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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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오전만 근무하면 다음 주까지 휴가다. 사실상 내일부터 휴가를 즐길 수도 있었는데 업무가 조금 남았다. 뭔가 조금 설레는데, 어떤 계획도 없다. 진정한 계획은 무계획이지! 내일은 도화지와 색연필을 꺼내 계획표를 짜야지. 물론 거짓말이다. 아, 뭐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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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을 읽을 거다. 표지에는 유숙자 옮김 이라고 적혀 있다. 옮긴다니. 재밌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물건을 옮기는 것처럼. 역자인 유숙자가 무거운 철근이나 시멘트를 나르듯 낑낑대며 크고 무거운 소설을 옮기는 상상을 한다. 일본어 위에 놓여 있던 소설을 한국어 위에. 팔뚝에 돋는 핏줄. 역자의 또 다른 자아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안전모를 쓰고 또 다른 자신에게 지시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자자, 유 씨. 좀 더 힘을 냅시다. 나는 번역이라는 것이 일종의 연주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번역가는 거칠게 이분하자면 원서를 최대한 살리는 사람과 출간 국가의 문화적 실정을 고려하여 나름대로 의역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예전에는 전자가 가장 이상적인 번역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꼭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 것이 말 그대로 번역이 연주라고 생각하면 역자 나름의 해석을 따라 번역서를 읽는 것도 즐거운 독서 체험이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신뢰할 만한 역자라는 전제하에. 생각해보자. 쇼팽의 같은 곡을 루빈스타인, 글렌 굴드, 조성진 등의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한다는 건 각자 다른 해석의 쇼팽이지, 피아노 좀 치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똑같이 쇼팽의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번역 또한 그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숙자가 자신의 모국어이자 한국어로 연주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앞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 얼마나 거듭 번역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는 같은 작품의 여러 다양한 번역본을 통해 원서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 무조건 원서 그대로만 고집하고 싶다면, 차라리 번역본에 기대지 않고 그 나라 언어를 직접 공부해서 정말로 원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다. 좀 다른 얘기지만 번역은 시대가 변할 때마다 개정되어야 한다. 독자 또한 시간과 의욕이 허락한다면 개정된 번역본을 재독해볼 필요가 있다. 언젠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옛날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가독성이 너무 떨어져서 힘들었다. 믿을 만한 출판사였는데도 그랬다. 바뀐 시대 탓도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오래전 랭보의 시집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하필 엉터리 번역본으로 읽었다가 굉장히 실망한 적이 있는데 그건 사실 랭보의 문제라기보다는, 명백히 역자의 문제였던 거다. 잘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이기도 했고. 번역서를 읽을 때에는 신뢰할만 한 출판사와 역자인지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체력과 시간은 소중하니까. 고작 체르니 100번을 겨우 뗀 듯한 연주자가 쇼팽을 연주해서 내놓는 불상사가 있을 수도 있는 거다. 연주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티켓을 사서 객석에 앉은 사람은 무슨 죄겠나. 어리석은 관객이 오판하여 연주자가 아닌, 곡에 불만을 품는다면 쇼팽은 또 무슨 죄겠는가. 덧붙여 시와 소설의 번역본인 경우, 소설가가 번역한 소설, 시인이 번역한 시는 또 특별한 맛이 있다. 소설가 김영하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라든지, 마찬가지로 소설가인 김연수가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 시인 김정환이 번역한 셰이머스 히니의 시전집,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김혜순이 참여한(아마 윤문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은) 세사르 바예호의 시집 같은 것들. 이런 작업들은 정말로 연주의 영역으로 느껴진다.
