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퀴즈쇼>를 읽다...
화자 이민수는 사생아다. 사생아라는 뜻을 알기 전부터 보는 순간 그 단어에 대해 오한을 느꼈다고 했다. 알지 못하는 단어를 직감으로 느끼는 것. 내 안에 잠복된 단어. 민수는 외할머니 최인숙을 엄마로 알다가 '엄마'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큰이모 최여사가 되었다. 최여사는 무명 영화배우였다. 최여사의 장례를 치룬 후 영상자료원에 있는 친구 정환에게 최인숙이 출연한 영화를 찾아달라 했다. 인민군 소좌로 나오는 최인숙이 살해되는 장면에서 영사실을 나온 민수. 민수는 그 장면을 볼 수 없었던 것을 환지통으로 비유한다. 사고로 팔을 잃은 사람이 손바닥이 가려운 환상을 겪는 고통같은.
빛나는 대학원생이고 그녀의 숙제를 늘 도와주던 스물일곱의 민수는 최여사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서 빛나에게 결별을 통보했다. 최여사가 얘기해 준 남자가 조심해야할 세 여자(속을 알 수 없다가 일을 저지르는 논개같은 여자, 똑똑하고 예뻐서 내 것이 될 수 없는 황진이같은 여자, 그리고 빛나-빛나라는 유형은 지금 앞에 있는 여자일 거라고 화자는 생각한다)중 하나인 빛나가 자신의 삶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거부한 것.
결별 후 무력해진 민수가 들어간 채팅사이트 '퀴즈방'.(이 장면에서는 응팔 정봉이 오버랩되네...) 인쇄소를 하던 외할아버지 덕에 백과사전을 끼고 살던 때가 있었다. 퀴즈에는 자신이 있어 주로 '책퀴방', '영퀴방'에서 활동하던 중에 '벽 속의 요정'이라는 처음 보는 멤버가 들어온다. 은연중에 필연을 느끼고.
p91 돈은 역시 상징이나 은유 같은 게 끼어들 틈이 없는, 오해도 착각도 없는 순수한 추상이었다. 모두가 그것의 위력을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자신만큼 상대방도 이해한다는 것까지 간단하게 이해한다.
... 추상이란 이런 것. 확실한 기초 언어
금융계 직원들의 빚독촉이 있은 후 찾아온 곰보빵 할아버지는 외할머니의 모든 빚을 이 집으로 탕감해 줄테니 넘기라고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민수는 집을 넘기고 고시원 쪽방에 들었다.
일상의 일탈, 그리고 망각. 퀴즈방은 민수에게 그런 곳이었고, 벽 속의 요정은 상상 속 연인처럼 느끼던 어느 날 편의점 알바를 때려치우고 퀴즈쇼에 나간다. 본선 초반 탈락. 저조한 성적이었지만 이후 뜸했던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오고 '벽 속의 요정' 서지원에게도 처음 연락을 받았다.
... 지원. 소설 초반에 스치듯 이름이 등장했다. 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작가에겐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물은 없다. 이야기 어딘가에서 그 역할을 부여한다. 치밀하게.
서지원은 퀴즈쇼의 구성작가였고, 이민수가 다른 사람을 벽 속의 요정으로 착각하여 말하는 순간에 뒤에 있었다. 그렇게 우연으로 연결되지만, 민수는 이것이 우연의 연속이라 운명이라 하고, 지원은 어느 지점(어쩌면 전생)부터 연결되어 있던 필연이라 한다.
... 프랑스 원작 소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영화로 만든 <서머스비>에서 오랜 방황 끝에 귀향한 마르탱이 가짜임을 안 사람은 구두장이였단다. 발의 사이즈가 줄어 알게 되었다는데 연예인 중에 누가 발 사이즈가 줄었다는데? 정말! 누구더라?
민수는 지원을 만나기 위해 옆방녀 김수희에게 어렵게 돈을 꾸었다. 얼마 안 되고 금방 갚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 전형적인 지식인의 무능력을 보는 듯하다. 고고한 지식과 허접한 현실 사이에 고뇌하는, 이는 지식인의 오류다. 지식은 허접하고 싸구려 놀이다. 현실은 고차원적이고 어렵다. 인간의 삶이 현실에 있지 지식에 있지 않고 지식은 현실의 부산물이고 현실의 시종이다. 공부하면 할수록 드는 지식의 빈틈들, 허무맹랑한 형이상학. 단지 유희일 뿐. 지적 유희.
