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의 원숭이
내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는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지역 내에서 나름대로 유서 깊은 OO봉이라는 산봉우리가 하나 있다.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잘 가지는 않지만 전에는 운동 삼아서 자주 갔던 곳으로 오늘은 그곳에서 경험한 일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어느 날인가 운동을 하러 그 산으로 향했는데 가는 도중 날이 좀 덥기도 하고 귀찮다 싶어서 약수터까지만 갈 요량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산에 들어서면서 이상하게 정상 쪽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강한 이끌림이 느껴졌고, 정상까지 한번 올라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어 먹고 등산을 시작했다. 그렇게 길을 가는 도중에 희한하게도 평소와 달리 체력이 빨리 소진되어 등산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날따라 유난히도 호랑이, 뱀, 곰 등 동물령부터 시작해서 칼을 찬 산적 같은 영혼 등 정말 산에 거주하는 별의별 잡다한 존재들이 정상에 다가갈수록 나를 방해하고 괴롭히고 지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귀처럼 물어뜯는 존재들을 하나하나 치우고 떼어내면서 올라가는 것이 정말 고역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이 예사롭지 않은 상황을 나에게 새로운 힘이 주어질 계기로 생각하거나 높은 영역에 속한 수련을 도와주는 존재의 계시 같은 걸로 철썩 같이 믿고 죽을 힘을 다해서 산을 올랐다. 평소에 약간 게으른 면이 있던 내가 그런 의욕을 가지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산 중턱을 넘어설 무렵 약수터에 거주하고 있는 건지 좋지 못한 기운을 내뿜는 이무기가 나타났는데 정상까지 올라간다면 무사치 못할 것이라는 되도 않는 협박을 해서 과감히 한 방 먹이고는 재빠르게 정상으로 향했다. 온갖 역경을 딛고 정상에 올라섰을 때, 그곳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성스럽고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빛으로 이뤄진 어떤 신성해 보이는 존재였다. 그 존재는 빛을 발하며 내 쪽으로 다가와서는 "네가 좀만 더 수련이 되었으면 내 모습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을 텐데..." 하고 아쉬운 듯이 말하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가지고 있는 물병을 내려놔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존재가 내뿜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압도된 나는 시키는 대로 땅에 물병을 내려놓았다. 조금 뒤에 갑자기 하늘에서 고요하면서도 눈부신 서광이 내려오는데, 잠깐이었지만 신성해 보이면서도 엄숙한 것이, 그때까지 온갖 잡다한 영들과 난잡하고 더러운 싸움을 벌이는 것이 일상이었던 내가 영적 존재와 접하면서 그렇게 성스러운 분위기를 느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곧이어 갑자기 잠잠하던 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치더니 내가 바닥에 내려놓은 물병을 향해 냅다 꽂히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병을 집어 들어 물을 들이켜 마시는데 신기하게도 온몸에서 전신의 탁기가 모여들어 내 자신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고 그 탁기 덩어리가 앞쪽에서 불어 닥치는 바람에 덧없이 씻겨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이윽고 그 존재가 내 심장에 손 같은 것을 집어넣어 기다란 기생충같이 생긴 것을 꺼내서 태워버리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수련자가 경지에 올라갈 때는 이런 것들이 말썽이다." 연이어 벌어지는 놀랍고 신기한 상황에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들뜬 기분이었다. 내가 멍하거나 말거나 빛으로 된 존재는 신경 쓰지 않고 나를 부른 이유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저기 산 아래쪽에 있는 약수터에 커다란 이무기 같은 게 있는데, 거기 있는 존재가 독기를 내뿜어 물까지 오염되고 주변의 존재들도 많이 힘들어한다. 내가 힘을 좀 빌려 줄 테니 그 존재를 퇴치해 봐라."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는 마치 요괴퇴치 의뢰마냥 아까 약수터에서 마주친 이무기의 퇴치를 부탁했다. 그 존재가 힘을 빌려주는 모양도 예사롭지 않았다. 내 몸에 커다란 검이 들어가고 검에 불길이 치솟으면서 동시에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육체가 갈라지고 불태워졌는데, 다시 새살이 돋아나 육체가 재구성되며 나의 미간에 벼락의 문양이 새겨졌다. 그렇게 힘을 받고서 산을 내려갈 무렵에는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홀린 듯이 올라왔던 코스가 아닌 처음 가는 생소한 길로 빠져버렸다. 