주남저수지에는 벌써 가을이🌾
추석 연휴를 맞아 본가에 왔더니 해질녘이 되니까 역시나 주남저수지가 부르더라고요. 일몰 시간 맞추려고 잠시 머물렀던 카페에서 커피를 쏟는 바람에 얼룩덜룩한 옷으로 뚤레뚤레 저수지로 향합니다 걷다가 만난 고양이씨. 사진을 찍으려니 나와서 도도하게 걷네요. 사진 찍히는 게 싫은 거냥. 하고 새로 자리잡은 고양이씨의 정면을 다시 잡기 위해 추월하고 뒤로 돌았더니 오 이왕 찍을 거면 더 예쁜 배경으로 찍으라는 고양이님의 혜안 덕분에 고양이님 인생샷 건지셨습니다 앞은 파랗고 뒤는 벌건 주남저수지의 저녁 언제 봐도 카메라를 들이대게 되는 적란운도 있고 그 아래는 멋모르고 잡혀서는 사람들을 태운 마차를 털레털레 끄는 당나구가 있죠. 진짜 왜 이곳에 당나구를 두고 고생시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인간이 미안해… 다시 고개를 들면 이렇게 청명한 하늘과 꽃을 피우려고 준비중인 갈대들 추석을 향해 살쪄가고 있는 달 위로 비행기도 지나가구 안 보이신다고요? 왼쪽 위에 조그맣게 있는뎅 노을을 찍고보니 잠자리가 주인공이네요 곱게도 앉아있네 코스모스도 한창이고 적란운은 여기까지 흘러왔고 물들어가는 하늘을 피해 철새는 바삐 날고 덜 살찐 달 아래로도 하늘이 발갛게 물들었네요 세 갈래로 뿜어내는 일!몰!파!워! 산이 겹쳐 만들어내는 그림도 너무 아름답죠 새가 날아든다 온갖 철새가 날아든다 붉은 빛이 점점 약해지고 해가 완전 내려앉아 버릴 기세라 후다닥 집으로 향합니다 나도 새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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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의 흥행과 별개로 병영문화에 대한 설전들이 몇 보였다. 거기에 국방부까지 합세해 병영문화가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것까지. 어느 정도로 비난이 일었기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군필자로서 직접 시청을 해본 소감은 그게 국방부까지 나서서 변명할 일이었나 싶기도 하다는 것이다(물론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이겠지만). 드라마에서 그려진 군대 내 괴롭힘 문제가 대수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극적 구성을 위한 다소 극단적인 설정들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드라마에서 그려진 일들이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하는 건 또 아니다. 병영문화가 실제로 아무리 좋아졌다고 한들 어디에나 극단적인 인간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건 좀 다른 문제다.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인즉슨, 군대가 아무리 폐쇄적인 곳이라고 해도 대개 입대 전 사회구성원으로 별 무리 없이 살던 사람들이 잠깐 거쳐 가는 곳인 것도 맞기에 집단 내에서 어느 정도 상식은 있다. 물론 군대라는 곳은 정말 이상해서, 멀쩡한 사람들이 부대만 들어오면 이상하게 변하는 경우도 적지는 않으나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2000년대 초반에 군 복무를 했던 나로서는, 현재의 군대 실정은 모른다. 그리고 사실 관심도 없다. 그냥 지금은 복무기간이 많이 줄었고, 군인들이 스마트폰도 쓸 수 있다는 것, 또 2000년대 초반에 비하면 그나마 월급이 조금 올랐다는 것 정도. 지금도 아마 군대 내 어딘가에서는 괴롭힘과 구타가 있기야 있겠지만, 내가 군 복무하던 당시에는 명확하게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에 비하면 군 인권이 크게 이슈화되지도 않았던 때다. 그나마도 구타와 괴롭힘이 많이 사라진 때라고들 했다. 나 때는 더 힘들었다, 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어차피 내 세대나, 더 윗세대나 지금 세대나 각자 고된 군 복무를 하는 거다. 모두 각자의 고통을 사는 거다. 모든 시대의 군대를 경험해본 것이 아니니 어느 세대가 더 힘들다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그려진 괴롭힘 사례들을 현실에 적용해보면 조금 선을 넘는 데가 있다. 군대 특유의 그 경직되고 긴장감 흐르는 분위기는 공감하는 바이지만, 선임들의 괴롭힘은 조금 심하다 싶은 거다. 가령, 벽에 박힌 못을 뒤에 두고 폭행을 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시켜대는 행위, 또 무엇보다 이제 곧 나갈 말년병장이 고작 일병을 그렇게 손수 괴롭혀대는 일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놓고 악한 짓을 일삼는 드라마와 달리 정교하고 교묘하고 비겁하게 괴롭히는 말종들이 분명 현실에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불문율이라는 게 있다.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폭력이나, 심각한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행위는 어지간해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정정한다. 