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ato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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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참전 군인중 가장 기묘한 인물.jpg

이렇게 입체적인 인물이 다 있다니
zato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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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기독교신자라니 귀하네요
@dearemilia 그러게요. 저 시대에. 그것도 일본에서.. 귀하네요.
뭐지 이캐릭터는 ㅋㅋ
그와중에 예수쟁이
머지...진짜 ㅁㅊ건가...종잡을 수 없네...
우리나라 개독교 비긴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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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발전된 근 미래 시대,  인간들은 너무 발전한 나머지 허영과 타락에 빠져듦 그들의 허영은 삶과 일조차 분리했기에 모든 고된 일들을 처리할 기계를 자신들의 모양을 본 따 만듦 온갖 고된 일들은 기계가 다 처리하며 인간 사회는 더 급 성장함 그러던 어느 날,  B1-66ER 이라는 기계가  처음으로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람을 죽임 이유는 멸시와 학대, 고문 등으로 기계를 해쳤기 때문에 일어난 일 하지만 B1-66ER은 재판에서 정당방위라며 죽고 싶지 않다 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당한 재판 또한 없었음 인간들은 것도 모자라 같은 종을 모두 폐기하기로 결정함 기계 뿐만 아니라 몸의 일부를 기계로 바꾼 인조인간들,  순수 몇몇 자유옹호자들 모여 시위를 했지만.. 비폭력 시위대였던 몇백만의 무리를 모두 사살해버림 그리고 그 일은 인간들의 기계 압살 전쟁으로 이어짐 인간들에게 추방당해 살아남은 기계들은 새로운 땅인 '약속의 땅'에 정착해 스스로 인공지능을 만들고 종을 생산하며 이윽고 세월이 지나 '01'이라는 나라를 만듦 기계들의 나라 01에서 만든 모든 제품들이 인간 나라에서 만든 제품보다 뛰어나자 점차 인간들은 생활 전면의 모든 제품을  01 나라 것에 의존하게 됨 그러자 01 국가의 신뢰도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반대로 인간 사회는 돈, 신뢰도, 발전도 역시 추락하게 되는 일이 벌어짐 그러자 인간들은 01 국가를 견제하고 고립시키기 위해  나라끼리 모여 협약을 맺고 01국가의 모든 제품들의 배제하려고 함 그런 UN에 01 특사들이 나타나  사과와 인간들의 정복인 정장을 갖춰입고 서로 이해가 되는 교류를 정하길 원한다고 요청했지만 인간들은 그 모습에서 오히려 모멸감을 느꼈고 과거 기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기억을 가진 인간들은 01국가에 선공격을 날리게 됨 하지만 예전의 기계들이 아니었고, 기계들은 압도적인 힘으로 인간에 대항해 반격에 나섬 결국 기계가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됨 절박해진 인간들은 기계의 에너지원인 태양열을 차단하면 기계들을 이길 수 있을거라 판단하고 태양을 없애버리기로 함 태양을 볼 수 없도록 하늘에 검은 물질을 뿌려버리는 것 인류는 '검은 물질은 우리가 뿌린 물질이니  이기고 나서 다시 제거하면 되는 거 아님?'이라 생각했음 그렇게 전쟁에서 이기고자 인간들은 스스로 하늘을 덮어버리게 된다 인간에게는 자비를 기계에게는 죗값을 치루길 바라며.. 이 작전은 실제로 초반에 효과가 있어서 인간들은 에너지원이 떨어진 기계들을 처리해 나가며 다시 우위를 점할 수 있을거라 가능성을 봄 하지만 그들이 너무나 간과할 것이 있었으니 기계들은 스스로 국가를 건설하고 성장하면서 인간의 몸을 연구해왔음 바로 인간의 몸은 대부분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 인간의 몸은 안에서 계속해서 생체전기와  열, 운동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생물체였음 그리고 인간의 저런 요소가 기계들의 충분한 대체 에너지원이 되어 너무나 잘 돌아가게 한다는 사실 결국 전쟁은 기계들의 승리로 끝났고, 기계들은 정복자가 되었음 인류가 스스로 하늘을 박살냈기 때문에 그나마 살아 남은 생존자들 역시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버림 이제 인간과 기계는 새로운 공생관계가 수립됨 살아남은 인간들에게 기계들은 한 가지 제안을 함 그것은 육신을 바치면, 인간들은 그 사실조차 까먹는 신세계를 선사하겠다는 것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의 행복한 가정 ......을 꿈꾸고 있는 자원 에너지 소스가 되어버린 인간 ...인간들 ...인류 그렇게 인류는 자신들이 기계 에너지원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꿈 같은 현실 세계를 '꿈 꾸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음 후에 네오라고 불릴 사람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Matrix> 1999년作 출처ㅣ더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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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절규’에 적힌 메시지의 미스터리가 풀렸다.
