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gun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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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장례문화

사티는 남편이 죽어서 시체를 화장 할 때
아내가 불 속에 뛰어 들어 남편의 시체와 함께 불타는 풍습임.

1829년 동인도 회사의 총독 벤틱 경이 금지했지만
1843년 마하라자만 싱 왕의 장례식때
그의 15명 아내들이 사티로 죽기 전 손바닥 도장 흔적이 있을 정도로 사티는 계속 되었음.
1987년 9월 라자스탄 주의 데오랄라 마을에서 18세 과부가 사티로 죽었는데
애초에 라자스탄 주정부는 사티를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강행 되었다고 함.
남편의 가족들이 과부를 마취 시키고 장작더미에 밀어 넣었다고.

그리고 지키고 있으면서 불구덩이 속에서 빠져 나오려는 과부를 몇 번이고
다시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었다고 함.
경찰은 그 가족들을 구속했으나 별 문제 없이 석방 되었다고 함.

에휴.


2006년 8월 22일에 있었던 사티에서는
과부가 불에 탄 후 남은 재를 만져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들면서 관광특수까지 누렸다고 함.

남편이 죽으면 과부는 친척들로부터 가문의 남성들 중 한 명과 동침할 것을 강요 당했다고 함.

그리고 남편을 잡아 먹었다는 낙인으로 평생 집안에서만 살아야 했는데
힌두교 관습에 따라 과부들은 재혼을 해서도 안되고 다른 남성을 유혹해도 안되었다고 함.

머리카락을 전부 밀고 대머리인 채로 살면서
장신구를 걸치거나 색깔 있는 옷을 입는 것도 금지였다고 함.

이렇게 감금과 멸시를 당하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랬다고 산 채로 불 타 버리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임.

살아 있는데 불 속에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반항을 덜 하게 하기 위해 환각제를 먹이고 기둥에 묶어 두는데
화장을 야외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시신이 불타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려
길면 10시간이 넘도록 과부는 불태워지게 됨.


처음에는 불타는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지만
전신이 3도 화상으로 뒤덮이면서 신경이 죽을 때 쯤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스스로 자신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며 생을 마감한다고 함.
사티를 강요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옛날 열녀문이 있었던 것처럼
사티를 행하면 여신으로 승격 되어 사원이 지어지고 친척들은 막대한 기부금을 받게 된다고 함.
그렇다보니 친정이고 시댁이고 할 거 없이 합심해서 산채로 태워 버리는 사티를 종용하는 것.

아까도 말했지만 감금과 멸시를 당해도 강제로 산 채로 불타 죽는 것 보다는 나을 테고
법적으로 금지가 되어 있음에도 강제적으로 끌어내 살해하는 경우도 생겨남.


1802년 한 해 동안 인도의 캘커타 지방 주위 50km 반경안으로
438명의 과부가 사티 풍습으로 죽었다고 함.

현재는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시골에서는 사티 풍습으로 죄 없는 과부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지고 있다고 함.


