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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전투

安市城戰鬪 645년(보장왕 4년), 고구려의 안시성에서 벌어진 전투로 제1차 고-당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여러 성을 함락하는 등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안시성의 실패로 고구려에서 철수하게 된다. 1 배경 643년 9월에 당나라에 고구려에 상리현장을 사신으로 보냈고 연개소문이 신라의 두 성을 함락했는데, 상리현장은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했지만 연개소문이 이를 거절하면서 당태종이 이를 명분으로 삼아 고구려 정벌을 일으키기로 하는데, 요수를 건너 건안성을 압박하고 이세적, 이도종 등이 개모성을 함락했다. 한편으로 장량이 이끄는 수군이 비사성을 함락하고 당태종이 요동성, 백암성 등을 함락했으며, 고구려에서는 고연수, 고혜진 등이 이끄는 15만을 원군으로 보내서 싸웠다. 아사나사이가 이끄는 당군이 거짓으로 싸우다가 지는 척 도망가거나 사신을 보내 연개소문을 문죄하러 온 것으로 교전은 바라지 않고 신하의 예만 취한다면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보여 고구려군을 방심하게 했다. 결국 고구려군은 제대로 방비하지 않다가 주필산에서 패해 고연수, 고혜진 등은 항복했으며, 8월 10일에 군영을 안시성 남쪽으로 옮겼다가 당태종은 건안성, 오골성 두 성과 안시성 중에서 어느 곳을 공격할지 물었다. 이세적이 보급 문제, 배후 기습 문제로 안시성을 공격할 것을 주장해 안시성을 공격하기로 한다. 2 진행 당나라의 군사들이 안시성 공격을 시작하자 안시성 내부에서 당태종의 깃발, 수레의 덮개 등을 머리서 보기만 하면 번번이 성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면서 당태종이 화를 내자 이세적이 성을 공격하는 날 이들을 모두 묻게 해달라고 하면서 이 소식을 듣고 안시성에서는 더욱 굳게 지키기를 각오하면서 당나라의 군사들이 여러 차례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고연수, 고혜진 등이 군사를 옮기면서 장량의 군사와 합해 오골성을 함락하고 압록수를 건너 평양을 함락하는 의견을 냈지만 장손무기가 건안성, 신성 등의 군사들에게 공격받을 것을 이야기하자 중지했으며, 당태종이 안시성의 닭, 돼지 소리를 듣고 성을 포위한지 오래 되면서 성 안의 연기가 미미해졌지만 지금은 닭과 돼지가 시끄러운 것은 군사들에게 잡아먹이고 밤 중에 나와서 기습할 것이라 여기면서 이세적에게 대비하게 했다. 밤에 고구려군의 수백 명이 성에 줄을 매달아 내려왔고 이 소식을 듣고 당태종이 직접 성 아래로 와 군사를 불러 공격해 수십 명을 죽이고 물러나게 했다. 이도종이 무리를 감독해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토산을 쌓고 안시성을 압박했는데, 안시성에도 이에 대응해 성을 더 높이 쌓았고 여러 차례 군사들이 교대로 싸워 하루에 여섯 번에서 일곱 번 교전할 정도였다. 당나라의 군사들은 충차, 포석으로 성루를 부쉈고 안시성은 목책으로 부서진 부분을 막았으며, 이도종이 싸우다가 발을 다쳤고 토산을 쌓는 일은 60일이나 되었다. 토산 꼭대기에서 성곽까지는 몇 장 정도 떨어져 있어 내려가서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이도종은 부복애를 시켜 토산 꼭대기에서 대비하게 했지만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거느리고 떠나고 있던 중에 고구려의 군사 수백 명이 성이 부서진 곳으로 나와 싸우면서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면서 참호를 파서 지켰다. 결국 당태종은 화가 나서 부복애를 죽였고 이도종이 죄를 청하자 개모성, 요동성을 함락한 공로가 있어 용서했다. 요동성이 일찍 추워지고 풀은 마르면서 물이 얼어 병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지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3 결과 안시성의 실패로 인해 고구려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으며, 당의 주력군이 고구려 원정을 한 틈을 타서 설연타의 힐리구리실설사다미가한이 하주를 노략질했다. 이로 인해 당태종은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주를 직접 정벌하려다가 병에 걸리게 된다. 여담으로 안시성 전투는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2006~2007)과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2006~2007)에서 자세하게 묘사된적이 있다. 보통 대조영버전을 연개소문 버전보다 높게 쳐주는데 대조영에서는 수십만의 당나라 대군이 안시성으로 돌격하는 모습,공성전,토산의 붕괴등을 실사촬영,CG로 리얼하게 처리함으로써 거의 반지의 제왕급의 전투신을 구현해냈다. 특히 토산이 무너질때의 장면과 OST가 맞물리는 폭풍간지의 장면은 대조영 최고의 명장면으로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된다. 출처- 리그베다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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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연구한 공학자, 길브레스 부부 (1)
1904년 10월 19일, 미 오클랜드. 막 결혼식을 마치고 나온 신혼부부가 기차에 올라 몇 마디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이는 몇이나 낳았으면 좋겠어?' '글쎄, 한 다스만 낳지. 기왕이면 남녀 각각 여섯 명씩.' 대화 내용이 살짝 소름끼치긴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이 말은 실제로 실현됩니다. 평생 길브레스 부부는 여섯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딸을 가졌고, 개중 다섯째 아들과 일곱째 딸에게 자신들 이름을 각각 붙여줬죠(프랭크 2세, 릴리언 2세). 비록 둘째는 1912년 디프테리아로 사망하지만, 나머지 형제자매들은 모두 잘 성장해 주었습니다. 길브레스 부부와 11명의 자식들. 자녀들은 부부의 실험 연구 대상이자 참가자였습니다. 부부는 여러 번 자녀들이 접시를 닦는 동작을 촬영해 분석하거나, 그들이 개발한 방식으로 타자기 사용을 보름 만에 숙지하게 교육하는 등 일상 생활에 그들의 연구를 접목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이 기억하는 부모는 유머러스하고 자상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네요. 어째서 남편, 프랭크 길브레스가 열두 명 자식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프랭크 길브레스는 매번 가족들을 데리고 국립공원이나 영화관에 입장할 때, 혹은 기차나 차편을 타야 할 때면 항상 단체 할인을 받아냈다고 하네요. 나중에 프랭크는 아이들 중에 쌍둥이나 세쌍둥이가 없어서 섭섭해했답니다. 여러 명 아이들을 한 번에 낳아 한 번에 기르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나요? 뉴저지 몽클레어에 집을 한 채 마련해 두고, '과학적 관리법과 낭비의 동작을 없애는 학교'라고 이름붙인 집에서 길브레스 부부는 평생 자신들의 연구를 그 자신과 자기 자식들에게 적용했습니다. 나중에 셋째 어네스틴과 다섯째 프랭크 2세는 자기 가족들이 그 집에서 살았던 경험담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요. 이 책이 어찌나 유행했던지 속편에 영화, 뮤지컬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기억하는 프랭크 길브레스는 자상하고 유쾌한 가장이었던 모양이지요.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혁신주의 운동이 미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떨칠 때가 1900년대 초 일입니다.