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0she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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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 달탐사를 성공시킨 수학자

컴퓨터 명령어 없던 시절에 전기 신호 0과 1만을 사용해서 자기만의 암호를 창작하고 달착륙 우주선 프로그램을 다 작성함

그녀는 아폴로 11호의 내장 컴퓨터가 실수해서 지구에 못 돌아올 걸 대비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사에서는 "아폴로 11호는 너무 완벽하니 조종사들이 모두 손가락을 다치는 사고만 없으면 될 정도다. 안심해도 된다."라며 그녀의 의견을 무시.

하지만 그녀가 경고한대로 아폴로 11호에 사고가 발생했고, 지구 귀환이 불가능할 뻔 했지만 그녀가 만든 비상 프로그램으로 지구로 돌아오는 길을 찾아 무사귀환에 성공했다.

저 책이 전부 달 착륙 우주선 프로그램. 오류가 단 1개도 나오지 않았고, 혼자서 몇 개월 만에 작성함. 이게 다 남편을 뇌종양으로 잃고 몇 달 되지 않아 해낸 일.
Magaret Hamilton
존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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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세계란
현실판 헤르미온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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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킬방원도 어쩌지 못한 남자
태조 이성계의 차남 '이방과' 우리가 아는 조선 2대 왕인 정종임. 고려 시절에는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종군하며 한명의 장군으로 활약할 정도로 태생부터 무인인데 사극에서는 킬방원 기에 눌려서 아무것도 못한 약한 남자로 표현됨 태종 이방원 자기 아버지도 내쫓고 배다른 형제들도 서슴없이 쳐낸 이방원조차 이방과만큼은 정말 깍듯하게 대했음. 저 깍듯하게 대한게 일방적으로 정종을 형님 대접하고 두려워하고 그런게 아니라 진짜 우애가 깊다는 평가가 자연스러울 정도임. 정몽주를 죽일 때 서로 힘을 합한것도 있고 왕자의 난 때 상황이 매우 심각하게 변하지 않도록 조율해준것도 있다니.. 여튼 왕이 된 이방원이 첩도 들이고 가끔 하고싶은거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하나의 일화가 탄생함. (원경왕후 민씨와 다투고 난 다음) "저 여편네 짜증 못받아주겠다. 차라리 후궁을 들이는게 나을것 같으니까 좀 그럴듯하게 준비해라" "방원아" "?" "부인이 있는 녀석이 왜 또 장가를 들려고 해? 난 사이에 둔 자식 하나 없는데도 소싯적(젊을때) 정 때문에라도 첫 부인이랑 여태까지 함께다. 슬하에 자식도 많이 둔 놈이 네 부인 속상하게 하려고?" "아니 형님;;" 이때 이방원에게 한 이방과의 일갈 탓인지 후궁을 들일때 형식적인 가례조차 올리지 않고 조용히 후궁을 들였다고 함. 비록 이방과는 왕위 시절에 다른 첩을 들여 그 사이서 자식을 많이 보았지만 첫 부인이던 정안왕후 김씨 사이에선 자식을 못 봤음에도 정말 각별한 부부사이였다고. 그정도로 정많은 형님 입장에서 부부싸움 했다고 후궁 들일 생각 꺼내놓는 동생이 철없이 보였던 모양이다. 저런 일갈 들으면 싫은 감정이 들 수 있음에도 그러진 않고 오히려 이방원은 형님을 부러워하고 그랬다는 말이 있다. (상왕 대접을 받으며 정안왕후와 전국 팔도 유람을 다니던 정종) (말년에 현자타임 비슷한게 온 태종) "부럽습니다 형님" "뭐가 부럽다는 거냐?" "맘 편히 놀러다니시는게 참으로 부럽습니다" "그럼 너도 같이 놀면 되잖니" "어 그러네" 세자(이도, 훗날의 세종대왕) 교육도 잘 됐고 왕위 물려줄 각 재다가 고독함이 느껴졌는지 말년의 태종은 상왕이던 정종과 같이 사냥도 다니고 어울려 놀았다니 나이가 들었어도 형제애는 각별했던거 같음. 정종이 말년에 먼저 세상을 뜰 때에는 태종과 세종이 그 옆에 있었다고 하니 조카와의 관계도 나쁘진 않았던듯. 만일 젊을적의 정종이 정치적 야욕을 조금이라도 품었다면 이방원이 왕자의 난 때에 제대로 날뛰지도 못했을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나오는걸 보면 이방원 입장에서 둘째 형님은 정치 욕심도 없으면서 출중한 무인이고 형제애와 가족애가 뛰어나니 싫어할 수 없는 정말 좋은 형이었나 보다. (출처) 어 그러네 ㅋㅋㅋㅋㅋ 둘이 다 늙어서 눈싸움 하고 놀 정도로 우애가 좋았다고... (지가 다 죽여서) 얼마 남지 않은 혈육이라 더 그러지 않았을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지 말자
