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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때 무명의 지휘관이 남긴말


출처: 끝판왕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thelastwang/ 6.25전쟁때 무명의 지휘관이 남긴말 전쟁영화 한편 본 기분 감사합니다. 감세바 V2 감동으로 세상 바꾸기 페이지 https://xn--www-2q8nq6cg0e.facebook.com/gamseba 좋아요 누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한것입니다!!!^^ MSG처럼 자극적인 짤에 지친 여러분!!! 이제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훈훈한 짤들을 만나보세요!!! tv고 라디오고 신문이고 대중매체에는 죄다 자극적인 소식들 뿐이라서 좀 따뜻하고 귀감이 되는 소식들 좀 퍼트려보려고 직접 만들었습니다. 출처 안밝히셔도 되니까 마음껏 퍼날라주세요. 요즘 세상 사람들 마음에 따뜻한 소식들 좀 심어주고 싶네요. 감동적이고 귀감이 될만한 소식을 제보해주세요. donelly@naver.com #인문 #교양 BGM https://youtu.be/uoypZLxDZIg
브금 자동지원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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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내가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수 있다는건 상상이 안된다
@trud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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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 대신 발명을!
예전에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년생이나 사업장을 연 지인에게 만년필은 인기 있는 선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만년필을 처음으로 착안해서 발명한 사람은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입니다. ​ 그는 뉴욕에서 보험설계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 큰 보험 계약을 성사시키려던 참이었는데 고객이 계약서를 작성하다가 그만 잉크를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 잉크로 뒤범벅된 계약서는 쓸 수 없었고 새로운 계약서를 가지고 오겠다며 고객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 그런데 그가 다시 고객을 찾았을 땐 이미 다른 보험설계사와 계약을 마친 후였습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보험설계사가 고객에게 접근했던 것이었습니다. ​ 잉크가 엎질러지지 않았다면 계약이 성사됐을 거란 생각에 속상했던 그는 쏟아질 염려 없는 특별한 잉크병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펜 안에 잉크를 담아 지금의 만년필을 발명했고 1884년 특허를 내며 사람들에게 선보여집니다. ​ 잉크와 펜을 함께 가지고 다녀야 했던 불편함이 없어진 것입니다. ​ 그는 계약을 훔친 다른 설계사에게 화내고 원망한 것이 아니라 역발상을 통해 인류 문구 역사에 소중한 발명품인 만년필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살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힘들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수록 원망과 분노에만 머물지 않고 긍정적인 방법을 모색한다면 새로운 출발을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오늘을 사시길 따뜻한 하루가 응원합니다. ​ ​ # 오늘의 명언 인생에 ‘실패’라는 것은 없다. ‘실패’란 단지 우리의 인생을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삶일 뿐이다. – 오프라 윈프리 –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참고로 이건 제가 직접 만든 만년필 이랍니다... ​ ​ ​ #원망#분노#절망#희망#인생#삶#명언#영감을주는이야기#교훈#따뜻한하루
강도를 네 번이나 만나다
198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던 윌리엄 리바인(William Levine)은 한 달 동안 무려 4번이나 강도를 만나 결국 빈털터리가 된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리바인이 운영하는 정육점을 포함해 다른 상점들도 이미 강도들의 타깃이 된 상태였기에 강도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 그러다 리바인은 자신이 연구한 방탄조끼를 만들었고 직접 방탄조끼를 입고서 장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강도들의 침입도 줄어들었습니다. ​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주변 상인들에게도 금방 소문이 났고, 그들은 모두 그에게 방탄조끼를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 입소문을 타며 점점 많아지는 주문에 정육점을 병행하며 감당하기 어려웠던 리바인은 일생의 큰 선택을 합니다. ​ 바로 자신이 운영하던 정육점을 정리하고, “Body Armor, International”이라는 방탄조끼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 이 회사는 이후 크게 성장하여 전 세계 도시에 지사를 세우고 일약 국제적인 기업으로 발전을 하였습니다. ​ 정육점 주인에서 세계적인 방탄조끼 회사의 회장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인생에서 표현할 때 흔히 ‘굴곡지다’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위기, 역전 등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내려갈 때가 있다면 반드시 올라올 때가 있는 것처럼 도약의 기회는 때론 위기 속에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 하지만, 예상치 못한 위기 속에서 흔들림 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분명 성공의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 ​ # 오늘의 명언 문제를 대면하는 데 따르는 정당한 고통을 회피할 때, 우리는 그 문제를 통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성장도 회피하는 것이다. – M. 스캇 팩 –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위기#인생역전#오르막과내리막#인생#삶#명언#영감을주는이야기#교훈#따뜻한하루
"총알이 날아와 옆에 있던 친구 관자놀이를 관통했어요."
