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kkeb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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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난 서울 인사동 근황.jpg


서울 종로구 도심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가장 이른 시기 한글 금속활자와 천문시계 등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됐습니다.
문화재청은 수도문물연구원이 발굴 조사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유적에서 1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금속활자가 출토됐다고 밝혔습니다.


이 한글 활자는 이제까지 발굴된 활자 가운데 처음으로 15세기 중반 훈민정음 창제 시기에 사용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 유적에서는 또 조선 시대 금속활자의 정수인 1434년 세종 때 제작 갑인자로 추정되는 한자 금속활자가 출토됐습니다.

세종 때 자동 물시계인 옥루 혹은 중종 때 다시 제작된 자격루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금속 파편과 함께, 세종 때 만들어진 주야간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 금속 파편이 처음으로 출토됐습니다.


수도문물연구원은 함께 발굴된 총통 파편에 새겨진 제작 연도로 미뤄 금속활자와 유물들이 선조 때인 1588년 이후 금속 재활용을 위해 묻힌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이 유적에서는 다양한 활자 천6백여 점이 무더기로 발굴돼, 책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여러 활자들의 실물이 추가 확인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ㅊㅊ 디미토리


헐 ㄷㄷㄷ 대박사건 ㄷㄷㄷㄷ
대학생들 논물 갈아엎으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닼ㅋㅋ
근데 저거로 폰트 만들어서 배포해주면 좋겠다 렬루 존멋인데????????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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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저런거 수십번은 더 나왔을텐데.. 개발 방해 된다고 다시 뭍고 갈아엎고 얼마나 많이 사라졌을까
우와~~~ 탑골공원 옆 진심 너무 신기해요
백제역사에서 한성백제 역사가 500년인데 고작 200년도 안되는 충청백제 유물만 발견되는거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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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숙종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서는 희빈장씨나 숙빈최씨에 초점을 두고있기에 의외로 그가 인현왕후에게 어떤식으로 대했는지는 잘 나오지않는다. 그냥 인현왕후를 무시했다, 정도로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그가 얼마나 인현왕후를 막대했는지 알아보자 우선 인현왕후의 나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그녀가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나이는 14살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보다 6살 연상으로 21살. 장희빈은 숙종보다 2년 연상으로 23살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당신이 21살이라면 23살 존예누나에게 끌릴까, 14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끌릴까? 사실 숙종이 인현왕후보다 희빈에게 더 끌린건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다. 문제는 이 상태가 8년동안이나 지속됐다는 것이다. 폐비됐을 당시 인현왕후의 나이는 22살쯤 됐었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킬 때 들었던 명분 중 하나는 불임이었는데, 20대 초반 애한테 할 소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얘네 몇번 자지도 않았을 것같음 이유야 어찌됐든 인현왕후는 폐위됐고 희빈이 중전의 자리에 앉게된다 숙종 : 어휴 이제 좀 살겠네 걔랑 혼인하는 날 지진났을 때부터 알아봤어. 얘들아, 걔가 입었던 옷은 다 불태워버려라.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걔 얘기하면 뒤진다 정말 전 부인에대한 예의라고는 1도없는 숙종되시겠다 우리는 폐비가 된 인현왕후가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이 없다. 드라마에서도 이 부분은 숙빈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질 뿐, 인현왕후가 어찌 살고있는지는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시기의 인현왕후의 삶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할수있다. 