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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국가 운영 난이도

이렇게 보니 독립한 것이 더욱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려.
이 정도 난이도 게임을 (비록 삐끗했지만) 성공해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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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께서 중국 상하이에서 의거를 거행하셔서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특히 당시 중국에 알렸고, 중화민국(현 대만) 총통 장개석이 이 의거에 감동을 받아 광복군을 지원함은 물론 카이로 선언과 얄타 회담에서 한국을 독립국으로 하기로 했던 결과 2차대전 후 우리나라가 독립^^ 순국선열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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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대일본제국의 희생정신.godborn
옛날 옛적 중일전쟁 시절의 이야기다 상하이에서 중꿔와 좆본이 멱살잡고 드잡이하던 시절 존나게 웃긴 주작질이 있었드랬다 기세도 등등하게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에 트위스트를 추면서 쳐들어온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상하이를 지키는 중꿔들은 지금까지의 오합지졸 븅딱들이 아니라 독일에서 온 나치훈련교관한테 착실하게 훈련받은 파워 짱깨였던고로 좆본군은 존나게 깨진다 가장 좆본군을 괴롭힌게 중꿔들이 치밀하게 깔아둔 철조망이었는데, 독일식 철조망 진지라 존나게 튼튼했다 철조망이 좆같으면 철조망을 치워야지 좆본군은 철조망을 조지러 갈 자원자를 뽑기 시작했다 옛날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나온 파괴통이라는게 있음 길쭉한 원통 안에 폭탄을 넣어서 멀리서 구조물 철거하는데 써먹을 수 있는 신통한 물건이다 이렇게 여러개 이어서 길쭉하게 만들어서 철조망이나 지뢰밭에 넣고 도화선 불 붙여서 터뜨리고 안전하게 진군하는 거다 말로 설명하면 감이 안 잡힐테니까 움짤로 보면 됨(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뱅갈로어라고 부른다) 겨우 철조망 뚫자고 쓰기엔 좀 비싸 보이는 물건인데 그래도 병사의 목숨은 소중하니까 앵간한 나라는 다 들고 다녔다 물론 인권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대일본제국의 자랑스런 육군에도 당연히 파괴통이 없지 설마 있을 거라고 생각했음? 좆본 새끼들은 철조망이 있으면 사이오닉 정신에너지로 뚫고가라는 프로토스들인데 파괴통 같은게 제식 장비로 있겠냐 그래서 나온게 이 현지급조파괴통(대나무제)다 일본 대나무도 아니고 상하이 현지에서 대나무 짤라다 폭약 채우고 도화선 쑤셔박은게 끝인 조잡한 물건이다 생짜 대나무를 짤라 만든 물건이니 당연히 길이 조절 기능 따윈 없다 도화선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라 설치 후에 땡기는 게 아니라 미리 땡겨놓고 달리는 거다 그러니까 농담 아니라 이거랑 똑같다 저 존나 길쭉하고 무거운걸 3명이서 발맞춰서 존나게 달리면서 터지기 전에 던지고 돌아와야 됨 놀라운건 저 병신짓을 자원자를 받아서 처리했다는 건데 위의 3명이 그 자원자들이다. 각각 다케지, 스스무, 이노스케라는 엑스트라같은 이름이 있지만 그냥 개또라이 1호기 2호기 3호기로 통칭하자 이런 개또라이짓에 자원했으니 틀림없이 개또라이들이 분명하니까 이 개또라이 트리오가 그나마 보여준 상식은 딱 하나였는데 이딴 짓을 밤에 했다는 거다. 낮에 했으면 100% 총맞고 뒤졌을건 분명하고 존나 쪽팔렸을 거다 헛둘헛둘헛둘 야밤의 상하이를 트위스트를 추면서 3명의 개또라이가 나아간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맨 앞에 가던 개또라이 1호기가 진흙에 미끄러져 트위스트를 추면서 넘어져버린 것이다 호엑! 호에에엑! 일제히 패닉을 일으키는 상하이 트위스트 3인조. 자원했을 때의 깡은 어디갔는지.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거 도화선에 미리 불 붙이고 달리는 물건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건이니 뭐 겁에 질린 건 이해가 간다만 그 뒤의 행동이 또 코미디다 자빠져버린 개또라이 트리오가 도화선을 꺼버리곤 본대로 복귀해버린 것이다 장렬하게 짱깨의 방어선을 작살내고 돌아왔어야 할 개또라이 트리오가 맨몸으로 복귀하자 부대장은 기가 막혔다 당연히 오지게 깨졌다 얼마나 깨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개또라이 트리오가 겁에 질려서 다시 대나무 파괴통을 들고 도로 방어선으로 달려갈 정도는 깨진 모양이다 부대장의 개지랄을 피해 다시 개또라이 3인조는 방어선을 향해 돌격한다 헛둘 헛둘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 잠시 후 요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다시 말하지만 폭파 타이밍 조절 기능 따위 없는 물건이었다. 