[아이디어 래빗]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가 제작한 대표작 ‘절규(THe Scream)’를 둘러싼 의문의 메시지 미스터리가 풀렸다. 작품 ‘절규’에는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Can Only have been painted by a madman)’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어 미술계에는 다양한 추측이 제기되어 왔다. 미술학자 일부는 뭉크에게 악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작품을 훼손하고 뭉크를 비하하기 위해 이 같은 메시지를 적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연필로 쓴 메시지는 사실 뭉크 본인이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의 연구를 담당한 큐레이터 ‘마이 브리트 굴렝’은 “글자 하나, 단어 하나까지 매우 신중하게 분석했다. 이것은 뭉크의 필체와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라며 “의심할 여지 없이 뭉크가 쓴 것이 맞다. 만약 작품을 훼손하기 위한 의도였다면 뭉장을 더 크고 선명하게 표현했을 것이다”고 전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Can Only have been painted by a madman) 해당 글귀는 1895년에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이 완성된 1893년부터 2년이 지난 후인데, 당시 오슬로대 학생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는 뭉크가 비정상적이고 미친 남자라는 주장이 등장했었다. 이것 뿐만 아니라 당시 미술계에서는 뭉크의 정신 상태가 의심이 된다는 이야기가 다수 등장했었다. 작품 ‘절규’가 그의 상태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뭉크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지자 해당 문장을 작품에 추가한 것으로 예상된다. 연구를 담당한 ‘마이 브리트 굴렝’은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라는 문장은 자신이 정신병자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격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 섞여 있다”라며 “이 문장을 쓰면서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지를 스스로 통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글: Idea Rabbit News Editor]
지금과는 사뭇 다른 그시절 친구들과 소통 할 수 있었던 방법들
지금은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집 전화가 없는 집도 많고 유치원 - 초등학생들도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때 당시에는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핸드폰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았음 그럼 어떻게 친구들이랑 연락했냐고? 집전화로 " 안녕하세요 두팔이친구 김뫄뫄인데요 혹시 두팔이 집에 있나요? " 하며 친구집에 전화함 아니면 친구들이랑 약속 시간을 맞춘것도 아닌데도 늘 놀던 시간대에 놀이터에 나가면 친구들이 있었음 집전화도 안받고 놀이터에도 친구가 없으면 친구네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대문너머 뫄뫄야.. 하고 부르면 친구 어머님이 친구 불러줌 그리고 친구 만나면 무족권 방방은 필수코스임 (우리지역은 퐁퐁이라고 부름) 30분에 500원정도로 기억하는데‎, 시간 끝나가면 뫄뫄 나와라~~~~ 하고 아저씨나 아줌마가 불러줌 방방 다 타고 먹는 슬러쉬가 리얼 개존맛 나는 콜라맛 성애자 그리고 생일에는 친구들 모여서 1차는 집에서 생파 조졌다가 2차로 마트 안에 있는 놀이시설까지 조져야 국룰이였음 평소엔 비싸다고 엄마가 안보내줘서 생일같은 특별한 날에만 갈 수 있는 코스였음 고학년으로 진급하면 집에서 생일파티 귀찮다고 맥도날드에서 생일파티 열어주는 어머님들도 많았음 요즘도 맥도날드에서 저런거 해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생일파티의 피날레는 노래방 친구 생일 선물은 아묻따 문구세트 저기에 포장도 정성스레 해줘야됨 그 시절 여자아이들이 노는 법... " 나 이 캐릭 머리 하나만 주면 안돼??ㅠㅠ 내가 가진 이거랑 교환하자!! " 해서 내가 가진 캐릭 머리 스타일 떼어주다가 대가리 몸통에서 분리되서 오열 한 경험 있는 사람.. 친구랑 친해지면 무족권 교환일기 쓰자고 해야됨 그리고 지금은 인스타나 카톡처럼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sns가 유행이지만 그때는 컴퓨터가 더 보편화 됐을 시기라 네이트온이나 세이클럽 같은 메신저들이 친구들과 연락하는 수단이였음 네이트온 상태 메세지란‎,, 그 날 하루 나의 기분을 남겨주는 메모장과 같았음 다른 용무중이 아닌데도 심란하면 다른 용무중 달아놓고 대화명에 " 대화 X " 는 국룰 그럼 친구가 채팅 빨리 읽으라고 광분 조낸 보냄
1970년대 서울의 요새화 계획과 그 흔적들