<진영숙 양(15세, 당시 한성여중 2학년)의 유서>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닌,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 이 글의 주인공인 "진영숙" 양은 57년 전 4월 19일 오후 4시 학교를 파한 후 시위에 나가기에 앞서 홀몸인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집에 갔다가 시장에 장사하러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편지를 써놓고 거리로 나섰다가 성북 경찰서 앞으로 이동하던 버스에서 구호를 외치던 중 버스 안에까지 실탄 사격을 하던 경찰에 의해 사살당했다. --------------------------------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오 우리는 당시 우리보다 어린, 살아있다면 지금 어르신들일 학생들의 피로 쓰인 민주주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소 그리고 이승만 ㄱㅅㄲ...
냉혹한 대일본제국의 희생정신.godborn
옛날 옛적 중일전쟁 시절의 이야기다 상하이에서 중꿔와 좆본이 멱살잡고 드잡이하던 시절 존나게 웃긴 주작질이 있었드랬다 기세도 등등하게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에 트위스트를 추면서 쳐들어온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상하이를 지키는 중꿔들은 지금까지의 오합지졸 븅딱들이 아니라 독일에서 온 나치훈련교관한테 착실하게 훈련받은 파워 짱깨였던고로 좆본군은 존나게 깨진다 가장 좆본군을 괴롭힌게 중꿔들이 치밀하게 깔아둔 철조망이었는데, 독일식 철조망 진지라 존나게 튼튼했다 철조망이 좆같으면 철조망을 치워야지 좆본군은 철조망을 조지러 갈 자원자를 뽑기 시작했다 옛날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나온 파괴통이라는게 있음 길쭉한 원통 안에 폭탄을 넣어서 멀리서 구조물 철거하는데 써먹을 수 있는 신통한 물건이다 이렇게 여러개 이어서 길쭉하게 만들어서 철조망이나 지뢰밭에 넣고 도화선 불 붙여서 터뜨리고 안전하게 진군하는 거다 말로 설명하면 감이 안 잡힐테니까 움짤로 보면 됨(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뱅갈로어라고 부른다) 겨우 철조망 뚫자고 쓰기엔 좀 비싸 보이는 물건인데 그래도 병사의 목숨은 소중하니까 앵간한 나라는 다 들고 다녔다 물론 인권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대일본제국의 자랑스런 육군에도 당연히 파괴통이 없지 설마 있을 거라고 생각했음? 좆본 새끼들은 철조망이 있으면 사이오닉 정신에너지로 뚫고가라는 프로토스들인데 파괴통 같은게 제식 장비로 있겠냐 그래서 나온게 이 현지급조파괴통(대나무제)다 일본 대나무도 아니고 상하이 현지에서 대나무 짤라다 폭약 채우고 도화선 쑤셔박은게 끝인 조잡한 물건이다 생짜 대나무를 짤라 만든 물건이니 당연히 길이 조절 기능 따윈 없다 도화선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라 설치 후에 땡기는 게 아니라 미리 땡겨놓고 달리는 거다 그러니까 농담 아니라 이거랑 똑같다 저 존나 길쭉하고 무거운걸 3명이서 발맞춰서 존나게 달리면서 터지기 전에 던지고 돌아와야 됨 놀라운건 저 병신짓을 자원자를 받아서 처리했다는 건데 위의 3명이 그 자원자들이다. 각각 다케지, 스스무, 이노스케라는 엑스트라같은 이름이 있지만 그냥 개또라이 1호기 2호기 3호기로 통칭하자 이런 개또라이짓에 자원했으니 틀림없이 개또라이들이 분명하니까 이 개또라이 트리오가 그나마 보여준 상식은 딱 하나였는데 이딴 짓을 밤에 했다는 거다. 