한 남자가 자전거 바퀴에 공기를 넣으려고 가까운 친구에게 펌프를 빌렸습니다. 그런데 쓰던 도중 펌프가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펌프가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헌 것을 빌려 쓰고 새것을 사주자니 아까웠습니다. ​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망가진 펌프를 친구에게 돌려주었습니다. ​ 그리고는 자신의 실수를 잊으려는 듯 자기 합리화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 ‘펌프가 많이 낡았네? 비싼 물건도 아니고, 내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고장 날 펌프였을 거야. 그러니 난 아무 잘못도 없는 거야.’ ​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그는 결국 친구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 새 펌프를 사서 친구에게 갔습니다. ​ “내가 펌프를 사용하다가 그만 망가뜨렸네. 연장 다루는 법이 많이 서툴렀나 봐. 그래서 새 펌프를 사 왔네.” ​ 친구는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펌프를 사 온 친구에게 큰 우정을 베풀었습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 욕심을 부려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조금만 더 크게 가져보세요. 작은 일에 오히려 큰마음으로 대처한다면,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 ​ # 오늘의 명언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욕심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열린다. – 에피쿠로스 –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 ​ #소탐대실#이지적사고#자기중심#인생#삶#명언#영감을주는이야기#교훈#따뜻한하루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 조선시대 궁궐 모습.jpg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의 조선시대 궁궐 모습이 담긴 미공개 유리건판(유리에 감광유제(感光乳劑)를 칠한 사진용 감광판) 사진들이 처음으로 선보인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1927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건춘문 동쪽으로 이건되기 전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식민지시대 유리건판 사진으로 이를 확대하면 '光化門'이란 현액 글씨가 뚜렷하다. 나아가 그 전면 월대를 포함한 광화문 전경이 비교적 잘 드러난다. 열린 우협문 안으로 보이는 흰색 가건물 지붕 일부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건물로 추정된다. 이로써 보건대 조선총독부 청사 착공 직후에 촬영했다고 판단된다. 조선총독부서 찍은 경복궁 근정전 주변 사진. 전각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원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1867년 조대비(趙大妃)를 위해 지은 경복궁 자경전. 이곳은 이후 두 차례 화재를 만났다가 1888년(고종 15) 재건됐다. 꽃담으로 유명한 이곳 서측 담장에는 꽃 문양이 베풀어져 있다. 문양은 꽃 아홉 개와 문자 아홉 개가 서로 짝을 이루고, 나머지 한 개는 꽃과 나비 등을 조합한 것이다. 현재의 자경전 꽃담에는 아홉 개가 아닌 여덟 개 꽃 문양이 남아 있다. 윗쪽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식민지시대 유리건판 사진이며 아래쪽은 그 현재 모습. 