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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군의 검, 환도

환도는 조선시대의 군의 칼이다.

환도에 대한 기록은 1277년 고려에 몽골사신이 와서

이장무와 함께 환도를 만들기 시작한것이 최초이며

고려후기에 들어온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세종실록 - 우리나라 말로 환도라 한다. 검은 칠을 하고, 장식은 황동을 사용하고, 술은 홍도수아로써 드리우고, 띠는 가죽을 사용한다.>




*환도와 일본도의 구분법
일본도
환도


구분법은 여러 방법이 있는데 젤 쉬운게 그냥 장식을 보면된다
(칼날단면. 즉, 육각도,배형도,편삼각도 등으로 구분하는건 복잡 함)

환도는 칼 양끝에 '금속장식'과 '칼집에 띠돈'이 달려있고, '자루에 술'이 달려있다.

띠돈에 군복용 허리띠를 걸어 패용(착용)하는 방식이다.

일부 환도 칼집에는 칼을 뽑을수 없게 락킹 버튼이 있는 경우도 있다




*환도 패용법
환도는 칼자루가 뒤로 가도록 패용했다

그 이유는

1. 말 탔을 때 걸리적 거리지 않음

2. 활 쏠 때도 걸리적 거리지 않음

때문이였다


넷플릭스 킹덤을 보면 칼자루가 앞으로 오도록 패용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지만

활을 쏠때 줄을 당기는데, 이때 칼자루에 걸려서 매우 매우 불편 하게 된다
그래서 활과 같이 무장 할때는 칼자루가 뒤로 가도록 패용 하는게 정석이다
근데 이렇게 칼자루가 뒤로가면 칼은 어떻게 뽑음? 하겠지만...
아주 쉽고 편하게 잘 뽑 힌다





*환도의 특징

조선 초기의 환도는 길이가 짧아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가 짧았고 이는 단점이였다.

물론 초기 환도에도 장점은 있다

좌우로 스텝을 밟으면서 후려치거나, 빠르게 이동해서 베는 식으로 기동력을 살리는 전법에 편리했다.

방패를 들고 자신을 보호하면서 상대를 찌르는 검술에도 유리했지만,

기록을 보면 조선초기의 환도는 일본도의 위력을 이길 수 없었다고 나온다


초기 환도는 질량에 비해서 구조적인 안정성은 높지만, 한손으로 휘두르는 속력에만 의존해야 하므로 살상력이 부족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격만으로도 충분히 살상력이 나오는 일본도에게 버티지 못 했었다
(당시 일본군은 검을 들고 크게 도약하며 창까지 상대 했었다고 한다)

결국 임진왜란을 겪으며 일본도를 상대 하기 위해 환도의 길이가 길어지게되고

임진왜란 이후엔, 몸을 위아래로 크게 회전하면서 체중을 실어 베는 일본의 검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질량이나 내구도 같은 검의 스펙 같은게 중요한게 아니라, 검을 다루고 가르치는 검술 체계가 있느냐가 제일 중요했다


<선조실록 1594년 7월>

이번에 귀순한 왜인(항왜) 중에는 검을 잘 쓰는 자도 있고 창을 잘 쓰는 자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검술이 전해 오지 않았는데, 근일에 약간 전습하니 이는 만세에 유익한 일이다.


<선조실록 1594년 12월 27일>

비망기로 일렀다. "우리 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별도로 한 장수를 뽑고 아이들 약간 명을 선택하여 한 대열을 만들어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되 주야로 권장하여 그 묘법을 완전히 터득한다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훈련 도감에 이르라."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7월 27일>

훈련대장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 어디에도 있지만 왜의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나라 홀로 전하고 익히는 자가 없어 신의 마음이 항상 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중략)신의 아랫사람 중에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을 보내 검을 배우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보내라" 하였다.




*환도는 원래 보조무기

국궁, 승자총통, 천자총통 같은 무기와 집단 전술을 애용했던 조선에서 짧은 환도는 보조무기였다.

애당초 조선의 주력은 갑사 부대 즉, 기마궁술이였다. (여진족,왜구 잘 조지던 정예병력이였는데, 신립이 탄금대에서 다 날려먹음)

때문에 조선에서 검을 이용한 전술은 빠르게 쇠퇴했고, 검을 제작하는 기술은 휴대하기에 편한 칼을 만드는데 집중되었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환도는 일본도랑 크기가 비슷하더라도 약간 더 가벼웠다.

질량을 낮추었으므로 타격력이 조금 약해졌지만, 다양한 무기들을 함께 패용하거나, 기동성이 높은 전술을 쓰기에도 유리했다.

활을 주무기로 한 우리나라의 병법에 맞춰 변화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근접전도 활로 할 정도였고, 임란 당시에도 궁술의 달인들이 많았었다.




*임진왜란 이전 무과 시험에 검술과목 자체가 없었다.

다만, 군영에서 검술을 딱히 중요하게 안가르쳐서 공식적인 검술이 없던것이지

기록을 보면 소수의 민간에서 전승되어 몇몇 선비나 장군들이 칼로 전공 세우거나 검술 익혔단 기록들이 있긴있다

전쟁 터져서 수도까지 털리고 하니 당시 정보력 수준으로는 검술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애들 찾기가 아주 어려웠다고 한다

근데 이건 세조가 조선군의 인사 고과를 철저히 궁사 위주로 재편시켜 창,검술의 전승이 거의 끊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괜히 임란때 고생한게 아니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조선의 검술

무예도보통지는 임진왜란 발발 200년 이후 1790년(정조 14년)에 편찬된 조선 시대 군용 무술 교본이다.