불 땡기고 터뜨리러 갔다가 자빠져서 돌아오는 시간이 짧았겠냐 이미 타들어갈 대로 타들어간 도화선은 이 빡대가리 3인조와 함께 그대로 폭사했다 1932년 2월 22일의 병신 같은 콩트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더이상 등신 같을 수 없단 생각이 들겠지만 진짜 등신질은 이제 시작이다 상하이 사변을 취재하러 온 좆본 기레기가 기레기 만랩 스킬을 터뜨린 것이다 아사히 신문에서 온 이 좆본 기레기 새끼가 이 작전을 지휘했던 등신을 취재했는데, 당연히 무의미하게 병사를 꼬라박았다고 할 수는 없으니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3명의 위대한 육탄용사들이 대나무 폭탄을 껴안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카미카제를 시도했다는, 듣기만 해도 엄청난 뻥카 인터뷰가 튀어나온 것이다. 개또라이 3인조는 어느 틈엔가 구국의 용사가 되었다. 얼타다 자빠져서 호에엑 거리던 폐급들은 즉시 2계급 승진한 것은 당연하고 그 뒤의 일이 더 가관이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을 통해 중국을 날려버린 감염된 테란 3인조의 영웅담이 전국으로 흘러나가니 온사방에서 자폭찬양이 울려퍼졌다. 심지어는 죽은 병사들을 기린답시고 육군에 기부금이 쏟아져들어왔다. 정말 좆본스러운 상황이군 개또라이 3인조는 맥주 광고에 나오기도 하고 조선 학교에서 어린이 논술문제로 출제되기도 했으며(내용: 개또라이 3인조는 어떤 심정으로 꼬라박을 했을지 서술하시오 초우셴징) 결국에는 동상까지 세워진 것이다 물론 당연히 개또라이 3인조를 주인공으로 한 군가도 만들어졌다 과연 대일본제국이다 정말 대-단해 부실한 병신 무기 만들어놓고 닥돌하라는 좆본군이나 하란다고 그걸 자원해 하는 또라이들도 븅신이지만 저렇게 자폭 자체를 신성시하면서 몸 흔드는 좆본 국민들이야말고 최종병신이 아닐까 이렇게 감염된 테란 3인조는 50년 넘게 찬양받다가 뜬금없이 2007년에 아사히 일보가 아 그거 구라였음 ㅈㅅ 정정보도를 내면서 정체가 까발려지고 만다 진짜 존나 개쪽팔렸겠다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출처) 일본 전쟁 얘기 좋아하시길래 원하시는 걸로 가져옴 정말 천하 제일 븅신들인데 왜 우리는.......
복싱 룰까지 바꾸게 만든 비극적인 사건.jpg
당시 복싱 타이틀 소유자이자 인기스타인 레이 맨시니의 타이틀을 유지시켜 주기 위해 26세의 무명 복서 김득구를 희생양으로 올린다 김득구가 그 당시 WBA 세계랭킹 1위였으나 정작 비아시아권 선수랑은 단 한번도 싸워 본 적이 없는 사실상 세계적인 기량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으니 그 매치는 오로지 맨시니의 롱런과 대회의 흥행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득구는 맹훈련을 거듭하며 독기를 품는다 라스베이거스로 떠나면서  "관을 준비해 놓고 간다, 진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  그렇게 당대 복싱 챔피언과 이 무명선수의 결투는 9라운드까지 누구하나 밀리지 않는 치열한 양상을 보여왔으나 김득구는 10라운드 이후 체력이 고갈되어  정신력만으로 버티며 간신히 방어에 성공하는 모양새 14라운드 시작과 동시에 맨시니에게 턱을 맞아 쓰러진 김득구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뇌출혈과 두번에 이은 대수술 5일간 뇌사상태에 빠졌고 그의 어머니의 허락 아래 산소 호흡기를 떼어냈다 "링 위의 비극" 26세 김득구의 사망은 복싱계 뿐만이 아니라 스포츠계 전반에 큰 충격이었는데 복싱 룰 개정을 위한 청문회까지 미국에서 열렸고 경기의 레프리였던 리처드 그린은 죄책감을 못 이겨 자살 고 김득구의 모친도 3개월 뒤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으며 챔피언을 지켜낸 레이 맨시니는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 자살 시도도 했고 10년 후인 1992년 복싱 커리어를 마감한다 복싱 룰은 김득구의 죽음으로 인해 많이 바뀌었는데  15라운드를 12라운드로 단축하고 휴식시간을 30초 더 늘렸으며, 스탠딩 다운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경기 당일 새벽에 하던 계체량을 하루전으로 앞당겼다 출처 혹시 기억하시는 분 계신가요 복싱의 룰까지 바뀔 정도로 큰 사건이었네요..