있기는 있다. 있기는 있지만, 그 정도의 행위를 할 거라면 정당방위에 가까운, 그러나 악에 받친 하극상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걸 상상하지 않고 고삐 풀린 말처럼 개차반으로 지낸다면 그는 아주 일시적인 권력에 취한 머저리다. 계급 사회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괴롭히는 인간들도 최소한의 명분을 가지고 괴롭히는 거다. 어차피 2년도 안 되는 시간이고, 나가면 남남인 걸. 아무리 선임이라고 하지만 자꾸 선을 넘는 수준에 이르면, 부대 내에서도 수군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선임이라고 해서 후임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거나, 후임의 인격을 아무렇지 않게 말살시키거나, 후임의 가족을 조롱한다거나 하는 짓을 하면, 그가 아무리 선임이라고 한들 부대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고립되는 건 피해자인 후임이 아니라 선을 넘은 가해자, 곧 선임이다.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결코 말년이 좋지 않다. 최고참이 별 근거 없이 일이병들 앞에서 상병 후임에게 정도가 넘은 모욕을 주거나 계급에 맞는 대우를 해주지 않아도 조롱당하는 건 최고참이다. 물론 앞에서는 대놓고 못 하겠지. 다만 그를 배제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분명 형성된다. 세대의 구분도 있겠지만 사실 부대마다 문화가 다르기도 할 거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다. 좋으나 싫으나 1년 반 남짓을 부대끼며 살아야 하니 서로 지킬 건 지킨다. 드라마 설정이 완전한 허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선을 넘은 자들의 극단적인 사례라는 생각은 든다. 병영문화 운운하며, 국방부까지 지레 겁먹고 변명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거다. 군대를 무작정 옹호하는 것으로 비칠까 봐 다소 우려되는데, 나는 군대가 정말 죽기보다 싫었고, 이등병 시절에는 매일같이 탈영하고 싶었으며, 지금도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당시에는 정말 하루라도 빨리 군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밖이 그리워서? 밖의 자유가 좋아서? 노노. 그러니까, 군대만 아니면 되는 거다. 전시 국가에서 필요한 곳은 맞고, 군인을 폄하하고 싶지도 않으나 도저히 추억으로 부를 수 없는 부조리가 만연한 곳이었으며, 나와는 절대적으로 맞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이 어디 나뿐일까. 나는 이제 이 나라가 징병제를 없애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끌려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심지어 처우마저 거지 같으니 사명감 따위는 생길 리가 없다. 고작 그 돈을 받으면서 말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나 때는,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라떼는 말이다. 이등병 시절 월급이 19,900원인가 그랬다. 무슨 홈쇼핑인가?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다. 무슨 명분으로 사명감을 요구했던 걸까. 군인이 100% 분명한 직업으로서 자리매김하면 오히려 그나마 군인이 적성에 맞는 사람들이 지원할 것이다. 또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지원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시간이나 죽이려고 원시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도 차츰 사라질 거다. 있다고 해도 그때는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고소의 문제로 가야 할 거다. 군인은 애국심이랄지 국방에 대한 사명감으로 하는 게 아니겠냐고? 그런 신화에 가까운 말보다는 적합한 보수를 주며 완전한 직업인으로 대해줘야 일말의 직업정신이라거나 생계에 대한 절실함으로 군대가 오히려 강해질 거다.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한 게 어딨나. 적군이 내 생계를 위협한다? 그보다 더 사기 충전될 요인이 또 어딨겠나. 추가로 군에 대한 인식도 조금은 나아질 것이고, 군을 둘러싼 많은 사회적 문제도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는 군대의 부조리,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극 중 조 일병의 말마따나, 고작 수통도 안 바뀌는데, 바뀌기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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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지원금이 모든 곳에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늘 하던 대로 나는 카드를 긁을 뿐인데 재난지원금에서 차감되는 경우도 있고, 평소처럼 내 돈이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문득 내가 정부와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엔 내가 살게, 이번엔 네가? 