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crew
10,000+ Views

SNS속 핫플레이스: 플래그십 스토어★


안녕 크루들~

요즘 삼청동이나 한남동에 가면 정말 많은 전시가 있고 또 고가의 입장료 전시가 존재하지!

하지만 정작 인싸들은 돈이 안드는 전시장을 간다고 하던데??
바로 브랜드 매장의 끝판왕이자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플래그십 스토어!

지금 어떤 브랜드들이,어떤 플래그십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는지 알아보자고!
멈춰~~~~ 우선 플래그십 스토어가 뭔지 알아야겠지?
팝업스토어가 아주 짧게, 단기간 브랜드 특징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플래그십 스토어는 브랜드의 성격과 이미지를 극대화한 매장이라고 생각하면 돼!

첫번째는 레깅스 열풍이 불면서 국내 레깅스의 원탑 자리에 오른 안다르!
지하 1층, 지상3층 규모로 삼청동 분위기에 맞춰 한국적인 정서와 여유를 느낄 수 있게 목조 건물로 건축되었어! (그건 나도 안다르!! 미안…ㅋㅋ)

여기는 지하1층, 홍차와 프리미엄 티를 즐길 수 있는 ‘티 라이프 라운지’인데
혹시..아메리카노는 없나요? ㅎㅎ

3층의 ‘라이프 파지티브 스튜디오’에서는 요가와 필라테스 관련 클래스를 진행 한다고 해!
삼청동 뷰가 펼처친 공간이라…캬~ 뷰 구경하다가 운동 끝날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ㅋㅋㅋㅋ

2층은 매주 출시되는 안다르 제품이 마련된 리테일 공간이야~
하지만 2층이 핫한 또 한가지 이유가 있지! 바로, 셀프 사진관이야! 오~~~~~
안다르 제품을 직접 착용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 할 수 있어.. 대박..가야지 가야지~

두번째는 국내 핸드크림3대장 중 하나인 탬버린즈!
이솝, 논픽션과 함께 가장 핫한 핸드크림 브랜드인 탬버린즈는(르라보 미안해…) 첫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신사동에 이어 도산공원에 두번째 플래그십 스토어가 생길 정도로 지금 가장 핫한 브랜드라고 할 수 있지!!

오~ 깔끔한 인테리어에 음.. 저 눈사진 때문에 다OO안경점이라고 착각이 드는 건 나만 그런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두둥..! 등장! 이게 그 유명한 제주도 성이시돌목장에서 데려온 말!
은 아니고 진짜 말처럼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모형이라고해..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서 놀라 소리쳤었지…ㅋㅋㅋㅜㅜ
아직 안가 본 크루가 있다면 추천추천!

저기 보이는 000과 416, 218, 7 다 갖고 싶다 ㅠㅠ…킁킁
탬버린즈는 제품명을 숫자로 표기하더라구! 참고참고!

선글라스하면 떠오르는 브랜드, 젠틀몬스터!
서교동 홍대에 위치한 플래그십스토어가 1년여 기간 꽃단장을 마친 뒤
LIKE 박물관? 처럼 요즘 느낌으로 갬성있게 변신했지! ㅎㄷㄷ 또한 가장 핫한 브랜드 탬버린즈와 같이 ‘하우스 도산’에 두번째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했어!

오..뭔가 체스하다 뛰쳐나온 나이트를 표현한거 같군…(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ㅎㅎ)

이건 젠틀몬스터의 김한국 대표가 쇼핑을 할 때 로봇이 걸어다니면 어떨까? 라는 질문에 1년 여의 연구 끝에 6족 보행 로봇을 만들었다는데.. (입김 한번 장난 아니다…)
현재는, 인스타셀럽들의 사진 맛집이라 불리며! 주말마다 긴 줄이 이어지지…ㅠㅅㅠ

지하에는 디저트 ‘누데이크’를 판매하고 있어! 들어본 크루들도 있을 거야!
괴상한 비쥬얼을 하고 있지만 내놓는 족족 품절!! (난 언제 먹어보나….)