공포갤러리 히죽님 펌
shingun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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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짱꼴라보다 더 미개하고 위험한 국가여‥🙄😤😡
솔직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우리도 열녀문이니 하면서 과부 수절을 강요했지않나! 심지어 혼인도 못하고 정혼만 한 상태에서도 남자 약혼자가 죽어도 그 집에 가서 평생 수절하면서 산 송장처럼 살다간 여성들도 많은걸로 알고 있다. 인도의 사티 풍습처럼 불에 타 죽지는 않아도, 목숨만 붙어 열녀문 받기 위한 도구로 쓰인 것이 더 나아보이진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에게만 정조의 의무를 지우는 거지 발싸개 개같은 풍습들이 형태만 달리할 뿐 똑같은것 아닌가?
끔찍
2006년..에휴..여신이 아니라 원혼이 돼서 쫒아다닐거 같다..
인도는 국민성과 카스트때문에 발전하지못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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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 천민계급
여타 다른 고.중세 국가들처럼 일본은 과거 신분에 따라 직업이 달랐음  특히 죽음과 관련되거나 보편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됐던 직업 식육,피륙,쓰레기처리,매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전부 천민계급이었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부라쿠(부락),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부라쿠민이라 불렀음 문제는 현재까지도 이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이어지고 있음 한국의 지역 차별 같은 것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심각한 차별임 몇가지 유명한 예시를 들어보면 1. 1975년 일본 기업들 사이에서 이 부라쿠민에 대한 신상정보를 모은 블랙리스트가 거래되다 적발됨 (이런 부라쿠민 블랙리스트 관행은 현재까지도 암암리에 흔히 이뤄지고 있음) 2. 2009년 구글어스에서 옛 일본 지도와 현재 지도를 겹쳐보는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라쿠 지역이 특정돼 넷상에서 '더러운 동네' 라는 이름으로 해당 지역 정보가 퍼짐 3. 일본 정치인 아소 다로가 부라쿠민 출신 정치인에게 "부라쿠민 따위는 일본 총리가 될 수 없다" 고 폭언함 4. 1963년 사이타마현에서 여고생 납치 피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범인을 잡지 못하자 경찰이 근처 부라쿠 지역에서 이시카와 카즈오라는 사람을 체포해 고문을 통해 무고 자백을 받아냄 이시카와 카즈오는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97년 가석방됨 뉴스로 나올만큼 큼지막한 사건만 몇개 정리했을때 이 정도고 사실상 현재까지도 신분제가 이어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심각하지만 일본인에게 외국인이 이 이야기를 꺼내면 언제적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며 굉장한 모욕으로 여김 기본적으로 일본 사회내에선 금기어나 마찬가지이고 '부락'이란 단어는 일본내 미디어에선 사실상 검열 대상임 아래는 일본 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부라쿠민 차별 사진들 차별 금지 정책은 보통 '동화'라는 단어를 많이 씀 실제로 일본에선 초등학생때 부터 '동화교육'이란 이름으로 차별 반대 교육을 받는다고 함 이 외에도 부라쿠민 뿐만 아니라 아이누족, 류큐인 같은 소수민족이나 재일 조선,한국인들도 만만찮은 차별이 받으며 살아가고 있음 도탁스 펌
생존을 위해 식인을 했던 사례들 ㄷㄷㄷ
만일 너희들이 아사 직전의 극한 상황에 몰린다면 끝까지 이성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이때 식인(cannibalism)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극단적인 생존 방법이야 물론 그 선택은 당하는 사람이나 행하는 사람이나 의심할 바 없는 엄청난 비극이지 자 그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식량으로 삼았던 몇가지 사례들을 알아보자 맥퀴리 하버 탈출 사건 (macquarie harbour) 1820년대 초, 영국의 감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영국정부는 좀도둑부터 살인마까지 다양한 죄질의 범좌자들을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호주 남부 해안의 섬, 타스메니아(Tasmania)로 이동시켰어 지도 남쪽을 보면 주황색으로 칠해진 'TASMANIA' 라는 섬이 보이지? 