정부와의 더치페이. 나 지금 뭐라니. 연말이 다가오면 다음 해의 계획들을 세우곤 한다. 새로운 종목들을 계획하기도 하고, 늘 하던 것들의 테마를 정하기도 한다. 일단 많이는 아니어도 꾸준히 하고 있는 독서의 내년 테마는 고전 읽기다. 내년은 독서에 한해서 ‘고전 읽기의 해’로 정했다. 고전, 그리고 세계문학을 중심으로 읽기로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예외사항을 두자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책은 별개다. 한마디로 내년 독서 테마는 정확히 ‘고전 읽기와 책장 파먹기’다. 이를테면 냉장고 파먹기 같은 거다. 일단 있는 거 읽자, 이런 거다. 갖고 있는 책들을 읽어버리고 빨리 좀 치워버리고 싶은데, 그러니까 책장에 딱 이번 달에 읽을 책 정도만 놓고 싶은데 당최 그게 안 되네. 책장과 책상에 책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이게 다 호기심 탓이다. 아니 이런 책이 나왔네? 뒤적뒤적. 아니 이런 책도? 뒤적뒤적. 자자, 이제 그런 건 당분간 그만. 사실 지금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지금 읽고 있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이후로는 ‘고전 읽기와 책장 파먹기’ 돌입이다. 운동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종목인데, 코로나 4단계로 인해 중간에 pt가 어중간하게 끝나고 다소 게을러진 측면이 있다. 하지만 현재 일주일에 적어도 이삼일은 센터에 가려고 하고 있고, 비가 오지 않는 이상 자전거는 꾸준히 타고 있다. 또 홈트도 적게나마 하는 중이고. 올해 운동을 시작했으니 이제 내년 운동의 테마를 정할 건데, 사실 유도를 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크로스핏에도 관심이 간다. 나는 크로스핏이라는 것이 그냥 조금 변형된 헬스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무지가 무서운 거다. 우연히 지인과 안부를 묻다가 그녀가 요즘 크로스핏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해서 이것저것 좀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그룹 운동이다 보니 요즘 운동 메이트가 필요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좋은 운동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고, 또 종합적으로 체력을 기를 수 있으니 운동을 편식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관심이 많이 생기고 있다. 일단 내년 운동은 크로스핏으로 시작해볼까 한다. 물론 변수는 늘 염두에 두고. 마지막으로 이건 장기 프로젝트 느낌으로 생각 중인데, 크게 색다른 건 아니다. 내년부터는 영어를 좀 공부해보려고 한다. 사실 영어 공부는 2017년에도 시도하다 실패했고, 작년에도 시도하다 실패했다. 방법은 모두 달랐었다. 영어를 효율적으로 습득하는 방법 중 나에게 맞는 것은 무엇일지 참 여러모로 고민했다. 기초 회화책 한 권을 우선 다 외워보려고도 했었고, 미드를 통해 해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결국 다 지쳐서 떨어져 나갔다. 물론 의지의 문제이지만. 우선은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영어를 통해 새로운 직업을 가지려고 한다거나 스펙을 쌓으려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좋지만 그 자체가 최종 목표라면 더 쉽게 지칠 듯하다. 좋은 직업을 가지려고 영어를 공부한다면, 혹시나 결국 좋은 직업을 갖지 못했을 때는 얼마나 좌절감이 클 것이며, 또 요즘 세상에 영어 하나 좀 잘한다고 갑자기 인생에 대반전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다. 나는 그냥 영어를 취미 삼아 하고 싶다.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더 쉽게 지치는 일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선은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싶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고, 어쨌거나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다 보니 외국어에 순수한 호기심이 이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모국어, 그러니까 한국어를 의사전달의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언어가 하나의 악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 모두 한국어를 쓰지만 그것을 똑같이 연주하고 있지는 않다. 