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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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산을 쓰고 점심을 먹으러 가며 생각했다. 올해는 비만 오는구나. 이쯤 되면 레이니 데이가 아니라 레이니 이어(이얼?)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퇴근이 세 시간 반 남짓 남았군. 연말을 앞두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업무량 속 이 태풍의 눈 같은 시간.

앞 문장까지 쓰고 다시 글을 쓰려고 보니 이젠 퇴근 시간이 두 시간 반 남짓 남았군. 이왕 이럴 거 오전부터 한 시간마다 한 문장씩 적어볼 걸 그랬나. 만약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한 문장씩 적는다면 그 글은 혼자 쓴 게 아니라 열 명의 내가 공동으로 쓴 글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공저 나 1, 나 2, 나 3…….” 물론 시간을 아주 미세하게 쪼갠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미 나는 무수한 겹의 내가 바통을 이어가며 글을 쓰는 거겠지만. 그러니까 어떤 와인은 마시는 와중에도 공기와의 접촉으로 인해 수시로 맛과 향이 변하는 것처럼.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인 이십대 초반에, 글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뭔가를 끼적여 놓은 것들을 본 적이 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려서 혼났던 기억이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녹음해서 들으면 대부분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이질감을 느끼듯이 그 역시, 아니 그 이상으로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나는 이제 ‘나’가 아니면서 여전히 ‘나’이므로. 지금 쓰는 글들도 훗날 보면 그런 느낌일까. 그런데 두 가지 경우 모두 저마다의 장단점이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내가 쓴 글을 볼 때 다시 얼굴이 화끈거린다면 한 번 더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고통일 테고,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는다면 나는 그다지 성장하지 않았다는 자괴감이 들 것 같기도 하다. 너무 비관적인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또 장점이다. 수치스럽다면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 것이고, 수치스럽지 않다면 나보다 어린 내가 철모르던 시절에 크게 삽질(?)한 것은 아닐 테니까.

수치스럽다면 몇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나보다 훨씬 어린 나를 연민하는 기분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기분으로. 수치스럽지 않다면 나는 어린 나를 여전히 동의하고 지지한다는 기분으로.

개인적으로는 사실 올해 쓴 일기들은 프로젝트가 끝나면 전부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적게든 많게든 각자의 사진첩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텐데, 나는 내 사진첩을 보면 잘 나온 사진들만 남기고 모조리 불태우고 싶다는 욕망도 들고, 그렇다고 못 나온 사진들을 다 버리자니 그냥 그 시간들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것 같아서 망설여지기도 한다.

카프카는 죽을 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는 그 유언을 어기고, 카프카의 원고를 세상에 내놓았다. 카프카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의 전설적인 원고들을 경험하지 못했겠지만, 과연 저 사후세계에서 당사자인 카프카가 이 현장을 모두 목격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막스 브로트 너 이 새끼……, 정도? 아, 물론 독일어로 욕했겠지만, 사실 그의 성정으로 보아서는 그럴 것 같지도 않고, 그러나 사후이기는 하지만 유명세와 명예 상관없이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그가 그의 작품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할 수 있기에 그는 카프카다.

시간이 많이 흐른다면 그때도 내가 여전히 글을 쓰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수치스럽든 그렇지 않든, 어린 나를 조금은 너그럽게 봐주고 싶다. 어차피 지금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기도 가장 늙은 사람이기도 하니까. 내게 어린 시절의 내가 깃들어 있듯, 아직 도래하지 않는 내가 이미 내게 깃들어있는지도 모른다.

자, 이제 퇴근이 한 시간 반 남짓 남았다.

