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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무엇을 보고 웃었을까?

주말 특집, 로마인들은 뭘 보고 웃었을까요?

당연히 로마인들도 유머를 즐겼다. 카이사르(짤방도 아래 영상에서 가져왔다)가 대폭소를 할 때가 마냥 유머스러운 상황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아스테릭스의 저자들은 드골을 카이사르에 빗대 풍자했었다. 참조 1)

여기에 대해 로마 희곡 전공자가 잘 설명한 글을 발견했다(참조 2). 플라우투스(Titus Maccius Plautus, BC254-BC184)와 테렌티우스(Publius Terentius Afer, BC195/185-BC159)의 희곡을 바탕으로, 로마 공화국 시절(카이사르 이전을 의미한다) 희곡에서 볼 수 있는 4가지 공식이 현대의 유머에도 통한다는 이야기이다. 한 번 들어가 봅시다.

첫 번째, 모름지기 모든 것은 이름부터이다. 이름부터 추측하기 쉬운 캐릭터가, 역시나 스테레오타입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그리스/로마식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직역하면 웃기는 이름이 한 두 가지가 아니며 고전으로 갈수록 그게 더 심했다. 물론 지금도 없지는 않다.

가령 포켓몬스터를 보면 주인공 이름 사토시는 똑똑하다의 의미이고, 한국어판 이름인 한지우는 똑똑한(智) 친구(友)의 의미로 넣었다. 미국판은? Ash Ketchum인데, 이게 “캐치”의 의미가 있다. Catch’em을 저렇게 쓴 것이다.

두 번째는 펀치라인이다. 뭔가 궤가 안 맞는 문장과 이어지는 어색한 정적, 뒤이은 해설이 주는 유머 감각이다. 플라우투스의 희곡에 나오는 한 주인공이 청중에게, “musca est meus pater”라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아버지는 파리라오.” 그리고 잠시의 정적이 흐른 다음, “아버지로부터 아무 것도 숨길 수 없기 때문이지” 하는 식이다.

내가 상당히 좋아하는 코메디언인 캐서린 라이언의 공연(참조 3)도 봅시다. 사실 캐서린 라이언은 자기가 공연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집대성하여 넷플릭스 드라마(참조 4)를 만들기도 했는데 다음 시즌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구성은 같다. 도발적인 말을 먼저 꺼내고, 그걸 서서히 풀어가면서 청중을 웃기는 방식이다.

세 번째는 게임이다. 두 번째에 해당하는 펀치라인이 계속 반복되면서 게임처럼 흘러가는 유머이다. Key & Peele의 이 에피소드를 봅시다(참조 5)? 선생이 출석을 부르는데 계속 통상적이지 않은 발음으로 이름을 부르고, 그 대상은 모두 다 중산층 백인 학생들이다. 이 의도적인 이름 잘못 부르기는 계속 이어지고, 학생들은 이름 발음을 고쳐주려 하지만 선생은 분노한다. 그런데 맨 마지막 흑인 학생만은 이름을 제대로 부르면서 끝난다.

다만 아무래도 제일 눈에 띄는 것이 이 네 번째, 제4의 벽 깨기인데, 우리나라 마당놀이에서 보듯, 청중과 커넥션을 유지하면서 극을 진행하는 구조다. 코메디는 아니지만 BBC/넷플릭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참조 6)을 보셨다면 알아차리실 것이다. 아마 이 구조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현대적인 코메디는 BBC/아마존의 Fleabag이 아닐까(참조 7)?

따라서 결론은, 로마인들의 코메디 또한 현대의 코메디와 별 다를 것이 없다입니다? 물론 2천년의 세월 때문에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내용도 많이 갖고 있다. 로마 시대의 희극 스폰서 절대 다수가 귀족 남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에 치우친 것은 요즘 시대에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귀족 남성들이 희극의 주요 스폰서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언제나 농담의 대상이었던, 부자이지만 나이가 많고 우둔한 로남(…)들이 스스로를 심각하게 여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아주 잘 먹힐 것 같다. 무대에서, 시장에서 그런 게 먹힌다는 걸 모두들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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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아스테릭스(2021년 6월 5일): https://www.vingle.net/posts/3769061

2. NO LAUGHING MATTER? WHAT THE ROMANS FOUND FUNNY : https://antigonejournal.com/2021/08/what-romans-found-funny/

3. Katherine Ryan Live at the Apollo (2017년 12월 31일): https://youtu.be/FybyRaScHrI?t=105

4. 더체스 다이어리 : https://www.netflix.com/kr/title/80223040

5. Substitute Teacher - Key & Peele(2012년 10월 18일): https://youtu.be/Dd7FixvoKBw

6. 모두 프랜시스 언더우드가 청중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Best of Kevin Spacey "House Of Cards" : https://youtu.be/xgsQ1-oOZkg