싱가포르가 잘사는 북한 소리를 듣는 이유
요약 :  싱가포르 초대 지도자 리콴유는 식민정부의 탄압과 빈부격차에 맞서면서 강성해진 좌익과 동맹을 맺음. 당시 `영국 명문대 유학을 다녀온 인권,노동 변호사`였던 리콴유는 인민행동당을 결성하여 집권한후, 정당을 완벽하게 장악함. 그 과정에서 연합 했던 당내 좌익 세력을 재판없이 무기한 수감(...)시켜서 숙청함. 이후 국가를 사유화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자기 맘대로 탄압함. 자기 자식에게 정권을 물려줌. 리콴유-리셴룽의 일가가 국가 주요 산업을 장악하고 있음.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의 아들이자, (2대 바지총리에게 넘겨받은 ) 3대 총리인 리셴룽의 경력. 김정은 보다는 소박함. (33세 공군 준장 전역. 35세 국방담당 국무장관)  이제 3대 세습 준비중이라고.  * 집회 시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  여성 폭력 근절, 동성애 관련, 노동절 행진 뭐든 체포, 구금. 몇주간 감옥에 넣어버림.  87년에 정부가 반정부 음모를 꾸민다고 22명을 체포함. (가톨릭 노동자로 빈민을 돕고, 외국인 가사 노동자 학대를 도와준 변호사들도 포함)  이들은  구속동안 고문,폭행으로 자백을 강요당함. 석방되어서 기자회견을 하자마자, 정부가 다시 구속후 `잘 타이름`  이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공개 성명서를 발표해야만했음.  국민들이 정부 비판을 하는 순간, 정부에서 `니들 시민단체하지 말고 정치해라`라고  함.  * 선거  정부에서 대놓고 선거규칙을 조작해댐. 97년엔 정부에서 선거 하루 전에 선거구를 확정함. 01년엔 정부에게 투표자에게 투표 전날에 현금화가능한 주식을 줌.  선관위는 수상 직속 조직.  그래서 집권당 소속이 아니게 출마한다? 소송 크리(명예훼손, 세무조사)로 인생을 파탄내버림.  집권당을 안찍은 지역은 인프라 공사를 무기한 지연시켜버림. 개발호재는 커녕 슬럼이 되가도 손하나 까닥 안함.  국민의 80%가 공공아파트에 거주해서 주거문제를 해결했다는데. 그 지역에서 야당 찍었다고 아파트 수리를 안해준다면? * 노동  지니계수에서 싱가포르는 155개국 가운데 123위를 자치했다 싱가포르에는 최저임금이 없음. 노동운동하면 반정부 분자 취급받음.  싱가포르 육체노동자는 세계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고 있음.  현재 하위 10만 가구(인구의 약 10퍼센트)의 월가계 소득은 약 100만원.  어용 노조만 존재함. 파업은 불법.  * 언론  - 주요매체 주인이 정부. 매체에 정보기관원들이 상주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직원으로 일하면서 검열중.  - 정부가 원하지 않는 기사를 내면 무조건 명예훼손으로 소송함. 돈을 쉽게 징수하기 위해 아예 언론 설립 조건이 예치금.  외신도 예외없음. 다들 닥치게 됨.  " ‘국경없는 기자들(Reporters Without Borders)’은 싱가포르를 167국 에서 147 번째로 순위를 매겼다. 이것은 미얀마보다 18위가 높고, 이라크보다 한 단 계가 높은 수치" "국경없는 기자들’은 전 수상, 고촉통(Goh Chok Tong)에게 ‘언론자유 약탈 자상’을 주었다. 이 상은 정부의 계속되는 언론 억압에서 그의 역할 때문에 주어진 것 으로서, 무아마르 가다피, 로버트 무가베, 김정일, 피델 카스트로도 함께 수상되었다." * 요약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68779?sid=104 정문태  "정치학자들은 그 리콴유-리셴룽의 인민당이 지배해온 싱가포르를 세습 전체주의 사회로 규정해 왔다. 그 리셴룽이 총리 자리를 차지하고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 총리의 아내 호칭은 싱가포르 경제를 주무른다는 테마섹의 최고경영자 노릇을 해왔다. 리셴룽의 동생 리셴양은 최대 통신사 싱텔(SingTel) 최고경영자를 거쳐 현재 창이국제공항을 관리하는 민간항공국 대표 자리를 꿰차고 있다. 이렇게 리패밀리가 지배해온 싱가포르를 경제학자들은 족벌자본주의라 불러왔다. 좋든 싫든 그 전체주의 족벌자본을 이끄는 자들을 역사에서는 독재자라 불러왔다." 참고한 자료들.  #1. http://todayboda.net/article/6707 저항이 사라진 역사적 배경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건국 당시 리콴유는 대대적인 좌익 소탕 작전으로 통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앞서 언급한 싱가포르 청년의 이야기를 다시 인용하면, 그는 자신과는 다르게 자기 아버지 세대는 리콴유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 있다고 했다. 독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던 중국계 싱가포르인 중 일부는 아직까지도 그의 잔인한 탄압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역사를 돌아보자. 본래 영국 식민지였던 싱가포르는 좌익 성향이 강한 섬이었다. 영국이 제2의 쿠바가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좌익의 주축은 인구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계였다. 중국계 중에는 가난한 노동계급이 많았고, 이들은 1942~45년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겪으며 급진화되었다.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하자 민족주의적 열기를 타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식민 정부가 중국계 중고등학교를 차별하는 것에 저항하며 학생운동이 활발해졌다. 좌익은 노동조합과 중국계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파업과 동맹휴업을 전개했다.  하지만 대중투쟁만으로는 한계가 있자, 좌익은 55년 본격적인 총선거를 앞두고 리콴유 분파와 손을 잡았다. 리콴유는 중국계이긴 했지만 영어로 교육 받은 엘리트로 영국 캠브리지 출신 변호사였다. 귀국 후 그는 인권·노동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명망을 쌓고 있었다. 그의 그룹은 주로 영국 유학 시절 정치써클에서 뜻을 함께 했던 온건 사회주의 계열의 엘리트들이었다. 