도산공원에 위치한 패션브랜드 준지의 다크다크한 플래그십 스토어!
준지하하면 떠오르는 색감은 블랙이지? 그래서 준지는 ‘암흑물질’ 컨셉으로 건축을 했다고 해!
준지 매장보다는 카페와 공중에 떠있는 나무 덕에 더 유명해졌지!

바로 그 나무가 이거야! 내가 가본 결과 인조 나무는 아닌거 같더라구!
그리고 요즘 이 나무를 카피해서 인테리어를 하는 카페들이 정말 많이 늘어 났다고 하더라고…
(내가 카페 이름은 안 밝히겠어~ㅡ..ㅡ)

여기는 카페 내부 공간인데! 무슨 고급 레스토랑 같지?

벌써 세번째 플래그십스토어를 오픈한 아더에러!
오늘은 성수에 위치한 아더에러의 두번째 플래그십스토어, 아더에러2.0을 알아볼거야!
2.0의 컨셉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우주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을 텐데, 가본 크루들은 알겠지만 정말 센세이션할 정도로 잘 표현 했어!

처음 등장하는 곳은 거대 ‘싱크홀 룸’이야
여기에서는 폭탄 맞은 듯한 바닥과 백남준 선생님이 생각나는 비디오아트가 존재해!ㅋㅋ
이건 시작에 불과해~

여기서 사진을 잘~~보면 알 수 있는데 저 우주선 밑은 물이야..정말 빠르게 물이 흐르는데..
난 좀 무섭더라구…ㅋㅋㅋ (근데 정말 빨ㄹㅏ)

여기는 우주선 내부의 침실이 아니라!
피팅룸이야! 대박이지? ㅋㅋㅋㅋ 쇼룸에 온건지…영화 세트장에 온건지… 정말 헷갈리더라구
난 사실 잠깐 침대에 누워있었어…훗…


여기까지 브랜드들의 아이덴티티를 확인 할 수 있고 또 어떻게 표현 했는지
알 수 있는 체험형 공간인 ‘플래그십 스토어’를 알아 봤어~~

소개한 브랜드 이외에도 정말 많은 브랜드들이 너나 할거 없이 플래그십 스토어를 만들고 있고 계획에 있다고 하더라구 그만큼 소비자들과의 소통을 강조하려고 하는거 같아!
(많아지면 우리야 좋지 ㅎㅎ.. 나랑 갈사람~?~??~!)

