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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마지막 영국인 총독 이야기

1842년부터 1997년까지 155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홍콩은 총 28명의 총독들이 거쳐갔다. 27명의 전임총독들은 군인출신이나 현지사정에 밝은 식민지 관청 출신들이었다. 
하지만 1992년 임명된 28대 총독 크리스 패튼(Chris Patten)은 이들중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과거 홍콩에 몇번 온 적은 있었으나 동아시아 정세에는 문외한이었고 광둥어조차 한마디 할 줄 몰랐다.

패튼은 1944년 랭커셔 지방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출신으로 태어났다. 현재도 그렇지만 영국에서 아일랜드계는 주류계층이 아니다. 하지만 패튼은 살을 깎는 노력으로 옥스퍼드 발리올 대학에 입학하여 차석으로 졸업하고 1979년 바스 지역구 의원으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80년대 대처와 메이저 내각 시기 그는 해외 개발부, 환경부 장관등을 지내며 정치 커리어를 이어갔다.
1992년, 패튼은 영국 보수당 의장으로서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정작 자신의 지역구에서는 패했다. 내각은 그를 재·보선이나 상원의원으로 임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메이저 총리는 그에게 홍콩의 마지막 총독 자리를 권했다.
그의 임무는 중국과 영국 간 체결된 반환 공동선언 내용이 최대한 잘 실현되도록 힘을 쓰는 것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가 100년 전 영국이 싸질러 놓은 똥을 치우러 가는 역할을 맡았다고 조롱했다. 홍콩시민들도 처음에는 그가 현상유지만 하다가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패튼은 임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홍콩의 여러 체제들의 개혁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선거개혁이다.
패튼은 먼저 홍콩 정치체제의 풀리지 않은 문제는 홍콩 입법회 의원의 선출 방식을 개편하고자 했다. 그는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정치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본래 홍콩의 선거제도는 1982년에 도입된 간선제였다. 실권을 대부분 총독가 가지고 있었고 구의원도 총독이 지명하는 식이었다. 선거인단도 대부분 지역유지들과 기업임원들 같은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들로 이뤄졌다.

패튼은 투표 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추고 전체 인구의 1/3에 달하는 270만 명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등 부분적인 직선제를 도입했다. 구의원 임명제는 아예 폐지해버렸다. 이 법안은 8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가결됐다. 1994년 실행된 입법국 선거에서 최초로 도입된 후, 1995년 선거부터는 홍콩의 평범한 노동자들도 선거 참여가 가능했다.
그가 이런 행보를 보인 이유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지 않으면 중국에 넘어간 홍콩인들이 피지배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아일랜드계로서 살아온 그로서는 ‘2등 시민’으로 사는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있었다. 지금 홍콩 사람들이 누리는 실낱같은 민주주의와 식민통치 시절의 좋은 기억은 패튼의 유산이다.
본래 총독들은 공식석상에서 견장과 칼이 달린 흰 제복을 입고 권위적으로 행동했다. 주민들과의 교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패튼은 전혀 달랐다. 그는 항상 양복을 입었고 경호원 없이 매일 아침 아내와 함께 거리를 산책을 하며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장애인 시설이나 저소득층이 사는 구룡, 신계지역을 자주 방문했다. 타이청 베이커리(泰昌餅家)의 에그타르트는 그가 좋아했던 간식이었다. 한번은  건물에서 난 화재로 수십명의 사망자가 나오자 직접 사고현장으로 뛰어와 유족들을 위로하고 사고수습에 고뇌하는 모습도 그대로 뉴스에 나왔다. 이런 친서민적인 행보 덕분에 홍콩 시민들은 패튼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그를 뚱보 팽(Fat Pang, 肥彭)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홍콩반환 직전까지도 그의 지지율은 70%가 넘었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홍콩은 아시아의 금융허브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고속성장을 거듭했고 부채문제도 깔끔했으며 외환 보유액은 사상 최고치였다. 패튼은 재정을 불려서 그 돈을 고속도로, 사회기반시설 확충에 쏟아부었다. 대표적으로 하드랜딩으로 악명 높았던 카이탁 국제공항을 대신하고 있는 현재의 홍콩 국제공항이 그의 재임시절 건설됐다. 홍콩영화를 통해서 많이 알려진 메트로폴리스의 모습은 사실 이 시절 완성된 것이다. 
배우자인 라벤더 패튼(Mary Lavender St Leger Patten)은 로펌변호사 출신으로 온화하고 이미지 덕분에 홍콩시민들에게 퍼스트레이디로 대접 받았다. 그녀의 내조는 조용했지만 효율적이었다. 패튼이 현지방문으로 대중들과 카메라 앞에서 웃고 친근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그녀는 항상 뒤에서 관계자들을 불러 재정적 지원과 후원등 실질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는등 남편을 도왔다. 수많은 병원이나 복지단체, 특수학교들이 그녀의 도움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패튼 부부에게는 케이트, 앨리스, 로라 총 3명의 딸들이 있었다. 그녀들 역시 부모를 따라 어린 나이에 홍콩에 와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홍콩반환년인 1997년 마지막 날까지 홍콩을 떠나지 않고 생활했다.  사진에 보이는대로 세명 모두 한 미모 했기때문에 홍콩시민들은 그녀들을 공주님처럼 여겼다.
그가 시행한 ‘민주적 개혁’은 중국 정부와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중국 공산당은 식민지 지배 종식에 앞서 혼란의 씨를 뿌리려 한다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천안문 사태 직후라 매우 민감한 상황이었다.