사실 BBC판도 동일하다. 프랜시스 어콰트가 청중을 싱긋 바라보는 장면을 보시라. https://youtu.be/UL9iyYIb_e8

7. 두 시즌동안 우리의 주인공은 제4의 벽을 232회나 깨뜨렸다! Literally Just Every Time Fleabag Looked At Us | Prime Video(2019년 8월 21일): https://youtu.be/YNkKlgzvO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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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정보전 능력
1. 첩자 파견 및 운용 : 확인되는 것만 최소 7명. 피난민 잡아다 소식 물어보는 수준에서 끝난 게 아니라 이순신이 직접 관리하는 전문직 첩자들임. 아예 일본군 본진인 부산포에서 순왜로 들어가 몇년간 지속적으로 첩보 보낸 고정간첩도 2명 있었고, 손수 페이퍼플랜 만들어 일본군 손에 넘어가도록 흘리기도 했었음 조정의 공식적인 첩보루트가 아니라 이순신 본인이 사적으로 관리하던 네트워크라서 원균은 쓰지도 못했고, 이순신이 칠천량 이후 복귀했을 때 유용하게 써먹음 2. 정찰을 통한 현지 정보 습득 탑승인원 4인 이하의 쾌속선으로 이순신이 운용한 탐망선 총계 110척 추정 높은산 정상에 탐망군 따로 두고 정찰을 계속 돌려서 정보습득 되고 나서야 전투 나감 척후를 적당히 되는놈 아무나 시키던 다른놈들과 달리 이순신 휘하에서 척후장, 별망군, 탐망선 등등의 장교는 전문직이었음 3. 피난민 활용 이순신이 백성과 피난민들 구휼에 존나 신경쓴 이유는 유교적 명분이나 인의도 있지만 정보수집 목적도 컸음 이순신이 백성들 잘 대접해준다니까 그쪽으로 피난 많이가기도 하고, 쓸만한 첩보 제공하면 보상도 많이해줘서 제보자들도 많았음 이를테면 한산도 대첩은 목동 김천손이 함대로 뛰어와서 적 함대가 견내량에 정박중이란 거 안 알려줬으면 불가능했겠지 정보제공자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훈련원 봉사 제만춘이 포로가 되서 나고야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해왔는데 얘를 잘 대접해서 포로생활 들은 다음 조정에다가 선처를 부탁함 4. 포로 심문 본래 조선군은 왜적을 잡으면(or 투항 해오면) 족족 목이나 따서 수급올리던 것과 달리 이순신은 포로한테서 정보를 캐내는데 주력함. 심문한 다음에 죽인 것도 아니고 선처 해주고 전력으로 씀. 적 수급 따오는 것보다 적 포로로 잡아오는걸 더 높게 쳐 줌. 5. 정보장교 광양현감 어영담이 대충 비슷한 역할을 했음 어영담은 약간 사람이 어설프고 업무능력이 떨어져 평생  남해안 일대 외관직만 떠돌아다니던 관료였으나, 오랜 외관 경험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물길을 그냥 외우다시피 한 인간 GPS였음. 이순신마저 자기도 이 능력 못따른다고 인정함 임진왜란 초기, 아직 전라/경상도의 물길에 서툴렀던 이순신의 정보장교 역할을 하며 조선수군의 길잡이를 해줬고 이에 이순신은 어영담이 저지르던 부실행정, 내지는 부정부패 등등을 다 눈 감고 무마해줌. (원래 이 양반 성격상 이런거 걸리면 짤 없이 사형.) 전근대시기 조정도 아니고 일개 장군이 자발적으로 운용한 첩보능력으로는 특이한 수준임 비슷한 케이스를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장군이 군주던가 아니면 단기간에 일시적으로 운용된 수준임. 반면 동시기 조정은 선조 이하 전원이 이중간첩 요시라한테 놀아나고 있었음 6. 동맹국 정보자산 활용 일본은 조선 조정보다는 명나라 황실을 협상대상으로 봐서 북경과 오사카에 서로 외교사절을 자주 파견했음. 선조가 주는 정보는 쥐뿔도 없으니 이순신은 그나마 같이 작전하는 명나라군한테서 정보를 얻어야 했음. 진린 같은 이순신 빠돌이를 제외하면 명나라 장수 대부분은 조선군을 자신들보다 아래로 봤으므로 콧대가 하늘을 찔렀고 이순신은 이런 놈들 비위를 맞추려고 자존심도 접어가며 없는 살림에 연회를 베풀었음. 술이 거나하게 취한 명나라 장수들은 기생 옆에 끼고 따라주는 술 받으며 허세 반 진심반 취중진담을 나눔. 나오는 내용의 9할이 개소리였지만 그중 한개 정도는 쓸만한 정보였다고 함. 조선 조정의 외교력이 씹창이었던 관계로 이순신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같은 내용들을 이렇게 건너건너 들어야 했을 정도임. 명나라 측에겐 정말 개나소나 알 정도로 가치없는 것들이었을지 몰라도, 이순신은 그런 것들 조차 정말 감지덕지했을 정도임. 출처 : <임진왜란 기간 충무공 이순신의 정보활동에 관현 연구> 출처 크 역시 전략의 군주
우리가 알고 있는 삼고초려는 허구다!
정사 삼국지가 나오기 전 위나라 어환(魚豢)이란 역사학자가 쓴 《위략(偉略)》이라는 역사서가 있습니다. 정사《삼국지》를 쓴 진수는 제갈공명이 죽기 2년 전에 태어난 자이지만, 어환은 그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으로 당시의 상황을 정리했는데, 위나라 역사가였던 만큼 본인이 모시던 조조의 천하통일 야망을 꺾은 제갈공명에 대해 더 면밀히 분석했을 겁니다. 또한 수십 년 뒤 진나라 시절 사마표가 쓴 《구주춘추(九州春秋)》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위략》에서는 유비와 제갈공명의 만남에 대해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그 내용은~ 두두두둥……! 