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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꿈에 성시경이 나왔다. 이제는 꿈에까지 나온다. 좌식으로 된 어느 식당이었다. 성시경과 나는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 좋아하는 연예인인지라 내가 여러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기억나는 건 딱 두 가지다.

기억나는 지점부터는 내가 아니라 이미 성시경이 말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앞에 내가 무슨 질문을 하고 난 뒤였던 것 같은데.

“정엽 그 양반이 원래 재밌는 양반은 아니라서……”

그렇다. 성시경의 말이다. 내가 무슨 질문을 했기에 성시경은 저런 답변을 내어놓은 것일까. ‘정엽 그 양반’이란 가수 정엽을 얘기하는 것일 텐데, 나는 성시경에게 정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걸까. 아니면, 정엽 정말 재미없지 않아요? 라고 묻기라도 한 걸까. 실제 성시경과 정엽의 관계는 물론 나야 전혀 모른다. 그들이 라디오 프로그램 <푸른밤>의 역대 진행자라는 공통점 말고는.
그런데 나는 정엽이 정말 재밌어서 미칠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엽이 딱히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정엽은 가수일 뿐, 개그맨은 아니지 않은가. 그가 꼭 재밌어야 할 이유도 없고. 굳이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정엽이 <푸른밤, 정엽입니다>를 진행할 때 일부러 찾아 듣기도 했고, 꽤 좋아했으니 특별히 그가 재미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물론 당시 <푸른밤>을 찾아 들은 건, <푸른밤>을 앞서 진행한 성시경에 대한 향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정엽이 성시경보다는 재미가 없구나, 라고 잠시 생각했을지언정 ‘정엽은 재미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적은 없다. 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은 내가 인지하기로 두 번째 질문이자, 꿈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나는 성시경에게 질문했다. 참고로 나는 그를 형이라고 지칭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그냥 준 거 없이 싫은 사람은 없어요?” 그렇다. 이것은 내가 분명히 의식하고 한 질문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좀 이상한 게, 왜 하필 그런 질문을 던졌던가 싶은 거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성시경은 마치 성인군자처럼 싫은 사람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물론 내가 아는 성시경은 적어도 팬들 앞에서 이유 없이 누군가를 험담할 사람은 아니지만, 굳이 그런 걸 숨기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던진 질문은 마치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온화하며, 화라고는 낼 줄도 모르고 내 본 적도 없는 사람을 떠보듯이 싫어하는 사람 없냐고 묻는 격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성시경은 차가우면 차갑지 화낼 줄 모르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성시경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조석 말야……. <마음의 소리> 조석. 그 양반 만화, 그거는 진짜 아니야…….” 내 기억은 거기까지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거참 이상하다. 내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기엔, 나는 정엽 그 양반도 싫어하지 않고, 조석 그 양반 만화도 싫어하지 않는다. 어째서 내 무의식은 성시경이라는 거죽을 입고, 정엽 그 양반, 조석 그 양반하며 그들을 격하하는가. 심지어 이제 완결된 <마음의 소리>를 두고. 정말 이상한 양반이다.