낮에 했으면 100% 총맞고 뒤졌을건 분명하고 존나 쪽팔렸을 거다 헛둘헛둘헛둘 야밤의 상하이를 트위스트를 추면서 3명의 개또라이가 나아간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맨 앞에 가던 개또라이 1호기가 진흙에 미끄러져 트위스트를 추면서 넘어져버린 것이다 호엑! 호에에엑! 일제히 패닉을 일으키는 상하이 트위스트 3인조. 자원했을 때의 깡은 어디갔는지.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거 도화선에 미리 불 붙이고 달리는 물건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건이니 뭐 겁에 질린 건 이해가 간다만 그 뒤의 행동이 또 코미디다 자빠져버린 개또라이 트리오가 도화선을 꺼버리곤 본대로 복귀해버린 것이다 장렬하게 짱깨의 방어선을 작살내고 돌아왔어야 할 개또라이 트리오가 맨몸으로 복귀하자 부대장은 기가 막혔다 당연히 오지게 깨졌다 얼마나 깨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개또라이 트리오가 겁에 질려서 다시 대나무 파괴통을 들고 도로 방어선으로 달려갈 정도는 깨진 모양이다 부대장의 개지랄을 피해 다시 개또라이 3인조는 방어선을 향해 돌격한다 헛둘 헛둘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 잠시 후 요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다시 말하지만 폭파 타이밍 조절 기능 따위 없는 물건이었다. 불 땡기고 터뜨리러 갔다가 자빠져서 돌아오는 시간이 짧았겠냐 이미 타들어갈 대로 타들어간 도화선은 이 빡대가리 3인조와 함께 그대로 폭사했다 1932년 2월 22일의 병신 같은 콩트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더이상 등신 같을 수 없단 생각이 들겠지만 진짜 등신질은 이제 시작이다 상하이 사변을 취재하러 온 좆본 기레기가 기레기 만랩 스킬을 터뜨린 것이다 아사히 신문에서 온 이 좆본 기레기 새끼가 이 작전을 지휘했던 등신을 취재했는데, 당연히 무의미하게 병사를 꼬라박았다고 할 수는 없으니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3명의 위대한 육탄용사들이 대나무 폭탄을 껴안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카미카제를 시도했다는, 듣기만 해도 엄청난 뻥카 인터뷰가 튀어나온 것이다. 개또라이 3인조는 어느 틈엔가 구국의 용사가 되었다. 얼타다 자빠져서 호에엑 거리던 폐급들은 즉시 2계급 승진한 것은 당연하고 그 뒤의 일이 더 가관이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을 통해 중국을 날려버린 감염된 테란 3인조의 영웅담이 전국으로 흘러나가니 온사방에서 자폭찬양이 울려퍼졌다. 심지어는 죽은 병사들을 기린답시고 육군에 기부금이 쏟아져들어왔다. 정말 좆본스러운 상황이군 개또라이 3인조는 맥주 광고에 나오기도 하고 조선 학교에서 어린이 논술문제로 출제되기도 했으며(내용: 개또라이 3인조는 어떤 심정으로 꼬라박을 했을지 서술하시오 초우셴징) 결국에는 동상까지 세워진 것이다 물론 당연히 개또라이 3인조를 주인공으로 한 군가도 만들어졌다 과연 대일본제국이다 정말 대-단해 부실한 병신 무기 만들어놓고 닥돌하라는 좆본군이나 하란다고 그걸 자원해 하는 또라이들도 븅신이지만 저렇게 자폭 자체를 신성시하면서 몸 흔드는 좆본 국민들이야말고 최종병신이 아닐까 이렇게 감염된 테란 3인조는 50년 넘게 찬양받다가 뜬금없이 2007년에 아사히 일보가 아 그거 구라였음 ㅈㅅ 정정보도를 내면서 정체가 까발려지고 만다 진짜 존나 개쪽팔렸겠다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출처) 일본 전쟁 얘기 좋아하시길래 원하시는 걸로 가져옴 정말 천하 제일 븅신들인데 왜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의 정보전 능력