여기에 5개의 검술이 실려있는데 임란 이후 일본의 검술과 중국 남부의 검술을 받아들여, 

우리나라의 무기,편제,상황에 맞게 상당부분 재구성 및 재편된 것들이다.

참고로 동시대 기준 수준이 매우 높은 검술 체계들로, 숙련된 검사들이 육성되기 시작했다 (김체건,김광택,백동수 등)

간혹 일본거랑 중국거 수입해와서 한국거 아니다라고 박박거리는 무식한 인간들이 있는데,

무예도보통지에는 우리나라만의 오리지널리티 있는것들이 포함되어있고, 어차피 무술뿐만 아니라 모든 기술은 교류를 통해 만들어진다.

일본의 가라데는 중국 남파 권법에서 유래해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에 전해졌다. 즉, 자기들만의 무술로 승화시킨것이다.

현재 가라데를 중국무술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드라마의 폐해

한국 사극에서는 100편 중 90편 이상이 카타나(일본도)를 써서 논란이 많았다.

이후 추노, 뿌리깊은 나무, 해를 품은 달, 킹덤 등등..

무기 고증에 어느 정도 신경을 쓴 작품이 나오며 고증된 형태의 환도를 볼 수 있는 비율이 높아지게 되었다





*현대에 남아 있는 환도

칼 양끝의 '금속장식'과 '칼집의 띠돈'이 환도임을 나타내고 있다
(독일박물관 소장 녹칠어피 운검)

조선은 군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칼들을 환도라고 불렀는데.

환도 종류로는 대표적으로 일반군용, 운검, 별운검, 어도 등이 있고

환도 외에는 사인검, 칠성검, 예검 등이 있었다.

(독일 라이프치히 박물관 소장) 
(고려대박물관 소장)

운검

조선의 대표적인 환도 양식으로 후기까지 많이 유지했다.

운검은 왕의 호위무사들을 칭하고

이들이 패용하는 환도 명칭도 운검이라고 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별운검

나라의 큰 행사 때 왕의 양옆에서 별운검을 들고 호위하는 임시관직이다.

종2품(중장급) 이상 믿을만한 사람 2명을 선발한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어도(임금의 환도)

대모갑, 옥, 금, 은을 사용해 제작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네덜란드 소장 운검)
(독일 라이프치히 소장 환도)

칼집에 십장생문을 새겨 넣었고 칼날에는 광사두우 光射斗牛

'칼의 빛이 북두칠성과 견우성을 쏘아 우주의 이치에 맞닿는다'가 새겨져 있다

(독일 라이프치히 박물관 소장 환도)

(러시아 박물관 소장 환도)

코끼리 상아로 칼집을 만들고 조각을 넣음
금, 은 등을 사용해 제작

임진왜란 이후 일본도식 손잡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칼집에 옻칠을 하고 위에 금분을 뿌려 마무리하는 일본 전통공예 양식(마키에 양식)을 사용

전어도

태조 이성계의 칼


전어도는 경복궁의 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인 칼로

임금의 어도라고 전해지는 검이다.

야사로는 이성계의 칼로 전해지는데

고궁박물관엔 같은 칼이 1점이 더 있다.