중국어도 못하고, 대중적 지지기반도 없었던 리콴유 그룹은 좌익의 대중 조직을 필요로 했고, 좌익은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리콴유 그룹을 필요로 했다. 일종의 통일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1954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당이 지금까지도 집권하고 있는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이다. 그러나 좌익의 대중동원력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한 리콴유는 당내 좌익분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한다. 싱가포르판 국가보안법으로 많은 좌익 지도자들이 재판도 없이 무기한 수감되었으며, 대부분 20년 가까이 복역한 후에서야 풀려나게 되었다. 앞서 말한 청년의 아버지 세대에게 리콴유는 쓰라린 상처를 입혔지만, 사실 그 덕에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은 비판세력이 깨끗이 제거된 상태에서 마음껏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장기 집권의 물질적 토대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구축된 체제는 과연 살만한 체제인가? 일단 고속성장 덕에 일자리 구하는게 어렵지는 않다. 대졸자의 90퍼센트가 졸업 후 6개월 이내에 취직이 된다고 하니 한국 현실을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다. 세계에서 6번째로 물가가 비싼 도시이지만, 계속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니, 고가의 물건은 할부로 살 수 있다. 밥도 싱가포르 서민들이 애용하는 호커센터에서 먹으면 3000~5000원에 한끼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의 주택 정책 덕에 주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건국 초 정부는 만성적인 주택난을 해결하고, 좌익의 발호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공공아파트(HDB)를 구축했다. 시중보다는 싼 가격에 현대식 아파트를 제공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국민적 지지가 높았고, 지금은 국민의 80퍼센트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아파트 대출금을 갚기 위해 오랜 기간 노동을 해야 하지만, 월세로 살거나 민영주택을 사는 것보다는 저렴하다. 일자리, 밥, 집이라는 최소한을 해결해준 집권당에게 국민들은 항상 60~70퍼센트의 지지로 화답해 왔다. 초국적 자본을 위한 전방위적 통제 하지만 물질적 안정에는 대가가 따랐다. 싱가포르의 발전전략은 초국적 자본의 유치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동조건은 엄격히 통제됐다. 정부는 좌파계열 노조는 모두 해산시키고 어용노총(NTUC)을 세웠다. 파업은 불법화 되었고, 노동조건도 후퇴했다. 싱가포르에는 최저임금 제도가 없다. 일자리는 많아졌지만, 여타 선진국에 비하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다. 소수의 골드칼라가 초호화 생활을 누리게 된 사이, 서민층의 삶은 여전히 개발도상국을 방불케 한다. 현재 하위 10만 가구(인구의 약 10퍼센트)의 월가계 소득은 약 100만 원에 불과하다. 1인당 GDP 5만 2000달러의 신화는 이들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다. 리콴유 분향소에 헌화하려 길게 줄을 선 싱가포르 시민들 이런 극심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정부의 논리는 능력주의다. 정부는 인종이나 배경에 관계 없이 누구나 공부 잘하고, 능력만 좋으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능력에 따른 신분상승의 기회를 약속함으로써 정부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 교육시스템은 철저한 경쟁 체제로 재편됐다. 중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부터 학생들은 성적에 따라 서열화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어린 나이부터 사람들에게 경쟁을 내면화시켰다. 흔히 싱가포르의 국민성이라고들 말하는 ‘키아수(kiasu, 驚輸)’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말은 ‘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의미한다. 국민들이 치르는 또 다른 댓가는 정치의 제약이다. 투표는 할 수 있지만, 그 외의 거의 모든 권리는 없다고 보면 된다. 정부가 지정한 공원 한 곳을 제외하고는 집회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방송국도 정부가 운영한다. 시민단체에게는 시혜성 구호 사업만 허용되고, 정부 비판은 일체 허용되지 않는다. 싱가포르 관료들은 정부 비판을 할 거라면 차라리 직접 정치를 하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정치의 링에 들어서는 순간, 반대파들은 각종 법정소송(주로 명예훼손)이나 세무조사에 치여 파산에 이르게 되거나, 망명을 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한다. 사태가 이러하니 야당이 몇 개 존재하긴 하나, 모든 선거구에 후보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역량이 취약하다.  눈에 보이는 탄압 외에 삶의 전반에 걸쳐 이뤄지는 통제도 만만치 않다. 공공아파트를 매개로 한 통제가 대표적이다. 더 빠른 순번으로 더 좋은 아파트를 얻기 위해서는 정부의 시책을 따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1980년대 들어 경제가 휘청이고, 민심 이반이 감지되자 정부는 아파트 개보수를 담보로 국민들의 충성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건국 이래 최초로 야당 의원이 탄생하자, 정부는 공공아파트 개보수 작업에 대한 우선순위를 집권당 지지 지역에 주기로 했다. 