왜냐하면 숙종이 밥을 안줬기 때문이다 신하들 : 전하, 아무리 폐비됐다고 해도 한 때는 이 나라의 국모였는데 너무 용서가 없으십니다. 쌀까지 끊으시면 뭘 먹고 살라고 그러십니까? 따로 별궁에 거처하게 하시고 밥도 좀 주고 하세요 숙종 : 뭐 자네들이 그렇게 말하니 생각은 해보겠네 신하들 : 아 다행입니다ㅎㅎ 애초에 인현왕후가 뭘 그리 잘못해서 폐서인이 된것도 아니었기에, 남인 서인 할 것없이 인현왕후에 대한 대우는 해주는게 인간된 도리라고 생각했음. 그러나 숙종은 인간이 아니었다 숙종 : 야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걔 폐비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거 하나 못견디냐? 그리고 괜히 은혜 베풀었다가 걔가 이상한 희망 품고 복위 시도라도 하면 니들이 책임질거임??ㅋ 숙종개새끼야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거 가지고 그러는거 아니다...ㅠ 이 부분은 정말 볼 때마다 정털리는 부분임 신하들 : 아니 님들 거의 10년이나 같이 살았잖아요 부부간의 정을 봐서라도 쌀은 줘야죠 숙종 : 아ㅅㅂ 걔가 어떻게 살든 내 알바임? 내 앞에서 걔 얘기 하지마라 개빡치니까; 앞으로 걔 얘기 한번만 더 꺼내면 진짜 뒤진다 숙종 성깔을 보면 무서워서라도 입닥쳤을 것같은데, 인현왕후의 생활이 눈물날 만큼 곤궁했기 때문에 (아빠 사망, 오빠들 백수됨, 집안 노비 몰수, 쌀 지급x) 보다못한 신하들이 몇번씩이나 상소를 올렸다. 물론 숙종은 가볍게 다 씹는다. 몇명은 괜히 상소올렸다가 관직도 삭탈됐다. 그렇게 인현왕후는 힘든 생활을 이어가다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마는데... 인현왕후가 거처하는 곳에 왠 도둑놈 하나가 든것이다.. 이 도둑놈은 도망할 곳이 없어지자 인현왕후의 집 담벼락을 넘어 몰래 숨은 것이었다. 이게 발각되자 이 새끼는 남의 집 자물쇠를 지 마음대로 쳐부수고 나갔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신하들은 난리가 났다. 일반 백성 집에서도 안일어날 일이 인현왕후의 집에서 일어나다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신하들 : 전하.. 이건 좀 아니잖아요ㅡㅡ 숙종 : 그래 그 도둑놈 처형시키면 되는거지?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걔 언급ㄴㄴ 결국 인현왕후의 쌀 지급은 해결되지않은채 시간이 흘러갔다 그 이후로 인현왕후는 절에서 지냈던 것 같다. 밥도 얻어먹을 겸 멘탈힐링도 되니 일석이조 그러던 어느날 소론 : 전하!!! 서인 새끼들이 인현왕후 복위 계획하는데여!? 숙종 : 뭐!??? 돌았나 이 십새끼들이? 다 죽여버려!!!! 남인 : 옙 알겠습니다^^7 서인 : 아 좆됐네... 숙종 : 음.. 근데 얘들아...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지... 남인 : 아 더 시킬거 있으세요? 전하가 시키신대로 열심히 주리틀고 있습니다^^ 숙종 : 응 근데 이제 너네가 주리 틀려야 할 것같애^^ 남인 : ????? 서인 : ????? 숙종 : 그리고 인현왕후도 다시 불러들일거야^^ 숙종은 개뜬끔없이 스탠스를 바꾼다 서인을 조지다가 갑자기 남인을 조지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유는 뭘까..? 아무도 모른다.. 이미 숙종의 왕권은 하늘 꼭대기에 있었기에 왕권강화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다 경종의 미래를 생각하면 인현왕후를 더욱 불러와선 안됐다. 내 궁예지만, 나는 숙빈이 숙종에게 무슨 말을 건냈다고 생각한다 그거 말고는 진짜 이유가 없어.... 아무튼 숙종은 인현왕후에게 구구절절한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편지 내용이 참 가관이다 숙종 : 중전 미안하오 내가 예전에는 간신들한테 속아서 그랬던거요 숙종 : 가끔씩 그대가 내 꿈에 나타났는데 내 옷을 잡고 우는 모습이 참 슬펐소 숙종 : 그대가 나에게 했던 말이 나쁜 뜻에서 했던 게 아니라 나라를 위해 했던 말이라는걸 이제서야 깨달았소 숙종 : 그 간신들 내가 얼마전에 다 처리했으니까 우리 다시 합치자... 구남친 냄새 솔솔 풍기는 숙종의 편지에 인현왕후도 답장을 한다 인현왕후 : 아닙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살아만 있는 것도 감사할 지경인데 어찌 감히 궁에 갈수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다시 궁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소리였다. 숙종 : ㅅㅂ...얘들아 그냥 니들이 직접가서 얘 데리고와라 신하들 : 저기... 문을 안열어주던데여... 예전처럼 외간사람이 들어올까봐 겁나서 자물쇠 못풀겠대여..;; 숙종 : 아니 우리가 호위해줄거니까 괜찮다고해;;; 그리고 가는 김에 옷이랑 선물도 다 줘 인현왕후 : 계속 거절하는 것도 좀 아닌것같아 문은 열었지만 옷이랑 선물은 못받겠습니다. 저같은 죄인이 어찌 이런걸 받을 수있겠습니까 제발 도로 가져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숙종 : 아니..그만 좀 튕기고 제발 받아줘 인현왕후 : ㄴㄴ 숙종 : 그만 좀 튕겨!!!! 너 내가 준 옷입고 옥대타고 안오면 상궁들이 대신 죽을거니까 알아서 해 인현왕후 : 어휴... 그렇게 까지 하니 가기는 가겠음 이 이후에도 인현왕후는 뭐만하면 죄인드립을 하며 숙종을 속터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 저러니 빡칠수도 있겠지만 숙종은 솔직히 뺨맞아도 할말없는 수준이라.. 숙종 본인도 그걸 아는지 인현왕후 저러는거 다 받아줌 출처 숙종이 너무했네... 인현왕후가 진짜 보살이었군..