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프레데릭 테일러가 활발하게 강연, 저술 활동을 하며 자신의 소위 과학적 관리론을 설파하고 다닌 때도 이 즈음이죠. 1904년 결혼한 길브레스 부부가 어떻게 평생에 걸쳐 공동연구를 수행했는지는 잠시 미뤄 두고, 먼저 프랭크 길브레스에 대해 잠깐 조명을 해보겠습니다. 프랭크는 메인 주 페어필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아났습니다.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결과 MIT에 입학 허가를 획득하지만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하기를 선택했죠. 17세이던 그가 선택한 첫 직업은 벽돌공 수습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차차 능력을 인정받아 현장감독으로 승진했고, 나중엔 아예 독립해 건축회사를 차리게 됩니다. 이때 프랭크 나이가 34세였습니다. 사장이 된 프랭크가 집요하게 파고든 건, 바로 벽돌쌓기의 효율을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다양한 수단으로 현장 연구를 실시한 후, 그가 내린 결론은 바로 불필요한 작업 동작을 선별해내 제거하거나 교정하는 동작 연구였죠. 프랭크는 자기 연구를 바탕으로 건설업계의 작업 방식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는 여러 방안을 줄줄이 내놓았습니다. <현장 시스템(1901)>, <콘크리트 시스템(1908)>, <벽돌쌓기(1909)> 3부작 저서가 바로 그 방안이었죠. 운명적인 만남은 정말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1903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한 부유한 집안 여성이 미 동부로 여행을 옵니다. 그녀 응접을 맡은 안내원 미니 번커는 프랭크의 친척이었죠. 결국 미니 번커의 소개로 여성은 프랭크 길브레스와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 뒤 약 1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서로 마음이 맞음을 확인한 두 남녀는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는데요. 이 여성이 바로 프랭크의 영원한 반려, 릴리언 길브레스였죠. 릴리언의 아버지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으로 설탕 정제업으로 나름대로 부를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해 집안일에서 자주 릴리언의 도움을 받았죠. 릴리언은 학업 성적이 뛰어났는데, 부모는 대학 진학을 반대했습니다. 자기 딸이 형편 넉넉한 집 자녀와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게 두 사람의 바람이었죠. 릴리언은 그런 부모를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그렇지만 전 너무 평범해서, 부자들은 아무도 저와 선뜻 결혼하려 하지 않을 거에요.' 설득이 먹힌 건지, 아니면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건지, 릴리언은 소원대로 근처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은 주 시민은 누구든지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형 강의가 많아서 심지어 건물 밖에 텐트를 치고 진행하는 수업도 있었다고 하네요. 또 학교에 기숙사가 따로 없어서 릴리언은 매번 집에서 통학을 해야 했습니다. 전공은 영문학이었는데, 심리학 등에도 관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릴리언은 대학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올려, 졸업식 연사로 연단에 올랐죠. 캘리포니아 대학에선 처음으로 여성이 졸업 연사를 맡은 사례였습니다. 1900년 릴리언은 콜롬비아 대학의 대학원에 지원하는데요. 본인은 영문학 전공을 희망했지만, 지도 교수 소개를 받아 찾아간 영문학 교수는 여학생을 제자로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는 대신, 그녀는 전공을 심리학으로 바꾸어 진학하는데요. 도중에 건강 문제로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1902년 모교인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돌아와 기어이 석사 학위를 마친 후, 릴리언은 바로 박사 과정을 지원합니다. 이때 지원한 전공은 영문학, 부전공으로 심리학을 선택했죠. 이후 1903년 동부 여행 도중 소개받은 프랭크와 1904년 결혼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앞서 적은 그대로입니다. 결혼 이후 프랭크의 연구는 부부 공동의 연구가 되었습니다. 프랭크는 릴리언에게 산업심리학 분야를 공부해 보라고 권유하죠. 릴리언 역시 그 편이 프랭크의 일을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 동의합니다. 결혼 당시 이미 프랭크는 길브레스 사Gilbreth inc.라는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이후 두 사람이 꾸리는 가정 생활은 여러모로 독특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1. 그 집에선 항상 심부름거리가 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용돈이 추가로 필요한 아이들은 자신이 할 심부름거리를 골라 길브레스 부부에게만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와 입찰액을 적어 제시했는데요. 부부는 이중에 최저입찰액을 제시한 사람에게 응찰해 심부름을 맡기고 용돈을 주었다네요. 2. 프랭크는 매번 조끼를 입을 때면 아래부터 위로 올라가며 단추를 채웠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위에서 아래로 끼우면 7초가 허비되지만, 아래서부터 채워 올라가면 고작 3초밖에 안 걸린다나요? 3. 한번은 면도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면도솔 두 개로 거품을 낸 후, 면도칼 두 자루로 한꺼번에 면도를 하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걸 확인하려고 직접 실행에 옮겼다고 합니다. 당연히 면도칼에 목이 베여서 피가 났는데, 자녀들 증언에 따르면 프랭크는 베인 것 자체보다 그걸로 인해 목에 붕대를 감느라 2분이 오히려 허비된 것에 실망한 듯 보였다네요. 4. 평소에 프랭크는 가족 집합 신호로 휘파람을 정해 놓고 스톱워치까지 동원해서 신호 즉시 모든 가족이 무슨 일이 있어도 모이도록 훈련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전체가 모여야 할 일이 있거나 손님이 와서 가족을 소개시킬 때 등 여러 상황에서 휘파람 신호를 이용했다는데요. 어느날 이들 가족이 길가에서 낙엽을 태우던 중, 그만 불이 나무 벽에 옮겨 붙었다고 합니다. 프랭크가 즉시 휘파람을 불자, 불과 14초만에 온 가족이 밖으로 뛰쳐나왔죠. 불은 소방수에게 채 연락할 틈도 없이 꺼졌답니다. 5. 프랭크 길브레스가 가족 중에서도 유난히 특이한 성격이 아니었냐고요? 화장실에는 가족들이 매일 할 일과 공정표가 붙어 있었는데요. 이건 부부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각종 가사일을 해낼 수 있을지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아이들은 밤에 자기 전 체중을 달아 그래프에 적고, 숙제를 마무리하고 손과 얼굴을 씻고 이를 닦으면 또 도표에 표시를 했습니다. 이때 아내 릴리언 길브레스는 스케줄에 기도하는 것도 표시하고 싶다고 제안했는데요. 프랭크는 심사숙고 끝에 각자 자유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네요. 특이한 성격은 부부 양쪽 모두였던 모양입니다. 1924년 프랭크 길브레스는 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 1회 국제경영컨퍼런스에 참석하려고 여행길에 오릅니다. 