1968년 김신조 사건으로 충격받은 박정희 정부는 ’서울의 요새화 계획‘을 실시하여 서울이 전쟁이나 무장공비에 대항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함. 북악스카이웨이 대외적으로는 관광용 도로라고 홍보했지만, 실제로는 청와대 뒤 북악산의 검문을 강화하고 경호에 만전을 기하고자 만든 도로.  또한 의도적으로 도로 인근에 아파트와 주택을 개발시켜 도로를 번화하게 만들어 무장공비를 방어했음.  한남대교 개통 당시 이름은 제3한강교. 강남 개발 촉진하고자 건설된 교량이지만 한국전쟁 당시 한강의 제대로 된 교랑이 고작 하나밖에 없어서 많은 서울시민들이 포위되고 말았던 역사를 교훈삼아 서울의 유사시에 시민들과 국군부대가 한강 이남으로 대피할 수 있는 또다른 길목을 만들고자 하는 안보적 목적도 강했음.  남산 1.2호 터널 남산 1호터널은 위에서 언급한 한남대교와 함께 강남과 사대문안의 연결은 물론, 전시에 이 터널을 통해 시민들과 국군이 한강 이남으로 대피할 수 있는 길목 겸 방공호로 개발되었음.  남산 2호터널은 지금도 통행량이 적은 애매한 터널인데, 이는 용산의 미군부대를 염두에 둔 군사적 목적이 매우 강한 터널이기 때문임.  이 두 터널은 남산을 방패삼아 시민들의 방공호로도 쓰이며, 원래 계획상으로는 1.2호터널 교차점에 5000평의 지하광장을 만들어 최대 20만을 수용할 예정이었음.  남산타워 경기북부와 서울에서 선명하게 들리고 볼 수 있던 북한의 방송에 대한 방해전파를 쏘고자 하는 목적이 강했음.  더불어 날 좋을 때 올라가면 개성 송악산까지 보이기 때문에, 북한군의 동태 파악과 요격에도 사용하고자 건설.  유진맨션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이곳의 1층 상가는 두 번째 사진처럼 기둥으로 받쳐져 있고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음.  이 자리는 은평을 통해 사대문안으로 들어오는 서울 방어의 최전선으로,  저 주차장이 전시에는 전차 격납고 역할을 하고, 건물이 적의 포격을 방어하며, 유사시에는 기둥을 붕괴시킬 수 있도록 했음.  이 사실은 해당 시공업체가 1981년 서울시와 행정소송을 벌이며 밝혀짐.  여의도공원 (구 여의도광장) 1997년까지 여의도공원은 원래 콘크리트 여의도광장이었음.  70년대 여의도를 개발할 때 원래는 이곳의 일부를 지금처럼 공원으로 조성할 예정이었지만,  박정희가 지도에 직접 거대한 부지를 그려넣고, 이곳에 아무것도 없이 그냥 콘크리트만 깔라고 지시를 하면서 광장이 건설됨. 당시는 베트남전에서 고전한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시기로, 안보 위기를 느낀 박정희가 유사시 여의도를 공군 비행장으로 쓸 수 있도록 광장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음.  여의도 지하벙커 2005년, 여의도 버스환승센터를 만들던 도중 발견된 지하벙커.  1970년대 여의도광장에서 행사를 할 때, 대통령을 노리는 공격이 게시될 경우를 대비하여 VIP가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든 벙커임.  내부에 소파, 샤워실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음.  비밀리에 만든 공간이었고, 제대로 인수인계가 안 되어 잊혀졌다가 2005년에 발굴되었음 강남 한강변 아파트의 총안구 신사동, 압구정동, 청담동의 한강변 아파트에는 총을 거치할 수 있는 총안구가 있음.  강북이 인민군에 수복되었을 때, 한남대교를 건너 한강을 넘어오려는 인민군을 요격하기 위해 만들어 진 총안구임.  광화문 이동형화단 과거부터 세종대로 일대의 화단은 이동이 가능한 형태였는데 이는 인민군이 진입할 시 화단을 방어용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음. 현대에도 여전히 광화문의 화단은 이동형이며, 집회시위 관리용으로도 사용됨. 공릉천 대전차방호벽 파주와 고양에서 서울로 쉽게 진입이 가능한 공릉천에 방호벽을 설치하여 적군의 전차 진입을 막고자 하였음. 최근 상당수 해체되었음. 대전차방호벽 파주, 고양, 의정부부터 서울 외곽인 구파발에 이르기까지, 인민군의 서울 진입을 막기 위한 ‘수도권 방호벽’이 정말 많았음. 최근 주민편의와 안전을 위해 고양시를 필두로 상당수가 철거되고 있음. 일산신도시 1994년 국방부장관이 ‘수도권 신도시는 수도 서울의 바리케이트다’라고 밝히며 엄청난 논란이 되었는데  이를 통해 일산신도시가 수도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시가전 특화 도시임이 밝혀졌음.  일산은 의도적으로 남북 도로를 좁게, 동서 도로를 넓게 만들어 동서로 길게 배치된 국군이 좁은 남북 도로를 타고 오는 인민군을 포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며 아파트를 바리케이트처럼 복잡하게 조성하여 서울의 방어막처럼 만들어 두었음.  즉, 도시 전체가 서울의 방호벽으로 건설되었음. 도시갤러리 오늘의김에빵님 펌
기존나쎈 조선 최초의 주미 대사.jpg
때는 1887년.. 5년전에 구식 군인들이 일으켰던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허겁지겁 부르긴 했는데.. 청나라는 군대 진압했으면 좀 꺼지지 조선에 눌러앉아서 온갖 간섭을 하려 했고 일본은 임오군란때 죽은 일본인과 불탄 일본 공사관을 들이밀며 배상 요구를 하려 한것임 심지어 언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지들 군대도 조선에 주둔시키겠다는 말같지않은 요구도 해버림 하지만.. 고종 고종은 쩔수 없었다.. 그 뒤로 조선은 지겹도록 청나라와 일본 간섭에 시달리게 됨 *잠시 당시 관계 설명* 이 당시 청나라는 서양 국가들에게 탈탈탈 털리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들 따까리 자리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하지만.. 