야당 의원을 배출한 지역은 개보수 작업을 기약 없이 지연시켜버렸다. 주거 환경 개선을 원한다면 집권당을 찍으라는 회유이자 무언의 협박이었던 것이다. 전 국민의 80퍼센트를 수용하고 있는 싱가포르 공공아파트 저항을 꿈꿀 수 있는 조건 이렇듯 싱가포르 집권당의 장기 집권 비결은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억압에만 있지 않다. 눈부신 경제성장은 열심히 공부하고 묵묵히 일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만들었다. 공공아파트 정책은 정부의 주민 통제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어줬다. 정부는 작은 섬나라에서 이 길뿐이라고 외쳤고, 다른 정치경제적 대안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이렇게 해서 국가-집권당-개인의 운명은 하나로 통합되었다.(중략)" #2. 싱가포르의 인권 침해 지 순 후안  싱가포르민주당 사무총장 "싱가포르에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들은 외국인들의 대부분의 반응은 “나는 상황이 그렇게 나쁜지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외국인으로부터 듣는 전형적인 반응이다. 억압, 공포는 외국인이 쉽게 떠올릴 수 없는 이미지이다. 섬 위의 깨끗하고 효율적인 모든 것을 보여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항을 둘러본 기쁨을 가진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의 권위주의적 통제의 범위를 믿기 어렵다.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 군도와 북쪽으로는 말레이시아 반도 사이에 위치한 도시국가는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으로 도전을 받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집권당인 국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 PAP)의 통제와 위협의 방법이 이 글에서 다룰 토론의 주제이다. 반대를 제거하기 국내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 : ISA)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식민지 지배기에 영국에 의해서 도입된 ISA 또는 과거에는 Preservation of Public Security Ordinance라고 불렸던 법은 정부가 공적인 안전에 위험을 끼칠 것으로 의심되어지는 시민에 대하여 일방적인 구속과 무제한의 억류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한 막대한 힘을 가진 정부는 그것을 반대세력에 적용할 유혹에 빠지게 한다. PAP는 물론, 그 유혹을 저항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1963년 2월에 의회의 야당 의원, 신문의 편집자, 노동지도자, 다른 정치적인 지도자 등 150여명에 대한 구속을 명령했다. 구속된 사람들 중 대부분이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역해야 했고, 일부는 20년까지 지속되었다. 가장 최장으로 억류되어 있던 사람은 치아 티에 포(Chia Thye Poh)였다. 1966년 숙명적인 날에 안전요원이 치아를 방문했다. 그리고 국내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고 말했다. 이 야당의 의원은 이후 23년 동안 수감되었고, 석방된 후에도 그는 싱가포르 섬 남쪽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단지 낮 시간에만 본토에 오는 것이 허용되었다. 국내보안법 적용은 60년대와 7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1963년에 구속된 포 수 카이(Poh Soo Kai)는 그가 ISA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캠페인을 시작한 때인 1972년에 석방되었다. 결과적으로 PAP가 회원조직으로 가입하고 있었던 국제사회주의자(Socialist International)는 PAP를 회원 대열에서 탈퇴시키려 발의했다. 그러자 이를 간파한 PAP는 1976년에 스스로 조직화 작업을 멈췄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 후에 포는 재구속되었다. 그는 6년 후에 석방되었는데, 독방에서 2년을 지낸 후였다. 1987년에 싱가포르 정부는, 정부를 폭력적으로 전복하고 맑시스트 국가를 건설하려고 모의한 22명의 개인을 구속, 억류했다고 발표했다. 구속된 일부인사는 야당에 협력했었고, 일부는 가톨릭 노동자들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고, 다른 사람들은 학대를 받은 해외의 가사노동자들을 도운 변호사들이었다. 1년 동안 구속되어 있는 동안 그들은 주먹으로 구타를 당하고, 뺨을 맞고, 잠을 자지 못하는 등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아야했다. 수감자들은 그들의 의사와 반대되는 것을 강제적으로 자백해야 했다. 그들은 석방이 되자마자 일부는 함께 모여서 기자회견을 열어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의 무죄를 알리고, 그들이 고문과 학대를 받지 않았다는 정부의 주장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재구속되었고, 그들의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그들이 성명서를 부인하는 제정법상의 선언을 하여야 했다. 향후 그들이 정부를 다시 부인한다면, 그들은 잘못된 법정선언을 한 것에 대해서 법정에서 판결을 또 받게 될 것이다. 9.11의 비극 이후에 최근에는 37명의 사람들이 국내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테러리스트 네트워크에 연결되었다는 혐의와 싱가포르내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려고 모의를 했다는 혐의였다. 몇 명은 석방되었으나 대다수는 재판도 받지 않은 채 감금되어 있다. 