이 꿈은 실제 성시경과 정엽과 조석과는 무관하며, 이게 다 내가 꿈을 잘못 키운 탓이다. 성시경과 정엽과 조석의 팬분들은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또한 나의 무의식이기는 하지만, 정엽과 조석의 웹툰에 대한 내 취향과도 무관함을 밝혀둔다. 나는 그 양반들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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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0-EDTpdlDY 9월 6일, 파리는 며칠 째 청명한 하늘이 이어지고 있다. 여름답지 않은 쌀쌀한 밤기운에 솜이불 속으로 피난을 가 야 한 해가 벌써 끝이 난 것 같다 하며 아쉬워하던 내담을 엿들었는지 구름을 힘껏 닦아 낸 하늘을 보니 아직 태양이 꾀나 우리 이마 가까이에 있었고 그 덕에 습관처럼 챙긴 청자켓은 하루 종일 짐이 되었다. 어제는 눈이 멀듯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 고다르의 영화 속에서 미셀이 총을 맞고 쓰러진 거리들을 걸었는데 오늘 벨몽도가 타계했다는 비보가 라디오에서 끝없이 흘러나왔다. 영화 속에서 미셀은 이유도 없이 자기 삶을 구겨 불쏘시개로 만들곤 태연하게 그것으로 불을 붙여 담배를 피곤했는데 벨몽도는 수십 편이 넘는 영화와 많은 무대에도 오르고 은발의 머리로 헬기에 매달리는 장면을 직접 연기할 만큼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미셀은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진 후 자신을 내려다보는 경찰들과 패트리샤 바라보며 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감겨버렸는데 벨몽도의 마지막은 어떠했을지. 자연은 시간에 떠내려간다. 이미지만이 냇가의 돌처럼 버티고 앉아 철철 하는 물소리를 낸다. 소리를 듣고 냇가를 찾은 이는 돌을 건드려 무게를 가늠해보고 모양을 재고 금세 비웃고 제멋대로 시간 위에 돌을 놓아보다가 마침내 자리 잡은 제 미약한 돌이 못 붙잡는 끝없이 성실한 시간에 압도되고 만다. 뭘 하는 거지. 낡은 공방에 가득 그림을 채워도 공허만은 지워지지 않아 화가들의 그림에는 왠지 모르는 쓸쓸함이 늘 담겨 있다. 육신을 썩지 않게 한다면 시간에 둑을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시체의 속을 비워내 육신을 미라로 만들었고 사람의 데스마스크를 뜨고 돌을 깎아 시체를 두 발로 다시 서게 만들었으며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순간 그 찰나를 기록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들렸고 과학의 힘을 빌려 이제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들까지도 (우리도 모르게) 방부처리를 하게 되었다. 남겨진 것들은 구글도 감당을 못할 만큼 넘치고 넘치지만 언젠가부터 그것들은 더 이상 어떠한 물소리도 내지 못한다. 흘러가는 것에도 버티는 것에도 나는 이제 감각이 희미하다.  9월 5일,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는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무료로 개방되기 때문에 오전부터 서둘러 오르세 미술관을 찾았다. 점심시간에 예약을 한 것이 주효해서 별다른 대기 없이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실내에는 더 부지런한 이들이 이미 가득했다. 사람들이 많은 미술관은 그림을 보기보다는 그림 앞에 선 사람들을 보는 곳이 된다. 나는 그것을 나름대로 즐긴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이밀고 싶어 하는 유명한 그림들. 감격하는 사람들과 시니컬한 표정으로 그것과 그들을 스쳐가는 사람들. 자기 취향을 광고하듯 남이 지나치는 그림 앞에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 지나 서다 돌아와 그 자리에 다시 서보는 사람들. 파리의 미술관에서 그림만을 온전히 감상하기란 그 어떤 요일 그 어떤 시간대에라도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미술관이라는 공간 안에는 남긴 사람과 들린 사람의 욕망이 제멋대로 가득 드러나 있기에 나는 그곳들이 늘 즐겁다.  미술관을 나와 하얀 먼지가 일렁이는 파리의 거리를 걸었다. 센강의 유람선에 가득한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했고 우리도 그들을 좋은 그림처럼 느꼈다. 파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가 아니기에 사람들은 각자의 표정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2021년 9월 6일 벨몽도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아니었다면 좀처럼 부유하는 좌표를 알 수 없는 가을 속의 여름이었고 팬더믹 속에 오아시스였다. 9월 7일, 사관학교에 들어간 지 20년 만에 대학 시절 마지막 학기의 수강신청을 한 지 13년 만에 다시 수강신청을 했다. 30학점. 프랑스어는 좀처럼 늘지 않지만 당장 다음 주부터 강의실에 앉아 당황한 얼굴이라도 짓고 있어야 한다.  돌고 돌아 당신이 씻어준 복숭아를 그리고 돌고 돌아 두 걸음 앞서 걷는 당신을 찍는다. 몇 년을 술래 잡던 의미는 결국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스러지고 온통 마음이 다구나 씁쓸한 단맛을 느낀다. 내 첫 영화 본 어떤 이는 그 덕에 자신이 영화를 통해서 뭘 하고 싶었는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했는데 나는 그만 그게 부끄러워 말을 자꾸 배우러 다닌다. 파리에 온 지 2년. 나는 다시 물소리를 낼 수 있을까. 돌을 고를 때 돌을 쥐고 첨벙 걸을 때 돌을 놓을 때 무엇보다 내게 마음이 있어야지. 아무렴. W, P. 레오 2021.09.10 파리일기_두려운 날들이 우습게 지나갔다