한국인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표현하면 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우스운 일이 아니다. 분명히 유창한 사람들이 있다. 모국어를 몇십 년 연주해본 경력으로 새로운 악기를 연주해보고 싶은 거다. 실제로 영어 공부에 대한 학습법 중 문법보다 발음에 치중하여 무작정 따라 해 보는 식이 종종 눈에 띄는데 내가 모국어를 습득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게 맞기는 하다. 우리가 문법을 따져가며 말을 배웠던가? 그저 주변의 한국어를 쓰는 많은 사람을 흉내 내며 여기까지 온 거다. 물론 여기에 맹점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미 완전히 모국어에 익숙해진 선입견으로 가득 찬 나의 뇌가 미국도 아닌 한국에서 외롭게 영어를 시작한다는 것은 백지의 상태인 유아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자연스레 언어를 흉내 내볼 수 있는 환경도 아니며, 다시 말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뇌가 이제는 너무 언어에 대한 선입견으로 굳어져 있으니까. 그래서 사실 기초 회화책 한 권을 우선 외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면 일단 기본적인 데이터는 가지고 있어야 응용의 가능성이 생기니까. 나는 여기서 또 엉뚱하게 얼마 전부터 인공지능이 떠올랐는데 가령 인공지능과 사람은 동물인 개의 사진을 보고 둘 다 개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의 경로는 좀 다르다. 인공지능의 현재가 다시 어디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몇 년 전에 본 기사에서 인공지능이 개를 판단하는 경로를 설명하기를, 우선 아주 다양한 개의 사진을 인공지능에 주입한다. 인공지능은 판단하기 시작한다. 눈이 두 개 있고, 여기쯤에 코가 있고, 귀가 있고, 색은 어떠한지 등등. 인공지능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데이터의 평균을 내서 이것은 개라고 인식하는 과정에 이른다. 그러니까 개의 사진 자료가 인공지능에 계속 쌓일수록 개를 판단하는 확률은 높아진다. 그러나 다만,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인공지능이 실수하도록 의도적으로 개와 아주 비슷한, 초콜릿이 박힌 비스킷 사진을 가져다 두면 인공지능은 그 오묘한 비스킷을 두고 개라고 판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데이터가 쌓이면 그러한 오류는 줄어들 거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사람은 사진을 보고 개를 판단할 때, 보자마자 이건 동물인 개구나, 라고 하지 눈이 이렇게 있고 귀와 코가 여기 있고 그러니까 이건 개구나, 라고 하지는 않는다. 개와 얼핏 비슷한 비스킷을 보고 개라고 착각하지도 않는다. 따져볼 필요도 없는 거다. 보면 바로 아는 거다. 외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는 나도 그 나라 사람과 비교하면 인공지능일 뿐이며, 심지어는 속도도 느리고 학습을 방해하는 방대한 데이터까지 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차피 내가 지금부터 외국어를 배운들, 오늘 태어난 그 나라 아이와 속도가 같을 수는 없을 거라는 거다. 나는 이것을 인정하고, 우선은 인공지능이 개의 수많은 사진을 학습하듯 일단은 기초 회화의 암기를 다시 한번 해볼까도 생각 중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어를 정말 잘하는 외국인들을 볼 때, 그들이 아무리 한국인처럼 말해도 이상하게 한국인 같지는 않다. 특유의 목소리 문제인지, 이미 굳어버린 그들만의 억양의 문제인지 어쨌든 아무리 유창해도 외국인 같기는 한 거다. 언젠가 한 한국 드라마에서는 일본말을 하는 배우가 나왔는데,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한국인이 일본어 연기를 한 것인가 싶다가도 이상하게 느낌이 왔다. 저건 한국인의 일본어 연기가 아니라 일본 배우인 것 같다는 느낌. 찾아보니 정말 일본 배우였다. 그러니까 사실 언어라는 것은 단순히 언어의 완벽한 습득에서만 오는 게 아니고, 아주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문화나 그로 인해 정착된 느낌에서도 오는 거라는 생각. 내가 아무리 영어를 완벽하게 습득해도 결코 미국인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내 목적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외국인이 거문고나 아쟁을 연주한다는 느낌으로, 다른 나라의 언어를 한 번 연주해본다는 느낌으로 모국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도 한번 연주해보자는 마음으로 임하려고 한다. 물론 처음에는 성능이 떨어지는 인공지능처럼 굴어야 할 최소한의 필요는 있겠지만. 내년 계획을 다 세운 느낌이다.
