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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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을 읽을 거다. 표지에는 유숙자 옮김 이라고 적혀 있다. 옮긴다니. 재밌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물건을 옮기는 것처럼. 역자인 유숙자가 무거운 철근이나 시멘트를 나르듯 낑낑대며 크고 무거운 소설을 옮기는 상상을 한다. 일본어 위에 놓여 있던 소설을 한국어 위에. 팔뚝에 돋는 핏줄. 역자의 또 다른 자아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안전모를 쓰고 또 다른 자신에게 지시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자자, 유 씨. 좀 더 힘을 냅시다.

나는 번역이라는 것이 일종의 연주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번역가는 거칠게 이분하자면 원서를 최대한 살리는 사람과 출간 국가의 문화적 실정을 고려하여 나름대로 의역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예전에는 전자가 가장 이상적인 번역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꼭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 것이 말 그대로 번역이 연주라고 생각하면 역자 나름의 해석을 따라 번역서를 읽는 것도 즐거운 독서 체험이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신뢰할 만한 역자라는 전제하에.
생각해보자. 쇼팽의 같은 곡을 루빈스타인, 글렌 굴드, 조성진 등의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한다는 건 각자 다른 해석의 쇼팽이지, 피아노 좀 치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똑같이 쇼팽의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번역 또한 그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숙자가 자신의 모국어이자 한국어로 연주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앞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 얼마나 거듭 번역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는 같은 작품의 여러 다양한 번역본을 통해 원서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 무조건 원서 그대로만 고집하고 싶다면, 차라리 번역본에 기대지 않고 그 나라 언어를 직접 공부해서 정말로 원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다.

좀 다른 얘기지만 번역은 시대가 변할 때마다 개정되어야 한다. 독자 또한 시간과 의욕이 허락한다면 개정된 번역본을 재독해볼 필요가 있다. 언젠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옛날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가독성이 너무 떨어져서 힘들었다. 믿을 만한 출판사였는데도 그랬다. 바뀐 시대 탓도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오래전 랭보의 시집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하필 엉터리 번역본으로 읽었다가 굉장히 실망한 적이 있는데 그건 사실 랭보의 문제라기보다는, 명백히 역자의 문제였던 거다. 잘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이기도 했고. 번역서를 읽을 때에는 신뢰할만 한 출판사와 역자인지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체력과 시간은 소중하니까.
고작 체르니 100번을 겨우 뗀 듯한 연주자가 쇼팽을 연주해서 내놓는 불상사가 있을 수도 있는 거다. 연주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티켓을 사서 객석에 앉은 사람은 무슨 죄겠나. 어리석은 관객이 오판하여 연주자가 아닌, 곡에 불만을 품는다면 쇼팽은 또 무슨 죄겠는가.

덧붙여 시와 소설의 번역본인 경우, 소설가가 번역한 소설, 시인이 번역한 시는 또 특별한 맛이 있다. 소설가 김영하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라든지, 마찬가지로 소설가인 김연수가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 시인 김정환이 번역한 셰이머스 히니의 시전집,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김혜순이 참여한(아마 윤문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은) 세사르 바예호의 시집 같은 것들. 이런 작업들은 정말로 연주의 영역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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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마트에서 이것저것 생필품을 사서 계산대에 갔더니 중년의 남자가 본인의 물건을 계산원에게 넘기고 지갑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지갑이 보이지 않았던지 어라, 지갑이 어디 갔지. 그런 말을 했다. 그러면서 가방을 계속해서 뒤적였고,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지갑이 진짜 어디로 갔지. 나와 계산원은 그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어리둥절해 하며 지갑을 찾았다. 그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난감한 표정으로 바뀌어 갈 무렵, 나는 계산대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지갑 하나가 종량제 봉투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미리 지갑을 빼놓고 깜빡 잊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가방에서 지갑을 흘렸던 것인지 뭐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그 지갑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애꿎은 빈 가방에만 골몰했다. 나는 계산대 한구석에서 자신의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지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에게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저기 있는 지갑 아니에요? 그는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어 맞아요, 했다. 그리고는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주워든 자신의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어 계산원에게 건넨 뒤 다시 한번 내게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냥 한번 웃어주고 말았다. 그는 잔돈을 건네받아 주머니에 넣었고, 나는 내가 골라온 물건의 계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모든 짐을 정리해 들고,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에 또다시 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지인과 오랜만에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뷔페식 식당이었는데, 식사 전에 물을 한잔하고 싶어 음수대로 갔다. 덩치가 큰 남자 한 명이 음수기 앞에서 컵을 받쳐 든 채로 있었고, 컵 안으로 얼음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음수기를 살펴보니 얼음, 얼음물, 정수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도록 기능이 갖춰져 있었는데, 기계는 ‘얼음’이 선택되어 있었다. 당연히 컵에는 얼음만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가 얼음을 먼저 받은 뒤 물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계속해서 얼음만 받고 있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그는 컵 안으로 물이 아닌 얼음만 떨어지는 것을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으로 보고 있는 듯했다. 컵을 이렇게 대보다가 저렇게 대보다가 하는 식으로 무언가를 궁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선택 기능을 보지 못한 것 같았고, 또한 물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이걸 눌러주셔야 할 것 같다고, 무심히 말하며 정수를 눌러주었다. 그러자 가만히 보고만 있던 그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다시 얼음을 누르더니 조금 있다가 자리를 떠났다. 물론 남자는 애초에 얼음만을 원했던 것이 맞을 수도 있고, 순전히 내가 그를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는 물을 원한 것이 맞는데, 어쩐지 바보짓을 들킨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 것일 수도 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어떤 선의는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쓸데없는 오지랖이 되기도 한다. 나의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모두 선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니까. 이게 바로 선의의 맹점이다. 내 의도가 선했으니 상대가 감사해야 함이 응당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선의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앞서 얘기한 나의 행동들은 필요 이상으로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것도, 상대의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에 기분 나빠할 것도 아니다. 놓치지 말자. 애초에 나의 두 행위는 사실 선의라기보다, 내 편의를 위해 상대를 재촉한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토박이말 살리기]1-81 뜬돈
[토박이말 살리기]1-81 뜬돈 오늘 알려 드릴 토박이말은 '뜬돈'입니다. 이 말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어쩌다가 우연히 생긴 돈'이라고 풀이를 하고 "뜬돈을 헛되이 낭비하다."는 월을 보기로 들었습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때에 우연히 생긴 돈'이라고 풀이를 하고 "은숙이는 뜬돈이 생겼다며 좋아했다."를 보기월로 들었습니다. 풀이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두 가지 풀이에 같이 나오는 '우연히'가 '어떤 일이 뜻하지 아니하게 저절로 이루어져 공교롭게'라는 뜻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다음과 같이 다듬어 보았습니다. 뜬돈: 생각지도 않은 때 어쩌다가 뜻하지 않게 생긴 돈 우리가 흔히 '뜻밖에 재물을 얻음. 또는 그 재물'을 '횡재(橫財)라고 하는데 이 '횡재'를 갈음해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거저 얻거나 생긴 돈'을 '공돈(空돈)'이라고 하는데 '공돈'을 써야 할 때 떠올려 써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횡재' 또는 '공돈'이라는 말을 써야 할 때 '뜬돈'이라는 말을 떠올려 쓰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오늘도 토박이말에 마음을 써 봐 주시고 좋아해 주시며 둘레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는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4354해 열달 열여드레 한날(2021년 10월 18일 월요일) 바람 바람 #토박이말바라기 #이창수 #토박이말 #살리기 #뜬돈 #횡재 #공돈 #참우리말 #숫우리말 #순우리말 #고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