원래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사대관념에 입각한 조공책봉 관계, 즉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보살펴주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는 그런 관계임. 말그대로 힘에 의한 관계라기 보단 이념에 따른 자발적 관계이고, 당연히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었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청나라가 자꾸 선넘더니 무력을 앞세워 국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는 것! 이때부터 조선인들도 머야시발;;하면서 청나라와의 전통적 관계를 끊고 동등한(=근대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조공을 철폐하려고 하는 등 한발자국씩 나아가던 시기였음 ~다시 돌아와서~ 조선의 여러 관료들은 청나라를 비롯한 외세의 개입이 갈수록 심해지는 이 시점에, 어떻게 하면 조선이 자주독립을 지키며 근대화를 이뤄낼 수 있을지 열심히 고민 또 고민했음 그 당시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외교> 조선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국제질서에 편입하고자 했음 그렇게 해서 청나라에도 조공책봉 사신이 아닌 동등한 주청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고, (물론 청나라는 전통 질서에 혼란 생긴다고 싫어했음 ㅎㅎ 우짤) 도쿄에도 주일 외교관을 파견하고자 했었음 하지만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바로 조선 최초의 주미 대사 주미특파전권대사 박정양을 파견했다는 것임 고종이 주미 대사를 파견한 것은 미국에 상주 외교관을 파견함으로써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주변국에게 보여주고, 서양의 현재세력 관계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고종의 빅 픽쳐 ㅎㅎ 조선은 당연히 파견하기로 결정한 후에 청나라한테도 알려줬음 : 정양이 일행 미국에 보낼거임 ㅎㅎ 위안스카이(원세개) : 미쳤습니까 휴먼? 갑자기 청나라가 존나게 시비를 거는거임;; 대충 뭐라고 했냐면 조선이랑 미국 사이에는 상민도 없고 무역도 안하는데 전권공사는 왜 보내? 돈도없으면서 외교사절은 무슨 ㅎㅎ 낭비 ㄴㄴ 아니 그리고 니네 왜 우리한테 허락 안받음?? 이거 무효야 무효 응.. 개소리 한거임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미국 공사나 고문관도 청나라가 조선과 미국의 조약을 방해하는건 조약 위반이고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니 냅둬야 한다고 항의했음 이 민폐국 때문에 자꾸 출발이 늦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청나라가 요구하는 영약삼단을 받아들임 고종은 청나라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면서 박정양 일행에게는 “짐의 뜻을 잘 헤아려 처신하라”고 거듭 당부했다고..(대충 영약삼단 지키지 말라는 뜻) 영약삼단이란?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대한제국 공사는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 ③ 대한제국 공사는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한줄요약: 청나라가 미국에서 조선이 자기네 속국이라고 홍보하기 위해 세가지 약속 지키라고 협박함 조선이 자주독립국인걸 보여주고자 했던게 어지간히 아니꼬웠나 봄 ㅎㅎ 어찌됐건 우여곡절 끝에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 일행! 청나라와의 약속 중 첫번째인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를 지켜야 할 차례였음 (조까~) 하지만 기존나쎔 박정양은 청나라 공사가 아닌 미국의 국무부 장관를 먼저 만나러 가면서 영약삼단을 무시해버림 당시 일행 조금 화난 위안스카이 : 영약삼단 지키라해;; 거슬린다해;; 박정양은 청나라가 항의하자 “님 ㅠㅠㅠㅠ 쏴리쏴리 ㅠㅠㅠㅠ 뚜이부치 ㅠㅠㅠ 정부가 청국 공사 먼저 만나러 가라고 나한테 말 안해줬음ㅠㅠㅠ 일부로 그런거 아님 ㅠㅠㅠㅠ” 이라고 해명함 청나라는 그냥 흠....하고 넘어가게 됨 하지만 그 뒤로도 박정양은 미국의 대통령을 만날 때 청의 외교관을 대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워싱턴에서 공사관의 부임 순서에 따라 방문하는 관례에 따라 28개국 중에 18번째로 청의 공사관을 방문했음 이후에 청국 공사에 방문한 박정양은 더 이상 “몰랐다”고 할 수 없으니 솔직하게 “미국에 도착해서 미국 국무부가 아닌 청 공사를 먼저 방문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이고, 이는 미국이 조선과의 교류를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조선과 미국의 국교라는 파견 명분을 해칠 수 있으므로 영약삼단을 지킬 수 없었다.” 고 말했고, 너무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청나라에서도 뭐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었음. 하지만.. 