영화 사라진 시간 해석 / 꿈과 현실의 경계, 그리고 삶
제목 : 사라진 시간 감독 : 정진영 출연 : 조진웅, 배수빈, 정해균, 차수연 외 국가 : 한국 러닝타임 :105분 꿈과 현실의 경계, 그리고 삶 평화로운 시골마을. 집 한 채가 전소됐고, 부부가 사망했다. 조사를 위해 마을을 방문한 경찰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조사 결과 방화의 가능성은 낮은 걸로 판명됐지만 께름칙한 부분이 있었다. 마치 부부를 감금한 것처럼 2층 출입구에 철창이 쳐져 있던 것. 마을 사람들을 취조한 경찰은 그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게 된다. 아내는 밤이면 다른 사람이 되는 이상한 병이 있었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밤 시간 동안 그녀를 2층에 가둬두고 아침에 열어줬던 것. 공교롭게도 그날은 아내를 홀로 가둬두는 게 미안했던 남편이 아내와 같이 자진하여 감금당하길 요청했고, 아침마다 문을 열어주던 이른바 '열쇠관리인'은 모종의 '프라이버시'로 본인의 직분을 잠시 망각했다. 비극이 일어난 당시에 그는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비록 방화에 의한 직접적인 살인은 아니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부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는 상황. 잡혀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신나게 놀아 보자며 마을회관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한 노인의 생일잔치를 벌인다. 형사는 수사의 일환인 양 못 이기는 척 잔치에 참여한다. 본분을 망각하고 연회를 너무 즐긴 탓인지 독한 송로주를 양껏 마시고 거하게 취해버린 형사는 사건 현장인 부부의 집에 찾아가고 두 사람이 사망한 그 집 2층에서 깜빡 잠이 들고 만다. 다음날 아침 깨어난 남자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고 만다. 그는 형사가 아닌 학교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그에겐 그 집에 살았던 여자처럼 매일 밤마다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병이 있었고 스스로 2층 방에 감금해달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요청했다는 것. 확인을 위해 마당으로 뛰어나와보니 전소되었던 집은 멀쩡했고, 그 집의 주인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 집에 살던 부부도, 집이 전소된 일도, 그가 형사라는 사실도 그를 제외한 모든 마을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 후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남자는 결국 경찰로서 자신의 기억이 진실인지 공상인지 밝혀내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려 이짓 저짓을 다 해보지만 결국 실패한다. 어쩔 수 없이 학교 선생님의 삶에 적응하기로 한 그는 자신과 비슷한 병(밤이 되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을 가진 뜨개질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망상인지, 이 영화는 난해하며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감독도 영화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나름의 친절하고(?) 다소 직접적인 힌트를 극에 배치해 뒀는데, 그는 다름 아닌 정신과 의사다. 정신과 의사는 형사의 삶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학교 선생님으로 알고 있는 이 남자에게 이야기한다. 욕망의 소각은 꿈으로, 현실에서는 공상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이 영화에 화재는 총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선생 부부의 집이 전소되는 장면, 두 번째는 남자가 사람을 죽이고 비닐하우스에 방화를 저지르는 장면이다. 그는 분명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지만 비닐하우스에선 불에 탄 시체 대신 불에 탄 고라니가 발견된다.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이 영화에서 화재, 불이 등장하는 장면은 곧 남자의 꿈이나 공상이라고 생각하면 이야기의 아귀는 대충 맞아떨어진다. 남자는 사실 형사가 아닌 선생이었으며 부부의 존재와 그가 저지른 살인은 모두 꿈과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고, 그렇게 해석하면 복잡한 이야기를 씹어 삼키기가 조금은 편해진다. 그가 기억하는 형사로서의 삶에서 아내의 이름이 '전지현', 두 아이의 이름은 각각 '박지성', '박주영' 이었다는 점도 남자의 기억이 만들어진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선생일 때도 경찰일 때도 꾸준한 남자의 습관인 '혼잣말' 역시 남자의 정신적 불안정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 같다. 