바로 저기야 특히나 살인과 같이 죄질이 나쁜 죄수들은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시킨 맥쿼리 하버로 보내져 수년간 고된 노역을 해야 했지 이곳에서의 노역 생활은 악명이 자자했는데 죄수들은 차라리 교수형 당하는 것이 낫다 생각할 정도였다고 해 덕분에 몇몇 죄수들이 동료 죄수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어 1822년 9월, 공동 작업에 동원된 8명의 죄수들은 고된 노역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기로 결심해 그들은 간수를 뒤에서 덮친 후 나무에 묶고 약간의 식량과 도끼 하나만을 들고 도주하지 탈출한 8명은 배를 훔쳐타고 아시아쪽이나 남미로 가려고 했어 죄수들은 배를 훔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탈출 사실은 바로 들통나면서 간수들에게 알려졌고 결국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항구가 폐쇄당하고 말지 죄수들은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해 숲이 울창한 미개척지를 지나 육지의 다른 거주지로 향했어 육지로의 탈출을 감행한 죄수들은 여태 꽤 있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 중 단 한번도 성공한 탈옥은 없었다고 해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죄수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다른 방안은 없었어  핑크색 화살표 보이지? 저게 죄수들이 이동한 경로야 왼쪽에 항구라고 적혀있는 곳이 맥쿼리 하버고 쨋든 그들이 가는 길목에 위치한 100km에 달하는 가파른 산맥에는 먹을 만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해 시간이 지나면서 8명의 죄수 중 로버트 그린힐이란 죄수가 무리의 리더가 되었지 그린힐은 선원 출신이었어서 태양과 별로 방향을 가늠할 줄 알았고 유일한 무기였던 도끼를 가지고 있던 자였어 탈출을 감행한지 8일째 그들은 완전히 기아상태가 되었지 앞서가던 5명의 죄수들은 체력이 약해서 자꾸 뒤쳐지기만 하던 3명을 귀찮게 여겼고 결국 무리는 강한 쪽과 약한 쪽 두 무리로 나뉘게 돼 리더인 그린힐과 그의 친구였던 트레버스, 보든햄, 매더스, 피어스가 한 무리를 이뤘고 달튼, 캐널리, 브라운이 또 다른 한 무리를 이루었지 밤이 되자 두 무리가 따로 불을 피우고 잠을 청했어 그때 리더인 그린힐이 자신의 무리에게 소름끼치는 제안을 했어 선원이었던 그린힐은 선원의 관습을 예로 들며 얘기를 꺼냈지 선원들의 관습이란 생존이 어려울 시 최후의 수단으로 제비뽑기를 해서 선택된 한 명을 먹고 나머지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한다는 거였어 절박했던 그린힐의 무리는 전원이 찬성하지 하지만 그들은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정하는 대신 약한 3명의 무리에서 그들의 희생자로 골랐어 희생자로 선택된 인물은 달튼이었어 선택의 이유는 죄수 캠프에서 달튼이 규율을 어긴 동료 죄수들을 간수 대신 채찍질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지 약한 무리의 3명이 모두 잠들자 그린힐은 달튼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쳤어 죽은 달튼의 시체는 농부 출신인 트레버스가 양을 도살해본 경험으로 손질했지 다들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지만 그날 밤 달튼의 살점을 먹은 사람은 그린힐과 트레버스뿐이었어 하지만 아침이 되자 고기 냄새에 이성을 잃은 나머지 죄수들도 달튼의 살점을 먹었어 배를 채운 죄수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어 죽은 달튼과 같은 무리였던 브라운과 케널리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고 앞의 5명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다시 맥쿼리 하버로 돌아갔어 다음 희생자는 자신들이 될 거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린힐의 무리는 한참 후에야 2명이 없어진 것을 알았고 이로 인해 그들의 생존 게임에는 큰 차질이 생겼어 5명의 죄수들은 한 번의 살인으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무리 중 또 다른 누군가가 죽게 되리란걸 알게 됐지 5일 후 고기가 바닥나자 다음 희생자를 정할 때가 왔고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어 결국 