우리나라 도깨비 제대로 알기! - 2. 진짜 도깨비, 가짜 도깨비
도깨비는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의외로 많은 면에서 오해를 받아.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성격이 달라진 것도 있지만, 이번엔 될 수 있는 한 민간설화에 따라 '기름기 쏙 빠진' 도깨비를 찾아보려고 해. (글 내용이 김종대 박사님의 연구를 많이 따랐다는 걸 먼저 밝힐게.) 그럼 우리 함께 도깨비의 개념을 바로잡아보자! 1. 도깨비의 정체 도깨비는 요괴야, 아님 귀신이야? 요즘 동화에선 도깨비가 막 무섭고 괴팍한 요물 정도로 많이 나와. 하지만 그런 부정적 이미지들은 후대에 도깨비의 위치가 낮아지면서 많이 생긴 거고, 옛 설화 속 도깨비는 요괴도 귀신도 아닌 무려 '신'이었어! 놀랍지 않아? 도깨비가 신이었대 언니들! 도깨비가 신이라니 어색할 수도 있지만, 그는 엄연히 제삿상도 받아먹는 신이었어. 귀신은 사람이 죽어서 생긴 거고, 요괴는 사람이 죽은 건 아니지만 성질이 사악해서 조화를 깨뜨려. 하지만 도깨비는 사람이 죽어서 생긴 것도 아닌데다, 오히려 인간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수호자' 격의 신이었지. 그래도 도깨비는 신 치고 왠지 위엄이 덜하지? 도깨비는 높은 상위 신이 아니라 그보다 좀 낮은 하위 신 정도라고 보면 돼. 보통 높고 전지전능한 신일수록 엄청 높은 하늘이나 엄청 깊은 바닷속처럼 사람이 닿기 힘든 곳에 살거든? 하지만 도깨비는 달라. 도깨비의 특징 중 하나가, 산에 살아도 결코 산 꼭대기에 살진 않는다는 거야. 개나 소나 다 넘는 고갯길에도 나타나고, 한밤중에 불쑥불쑥 마을에 내려오기도 하지. 다시 말하지만, 도깨비는 인간과 어울리고 싶어 해. 금 나와라와라 뚝딱, 은 나와라와라 뚝딱♬ 도깨비가 신이라면 과연 무엇을 관장하는 신이었을까? 바로 생산력을 가진 '재물신'으로서, 백성들이 궁핍할 때 '부족함이 언젠가 채워질' 희망을 주는 풍요의 아이콘이었대. 그래서 농촌에서는 도깨비터에 풍년이 든다고 믿고, 어촌에서는 도깨비터에 물고기가 많이 모인다고 믿고 그랬던 거지. 만화영화 <꼬비꼬비>에도 나오듯이 도깨비는 메밀묵을 좋아해. 도깨비 고삿상에도 메밀로 만든 묵이나 떡, 범벅 등이 올라가거든. 그런데 왜 하필 쌀도 아니고 메밀이게? 힌트를 주자면, 메밀은 쌀과 달리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서 기근이나 흉년이 들 때 많이 심었대. 마르고 배고픈 땅에서 키운 메밀로 도깨비에게 고사를 지내는 걸 상상해봐. 도깨비가 옛 농민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감이 좀 올 거야. 2. 도깨비의 설움 '가짜 도깨비'들을 찾아라 역사적인 이유로, 혹은 카더라 통신들 때문에 우리 인식 속에 슬쩍 자리 잡은 이른바 '가짜 도깨비'들이 꽤 있대. 그들의 정체를 파헤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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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면와를 용 문양의 '용면와'라 불러야 한다는 설도 있거든.) 중국의 도철문. 중국의 괴물 도철을 새긴 문양이래. 귀면와에 대한 설을 찾아보면, 일단 중국의 '도철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귀면 문양이 나왔다는 설이 있어. 실제로 도철이라는 중국 괴물이 귀면 문양과 되게 비슷하게 생겼다네. 인간의 얼굴에 뿔, 털로 뒤덮인 몸, 호랑이 송곳니 등등... 게다가 귀면 문양은 불교적 성격이 있어서 중국과 일본에도 나타나고, 심지어 우리나라의 귀면와가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까지 있어. 그러니까 귀면와는 그 자체도 정체가 불분명하고, 다른 종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 신앙 대상이었던 도깨비와는 연결 짓기 어렵다는 거야. 한 편, 치우천왕은 단군 조선 이전에 있었던 '배달국'의 14대 왕 '자오지 천왕'을 가리키는 말이야. 그의 이야기는 마치 트로이 전쟁처럼 역사이자 신화처럼 전해진대. 그런데 이 치우천왕이 도깨비의 왕 아니면 조상이라는 말이 있거든? 이건 아까 말한 귀면 문양이 치우천왕의 얼굴 문양이라는 또 다른 설 때문에 그래. 2002 월드컵 때 붉은악마의 공식 캐릭터였던 '치우천왕'이야. 이것 역시 귀면 문양을 닮았지? 그 설을 쉽게 정리하자면, 치우천왕이 중국 등지에서 수호신처럼 여겨지곤 했는데, 귀면와 역시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둘을 연관 지은 거야. 그런 식으로 치우천왕이 귀면와와 연결, 그리고 귀면와가 도깨비와 연결이 되면서 결과적으로 "치우천왕은 도깨비의 왕"이라는 인식이 피어나게 되지. 하지만 귀면와나 치우천왕이 '벽사', 즉 '사악한 귀신을 몰아내는' 기능을 가진 반면 도깨비는 재물 생산 능력이라면 모를까 벽사의 기능 같은 건 없어. 오히려 후대에 가서 역병을 몰아온답시고 벽사의 대상이 돼버린 게 도깨비란 말야 ㅠㅠ (2) 독각귀(獨脚鬼) + 이매,망량 등 웹툰 <도사랜드>에 나오는 도깨비왕의 엽전. 저 엽전에 새겨진 한자가 바로 '이매망량(魑魅魍魎)'이야. 디테일 돋네. '독각귀'는 중국의 요괴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독각귀나 이매, 망량을 도깨비의 옛 이름으로 알고 있더라고. 그래서 독각귀라는 이름 뜻(한 다리 귀신!) 그대로 도깨비의 다리가 하나 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있고. ...? 석보상절에 등장하는 '돗가비'. 여기서 돗가비를 한자로 풀이하지 않았다는 걸 주목해줘. 도깨비의 어원이 한자어가 아니라 순우리말이라는 증거야. 도깨비의 옛 이름은 한자어인 '독각귀'가 아니라 (가장 오래된 기록을 토대로 했을 때) 15세기 <석보상절>에 한글로 쓰여진 '돗가비'야. 역시 한자어인 '이매'와 '망량'도 도깨비와는 완전 별개지. 사실 이 셋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귀(鬼)', 즉 귀신들이고, 다리가 하나라거나 짐승의 머리를 가졌다는 등의 얘기들도 독각귀의 모습일 뿐이지 도깨비와는 아무 관련이 없대.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도깨비를 '독각귀', '이매', '망량'이라고 하던데? -백과사전에서도 독각귀나 이매, 망량이 도깨비의 옛 이름이라고 그러던데?  (네이버 백과사전도 그러더라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자면... 독각귀, 이매, 망량이 쓰여진 문헌은 당연하지만 한문 문헌이야. 단어 자체가 한자어인걸. 조선시대에 한자는 사대부들의 문자고, 한문 문헌들 역시 사대부들 손으로 쓰였는데, 한글도 없이 한자를 이용해서 순우리말인 '도깨비'를 표기하자니까, 마땅한 한자가 없더란 거야. 그래서 중국 '독각귀'의 이름을 빌려다 쓴 거고, '독각귀=도깨비'라는 오해가 빚어진 것도 이 때문이래. 백과사전들도 이러한 "우리말->한자" 표기상의 차용을 고려하지 않는 바람에 독각귀를 도깨비의 옛 이름으로 설명하는 것 같아. 