그가 뜨개질 선생님과 함께 간 수안보 온천에서 불 타 죽은 부부가 멀쩡히 살아서 등장하는 장면 역시 부부는 남자의 꿈이나 공상의 산물임을 다시금 증명한다. 다 아파요. 엄마가 아빠와 실랑이를 하다 아빠를 밀어 넘어뜨렸다. 공교롭게도 근처에 있던 나는 아빠 밑에 깔렸다. 무척이나 아팠다. 시간이 흘러 이날의 이야기를 엄마 아빠에게 꺼냈다. 그때 두 사람은 왜 싸웠냐고. 이야기를 듣던 둘은 두 목소리로 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 적은 없다고. 네가 꿈을 꾼 것 아니냐고. 기억은 과히 선명했고 아빠 밑에 깔렸을 때의 고통은 소름 끼치도록 생생했기 때문에 나는 두 양반이 짜고 나를 속이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간밤에는 꼭 생시 같은 꿈을 꿨다. 깨고 곱씹어 보니 아쉬움과 동시에 찝찝함이 남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리고 우리의 기억 중에 꿈과 공상에 오염되지 않은, 신뢰할 수 있는 기억은 몇 개나 될까. 설령 어떤 기억이 사실이라 해도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부정한다면 그 기억은 거짓이 되는 게 아닐까. 일일 저녁 정보 프로그램에서 90세가 넘은 장수 노인을 인터뷰했다. 노인의 일상을 보여주다가 영상의 말미쯤에 오래 사시니 어떠시냐는 창의력도 의외성도 엿볼수 없는 뻔한 질문을 했다. 노인이 대답했다. 지난 90년 평생의 세월이 돌이켜 보면 한바탕 꿈같았다고. 초등학교 과학시간이 생각난다. 우리가 밟는 땅, 단단한 지각은 사실 지극히 불안정한 맨틀 위에 둥둥 떠 있는 섬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지진이니 해일이니 하는 무서운 현상들은 다 맨틀의 운동과 관련된 것이라고. 매일밤이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여자에게 역시 비슷한 종류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남자는 "다 알아요."라며 그녀를 위로한다. 당신만 특별히 아픈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다는, 남자의 "다 알아요." 가 "다 아파요."처럼 들리는 건 그래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뜨개질 선생님인 그녀 역시 남자의 공상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무섭다. 과연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우리는 그 경계선을 명확히 그을 수 있을까.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이 거짓일 일말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이 사실은 트루먼쇼, 통속의 뇌, 매트릭스, 호접지몽, 일장춘몽, 아시1발꿈, 개꿀잼 몰카 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의 현실 인식이란 것도 사실은 두껍고 유동적인 맨틀 위에 떠있는 얇은 지각처럼 지극히 얇고 불안정한 것은 아닐지. 그러나 만에 하나 삶이 다만 커다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 탄로난다 해도 우리는 계속 살아야 할 것이다. 어느 죽은 시인의 시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 고 삶이 그대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엿먹일지라도, 잔인하게 짓밟고 조롱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여전히 우리에게 자신을 윤허해 준다면. 자신이 믿던 모든 것을 부정당한 남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참 좋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아직 삶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기억과 실존, 꿈과 현실이라는 어려운 주제들을 정진영 감독은 잘 녹여냈다고 생각한다. (본 작품이 연출 데뷔작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 수준급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관람 후에 시원한 느낌 대신 찝찝함이 남는 것을 감독의 연출 경험 미숙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여타 리뷰들에서 감독의 역량에 대한 비판도 종종 보였고 나도 어느정도 동의 하는 부분이지만 그가 이야기꾼으로서 들려준 이야기는 꽤나 매력적이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내심 감독으로서 장진영의 다음 행보가 기대가 되는 바이다. 원문 주소 https://m.blog.naver.com/fox11142/222503216466
서울은 기다리지 않는다