우리 크루들은 오늘 컨텐츠를 보면서 어떤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가장 가보고 싶어졌어~?
8 Comments
Suggested
Recent
와 데이트 코스 각 이거 무조건 저장 각이다
@beoo8 데이트 100% 성공 예상!ㅎㅎ
이시국만 아니면 ㅠㅠ
@skfksduwk777 하루빨리 잠잠해지길..기도합니다...ㅠㅠ
안다르 분위기 무엇..? 꼭간다🏃‍♀️🏃‍♀️
@choeeeee 삼청동 투어는 덤으로! ㅎㅎ
나중에 여자친구랑 가볼게요! 생기면...
@hahama127 꼭 가실 수 있게 기도해드릴게요🙏🏻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이탈리아 패션의 부상(浮上)
주말에는 역시 논문 특집이죠. 생각해보면 궁금한 주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어째서 하필이면 이탈리아가 프랑스 외의 패션 대국으로 떠올랐냐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사진부터 얘기를 하자면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중 하나인 엘리오 피오루치(Elio Fiorucci, 1935-2015)의 “패션 읽는 법/Come leggere la moda”이며,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촬영했다. 사실 이 사진에 이탈리아 초기 패션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사진 자세히 보면 미국과 영국의 유명인사들이 정가운데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국가로서 이탈리아 패션 산업을 일으킨 곳이 미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를 어쩌면 능가할 수도 있었을 이탈리아가 그냥 프랑스의 경쟁국에 머물고 만 것은 스스로의 분열에 있었다. 문제의 논문은 아래 링크에 있다. Exploring the marriage between fashion and ‘Made in Italy’ and the key role of G.B. Giorgini(2020년 9월 30일) :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09654313.2020.1833842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 시작은 무솔리니다. 그의 파시즘이 갖는 핵심이 민족주의이고, 그에 따른 산업의 이탈리아화 관점에서 패션 부흥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프랑스만 쳐다보고 있는 이탈리아 패션계를 바꾸기 위해 1932년 Mostra Nazionale Permanente della Moda (EAMNPM, 국립패션위원회..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를 토리노에 설립하고 각 패션 업체들에게 만드는 옷의 25% 이상이 “이탈리아”스러워야 한다면서 사진과 패브릭 샘플을 제출하도록 명령한다. 정부가? 옷 사진과 패브릭을? 판단해? (대충 김성모의 그 짤) 무솔리니 정부는 나름 오뜨 쿠튀르 업체들에게 금장(marca d’oro)도 주고 했지만 업체들이 순순히 따를리 만무했고, 이탈리아 업체는 물론 잡지들은 여전히 최신 파리 패션 동정을 보고 배우고 보도했었다. 그래도 이런 노력 덕택인지 조금씩 패션 스타일의 국산화가 시작된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때마침 페라가모(미국에서 이탈리아로 역이동한 특이 사례이다)와 구찌, 푸치(Pucci)와 같은 브랜드들이 지명도를 쌓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쟁 직후, 원래 EAMNPM이 있던 토리노는 민관이 합작하여 이탈리아패션위원회/Ente Italiano Moda(EIM)을 세운다. 토리노를 이탈리아 패션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피에몬테가 그렇게 한다 이거지? 롬바르디아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즉, 밀라노도 이탈리아패션센터/Centro Italiano Moda(CIM)를 만든다. 다만 토리노가 먼저 선빵을 날렸으니, 밀라노에게는 우군이 필요했다. 로마다. 그래서 CIM은 첫 패션쇼를 밀라노가 아닌 로마에서 1949년 4월에 하고 그 외에는 1950년 4월에 취리히에서, 1950년 9월에 베네치아에서 개최한다. 이러니 로마는 생각했다. 