, 지구를, 도시를, 회색 눈들을, 그 속에 누워있는 시체들을, 컨테이너 박스를, 반을, 그를, 나를, 집어삼켜버렸을까. 어느 날 갑자기 붉은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붉은 눈의 이유에 대해 뜬구름 같은 해답과 소문들을 내놓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붉은 눈은 회색으로 바뀐다. 하늘에는 때가 낀 양말과 더러워진 털을 가진 양 떼 같은 회색 구름이 떠 있고 회색 눈이 끝없이 쏟아진다. 오늘도, 내일도, 낮에도, 밤에도 회색 눈은 회색 구름에서 계속 떨어져 내린다. 늘 회색 구름과 회색 눈에 덮여있는 도시, 회색시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다. 1년이 넘도록 쏟아진 눈에 회색시의 기능들은 마비되어버리고 불길한 소문들만 알음알음 회색 눈을 타고 퍼진다. 해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피골이 상접하고 피부색마저 회색으로 변한다. 회색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줄줄이 회색시를 떠난다. 누구도 돌아온 적 없고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회색인들의 행렬. 회색시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생긴다. 행렬을 따라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나는 회색인, 끊이지 않는 회색 눈과 보이지 않는 미래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 평범한 생활을 이어가려 노력하는 사람. 세 번째 사람에 속하는 주인공 해인과 그녀의 애인인 그, 그리고 그의 반려견 반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회색시에는 한 가지 소문이 퍼져 있다. [그게 온다고 한다]는 소문. 그게 무엇인지는 소설 내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179부터 0으로 줄어드는 소설 속 챕터(?)별 숫자들과 그게 오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처럼 이야기하는 인물들의 대화를 보면 그게 뭔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된다. 지구가, 적어도 인류 문명이 끝나버릴 만한 거대한 자연재해, 혹은 인간의 멸망을 일으킬 만한 사건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우리는 의사인 주인공 해인과 구둣방을 운영하는 그녀의 남자 친구 그(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반려견 반이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하루다. 바로 다음 날, 그게 온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그 날 하루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둣방인 컨테이너 박스의 문을 두드린다. 근처 분식집 아주머니인 또와 아주머니, 맡긴 구두를 찾으러 온 노인, 우산 장사를 하는 그의 친구, 회색인의 행렬을 따라갔다가 반죽음 상태로 돌아온, 이미 회색인이 되어 버린 기타 리페어샵을 운영하던 진수 등등. 이 책은 담담하게 그것이 오기 전 하루 동안 해인과 그와 반과 그들이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방문하는 여러 방문객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디스토피아, 혹은 아포칼립스를 다룬 소설의 강점으로는 무너져가는 세계를 구하려는 주인공의 분투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처절함, 생존자들 간의 싸움과 다툼에서 생겨나는 긴장감을 들 수 있겠지만 이 소설은 전혀 다르다. 이 소설은 끝을 앞에 둔 소시민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세계를 구하겠다는 야심 찬 주인공도 없고 처절하게 살아남으려 남을 약탈하고 죽이는 인물도 없으며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사건도 딱히 없다. 또와 아주머니는 곧 다가올 끝을 외면하며 하루하루 손님 없는 분식집을 운영할 뿐이고 구두를 찾으러 왔다는 노인은 내일이면 찾아올 그것에 대해 체념하고 자신의 죽음을 넌지시 암시한 채 구두를 찾지도 않고 돌아간다. 홍 여사님은 두 달만에 찾아와 전과 다름없이 폐지와 폐품을 받아 손수레를 끌고 돌아가고 유나라는 여고생은 학교를 안 가도 돼서 좋다고 말하면서도 수의사가 될 것이라며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주인공인 해인과 그녀의 연인인 그도 마찬가지다. 내일이면 모든 게 사라질지도 모르는 오늘, 그들은 평범한 하루를 보낸다. 늘 먹던 김치찌개를 끓여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시디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반을 쓰다듬으면서. 그 지점이 좋았다. 곧 다가올 마지막에 대한 절망과 체념과 포기로 얼룩진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이.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를 세계와 회색 눈이라는 절망 속에서 퍼지는 사람 간의 당연한 호의와 공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내일이 세상의 마지막이라도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가치들, 사랑, 공감, 연민이 남아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뭉클하기도 했다. 반의 기도를 막은 누런 콧물을 직접 입으로 빨아내 반을 살려내고, 숨이 꺼져가는 진수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해인과 그의 모습. 보이지 않는 홍 여사를 걱정하던 구두를 찾으러 온 노인과 홍 여사가 늘 고맙게 생각한다며 해인에게 쥐어 준 곶감 몇 개.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린 죽은 연인의 놓쳐버린 손을 다시 수습해 이어주는 해인. 유나와 해인에게 신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직접 만든 단화와 부츠를 선물한 그. 몇 시간 후면 이 모든 게 사라질 회색 눈뿐인 세상에 조그맣고 또 커다란 행동과 언어들이 남아 있다는 점이 기뻤다. 해인의 가족들, 엄마, 아빠, 여동생은 회색인들의 행렬을 따라 떠나기로 하고 그 전날 해인과 마지막 파티를 한다. 해인의 아빠는 그와 함께 남겠다는 해인에게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돈을 얼마나 버는지, 나이는 몇이고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묻지 않는다. 그를 많이 좋아하는지, 함께 있으면 안 무섭겠는지를 묻고 그럼 됐다고 말한다. 아이러니하다. 온전한 세상일 때는 사랑만으로 함께 있을 수 없다. 연인의 직업이 무엇인지, 함께 살 집은 있는지, 부모의 직업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인지, 아이는 없는지, 결혼한 적은 없는지. 둘의 사랑에 온갖 요인들이 끼어든다. 부모와 가족의 반대, 친구들의 만류, 주변의 시선 등등.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그 당연한 이야기는 온통 회색 눈으로 뒤덮여 거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 하루하루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머지않아 모든 게 사라질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되고 나서야 당연한 이야기가 된다. 서로를 사랑하고, 그것만으로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은 사실 당연하지 않은 세상인 걸까. 시종일관 조용하고 고요하다. 그렇다고 슬프거나 침통하거나 체념과 포기의 기운이 감도는 것도 아니다.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내일이면 모든 게 없어질 세상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기가 나가고, 불이 꺼지고,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 속에서 서로를 꽉 껴안은 해인과 그가 서로를 놓치지 않았기를.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어지기를.  -1 그것은 오지 않았다. 소설 속 한 문장 "많이 좋아하니?" "네. 많이요." "같이 있으면 설레니?" "네." "함께라면 안 무섭겠니?" 나는 확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