p.s

독일에 환도가 많이 남아 있는 이유가 고종이 선물로 준것들도 많고, 수집가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종격투기카페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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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에서 가장 스펙타클한 실화
보통 무협영화의 최후의 걸작 중 하나로 불리는 장예모 감독의 영웅 내용은 대충 진나라의 왕 영정, 훗날 진시황이 되는 인물을 암살하기 위한 자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장예모 감독 특유의 화면빨과, 이연걸, 견자단의 합 간지 그자체인 양조위까지, 영웅은 미국에서조차 흥행한 걸작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영웅은 사실 자객열전에 기록된 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대충 중국이 참 보기 좋았던 시대인 전국시대 진나라는 소양왕의 치세를 걸쳐 사실상 통일 수순을 밟게 되었고 진나라 왕 영정 때에 이르면, 위 짤에 보이는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가 멸망당한다 영정은 이제 칼 끝을 남방의 패자인 초나라에게 겨누는데 문제는 북방의 연나라였고, 영정은 동쪽의 제나라와 불가침 조약을 맺고 후방인 연나라를 먼저 정리하고자 했다. 이런 격동의 시대에 연나라 사람 형가가 있었다. 형가는 검술을 좋아했지만,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고 장기를 두다가 게임 좆같이 하자, 상대의 위협에 도망가기도 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시장에서 개백정인 아무개(이름이 전해지지 않음)과 악공 고점리와 띵가띵가하면서 놀기만 했다. 이 사람의 일화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방약무인이다 그러나 연나라의 대신 중 하나인 전광은 형가를 보고 비루하게 행동하지만 마음은 고결하고, 뜻을 가진 사람임을 꿰뚫어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나라는 초나라를 치기 위해 후방을 정리하고자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진나라의 위협이 목전에 오자, 연나라의 태자 단은 전광을 찾아온다. 그는 국가의 멸망을 막기 위해 자객을 파견해 영정을 죽여 판도를 뒤집으려 했다. 이에 전광은 형가를 추천하고, 국가의 기밀을 지키고자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한다. 단을 만난 형가는, 태자에게 암살에 성공하려면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한다. 서리마저 벤다는 명검에 독을 발라 스치기만 해도 죽는 상절 연나라의 곡창지대의 지도인 독항 지방의 지도 명장이지만 영정에게 미움을 받아 연나라로 투항한 번오기 장군의 목 즉 독항 지방의 지도는 그 땅을 진나라에 넘기겠다는 것이었고 번오기 장군의 목은 영정의 방심을 상절은 그의 목숨을 빼았는 도구였다. 지도와 상절이 준비되자, 형가는 번오기 장군의 집으로 가 그에게 대의를 위해 당신의 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번오기는 "놈을 죽이는데 필요하다면 가져가십시오" 하며 스스로 목을 베었다 그 뒤에 형가는 자신과 보조를 맞출 대담한 투사를 구했는데 13살에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진무양이라는 장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형가는 영정을 죽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역수라는 강을 건넌다. 그리고 이 때 그가 부른 노래는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風蕭蕭兮易水寒 바람 쓸쓸하고 역수 강물은 차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연나라의 태자와 신하들은 모두 흰색 의관을 입고, 그를 송별했다. 형가의 친구 고점리가 연주하는 노래에 맞춰 모두 울면서 노래를 불렀고 형가는 수레에 올라타고 진의 수도 함양을 향해 뒤돌라보지 않고 달린다 진의 수도 함양에 도착한 형가와 진무양은 연나라의 항복사절이라고 말했고, 진왕은 형가 일행의 알현을 허락한다. 형가는 이전의 비루한 행적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당당하게 진왕 앞에 섰고 아무 의심도 받지 않을 정도로 초연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이 온 진 무양이었는데,  진무양은 거사가 코앞이어서 그랬는지, 낮이 새파래지며 바들바들 떨었고 의심을 받게된다. 그러나 형가는 태연히 웃으면서 말했다. 北蕃蠻夷之鄙人,未嘗見天子,故振慴。願大王少假借之,使得畢使於前。 북번 오랑캐 시골뜨기가, 일찍이 천자를 뵈온 적 없으니, 떨며 두려워합니다.  대왕께서는 작은 잘못을 용서하시어, 어전에서 사자의 임무를 마치게 하소서. 그러나 영정은 역시 천하의 영웅 다웠다. 뭔가 이상하게 여긴 진왕 영정은 부사는 놔두고 형가에게 혼자 올라와서 진상물을 보이라고 했다. 형가는 가져온 독항의 지도를 펼친다. 그리고 그 지도 안에는 숨겨둔 비수 상절이 있었다. 형가는 일거에 그 검을 잡고 영정에게 휘둘렀는데 진왕이 재빠르게 일어나는 바람에 진왕의 옷소매만을 스쳤다. 이에 형가는 옷소매를 잡고 찌르기 위해 영정의 옷소매를 잡았지만 추운 기후의 연나라가 두꺼운 의복을 입는 것과 달리 진나라는 얇은 의복을 입었고, 이에 영정의 소매가 찣어지게 된다. 아마 형가는 이 이상 부터는 계산하지 못한 것 같다. 