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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녕골에서

밀림을 뚫고 한참을 가다 보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나타나는 초록의 향연. 묵밭이 나타난다.
끝없이 이어지는 망초대와 안들미,엉겅퀴 ...
고라니들이 사랑놀이로 짝하고 뛰어놀았을 법한
넓은 풀밭엔 오래전 누군가 버리고 떠난 취나물 밭이 숨어있었다. 그걸 채취하러 왔다.
저 끝 비탈을 돌아 좌측으로 들어서면 안뒷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초등학교 때 친구 권영이, 한수, 병진이, 경자가 아마 그 고개를 넘어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까?
나도 어렸을 때 퇴비 비기를 독려하러 다니시는 아버지(마을 이장 이셨다)를 따라 그 고개를 넘어 다녔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인적이 끊겨 어디가 길인지 분별이 안된다.

무엇보다 큰 어머님의 추억담은 애달프다. 고개를 두고 안뒷골에 사시던 큰어머니와 정골에 살던 큰아버지의 혼담이 오갈 때, 큰 아버지는 소를 몰고 고개를 넘어와
빨래 터에서 빨래하는 처녀 아이 큰 어머님을 언덕에서 훔쳐보곤 했다 한다. 큰어머니는 소년을 의식했지만 차마 처다보지 못하고 괘한 빨래 방망이만 요란하게 두들겼다고 하셨다.
여기가 예전엔 우리 밭과 논이 있었던 자리라 큰아버지는 아마 일하러 왔다가 잠시 가서 훔쳐보고 왔으리라.
예전엔 모두 중매라 소년은 처녀 아이의 얼굴이 궁금했겠지. 그냥 가기는 뻘쯤하니까 소를 앞세우고 풀을 뜯기는 냥 말이다.
그랬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단 2년의 결혼생활 후 전쟁통에 헤어져 평생을 못 보고 사시다 큰어머는 돌아가셨다. 월북했으리라 짐작만하는 큰아버지의 소식은 아직도 모른다.
물론 연세로 봐서는 돌아가셨겠지만 어떤 삶의 여정을
보내셨을지 궁금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많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이곳에 농사지으러 올 때면
항상 나를 앞세우고 왔다.
아버지가 작물을 심고 김을 매고 할 때면 난 가재를 잡거나 산딸기, 오디 등을 따먹으며 아버지가 일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꼴지개를 짊어진 아버지와 나와 소가 삼위일체로 논둑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흑백사진으로 기억에 있다.
모든 걸 지게 하나로 운반하셨던 아버지의 지게는 아직도 집 뒤편에 세워져 있는데 아버지는 안 계시다.

홀로서기의 첫 농사, 아버지에게 배운대로 시작은 했지만
말구(나의 밭 머리에서 농사 짖는 친구)의 조언과 기계의 도움으로 약간은 다른 방식을 취한다. 친구의 성실성을 늘 보아왔던 아버지는 혼자 남을 나를 걱정해 말구와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셨다.
나에게 있어 농사는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다.

'아버지 오늘은 옥수수 밭 북을 주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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