1. 첩자 파견 및 운용 : 확인되는 것만 최소 7명. 피난민 잡아다 소식 물어보는 수준에서 끝난 게 아니라 이순신이 직접 관리하는 전문직 첩자들임. 아예 일본군 본진인 부산포에서 순왜로 들어가 몇년간 지속적으로 첩보 보낸 고정간첩도 2명 있었고, 손수 페이퍼플랜 만들어 일본군 손에 넘어가도록 흘리기도 했었음 조정의 공식적인 첩보루트가 아니라 이순신 본인이 사적으로 관리하던 네트워크라서 원균은 쓰지도 못했고, 이순신이 칠천량 이후 복귀했을 때 유용하게 써먹음 2. 정찰을 통한 현지 정보 습득 탑승인원 4인 이하의 쾌속선으로 이순신이 운용한 탐망선 총계 110척 추정 높은산 정상에 탐망군 따로 두고 정찰을 계속 돌려서 정보습득 되고 나서야 전투 나감 척후를 적당히 되는놈 아무나 시키던 다른놈들과 달리 이순신 휘하에서 척후장, 별망군, 탐망선 등등의 장교는 전문직이었음 3. 피난민 활용 이순신이 백성과 피난민들 구휼에 존나 신경쓴 이유는 유교적 명분이나 인의도 있지만 정보수집 목적도 컸음 이순신이 백성들 잘 대접해준다니까 그쪽으로 피난 많이가기도 하고, 쓸만한 첩보 제공하면 보상도 많이해줘서 제보자들도 많았음 이를테면 한산도 대첩은 목동 김천손이 함대로 뛰어와서 적 함대가 견내량에 정박중이란 거 안 알려줬으면 불가능했겠지 정보제공자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훈련원 봉사 제만춘이 포로가 되서 나고야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해왔는데 얘를 잘 대접해서 포로생활 들은 다음 조정에다가 선처를 부탁함 4. 포로 심문 본래 조선군은 왜적을 잡으면(or 투항 해오면) 족족 목이나 따서 수급올리던 것과 달리 이순신은 포로한테서 정보를 캐내는데 주력함. 심문한 다음에 죽인 것도 아니고 선처 해주고 전력으로 씀. 적 수급 따오는 것보다 적 포로로 잡아오는걸 더 높게 쳐 줌. 5. 정보장교 광양현감 어영담이 대충 비슷한 역할을 했음 어영담은 약간 사람이 어설프고 업무능력이 떨어져 평생  남해안 일대 외관직만 떠돌아다니던 관료였으나, 오랜 외관 경험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물길을 그냥 외우다시피 한 인간 GPS였음. 이순신마저 자기도 이 능력 못따른다고 인정함 임진왜란 초기, 아직 전라/경상도의 물길에 서툴렀던 이순신의 정보장교 역할을 하며 조선수군의 길잡이를 해줬고 이에 이순신은 어영담이 저지르던 부실행정, 내지는 부정부패 등등을 다 눈 감고 무마해줌. (원래 이 양반 성격상 이런거 걸리면 짤 없이 사형.) 전근대시기 조정도 아니고 일개 장군이 자발적으로 운용한 첩보능력으로는 특이한 수준임 비슷한 케이스를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장군이 군주던가 아니면 단기간에 일시적으로 운용된 수준임. 반면 동시기 조정은 선조 이하 전원이 이중간첩 요시라한테 놀아나고 있었음 6. 동맹국 정보자산 활용 일본은 조선 조정보다는 명나라 황실을 협상대상으로 봐서 북경과 오사카에 서로 외교사절을 자주 파견했음. 선조가 주는 정보는 쥐뿔도 없으니 이순신은 그나마 같이 작전하는 명나라군한테서 정보를 얻어야 했음. 진린 같은 이순신 빠돌이를 제외하면 명나라 장수 대부분은 조선군을 자신들보다 아래로 봤으므로 콧대가 하늘을 찔렀고 이순신은 이런 놈들 비위를 맞추려고 자존심도 접어가며 없는 살림에 연회를 베풀었음. 