분명한 건, 독각귀는 이름만 빌려줬을 뿐이지 도깨비와 별개인 중국 귀신이라는 거야.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들어줄게. 여기 동양의 용(龍)과 서양의 드래곤(Dragon)이 있어. 둘은 비슷한 점이 많지만 엄연히 다르지. 출신부터가 다르니까. 그런데 우리는 둘 다 '용'이라고 부르고, 서양 애들은 둘 다 'Dragon'이라고 부른다? 즉,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나 문자에 따라 적절한 '이름'을 붙일 뿐이지, 개념상으로는 아예 다르다는 뜻이야. (3) 오니 꼬비꼬비 너마저... 만화영화 <꼬비꼬비>에 나오는 도깨비들. 하지만 이 모습은 일본 요괴 '오니'에 더 가깝다는 사실 ㅠㅠ 이번엔 일본에서 온 '오니'를 살펴보자. 머리에 난 뿔, 튀어나온 이빨, 붉거나 푸른 피부, 원시인 복장, 못이 박힌 철퇴까지... 아마도 오니는 우리의 의식 속에 가장 강하게 자리 잡은 가짜 도깨비일 거야. ??? 오니 이야기를 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게 '혹부리 영감' 아니겠어?. '오니=도깨비'라는 오해를 만들어낸 일등공신이니까. 1941년 일제강점기 <초등국어독본>에 실린 '혹부리 영감' 삽화야. 일본식 옷차림의 노인 주변으로 뿔 난 오니들이 보이지? 사실 '혹부리 영감'은 일본 이야기야. 혹부리 영감처럼 노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일본 설화의 특징이래. 우리나라의 설화는 주인공이 대개 젊고, 충이나 효 같은 유교적 이념이 드러나는 게 특징이야. 하지만 혹부리 영감 이야기를 떠올려봐. 유교적 이념부터가 없잖아? 그러면 어쩌다가, 일본 설화에 등장하는 오니한테 도깨비의 자리를 빼앗긴 걸까? 1909년, 일본의 <심상소학독본>에 실린 혹부리 영감 삽화야. 바로 이것이! 1915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보통학교조선어급한문독본>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서 이렇게 변신해. "괴슈 독갑이" ("괴수 도깨비") 사실 도깨비는 짐승이나 괴물의 개념이 아니라서 괴수라는 표현 자체가 어색해. 도깨비를 요괴인 오니와 동일시하려고 사용한 표현일 뿐이지. (솔직히 도깨비가 괴수면 막 돈 갖다주고 명당자리 알려주고 그러겠음??) '혹부리 영감' 속 오니는 일제에 의해, 국민 교육의 기반인 초등 교과서 속에서 도깨비라는 이름을 얻은 거야. 바로 여기에 일제의 무시무시한 의도가 숨어있어. "일본의 오니와 조선의 도깨비를 봐, 정말 비슷하지? 사실 둘은 뿌리가 같은 거야! 그러니 조선 문화와 일본 문화는 뿌리가 같아! 뿌리가 같으니 한일합방 또한 자연스러운 거야!" 이러한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조선 사람들 머리에 심으려 했다 이거지. 오니의 탈을 쓴 가짜 도깨비는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이 만들어낸 비밀 병기라는 거! 꼭 기억해 언니들! 그런데 한 가지 기가 막히는 게 뭔지 알아? 저런 메시지의 일부가 아직도 우리나라에 남아있다는 거야. 실제로 문화 연구과정에서 도깨비랑 오니, 독각귀를 똑같이 묶어서 보기도 하고, 심지어 도깨비가 중국에서 생겨나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파되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대. 쉽게 말해 '독각귀는 중국 도깨비', '오니는 일본 도깨비' 라고 여기는 애매한 생각이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도깨비를 근본 없는 놈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ㅠㅠ (그럼 슈렉은 '유럽 도깨비'게?) 용과 드래곤의 비유를 다시 떠올려보자. 오니를 우리의 언어에 맞춰 '일본식 도깨비'라 편하게 부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둘은 개념상 부정적인 '요괴'와 긍정적인 '신'이라는 근본적 차이가 있어. 쓱 보기에 비슷한 면이 몇 가지 있을 뿐 별개의 개념이라는 말이야. 예를 들면, 영화 <슈렉>에서 슈렉은 원래 오거(Ogre)라는 괴물인데 더빙판에선 '도깨비'라고 번역하거든? 그렇다고 슈렉이 정말 도깨비인 건 아니란 말이지. 표면적인 유사성만을 가지고 그 본질까지 함부로 묶어버리는 사고방식은 매우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 [참고자료] <저기 도깨비가 간다> - 김종대 네이버 캐스트 <백제인의 심성이 스며 있는 여덟 가지 무늬벽돌> 및 동아일보, 경향신문 기사 한배달 치우연구 제2호(2002.12) 네이버 백과사전, 다음 사전, 네이트 지식 등 강조하건대, 도깨비는 도깨비고, 독각귀는 독각귀고, 오니는 오니야. 도깨비는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우리나라의 고유 문화 아이콘이지. 만약 아직도 우리 주변에 도깨비가 살아있다면, 도깨비는 얼마나 서러울까? 한때는 함께 어우러져 살던 사람들인데, 이젠 자기 모습조차 제대로 알아주질 않으니 말야. 진짜 도깨비를 알아가는 건 일제가 구겨놓은 우리 문화를 되살리는 일이기도 해. 우리 도깨비한테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져주자! 아이들한테도 진짜 도깨비 이야기를 들려주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 출처
작전명 "태양을 만져라"-인류 최초의 태양 탐사선 이야기
미국 시카고대학의 한 무명 교수였던 천체 물리학자 유진 파커 박사 파커 박사는 1958년 ‘천체물리학 저널(The Astrophysical Journal)’에 *태양풍의 존재를 밝히는 논문을 제출함 *태양풍=쉽게 말해 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 태양풍에는 양성자와 전자 등 미립자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입자들이 계속 태양에서 방출된다는 것 현재 우리는 이 흐름을 두고 '태양풍'이라고 부름 하지만 저널 측 논문 검토위원들은 이 이론은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파커의 논문을 싣는 것을 파워거절함 왜냐면 당시에 이미 인류 최초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가 발사된 뒤였지만 아무런 장비를 갖추지 않아 인공위성이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측정도 할 수 없었고, 우주 관측은 지상에서 하는 것이 전부였음 지구-우주 거리가 얼만데 땅에서 봐봤자 얼마나 보이겠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당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우주는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라고 생각했음 근데 갑툭튀 듣보 박사 놈이 나타나서는 머? 우주는 진공상태가 아니라고?  