사람이 자주 안다니는 길이라서 그런지 분위기가 이상했고 그 곳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겨우 큰길로 나와 간신히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내 방으로 돌아와 아까의 몽환적인 경험의 여운에 잠긴 채 한참을 누워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 이참에 수련을 하면 더 잘 될 거라는 생각이 스쳐 자리를 잡고 수련을 시작하였다. 시작하자마자 빨간 줄이 보였다. 줄이 인도해 주는 대로 따라 가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희한한 잡념이 떠올랐다. 늪에 빠져들듯 하염없이 그 잡념에 빠져들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정신을 차려 똑바로 쳐다보니 누군가 안대로 내 눈을 가려 놓고 있어서 안대를 태워버렸다. 가까스로 올라간 길 끝에는 이무기가 있었는데 신장들이 나타나서 이무기를 제압하더니 끌고 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 약수터에 뱀 떼가 뛰쳐나오고 아까 전에 산에서 봤던 서광이 약수터를 향해 비추어졌다. 정말 지금까지 쓴 부분만 본다면 기공하는 수련가나 영적인 능력자들이 누구나 겪고 싶어 할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겠지만 반전이 숨어있다. 수련을 하며 약수터에 있던 이무기를 제거하고 난 이후, 나름대로 한 단계 성장했다는 뿌듯한 느낌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중에 수련을 가르쳐 주시는 스승님이 한 번 수련하러 올라오라고 연락하셔서 찾아갔었다.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앞서 스승님께 내가 예전에 산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말씀드렸다. 스승님은 길게 말하지 않고 나에게 사기를 친 존재부터 제거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서야 깜빡 속아서 완전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승님이 직접 투시를 해보고 설명 해주시는데 마계 영역에 속한 존재가 나를 가지고 논 것이라고 말해주셨고 즉시 영력을 받쳐 줄 테니, 그 때 봤던 존재가 실제로는 어떠한 존재인지 직접 보라고 하셨다. 집중을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산에서 보았던 찬란한 후광을 등에 업은 신과 같은 존재는 온데간데없고 웬 갑옷 입은 원숭이 한 마리가 스승님의 힘에 제압당해 묶여있었다. 나는 스승님의 힘을 빌려 겨우겨우 원숭이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했다. 스승님의 말로는 보기엔 그냥 원숭이지만 내가 일말의 의심도 없이 감쪽같이 속을 정도로 교묘하고 매우 강력한 마계의 존재로 지금의 내가 스스로 이겨내기엔 버거웠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산에 올라갔을 때부터 느낀 이끌림, 빛의 존재에게 받은 힘, 수련하면서 이무기를 퇴치한 일 등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다 그 원숭이가 꾸민 쇼 같은 것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그 당시만 해도 나도 투시가 되고 기공능력을 조금 쓸 줄 아니까 이런 좋은 기회도 오는구나 하고 은근히 좋아하면서 바보 같은 착각을 했었다. 그때 만약 내가 조금만 더 깊게 공부가 되어 있었더라면 그 존재의 정체를 간파하진 못하더라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적어도 그렇게 철저하게 당하진 않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된통 당한 것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영적인 존재 중에는 사람을 속이고 아주 쉽게 가지고 놀 수 있는 강력한 존재들이 많다. 실력이 미숙한 수련가나 영능력자가 이런 존재들이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강력한 힘을 나눠주는 환상을 보여준다던가, 무언가 신성한 의무를 지우는 설화 속에서나 보았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면서 체험하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처럼 감쪽같이 속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걔 중에는 정말로 자신이 이제 깨달음에 이르렀다거나, 신의 계시를 받은 메시아라거나, 옥황상제라거나, 내가 어떤 계를 받고 선계의 무슨 수준에 이르렀다느니 하는 착각에 빠져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거나 이상한 길로 빠지게 되는 안타까운 케이스도 나오는 것이다. 영적인 존재에게 휘둘리며 꼭두각시 신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불가에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여 버리고, 조사가 오면 그 조사마저 죽이라"라는 말이 있다. 수련 중에 어떤 영적인 현상을 겪든 그 현상에 메이지 않고 무심하게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말로 제대로 된 수련가가 되고 싶다면 어떤 것을 보거나 느껴도 그 현상에 집착하지 않는 무심함을 갖추고, 언제나 속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염두 하며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 않는 겸허한 마음으로 수련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