#서울은 기다리지 않는다 난개발과 급속성장. 서울의 멋은 그러나 부산함과 조잡스러움 속물근성 등을 한데 스까 아트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데에 있다. 7080 부잣집 스타일 구축 주택의 옆구리에 빛나는 철제 엉덩이를 디밀고 바짝 붙어있는 최신식 사무실 건물. 어찌나 가깝게 붙어있는지 맘만 먹으면 양쪽에서 창문을 열고 건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지각색의 건축자재와 양식. 아무 계획도, 전체적인 그림으로서의 어울림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냥 당대의 유행따라 개성따라 세워놓은 것 같은 건물들은 그야 말로 지들 맘대로지만 하나로 모아놓고 보면 묘하게 어울린다. 오히려 너무 지들 멋대로인 탓에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그러나 서울은 돌아보지 않는다. 공존은 잠시뿐이다. 과거는 헐리고 미래가 들어선다. 백프로다. 역사와 보존이라는 단어를, 서울은 돌보지 않는다. 당신이 만나는 구축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커다란 크레인 교수대에 대들보 모가지를 걸어 공중에 매달 때가 아직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의 다정한 도시 서울은 무엇이든 숭배하지만 어떤것도 사랑하진 않는다. 동대문 운동장이 헐리고 DDP가 들어서던 때를 기억한다. 청계천에서 동대문 운동장으로 밀려난 상인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서울은 1도 신경쓰지 않았다. 서울은 터미네이터다. 서울은 글래디에이터다. 미래로 나아갈 뿐이다. 거슬리는 과거는 모두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끊임 없이 베고 찌르고 썰어넘기며. 불쌍한 존 코너는 코너에 몰린다. "아 윌 비 백." 그러나 늙은 상인들과 그들의 잡동사니들은 운동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서울은 곰팡내를 참는 법이 없다. 그들이 생계를 이어가던 자리엔 모던 아트의 극치인 건물과 좋아요를 쓸어담는 간지나는 패피들이 들어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들의 착장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좋아요 숫자 만큼 비쌌다. 그렇다. 서울의 쇼윈도엔 명품이 아니면 걸릴 수 없다. 도시의 지하, 출근길 2호선 열차 안에는 한데 엉켜 메트로 병천순대가 되어버린 군중이 옮겨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신대륙의 흑인 노예들처럼. 지상 위에는 그들의 연봉을 에누리 없이 4, 5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겨우 구매할 수 있는 슈퍼카들이 내처달린다. 해를 받아 반짝이는 은색 앰블럼들이 심장에 꽂은 말뚝같다. 병든 도시. 한강은 그 사이를 길게 째진 흉터처럼 흐른다.
아동문학가 김정현 '동시다오' 전시회
전시제목 : 김정현 개인전 '동시다오' 전시장소 : 경남 김해시 가야테마길 161 김해가야테마파크 철광산공연장1층 작은문화마당 전시기간 : 2021년 9월 17일(금) ~ 2021년 10월 ----------------------- 시인이자 아동문학가, 인플루언서로 활동중인 김정현 작가의 전시회 '동시다오'가 열린다. 오는 9월 17일 시작해 10월 31일까지 45일간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가을 나들이 장소로 좋은 김해가야테마파크내 철광산 공연장 1층 작은문화마당에서 개최된다. ​ 이번 전시회는 '그림이 있는 동시'를 주제로 한 동시화전으로 진행되는데 사진이나 그림, 캘리그래피 등의 전시회는 많지만 동시를 테마로 기획된 전시회는 처음이어서 더욱 뜻깊은 전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시회 제목인 '동시다오'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 전래동요 '두껍아 두껍아' 노래 가사 중 '헌집 줄게 새집다오'라는 노랫말에 '동시'를 넣어 부를 때의 어감과 각인성이 좋은 '동시다오'가 되었다고 한다. ​ 작가는 "코로나19로 힘든 시기, 피로하고 지친 마음을 동심으로 치유하는 전시회가 되길 희망하며 어른은 맑은 아이의 심성을 되찾고 아이는 부모님과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을 간직하는 뜻깊은 전시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김해장유신문 기자 임현아 yasi407@naver.com #김해가야테마파크 #김정현 #아동문학가 #동시다오 #동시화전 #동시 #시 #전시회 #개인전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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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지원금이 모든 곳에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늘 하던 대로 나는 카드를 긁을 뿐인데 재난지원금에서 차감되는 경우도 있고, 평소처럼 내 돈이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문득 내가 정부와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엔 내가 살게, 이번엔 네가? 정부와의 더치페이. 나 지금 뭐라니. 연말이 다가오면 다음 해의 계획들을 세우곤 한다. 새로운 종목들을 계획하기도 하고, 늘 하던 것들의 테마를 정하기도 한다. 일단 많이는 아니어도 꾸준히 하고 있는 독서의 내년 테마는 고전 읽기다. 내년은 독서에 한해서 ‘고전 읽기의 해’로 정했다. 고전, 그리고 세계문학을 중심으로 읽기로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예외사항을 두자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책은 별개다. 한마디로 내년 독서 테마는 정확히 ‘고전 읽기와 책장 파먹기’다. 