우리도 하나 만들면 되겠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부터 로마는 미국 영화 스타들의 결혼 장소였다. CIM이 패션쇼를 개최한지 딱 한 달 뒤, 로마는 이탈리아 패션위원회/Comitato della Moda (CM)을 설립한다. 이때 어지러운 이탈리아 천하를 통일한 영웅이 홀로 나타나시니… Giovanni Battista Giorgini (1898–1971) 후작이다. 원래 토스카나의 물건들을 미국 백화점에 수출하는 일을 하던 그는 1951년 피렌체 패션쇼를 기획하면서, 토리노나 밀라노, 로마도 아닌 피렌체(토스카나에 있다)를 패션 수도로 삼고 외세를 불러온다. 미국이다. 그는 이탈리아가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종목이 패션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피렌체에서 기획한 패션쇼에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몬트리올의 거물들을 이탈리아로 초청했고, 이탈리아에서 지금도 보기 쉽지 않은 거의 완벽한 영어 가이드를 제작했으며, 여기에 참여하는 이탈리아 의류 업체들에게 조건을 붙였다. 이탈리아 전통에 맞는, 프랑스 풍을 찾을 수 없는 스타일만 주문한 것이다. 1952년 피렌체 패션쇼 후, 바이어들이 드레스를 살펴보고 있다. 출처, POLIMODA CELEBRATES THE 70TH ANNIVERSARY OF THE FIRST ITALIAN FASHION SHOW :https://www.polimoda.com/70-years-ago 피렌체 시와 토스카나 지자체 또한 적극적으로 그를 돕는다(뭔가 당연하게시리 이탈리아패션 피렌체 센터Centro di Firenze per la Moda Italiana도 설립된다.. 게다가 미국 패션 언론들도 잔뜩 모셔온 그는 이탈리아 패션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 결과가 아무래도 1952년 라이프 지의 이탈리아 패션 특집일 것이다. 오뜨 쿠튀르만이 아니라 부티크 장르(프레타 포르테와 오트 쿠튀르의 사이쯤?)를 내세운 것도 특히 주효했다. 1952년 4월 미국 라이프 지, 이탈리아 패션 특집이었다. 출처, Life Magazine, April 14, 1952 - Italian fashions :https://oldlifemagazine.com/april-14-1952-life-magazine.html 당시 때마침 미국에서 프랑스 패션이 너무 고가인지라 가격대가 좀 더 저렴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패션을 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시 어디를 가도 근본이 있어 보이는 이탈리아이고, 피렌체 하면 메디치 아니겠나. 본인이 귀족이기 때문에(만초니 가문과 관련 있다) 귀족 자제들을 모아서 별도의 이벤트나 패션쇼를 하니, 근본 있는 귀족 좋아하는 미국은 이탈리아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가격 경쟁력이 중요했다. 가령 당시 오트 쿠튀르 한 벌을 파리에서 맞추면 500 달러 정도 할 텐데, 이탈리아에서 맞추면 90에서 150 달러 정도밖에 안 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디오르가 미국에서도 옷을 제작하는 바람에 자기가 남편 비서와 비슷한 옷을 입을까봐 두려워한 미국 사모님들이 이탈리아 옷을 사재기 시작했다. 결과가 그대로다. 1960년이 넘어가면 미국에 대한 패션업 수출량에 있어서 이탈리아는 프랑스를 두 배 가까지 추월한다. 그러나 그 영광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이탈리아답게(…) 다시금 도시들 간 내전에 돌입하기 때문이었다. 패션업계 길드(!)가 차례로 성공하는 걸 본 이탈리아 다른 도시(가령 팔레르모나 나폴리)들도 패션센터를 만들기 시작했고, 토리노는 피렌체로부터 왕좌를 빼앗기 위해 밀라노와 연합한다. EIM과 CIM이 합세하여 피렌체를 몰아내기 위해 해외 업체/언론과 직접 연락하기 시작했고, 피렌체 패션쇼에 각자 소속 업체들이 불참하도록 독려한다. 물론 호락호락 당할 피렌체는 아니었으나, 결정적인 한 방은 로마로부터 나왔다. 로마가 토리노-밀라노 연합에 합류한 것이다. 이쯤 되면 피렌체가 동탁이 되어버렸다. 로마의 오뜨 쿠튀르 업체들(좀 알려진 곳이라면 폰타나 시스터즈/LE SORELLE FONTANA와 시모네타/Simonetta?)이 별도로 이탈리아하이패션협회/Sindacato Italiano Alta Moda(SIAM)를 설립한다. 