태양에서 방출된 뭔가가 떠다닌다고? 구라즐; 진공상태가 마즘ㅋ 하지만 파커는 포기하지 않긔 내 가설과 이론은 사실이며 논문을 꼭 싣고야 말거시다 너네 두고바 감안안도 파커는 시카고대학 선배 교수이자 저널 편집자였던 유명 우주물리학자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크하르 박사를 찾아갔음 이름 전래 어렵내; 저겨 박사릠!!!!!!! 논문 검토위원놈들이 내 이론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거지, 논문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류가 없는 논문인데!!! 도대체 왜!!!!! 내 논문을 실을 수 없다는 거시조???!?!?!? 과학자가 돼가지고 지금 그런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처리를 하는 겁니까?!?!!!! 수브라 어쩌고 박사 :  어...니 말 듣고 보니..그건 또 그렇네...? 생각해보니까..오류는..업쟈나....? 논문은 오류라고는 없었음 그냥 당시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기엔 가설부터가 넘나 급진적인 내용이라 다들 무시했던 거였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항의끝에 결국 파커는 자신의 논문을 실을 수 있었어 다들 이해했지?ㅎㅎ 이정도는 껌이잖아ㅎㅎ;;;; 그리고 논문이 실린지 4년 후 1962년 미국 나사(NASA)에서 보낸 금성 탐사선 마리너 2호를 통해 태양풍의 존재가 확인됐음...!! 파커의 이론은 사실이어따!!!!!! 우주더쿠 과학자들은 난리가 났음ㅋㅋㅋㅋㅋㅋㅋ 머?!!? 우주가 아무꺼또 없는 진공상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에너지 입자가 있고, 심지어 걔네가 흐 른 다 고 !?!1!?!?!?!? 새로운 증거의 등장에 우주물리학자들 심장 터져벌여 헠헠 이 후로 많은 우주탐사선이 발사됐지만 태양열이 너무 뜨거운지라 근거리 관측은 할 수 없었음 그나마 제일 가까웠던 게 1976년 헬리오스B 탐사선이 태양 표면으로부터 4300만km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한 거였음 근데 지구-태양 거리는 1억 5000만km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300만? 많이 가긴 했지만 태양의 비밀을 풀기 위해선 택도 없음; 하지만 태양에 다가가겠다는 인간들이 열망 덕에 수 십 년의 시간에 걸쳐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찌 이 정도면 해 볼만 하겠다 전래 자신감 충만해진 나사는 이전에 쏘아올린 어느 위성보다 태양에 가까운 위성을 보내겠다는 프로젝트를 시작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래 미국놈들 다운 자신감 아니냐 여튼 그래서 탄생한 프로젝트 태양을 만져라(Touch the Sun) 레오가 부릅니다 터치 말 그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가깝게 태양에 접근하겠다는 프로젝트임ㅋㅋㅋㅋㅋ 엥 완전 이카루스 아니냐? 뭐 그래서 얼마나 가까이 가는데? 이 프로젝트에서 발사 될 탐사선의 목표는 태양 표면으로부터 640만km까지 가는 거임 띠용 앞단위가 바꼈쟈냐 그리고 마침내 2018년 8월!! 인류 최초 태양 탐사선이 발사 준비를 마쳤음 쓰리 투 원 발사~!~!~!~! 지금 만지러 갑니다 헠헠 탐사선의 이름은 파커 솔라 프로브 파커? 아까 그 파커 박사? ㅇㅇ마즘 나사에서 태양풍의 존재를 처음 제시했던 파커 박사의 이름을 붙여서 탐사선 이름을 지었음 그리고 파커 박사의 사진과 태양풍에 관한 논문을 선체에 실어 보내는 등 최고의 예우를 해줌(감덩 더 놀라운 거슨 나사가 생존 인물의 이름을 따서 탐사선 이름을 지은 건 이번이 최초야 그래서 파커 박사는 파커 솔라 프로브의 발사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었지!! 60년 전 자신이 처음 제시했던, 하지만 무시받았던 이론이 현실이 되는 순간...!(왈칵 사실 이 표정이 너무 감동적이라 글 쓰게 됐음ㅠㅠ 파커 탐사선은 앞으로 7년 동안 태양 주위를 돌며 태양과 코로나(태양의 대기) 정보를 수집할 예정이라고 해 임무가 끝나면 태양 속으로 떨어진다고 함 (무인 탐사선임) 나사는 파커 탐사선이 보내 올 자료를 토대로 지구에서 전자파 교란을 일으키는 태양풍을 분석해 인공위성이나 지상에서의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네 그리고 파커 탐사선을 통해 태양풍이 어떻게 생기고, 언제 강해지는지 등을 밝혀낼 계획임ㅋㅋㅋ 널 낱낱이 파헤져 주겠어!!! 기다려 태양쓰!!  발사 되고 나서는 어떻게 됐냐구? 파커 탐사선이 발사된 지 3개월 후 2018년 11월 연구진들은 파커 탐사선으로부터 모든 장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A등급의 무선 신호를 받음!! 훠우!!!! 파커 짜란다!! 그리고 파커 탐사선은 사진도 한장 같이 보냈는데 태양의 동쪽을 찍은 사진임 이미지 중앙의 밝은 원은 수성이고 어두운 원들은 걍 배경 보정하다 생긴 거래ㅋㅋㅋㅋ 이렇게 보니까 태양 진짜 전래 커;;; 파커는 현재 태양 표면으로부터 2400만km까지 근접했대 1976년 헬리오스B 탐사선이 갖고 있던 4300만km기록을 벌써 깨벌인 것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커는 순항중! 목표치 640만km까지 파커 힘조~!~!~!~! 나사의 상상도
인간미가 느껴지는 조선왕들의 일화 (꿀잼 시간순삭)
왕이라는게 진짜 준니 하드코어하구나.. 를 느낀 일화들 잼나는 것도 있고 안타깝고 씅나는 내용도 있고 재밌어서 퍼옴 ㅇㅇ 어진을 찾을 수 없는 왕들은 걍 뭐 대충,,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를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4.태종은 운명론자가 아닌 현실론자였는데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어느날은 우연히 하급관리 두명의 토론을 듣게 되었다. 한명은 부귀영화는 모두 임금에게서 나오는것이라고 하였고 도 한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현실론자였던 태종은 부귀영화가 임금에게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한품계를 올려주려 하려고 그 관리에게 '지금 가는 아무개에게 한 품계를 올려주도록 하시오'라는 종이를 세종에게 전해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관리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운명론자인 관리에게 대신 종이를 전해주라 하였고 결국은 그 관리가 진급을 하였다. 5. 조선왕들중 가장 많은 자식을 가진 왕으로 12남 17녀, 29명의 자식을 가졌다.