중국 관영 언론들은 패튼 총독을  “머리 둘 달린 간사한 뱀” “천년에 걸쳐 천벌을 받은 역사의 죄인”이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하지만 패튼은 중국이 뭐라 하건간에 홍콩의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위한 일이라며 개혁을 밀어부쳤다. 중국정부는 홍콩이 반환되면 이 조치들을 무효화할 것이라는 엄포를 놨다. (결국 반환 직후인 1998년 홍콩 입법국은 해산되고 중국에서 선출한 입법회가 구성됐다.)
홍콩 반환식 날의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절하다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총독관저의 국기 하강식에서는 비가 쏟아졌고, 접힌 유니언잭을 받아든 그는 북받친 감정을 억누르느라 눈이 붉게 충혈됐다. 이스트 타마르에서 열린 고별행사에서는 엄마대신 총알받이로 온 찰스 왕세자 옆에 앉아 행사를 지켜봤지만 견딜 수 없었는지 마지막에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는 고별사에서 "영국은 물러나지만, 홍콩인들은 영국이 남긴 민주주의와 자유의 유산을 고스란히 지켜나갈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패튼뿐만 아니라 아내 라벤더와 세 딸들도 반환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눈물을 흘렸다.
반환식이 끝난 직후 패튼은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찰스 왕세자가 타고 온 영국왕실 요트인 HMY 브리타니아(Britannia)호에 오른 그의 식구들은 홍콩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여담으로 찰스 왕세자는 이날 행사를 끔찍한 공산주의 인형극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정치에서 은퇴한 현재도 홍콩을 여러차례 재방문 했으며, 2013년 우산혁명과 2019년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중국의 정책은 법치가 아닌 공포의 통치'라고 비판하며 영국과 서방국가들이 이런 압제에 도움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총독 재직 당시 정신질환자로부터 “영국은 세계 최고(最古)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왜 홍콩인 의견을 묻지 않고 전체주의 정권에 홍콩을 넘기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홍콩에서 받은 질문 중 가장 완벽했지만 답을 할 수 없었다. 홍콩 민주화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민주주의를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거의 항상 바람직합니다.(Democracy is seldom predictable, but it is almost always desir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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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홍콩 ㆍ 썩어빠진 짱꼴라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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