무협영화였으면 둘이 화려하게 싸웠겠지만, 이건 역사다 영정은 기둥 사이로 도망갔지만, 형가 역시 칼을 들고 영정을 쫓았다. 그야말로 기둥 사이에서 술래잡기가 펼쳐진것이다. 문제는 당시 진나라 국법에 따르면 대전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이는 국왕 뿐이었다. 근데 너무 상황이 급박해서 진왕 영정은 군사를 부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진왕이 가졌던 장검은 길이가 길었고, 또 영정이 마음이 급해서 자루에서 빠지질 않았다. 근데 사실은 장검은 안전상의 이유로 잘 빠지지 않게 만들었고 이런 기본 상식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의 충신들은 맨몸으로 형가에게 달려들었고 어의인 하무저는 약가방을 던져 형가를 방해한다. 그래도 형가가 진왕을 추격하자, 신하들은 외쳤다. 左右乃曰:「王負劍!」  좌우에서 외쳤다, 대왕께서는 칼을 등에 지고 뽑으십시오! 신하의 말을 듣고 영정은 칼을 뽑을 수 있었다. 영정은 그 칼로 형가를 내려쳐 치명상을 입힌다. 그러나 형가는 쓰러진채로 남은 힘을 쥐어짜 비수를 던진다. 그러나 영정은 이를 피했고, 비수는 기둥에 꽂힌다. 영정은 형가를 여덟번 내리쳤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형가는 죽어가면서 영정에게 말한다. 事所以不成者,以欲生劫之,必得約契以報太子也。 일이 실패한 것은 너(진왕)를 사로잡아 약속을 받아내어 태자에게 보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는 진왕 영정을 붙잡아 협박해서 연나라와의 불가침 조약이나 빼앗긴 땅을 돌려받으려 한 것일 수도 있다. 영정은 이 말을 듣고 칼을 내리치는 것을 멈춘다. 그 순간 근위병들이 달려왔고, 형가는 그렇게 죽었다. 영정은 의기로운 형가는 높게 샀지만, 자신을 죽이려 한 연나라에 분노했다. 그는 왕전, 왕분, 이신에게 연나라 침공을 명했고 연나라의 왕 연희는 수도 계성이 함락당하자 영정 암살을 주도한 아들이자 태자인 단의 목을 잘라 보냈지만 진나라 군은 계속 공격했고, 연왕은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수천기의 기마대를 이끌고 추격해 온 이신에게 잡혀 포로가 된다. 참고로 이 때 압록강 서쪽의 고조선이 진나라에게 칭신한다. 연나라가 멸망당한 뒤, 형가의 친구이자 악공인 고점리는, 잠적했지만 뛰어난 연주솜씨 때문에 발각되었고 연주 소리를 들은 영정은 그의 눈을 멀게하고 곁에서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러나 고점리는 영정과 가까워지자 축에 납을 넣어 연주하는 도중에 영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축을 날리나, 어깨죽지를 스쳤을 뿐이었다. 형가와 고점리에게 연달아 죽을 뻔 한 영정은 다시는 멸망당한 6국 사람들을 자신에게 들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듯, 영정은 전국을 통일하고 진시황이 된다. 그러나 진시황의 치세 동안 이정도로 그의 목숨을 위협했던 것은 형가와 고점리 밖에 없었다. 몇 십년 후 이 사건을 들은 한나라 출신 사람인 장량과 창해는 영정, 즉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한 계략을 세운다. 진시황이 탄 수레를 창해가 거대한 추를 던져 박살내버린다는 것이었는데 결국 이는 실패한다. 그러나 이런 일화가 전해지듯, 형가의 암살시도는 곧 멸망 당한 6국 백성들의 진의 타도로 이어졌고 결국 암살을 시도한 장량은 유방과 손을 잡고 진나라를 멸망 시켜 버린다. 막 살던 망국 직전의 협객이 중국을 통일하는 진시황의 목숨을 가장 아슬아슬하게 노렸다는 이 실화는 중국 역사 대대로 칭송되었고, 일명 협객으로 불리게 되며 많은 호걸들이 그의 모습을 따라하고자 하였다. 또한 나라가 어려울 때 마다 형가의 일화를 내세우며 많은 민초들이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기도 했다. -끝- 에프엠코리아 태양@만세님 펌
북한이 지금처럼 강성 독재체제가 된 결정적인 이유
바로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문 본래 6.25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지금처럼 김씨부자를 지도자로 하는 조선로동당의 일당제이긴 했지만 실제로 당시 북한은 정치파벌이 여러개인 연립정부에 가까웠음 김씨부자들의 권력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다는 말 당시 북한의 대표적인 당들은 만주파 당시 표면적으로는 북한을 지배하고 있던 만주파 여기 소속이 지금 북한에서 구국의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김일성, 김책, 강건, 최용건 등이였음 김광협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1970년에 김일성에 반대 깃발들고 숙청당함 갑산파 박금철, 리효순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얘네는 거의 만주파의 일부와 같았음 연안파 김두붕, 허정숙, 김무정, 박일우, 방호산 등 항일 전쟁과 국공내전을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인 계파 1930년대부터 조선의용군 등으로 활동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었었던 파였음 6.25 전쟁과 8월 종파사건을 통해 주요 인물들이 대거 숙청당함 소련파 박창옥, 허가이, 남일 등으로 구성되었던 소련 출신 파 1956년 2월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한 소련 공산당 제 20차 대회를 계기로 연안파랑 함께 김일성을 비판하며 김일성과 싸웠으나 패배하며 전원 숙청당함 남로당파 그 