이를테면 냉장고 파먹기 같은 거다. 일단 있는 거 읽자, 이런 거다. 갖고 있는 책들을 읽어버리고 빨리 좀 치워버리고 싶은데, 그러니까 책장에 딱 이번 달에 읽을 책 정도만 놓고 싶은데 당최 그게 안 되네. 책장과 책상에 책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이게 다 호기심 탓이다. 아니 이런 책이 나왔네? 뒤적뒤적. 아니 이런 책도? 뒤적뒤적. 자자, 이제 그런 건 당분간 그만. 사실 지금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지금 읽고 있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이후로는 ‘고전 읽기와 책장 파먹기’ 돌입이다. 운동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종목인데, 코로나 4단계로 인해 중간에 pt가 어중간하게 끝나고 다소 게을러진 측면이 있다. 하지만 현재 일주일에 적어도 이삼일은 센터에 가려고 하고 있고, 비가 오지 않는 이상 자전거는 꾸준히 타고 있다. 또 홈트도 적게나마 하는 중이고. 올해 운동을 시작했으니 이제 내년 운동의 테마를 정할 건데, 사실 유도를 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크로스핏에도 관심이 간다. 나는 크로스핏이라는 것이 그냥 조금 변형된 헬스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무지가 무서운 거다. 우연히 지인과 안부를 묻다가 그녀가 요즘 크로스핏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해서 이것저것 좀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그룹 운동이다 보니 요즘 운동 메이트가 필요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좋은 운동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고, 또 종합적으로 체력을 기를 수 있으니 운동을 편식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관심이 많이 생기고 있다. 일단 내년 운동은 크로스핏으로 시작해볼까 한다. 물론 변수는 늘 염두에 두고. 마지막으로 이건 장기 프로젝트 느낌으로 생각 중인데, 크게 색다른 건 아니다. 내년부터는 영어를 좀 공부해보려고 한다. 사실 영어 공부는 2017년에도 시도하다 실패했고, 작년에도 시도하다 실패했다. 방법은 모두 달랐었다. 영어를 효율적으로 습득하는 방법 중 나에게 맞는 것은 무엇일지 참 여러모로 고민했다. 기초 회화책 한 권을 우선 다 외워보려고도 했었고, 미드를 통해 해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결국 다 지쳐서 떨어져 나갔다. 물론 의지의 문제이지만. 우선은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영어를 통해 새로운 직업을 가지려고 한다거나 스펙을 쌓으려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좋지만 그 자체가 최종 목표라면 더 쉽게 지칠 듯하다. 좋은 직업을 가지려고 영어를 공부한다면, 혹시나 결국 좋은 직업을 갖지 못했을 때는 얼마나 좌절감이 클 것이며, 또 요즘 세상에 영어 하나 좀 잘한다고 갑자기 인생에 대반전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다. 나는 그냥 영어를 취미 삼아 하고 싶다.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더 쉽게 지치는 일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선은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싶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고, 어쨌거나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다 보니 외국어에 순수한 호기심이 이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모국어, 그러니까 한국어를 의사전달의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언어가 하나의 악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 모두 한국어를 쓰지만 그것을 똑같이 연주하고 있지는 않다. 한국인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표현하면 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우스운 일이 아니다. 분명히 유창한 사람들이 있다. 모국어를 몇십 년 연주해본 경력으로 새로운 악기를 연주해보고 싶은 거다. 실제로 영어 공부에 대한 학습법 중 문법보다 발음에 치중하여 무작정 따라 해 보는 식이 종종 눈에 띄는데 내가 모국어를 습득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게 맞기는 하다. 우리가 문법을 따져가며 말을 배웠던가? 그저 주변의 한국어를 쓰는 많은 사람을 흉내 내며 여기까지 온 거다. 물론 여기에 맹점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미 완전히 모국어에 익숙해진 선입견으로 가득 찬 나의 뇌가 미국도 아닌 한국에서 외롭게 영어를 시작한다는 것은 백지의 상태인 유아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자연스레 언어를 흉내 내볼 수 있는 환경도 아니며, 다시 말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뇌가 이제는 너무 언어에 대한 선입견으로 굳어져 있으니까. 