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d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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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경제 상황

경제학에는 '노동소득 분배율' 이라는 개념이 있다

노동소득분배율이란

한 나라의 국민총생산에서 근로자들이 받는 급여의 비중을 지칭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일 수록 산업구조가 고도화 되어 있어서 인건비가 높기에

노동소득 분배율이 높은 경향이 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노동소득분배율이 약 70% 정도이며

서유럽의 일부 복지국가들은 노동소득분배율이 75% 수준까지 올라간다
일본 역시 G7에서 미국 다음으로 경제규모가 크고 빈부격차가 적은 국가이니만큼

노동소득분배율이 70% 정도이다
한국은 아직 미국이나 일본, 서유럽 선진국들에 비해

아직 1인당 국민소득이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이기 때문에

노동소득분배율이 아직 65% 수준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을 뛰어넘을 것이다' 라고 자축하는

대만의 노동소득분배율은 얼마나 될까?

미국이나 일본 급인 70% 수준일까?

아니면 한국과 비슷한 65% 수준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정말 참담하게 낮다
대만의 노동소득분배율은 고작 41% 수준이다

대만에서 100원을 벌어들이면 대만인들 주머니에는 고작 41원이 들어간다는 소리다


이게 어느 정도 수치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베트남이나 필리핀 같은 동남아 국가들의 노동소득분배율이 39.5%다

그러니까 대만이랑 노동소득분배율이 1.5% 밖에 차이 안 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대만 경제가 얼마나 기형적인지 짐작할 수 있을리라 믿는다

실제로 대만 경제는 가마우지 경제의 전형적 사례다


대만 최대의 기업 TSMC의 경우 외국인 지분율은 77%에 달한다


TSMC가 아무리 실적을 올리고 주가가 올라봐야

대만인들에게 떨어지는 배당금은 고작 23% 수준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대만이가 필사적으로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해봐야

사냥감 대부분은 주인이 차지하고 대만은 개평 밖에 줏어가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대만 대기업 월급이 한국 편돌이보다 못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만인들은 대만뽕에 가득차서 오늘도 몸을 혹사해 가며 일을 하지만

그 과실은 결코 대만인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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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입신고날 근저당 건 집주인..'이 특약' 한 줄이면 안 당한다
(+ 전세금 돌려줄 테니 전입신고 말소? …“그건 집주인 사정”) 회사원 A씨(29)는 지난해 말 서울 관악구의 한 신축 빌라에 전세보증금 2억3000만원을 주고 입주하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잔금을 치르고 입주한 뒤인 지난 2월, 은행에서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다. 빌라가 경매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집을 소유한 임대사업자 대표가 회사를 부도처리를 하고 잠적한 것이다. A씨가 뒤늦게 빌라의 등기를 떼보니 전세계약을 맺은 당일에 임대인이 은행에서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같은 건물의 또 다른 빌라의 매매가격을 알아보니 전세금과 큰 차이가 없는 2억5000만원 선이었다. 이른바 ‘깡통 전세’였다. 문제는 A씨가 입주 다음 날에 동사무소에 들러 전입신고를 하고 확정일자를 받았다는 점이다. 공인중개사는 “확정일자가 늦어 우선변제권과 대항력이 뒷순위로 밀린 탓에 전세금을 모두 돌려받기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A씨는 “그동안 모아놨던 돈을 모두 전세금에 쏟아부었는데, 전 재산을 날리게 될 것 같아서 두렵다”고 토로했다. A씨처럼 ‘깡통 전세’에 입주한 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등 각종 전세 사기 피해자가 늘어나고 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전세반환보증 사고는 총 2799건으로, 사고 총액은 5790억원에 달했다. 1년 전보다 391건이 늘었고, 피해 금액도 1108억원이 증가했다. (중략) ━ 전입신고는 다음날부터 효력…특약 적극 활용해야 부동산의 근저당권이 전입신고와 같은 날에 진행되면 대항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대항력은 집의 주인이 바뀌더라도 계약 기간까지 살 수 있고 보증금을 모두 돌려받을 권리다. 임차인의 대항력은 주택을 점유하고 동사무소에 전입 신고한 다음 날부터 생긴다.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빌리는 근저당권설정등기는 등기신청일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문제는 임대인이 전세계약을 맺은 당일에 해당 매물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뒤 돈을 갚지 못해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임차인이 전세금을 모두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 전입신고와 근저당권 설정을 같은 날에 했더라도, 근저당권이 전입신고에 따른 대항력보다 선순위인 만큼 경매 등으로 회수한 돈을 대출 기관이 먼저 가져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피하려면 전세계약서의 특약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계약서의 특약에 ‘전입신고의 효력이 발생하는 계약일 다음 날까지 계약 당시 상태로 유지한다’는  특약사항을 기재하면 이러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특약을 포함한 계약서를 작성한 뒤 동사무소에서 확정일자를 받고, 해당 주택에 거주자가 없으면 잔금을 치르기 전 미리 전입신고를 해 우선변제권(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갈 경우 우선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권리)을 빠르게 확보하고 대항력이 생기도록 해야 한다. ━ 전세금 돌려줄 테니 전입신고 말소? …“그건 집주인 사정” 임대인이 전세금 반환을 위한 대출을 받아야 한다며 세입자에게 전입신고 말소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임대인이 “주택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아 전세금을 돌려주려는데 은행 측에서 세입자가 없어야 한다고 요구한다”며 전입신고 말소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세금을 돌려받기 전에 전입신고를 말소하는 것은 위험한 만큼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전입신고를 말소한 뒤 임대인의 채무 관계로 인해 부동산이 경매에 넘어갈 경우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의 순위가 낮아져 전세금을 돌려받기 어려워질 수 있다. 법무법인 법도의 엄정숙 변호사는 “전세금을 돌려줄 수 없어서 은행 대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온전히 집주인의 사정”이라며 “집주인이 대출을 못 받아서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하면 전세금반환소송 제기해 돌려받을 수 있고, 승소하면 소송 비용까지 임대인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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