도중에 그는 무언가를 문득 떠올리고 근처 공중전화로 아내이자 파트너인 릴리언에게 전화하죠. '오는 도중에 가루비누 담는 동작을 생략할 좋은 생각이 났는데 어떻게 생각해?' 믿기지 않지만, 그게 프랭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되었습니다. 슬로바키아에 가기도 전에 프랭크 길브레스는 심장병으로 사망합니다. 홀로 남은 릴리언 길브레스에겐 11명의 자녀와 집, 남편이 남긴 사업체와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남아 있었죠. 프랭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돌자, 심지어 그동안 길브레스 사와 거래해 온 업체들이 컨설팅 계약 중지를 통보했습니다. 릴리언 길브레스에겐 두 선택지가 있었죠. 모든 일을 접고 고향에 가서 남편 잃은 미망인으로 평생 가족을 돌보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남편의 업무 파트너로서 그의 연구와 일을 이어갈 것인가. 릴리언 길브레스는 남편의 모든 것을 자신이 잇기로 결심했습니다. 산업 공학의 퍼스트 레이디는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
조선의 상남자 의병장.jpg
율곡 이이의 뛰어난 수제자였던 성리학자 조헌 당시에도 서인 초강경파로 분류되었으며, 걸핏하면 궁앞에 나타나 상소를 올리기로 유명.. 그런데 이분의 특이점이 상소를 올리러 갈때 도끼를 항상 들고 간다는 것 그 의미는 "내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도끼로 때려부수겠다.."가 아니라, "내 의견을 무시할거면 차라리 이 도끼로 내 목을 쳐라"라는 뜻 이걸 '도끼상소' 혹은 '지부상소'라고 부르는데, 뜻하지 않게 이후 조선의 양반과 유생들 사이에 유행이 되어버림 게다가 자기의 상소가 무시당했다 싶으면 바닥에 머리를 여러번 찧어서 이마에 피를 철철 흘리는 일이 잦을 정도로 과격한 인물.. 이에 선조는 "저거 진짜 미친놈 아냐?라며 유배를 보냄.. 유배가서도 연일 상소를 올리는데, "정여립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왜군이 쳐들어와 전쟁이 날 것이다"등이 주요 내용이었음.. 처음엔 미친소리 취급받았으나 진짜 정여립이 난을 일으켰고 (이게 진짜 난인지 모함인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흠좀무하게 진짜 전쟁까지 터짐... ㄷㄷ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 이윽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직접 의병을 조직해 왜군과 맞서 싸우다 금산전투에서 아들 조극관과 함께 장렬히 전사 애초에 병력면에서도 승산이 없는 전투였으나 굳이 만류를 무릎쓰고 참전한 이유는 "조선의 사대부는 의기가 있고, 군주와 백성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도망치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일본군 피해도 만만치 않아 일본군 역시 금산성을 버리고 퇴각하게됨 그로 인해 전라도가 치켜지게 되며, 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음 그의 의기로운 죽음은 사후 조선의 사대부와 백성들을 크게 자극하며 의병들이 각지에서 봉기하는 촉매제가 됨 이후 그는 '행동하는 선비의 표본'으로서 이후 존경과 추앙을 받게됩니다 . 이런분이 계셨습니다... 출처: 이게 바로 선비 정신이 아닌가 싶소. 제대로 된 양반은 왜란때 죄다 의병으로 나가 돌아가셔서 조선 후기 양반들이 지질하다는 소리도 있으니...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3)
프레데릭 존스에게도 다른 위대한 발명가들처럼 영감이 불현듯 찾아온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밤, 호숫가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운전석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였습니다.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밤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들어왔죠.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열린 창문으로 불청객도 들어왔거든요. 모기가 들어와 윙윙거리자, 프레데릭은 짜증이 나서 창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차 안은 금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워졌죠. 창을 열자니 또 모기가 들어올 것같고, 그렇다고 창을 계속 닫고 있자니 더워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 때에 프레데릭에게 한 영감이 찾아옵니다. 바로 차량용 에어컨을 만들어 팔자는 생각이었죠. 그는 자기 상사이자 파트너인 누메로를 찾아가 자기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걸 만드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으니, 분명 성공할 거라고요. 누메로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누메로는 프레데릭의 아이디어에 대해 시큰둥하게 굴었습니다. 어째서 누메로가 새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더군다나 당시 회사는 새로운 사업 분야를 찾아야 할 처지였는데도 말이죠. 누메로의 회사에서 개발한 극장용 음향 시스템 설비는 미 중서부 전역에서 팔려 나갔습니다. 곧 선발주자인 웨스팅하우스와 RCA가 그 존재를 의식하게 되죠. 치열한 경쟁과 소송전이 거듭되었습니다. 상대는 미 전역에 먼저 진출한 대기업들이죠. 누메로의 회사가 저렴한 가격과 품질로 승부를 거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누메로에겐 대안이 필요했죠. 프레데릭의 아이디어가 묻히나 싶자, 곧 다른 방향에서 기회가 돌아옵니다. 1983년, 누메로는 골프 친구들과 경기를 하며 친목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개중 한 친구가 우연히 누메로가 듣는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죠. '요전번에 시카고에서 닭고기를 잔뜩 사들였는데 말야, 트럭이 길에서 퍼지는 바람에 고기가 다 상해버렸다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당시 운송용 냉각 시스템은 초보적이었고 취약했습니다. 트럭의 진동 때문에 민감한 장비는 쉽게 고장났고, 그나마도 차체와 독립된 동력원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때문에 육류나 상하기 쉬운 상품을 육지에서 수송하는 데는 한계가 따랐습니다. 누메로는 친구 말을 듣고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죠. '혹시 그 문제, 전문가가 해결 못 하면 까짓거 내가 해 버리지.' 누메로에겐 농담이었지만 친구에겐 아니었습니다. 이제 누메로가 기댈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죠. 자신이 운영하는 영사 기기 회사에서 수석 엔지니어를 맡은 프레데릭 존스가 아니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기껏 제안한 차량용 에어컨 아이디어를 걷어찬 고용주가, 뒤늦게 와서는 세상에 없는 차량용 냉각 설비를 발명해 내라고 합니다. 프레데릭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 프로젝트를 맡았을까요? 그의 생각이야 어쨌건, 프레데릭은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냅니다. 1938년 최초의 육상 운반용 냉동장치 모델 A의 특허를 발표하죠. 1938년 발표된 모델 A는 냉각용 핵심 부품이 차체 하단에 설치되었습니다. 이것이 도로 사정에 따라 손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알자, 프레데릭은 해당 유닛을 트레일러 상부로 옮깁니다. 