그래서 사실 기초 회화책 한 권을 우선 외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면 일단 기본적인 데이터는 가지고 있어야 응용의 가능성이 생기니까. 나는 여기서 또 엉뚱하게 얼마 전부터 인공지능이 떠올랐는데 가령 인공지능과 사람은 동물인 개의 사진을 보고 둘 다 개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의 경로는 좀 다르다. 인공지능의 현재가 다시 어디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몇 년 전에 본 기사에서 인공지능이 개를 판단하는 경로를 설명하기를, 우선 아주 다양한 개의 사진을 인공지능에 주입한다. 인공지능은 판단하기 시작한다. 눈이 두 개 있고, 여기쯤에 코가 있고, 귀가 있고, 색은 어떠한지 등등. 인공지능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데이터의 평균을 내서 이것은 개라고 인식하는 과정에 이른다. 그러니까 개의 사진 자료가 인공지능에 계속 쌓일수록 개를 판단하는 확률은 높아진다. 그러나 다만,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인공지능이 실수하도록 의도적으로 개와 아주 비슷한, 초콜릿이 박힌 비스킷 사진을 가져다 두면 인공지능은 그 오묘한 비스킷을 두고 개라고 판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데이터가 쌓이면 그러한 오류는 줄어들 거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사람은 사진을 보고 개를 판단할 때, 보자마자 이건 동물인 개구나, 라고 하지 눈이 이렇게 있고 귀와 코가 여기 있고 그러니까 이건 개구나, 라고 하지는 않는다. 개와 얼핏 비슷한 비스킷을 보고 개라고 착각하지도 않는다. 따져볼 필요도 없는 거다. 보면 바로 아는 거다. 외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는 나도 그 나라 사람과 비교하면 인공지능일 뿐이며, 심지어는 속도도 느리고 학습을 방해하는 방대한 데이터까지 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차피 내가 지금부터 외국어를 배운들, 오늘 태어난 그 나라 아이와 속도가 같을 수는 없을 거라는 거다. 나는 이것을 인정하고, 우선은 인공지능이 개의 수많은 사진을 학습하듯 일단은 기초 회화의 암기를 다시 한번 해볼까도 생각 중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어를 정말 잘하는 외국인들을 볼 때, 그들이 아무리 한국인처럼 말해도 이상하게 한국인 같지는 않다. 특유의 목소리 문제인지, 이미 굳어버린 그들만의 억양의 문제인지 어쨌든 아무리 유창해도 외국인 같기는 한 거다. 언젠가 한 한국 드라마에서는 일본말을 하는 배우가 나왔는데,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한국인이 일본어 연기를 한 것인가 싶다가도 이상하게 느낌이 왔다. 저건 한국인의 일본어 연기가 아니라 일본 배우인 것 같다는 느낌. 찾아보니 정말 일본 배우였다. 그러니까 사실 언어라는 것은 단순히 언어의 완벽한 습득에서만 오는 게 아니고, 아주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문화나 그로 인해 정착된 느낌에서도 오는 거라는 생각. 내가 아무리 영어를 완벽하게 습득해도 결코 미국인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내 목적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외국인이 거문고나 아쟁을 연주한다는 느낌으로, 다른 나라의 언어를 한 번 연주해본다는 느낌으로 모국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도 한번 연주해보자는 마음으로 임하려고 한다. 물론 처음에는 성능이 떨어지는 인공지능처럼 굴어야 할 최소한의 필요는 있겠지만. 내년 계획을 다 세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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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을 읽을 거다. 표지에는 유숙자 옮김 이라고 적혀 있다. 옮긴다니. 재밌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물건을 옮기는 것처럼. 역자인 유숙자가 무거운 철근이나 시멘트를 나르듯 낑낑대며 크고 무거운 소설을 옮기는 상상을 한다. 일본어 위에 놓여 있던 소설을 한국어 위에. 팔뚝에 돋는 핏줄. 역자의 또 다른 자아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안전모를 쓰고 또 다른 자신에게 지시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자자, 유 씨. 좀 더 힘을 냅시다. 나는 번역이라는 것이 일종의 연주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번역가는 거칠게 이분하자면 원서를 최대한 살리는 사람과 출간 국가의 문화적 실정을 고려하여 나름대로 의역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예전에는 전자가 가장 이상적인 번역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꼭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 것이 말 그대로 번역이 연주라고 생각하면 역자 나름의 해석을 따라 번역서를 읽는 것도 즐거운 독서 체험이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신뢰할 만한 역자라는 전제하에. 생각해보자. 