유명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파 박헌영, 김상룡, 리강국, 리승엽, 허헌 등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였던 파 1949년 조선로동당으로 신설 합병됨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숙청되기 시작함 박헌영은 1956년or1957년 사형당함 이렇게 많은 정치 계파들이 있었음 그래서인지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김일성의 권력은 1960년대 이후만큼 강하지 않았음 그러던 1956년 당시 소련의 권력자였던 흐루쇼프가 소련내에 있던 스탈린 신격화를 비판하는 일이 발생함 이를 계기로 북한내에서는 1956년 4월에 예정되어 있었던 조선로동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이 개인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라는 여론이 많았다고 함 그런데 엉뚱하게도 3차 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개인숭배에 대한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 씌우게 됨 결국 이를 계기로 김일성 반대파들이 반김일성 운동을 시작했고 김일성이 소련, 동유럽 순방을 위해 북한을 잠시 떠나자 소련파와 연안파가 김일성 내각의 실각을 위해 손을 잡음 그렇게 북한 내에서 반김일성 세력이 활기치기 시작할 무렵 바로 최용건이라는 사람이 이 모든걸 보고 들은 후 김일성에게 보고함 이를 듣고 계획을 세운 김일성은 이후 열린 8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참석했고 오히려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역공을 펼치며 반김일성파들을 꺽어버리게 됨 여기서 반김일성 파들은 여론을 자신들 쪽으로 완전히 가지고 오지 못하게 되었고, 윤공흠 같은 사람들은 김일성 찬양파들에 의해 단상에서 끌려 내려오게 됨 윤공흠, 서휘 등 연안파 인사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신의주로 향함 결국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되었고, 김일성은 이후 자신에게 반기를 든, 반기를 들 것 같은 모든 사람들을 숙청시켜버림 김일성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최용건은 명목상 북한 2인자인 부주석까지 오르게 됨 그리고 1976년 사망했고, 김일성이 직접 장의위원장이 되어 최용건의 장례를 치루어줌 여담이지만 최용건의 와이프는 2007년 중국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김정일이 조화를 보내주었다고 전해짐 이렇게 북한 역사상 최대의 반김일성 반대 운동은 김일성의 승리로 끝이 나면서 지금처럼 김씨 부자들의 독재 체제가 완성됨 김정일도 그랬고 김정은도 그렇고 자기 부모를 닮아서 그런지 김일성처럼 자기한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일단 죽이고 봄 ㄷㄷㄷ 도탁스 펌
한국전쟁 당시 필리핀 기갑부대의 활약
우선 밑의 썰 대부분의 출처는 필리핀 국방부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MaxDefense/posts/so-who-is-maj-maximo-young-ret-the-latest-recipient-of-the-south-korea-order-of-/991951714308819)의 게시물임을 밝힘. 자국 홍보용 SNS라는 특성상 과장이 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율동전투 때의 활약 등은 이미 국군, 미군 자료와 교차검증되는 부분이고 출처로 자국 기록이 아닌 'US Army in the Korean War' 4권, 미군 기밀문서 'Army 12 November 1952', USACMH 발행 'The Korean War the Outbreak'등 외국 자료를 기재하고 있어서 적어도 난 어느정도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함. 한국전쟁때 필리핀군은 10대대 전투단을 파병, 총 파병인원 7500여명을 보내 UN에서 다섯번째로 많은 군인을 보낸 군대였는데 특기할 사항은 이 10대대 전투단은 '기갑부대'였음. 그것도 필리핀에 있던 유일의 기갑부대.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사실 필리핀은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당시 M4A1셔먼(75mm모델), M10 울버린 구축전차, M7 프리스트 자주포, 그레이하운드 장갑차와 M3 반궤도 장갑차등 기갑차량을 도합 500여대 가량 보유하고 있던 서류만 놓고보면 상당한 기갑전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기갑차량들이 대부분 정비, 운용할 인원 없이 창고에 쳐박혀 있던 물건들이라는 점이었음. 근본적으로 미군이 필리핀에서 쓰다가 회수하지 않고 그냥 가버리면서 필리핀에 남게된 잉여물자들이었고 이걸 운용할만한 숙련된 정비병과 전차병, 인프라는 필리핀에 매우 소수만 있어서 필리핀은 1950년 시점에서 10대대 전투단 단 하나의 기갑부대만을 운용하고 있었으며, 구체적으로는 29대의 셔먼 전차와 10대의 스튜어트 경전차 소수의 m101 105mm 자주박격포만을 운용하고 있었다고 함. 하지만 필리핀은 6.25 개전 직후 곧바로 식량 및 농기구, 비료등을 한국에 지원해준 걸로 모자라 유일한 기갑부대인 10대대 전투단을 한국에 파병할 것을 결정했음. 필리핀이 안정되어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라 1946년 독립 이래 내부적으로 이미 한국보다 먼저 개판이 나서 친미정권에 반기를 든 공산 반군 후클발라합, 남부 이슬람 무장단체등이 들고 일어나 나라가 2~3개로 쪼개질 판국이었는데도 기갑차량 운용능력을 가진 유일한 부대인 10대대 전투단을 파병할 것을 결정한 것임. 