오늘의 일기는 두 시간 전의 나와 한 시간 전의 나와 현 시각의 ‘나’가 함께 썼다. 그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겹의 나는 세 명의 나를 보조한 서브 작가 정도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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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의 나를 여전히 지지합니다.. 가끔은 수치스럽기도 하지만요ㅎ 그때도 나이고.. 지금 이 순간도 나이고.... 내일의 나도 나니까요... 29살 12월 31일의 나와 1월 1일 30살의 나는 다른 사람일까요...?
@tomato7910 어려운 질문이네요.
@realrappy 딱히 대답을 원했던 질문은 아니니까 깊이 생각 마세요...^^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20대때 좋아했던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니는 제게 친정엄마가 종종 나이값 좀 하라고 잔소리 하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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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 네가 없고 양복은 원래 없어서
네가 없고 양복은 원래 없어서 *친구를 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누구나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내가 그를 잊는다면, 나는 오로지 숫자에만 관심이 있는 어른처럼 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물감 한 통과 연필 몇 자루를 샀다. 네가 없고 양복은 원래 없어서 너를 보내기 위해 나는 양복을 빌려야 했다 빌린 옷은 소매가 길어 자꾸만 흘러내렸다 음식은 일부러 조금 준비했지만 객은 생각보다 더 적었다 찬도 국도 별로라 객들은 그마저도 음식을 남겼다 오로지 술만 알맞게 차가웠다 찬 술을 마시며 새벽을 기다렸다 비용은 너의 삼촌이란 사람이 지불했다 그는 벌어서 갚으라고 했다 너를 보내는 일은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너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너를 구하지 못한 이유를 생각하다 대신 내가 이때까지 한 벌의 양복을 마련하지 못한 이유를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는 축복받은 세대라고 했다 너는 관짝 같은 집에 살다 집 같은 관으로 이사를 했다 집도 관도 자가는 아니었다 네 통장에는 십이만 육천팔백 원이 남아 있었다 관 같은 집과 관 그리고 십이만 육천팔백 원 그 어디에 축복이 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이름은 깨진 그릇이었다 우리는 담기지 못하고 새어나왔다 너의 동의 없이 네게 붙인 명찰을 거두어 너의 영정 앞에서 태웠다 틀린 이름이라도 없는 이름보다는 나을테니 아무래도 가져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네가 없으므로 나는 내게 말했다 내가 온 별은 너무 멀어 무거운 짐을 들고 갈 수는 없다고 모쪼록 잘 지내라는 너의 마지막 문자 채 두장도 채우지 못한 방명록 맨 뒷장에 양이 들어있는 상자를 그렸다 네게 양을 줬더라면 너는 여행을 조금은 미루지 않았을까 너는 인도에 가고 싶어 했다 그곳에서는 장작으로 고인을 보낸다고 했다 충분한 양의 장작을 구할 돈이 없어 화장이 끝났는데도 다 타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재와 유해는 갠지스 강에 묻는다고 했다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상상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강가에 가늘고 긴 꼬리를 가진 누추한 개 한마리 어슬렁대고 재가 되지 못한 시체들이 이따금 강변으로 밀려드는 모습을 강가에 앉아 충분한 양의 장작을 구하지 못한 이유에 관하여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양이 들어있는 상자 옆에 그 사람이 들어있는 상자를 그렸다  네가 누운 상자가 퍽이나 맘에 드는지 너는 활짝 웃고있다 겨울의 공사장이 생각난다 불을 쬐던 인부들 사이에 우리가 있었다 통 속의 폐목재들이 타는 소리 포개어 버티던 것들이 끝내 하나 둘 주저앉는 소리 내가 아는한 너는 나무 타는 소리를 싫어하는 세상 유일한 사람이었다 평생 흔들리며 살아온 나무가 불속에서도 몸을 뒤척이고 있다고 너는 말했다 우리가 태어난 곳이 인도가 아닌 덕분에 너는 다 타지 않는 일도 다 타지 않은채로 강으로 가는 일도 없었다  너는 성공했다 너의 화장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화장터의 두꺼운 벽 덕분에 줄곧 흔들리며 버텨온 네가 불속에서 마지막으로 주저앉는 소리 듣지 못해 다행이었다 단촐한 너의 여행이 부디 즐겁기를 * = 생택쥐 페리 [어린왕자] ----------------------- 비록 불편할지라도 누군가는 해야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생활고에 목숨을 잃은, 혹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청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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