제갈공명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당시 형주에 있던 귀족들은 곧 북쪽에서 조조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근심하던 중 황제로부터 숙부로 인정받은 명망가, 유비 장군이 왔다는 소식에 단체로 만나러 갔다네요. 이에 유비가 이들과 이런 저런 정세 이야기를 했는데, 제갈공명도 질문을 했다지만 유비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하지요. 우리가 흔히 게임이나 만화에서 여리여리한 꽃미남 스타일로 제갈공명을 묘사하지만, 《위략》엔 “투박한 생김새여서 잘 눈에 띄지 않았다.”고 적혀 있답니다. 원래 제갈 가문은 서주에서 이름을 날리던 집안이었는데 서주가 유비, 여포, 조조로 주인이 계속 바뀌며 대학살을 당하던 전란을 맞아 그나마 안전한 형주로 이사 온 상황이었죠. 그래서 피난 와중에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제갈 가문 자제들이 각자 다른 주군을 모시게 된 겁니다. 당시 형주 양양 땅에 이사 온 제갈공명은 방덕공, 황승언 등 여러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양양 귀족 자제 모임의 주요 멤버이기도 했으니 농사나 짓던 평민은 아니었지요. 그래서 이 멤버들이 지역 대표로서 유비를 만나러 갈 때 같이 갔던 겁니다. 그러나 유비 와의 모임에서 별다른 계책을 못 들은 다른 유지들은 실망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제갈공명은 유비에게 좀더 어필하려고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비는 이들이 돌아가자 아직 제갈공명이 남아 있는 줄 모르고는 심심하면 하던 취미 활동을 했더랍니다. 요즘 같으면 휴대폰 게임 같은 것을 했겠지만, 당시 유비가 한 소일거리는 바로~, 소 털로 새끼 꼬기. 청년 시절 돗자리 장사를 하던 때부터 즐기던 시간 때우기 버릇이었다지요. 그 장면을 본 제갈공명은 크게 실망했나 봅니다. 그래서 유비에게 한소리 했답니다. 이에 유비가 제갈공명의 진가를 알아보고 정중히 사과한 후 책사로 모셨다고 합니다. 출처)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최초 최고편-
어메이징 빅토리아 시대를 설명하는 만화
영국 역사에서 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부터 1901년까지로 빅토리아 여왕이 다스렸던 시대를 의미함.  이 게시물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특이했던 면모를 그린 만화를 소개하고, 설명을 덧붙이려고 함. 닥터 파니 시럽은 당시에 감기부터 콜레라, 이질까지 모두 치료할 수 있다고 광고된 유명한 "기적의 약"임. 아기들을 위한 약으로 광고되었는데, 성분에는 알코올, 모르핀, 클로로포름이 포함되어 있었음. *클로로포름: 수면마취제로 유독물질로 분류됨. 클로로포름을 쓰면 부정맥을 일으키게 되며 호흡을 억제하게 됨. 호흡이 억제되면 심하게는 사망에 이를 수 있음. 실제 신문기사 광고 "어머니들에게; 모든 아기들은 닥터 파니 시럽을 먹어야 합니다. 완전히 안전합니다. 아편과 합성 모르핀은 포함되어 있지 않답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죽음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잘 짜여진 애도 관습으로 유명한데 왜냐하면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임.  그리고 1839년 사진기술인 다게레오 타입이 발명되어 추모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음. 죽은 가족과 살아있는 가족이 함께 사진을 찍어서 추모를 한 것임.  보통은 누워서 촬영했지만 앉은 상태로 촬영하는 경우도 있었음. 사진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들었고 노출 시간이 20분으로 길었음. (이것도 8시간 노출에서 많이 줄어든 것) 그래서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가족들도 20분동안 꼼짝 않고 앉아있거나 서있어야 했음. 정신분석학의 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코카인의 열렬한 신봉자였음.  프로이트는 코카인을 거의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적의 치료제라고 생각을 했고, 환자들에게 처방했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코카인을 취했음. 일부 학자들은 코카인의 영향으로 오늘날 유사과학이라고 여겨지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나왔다고 생각함 ㅋㅋ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유사과학이라고 여기는 학자들도 많다함. 오늘날 애들이 장례식 놀이를 한다면 굉장히 이상해 보이겠지만, 빅토리아 시대에는 장례식 놀이를 하는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음. 이 놀이는 시대를 반영한 것인데 빅토리아 시대에는 사망률이 굉장히 높았음. 높은 사망률은 아이들이 조부모님, 부모님 뿐만 아니라 가까운 형제, 자매, 친구에게서도 죽음을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함.