경복궁 자경전 꽃문양 앙부일구는 조선 1434년(세종 16)에 장영실이 만든 해시계로 창덕궁 소장품으로 현재 여주영릉전시관과 창덕궁에 전시 중이다. 현재 이 앙부일구는 다리를 포함한 몸체가 받침돌 위에 노출돼 있으나 (오른쪽) 일제강점기 때 유리건판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는 받침돌에 몸체가 감입돼 앉힌 모습이다. 나아가 대석 옆쪽으로 빗물이 빠져나오게 하는 구멍이 뚫려 있음이 확인된다.(왼쪽과 가운데) 앙부일구 원래 모습을 고증할 수 있는 사진이다. 창덕궁 원래 위치 보루각에 있을 당시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이들 유리건판 사진에서 자격루는 청동으로 만든 파수호 하나, 수수호 둘, 그리고 수수통 둘만 남아 있으며 부표는 없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수수통 양 옆에는 측우기와 석조대와 위치한다. 자동 시보장치 물시계인 자격루는 현존품은 1536년(중종 31)에 제작품으로 현재 덕수궁에 옮겨져 있다. 조선국왕 용상 뒤에 설치한 그림병풍인 일월오봉병으로 식민지시대 유리건판에 촬영된 경복궁 근정전(윗쪽)과 덕수궁 중화전(가운데) 작품. 이에는 한결같이 해와 달 부분에 금속판이 붙어 있으나 현재의 일월오봉병(아래쪽)에는 이 금속판이 없다. 1935년 경복궁 건청궁 터에 조선총독부종합박물관을 짓기 위한 지진제를 지내고 있다. 일본 신도(神道) 방식으로 식장이 차려지고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이 절하고 있다. 건청궁은 명성황후 민비가 시해당한 현장으로 총독부가 이를 모두 철거하고 종합박물관을 지으려고 했다가 전시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총독부미술관을 짓는 데 그쳤다. 1929년 지금의 경복궁 건춘문 일대로 옮긴 광화문 문루에서 본 경복궁 동쪽 궁성과 건춘문, 동십자각 일대 전경. 왼편에 중학천이 흐르고 그 동편에는 민가들이 밀집해 있다. 1929년 박람회로 궁성이 파괴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붕괴사고 현장. 궁장 대부분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지만 그 바로 옆은 무너져 있다. 이 붕괴사고는 1926년 4월27일 오전 10시에 일어났으며 그 원인은 영추문 바로 옆을 종점으로 해서 운행된 전차의 진동 때문이라고 매일신문 4월29일자 기사에서 확인된다. 동경에 거주하던 이왕세자와 그 왕비 등 일행이 1922년 일시 귀국했을 때 희정당에 도착하는 장면. 자동차에서 내리는 여인은 이왕세자비 이방자 여사 1922년에 고국을 방문한 이왕세자 일행이 동경으로 돌아가기 전 어느 날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첫줄 왼쪽부터 정무총감 부인, 사이토 총독 부인, 의친왕비, 이방자 여사, 순정효황후, 순종, 이왕세자, 의친왕, 사이토 총독, 정무총감 등의 순서다. 1922년 이왕세자 내외의 창덕궁 체류 중 후원 나들이를 촬영한 장면으로 보인다. 건물은 영화당이며, 맨 앞부터 뒤로 순정효황후, 이왕세자, 이방자, 덕혜옹주 등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 창덕궁 인정전 앞 마당의 박석을 없애고 화초를 심고있다. 조선의 문무고관들이 왕에게 하례하던 상장적인 공간을 일제가 훼손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02년의 경복궁 경복궁은 그 창건 초기부터 조선조 멸망까지 (1394~1910년) 조선의 정궁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 불운의 궁이었으며, 조선조 500년동안에 사람이 산 기간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긴 세월 동안 폐허로 방치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운명을 타고난 비운의 궁이다. 경복궁은 1592년 부터 1868년 까지 276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폐궁이었다. 또한 순종을 심심하지 않게 위로한다는 구실로 1908년 일본은 창경궁에 동물을 끌어들여 동물원을 만들어서 조선의 오대왕궁중에 하나인 창경궁을 하루아침에 동물원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출처 그대로 남았다면 얼마나 더 멋졌을까요.. 사진으로 보니 위용이 더 실감나네요
애벌레가 자살행위를 하는 이유는?