개전 3개월이 채 안된 1950년 9월 15일에 부대는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김. 부대는 총 16대의 셔먼 전차와 1대의 울버린 구축전차를 운용할 예정이었는데 병력이 출발하기 이전에 "미리 유엔군에 장비를 보내놓고, 도착하면 다시 받아 싸우자!"라는 생각에 기갑차량들을 먼저 부산항에 보냄. 그리고 따로 병력이 출발함. 근데 막상 9월에 필리핀군이 부산에 도착하자 필리핀군은 차량을 못받음(???). 그래서 필리핀군은 명색이 기갑부대인데 인천상륙작전 이전까지 그냥 기갑차량 없이 보병으로 싸웠다고 함. 필리핀 국방부 페북에 따르면 자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파괴되었다고도 하고 대체 뭔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 17대의 기갑챠량의 행방은 오리무중임. 아무튼 그래도 필리핀군은 부산과 대구에서 기갑없는 기갑부대, 사실상 보병부대로서라도 열심히 싸웠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에도 참여했으며, 이후 미군에게 필리핀군이 가진 화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요청을 넣어 다시 채피 경전차와 셔먼 중형전차등을 받아 기갑부대로서 구색을 갖추는데 성공함. 1950년 11월 미우동에선 비가 내려 전차가 기동하기 힘든 진창이 되었음에도 성공적으로 채피 전차를 운용해 북한군을 격퇴했고 중공군의 개입 이후 1951년 4월 20일 임진강 인근에선 2대의 미군 M26 퍼싱 전차가 수렁에 빠져 기동불능이 되는 사태가 발생, 중공군은 포격을 가한 후 다수의 보병들을 보내 퍼싱 전차를 노획하려 했는데 이때 10대대 전투단의 전차들이 달려와 중공군을 격퇴하고 미군 전차병들이 성공적으로 퍼싱 전차를 회수할 수 있게 도왔다고 함. 하지만 가장 유명한건 1951년 4월 22일 벌어진 율동전투. 율동에서 900명의 필리핀 10대대 전투단 병력이 거점을 지키고 있었는데 중공군 44사단 병력이 공격을 개시, 근처에 있던 미군 부대가 모두 후퇴하면서 필리핀군이 지키던 거점은 쿠르스크마냥 툭 튀어나온 형태가 되어버림. 중공군은 4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고립되고 통신도 끊긴 필리핀군에 맹공을 퍼부었지만 필리핀군은 소수의 채피 전차로 이 공격을 격퇴하고 거점을 지키는데 성공함. 필리핀군은 12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중공군은 5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었음. 전선이 답 없이 밀리면서 필리핀군도 결국 후퇴하지만 필리핀군 덕분에 미군은 후퇴할 시간을 벌 수 있었음. 콘라도 디 얍 대위 막시모 영 소령 이 과정에서 콘라도 디 얍(Conrado D. Yap) 대위와 막시모 영(Maximo Young) 예비역 소령이 뛰어난 활약으로 2018년 한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기도 했음. 콘라도 디 얍 대위는 퇴각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돌격을 감행, 중공군을 패퇴시키며 부상자들을 구하고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이 과정에서 본인은 전사함. 막시모 영 예비역 소령은 이때 채피 경전차의 전차장이었는데 2차대전때 일본군에 맞서싸우고, 한국전쟁때 공산군에 맞서싸우고, 베트남 전쟁때도 참전해 세 전쟁에 참전한 인물로 알려져 있음. (올해 2022년 1월 작고) 앞서 말했듯이 율동전투때의 활약은 미군 기록으로도 검증된 사항이고 맥아더도 900명의 병력으로 4만명의 중공군을 막아낸 율동의 필리핀군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은 바 있고 퍼싱 전차 구출작전 당시에도 이 과정을 지켜본 미군 공수부대원들이 필리핀군을 극찬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필리핀군 10대대 전투단은 한국전쟁 당시 가장 분전해 싸운 부대 중 하나로 알려져 있음. 군사갤러리 나쿠로이님 펌
왠지 뭉클해지는 역사의 한 순간들
#1 초상화를 완성하는 동안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빅토리아 시대 부부, 1890년대 #2 베오그라드 근처 최전선까지 자신을 방문하러 온 아버지와 함께 잠든 세르비아 군인, 1914/1915 #3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아침, 동독 국경 수비대가 베를린 장벽 너머로 꽃을 건네고 있다, 1989 #4 도쿄의 국수 배달부, 1935년 #5 아메리카 원주민 어머니와 그녀의 아이, 1900년대 #6 제2차 세계 대전 중 부다페스트. 유대인들은ㄴ 도나우강변으로 끌려가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에 따른 후 총살 당했다. 지금은 60켤레의 철제 신발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강둑을 따라 늘어서 있다. Can Togay와 Gyula Pauer의 '다뉴브 산책로의 신발'. #7 1967년 7월 17일, 실수로 고압선을 만져 4000볼트의 전기에 감전돼 심정지가 온 동료에게 인공호흡을 하는 전기공. 동료의 빠른 응급처치 덕분에 Champion은 사고에서 살아남았고 다음 주에도 출근했다고 한다. #8 2차 세계대전 중 부상 당한 개를 태운 동물 구급차 #9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시기, 캘리포니아의 마스크를 쓴 사람들, 1918년 #10 아버지, 아들,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뉴기니, 1970 #11 도르레를 이용해 강을 건너 학교에 가는 아이들. 