무게가 2200파운드나 나갔던 초기 모델도 나중에는 950파운드까지 경량화하죠. 비록 우연히 이뤄진 개발이었지만, 누메로는 이 냉동 트레일러가 곧 자기 미래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입니다. 그는 곧 자신이 운영하던 극장 설비 회사 Ultraphone과 보유하고 있던 음향 설비 특허, 티켓 발권 기계 특허를 RCA에 팔아치워 정리해 버립니다. 여기에 자신의 생명보험을 담보로 1만 달러를 빌려 자금을 융통하죠. 이 돈을 가지고 누메로는 몇몇 동업자와 함께 써모컨트롤 컴패니Thermo control company를 설립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 트레일러에 올인한 거죠. 하지만 초기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이전에도 냉동 트레일러 기술이 여럿 소개된 바 있지만, 사용자들이 원하는 대로 작동한 경우가 아직 없었던 거죠. 누메로는 고민 끝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냅니다. 육류 포장 체인인 Amour 사와 접촉한 그가 담판을 짓습니다. '저희와 거래하시죠. 처음 트럭 두 대는 아무 비용 청구 없이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우리 장비가 고장나면 그로 인한 모든 손실도 보상해 드리죠. 어떻습니까?' 상대방 입장에선 손해보는 것이 없는 거래였습니다. 상대편 사장은 누메로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Amour 사는 트럭 8대를 추가 구매합니다. 누메로와 프레데릭의 상품이 비로소 시장에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겨우 첫 시작을 끊었지만, 회사 경영은 여전히 순탄치 못했습니다. 거기에 곧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죠. 이때 회사 사장인 누메로는 진지하게 자원 입대를 고민했습니다. 이미 한 번 군대를 다녀왔는데도 말입니다. 마치 그 결심이 허풍이 아니란 듯, 누메로는 지원을 하러 워싱턴 DC로 훌쩍 떠납니다. 그가 모든 것을 걸어 이제 막 반석을 닦아놓은 회사는 다시금 표류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피자 박스 접는 달인 영상으로부터 약 100년 전.
https://youtu.be/nPf309OP-Zk 뭘 이제 와서야, 싶긴 하지만 문득 떠오른 오래된 화제 하나를 우연찮게 떠올려 봅니다. <기생충> 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타고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영화 속에 나온 유튜브 영상 하나도 주목을 받았었죠. 피자 포장 박스를 접을 뿐인 짧은 영상이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 둘 척척 접어 만들어내는 그 동작이 낭비 하나 없이 숙련되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이걸 보고 따라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걸까요? 영화 속 얘기라지만 너무 무리수 아닙니까? 사실 이건 유튜브에 올라오는 수많은 달인들 영상 중 불과 하나일 뿐입니다. 가끔씩 보다보면 정말 저 사람이 나와 같은 인간일까, 싶은 영상들도 있죠. 유튜브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방에서, 사무실에서 편히 앉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가진 놀라운 재주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예술, 아니 마술과도 같죠. 여러분께 한 가지 예술을 더 보여 드릴까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 미국에서 찍힌 사진들입니다. 의아하신가요? 위 사진들은 흡사 오늘날 전시회에 걸려 있는 예술 사진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사실 순수하게 연구 목적으로 찍힌 사진들이죠. 이른바 사이클그래프라는 연구 방식으로 찍힌 사진들입니다. 작업자의 몸 곳곳에 작은 전구를 달고, 방을 다소 어둡게 한 상태에서 평소 하던 작업을 그대로 해보도록 시킵니다. 노출을 길게 해 카메라로 촬영하면, 작업자의 움직임이 마치 빛의 궤적처럼 긴 실선으로 사진 위에 그려지죠. 위 사진들에서 보이는 것처럼요. 알기 어렵지만, 왼쪽 실선 궤적이 위에서 언급한 사이클 그래프 방식. 오른쪽 점선 궤적이 아래서 적은 시간까지 표현한 방식. 제가 이해한 건 딱 그 정도네요. 만약 몸에 붙인 전구들을 일정 시간 간격으로 깜빡이게 하면, 궤적은 완전한 실선이 아니라 점선처럼 될 겁니다. 대신 각 점선의 길이가 동작 구간별 속도에 따라 달라지겠죠. 빨리 움직인 부분에선 점선이 길게, 느리게 움직인 부분에선 짧게 끊어지는 선이 여러 개 나타나는 식으로요. 사진이라는 정지된 그림 위에 시간 흐름을 표현할 수 있는 겁니다. 장도리 부분으로 못을 뽑는 작업자의 손 사진. 팔을 따라 이어진 전선과 중지에 끼운 반지 같은 것이 보이시나요? 촬영을 위해 전구를 단 부분입니다. 위쪽 사진은 의사가 환자를 봉합하며 매듭을 묶는 동작이 궤적으로 표현된 거고, 아래쪽 사진은 일류 골프 선수가 스윙 동작하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소개한 사진들은 1910년대에서 20년대 사이, 프랭크 길브레스와 릴리언 길브레스 부부가 수행한 동작 연구의 일부분입니다. 연구를 창안한 프랭크 길브레스는 숙련된 작업자의 동작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하거나 불편한 도구 자세 등을 바꾸는 등 개선을 통해 작업자의 피로와 부상 위협을 줄이면서 생산성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죠. 마치 <기생충>에서 송강호 씨 가족들이 유튜브 영상을 보고 박스 접는 방법을 배우려 했듯, 길브레스는 다만 그 과정을 좀 더 체계적으로, 모든 사람이 익힐 수 있도록 평생 동안 연구했습니다. 프랭크 길브레스가 동작 연구를 개창했다면, 아내 릴리언 길브레스는 이를 오늘날 산업 공학의 형태까지 끌어올렸습니다. 19-20세기 사회적 성 역할 관념이 굉장히 굳건하게 뿌리박혀있는 시기이기에 보통은 부인 쪽 역할을 과소평가하거나 평가절하하게 되는 일이 많겠습니다만, 릴리언 길브레스만은 아마도 그런 시각으로 보기 힘들 것입니다. 1924년 남편이 급사한 후로도 부부의 공동 연구를 그대로 계승해 1972년 93세로 사망하기까지 왕성한 사회 활동을 했으니까요. 1921년 미 산업공학회 첫 여성 회원 1926년 미 기계공학회 두 번째 여성 회원 1950년 여성엔지니어협회 첫 명예회원 1965년 국립공학 아카데미 첫 여성 회원 1966년 여성 최초로 후버 메달 수상 프린스턴, 브라운 대, 미시간 대 등 23개 대학 명예 박사 학위 릴리언 길브레스 한 사람이 받은 영예만도 이 정도입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산업 공학계의 퍼스트 레이디'였을까요? 그렇지만 역시 릴리언 길브레스 얘기를 하자면 필연적으로 남편 프랭크 길브레스 얘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요한 부부 얘기는 이후 다른 글에서 천천히 풀어 보죠. https://youtu.be/8iTOSgAnJ54 길브레스 부부가 타자 치는 여성을 촬영한 활동사진영상. 영상은 세 파트인데, 첫 파트는 타자를 치는 전체 모습을, 둘째 파트는 작업 중인 여성의 시선 움직임을 찍었고, 마지막 파트에선 타자기 위 손 동작에 집중해 촬영합니다. 낭비되는 동작을 찾아내 개선점을 확인하기 위한 거죠. 타자 치는 여성 옆 선반에 올려놓은 특이한 시계는 길브레스가 고안한 장치입니다. 당시 활동사진 촬영이 수동으로 크랭크를 돌려가며 찍는 방식이다보니 단순히 찍힌 필름만 가지고는 시간 흐름을 파악할 수 없어서 시계를 놓고 같이 찍게 되었다고 하네요. 마이크로 크로노미터라는 저 시계는 1/2000분까지 측정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길브레스 부부가 촬영한 여러 영상을 빨리감기 형식으로 합쳐놓은 영상도 있던데 한 영상당 15분 길이라 올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15분은 너무 길잖아요?