역사를 되돌아 보면 인간과 자원과 자연은 공존할 방법이 있음 헝가리의 고대 건초 목초지는 아직 전통 방식 그대로 유지되는 풍요로운 서식지임 덕분에 나비들이 아주 많음 그중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생활환을 가진 나비가 있는데... 부전나비 암컷들이 가서 알을 낳는 식물이 하나 있는데 그건 프네우모난테용담이라는 식물 알에서는 애벌레가 부화하고 풀 위에 있기 때문에 땅의 포식자로부터 안전함 하지만 애벌레는 자살행위로 보이는 행동을 할 때도 있음 명주실을 타고 땅으로 내려가 위험 속으로 진입함 애벌레에겐 개미에게 저항할 수단이 없어 그대로 붙잡힘 하지만 애벌레는 이걸 노린것이였음 애벌레는 개미유충과 비슷한 향을 만들어내는데 그래서 개미는 애벌레를 자신의 둥지로 데려감 그렇게 애벌레는 개미의 육아실에 보관됨 그리곤 흰색 개미유충들 사이에서 개미 유충의 흉내를 내기 시작함 그러면 개미들은 에벌레에게 먹이를 먹임 왜냐? 개미들이 자신들의 새끼인 줄 아니까!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님 애벌레들은 이제 여왕 개미와 비슷한 소리를 냄 결국 개미들은 애벌레를 지극정성으로 모심 와~ 똑똑한건지 약은건지 호구 개미들... 먹이가 떨어져가면 개미 유충이 아니라 애벌레들을 우선 챙겨 먹일정도... 엄청난 먹이를 섭취한 덕에 애벌레는 거대해짐 그렇게 애벌레는 땅 속에서 꿀같은 2년을 보냄 그리고 마침내 개미들의 사육도 끝이 남 누구를 위한 육아였던 것인가?... 애벌레가 고치로 변했음 몇 주가 지나고 부전나비가 나옴 이제 나비는 지난 23개월동안 살았던 개미굴에서 나옴 막 부화한 나비는 개미굴에서 나와 식물줄기를 오름 날개가 펼쳐지고 준비가 끝나면 짝을 찾아 날아감 이렇게 복잡한 생에 덕에 노동은 절약될지 모르지만 위험함 만약 개미나 용담에 무슨일이 생기면 이 나비들 역시 멸종하니까!
아편전쟁 때 영국이 10🐦끼가 아닌 이유
아편전쟁은 단순히 돈 문제이자 아편 판매 찬반으로 의회 표결까지 갔던게 아님 아편전쟁 개전파의 의견 : 영국인들이 불법으로 감금 당하고 거주지가 포위 당하고 적하물을 약탈 후 폐기당했다. 청나라에 대한 응징이 필요하다! 아편전쟁 반대파의 의견 : 청나라가 그러한 태도로 나선 것은 우리가 청나라의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으로 개념차게 대립한 것 같아보임 근데 실제로는 혐성국의 혐성력 250% 발휘한 표결임. 사탄이 부랄을 탁 치고 기립박수를 할 항목이 개전파의 주장이다. 영국의 대외 규정 = 현지에서는 현지 법을 따른다, 치외법권은 적용하지 않는다. 청나라의 아편 법안 = 아편 매매는 금지하고 밀수 또한 금지한다. 적발될 경우 자산 몰수 및 사형이며 영국 상인들은 이를 인정하는 서약서를 썼다. 임칙서의 대처법 = 공문을 미리 보내고 영국 마약상들이 자기들 거주지에 아편을 숨겨 밀매하려 하자 포위하여 단속하고 최종적으로 아편 1400톤을 압수함. 임칙서의 결론 = 법도 그러하고 이들이 서약서도 썼으니 모조리 죽여도 되지만 사람 목숨은 소중하니 아편 1상자 당 차 5근으로 최소한의 보상을 해준다. 영국인 감금건 = 술에 꼴은 영국 해병이 사람을 죽여서 영국의 법을 적용하려 했으나 영국 해군에서 무시. 그 대응을 내놓을 때 까지 마카오를 봉쇄함 즉 현지 법을 따라야 하는 영국 상인들이 아편 밀매시 사형이라는 서약서까지 썼는데 현지 법을 쌩까고 아편을 밀매하다 감금 당하고 적하물 압수 당한 것을 불법 감금이라 포장하고 더군다나 현지 법을 적용하면 무조건 사형이지만 약간의 보상 받고 목숨을 건진 것을 약탈이라 포장하고 자신들의 법으로도 현지 법으로도 사형인 살인을 저질러놓고 항의로 마카오를 포위하고 인도주의적으로 숨통 틔워둔걸 감금이라 포장하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게 자신들의 탓인데도 아무튼 청나라 잘못이야! 하는 태도로 의회 표결까지 실시한거지 그냥 아편판매 vs 아편판매금지 같은 사소한 문제가 아님 이건 그냥 찬성 찍은놈이 혐성으로 가득한 혐성국 자체를 표현하는거임 기본적인 자신들의 대외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뒤엎고 타국의 법률을 개무시하는 내로남불 그 자체지 그냥 씹새끼가 아니라 그레이트 씹새끼거든 (출처) 이래서 그레이트 브리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