이들이 어떻게 피렌체를 공격한다? 피렌체 패션쇼에 참석한다고 해놓고서는 이틀 전에 자기들끼리 패션쇼를 로마에서 개최하니 어떻게 보면 더 영악하다. 밀라노는? 1955년부터 피렌체에 불참했다. 사실 밀라노도 매우 중요했던 것이, 밀라노의 패션 업계 뒤에는 텍스타일을 공급하는 산업단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도 피렌체와 커넥션을 끊으니, 피렌체의 이탈리아 패션 수도 역사는 10년을 못 갔다. 결국은 이탈리아 중앙정부 주도로 1962년 국립패션협회/Camera Nazionale della Moda (CNM)가 설립되고, 지오르지니는 여기 협회장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되어 결국 하이 패션/오뜨 쿠튀르는 로마로, 프레타포르테 혹은 부티크는 토리노/밀라노로 갈라지게 되고, 이 인식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로마의 패션위크가 “Alta Roma/하이 로마”로 불리는 것이다. 다만 오트 쿠튀르의 비중이 적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탈리아 유일의 패션 수도 왕좌는 이제 밀라노가 가져가게 됐다. 로마의 Fernanda Gattinoni 아틀리에의 모습, 오드리 헵번이나 마를레네 디트리히 등 유명인사들이 애용했던 오트 쿠튀르이다. 출처, C’è ancora spazio per la moda a Roma?(2022년 7월 15일):https://www.nssmag.com/it/fashion/30407/moda-roma-valentino/image:419469 그래도 피렌체가 남긴 것이 있지 않느냐… 당연히 있습니다. 이탈리아 스타일을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해외, 특히 미국을 위주로 한 언론과 기업들을 챙긴다는 점이다. 이탈리아가 1950년대 패션업을 하나의 도시 위주로 크게 뭉쳤다면 이야기가 달려졌을 수 있겠지만, 이탈리아가 그럴리가 없… 여담 1) 여러 다른 큰 나라들을 볼 때, 중앙집중과 한 도시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는 측면으로 본다면 프랑스나 영국 외에 어디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나마 한국 아닐까 싶다. 여담 2) 전기자동차를 생각하면 자동차 부문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을 뛰어넘는 게임체인저 역할을 전기차가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해외 수출을 위주로 해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비교적 비싸지 않은 값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사례를 볼 때, 우리나라는 (국가든 기업이든) 중앙집중이니 아마 일본을 분명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병 안걸리고 오래 사는 가장 확실한 방법.jpg
우리나라 최고의 장수마을이라는 전라북도 순창군 이곳에 사시는 한옥금 할머니 100세 넘긴 나이에도 고된 농사일을 거들 만큼 정정하시고 기력이 좋으심 영상 보면 진짜 행동 민첩하시고 건강해 보이셔 딱히 유별난 건강 비결도 없고 그저 매 끼 규칙적으로 식사하시는 게 다임 소고기 육회나 뭐나.. 아무것도 안 가리시고 다 잘 잡수셔요. 근데 잡술 만큼만 딱 잡수지 맛있다고 많이 잡숫고 이런게 없어요. 한옥금 할머니의 식사량은 하루 1700 칼로리 정도 늘 정해진 시간에 이정도 식사량을 유지 교수님이 만난 600여명의 장수 노인들 가운데 비만인은 한 사람도 없었음 모두 군살 없는 마른 체형.. 일본 최고의 장수마을이라 불리는 오키나와.  최근 이곳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다는데.. 장수마을이라 이름난 이 마을의 평균 수명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는 것 그래프를 보면 늙은 사람들의 수명은 똑같은데 젊은 사람들 수명이 엄청 줄었음 젊은 사람들의 뇌졸중, 심장병, 암이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노인들의 경우에는 이 병들이 일본 본토 사람들보다 적게 발병했는데 젊은 세대에서 역전됐습니다. 오키나와의 당뇨센터에는 젊은 중장년층만 득실득실 비만성 당뇨로 인해 이 곳을 찾은 유키히로 씨 체중이 늘면서 혈당 수치도 많이 상승해 관리중이라고 오키나와는 당뇨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전국에서 가장 낮았었음 하지만 최근에는 전국 1위 달성...