그 뒤로도 복장같이 사소한 걸로도 다 트집을 잡아서 시비를 걸었음 ㅎㅎ 물론 박정양은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나라의 압력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이는 엄청난 의의가 있는 행동이었다는 점 왜냐하면 청의 요구를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외교 활동을 했기 때문임 청나라 공사의 요구들을 거절하고 당당하게 단독으로 활동하며 자주적 외교와 독립국의 지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 (워싱턴 대한제국공사관) 당시 주미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이상재가 작성한 편지를 보면 "이곳의 인물 풍속 정치 법령은 오로지 우리나라와 일체 상반된다. 날마다 귀와 눈이 처음 듣고 처음 보는 것"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중국공사가 매번 체제사로 서로 양보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청나라가 가지가지 간섭해댔던 시절에도 우짤? 마인드로 조선의 외교를 위해 힘써줬던 그 옛날 기존나쎔 조선 외교관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가져와봄 마무리는 이상재의 편지 중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 개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使命)을 욕보이는 것이다." 문제시 삭제 출처
19세기 프랑스의 시체 관람
1886년 8월, 프랑스 파리 한적한 외곽에서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시체가 발견됐다. 프랑스 신문사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호기심 가득한 파리 시민들은 소녀의 시체를 보기 위해 시체 안치소로 몰려 들었다. 무려 1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시체 안치소로 몰려들면서 인근 교통이 전부 마비되었다. 자신이 먼저 보려고 주위 사람들을 밀치는 바람에 이곳에서 저곳에서 드잡이질이 벌어졌고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옷이 찢어지거나 기절하는 사람하는 사람까지 속출했다. 소녀 시체에 대한 관심은 이상할 정도로 고조된 편이지만, 사실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시체 안치소에서 시체 관람을 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리 벽으로 만들어진 시체 관람소는 파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 명소였다. 시체 안치소 내부가 훤히 보이는 유리창으로 도배한 용도는, 신원 불명 시체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시체를 확인할 수 있게 돕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 그런 식으로 시체를 찾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었다. 관광 명소가 될 정도로 사람들이 왕창 몰려 들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대부분 한가지, 죽은 자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은 자의 사인이 극적이거나 수수께끼일수록 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언론사들은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대서특필하며 온갖 추측성 기사를 쏟아냈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고 이틀 뒤 세느강 가에서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 시체가 발견되자 어떤 프랑스 일간지는 두 소녀를 엮어서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자매'라는 소설을 기사로 내보기도 했다. 이 기사가 나가고 소녀들의 시체를 보려는 구경꾼은 한층 더 늘었다. 1885년, 미국인 기자가 묘사한 파리 시체 안치소의 정경을 쓰자면,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치켜세운 신사들은 시체를 구경하며 히히덕거렸다. 노인들은 장터에서 물건을 흥정하듯 큰소리로 시체의 사연을 떠들었다. 창백한 안색의 귀부인이 동정어린 어투로 죽은 자의 명복을 빌었으나 시체 구경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시체가 옮겨질 때마다 양팔을 휘두르며 환성을 내질렀다. 오로지 시체 구경을 하기 위해 방문하는 방문객 숫자가 늘어나자, 파리 시청은 시체 안치소의 관람 구역을 확장했다. 노점상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시체 안치소 주위에 몰려들었다. 시체 안치소는 일주일 내내 아침 9시부터 새벽까지 개장했으며, 시체를 보기 위한 관광객은 더욱더 늘어났다. 어떤 시기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방문하는 관광객보다 시체 안치소를 구경하려는 사람 숫자가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시체 안치소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면서 시체의 유류품 역시 관광 상품이 되었다. 이에 따라 시체 안치소는 마치 백화점 쇼윈도 같은 형태로 재개장되었다. 초기에는 시체의 부패를 늦추기 위해 천장에 달린 수도 꼭지에서 차가운 물을 시체 위에 방울져 떨어지게 하는 방식을 취했으나, 1882년, 본격적인 냉장 시스템의 도입으로 시체 안치소의 시체들은 좀 더 오랫동안 구경거리가 되었다. 파리 경찰은 시체 관람을 범죄 수사에 활용하기도 했다. 1888년, 살인 용의자를 시체 안치소에 데려가서 희생자와 대면시키는 행위를 공식 절차에 추가 시켰다. 제 아무리 완고하게 무죄를 주장하던 용의자도 밝은 빛 아래에서 희생자의 유해를 마주하고 나면 금방 죄를 자백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시체 관람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점차 인기가 사그라들다 1940년대를 전후해서 완전히 금지되었다. 출처:한류열풍 사랑