언론의 문제 물론, 위에 말한 것 중 어떤 것도 언론의 종속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PAP가 1959년에 집권한 이후에 싱가포르에서 언론의 자유를 없애는 작업을 시작했다. 신문사에 의해서 국제담당 컬럼니스트로 고용된 미국시민은 신문사에서 해고된 때인 2004년에 다음과 같이 말해야 했다 : "스트레이트 타임즈는 싱가포르에서 경쟁력이 없다. 싱가포르 프레스 회사(Singapore Press Holdings)라고 불리는 기업이 전체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주식은 공개적으로 상장되었으나, 신문의 업무는 수상인 리 시엔 룽(Lee Hsien Loong)에 의해서 철저하게 감독된다. 리 시엔 룽은 싱가포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리 콴유(Lee Kuan Yew)의 아들이다. 이 신문은 저널리즘에 대한 경력이 없는 편집장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나의 직속 편집장은 30대 중반의 여성인 추아 리 훙(Ms Chua Lee Hoong)이었는데, 그녀는 정보기관원이었다. 그리고 다른 주요한 편집장도 싱가포르의 관료체계와 국가의 보안담당 관련 기관의 출신이다. 그들은 모두 국가의 정보기관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추적한다. 현재 싱가포르의 현지 프린트물 언론은 싱가포르 프레스사(Singapore Press Holdings)와 MediaCorp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는데, 이 두 회사는 직접적으로 국가의 통제하에 있다. 방송언론의 역사는 평온한데, 그것은 확고하게 처음부터 정부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이다. 호된 훈육과정을 통하여 싱가포르 국내의 언론을 성공적으로 길들인 후에 싱가포르 정부는 해외언론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하나씩 PAP와 그 정치에 대해서 비우호적인 논평을 하는 지역과 국제적인 신문을 값비싼 명예훼손 소송 또는 형사사건으로 법정에 세우고 있다. Asiaweek, Far Eastern Economic Review(이 둘은 기능이 정지되었다), Asian Wall Street Journal, Time,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The Economist, Newsweek 등은 그러한 운명을 맞았다. 공격적인 출판물에 대해서 취해진 다른 규제조치는 싱가포르에서의 배포를 제한하는 것을 포함한다. 1999년에 나는 CNBC, CNN과 로이터와 인터뷰를 했다. 이 인터뷰 이후에 정부는 이들 방송국에게 싱가포르로부터 방영되는 해외TV방송국은 싱가포르 방송을 통제하는 기준과 규칙을 똑같이 지켜야 한다는 경고를 줬다. 이것은 물론 정부의 승인 없이 공개적으로 행한 내 발언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아래에서 상세하게 말할 문제이다. 직후에, 싱가포르의 국내정치에 관련되는 부문에 대해서는 국제신문에 적용하고 있는 것처럼 해외 방송사를 기소할 수 있도록 싱가포르 방송법을 개정하였다. 그때 이후로, 싱가포르의 민주화운동 활동가들과의 인터뷰나 또는 해외방송국으로부터 싱가포르의 정치에 대한 보도는 거의 없었다. 싱가포르 정부의 언론탄압은 미디어의 계속되는 억압에 대해서 PAP를 비난하는 국제적인 미디어 감시그룹을 낳았다. 언론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각국 정부를 순위로 평가하는 조사에서 ‘국경없는 기자들(Reporters Without Borders)’은 싱가포르를 167국에서 147 번째로 순위를 매겼다. 이것은 미얀마보다 18위가 높고, 이라크보다 한 단계가 높은 수치이다. 그리고 선진국 중에서는 가장 낮은 것이다. 사실상, ‘국경없는 기자들’은 전 수상, 고촉통(Goh Chok Tong)에게 ‘언론자유 약탈자상’을 주었다. 이 상은 정부의 계속되는 언론 억압에서 그의 역할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서, 무아마르 가다피, 로버트 무가베, 김정일, 피델 카스트로도 함께 수상되었다. 또 다른 미디어 그룹인 Committee to Protect Journalists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싱가포르에서의 미디어에 대한 국가통제는 완벽해서 그 체계를 감히 도전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이상 구속하거나 언론인을 학대할 필요가 없다. 해외의 통신원들은 싱가포르에서 보고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정부가 종종 국제 언론을 기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드는 명예훼손 소송을 직면하게 하여 그 활동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독재권에 대한 투표? PAP는 1959년 처음 집권한 이후로 선거에서 매번 이겼다. 야당은 1968년에 의회를 거부했다. 정부가 1년 이상 의회 회기를 주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집권당이 기회를 잡고 교묘하게 선거를 조작해서 1970년대의 전체 의원 중 야당의원은 한명이 없었다. 현재 84명의 하원에서 단지 2명의 야당 의원이 있다. 독립적인 선거위원회가 없다; 선거담당 부서는 수상의 직속에 속한다. 캠페인 기간은 9일 동안 지속된다. 1997년 선거가 선언되기 하루 전에 선거구의 확정을 공고했다. 2001년에는 정부가 투표자에게 투표 전날에 현금화할 수 있는 주식을 주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지난 선거에서 야당은 의석의 반 이상을 차지할 후보자를 내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PAP가 첫 번째 투표가 있기도 전에 권력에 재집권하는 셈이 되었다.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는 가장 극명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 ‘싱가포르 시민은 그들의 정부를 민주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싱가포르인들이 선거에 참가하는 것에 그렇게 공포스럽게 만드는 한 요소는 PAP에 의한 명예훼손법이다. 사법권은 집권당의 일부분이라고 인식되는 것이다. 