술이 거나하게 취한 명나라 장수들은 기생 옆에 끼고 따라주는 술 받으며 허세 반 진심반 취중진담을 나눔. 나오는 내용의 9할이 개소리였지만 그중 한개 정도는 쓸만한 정보였다고 함. 조선 조정의 외교력이 씹창이었던 관계로 이순신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같은 내용들을 이렇게 건너건너 들어야 했을 정도임. 명나라 측에겐 정말 개나소나 알 정도로 가치없는 것들이었을지 몰라도, 이순신은 그런 것들 조차 정말 감지덕지했을 정도임. 출처 : <임진왜란 기간 충무공 이순신의 정보활동에 관현 연구> 출처 크 역시 전략의 군주
로마군을 시조로 여기는 베두인 부족
6세기, 벨리사리우스가 시간과 병력을 쬐에끔만 더 주시면 이탈리아 되찾겠다고 아드득까드득하고 있을 무렵, 팔레스티나 테르티아 속주의 리메스 후방이 너무 휑하니 비어서 불안한데, 여기 남쪽 중간쯤에 요새 하나 알박아 두면 방어에 도움되겠다! 란 생각을 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시나이 산기슭에 요새를 세우라고 지시함. 그렇게 전쟁도 잘하고 도로도 잘 깔고 공사도 잘하고 못하는게 없는 로마군 200여명이 시나이 반도에 파견, 산기슭에 요새를 뚝딱뚝딱 짓게 되는데... 폐하 다 지었습니다!! 이제 집에 어떻게 옵니까? ??? ??? 니네가 집에 왜 와? 잘 모씀다? 요새만 만들면 군생활 끝나냐? 그거 누가 지킬지는 생각 안해봤어? (씨발...) 하는김에 거기에 뿌리내리고 잘 살아봐라. 아들들 낳으면 걔네도 대대로 수도원 지키라고 하고! (씨발...) 그렇게 말뚝을 박은 병사들은 시나이 남부에 뿌리를 내렸고, 황무지에 유일하게 지나다니는 아랍 베두인 부족들이랑 피가 섞이게 됨. 이들의 후손은 갈수록 시나이 베두인족의 피가 더 짙어지다가, 마침내 아예 자기들만의 전통을 간직한 새로운 부족, '자발리야' 부족이 됨. '제벨' = 아랍어로 '산'이니까 '자발리야' = '산에 사는 사람들'. 부족 이름부터가 시나이 산기슭에 지은 요새에서 유래하는 셈임 이런 베두인 부족들은 기독교 신자들이었고, 4세기부터 아일라에 주둔하던 제10 프레텐시스 군단을 주축으로 형성된 팔레스티나 방어선(limes Palaestinae)의 리미타네이 부대들에도 대거 보조병으로 복무함. 무함마드가 팔레스티나 속주를 슬쩍 찔러본 '무타 원정' 때에도 로마 장군 테오도로스 아래에서 종군했고. 하지만 이후엔 로마 정부가 베두인족한테 돈을 안 주자, 실망한 부족들은 갈수록 미래가 창창해 보이는 칼리파 편에 붙으면서 이슬람으로 단체 개종함. 그렇게 시간이 흘러 7세기,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가 로마군 썰고 다닐 때, 고립된 기독교 수도원들은 차례차례 무너졌지만, 성녀 가타리나 수도원만은... ??? : 아 ㅋㅋ 저거 건드려봤자 이득도 없는데 그냥 지나가죠? 정통 칼리파 시대에 칼리프 우마르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면서 수도원 자체의 수도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자발리야 부족민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했지만 여전히 성녀 가타리나 수도원과는 공생 관계를 유지했고, 기독교적 색채도 현대까지 쭈욱 잔존함 그래서 성 가타리나 축일에 교회도 나가고, 무덤 묘비로 십자가를 세우기도 하고, 심지어 부활절 축제도 참가할 정도로 괴상한 스까종교를 믿는 부족임. 1차 십자군 때에도 그래서 성지순례왔다가 들린 프랑크인들이 신기해했고, 19세기 유럽인들도 신기해함 그리고 지금은 얘네가 뭐하냐면... '관광 가이드' 출처 아아 저희는 로마의 후예로서~~~~
자동차 색깔.