사탄 씨라고 하셨죠? ptsd 상담에 잘 오셨습니다.
과거 노예들이 겪었던 실제 사례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들은 수확기인 1월에서 7월까지는 새벽부터 해질 녘까지 일했다. 감독관은 언제든 노예가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매질이나 고문 도구로 혹독한 벌을 주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고통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가 수리남에서 복무했던 네덜란드 군인 존 가브리엘 스테드맨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롤러 안으로 사탕수수를 밀어 넣는 작업은 너무나도 위험한데, 실수로 손가락이 끼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팔 전체가 빨려들어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지는 일이 흔했다. 그 때문에 기계 작동을 멈출 수는 없다는 이유로 대신 기계에 낀 손가락을 재빨리 쳐내기 위해 손도끼를 준비해 놓는다. 또 다른 위험은 흑인노예가 자긴이 땀흘려 만드는 설탕을 감히 맛보는 것이다. 들켰다간 이빨이 다 나갈 정도로 얻어맞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짓이다.” 한 스코틀랜드인은 영국령 세인트키츠 섬에서 사탕수수밭 거름을 똥거름더미에서 운반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이 작업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만큼이나 죽도록 고된 작업이기도 했다. <자메이카 농장주를 위한 지침서>의 저자 토마스 러플리는 만 세 살이 넘는 노예 아이들도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농장 관리인에게 유아들은 노예 할머니가 돌보는 가운데 아동조로 편성하라고 권했다. 노예 아이들에게 ‘작은 양동이’를 주어 떨어진 쓰레기를 줍거나 잡초를 뽑게 하는 등 유익한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 ‘작은 양동이’는 한낮의 더위 속에서 지독한 악취와 더러운 물이 뿜어져 나올 뿐더러 무게가 대략 34kg이나 나갔다. 네덜란드령 아메리카에서는 주인이 노예의 팔다리를 자르거나 죽이는 것을 공식적으로는 금지했지만, 어디가지나 공식적일 뿐이었다. 스테드맨은 노예에게 유난히 지독하게 잔인했던 한 백인 여성에 대해 기록했다. 그녀는 자꾸 밤에 울어서 더는 못 참겠다고 한 노예의 아기를 강물에 던져 죽여버렸다. 그리고 감히 주인의 허락도 없이 아기를 따라 강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다는 이유로 아기 엄마를 두들겨 팼다. 노예 몇몇이 제발 조금ㅁ나 더 자기들을 자비롭게 대해달라고 빌자, 그녀는 노예들 중 두 명의 목을 쳐버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살아남은 노예들은 그 목을 들고 수리남 총독을 찾아가 이렇게 빌었따고 한다. “각하, 이것은 제 아들의 머리이며, 이것은 제 형제의 머리입니다. 자기를 불쾌하게 했다는 이유로 저희 여주인이 명령해서 베어버린 것입니다. 노예인 저희의 증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피투성이 머리들이 충분한 증거가 된다면, 저희는 앞으로 이런 일만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빌 따름입니다. 그리하면 저희 모두는 주인의 안녕과 번창을 위해 기꺼이 피땀을 흘리겠습니다.” 만약 백인 목격자가 증언했다면 그 여주인은 (고작해야 죽인 노예 1명 당 50파운드의 벌금이지만)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의 증언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고 총독에게 호소하러 왔던 노예들은 자작극을 벌였다는 죄로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마조리 간 외 저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 中 "사탄 씨, 아메리카 여행 중에 받은 정신적 충격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합니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 대화를 나눠봅시다." 출처 : 디시인사이드 모야... 진심 사탄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을듯......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까지 악해질 수 있을까ㅠㅠㅠㅠㅠㅠ....... 마지막 여주인 얘기에 혼자 울컥해버렸음 ㅇㅇ..ㅠㅠㅠㅠㅠㅠ 진짜..... 믿기 힘든 수준이네여..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4)
남들 한 번 가기도 꺼리는 군대를 두 번 가겠다고 자원한 누메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첫 영화 <퍼스트 어벤저>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까요? 영화 초반에 비쩍 마른 주인공이 군대에 자원했다가 퇴짜맞는 장면이 있었죠. 1차 대전 발발 즈음엔 젊은이들 사이에서 군에 자원하는 것이 의무이자 일종의 모험 같은 것으로 여겨진 모양입니다. 낯선 유럽 대륙에 가서 군에서 선전한 것처럼 안전하고 안락한 참호에 틀어박혀 적을 노려보며 몇 개월쯤 있다보면 어느새 예정된 주둔 기한이 끝나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당시 군에 지원한 청년들이 전쟁에 대해 가진 인식은 그런 정도였죠. 그 전쟁이 수년이 넘게 이어지고 전세계 열강이 참전하는 국제전이 될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https://youtu.be/JerVrbLldXw <퍼스트 어벤저> 영화 트레일러. 영상 가장 앞부분에 주인공이 군에 지원했다 퇴짜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실제에 비하면 신병 지원소가 만화처럼 과장되게 표현되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누메로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호기롭게 군에 자원하러 일부러 워싱턴까지 옵니다. 막 설립한 회사 운영이 아직 채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누메로와 프레데릭에겐 전화위복이 됩니다. 워싱턴에서 누메로는 우연히 육군이 가진 고민을 알게 됩니다. 미 육군은 유럽 대륙으로 보낼 장병들을 위해 각종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수송해야 했죠. 그 보급품들 가운데는 물론 식료품이나 의약품 따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중에 상하거나 훼손되지 않고 신선하게 목적지까지 물품을 수송하자면 무엇보다도 향상된 냉동 기술이 꼭 필요했죠. 마침 누메로에겐 그들의 고민을 해소해 줄 기술이미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누메로는 군에 자원하겠다는 계획을 접고 다시 서모컨트롤 사로 돌아옵니다.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 유닛을 군 사양으로 개량해 생산하기 위해서였죠. 완성해 군에 납품한 냉동 장비는 현장에서도 고장 없이 잘 작동했습니다. 미군은 정식으로 서모컨트롤 사 제품을 군 장비로 채택하기에 이르죠. 곧 미군의 식수부터 혈장에 이르기까지 온도에 민감한 모든 품목이 서모컨트롤 사의 냉동 트럭으로 미군이 진출한 모든 전역에 배송됩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심지어 태평양 전선에서도 누메로와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가 수송을 맡았죠. 군과 협력하면서 서모컨트롤 사는 비로소 두각을 보였습니다. 프레데릭이 완성한 기술은 단순히 트럭을 개선할 뿐 아니라, 야전병동과 병기창, 심지어 B-29 폭격기의 조종석과 엔진에까지 적용되었죠. 