모데나, 이탈리아, 1959년 #12 두 다리가 잘린 장애인 철도 신호수 제임스 와이드(James Wide)가 애완동물이자 조수인 잭 개코원숭이와 함께 일하는 모습, 케이프 타운, 1880년대 James Wide는 1881년에 차크마 개코원숭이를 구입하여 휠체어를 밀고 감독 하에 철도 신호를 작동하도록 훈련했다. 개코원숭이는 하루 20센트, 매주 맥주 반 병을 받았고, 철도 회사에서 9년 동안 일하면서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3 노예 남성이 3년간 다리에 착용하고 있던 사슬을 제거하는 영국 선원 이 노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왕립 해군이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만 해안에서 노예 무역 기지를 탈출했다.⁣(1907) #14 1902년 프랑스의 나이프 그라인더, 그들은 허리를 보호하기 위해 누워서 일했고 온기를 위해 개를 다리에 앉혔다. #15 연구원이 한 번에 최대 8권의 책을 작업/읽을 수 있게 해주는 18세기 장치 #16 9/11 테러, 81층에서 걸어 내려가 1층에 막 도달한 순간 무너져내린 세계무역센터의 먼지 구름을 뒤집어쓴 여인 먼지의 여인 Marcy Borders는 2015년 8월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암이 그 날 흡입한 먼지 때문에 악화되었다고 생각했다. 9/11 피해자 보상 기금과 세계 무역 센터 건강 프로그램은 지난 18년 동안 2,000명 이상이 그날의 사고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17 2001년 9·11테러를 부시 대통령이 처음 알게 된 순간 #18 독일 베를린, 1985-2018 #19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한 10년 후 찍은 필리핀계 미국인 가족 사진, 1912 #20 2800년 된 키스 (출처) 먹먹하기도, 웃음이 지어지기도, 또 괜스레 뭉클해지기도 하는 역사적 순간들 :)
왠지 뭉클해지는 역사의 한 순간들 #3
광복절이네요. 대한독립만세! 외치고 시작합니다. #36 1917년 전기 충전 자동차 #37 히로시마 원폭 진원지에서 1,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망한 3세 소년의 세발자전거, 1945 #38 1968년 경마장에서 영국 여왕과 남편 #39 부모와 함께 있는 2살짜리 엘비스 프레슬리, 1937 #40 1945년 5월 베를린 전투 중 베를린의 폐허를 걷는 여성 #41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균형을 잡는 곡예사, 1934 #42 탈락된 에펠탑 디자인들 #43 1945년 12월 21일 주인이 죽은 날 조지 S. 패튼 장군의 애완견 #44 1983년 이탈리아 교도소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 남자 메흐메트 아그카와 이야기를 나누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45 1910년, 미국에서는 아이를 소포로 부치려는 부모들이 많았다. 1913년에 도입됨 사진은 오하이오의 Jesse와 Mathilda의 8개월 된 아들 James. 제임스는 소포를 통해 할머니에게 보내졌다. 철도 티켓보다 저렴한 15c만 들이면 됐던 것. 보험은 50달러였다. 그리고 1920년부터 우체국은 더이상 어린이를 배달하지 않기로 했다. #46 1948년 "어린이 4명 팝니다." 1948년 8월 5일 인디애나 주 발파라이소의 The Vidette-Messenger에 실린 사진. 임신한 엄마가 아이들을 팔려고 내놓은 후 부끄러워 사진 작가에게 얼굴을 숨길 때 아이들은 포즈를 취하며 약간 혼란스러워 보인다. "시카고의 어느 집 마당에 있는 커다란 'For Sale' 표지판은 아파트에서 쫓겨나는 Ray Chalifoux 부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댈 곳이 없는 무직 석탄 트럭 운전사와 그의 아내는 네 자녀를 팔기로 결정합니다. Lucille Chalifoux 부인은 아이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동안 카메라 위에서 고개를 돌립니다. 맨 위 계단에는 Lana(6세)와 Rae(5세)가 있습니다. 아래에는 Milton(4세)과 Sue Ellen(2세)이 있습니다. 가족들은 어머니가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돈을 받았다고 비난했으며, 이는 이야기의 일부였을 수도 있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자녀를 파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년 만에 모든 어린이 사진과 당시 그녀가 안고 있던 아기가 다른 집에 팔렸습니다." #47 Moko 얼굴 문신이 있는 미라 머리(Mokomokai) 미라를 만들기 위해 뇌와 눈을 제거하고 두개골의 모든 구멍을 아마 섬유와 잇몸으로 막았다. 그런 다음 머리를 오븐에서 찐 후 불에 태우고 며칠 동안 햇볕에 둔다. 그 후 머리는 상어 오일로 수분을 공급한다. - 마오리 문화 - #48 런던의 '노커 업'(1929). 알람 시계가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막대기로 문과 창문을 두드려 클라이언트를 깨움으로써 돈을 벌었다. #49 1900년대 뉴욕시. (컬러링) #50 1936년에 만들어진 보조개 만드는 기계 (출처) 그러니까 이건 광복절 특집 시리즈였습니다. 전쟁 그만.
감자튀김 달인의 레전드 감튀 레시피 모음jpg