[빨강노랑파랑 차 사면 355만원 손해본다?…'돈' 되는 컬러 뭔가보니. 2021.10.1일 글로벌 자동차 보수용 페인트 기업인 엑솔타(AXALTA)에서 입수한 '2020년 글로벌 자동차 인기 색상 보고서'. 자동차 업계는 흰색, 검은색, 회색을 앞세운 무채색이 나라에 상관없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튀지 않는 매력'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자동차는 한번 사면 5년 이상 타기 때문에 개성을 표현한 화려한 유채색보다는 쉽게 질리지 않는 '무난한 무채색'을 고르는 경향을 보인다. 중고차로 팔 때도 무난한 무채색이 유채색보다 유리하다. 자동차 브랜드가 잘 팔리고 생산·관리도 쉬운 무채색 색상 위주로 외장 컬러를 선택하도록 강요(?)한 게 영향을 줬다는 주장도 있다. 무채색은 유채색, 펄, 금속소재 등과 결합해 다채로워졌다. 그냥 검다고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다. SUV는 상대적으로 세단보다 유채색이 많은 편이고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경차도 있다.] 내 나름대로 매일경제 기사를 위와 같이 요약을 해보고 느낀점은 사는 사람이 중고차 팔 때 가격까지 고려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이 없어서 안 사는 사람도 있을까? 자동차 회사에서 이미 색칠까지 완성된 차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것이지. 진짜 그 색깔이 좋아서 선택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사고나 노후되어 중고차로 나오지, 5년 탄 뒤 멀쩡한 차를 파나? 장기 렌트카를 이용하는 사람이나 렌트카 업체에서 필요한 정보라는 생각이 든다. 355만원 보다 내가 만족하는 수풀과 구별되는 0.001% 라임펄 칼라를 가지고 싶다.
돈의 철학
거상 임상옥은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가세가 기울었고, 아버지는 많은 빚을 진 채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임상옥은 의주 지역에서 청나라를 상대로 무역 활동을 하는 상인 밑에서 허드렛일부터 하면서 장사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 임상옥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 항상 들어왔던 말이 있었습니다. ​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고,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다.” ​ 어느 날 청나라에 가서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청나라와의 주된 무역 품목이 인삼이었는데, 임상옥은 가져간 인삼을 다 팔아 첫 장사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듯했습니다. ​ 장사를 마친 임상옥은 일행과 술집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이곳으로 팔려 온 상태였습니다. ​ 임상옥은 돈 때문에 사람을 이런 곳에 팔 수 있냐며 자신의 돈 500냥을 내어주고 ‘장미령’이라는 이름의 그 여인을 구해 주었습니다. ​ 그런데 그 500냥은 모시는 상인의 인삼을 대신 판 돈으로, 그중 250냥이 자신의 몫이라 장사 밑천으로 삼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 임상옥이 그렇게 한 데에는 사람이 먼저지, 돈이 먼저가 아니라는 자신의 아버지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조선으로 돌아온 임상옥은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 훗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장미령이 후에 고관대작의 첩이 되어 임상옥이 장사하는 데 많은 인맥을 만들어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임상옥이 거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상인으로서 독립한 이후로도 청나라와의 인삼 전매로 임상옥은 벌써 30대에 엄청난 거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쥐었지만, 임상옥은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 그는 항상 자신이 번 돈의 80%만 갖고, 나머지 20%는 인삼 경작 농가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썼습니다. ​ 현종 때에는 수재가 발생하자 임상옥이 거액의 의연금을 내어 ‘평안도 귀성 부사’라는 벼슬을 받기도 했습니다. ​ 이렇듯 임상옥이 욕심을 경계할 수 있었던 것은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라’는 ‘계영배’ 덕분이었는데 이 술잔은 잔 안에 술이 70% 이상 차면 술이 없어져 버립니다. ​ 그 원리는 술잔 속에 작은 관을 만들어 그 관의 높이까지 액체를 채우면 새지 않으나 관의 높이보다 높게 액체를 채우면 관 속과 물의 압력이 같아져 수압 차에 의해 액체가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임상옥은 돈에 관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는데 그것은 당장의 이익을 좇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욕심이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고 자신이 번 돈의 5분의 1은 항상 이웃에게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회 고위층의 탐욕과 그로 인한 불공정과 불법이 만행하고 있는 요즘, 거상 임상옥의 ‘돈의 철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 ​ # 오늘의 명언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 유일한 박사 –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 #돈#명예#사람#인생#삶#명언#영감을주는이야기#교훈#따뜻한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