아동문학가 김정현 '동시다오' 전시회
전시제목 : 김정현 개인전 '동시다오' 전시장소 : 경남 김해시 가야테마길 161 김해가야테마파크 철광산공연장1층 작은문화마당 전시기간 : 2021년 9월 17일(금) ~ 2021년 10월 ----------------------- 시인이자 아동문학가, 인플루언서로 활동중인 김정현 작가의 전시회 '동시다오'가 열린다. 오는 9월 17일 시작해 10월 31일까지 45일간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가을 나들이 장소로 좋은 김해가야테마파크내 철광산 공연장 1층 작은문화마당에서 개최된다. ​ 이번 전시회는 '그림이 있는 동시'를 주제로 한 동시화전으로 진행되는데 사진이나 그림, 캘리그래피 등의 전시회는 많지만 동시를 테마로 기획된 전시회는 처음이어서 더욱 뜻깊은 전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시회 제목인 '동시다오'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 전래동요 '두껍아 두껍아' 노래 가사 중 '헌집 줄게 새집다오'라는 노랫말에 '동시'를 넣어 부를 때의 어감과 각인성이 좋은 '동시다오'가 되었다고 한다. ​ 작가는 "코로나19로 힘든 시기, 피로하고 지친 마음을 동심으로 치유하는 전시회가 되길 희망하며 어른은 맑은 아이의 심성을 되찾고 아이는 부모님과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을 간직하는 뜻깊은 전시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김해장유신문 기자 임현아 yasi407@naver.com #김해가야테마파크 #김정현 #아동문학가 #동시다오 #동시화전 #동시 #시 #전시회 #개인전 #김해
서울은 기다리지 않는다
#서울은 기다리지 않는다 난개발과 급속성장. 서울의 멋은 그러나 부산함과 조잡스러움 속물근성 등을 한데 스까 아트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데에 있다. 7080 부잣집 스타일 구축 주택의 옆구리에 빛나는 철제 엉덩이를 디밀고 바짝 붙어있는 최신식 사무실 건물. 어찌나 가깝게 붙어있는지 맘만 먹으면 양쪽에서 창문을 열고 건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지각색의 건축자재와 양식. 아무 계획도, 전체적인 그림으로서의 어울림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냥 당대의 유행따라 개성따라 세워놓은 것 같은 건물들은 그야 말로 지들 맘대로지만 하나로 모아놓고 보면 묘하게 어울린다. 오히려 너무 지들 멋대로인 탓에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그러나 서울은 돌아보지 않는다. 공존은 잠시뿐이다. 과거는 헐리고 미래가 들어선다. 백프로다. 역사와 보존이라는 단어를, 서울은 돌보지 않는다. 당신이 만나는 구축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커다란 크레인 교수대에 대들보 모가지를 걸어 공중에 매달 때가 아직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의 다정한 도시 서울은 무엇이든 숭배하지만 어떤것도 사랑하진 않는다. 동대문 운동장이 헐리고 DDP가 들어서던 때를 기억한다. 청계천에서 동대문 운동장으로 밀려난 상인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서울은 1도 신경쓰지 않았다. 서울은 터미네이터다. 서울은 글래디에이터다. 미래로 나아갈 뿐이다. 거슬리는 과거는 모두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끊임 없이 베고 찌르고 썰어넘기며. 불쌍한 존 코너는 코너에 몰린다. "아 윌 비 백." 그러나 늙은 상인들과 그들의 잡동사니들은 운동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서울은 곰팡내를 참는 법이 없다. 그들이 생계를 이어가던 자리엔 모던 아트의 극치인 건물과 좋아요를 쓸어담는 간지나는 패피들이 들어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들의 착장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좋아요 숫자 만큼 비쌌다. 그렇다. 서울의 쇼윈도엔 명품이 아니면 걸릴 수 없다. 도시의 지하, 출근길 2호선 열차 안에는 한데 엉켜 메트로 병천순대가 되어버린 군중이 옮겨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신대륙의 흑인 노예들처럼. 지상 위에는 그들의 연봉을 에누리 없이 4, 5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겨우 구매할 수 있는 슈퍼카들이 내처달린다. 해를 받아 반짝이는 은색 앰블럼들이 심장에 꽂은 말뚝같다. 병든 도시. 한강은 그 사이를 길게 째진 흉터처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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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이 하도 어지러워 먼저 읽을 책들을 한쪽으로 빼서 쌓아보았다. 돌 쌓기처럼 뭔가를 기원하는 의식 같기도 하다. 나는 내 나태의 타파를 기원하는 것인가. 보름달을 보고 한 가지를 빌 수 있다면 뭘 빌어야 할까. 따져보면 단박에 떠오르는 뭔가가 없다. 