전쟁 동안 서모컨트롤 사가 미군과 계약한 금액은 천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서모컨트롤 사는 더 이상 작은 회사가 아니었죠. 1949년 기준 직원 200명에 매출 400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회사는 냉동 기술 훈련 학교를 자체 설립해 보유했고, 미 대륙과 중동, 유럽까지 진출해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프레데릭은 대전 후 기차, 배, 트럭 등으로 쉽게 옮겨 실을 수 있는 냉장 컨테이너를 개발했고, 동업자 중 하나인 Myron Green은 전국 유통 및 서비스망을 구축해 회사의 기틀을 세웠죠. 때맞춰 1950년대 새로운 산업이 등장해 급속히 성장합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냉동 식품과 슈퍼마켓 산업이죠. 프레데릭은 이 이후로도 다양한 기술을 연구해 특허를 내고 신제품을 출시했습니다. 1955년 버스용 에어컨을 최초 개발했고, 58년에는 기존 가솔린 엔진보다 훨씬 뛰어나 장거리 수송에 적합한 디젤 엔진 냉동차 설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생전 제출한 특허만도 60개가 넘죠. 그 분야도 냉동 설비에만 국한하지 않고, 엑스레이와 엔진, 음향 설비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1944년 프레데릭은 미국 최초로 냉동 엔지니어 협회 회원이 된 흑인이었습니다. 누메로는 계속 프레데릭과 다른 동업자들 도움을 받아 회사를 키웠죠. 50년대 중반에 서모컨트롤 사는 사명을 변경, 써모 킹Thermo king coperation 사로 바뀝니다. 현재도 전세계에서 검증된 기술력과 우수한 품질로 트럭용 냉동기뿐 아니라 다양한 냉동 수송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진출해 있는 기업입니다. 써모 킹 사가 1960년에 발표한 NWD 62 모델. 현재 써모 킹 사의 냉동 트레일러 제품들의 기본 틀이 된 모델입니다. 냉동차 이외에도 프레데릭 존스는 화물 열차의 냉동 차량, 군에서 혈장이나 약물 따위를 수송할 수 있는 휴대용 냉장 장치 등도 발표했습니다. 써모 킹 사가 발표한 상품 가운데는 심지어 우유 냉각기나 골프 카트 따위도 있습니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을 본 후, 1961년 2월 프레데릭 존스는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미네소타는 1977년 그의 공로를 인정해 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죠. 고아로 자라나 흑인이란 이유로 차별받던 그가 마지막엔 어느 누구도 그 공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위인이 된 겁니다. 한편 사장인 조셉 누메로는 평생을 함께 한 파트너가 사망한 후, 회사를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 사에 팝니다. 1963년까지 그는 계속 사장으로 자리를 지킨 후, 동업자였던 마이론 그린Myron Green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명예 회장으로 물러납니다. 회사는 60년대 극심한 파업을 여러 차례 겪지만 흔들리지 않았죠. 하지만 66년, 써모킹 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참사를 겪게 됩니다. 때는 1966년 3월. 회사는 우수 딜러와 직원들을 뽑아 포상 여행을 보내 주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하네다를 거쳐 홍콩 카이탁 공항으로 향하는 영국해외항공 소속 911편 비행기에 75명의 임직원이 몸을 싣죠. 회사는 이들에게 17일간의 동양 여행 패키지를 제공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 도중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호놀룰루에서 도쿄 하네다로 향하던 중, 비행기는 기상 악화로 후쿠오카 공항으로 회항합니다. 후쿠오카에서 하루 대기한 후, 비행기는 다음날 원래 계획했던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죠. 기상 상황은 좋아서 후지산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고 합니다. 지상에서 비행 계획을 브리핑한 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륙한 비행기는 예정대로 홍콩을 향해 날아갔죠. 그러다 문득 기장은 기수를 잠시 돌려 후지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물론 비행기 고도는 충분히 높아서 산 정상에 부딪칠 우려는 없었습니다. 탑승객들에게 하늘에서 보는 후지산 정상 풍경이라도 보여주려 했던 걸까요? 하지만 정상 즈음에서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나 견디지 못하고 동체가 공중분해되어 버립니다. 날개를 잃은 항공기는 후지산 동쪽 6킬로 떨어진 숲에 뿌연 연기를 내며 추락하죠. 써모킹 임직원 75명을 포함해 당시 탑승객과 승무원 124명은 모두 사망합니다. 사망한 임직원 가운데엔 임원급이 3명, 주요 딜러가 35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망한 임원 가운데엔 부사장 랄프 포터도 있었죠. 또 회사에서 보내주는 포상 여행이었기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경우가 총 52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바람에 63명의 아이가 부모를 잃었죠. 써모 킹 사 입장에선 창사 이래 최악의 참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BOAC 911편 추락 사고. 피해자 중엔 일본인, 한국인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써모 킹 사 임직원과 같이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난기류에 대한 주의 대응이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는 이후로도 건재했습니다. 모기업 웨스팅하우스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룹 내에서 유일하게 좋은 성적을 내어 알짜 기업 노릇을 톡톡히 해냈죠. 1991년 누메로가 사망할 당시엔 이미 회사는 수백만 달러 규모 사업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2700여 명을 고용하고, 도미니카나 아일랜드, 스페인에도 공장이 있었죠. 1993년엔 일본 시장 거의 절반을 점유했고, 이듬해에는 동유럽, 아시아 지역에서 딜러망이 36%나 신장했습니다. 1991년, 미리 적은대로 조시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프레데릭 존스는 이미 사망한 뒤여서 직접 훈장을 전달받지는 못했지만, 그 미망인이 행사장에서 대신 수령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이 흑인에게 수여된 건 프레데릭 존스가 최초였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냉동 운송 기술을 개발해 선적과 식료품 시장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공로가 인정되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 1985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처음 수여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산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을 선정해 표창했습니다. 듀폰 사나 빌 게이츠, 3M 등도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러한 영광을 누릴지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는 대공황으로 완전히 파산하고 학점이 모자라 법대 졸업을 하지 못한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가지고 대회에 나가길 바랐던 극장 영사기사였죠. 그들에겐 기회가 있었고, 기회를 붙잡을 능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편의점과 마트에서, 혹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그들이 남긴 유산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1930년대 누메로와 프레데릭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맞잡은 그 때 덕이란 생각이 듭니다.