지원은 민수를 자기집에 초대한다. 부모님이 여행가신 날에. 지원의 집은 그야말로 멋졌다. 특히 층을 터서 꾸며진 서재. 민수가 지원과의 시간들이 꿈같이 깨버릴 행복이 아닌지 염려하자 지원은 민수를 좋아하는 이유를 댄다. 순수하고 양심이 있다는 것. 스리고 무용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
...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나오는 김희성이라는 캐릭터는 '나는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라고 대사를 날렸다. 시기적으로 이 책이 먼저다. 갖다 썼던가 싶다. 김은숙 작가가.
지원의 집에서 하루의 행복을 만끽한 민수는 다음날 고시원에 들었다가 수희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용료 미지급으로 강제 퇴실 되었음도. 수희의 죽음을 애도하자니 죄책감이 밀려온다. 상담을 청했던 것을 미뤘던 것, 갚지 못한 이십만 원, 하필 지원의 집에 있었던 것 등.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춘성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계약금 천만 원에 퀴즈쇼를 하면된다는 제안을 퀴즈쇼 출연 후에 받았지만, 파격적인 조건에 오히려 의심이 들었던 그 일을.
이춘성을 따라 들어간 곳은 '회사'라 불렸고, 각 개인도 회사였다. 공간은 쾌적했으나 복잡해서 미로 같아 PDA 도움 없이는 식당도 찾아가기 어려웠다. PDA는 방 열쇠이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개인은 닉네임으로 불렸다. 장군이 맡은 팀에 배정받는다. 장군과 메두사, 탱고, 유리, 롱맨(민수) 5명이 한 팀이다.
... 갑자기 판타지로 가는 느낌이다. 작가가 민수의 앞날을 어찌 풀어갈지 궁금해진다.
민수가 간 회사는 유리의 은밀한 설명으로 해명된다. 화성과 태양 사이의 공간을 돌고 있는 회사 안에 의식만 와서 실제처럼 수행하고 있다는 것, 육체는 파주 어느 곳에 있다는 것, 그곳에서 잠을 자는 동안 뇌가 재부팅되었을 거라는 것이다. 장군은 유리가 허황되다고 딱 잘라 말한다. 이는 현실이라고. 민수는 혼란스럽다.
... 매트릭스의 세계에 와 있는 걸까? 일종의 메타버스 안에 형성된 MR(혼합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가 메타버스 개념은 확립되기 전으로 아는데, 작가는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의 개념을 이미 알고 있던 듯.
회사에서의 생활은 나름 흥미로왔고 제법 수입도 되었다. 집회라고 불리는 퀴즈쇼는 현장감과 명쾌함, 격정으로 긍정에너지를 민수에게 주었다. '마티니'라는 팀명으로 한 팀이었던 팀원들에게서 균열의 조짐이 보였고, 메두사는 롱맨을 범한다. 이후 회사와 구성원들은 롱맨을 외면하고 유리는 롱맨을 죽여 지구로 돌려보내겠다고 하지만 가까스로 도망친 롱맨 민수는 정신차려보니 파주가 아닌 대관령에 와 있다. 그저 아래로 아래로 뛰었을 뿐인데 횡계에 다다르고 민수가 도망쳐나온 산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얘길 듣는다. 소지품을 모두 나두고 도망쳐 왔기에 기억하는 단 하나의 전화번호의 소유자 지원에게 도움을 청한다. 지원이 민수에게 그간의 얘길 듣고 돕고자 하지만, 민수는 자신의 책을 넘겼던 헌책방에 알바를 하며 기거하기로 허락을 받는다. 이춘성과 그의 돈을 찾을 궁리를 하며 이제 다시 시작하려 한다. 지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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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61 작가의 말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들이 가장 불행하다는 역설. 그들은 비극을 살면서도 희극인 줄 알고 희극을 연기하면서도 비극이라고 믿는다.'
작가는 이 소설의 시작이 '이십대 혹은 이십대적 삶에 대한 연민'이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려 했단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당시인 2007년은 우리 사회에 헬조선이 유행어였던 듯하다. 지금도 청년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고, 여전히 공시생은 쏟아진다. 고학력자는 넘쳐나는데 사회는 더 급속히 변하여 사람이 잉여물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나라는 결혼하고 출산을 강요한다. 성장은 이 시대에는 끝났다. 성장보다 분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희극을 살면서 비극을 연기할 수 있는 시대를 꿈꾸지 않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