그들이 PAP 지도자에 의해서 제기된 명예훼손 소송에 따르는 손해로 인한 돈을 지불할 수 없었을 때에는 몇몇의 반대당 지도자들은 파산상태가 되었다. 고참 야당인사인 조수아 B. 제야르트남(Joshua B. Jeyaretnam)은 리 콴유와 다른 PAP 소송 제기자에게 수백만달러를 지불했다. 전 판사 제야르트남은 그의 집과 거의 모든 재산을 팔아야 했다. 2001년 1월에 그는 파산선고을 당했다. 왜냐하면 그가 여전히 그의 반대자에게 지불해야 될 수십만 달러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적 환경에서는 그는 의회에서 의원직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선거에의 참여가 금지당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고통 정부가 국내보안법(ISA)을 노동활동가를 구속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로 PAP는 노동조합에 대한 무자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싱가포르에서는 저임금과 해고된 노동자에 대한 실업보험을 규정한 법이 없다. 결과적으로 싱가포르 노동자 특히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임금을 받는 층에 상대적으로 속한다. 사무실 청소부나 운전사의 중간급 정도의 임금은 生産性에 조정되어서 세계 가장 낮은 59개국 그룹에 속한다. 단지 러시아, 우크라이나, 에쿠아도르만이 덜 받는다. 비서들도 많이 받지 않는다. 그들의 임금은 59개국 중 50위에 속한다. 이런 모든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 일어나는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즉 장관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월급을 받는 곳이다. - 내각 장관은 미국의 대통령보다 더 받는다. 그리고 수상은 미국 대통령, 영국의 수상, 프랑스의 대통령, 이태리의 수상, 독일의 총리의 월급을 합친 것보다 더 받는 곳이다. 자유 억제 "리콴유는 시민에게 자유롭게 모이고 말할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아수라장을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어떤 종류의 집회도 금지된다 : 싱가포르에서 미국대사관 밖에서 모이려고 했던 6명이 모임 장소에 가기도 전에 구속되었다. 아시아 활동가 사이에 버마에 대한 상황을 의논하기 위한 포럼은 금지되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의 근절을 위한 유엔의 국제기념일을 기리기 위해서 행진을 하려던 신청은 거절되었다. 싱가포르 언론에 대한 항의를 하기 위한 Think Center라는 NGO에 의한 요청도 거절되었다. 동성애자 이슈를 의논하기 위한 포럼도 불허되었다. 1999년에 나는 점심시간에 래플스 플레이스(Raffles Place : 싱가포르의 경제심장부)의 중간에 서서 군중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였다. 나는 다음 주에도 그 행사를 반복했다. 나는 두 가지 행동으로 기소되고 수감되었다. 2002년에 나는 대통령 저택과 수상의 관저가 있는 이스타나 외곽에서 노동절 행진을 하려고 시도했다. 경관들이 나를 환영하기 위하여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연설을 하기 전에 나를 멀리 끌고 갔다. 나는 다시 기소되었다. 그리고 5주 동안 수감되었다. 시민들이 공적인 장소에서 모임을 조직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영상물을 제작하고 배급하고 상영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너무 두려워서 공개적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할 수 없다. 정치적인 사회가 작동하는 이미 제한된 공간은 점점 더 죄어오고 있다" #3.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의 아들이자 3대 총리인 리셴룽의 경력. 김정은 보다는 소박함.  #4.  정문태 기자의 기사중.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68779?sid=104 "세계은행이 소득불평등을 매기는 지니계수에서 싱가포르는 155개국 가운데 123위를 자치했다. 중남미 엘살바도르(124위)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126위) 같은 나라들 주변을 헤매고 있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같이 1인당 국내총생산 최상위 나라들이 소득평등 분야에서도 1~3위를 차지한 사실과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경제 우등국 싱가포르의 시민 평균 월급이 미국 돈으로 따져 한 1800달러쯤 되고 10% 웃도는 시민이 월 1000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사이 리콴유의 아들이자 총리인 리셴룽은 수당과 보너스를 뺀 공식적인 연봉만도 싱가포르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의 약 32배에 이르는 180만달러(2012년 삭감된 연봉 기준)를 받고 있다. 이건 1000달러 월급쟁이 시민이 150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되는 돈이다. 20만~30만달러인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총리들 연봉을 그 나라 보통 월급쟁이들이 따라잡는 데 3~5년쯤 걸리는 현실과 아주 먼 거리에 있다. 이건 국가수반 가운데 둘째로 많은 돈을 받아온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연봉 40만달러의 4.5배" "정치학자들은 그 리콴유-리셴룽의 인민당이 지배해온 싱가포르를 세습 전체주의 사회로 규정해 왔다. 그 리셴룽이 총리 자리를 차지하고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 총리의 아내 호칭은 싱가포르 경제를 주무른다는 테마섹의 최고경영자 노릇을 해왔다. 리셴룽의 동생 리셴양은 최대 통신사 싱텔(SingTel) 최고경영자를 거쳐 현재 창이국제공항을 관리하는 민간항공국 대표 자리를 꿰차고 있다. 