습관을 연구한 공학자, 길브레스 부부 (2)
지난 글에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서 놀랐습니다. 괴짜 부부에 얽힌 일화를 나열했을 뿐이고, 어쩌면 지루할 법한 얘기인데도 말예요. 하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처음엔 프랭크 길브레스와 동작 연구에 대해 알아보다가, 우연히 이들 부부의 가정사 얘기를 보게 되었죠.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싶은 뜨악함과 함께, 이들 가족에 대한 흥미도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지난 글을 적은 이유도 그런 감상을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지만, 과연 얼마나 의도가 통했을까요? 각설하고 다시 길브레스 부부 얘기입니다. 흐름대로라면 릴리언 길브레스의 삶에 대해 얘기해야겠지만, 우선은 프랭크 길브레스 얘기부터 하죠. 한 가지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올바른 습관을 익히면, 다른 작업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일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습관은 하는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중요하다. 한 가지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습관을 익히는 방법을 알게 된 사람은 당연히 다른 일에도 같은 방법으로 좋은 습관을 지니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상은 헨리 간트의 책, <일과 임금 그리고 이익>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합니다. 헨리 간트는 오늘날 간트 차트로 알려진 일정 관리 도표를 창안한 인물인데, 세계 최초의 컨설턴트이자 과학적 관리론을 창시한 프레데릭 테일러의 제자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테일러나 길브레스 부부와도 생각이 통하는 부분이 있었겠죠. 때는 1907년, 아직 프랭크 길브레스가 살아 있을 때 얘기입니다. 길브레스 부부는 무언가를 계기로 프레데릭 테일러와 만날 기회를 얻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두 거장은 이내 서로가 하는 연구가 거의 유사하단 걸 눈치채죠. 테일러의 <시간 연구>와 길브레스 부부의 <동작 연구>는 다소 차이점이 있었지만 노동자의 능력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작업 방식을 개선한다는 발상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프레데릭 테일러 개인적으로도 살면서 지금껏 걸어온 길이 프랭크와 유사했습니다. 우수한 성적을 올린 학생이었지만, 개인 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든 점도,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 이윽고 자신만의 분야로 독립하게 된 것도 비슷했죠. 프랭크와 테일러 사이에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던지, 1912년 프랭크는 <과학적 관리 입문>이라는 문답 해설서를 출간해 테일러의 이론에 관심과 지지를 보였습니다. 프레데릭 윈슬로우 테일러. 세계 최초의 컨설턴트. 부유한 집안 출신에 직장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특허로 많은 돈을 벌었고, 은퇴 후 강연, 자문, 저술 활동을 왕성하게 수행했습니다. 작업장에 스톱워치를 끌어들여 노동자의 작업과 휴식 시간을 통제한 게 그의 업적 중 하나인데, 이후 노동자들이 반발하자 1912년 미 의회에서 작업장에서 스톱워치를 쓰지 못하게 하는 법까지 제정했다고 하죠. 또 테니스와 골프를 잘 쳐서 1881년 미 테니스 복식 챔피언십에서 우승 트로피를 따는가 하면, 1900년 하계 올림픽에서 골프 종목 4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골프채를 손수 디자인하기도 했다네요! 테일러와 만남을 가진 지 몇 년 후, 프랭크는 <동작 연구(1911년)>라는 저서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재미있게도 1911년은 테일러가 <과학적 방법론>을 출간한 해이기도 합니다. 이 <동작 연구>에서, 프랭크는 작업자의 동작을 분석해 가장 기초 단위 요소 17개로 분류하고, 이들 각각에 부호를 붙이는 한편 효율적인 행동과 비효율적인 행동을 구분합니다. 자신이 고안한 이 새로운 체계를, 프랭크 길브레스는 서블릭therblig이라고 지칭합니다. 혹시 눈치채셨나요? 서블릭이란 이름은, 바로 길브레스gilbreth 성을 뒤집어 쓴 거란 사실을요. 이것 또한 그가 남긴 묘한 기행 중 하나입니다. 1912년 이들 부부에게 또 한 번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인 릴리언이 그동안 부부가 함께 연구한 바를 토대로 산업심리학 논문 한 편을 써서 대학 측에 학위논문으로 제출합니다. 하지만 대학 당국이 논문 접수에 조건을 걸죠. 대학 측 논리는 이렇습니다. 릴리언의 주전공은 영문학이고, 따라서 제출한 논문은 학위 취득에 부적합하다. 하지만 릴리언이 본교로 돌아와 1년간 산업 공학 전문 실습을 수료한다면 논문을 접수받겠다. 문제는 미 동부에 사는 릴리언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교로 홀로 돌아가 수업을 수료하는 게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단 사실이었죠. 고민하는 릴리언을 위해 프랭크가 아이디어를 내죠. 그는 출판업자를 찾아가 설득한 후, <산업공학잡지>에 릴리언의 논문을 1년간 연재할 수 있도록 허가를 따냅니다. 릴리언의 논문은 1914년 <경영심리학>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됩니다. 이 책에서 릴리언은 여러 기업들이 권위와 수직적 명령에만 의존하는 전통적 체제에서 탈피해 과학적인 관리방법론에 기반한 새 체제에 따라 운영해야 한다고 역설하죠. 책에 적은 저자명은 L.M.Gilbreth였습니다. 저자가 여자인 게 알려지면 불리한 대우를 받을까 우려해서 필명처럼 이름을 적은 거죠. 그러다보니 평소 길브레스 부부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대체 저자가 누구냐는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럴 때면 프랭크 길브레스는 자신에게 질문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했다지요. '우린 결혼한 사이입니다.' 마치 두 사람은 일심동체이니 누가 썼느냐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처럼 말이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학 측은 새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릴리언이 경영 혹은 심리학 학위를 주는 어느 대학에서건 전문 실습을 받는다면 학위를 수여하겠다고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릴리언은 1915년 브라운 대학 응용경영관리 박사 학위를 무사히 취득합니다. 학위를 취득한지 불과 3일 후에 출산을 하게 됐지만요. 1916년 부부는 노동자의 피로를 유발하는 요소들을 분석한 <피로 연구>를 발표합니다. 1917년엔 <응용동작연구>를 내놓으면서 동작연구를 위해 활동사진기 촬영, 작업자 몸에 꼬마전구를 달아 행동 궤적을 찍는 사진 등 독창적인 방법론을 제시했고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랭크는 육군 소령으로 입대합니다. 릴리언은 부상 군인의 재활 연구에 뛰어들죠. 장애인들을 위해 몇몇 장치를 새로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팔만 가지고도 쓸 수 있는 타자기 같은 거죠. 