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 뚱뚱하고 병든 젊은이들과 날씬하고 젊은 오키나와의 노인들 그 차이는 식습관의 변화에서 시작됐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먹거리가 급격히 풍요로워지면서  언제라도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가 들어오며 패스트푸드점이 많이 생기고 폭발적으로 젊은 층의 비만이 늘게 되었죠. 유키히로 씨가 자기 할아버지를 소개해 주는데 유키히로 씨와 다르게 몸에 군살이 하나도 없으심 여느 젊은이 못지 않게 기력이 좋으시고 눈에 총기가 가득 92세의 나이에도 혼자서 밭 일구시고 트랙터 끄시고 그럼 할아버지의 식사는 소량의 밥과 된장국 생선 한토막 뿐 소박하고 열량이 낮은 오키나와의 전통 음식이다 충분히 먹었지만 배를 다 채우지 않고 항상 7~80퍼센트만 채우죠 오키나와의 장수노인들이 대부분 전통 식단과 소식을 고수해온 것과 달리 손자 세대의 식단은 대부분 열량 높은 패스트푸드다 유키히로: 햄버거 한두개로는 아무래도 부족하죠 서너 개 넘는 많은 양도 혼자서 다 먹습니다 일본 내 미군 기지의 70퍼센트를 담당하며 서구식 패스트푸드점이 범람하게 되고 소식 문화가 사라지면서 장수마을의 명성 또한 함께 사라져 가고 있다 장수 노인들은 대체로 칼로리 섭취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체중 1키로당 20에서 21칼로리 정도의 열량을 섭취하는 사람이 장수한다는 것입니다. 체질량지수(BMI) 22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장 수명이 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적인 노화 학자인 유병팔 교수는 동물 실험을 통해 소식의 효과를 확인한 바 있다. 자유식을 한 쥐보다 적게 먹은 쥐들이 수명 30퍼센트가 늘고 질병 발생 확률도 훨씬 낮은 것으로 나타남 이런 차이는 왜 나타나는 것일까? 소식한 쥐는 자유식 한 쥐에 비해 내장 조직의 기름이 적고 깨끗했음 간의 크기도 훨씬 작음 활성 산소량도 현저히 줄었는데 이는 노화나 질병 발생 가능성의 감소를 의미함 많이 먹으면 소화를 위해 산소가 많이 필요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활성 산소도 많이 발생함 이 활성 산소는 전자를 가진 세포들과 DNA를 마구잡이로 공격해서 손상시킴 이런 손상이 축적되면 질병이 발생하고 노화가 진행됨 위스콘신 대학교가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 열량을 제한한 원숭이가 외모에 있어서도 털이 풍성하고 윤기가 있었고 평균 수명이 30퍼 늘었음 당뇨 증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암 발생률이 50퍼 줄고  심폐질환도 일반 원숭이에 비해 50퍼 감소 늙어서 뇌 쭈그러드는 것도 감소됨 미국 NIA에서 50년간 추적조사를 실시한 결과 인간에게서도 이 결과가 똑같이 나타남 칼로리 제한의 이점은 오랜 기간 건강을 유지시켜주고 또한 수명을 늘려 주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활동적인 삶을 오래 유지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살고 싶다면 칼로리 제한을 권장합니다. 어떤 다이어트 자극 영상보다 더 뼈때리는 영상이라 울면서 캡쳐해옴 ㅎ.. 주의할 점은 소식=무조건 적게 먹는다가 절대 아님! 오히려 너무 적게 먹을 시 질병 확률이 더 올라간대 배부르게 먹지 않고 끼니때 정확히 맞춰서 먹는 게 포인트인듯,, ㄹㅇ 공감됐던 댓 하나 올리고 글 마무리함 출처
나뭇잎 마을 호카게급 돌려먹기였던 바둑의 정점 ㄷㄷ
세고에 겐사쿠 라는 일본 바둑기사가 있었음 일본의 기원을 창립한 사람들 중 한명이고 당대 최고의 바둑기사 중 한명이기도 했던 사람이었음. 