이렇게 리패밀리가 지배해온 싱가포르를 경제학자들은 족벌자본주의라 불러왔다. 좋든 싫든 그 전체주의 족벌자본을 이끄는 자들을 역사에서는 독재자라 불러왔다." "". 신문, 방송을 비롯한 주요 언론 매체의 주인이 정부인데다 검열로 쥐고 흔들 수 있으니까. 예컨대 최대 일간지 <스트레이츠 타임스>의 발행자인 ‘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SPH)가 모든 일간신문의 발행자를 겸하는 식이다. 미디어코프(MediaCorp)가 발행자인 일간 <투데이>나 7개 방송 채널도 사실은 국영투자회사인 테마섹(Temasek Holdings)이 주인이고 보면 예외가 없는 셈이다. 그게 <스트레이츠 타임스>에서 일했던 내 친구가 “진짜 기자를 하고 싶다”며 결국 외국으로 떠난 까닭이기도 하다. 그게 이 글에서 인용한 싱가포르 친구들이 저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까닭" (출처) 와 맵다 매워 잘 몰랐는데 들여다보니 이렇게 매운 나라가 또 없네... ㄹㅇ 잘 사는 북한
냉혹한 스파이 고양이의 최후
CIA에서 냉전시기 때 실행했었던 프로젝트 스파이 고양이. 말 그대로 고양이를 살아있는 도청기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음. CIA가 보는 고양이는 완벽한 첩보원이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은 은밀하고, 빠르고, 똑똑한데다, 장애물 돌파 능력도 높아서 어디에나 기어들어갈 수 있고 뭣보다 사람은 고양이를 발견해도 저게 절대 스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말만 들으면 그럴싸하지. 아무튼 그래서 2천만 달러의 예산이 들어간 스파이 사이보그 고양이가 만들어지게 된다. 가슴 부분에는 동력원과 트랜스미터가 삽입됐고, 귀에는 마이크가 숨겨졌고, 척추를 따라 꼬리 끝까지 안테나가 삽입됐음. 그야말로 인간-도청기, 아니 고양-도청기가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고양이 본인한테야 괴로웠겠지만 쉽게 진행됐음. 그 다음이 문제였음. 고양이는 자기가 사이보그로 개조된게 몹시 좆같았고 몸에 설치된 배선을 밭톱으로 잡아뜯거나 물어뜯어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고양이 키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새끼들은 사람 말을 죽도록 안 듣는게 특징이다. 사람 말을 듣고 목표 가까이 가서 도청을 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데 그 말을 더럽게 안 듣는다. 그리하여 스파이 고양이를 사이보그로 개조하는데는 1년도 안 걸렸지만 고양이를 원하는 위치로 유도하는 훈련을 시키는데는 5년이 들어갔다. 아무튼 5년과 2000만 달러를 들여 탄생한 스파이 사이보그 고양이는 드디어 1960년에 실전을 경험하게 된다. 장소는 워싱턴의 쏘련 대사관이었고, 마침 소련 대사관 앞마당 공원에서 벤치에 앉은 빨갱이 두 명이 대화를 하는 걸 본 CIA는 사이보그 고양이를 출격시켰음. 그리고 2000만 달러와 5년동안의 훈련을 받은 우리의 고양이는 10걸음 정도 걸어가다가 택시에 치여서 카짓 카페트가 됐다. 당연하지만 CIA는 이딴 병신 같은데 돈 쓰지 말라며 쿠사리를 존나 처먹고 계획을 취소했다. + 구라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을 거 같아서 당시 작전 계획서임 (출처) 이게 실화라는 게 유우머 어이없네 ㅋㅋㅋ
로마군을 시조로 여기는 베두인 부족
6세기, 벨리사리우스가 시간과 병력을 쬐에끔만 더 주시면 이탈리아 되찾겠다고 아드득까드득하고 있을 무렵, 팔레스티나 테르티아 속주의 리메스 후방이 너무 휑하니 비어서 불안한데, 여기 남쪽 중간쯤에 요새 하나 알박아 두면 방어에 도움되겠다! 란 생각을 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시나이 산기슭에 요새를 세우라고 지시함. 그렇게 전쟁도 잘하고 도로도 잘 깔고 공사도 잘하고 못하는게 없는 로마군 200여명이 시나이 반도에 파견, 산기슭에 요새를 뚝딱뚝딱 짓게 되는데... 폐하 다 지었습니다!! 이제 집에 어떻게 옵니까? ??? ??? 니네가 집에 왜 와? 잘 모씀다? 요새만 만들면 군생활 끝나냐? 그거 누가 지킬지는 생각 안해봤어? (씨발...) 하는김에 거기에 뿌리내리고 잘 살아봐라. 아들들 낳으면 걔네도 대대로 수도원 지키라고 하고! (씨발...) 그렇게 말뚝을 박은 병사들은 시나이 남부에 뿌리를 내렸고, 황무지에 유일하게 지나다니는 아랍 베두인 부족들이랑 피가 섞이게 됨. 이들의 후손은 갈수록 시나이 베두인족의 피가 더 짙어지다가, 마침내 아예 자기들만의 전통을 간직한 새로운 부족, '자발리야' 부족이 됨. '제벨' = 아랍어로 '산'이니까 '자발리야' = '산에 사는 사람들'. 부족 이름부터가 시나이 산기슭에 지은 요새에서 유래하는 셈임 이런 베두인 부족들은 기독교 신자들이었고, 4세기부터 아일라에 주둔하던 제10 프레텐시스 군단을 주축으로 형성된 팔레스티나 방어선(limes Palaestinae)의 리미타네이 부대들에도 대거 보조병으로 복무함. 무함마드가 팔레스티나 속주를 슬쩍 찔러본 '무타 원정' 때에도 로마 장군 테오도로스 아래에서 종군했고. 하지만 이후엔 로마 정부가 베두인족한테 돈을 안 주자, 실망한 부족들은 갈수록 미래가 창창해 보이는 칼리파 편에 붙으면서 이슬람으로 단체 개종함. 그렇게 시간이 흘러 7세기,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가 로마군 썰고 다닐 때, 고립된 기독교 수도원들은 차례차례 무너졌지만, 성녀 가타리나 수도원만은... ??? : 아 ㅋㅋ 저거 건드려봤자 이득도 없는데 그냥 지나가죠? 정통 칼리파 시대에 칼리프 우마르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면서 수도원 자체의 수도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자발리야 부족민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했지만 여전히 성녀 가타리나 수도원과는 공생 관계를 유지했고, 기독교적 색채도 현대까지 쭈욱 잔존함 그래서 성 가타리나 축일에 교회도 나가고, 무덤 묘비로 십자가를 세우기도 하고, 심지어 부활절 축제도 참가할 정도로 괴상한 스까종교를 믿는 부족임. 1차 십자군 때에도 그래서 성지순례왔다가 들린 프랑크인들이 신기해했고, 19세기 유럽인들도 신기해함 그리고 지금은 얘네가 뭐하냐면... '관광 가이드' 출처 아아 저희는 로마의 후예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