왜냐하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사실상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고, 고만고만한 소원들은 딱히 우선순위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시에 썼던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내내 그러할 텐데 그 문장인즉슨, “원하는 걸 가질 방법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꼭 취하고 싶다.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그렇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 지금은 죽은 어떤 가수의 노랫말 중에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라는 가사를 보며 그거 하나 모르는 내가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자라자 나는 정말로 내가 원한다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 같은 뭔가를 쥐고 오랫동안 으쓱했던 것 같다. 바보같이. 어릴 땐, 아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꿈이 없다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뭔가 멋이 없어 보였다. 그게 문제다. 나는 정말로 꿈이 있다거나, 일종의 드림워커로서 산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멋에 취해, 아니 그런 게 당최 뭐가 멋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볼 만한 일을 하나 선택해 이게 내 꿈이라 믿고 젠체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언젠가 어떤 한국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보았다. 담임교사는 자기가 맡은 학생과 면담을 하며 자꾸 꿈을 강조한다. 학생은 꿈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학생이 딱히 문제아인 것도 아니다.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을 것이다. 학생은 그저 하급 공무원이 되어 퇴근하면 맥주나 한 캔하고 쉬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나는 사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래, 꿈을 꿔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주입된 사고방식 아닌가. 꿈을 갖고 노력하는 삶을 비하하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모두가 야심 찬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폭력 아닌가, 그런 생각. 사실 영화 속 학생도 꿈이 없는 건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큰 욕심 없이 무탈하게 사는 것이 꿈일 뿐. 그런 건 꿈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사실 코미디다. 사실 요즘 나는 진지하게 그런 생각들이 든다. 내가 정말로 이루고 싶은 건 사실 없다는 것. 그러나 인생이 지루해서, 이렇게라도 꿈이라는 최면을 걸어놓고 살지 않으면 나태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완전히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인생은……, 인생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하고 내뱉는 것이 다소 거창해 보이지만, 인생은 매번 넘고 넘어야 하는 산들뿐이라 다소 지쳐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하지만 역시 요즘은 그 부질없음을 묵묵히 견디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태껏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게 사실은 없어서일지도. 아니, 다시 바꿔 생각해보면 어쩌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서 애초에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고, 가능 범위에 있는 것들은 사실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기 때문일지도. 너무 비관적인 생각으로 들리려나. 그러나 사실 꿈은 삶을 더 윤택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중요한 것은 지금 주어진 삶이다. 꿈이 있는 삶과 없는 삶, 둘 중 무엇이 더 위대한가를 따질 일은 아닌 것 같다. 꿈이 있는 사람은 지금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미래를 보며 사는 것이라서 현실을 지나가기가 어쩌면 수월할 것이며 그 자체가 기쁨일 테고, 꿈이 없는 사람은 어쩌면 지금 현실에 큰 불만이 없으므로 지금에 만족하고 집중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뭐가 됐든 둘 다 삶의 비중을 미래에 놓느냐, 현재에 놓느냐의 차이일 거다. 꿈이 있든 없든 중요한 것은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