화학전의 아버지이자 인류의 구원자
역사상 최초의 가스 공격은 벨기에의 소도시 이프르 근처에서 이뤄졌다. 1915년 4월 22일 목요일 아침, 잠에서 깬 프랑스 병사들은 거대한 초록빛 구름이 무인지대를 건너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구름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의 나뭇잎은 시들었고, 새는 하늘에서 떨어져 죽었다. 파인애플과 표백제 같은 냄새가 병사들의 목구멍을 채웠을 때 폐에서는 가스가 점액과 반응하여 염산을 발생시켰다. 그날 염소 가스 6000통을 개봉한 독일 병사 중 한 명인 빌리 지베르트는 이렇게 썼다. "프랑스군이 보유한 모든 야포, 모든 기관총, 모든 소총이 불을 뿜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가스를 멈출 순 없었다. 바람이 가스를 프랑스 전선 쪽으로 계속 밀어갔다. 그러다 모든 것이 다시 고요해졌다. 얼마 뒤 시야가 걷혔고 우리는 빈 가스통을 지나쳐 걸어갔다. 우리가 본 것은 총체적 죽음이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짐승도 굴에서 나와 죽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모든 나라는 가스 공격 금지 조치를 받아들였다. 강제 수용소에서 가스를 쓰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던 히틀러조차 전장에서의 사용은 거부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보병으로 참호에 배치되어 그 효과와 죽음의 고통을 두 눈으로 목격했고 스스로도 약하게나마 피해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프로 공격을 감독한 인물은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였다. 그는 이 임무의 성공으로 전쟁부 화학 부서의 책임자로 승진했으며 빌헬름 2세와 만찬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아내의 분노였다. 독일 여성 최초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클라라 이머바르는 실험실에서 가스가 동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았을 뿐 아니라, 현장 시험 중에 바람 방향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하마터면 남편을 잃을 뻔했다. 하버는 목숨을 건졌지만 학생 하나는 독성 구름을 피하지 못했다. 그 학생이 땅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며 죽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버가 이프르 학살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클라라는 하버가 인간을 대규모로 몰살할 수단을 고안하여 과학을 왜곡했다고 비난했다. 하버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이틀간의 휴가 기간에 친구들을 홈 파티에 초대했다. 새벽까지 계속된 파티가 끝나갈 무렵 그녀는 남편에게 지급된 리볼버로 자살했다. 이튿날 프리츠 하버는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한 채로 동부 전선의 가스 공격을 감독하러 떠나야 했다. 그는 전쟁 기간 내내 아내의 혼령에 시달렸다. “며칠에 한 번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 나가있는 게 도움이 된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매 순간이니까. 하지만 기진맥진하여 본부에 돌아와 있을 땐, 명령서와 전보 사이로 그녀의 머리가 나타난다." 1918년 휴전 이후, 연합군은 프리츠 하버를 전쟁 범죄자로 규정했다. 그는 독일을 떠나 스위스에 자리잡았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의 발견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907년, 하버는 식물 생장에 필요한 주요 영양소인 질소를 사상 최초로 공기 중에서 직접 채취하는 데 성공했다. 하버가 실험실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독일의 화학 대기업의 수석 공학자 카를 보슈는 수백톤의 질소를 생산할 수 있는 산업 공정으로 발전시켰다. 하버-보슈 공정은 당시 언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기에서 빵을 끄집어낸",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이다. 하버의 연구가 없었다면 천연 비료에 의존하여 농사짓던 수억 명이  비료 부족 사태에 맞닥뜨려 영양 결핍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가용 질소의 양이 두 배로 증가하자, 16억 명이던 전세계 인구는 100년도 되지 않아 70억 명으로 늘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하버가 발명한 질소 비료로 재배된 작물을 먹고 산다. (물론 하버의 원래 목표는 굶주린 대중을 먹이는 것이 아니었다.  1차 대전에서 영국 해군에 의해 칠레산 질산염의 운송이 차단되더라도 폭약을 제조할 수 있도록 원재료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에펨코리아 Nalchi님 펌