쇼팽의 같은 곡을 루빈스타인, 글렌 굴드, 조성진 등의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한다는 건 각자 다른 해석의 쇼팽이지, 피아노 좀 치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똑같이 쇼팽의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번역 또한 그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숙자가 자신의 모국어이자 한국어로 연주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앞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 얼마나 거듭 번역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는 같은 작품의 여러 다양한 번역본을 통해 원서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 무조건 원서 그대로만 고집하고 싶다면, 차라리 번역본에 기대지 않고 그 나라 언어를 직접 공부해서 정말로 원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다. 좀 다른 얘기지만 번역은 시대가 변할 때마다 개정되어야 한다. 독자 또한 시간과 의욕이 허락한다면 개정된 번역본을 재독해볼 필요가 있다. 언젠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옛날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가독성이 너무 떨어져서 힘들었다. 믿을 만한 출판사였는데도 그랬다. 바뀐 시대 탓도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오래전 랭보의 시집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하필 엉터리 번역본으로 읽었다가 굉장히 실망한 적이 있는데 그건 사실 랭보의 문제라기보다는, 명백히 역자의 문제였던 거다. 잘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이기도 했고. 번역서를 읽을 때에는 신뢰할만 한 출판사와 역자인지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체력과 시간은 소중하니까. 고작 체르니 100번을 겨우 뗀 듯한 연주자가 쇼팽을 연주해서 내놓는 불상사가 있을 수도 있는 거다. 연주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티켓을 사서 객석에 앉은 사람은 무슨 죄겠나. 어리석은 관객이 오판하여 연주자가 아닌, 곡에 불만을 품는다면 쇼팽은 또 무슨 죄겠는가. 덧붙여 시와 소설의 번역본인 경우, 소설가가 번역한 소설, 시인이 번역한 시는 또 특별한 맛이 있다. 소설가 김영하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라든지, 마찬가지로 소설가인 김연수가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 시인 김정환이 번역한 셰이머스 히니의 시전집,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김혜순이 참여한(아마 윤문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은) 세사르 바예호의 시집 같은 것들. 이런 작업들은 정말로 연주의 영역으로 느껴진다.
너는 비와 함께 나를 찾아와.
#금귤노트 #오늘의나에게안녕 ⠀ 비가 내리는 날 유독 네 생각이 나. ⠀ 오늘 비가 내렸죠. 비가 창문을 톡톡 두드리면 나의 마음도 두드리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잊었던 과거의 추억들이 떠오르기도 하죠. 여러분은 비가 내리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 한때는 소중했던 나의 모든 것이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 ⠀ ─── ⠀ 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날, 나는 너를 생각해. 쏟아지는 폭우와 비에 젖은 흙냄새를 좋아했던 너. 작은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걸었던 그 길을 기억해. ⠀ ⠀ 이제는 몇 년 전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너와의 추억이지만 그때의 거리와 그때 우리의 모습 그리고 그 감정들은 아직도 기억이 나. 나는 사람이 향기로만 기억되는 줄 알았는데 계절로도 또는 하나의 단어로도 기억에 남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 너는 나에게 여름철 비와 같은 사람이었네. 생각해보면 나는 여름철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부터 비를 좋아하게 되었어. 아마도 너로 인해 좋아진 것 같아. ⠀ ⠀ 그래서 비가 내리면 네 생각이 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내 마음속 깊이 묻어둔 기억의 상자가 열리는 것 같아.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너와의 추억도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는 날은 너로 시작하는 하루 같아. ⠀ ⠀ ─── ⠀ ⠀ 다음 주에도 내내 비가 내린다고 하네요. 추억에 잠기는 것도 좋지만 과거에 빠져있는 것보다 현재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https://youtu.be/E3NZPrpTG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