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에는 작은 관과 상복을 담은 특별한 장례식 놀이용 인형세트도 제작이 되어서, 아이들의 장례식 놀이를 도와주곤 했음. 많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귀족적인" 창백한 안색을 가지고 싶어했음. 그래서 화장품 회사들은 비누, 로션, 파우더 등 다양한 제품에 비소를 첨가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웨이퍼 등 디저트류에 첨가해서 섭취하도록 권고되었음. *비소: 사약에 쓰이던 독약. 씨씨(Sisi)로 더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 여왕(1837-1989)은 남다른 아름다움과 화려한 머리, 그리고 패션 감각으로 유명했음. 그래서 그녀 자신만의 미적 기준을 맞추기 위해 다양한 제품을 사용했음. 그리고 이 제품들 중 일부는 굉장히 특이한 성분들을 함유하고 있었음... *경랍: 향유고래의 머리 부분에 있는 저유조직(貯油組織)에서 얻은 기름을 냉각하여 고래 기름을 분리한 후 석출시켜 얻은 고형분 이 외에도 매일 저녁에 올리브 오일로 목욕을 했고, 미스트로는 갓 딴 보라색 꽃과 사이다 식초 등으로 만든 보라색 식초를 사용했다고 함. 그리고 건초로 만든 풀바디 스파 등도 즐겼다고 함.. 빅토리아 시대 말기, 패션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하는 사람들은 모자에 특히 집착했음. 특히 깃털 모자가 유행했는데, 새의 깃털, 새의 머리, 새의 날개 아니면 동물 전체를 올려서 장식했음. 이 시기에 장식을 위한 새 수요가 매우 높아서 패신저 비둘기라는 종은 멸종까지 되었다고 함. 새뿐만이 아니라 다람쥐, 쥐, 고양이 등 다른 동물들도 모자를 장식할 용도로 쓰이기 위해 희생되었음... 1883년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프랑스 패션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고양이의 머리를 이용한 장식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고양이 사육도 정규 사업으로 발전하고 있다"라고 했음. (근데 고양이로 모자를 장식하는 일은 없었던 일은 아니지만 뉴욕타임즈에서 과장했다고 보긴 한대..)  셸레녹(綠)이라고 알려진 녹색 안료는 '비산구리(구리 비소)'라고도 부르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독성물질인 비소가 포함된 안료임. 하지만 빅토리아 시기에 셀레녹은 벽지부터 드레스, 장난감, 사탕에 이르기까지 모든 녹색 색상에 사용되었음. 왜냐하면 색깔 자체는 정말 독특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임..... 근데 다들 알다시피 비소가 함유된 안료는 특히 소화를 시키거나 숨을 들이마실때 매우 위험함. 특히 셸레녹 벽지의 경우는 비소 가스가 방출이 되어서 다른 제품들보다도 훨씬 위험했다고 함.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5시에 가지는 티타임, 설탕 소비, 식용 색소의 사용이 특히 보편화되었음. 근데 이것은 때때로 굉장히 위험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알록달록한 티타임을 위해서 디저트에 사용하는 안료들이 황산구리(파란색), 비산구리 (녹색), 수은(붉은색) 등의 물질이었기 때문임..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이 독성 물질들을 혼합하여 디저트를 위한 아름다운 색을 내는 방법을 공유하기도 했는데, 프랄린 등의 디저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병에 걸렸고, 죽는 경우도 많았음. 19세기에는 증기기관차가 등장했고,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음. 증기기관차의 등장은 사람들을 이전보다 더 멀리, 더 빨리 여행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여성들에게 위험하다는 인식(루머)이 있었음. 빅토리아 시대에 퍼져있던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던 어떤 사람들은 여성의 몸은 고속 여행을 감당하지 못해서 (80km/h) 여행을 하면 기절하거나 광기에 사로잡히거나 심지어 자궁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었음. 그래서 때때로 여성들은 증기 기관차로 여행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함.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템즈강은 열악한 하수 시설로 악명이 높았음. 템즈강에는 런던에 사는 모든 인간들의 배설물, 공장의 폐기물, 도축 쓰레기들이 모조리 버려졌는데 19세기 전반에는 런던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면서 쓰레기 문제가 더욱 심해졌음. 원래는 '신선한' 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상수원이었던 템즈강이 불쾌한 냄새를 풍기게 되었고 이 냄새는 정말로 참기가 어려웠다고 함. 특히나 더웠던 1858년 여름에는 "The Great Stink", 즉 "대악취"로 알려진 지독한 악취로 고통받았음. 그 전까지는 의회가 지지부진하면서 악취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고 했고, 사람들은 그저 향긋한 손수건이나 담배, 석회 등을 사용해서 냄새를 즉각적으로 가려야만 했음. 