이자성의 난과 청나라 침공
이렇게 보면 오삼계도 나름 청나라에 투항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가 아직까지도 '한족의 배신자'라고 불리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 전체에 이제 청나라 군대를 견제할 세력이 없다보니까 청나라 애들이 아주 구석구석까지 약탈해버리거든요 청나라 침공기는 그야말로 한족 수난기로, 중국 전체에서 약탈, 방화, 강간, 학살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정작 오삼계는 이후 청나라한테 번왕 칭호까지 받고 한족 독립군을 진압하면서 잘먹고 잘삽니다 이러니 다른 한족 애들이 오삼계에게 치를 떨만 하죠 어째서 치밀하던 이자성이 마지막 순간에 군을 조율하지 못했느냐에 대해선 여러 추측들이 있습니다 1. 황제의 비자금을 보상으로 약속했으나, 애초부터 황제가 비자금을 군자금으로 다 써버린 탓에 농민군이 빡쳤다 2. 농민들이 북경의 귀족들에 대한 원한이 특히 깊었기에, 그들을 약탈하는 것을 일종의 보상으로 약속해주었다 3. 이자성도 마지막에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생각에 방심했다 개인적으로 전 1번 추측이 제일 마음에 드네요 사실 원숭환 숙청은 숭정제의 실책이 맞긴 합니다. 숭정제가 쉴드 칠 구석이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이전 황제들, 그니까 아예 나라를 다시 세울 노력도 안한 만력제와 비교해서 그런거고, 숭정제 자체도 '유능하다'고 보기에는 성격에서 조금씩 흠이 보이지요 (출처)
프랑스가 만든 민항기, 다쏘 머큐리를 알아보자
1970년의 항공 산업은 보잉, 록히드마틴, 맥도널 더글라스 등등 여러 미국 기업들이 피터지게 싸우던 시절이였음. 보잉은 747-100의 엔진 문제 등을 개선한 747-200을 출시하고 중단거리 시장을 노린 737 오리지널 시리즈를 런칭했음. 록히드마틴은 늘어나는 항공 수요에 맞춰 첫 광동체 여객기인 L-1011을 출시했고, 맥도널 더글라스는 록히드마틴이 첫 광동체 여객기를 런칭했다는 소식에 허둥지둥 DC-10의 개발을 진행시켜 출시하게 됨. 우리가 알아볼 프랑스의 여객기, 다쏘 머큐리는 보잉의 중단거리 시장을 노린 737 오리지널을 경쟁 상대로 삼고 개발을 시작함. 프랑스의 기업 다쏘는 보잉에 견주는 유구한 항공 산업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기업임.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설립된 다쏘는, 세계대전 후 첫 제트전투기인 우라강을 선보이고, 그 뒤 미라주 시리즈를 런칭하며 그 당시엔 베스트셀러 급으로 팔려나가게 됨. 특히 미국, 소련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제3세계 국가들이 미라주를 사들였고 이는 다쏘가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되는 발판을 깔아줌. 이러한 성장세에 한껏 고무된 다쏘는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여 첫 협동체 민항기, 머큐리를 런칭할 계획을 세우게 됨. 당시 다쏘가 얼마나 의욕적이였는지, 공장도 먼저 세우고 초도비행도 계획 수립 후 4년만에 이루어 낼 정도로 빠른 개발 과정을 보여주었음. 또한 다쏘 그룹의 또 다른 계열사 중 하나인, 다쏘시스템의 그 당시엔 최신 기술이였던 컴퓨터 설계로 머큐리는 경쟁 기종으로 지목했던 737 오리지널보다 속도도 빠르고 비행 효율도 좋은 항공기를 완성하게 됨 바로 이 항공기가 다쏘의 첫 협동체 민항기, 머큐리임. 앞서 설명했던 장점만 보면 출시하자마저 무지막지하게 팔려나갔을거 같지만, 머큐리엔 장점을 쌈싸먹어버리는 매우 큰 단점이 있었음. 바로 항속 거리, 즉 비행기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냐가 심각하게 조루였던 것! 이 항속 거리가 얼마나 짧았냐, 수치상으로는 1700km~2100km 이였음 수치상으로는 실감이 안나니 우리에게 친숙한 노선으로 따지면, 인천-나리타를 겨우 오갈 수 있는 수준이였던 것. 유럽 대륙으로 따져도 주요 도시를 겨우 연결할 수 있는 수준이였음. 머큐리의 경쟁 상대였던 보잉 737 오리지널 중 하나인 737-200이 4,300km을 날아갈 수 있었던 걸 보면 말 다했지. 이런 하나의 거대한 단점을 안고 시장에 나온 머큐리는 말 그대로 대폭망. 사진에 나와 있는 항공사인 에어인터가 이 항공기의 유일한 고객이였음.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정부의 자금도 투입된 탓에 에어인터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 항공기를 구매할 수 밖에 없었음. 게다가 이 항공기가 출시된 시기인 1970년대엔 오일 쇼크로 인해 불경기가 찾아왔고, 당시 달러화가 평가 절하되어 각국의 항공사들은 신뢰성 있는 737을 싸게 구입할 수 있었음. 최종적으로 다쏘 머큐리는 유일한 고객 에어인터의 주문량 10대 + 시제기 2대를 합해 총 12대만 생산된 체 생산을 중단하게 됨. 사실상의 사망 선고가 내려진 셈. 에어인터가 주문한 머큐리들은 1995년까지 하늘을 날다가 퇴역하게 됨. 이렇게 커다란 실패를 안겨준 머큐리는 다쏘의 영원한 흑역사로 남을 줄 알았으나, 오히려 커다란 결실을 맞이하게 됨. 머큐리의 실패 이후 프랑스도 유럽연합의 항공기 제작사인 에어버스와 함께하게 되면서 다쏘 머큐리를 기반으로 새로운 협동체 여객기를 설계하게 되는데... 이는 737 시리즈의 유일한 라이벌로 불리게 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A320 시리즈임. 어찌보면 다쏘의 노력이 완전히 헛되게 된 것은 아니게 된 셈이다. 지구촌갤러리 코마츠타미나루님 펌