이 사람은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평생 제자를 딱 3명만 뒀음 한중일 각각 딱 한명씩 오늘 이야기 해볼 이야기는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제자 이야기임 겐사쿠가 중국에서 한 미친 천재를 만나게 되는데 이미 12살 때 당대 최강이었던 일본의 바둑기사들을 상대로 이기면서 천재로 이름을 날렸고 겐사쿠는 이 천재를 보고 자신의 유일한 제자이자 첫번째 제자를 보내 1대1로 붙였는데 이 경기에서 13살 꼬마가 일본에서 소문난 천재였던 겐사쿠의 첫번째 제자를 압살하게됨. (첫번째 제자도 훗날 일본 원탑 중 한명이 됨) 겐사쿠는 이 소년에게 뿅가서 중국에서 일본으로 데려와서 제자로 삼는데 이 소년이 역사상 최고의 바둑기사 탑3에 드는 천재 '오청원'임 일본으로 건너가서 겐사쿠 밑에서 공부를 한 오청원은 당대 최강이었던 일본을 말 그대로 씹어먹음 어느정도였냐면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들이 20대초반의 오청원에게 찾아가 바둑을 두는일이 비일비재 했을 정도로 일종의 논외급 최종보스 역할이었음. 이 사람이 만든 전술은 훗날 현대 바둑의 기본기가 되어 그 토대 자체가 정석이 됨. 이런 개미친 goat를 제자로 둔 겐사쿠는 그 어떤 인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실제로 오청원 이후로 30년간 그 어떤 제자도 들이지 않고 살았음. 그리고 30년이 지나 한국에 또 한명의 개X라이급 천재가 탄생하는데 그게 바로 최후의 한명 한국의 제자 조훈현임 조훈현도 범상치 않았는데 무려 9살에 프로로 데뷔함. 조훈현도 일본으로 건너가 겐사쿠 밑에서 배우더니 13살에 데뷔. 신인왕도 먹으면서 승승장구 하더니 한국인의 족쇄 군대 때문에 한국에 귀국함 이때 겐사쿠의 상황이 중요한데 당연히 오청원을 키워냈기에 원로대접을 받았지만 겐사쿠의 라이벌 산하의 기사들이 일본 바둑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음. 그야 제자 자체가 셋뿐이니 당연한 일이었음 조훈현이 군대로 한국으로 귀국하자 제자를 빼앗겼다는 슬픔에 자살함... 바둑계가 충격에 빠졌던 사건이었고 조훈현도 이 충격에 침체기를 겪었음. 심지어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조훈현은 한국에서 텃세를 X나게 당해서 정말 순수 실력이 아니면 답이 없는 상황이었고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겐사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걸 몸소 증명함. 군대를 제대하고서 한국을 개같이 씹어먹더니 당시 한국은 바둑에서 약소국 취급이었는데 축구로 따지면 챔스인 '응씨배'에서 조훈현이 승패패승승으로 대반전 우승을 함 그리고 그 다음년도에서도 우승을 하고 한국을 넘어 세계최고 기사가 되었고 나아가 한국 자체가 바둑강국이 되어 먼 훗날 응씨배에서 한국인 기사가 우승을 휩쓸게 됨 그렇게 10년이 넘게 정상의 자리를 지킨 조훈현 한 제자를 받게되는데 그게 바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바둑기사 이창호임 (현대 바둑 한정 비빌자가 없음) 이창호와 조훈현은 단순한 스승과 제자 관계가 아니였음 조훈현의 집에서 이창호가 숙식을 같이하는 사실상의 양아버지였음. 11세의 나이에 프로데뷔를 한 이창호는 조훈현 인생에 단 두명 있었던 천재 였다고 함 자신의 사형인 오청원과 자신의 제자 이창호 이렇게 애지중지 키운 이창호는 청출어람을 시작함. 왼쪽이 당대 최고였던 조훈현 오른쪽이 그의 제자 이창호 15세 무려 최고였던 자신의 스승을 3대떡으로 이기며 조훈현이 갖고있던 타이틀을 하나하나 빼앗기 시작하고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압도당하기 시작하자 이창호와 조훈현은 양아들처럼 같이 살았기 때문에 차안에서 이창호와 조훈현 사이의 공기는 정말 적막했다고 함. 최고 전성기의 자신을 끌어내린 꼬마가 자신의 양아들이나 다름없는 이창호였기 때문에 스승으로써의 뿌듯함과 패배감과 섭섭함에 만감이 교차했다고 함. 일본과 중국의 정점이었던 조치훈 린하이펑 기사들과도 세계무대에서 만났지만 모두 이창호가 3대떡으로 발라버렸음. 당시 전성기의 승률이 90퍼센트에 육박할만큼 적수가 없었고 이 미친 사람은 그 기량을 무려 20년간 유지함 결국엔 조훈현을 무관으로 만들고 자신은 13관왕을 차지하며 완전한 세대교체를 이뤄버림 이 당시 승률이 아닌 출전한 대회의 우승 확률이 80퍼센트를 넘었음 훗날 이창호가 늙고 전성기가 지나 이세돌, 쿵제와 같은 다음 시대의 주역들이 등장 하기 전까지 무려 15년간 단 한차례도 세계랭킹 1위를 놓치지 않았음. 요약. 1940년대부터 1970년대의 정점 오청원 1970년대부터 1990년대의 정점 조훈현 1990년대부터 2000년대의 정점 이창호 이 셋은 전부 영화같은 사제관계로 얽혀있다. +)여담으로 이 미쳐버린  조훈현 이창호를 딱한번 꺾고 우승한 무려 '여자' 바둑기사 루이나이웨이가 오청원의 제자임 ㅋㅋㅋㅋㅋㅋㅋㅋ 지구촌갤러리 강남대성수호자김구암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