근데 1858년 여름에 정말로 참을 수 없는 냄새가 영국 전역을 덮자 그제서야 영국 의회는 템즈강의 하수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함. 그래서 2개월만에 악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함. 현재의 템즈강 빅토리아 시대에 인기있었던 약 중에 하나가 "RE-ANIMATING SOLAR TINCTURE"라는 약이었는데, 이 약의 효능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부터 살아날 수 있음"이었음. 그러니까 자살, 발작, 추락, 질식 등의 모든 죽음을 경험했을 때 이 약을 마시면 (이 약과 신체가 적절하게 작용한다면) 살아날 수 있다고 광고했음. 지금 생각하면 약장수 이야기같지만 빅토리아 시대에는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이 약이 팔렸다고 함. 솔라 팅쳐를 제작한 시블리 박사(Dr. Sibly)는 루너 팅쳐라는 약도 만들었는데, 이 약은 성관계가 부족할 때, 너무 잦은 성관계를 했을 때, 월경이 심할 때, 임신이 안 될 때, 폐경이 되었을 때.. 사용하면 효과가 있다고 홍보했음. 효과는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 빅토리아 시대에는 장례식에 상복 베일을 착용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었음. 길이는 약 6피트 정도이고 검은색 크레이프로 제작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검은 염색 안료의 일부가 상당히 독성이 강해서 가볍게는 발진부터 심하게는 호흡기 질환까지 다양한 질환을 일으켰음. 빅토리아 시대에 과부들은 특히 만 1년간 크레이프 베일을 쓰는 것이 예절이고 관습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심한 위험에 노출이 될 수밖에 없었음.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다음에 파리로 개선 행진을 했는데, 이 때 이집트 출신의 기마병들인 마멜룩 부대가 나폴레옹을 호위했음. 그 영향으로 이집토마니아(Egyptomania)라는 이집트 문화 열풍이 파리를 휩쓸었음. (맘루크 부대라고도 부름) 이집토마니아의 유행으로 고대 미라를 관찰하거나, 미라 등에서 찾은 보물들을 훔치거나, 미라의 신체 부분을 "기념품"이라고 가지는 이벤트들이 영국 곳곳에서 열렸다고 함.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유행처럼 일어났던 현상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긴 하대...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이런 종류의 이벤트를 즐겼던 것이 확실한데, 영국의 외과의사인 토머스 페티그루(Thomas Pettigrew, 1791-1865)라는 사람은 이런 종류의 수집에 빠져있어서 미라를 이용한 파티같은 걸 많이 열었다 함.  <허클베리 핀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 등의 소설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은 제인 오스틴을 엄청 싫어했다고 함. 마크 트웨인 친구인 작가 윌리엄 하웰즈 (William Dean Howells, 1837-1920)는 제인 오스틴을 제일 좋아했는데, 친구가 제인 오스틴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친구 앞에서도 제인 오스틴에 대해 욕을 했음.  사실.. 마크 트웨인이 제인 오스틴에 대해서만 욕을 한 건 아니고 워낙 많은 사람에 대해 욕을 했지만......... 제인 오스틴 덕후 앞에서도 제인 오스틴 욕한 것은 너무 심한 건 아닌가 생각을.. 토마스 덴트 뮈터(Thomas Dent Mütter)라는 의사는 화상 환자들과 기형으로 태어난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많은 기술들을 개발했음. 필라델피아에서 에테르 마취제를 투여해서 수술한 첫번째 의사라고도 함. 그리고 화려한 스타일로도 유명했음. 이것은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함. 빅토리아 시대 남성복의 기본적인 특징은 깔끔하고 베이직한 라인, 어두운 색, 디테일이었는데, 짙은 녹색, 검정색, 회색 등의 색이 유행했음. 이 시기에는 여성들의 옷에서 코르셋이 유행했던 것처럼 남성들도 코르셋을 입었는데 후기 빅토리아 시대로 가면서 재킷이 루즈하게 변화함. 그리고 탑햇을 썼고 모닝코트, 이브닝코트를 번갈아가며 입을 정도로 남성 패션도 화려한 양상을 띔. 빅토리아 시대 전후에는 대금욕의 시대라고 해서 남성이 패션에 신경쓰는 것을 탐탁치 못하게 보았지만 빅토리아 시대에는 남성들도 패션에 대해 많이 신경쓰고 깔끔하게 꾸미는 것이 미덕이었음.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책 공포증"이 있었음. 특히 1880년에서 1920년 사이는 일반 대중들이 "도서관의 책이 전염병의 원인"이라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었음.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많은 미국, 영국인들은 도서관 책이 결핵에서 천연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병을 퍼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음. 그 결과 도서관에서는 책을 소독했는데, 이 때 사용했던 소독 방법은 석탄산 결정체의 증기를 책에 쐬는 것, 포름알데히드(..)를 이용하는 것이었음. 그리고 만약에 아픈 사람과 접촉했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책을 완전히 파괴하기도 했음.  원출처 / 2차 출처 : 더쿠