부부는 전쟁 후 상이 군인들의 재활을 돕는 전쟁위험보험법 통과에도 협력했습니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1920년 <장애인을 위한 동작 연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죠. 친구 프레데릭 테일러도 그랬지만, 길브레스 부부는 동작 연구가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여 더 나은 처우를 받게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건 프랭크 자신의 개인적 경험 탓이기도 했죠. 건축 일을 할 때, 프랭크는 자신의 동작 연구 성과를 실제 현장에 적용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프랭크의 저서 <동작 연구>는 벽돌 쌓기나 건축에 관계된 사례가 많습니다. 예컨대 벽돌쌓기의 경우 동작연구를 적용했을 때 사용하는 동작 수는 18개에서 5개로 줄고, 시간당 쌓는 벽돌 수는 175개에서 350개로 크게 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작업 생산량은 두 배가 증가했죠. 한편, 테일러는 작업자의 근로 의욕을 높이기 위해 성과급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올바른 작업 방식으로 생산성을 높이면, 그 혜택이 곧 작업자에게 돌아가도록 설계한 거죠. 또 작업자 개개인의 효율이 증진되면 회사 전체의 수익성도 높아집니다. 결과적으로 노사 모두 윈윈이죠. 정작 노동자들에게는 기계적 수탈과 착취를 위한 이론으로 비판받았지만, 프랭크의 저서에는 작업자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작 연구>의 몇몇 구절을 아래 옮겨 적을까 합니다. 작업자가 맡은 일 이외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전적으로 회사 복지 부서의 담당이다(...) 작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작업자의 개인 생활을 살펴보는 일도 복지 담당 부서의 역할이다. 복지 부서는 작업자가 개인은 물론 속한 집단에서 더욱 가치 있는 경제인이 되도록 지원한다. ...따라서 작업자를 배치할 때는 작업자가 일을 대하는 태도와 성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작업자는 자신의 성향에 적합한 작업에 배치될 때 작업 지시를 더 잘 지키며 더 높은 성과를 낸다. 수습공이 당장 오늘 해야 할 일을 훈련하면 그 훈련은 무조건 실패한다. 수습공은 이론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습에 적응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실습이 없으면 수습공은 실제 작업에서 연습을 하게 되고 결국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 못한다... 미국의 건축 분야에서 수습공이 훈련을 받는 기간은 일반적으로 3년 정도이며 때로는 21세가 될 때까지 훈련을 받기도 한다. 최상의 조명은 작업자가 피로를 해소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줄여준다. 가장 좋은 조명과 가장 나쁜 조명의 설치비용 차이는 눈의 피로를 줄여 휴식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절약되는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많은 생산량을 달성하려면 작업자가 개인 공구를 쓰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작업자에게 개인 공구를 쓰게 하면, 작업자는 공구 구매 비용을 아끼고 도난을 당할 경우 손해를 줄이기 위해 같은 종류의 공구는 한 가지 크기만을 구입한다. 그러나 대부분 작업에서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다양한 크기의 공구를 사용해야만 보다 많은 생산성을 얻을 수 있다. 1910년대 인물의 시각으로 적은 것이기에 오늘날 현실과는 다소 맞지 않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프랭크 길브레스가 얼마나 꼼꼼하게 작업자들을 봐오고 개선책을 나름대로 궁리했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s://ridibooks.com/books/2602000003 프랭크 길브레스의 <동작 연구>. 이 책이 번역 출판되어 있단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미 출간된 지 100년도 넘은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이네요. 릴리언 길브레스 이야기는 이 다음 글에서 적겠습니다.
유관순 열사 고화질 복원 사진
1. 이화학당 보통과 입학 직후 1915~1916년 추정, 13세 2. 이화학당 고등과 졸업사진 1918년 추정, 16세 3. 1920년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18세 (고문으로 인해 얼굴이 부은거 감안하고 봐주세요.) 아래는 연필스케치 버전 유관순 출생: 1902년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유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18세에 순국했습니다. 1. 전세계 17살 소녀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잔다르크와 유관순 열사 뿐임.(3.1운동 당시 만16세 3개월) 2. 이화학당의 동기들과 5인 결사대 조직하여 만세운동하다가 경찰서 끌려간 후 온갖 협박과 고문 당하심. 학교장인 외국인 '프라이'의 간곡한 부탁으로 석방되어 집으로 내려감. 3. 천안으로 내려가서 부모님과 동네 유지 4분이랑 만세운동 계획 4.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하다 현장에서 부모님 두분이 즉사. 5. 유관순 열사는 옆구리에 칼로 찔린채로 머리채를 잡힌채 일본 순사에게 끌려감. 6. 1심에서 일본시민으로 충성하면 석방해주겠다는 재판장에게 의자 집어던져 법정 모독죄 추가. 7. 1심애서 7년형 인도 받음.(33인보다 더 많은 형을 언도받음) 8. 2심에서 3년형으로 감형 9. 상고하지않음 '나라가 없으니 어딜가도 갇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상고하지 않겠다' 10. 악명 높은 서대문 형무서로 이감 11. 칼에 찔렸던 옆구리에서 계속 피고름이 나고 썩어감. 12. 감옥에서도 여전한 항일 정신으로 모진 고문이 계속됨. 13 고문 : 손톱을 다 뺀지로 뺌, 고추가루 탄 물을 코에 붓고, 17살 소녀를 발가벗겨 매달아 때림. 옆구리 칼에 의한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 14. 3.1절 1주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만세운동 주동함 15. 감형 받고 출소 2일전 모진 고문에 방광이 터져 사망. 16. 아무도 시체를 안찾아감. 17.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집안은 풍비박산나서 거두어 갈 사람이 없었음. 주변 지인들도 일제의 협박에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음. 18.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인도함. 19. 출소할거라 믿었던 이화학당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새옷과 머리 핀을 준비했었음. 20. 그러나 죽은지 10여일이 지나 시신으로 돌아옴. 21. 그날 이화학당 교정이 썩은 내로 진동했다고 함.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IpQgS6u6W5A, https://theqoo.net/1336361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