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 준 얘기도 있다. (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 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 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 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 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을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양녕대군과 세종은 원래 우애가 깊지 않았다. 태종은 양녕과 효령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유독 충녕, 즉 세종을 편애 하였다. 게다가 세종은 알려진것과 같이 머리가 아주 좋았고 공부를 좋아했다. 태종이 충녕에게 나중에 '너는 할일이 없으니 놀아라'라고 하며 글씨,그림, 비파등을 마련해준 때가 있었다. 그 때 양녕은 충녕에게 비파를 배우며 서로 친해졌고 다른 면에서 보면 자신의 경쟁자였던 충녕이 공부를 포기 했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다. 그 후로는 양녕대군도 공부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비파, 글씨 등에 관심이 있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다시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양녕에게 많은 충고를 하였다. 양녕은 열등감으로 인해 방황하였고 다시 비행에 빠져들게 되어,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자리는 세종이 차지하게 됬다. 8.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세조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 라고 시키자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 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 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3. 신숙주가 영의정었을 때 구치관이라는 사람이 좌의정이 됐다. 이때 세조가 신숙주하고 구치관을 불러서 "내 오늘 경들에게 질문을 할 테니 대답을 잘 못하면 벌을 줄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신 정승!"하고 부르니까 신숙주가 대답했는데 세조가 "나는 새로 된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벌주를 먹였다. 그리고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니 그리고는 "나는 옛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구치관한테도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 다시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이번에는 신숙주가 대답했다. 근데 이번에는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을 잘 못하는구료" 하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서 또 "신 정승!"하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는데 구치관한테도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은 잘못 대답하였소" 하고 벌주를 먹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신 정승! 구 정승!" 하고 부르니까 둘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을 안하는건 예의가 아니라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고 한다. 성종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 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 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을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 보너스 연산군에 대한 잘못된 사실들 연산군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하고 폭군의 모습을 다소 보인점은 사실이지만, 몇가지 왜곡된 사실들이 있다. 1.연산군은 궁궐 담장 아래 백척 내에 있는 민가들을 철거하여 쫓아냈다. - 하지만 이것은 원래 불법주택들이였다. 선왕, 후궁들의 모습이 민간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법도에 의한 것들이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오히려 봄까지 기다려주고 주택의 등급을 나눠 무명을 보상으로 주고 대토 와 거주지까지 마련해 주었다 2.궁을 짓기 위해 열한 고을의 백성들을 내쫓았다 - 백성들을 내쫓은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는 500여호에 불과했고 열한고을은 사관이 의도적으로 과장해서 쓴것이다. 또 지나가는 자는 죽여서 시신을 구경시키는 형을 내린다고 했으나 무덤이 있는 자들에게 명절 출입을 허가했으며 불법주택에도 보상을 해준 연산군이 보상을 안해줬을 가능성은 적다. 게다가 궁은 큰집 50칸으로 몇몇 사대부들의 99칸 집들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3.연산군은 음란했다. -연산군이 비구니를 간음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기생의 출입도 소문이 두려워 꺼렸던 인물인데 늙은 비구니를 몽둥이로 쫓고 젊은 비구니들을 간음했다는것은 말이 맞이 않는다. -연산군이 여성 음악인들을 혼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그들을 예술가들였을뿐이며 오히려 여성 음악인들은 사대부들에겐 첩을 들이는 통로였다. 사대부들은 연산군에게 연산군이 남성음악인들만 잔치때 내려주자 불만을 갖고 여성음악인들 을 내려달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좋은 왕으로 묘사되는 성종은 16남 21녀를 가졌으나 그의 아들 연산군은 4남3녀만을 두었다. - 연산군이 백모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죽자 임신을하고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를 추측해보면 그 때는 이미 쉰세살에서 쉰다섯으로 당시에 그나이엔 잉태가 불가능했다. 4.정치는 하지않고 사냥을 즐겼다 -연산군은 군사력 강화를 원했던 왕이다. 