프랑스-호주 잠수함 계약 파기의 뒷이야기
프랑스-호주 잠수함 계약 파기 사건의 뒷이야기를 보니까 좀 더 흥미롭다. 피가로가 이걸 어떻게 취재했는지는 모르겠고, 아마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정도...라고 보시면 되겠다. 피가로 기사(참조 1)는 계약 파기 건을 세 가지 막으로 나눴다. 첫 번째 장, "음모". 지금으로부터 18개월 전,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 스스로가 의문을 제기한다. 비핵을 선언해와서 핵잠수함 건조는 커녕 남의 나라 핵잠수함 방문도 거의 거절해왔던 호주가 이제는 "타부"를 깰 때가 된 것 아닌가? 더군다나 프랑스와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호주 정부와 국방부 사이에서 늘 논쟁을 일으키는 주제였다. 프랑스와 계약을 체결한 2015년 이래 호주는 총리가 3명이 바뀌고, 국방부장관은 6명이 바뀌었다. 이러니 전략 논쟁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며, 중국의 위협에 대해 모리슨 총리는 호주가 "포위당한 요새"라 느끼고 있었다. 모리슨 총리의 우려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총리 자신과 국방부장관, 육군 및 해군 참모총장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 영국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두 번째 장, "보리스 존슨". 2021년 3월 영국과 호주 간 해군 참모총장 회담이 시작이었다. 이때 호주측이 제안을 한다. "미국 핵잠을 도입하려 하는데 영국이 도와줄 수 있겠는가?(참조 2)"였다. 영국은 바로 작전에 돌입한다. 이른바 Operation Hookless(참조 2). 당시 이 건에 대해 아는 이는 영국 내에 10여명에 불과했다고 하며, 작전 총괄은 보조의 외교안보 보좌관, John Bew였고, 보리스 존슨 스스로가 이 작전을 강하게 추진하도록 했다. 그 결실이 바로 올해 개최됐던 콘월의 G7 회담이었다(짤방도 그 당시 사진이다). 이때 세 정상이 만나서, 자기들끼리 계정을 따로 파자는(이건 국방부 모 과장님의 표현을 빌렸... ) AUKUS를 논의한 것이다. 그래서 상황은 마지막 제3장으로 흘렀다. 세 번째 장, "비밀계약". G7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언론은 커녕 프랑스도 당연히 몰랐다. 피가로에 따르면 한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쩌라구요? 우리가 커피 자국이라도 분석해야 했습니까?" G7 이후 차례로 프랑스를 방문한 호주와 미국도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프랑스가 그때 즈음 해서 낌새를 눈치챘다는 점일 것이다. 아마도 늦여름 즈음, 프랑스가 정부 채널을 통해(계약 당사자인 Naval Group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참조 3), 기존 계약상 만들기로 한 재래식 잠수함 대신 "핵잠수함 건조"를 호주에게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호주는 계약은 계약이라며 이를 거부한다. 호주가 워낙 비핵을 천명한 나라인지라 프랑스도 아마 더 강하게 밀어붙이기는 머뭇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호주는 8월 30 오전까지, "잘 되어가고 있다"는 통지를 프랑스에 보냈고, 9월 15일 오전에는 "기본설계(basic design)"에 동의한다는 호주 정부의 공문까지 왔었다. 그리고 15일 오후에 계약 파기 발표. 아마 호주 실무진도 자기 정부의 결정에 대해 모른 채로, 공문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형님이 결정을 내렸으니 어쩔 수가 없겠다. 핵심은 프랑스가 갖고 있는 인도태평양에 대한 핵심 이익을 다른 EU 국가들이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Nord Stream 2 때문에 이번에는 폴란드조차(!) 프랑스 편을 들고 있기는 하지만, 마침 유력한 독일의 총리 후보인 숄츠는 국방비의 정부 재정 중 2%를 지지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 혼자 EU 차원에서 국방력 투사 및 증대가 가능할까? 피가로 및 르몽드의 별도 사설도 이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4). 유럽이 밀려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르드리앙 프랑스 외교부장관이 영국을 비유한 것이 재밌다. "영원한 기회주의/opportunisme permanent"라는 표현인데, 천년을 옆에서 지켜봐왔으니 그 말이 맞기는 맞... ---------- 참조 1. 짤방도 여기서 가져왔다. 