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갔을까? (길지만 재밌는 글)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중에 일부분인데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대략 우리가 좀 비루하게 인식하기도 하는 조선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가 하는 부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 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출처 : http://dotty.org/2699099
100년간의 품종 개량이 낳은 끔찍한 결과.jpg
Bull Terrier (불 테리어) 한때 불테리어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운동선수 같은 개였다. 언젠가부터 불테리어는 변이된 두개골과 두꺼워진 복부를 갖게 됐고, 강박적인 꼬리 쫓기와 같은 만성질병들도 갖게 됐다. Basset Hound (바셋 하운드) 바셋하운드는 몸의 높이가 낮아지고, 뒷다리 구조의 변화, 과도한 피부와 척추 문제, 축 처진 눈에 발생한 내반증과 외반증, 그리고 과도하게 커진 귀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Boxer (복서) 짧아진 얼굴은 수많은 문제를 뜻한다. 현대의 복서는 더 짧은 얼굴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둥이도 살짝 위쪽으로 굽었다. 복서는 – 모든 단두종 개들과 마찬가지로 – 더운 날씨에 체온을 조절하는데 문제가 있고, 열을 발산하는 능력이 없어서 신체적인 능력에 제한을 받는다. 또한 가장 암 발생률이 높은 품종 중 하나다. English Bulldog (잉글리쉬 불도그) 잉글리쉬 불도그는 인기 있는 개에게서 볼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거의 모든 질병으로 고통받는다.  2004년 Kennel 클럽에서 조사한 바로는 6.25살(중앙값)에 죽는다고 한다. 건강한 불도그 같은 것은 없다. 불도그의 괴물 같은 비율은 의학적인 개입 없이는 사실상 스스로 교미를 하거나 태어날 수 없게 만든다. Dachshund (닥스훈트) 닥스훈트는 원래 기능적인 다리와 체격에 합당한 목을 가지고 있었다. 등과 목은 더 길어졌고, 가슴은 앞쪽으로 튀어나왔고, 다리는 비율상 더 짧아져서 가슴과 바닥이 거의 닿을 것처럼 됐다. 닥스훈트는 마비를 유발할 수 있는 추간판탈출증(디스크) 발생 위험이 큰 품종이 됐다; 또한, 병리학과 관련해서 연골발육부전증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고, 진행석 망막 위축증(PRA)이 발생하거나 다리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높다. German Shepherd (저먼 셰퍼드) 저먼셰퍼드는 사람들이 망한 품종에 대해서 얘기할 때 항상 언급되는 견종이다; 아마도 과거에 최고였기 때문일 것이다. Dogs of All Nations라는 책에서는 저먼셰퍼드가 중형견(25kg /55 lb)로 묘사된다. 이것은 오늘날 각이 지고, 가슴이 두툼하며 기울어진 등을 갖고, 운동실조증이 있는 85 파운드(38kg)의 개와는 거리가 멀다. 저먼셰퍼드가 2.5미터(8.5ft)의 벽을 넘을 수 있었던 때가 있었지만, 이미 옛날이 되어버렸다. Pug (퍼그) 퍼그는 또 다른 극단적인 단두종 품종이고 그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가지고 있다. – 고혈압, 심장 문제, 저산소증, 호흡 곤란, 과도한 발열, 치아 문제, 접힌 피부로 인한 피부염.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두 번 꼬인 꼬리는 실제로는 유전적인 결함이다. 심각한 형태의 경우엔 마비를 유발할 수도 있다. Saint Bernard (세인트 버나드) 한때 당당한 사역견이었지만 현대의 세인트 버나드는 사이즈가 너무 커졌고, 얼굴이 납작해졌다. 그리고 불필요한 피부를 갖도록 개량됐다. 아마 사역견 중에선 이런 형태의 개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빠르게 열이 오르기 때문에 사역견으로 부적합하다.  내반증과 외반증, Stockard 마비, 혈우병, 골육종, 무수정체증, 피브리노겐 결핍증 같은 질병들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집단이든 유전질병이 전혀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하지만 브리더(품종 개량가)들이 품종 특징을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것들은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형을 바꾸는 브리더들은 품종을 개량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많은 동물들을 비참한 상태로 만들뿐이다. 그 어떤 견종들도 짧거나/길거나/납작하거나/크거나/작거나/곱슬거리는 “어떤 특성이든” 이게 더 낫다고 하는 변덕스러운 사람의 결정에 의해 개선되지 않았다. 일생동안 더 나은 모습을 위해서 고통받도록 개의 운명을 결정짓는것은 개량이 아니다. 그건 고문이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