연산군 5년 여진족이 백성들을 사로잡자 연산군은 정벌에 나서려 했으나 그때마다 신하들은 반대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노비들이 부역에 나가는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냥은 군사력 강화를 위했던것이고 이것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된 결과가 임진왜란이다. 5.폐비 윤씨사건으로 폭군이 되었다 -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지만 연관인들의 처형은 신하들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였기도 하다. 그러나 훈구파를 무너트렸으면 사림을 불러들였어야 하는데 사림들조차 적으로 만들었으니 그를 보호할 사람은 없었다. 결국 연산군은 백성들에게는 폭군은 아니였지만 모든 사대부들에게는 적이였다. 그 결과 사관들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기록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믿어지고 있다.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5.조울증을 가지고 있었다. 명종에게는 손빈이라는 총애하는 환관이 있었는데, 그에게 집과 많은 값비싼것을 하사했으면 원하는것들은 모든지 들어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장령을 만났을때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명종으로부터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벼슬길도 막혔다. 명종의 조울증에 관환 일화는 이밖에도 많으며 아침에 파면했다가 저녁에 회복시켜주는 일들도 많았다.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리며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 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가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4.연산군을 폐위할 때, 중종을 보호하려 군사들이 오자 중종은 자기를 잡으러 온줄 알고 놀라서 자결 하려고 했다. 다행히도 그의 부인 신씨가 말려서 중종은 살아서 왕이 되었다. 5. 중종이 연산군 폐위후 왕위에 즉위했을때, 위에서 말한 신씨는 당연히 왕비책봉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반정때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을 죽였는데 보복이 올줄도 모른다는 이유로 조강지처였던 신씨를 중종은 '조강지처'라는 말 한마디의 저항을 딱 한번 하고는 출궁시켰다. 중종 11년 3월 28일,ㅡ 그는 고려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배운 부분은 최충헌 최충수가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하는 부분이였다. 최충수는 배필이 있던 태자에게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신종을 협박했다. 신종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태자비를 폐출시켰다. 이 부분을 읽으며 중종은 울먹거리며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종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선조 1.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이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2.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어오는 바람에 의주로 도망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명에 혼자 도망가기 위해 망명을 요청하였다. 명은 일국의 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거절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명에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시위를 했다. 결국 명은 그렇게 오고싶으면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북경까지 건너오라고 무안을 줬고 선조는 그제서야 망명을 포기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 지원군이 선조앞에 도착했고 이여송은 선조가 보는 앞에서 조선의 대신들의 싸대기를 후려치면서 어찌 나라를 이지경까지 만들었냐며 타박을 주었으나 선조는 아무말도 못하였다. 광해군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 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효종 1.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2.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그에 반대하는 유후성이 싸웠다. 이에 왕이 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고 말했는데 침이 혈락(血絡)을 범하여 과다출혈로 사망. 어의 가귀는 조사결과 수전증 있는걸로 밝혀졌다. 현종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숙종 1.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2.관우의 팬이였다고 한다. 인조 1.소현세자는 손톱밑이 시커멓게 변하고 얼굴은 검게 변하며 죽었다. 전혀 확인되지 않은 병이었다. 독살이라는 소문은 퍼져나갔지만 인조는 이것에 대한 조사를 피하려 했으며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2.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영조 1.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 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 면 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정조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규장각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 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끊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 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 6. 