차례대로, 보죠(보리스 존슨), 스코모(스콧 모리슨), 바이든 순이다. Crise des sous-marins: dans les coulisses de la «trahison» du siècle(2021년 9월 21일): https://www.lefigaro.fr/international/crise-des-sous-marins-dans-les-coulisses-de-la-trahison-du-siecle-20210921 2. ‘Like a scene from le Carré’: how the nuclear submarine pact was No 10’s biggest secret(2021년 9월 18일): https://www.thetimes.co.uk/article/like-a-scene-from-le-carre-how-the-nuclear-submarine-pact-was-no10s-biggest-secret-dj7z5f8bh 3. 프랑스 네이벌그룹 회장의 이 인터뷰가 내용이 많다. 가령 계약금 증액 대부분은 호주가 야기한 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수함 대수 증가 등 중간에 호주가 요구해서 바뀐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Crise des sous-marins : le président de Naval Group rompt le silence(2021년 9월 22일): https://www.lefigaro.fr/societes/crise-des-sous-marins-le-president-de-naval-group-rompt-le-silence-20210922 4. Sous-marins : Biden torpille le «contrat du siècle» entre la France et l'Australie, les leçons d'un Trafalgar indopacifique(2021년 9월 16일) : https://www.lefigaro.fr/international/joe-biden-torpille-le-contrat-du-siecle-les-lecons-d-un-trafalgar-indopacifique-20210916 Crise des sous-marins : « Ce n’est pas que la France qui est écartée du réalignement des alliances dans l’Indo-Pacifique, c’est aussi l’Europe »(2021년 9월 22일): https://www.lemonde.fr/idees/article/2021/09/22/crise-des-sous-marins-ce-n-est-pas-que-la-france-qui-est-ecartee-du-realignement-des-alliances-dans-l-indo-pacifique-c-est-aussi-l-europe_6095567_3232.html
한글날 즈음.
'훈민정음은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1446년 9월 29일 ‘세종실록’,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400여년이 흘러 1882년 양력 8월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조선에 온 청나라 오장경 부대 막료 설배용(薛培榕)이 경성 거리를 구경하며 이렇게 기록하였다. ‘농부들도 모두 글을 알고 집집마다 모두 편안히 읽으니 당 태종이 군자의 나라라고 한 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모음을 구성한 ‘천원지평인립(天圓地平人立: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며 사람은 서 있다)’이라는 삼재(三才) 원리와 태극, 음양, 오행, 삼재, 그리고 주역을 비롯한 유교 경전에 나타나고 구성된 성리학적 원리들을 동원하여 반포 3년전인 1443년 겨울 부딪쳤던 저항은 크게 무마되고 기성 지식사회의 동의도 얻을 수 있었다. 똑똑한 세종이 설득의 도를 꿰고 있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50년도 지나지 않은 1490년 충청도 회덕에 사는 여자 신창 맹씨는 함경도에 근무하는 군인인 남편 나신걸로부터 언문 편지를 받았다.(현존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 그리고 100년 뒤 안동에 사는 원이 엄마는 1586년 ‘둘이서 머리 하얗게 되도록 살다 함께 죽자더니 먼저 가냐’며 먼저 죽은 남편 원이 아빠 이응태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이 편지를 읽으면 꼭 꿈에 나와 말을 걸어달라’고 적혀 있다. 원이 엄마는 편지 첫머리에 남편을 ‘자네’라 불렀다. 성리학에 매몰되기 전인 조선 초 남녀 관계는 평등했다는 사실까지,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 ‘언문’ 편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1901년(광무 5년) 정월 25일 조봉길이라는 사내가 여섯 살 먹은 딸 완례를 윤참판 댁에 종으로 팔았다. 딸을 팔고 받은 돈은 찰벼 다섯 섬, 메벼 네 섬과 가을보리 한 섬이었다. 계약서는 지수남이라는 사내가 언문으로 작성했다. 1907년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정부 학부(學部) 산하에 ‘국문연구소’가 설립됐다. 국한문 혼용이 논쟁 끝에 채택되고, 훈민정음 이래 정서법이었던 ‘소리 나는 대로 쓴다’는 원칙이 폐기되고 ‘발음과 무관하게 단어를 표기한다’는 새로운 원칙이 확립됐다. 1908년 8월 주시경은 서울 서대문구 안산의 봉원사에서 국어연구학회라는 민간연구회를 창립했다. 이 학회가 오늘날 한글학회 뿌리다. 이제 한글을 세계 문자로 발전시키기 위해선 한글에 훈민정음식 표기법을 입히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소리나는 대로 쓴다는 것을 말하나? - 조선일보 박종인의 땅의 역사에서 요약 -