미리보기 그동안 여러번 시도해 봤는데 눅눅하고 기름도 많이 먹고 실패를....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우리나라 감자는 튀김용으로 만들기 좀 힘듭니다. 수분 함량이 많아서 찌거나 구워먹는 용도로는 좋은데 튀기는 용도로는 좀 맞지 않는거 같습니다. 그러다가... 마트에서 발견했네요.?? 혹시나 해서 만들어 봤는데 구이나 튀김 모두 괜찮은거 같습니다. 먼저 만드는 방법 감자를 깨끗이 씻고 껍질 벗겨도 되고 껍질채 사용해도 됩니다. 이때는 싹이 조금 날려고 해서 껍질 벗겨내고 만들었습니다. 적당한 크기로 썰어 둡니다. 여기서 만드는 방법이 몇가지가 있는데 소금물에 10분 정도 담궈 두었다가 건져서 물기 제거하고 만들거나 감자를 통채로 조금 삶았다가 썰어 튀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날은 첫번째 방법으로.... 이제 튀깁니다. 정확한 기름 온도는 잘 모르겠는데 작은 조각 한두개 넣어보고 이렇게 끓어오르면 됩니다. 바삭하게 잘 된 거 같네요. 바로 튀겨서 케쳡 찍어 먹으면 참 맛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름이 깨끗한 게 참 맘에 듭니다. 응용작 들어갑니다. 아래로는 아마 전에 본 사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감자튀김에 체다, 피자, 고다 치즈 세가지 올리고 오븐에서 구워냅니다. 여기다 베이컨 조각 좀 올려주면 거의 오지치즈 후라이와 비슷하죠. 다른 방법입니다.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이런걸 사온적이 있는데 없으면 생략해도 됩니다. 감자에 좀 뿌리고... 여기에 튀김가루를 아주 조금 뿌려서 이렇게 버무려 줍니다. 튀기면 이런 모습으로 나옵니다. 바삭바삭해 보이죠. 좀 더 바삭하게 만들어 볼까요? 위의 마늘 소금이나 허브가루 같은 거 조금 뿌리고 이번엔 전분가루를 섞어서 버무려 줍니다. 튀겨내오면... 정말 바삭합니다. 튀기는 시간을 조금 더 오래하면 이렇게..... 마늘 소금 대신 통후추랑 씨즈닝 뿌려서 만들면 파파이스 같은 곳에서 파는 케이준 스타일이 되겠죠? 다음엔 그렇게 만들어 볼려고 하는데 양파링으로 미리 만들어 보니 비슷한 맛이 납니다. 이제 우리나라 감자쪽으로 넘어와 볼까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나라 감자는 수분 함량이 많습니다. 튀기는 것보다 찌거나 굽는 쪽이 요리가 좀 더 잘 됩니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강판에 감자갈고 야채 좀 섞어서 부쳐냅니다. 이건 뭐 다 알고 있을 것이고..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 칼이나 채칼을 사용해서 최대한 감자를 얇게 채 썬 다음 물기 꼭 짜내고 팬에 고르게 펴서 앞뒤로 부쳐냅니다. 이렇게요. 감자 팬구이 완성 됐습니다. 그냥 케첩 뿌려서 먹어도 되고 파마잔 치즈나 피자 치즈 뿌려서 오븐구이 해도 됩니다. 마지막은 도구의 힘을 빌어봅니다. 저희 집에 돌려깎는 슬라이서가 있는데 껍질채 얇게 썰어줍니다. 얇게 잘 됐죠? 그냥 튀겨주면 감자칩... 감자한개로 이만큼이나 나옵니다. 이제 맥주 한잔이랑 즐기면 됩니다. 출처:  팜스 블로그 맥주 도랏...
GOD의 식비가 억대가 나왔던 이유.txt
1. IMF로 회사가 어려워 연습생이었던 지오디를 산속 외진 연습실에 버림 방치한 2년 동안 회사 지원이 없던 상황에서 지오디는 옥수수서리를 하며 버팀 감동받은 사장님이 제왑을 프로듀서로 부름 2. 녹음실을 만들어줌 물난리 남 녹음실이 아예 물로 잠겨벌미 물을 퍼내는데 산사태가 일어남 또 진흙으로 가득 참 하늘이 우리 앨범 내지 말라나 보다... 그만하자.. 2년 고생하고 포기하려고 할 찰나였음 피부병도 생김. 근데 어찌저찌 어린이 영어테이프 만들던 녹음실에서 god 전설의 1집이 탄생함 3. 어머님께는 리더 박준형의 실화 그외에 짠내나는 일화가 넘침 본격 염전 그룹 대표적인 일화 - 새우깡죽 1달여전 다섯이 모여 뜯어 놓고 반만 먹고 남긴 새우깡 쇼파에 끼어있던 걸 손호영이 발견하고 즉석에서 멤버들이랑 냄비에 물넣고 소금 풀어서 새우깡 넣고 죽 해먹음 오랜만에 죽이라며 매우 행복해함 - 고추장국 냄비에 수돗물 반 받고 고추장 몇 숟갈 탁탁 털어서 끓임 그거랑 밥이랑 먹음 다들 배불러했음 - 움직이지마 밥먹고 김태우가 돌아다니면서 노래 부르니까 윤계상이 “움직이지마 배꺼져” 4. 먹을 것에 한이 맺힌 손호영과 윤계상이 1집으로 번 몇백 만원을 먹을 걸로 다 쓴거.. 등등 마무리는 지오디의 육아일기 첫화에 나온 지오디 숙소로 ㅋㅋㅋㅋ + 이후 식비제한 없는 조건으로 재계약했는데  6개월동안 식비가 2억나왔다는 박진영 이야기를 듣고 멤버들이 말이 되냐면서 영수증하나하나 계산해보니 2억이 맞았다함 ㅇㅇ 그이후로는 조금은 아껴먹었다고..  모야 ㄹㅇ 염전그룹 ㅠㅠㅠㅠㅠㅠㅠㅠ 짠내 오졌다..... 찾아보니까 일화들이 더 있는데 - 미국에서 god 숙소 온 쭈니형 친구 새우깡에 간장하고 물타서 죽처럼 해먹고 있었음, 나중에 멤버들도 해먹음, 그 분은 90kg였는데 60kg로 빠져서 감 - 육아일기 찍을 때 제작진이 삼겹살을 줬는데 먹을거에 미쳐서 삼겹살을 김치찌개에 몽땅 집어넣음 (진짜 엄청 많이 받았는데)... 그게 나중에 기름찌개가 됨 절대 남기지 않음 - 석가탄신일에는 주변 절에 가서 국수 공짜로 줘서 좋아했음 (쭈니형은 진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데...) - 산속 지하수로 씻었음, 그걸 물 끓여서 샤워함 - 펌프가 얼어서 물이 안나오면, 한시간을 걸어가면 병원이 나옴 그 화장실에서 샤워함 - 카센터에 가서 오천원 주고 샤워실좀 써도 되냐고 해서 샤워함 - 순풍산부인과로 돈 벌어왔던 쭈니형 그때 사온 과자를 매니저가 모르고 다 먹음 그걸 본 손호영 " 저새끼가 과자 다먹었어. 죽여버릴까?" - 찌개 아낀다고 좀 상한거 먹어서 배탈이 남 화장실에 물이 안내려가서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은데 1시간을 뛰어서 병원 화장실에 뛰어감 - 육아일기 초기에는 진짜 쌩 그 상태로 찍어서 쌀도 없었음.. 그거 보고 팬들이 쌀이랑 음식 보내줌 재민이 먹이라고. 팬들이 키워줬다고 직접 이야기함. ㅊㅊ 디시+더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