정조 20년, 이정용이라는 유생이 술에취해 늦은밤 궁궐 담장 아래에서 잠에 들었다 잡혀간적이 있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했던 정조는 요즘 유생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데 술을 좋아한다고 칭찬을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생들이 숙박하던 잡촌과 집춘영은 벽을 맞대고 있으니 이정용은 잡촌에서 잤던거라는 궤변을 펼쳐서 오히려 상까지 주어서 보냈다. 헌종 1. 이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참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고종 1. 고종 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3.당시 1887년대, 전신(전보총국)의 등장과 함께 최초 궁궐에 가설된 전화를 경험한 고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 이 생각에 고종은 상당한 고액의 전화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 홍릉에 설치한다. 그 곳은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씨)의 무덤. 전화의 설치가 끝난 직후 고종은 아침마다 그 곳으로 통화를 걸어 말을했다.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 죽은 민씨에게 안부를 전했고 매일아침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멀리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까지는 못 하는구나." 그럼에도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는 그 날에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세종의 귀염둥이 막내아들의 다사다난한 연애사
영응대군은 세종이 거의 40살쯤 됐을때 태어난 왕자로 대군들 중에서는 막내였다. 이런 막둥이 자식을 세종은 겁나 아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영응대군을 치면 알겠지만 세종이 영응대군에게 뭘 해줬다는 내용으로 꽉차있다. 세종 : 우리 귀여운 막둥이^^ 뭐 갖고싶은거 없어? 말만해봐! 내가 다 줄게 ㅎㅎ 다른 자식들에 비해 너무 많이 퍼줘서 일일이 기록할 수가 없다는 기록이 실록에 적혀있을 정도니 세종의 막둥이 사랑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간단한거 몇개만 말하자면 다른 형제들은 세종을 "주상전하"라고 불렀지만 유일하게 영응대군만은 "아버지"라 부를 수있었고 세종은 영응대군이랑 같이 밥먹기위해 영응대군이 올때까지 기다렸다고 하며, 잠시도 영응대군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막내만 노골적으로 편애하면 다른 형제들은 짜증날 법도 한데, 형들 : 아유 우리 귀여운 막둥이♡♡ 형들이 봐도 영응대군은 너무 귀여웠나보다. 문종이나 세조도 영응대군을 특히 더 잘 챙겨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영응대군은 송씨랑 혼인을 하게되는데 이 둘은 꽤나 금슬이 좋았던 것같다. 그러나 송씨는 병에 걸리고 마는데, 송씨가 영응대군보다 몇십년은 더 오래 살았던걸 보면 (그녀는 무려 중종 대에 죽었다) 진짜 병약했던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성격이 너무 사나워서 영응대군마저도 무서워했다는 기록이 있는걸보면 혹시 그 병이 정신병이었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심증일 뿐 딱히 근거는 없다. 세종 : 우리 막둥이한테 그런 여자를 줄순없지!! 너희 이혼해 아무튼 세종은 우리 귀염둥이가 그런 여자 곁에 있는게 꼴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세종은 송씨가 병걸렸다는 이유로 영응대군을 재혼시키기로 결심하는데 영응대군 : 아니... 아빠 전 괜찮은데... 세종 : 안돼! 넌 더 괜찮은 여자를 만나야해!! 영응대군 : 가지마ㅠ 그렇게 세종에 의해 영응대군과 송씨는 이혼하게된다. (사람에따라 세종의 이런 행위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하던데 난 잘 모르겠다.) 정씨 : (나한테도 관심 좀...) 영응대군의 두번째 부인은 정씨인데 정씨와는 자식도 없었던 것을 보면 딱히 금슬이 좋았던 것같지는 않다. 영응대군 : (ㅠㅠ송씨...보고싶어..) 이혼한 후에도 영응대군은 송씨를 잊지 못했는데 수양대군 : (어휴 저 새끼 요즘 너무 힘들어하는거같은데 괜찮나) 수양대군 : 막둥아 나 송현수(송씨 오빠) 집에 갈건데 너도 같이 갈래? 수양대군은 그런 영응대군이 안쓰러워보였는지 응영군이 송씨를 만날 수있도록 옆에서 도와주기도했다. 그렇게 이 두사람은 이혼을 했는데 안한(?) 애매한 관계를 지속했다. 걍 별거 중인 부부.... 이 시기에만 애를 둘이나 낳았으니..... 그리고 단종 대에 와서는 아예 재결합하게 된다. 그렇게 해피엔딩인가 싶었...지만 영응대군이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게되면서 송씨는 과부가 되고 만다 사실 이 뒷이야기가 더 있는데 영응대군이 죽은 후 송씨는 절에 자주갔는데 여종 : (어휴 목탁소리 듣는거 지겨워 죽겠네...) 여종이 지루해하다가 잠들면 송씨 : 쟤 깨면 어떡해? 학조 : 에이 설마ㅋㅋ 학조라는 스님과 몰래 간통을 했다고한다 차라리 만남을 따로 가지던가 정말 대담한 한쌍이다. 자는 애 옆에서 그러고 싶냐.... 참고로 학조스님은 세조의 지원을 받아서 그런지 세속에 아주 물든 땡중이었다. 대체 이 스님의 매력이 무엇인지 이 스님이랑 엮인 여자만 한 10명정도 됐다. 여종 : 님들아 내가 재밌는거 알고있는데ㅋ 그러나 이 둘의 간통사실은 여종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그러길래 왜 자는 애 옆에서 그 지랄하냐 한편 이 사실을 알게된 김종직. 김종직 : (저 땡중새끼 내가 언젠가 꼭 조지고싶었는데 잘됐군) 안그래도 불교에 호의적인 왕실이 맘에 안들었던 그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학조스님을 조지기로 작정한다. 그는 학조스님의 각종 비리와 스캔들에 대한 글을 썼다 김종직의 제자들 : 어? 스승님이 이런글도 쓰셨네? 실록에 다 넣어야겠다ㅎ 이후에 김종직의 제자들이 그 사실을 실록에 넣으려고 시도하게되고 연산군 : 이 새끼들이 우리 왕실사람들을 욕해??? 연산군 : 다 뒤져 이 개새끼들아!!! 이는 이후에 피바다를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무오사화) 어쩌다보니 영응대군이 아니라 송씨 이야기가 된 것 같은데, 뭐 이런 스캔들이 있긴했지만 송씨와 그 후손들은 왕실에서 대우 받으며 아주 잘 살았던 것같다. 뭔가 하도 자극적인 이야기를 자주 다뤘더니 이제 이정도는 굉장히 평범하게 느껴지는 느낌.. 출처 역사썰은 언제봐도 재미써.... 흥미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