[책 추천]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 5
안녕하세요! 책과 더 가까워지는 곳 플라이북입니다. 오늘은 개천절을 맞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책 5권을 소개합니다. 이 책들을 통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01 한국 역사의 뿌리가 궁금해질 때 우리가 잘 몰랐던 한국의 고대사에 대해 설명해 주는 책 한국 고대사 윤내현 지음 | 만권당 펴냄 이 책 자세히 보기> 02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제대로 알고 싶을 때 선사시대부터 대한 제국에 이르는 한국사를 망라한 책 이덕일의 한국통사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 펴냄 이 책 자세히 보기> 03 한국의 역사를 재미있게 공부하고 싶을 때 유물과 유적을 따라 떠난 삼국시대의 재발견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펴냄 이 책 자세히 보기> 04 잘 알지 못했던 한국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싶을 때 우리가 잘 몰랐던 500년 고려의 역사를 담은 책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 박종기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이 책 자세히 보기> 05 어렵고 복잡한 역사를 한 번에 알고 싶을 때 500년 조선왕조의 기록과 역사 지식을 한 권에 담은 책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이 책 자세히 보기> 지금 플라이북 앱에서 또 다른 책 무제한으로 추천받기! 클릭!>
"총알이 날아와 옆에 있던 친구 관자놀이를 관통했어요."
<진영숙 양(15세, 당시 한성여중 2학년)의 유서>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닌,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 이 글의 주인공인 "진영숙" 양은 57년 전 4월 19일 오후 4시 학교를 파한 후 시위에 나가기에 앞서 홀몸인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집에 갔다가 시장에 장사하러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편지를 써놓고 거리로 나섰다가 성북 경찰서 앞으로 이동하던 버스에서 구호를 외치던 중 버스 안에까지 실탄 사격을 하던 경찰에 의해 사살당했다. --------------------------------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오 우리는 당시 우리보다 어린, 살아있다면 지금 어르신들일 학생들의 피로 쓰인 민주주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소 그리고 이승만 ㄱㅅ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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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경주 기마무사 말 갑옷 출토 복원 말 갑옷 자체는 2009년 쪽샘 지구에서 처음 발견되었지만 훼손이 심해서 복원에 난항을 겪고 있었고 쪽샘지구 다른 보분에서 추가로 출토되면서 온전한 복원이 가능하게 됨 이게 2020년 하반기 참고로 쪽샘지구는 그 유명한 주차장 사건의 그 자리임 신라 말 갑옷과 기마무사 갑옷 복원이 중요한 이유가 그 동안 고구려 기마 무사 갑옷 양식은 벽화로 남아있었지만 발굴에 있어서 훼손과 손상이 심해 실물 복원에 난항이 있었음 <지층채로 박리시켜 갑옷 유물을 발굴하는 모습> 그러니 이번 쪽샘지구 갑옷 출토는 다른 말 갑옷 출토품은 일부 부위의 찰갑 조각밖에는 없어 전모를 추정할 수 있는 여지가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주와 마갑이 무사의 갑옷, 말갖춤과 함께 모두 포함된 종합 유물세트가 나왔으니 동아시아권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대발견이었다. 라고 할 정도 동아시아 사료학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발굴인거지 그 동안의 갑옷 양식은  벽화에 그려진 외형과 부분적으로 출토된 부위를 가지고 예상하여 상상을 가미시켜 복원한거에 불과하다면 이번은 온전한 과거 기마 부대의 갑옷과 말 갑옷을 완벽히 재현했다고 할 수 있음 참고로 쪽샘지구는  2002년 발굴 시작 잠시 중단되었다가 2006년 다시 발굴 거의 20년 동안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아직까지 완전 발굴까지 기약이 없을 정도로 유물 노다지 장소임... 사실 경주 전역이 다 그렇긴 하지만...  (출처) 경주 유물 발굴이 완벽하게 진행된다면 정말 엄청난 것들이 많이 나올텐데 예산 문제로 더뎌진다는 게 참 아쉽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