제비뽑기를 했고 당첨자는 보든햄이 됐어 보든햄은 그 즉시 도살당했고 나머지는 그의 살로 굶주린 배를 채웠지 이제 남은 사람은 4명뿐이었어  4명의 관계를 살펴보면 도끼를 가진 그린힐과 그의 친구 트레버스가 무리 중 우위였고 나머지 매더스와 피어스가 약자였지 시간이 지나면서 굶주림이 다시 그들을 덮쳤고 어느덧 다음 희생자를 정할 때가 왔어 신변에 위협을 느낀 매더스는 피어스에게 둘이서 그린힐과 트레버스를 덮쳐 도끼를 빼앗자고 제안했어 하지만 피어스가 택한 건 강한 쪽이었어 피어스의 배신으로 매더스는 그들의 식사거리가 되었지 이제 친구 사이인 그린힐과 트레버스, 외톨이인 피어스 이렇게 세 사람이 남게 된다 누가 봐도 다음 차례는 피어스였지 트레버스에게 불행한 사고가 닥치기 전까진 말이야 숲에서 트레버스가 독사에 발목을 물린거야 그린힐은 그를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트레버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물린 부위는 썩기 시작했지 가망이 없음을 직감한 트레버스는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어 결국 트레버스가 다음 희생자가 됐어 마침내 두 명만 남게 되었어 그린힐과 피어스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어 언제든 상대방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둘은 서로를 죽이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그게 지켜지지 않으리라는건 둘 다 알고 있었겠지 때문에 둘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이제 누가 오랫동안 안 자고 버티냐의 싸움이 시작된거지 그들은 삼일 밤낮을 꼬박 샌 채로 계속 걸었어 상황은 극으로 치달았지만 죽지 않으려면 견디는 수 밖에 없었지 4일째가 되던 오후 결국 잠이 든 쪽은 그린힐이었어 그린힐이 잠들자 피어스는 곧바로 도끼를 집어들고 그의 머리를 쳐버렸지 이로써 알렌산더 피어스가 유일한 생존자가 됬어 피어스는 그린힐의 고기를 먹고 일주일을 더 걸어 탈출 50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어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 그는 다시 붙잡히는데 피어스에게 숲에서 일어난 식인에 대해 들은 간수들은 처음엔 이를 믿지 않았어 기독교를 믿는 영국인이 식인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간수들은 피어스가 나머지 죄수들이 추적을 피해 달아날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어 피어스는 다시 맥쿼리 하버로 이송됐고 다른 죄수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어 그 중 젊은 청년이었던 토마스 콕스란 놈이 재탈출하자고 피어스를 꼬드겨 지옥을 경험했던 피어스로는 처음엔 내키지 않아 했으나 결국 탈출에 동의했지 육로로의 탈출은 불가능하단걸 알고 있던 피어스는 이번엔 킹 리버를 헤엄쳐 건너기로 했어 그런데 5일간 걸어 킹 리버에 도착해 강에 뛰어드는 순간 킹 콕스가 갑자기 수영할 줄 모른다고 하는거야 개빡친 피어스는 변명을 늘어놓는 콕스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려 피어스는 콕스의 허벅다리와 종아리 살을 챙겨들곤 그 자리를 떠났지 그렇게 2~3일 가다 보니 후회가 엄습해왔고 피어스는 해안가에 맥쿼리 하버를 오가던 배를 붙잡고 자수를 해버렸어 따라서 피어스가 유죄를 받은 것은 물론이었지 1824년 7월 19일 알렉산더 피어스는 식인 행위로 교수행에 처해졌어 미뇨넷호 난파 사건 (mignonette ship) 1884년 여름 미뇨넷호 4명의 선원들은 요트 한 척을 본국인 영국에서 호주의 새 주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어 미뇨넷호에는 경험 많은 경주용 요트 조타수인 선장 탐 더들리랑 역시 경험 풍부한 선원 네드 브룩스 항해 담당 에드윈 스티븐스, 처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잔심부름꾼 리처드 파커가 승선해있었지 미뇨넷호는 14년 전에 만들어진 꽤나 오래된 배였고 상태는 아주 개판이었어 19세기에는 배들이 부실했기에 선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위험한 직업이었대 미뇨넷호가 침몰한 1884년만 해도 550여척의 영국 배가 침몰했다고 해 항해를 시작한지 7일 후인 7월 2일, 풍랑을 만나자 미뇨넷호는 어찌해 볼 새도 없이 침몰해버렸어 다행히 더글리 선장과 그의 선원들은 무사히 소형 보트에 옮겨탔지만 그대로 대서양을 표류하게 된거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통조림 2개, 나이프 하나, 경도 측정 시계뿐 마실 물조차 없었다고 해 배가 난파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세인트 헬레나'와 '트리스탄 드 코나'라는 곳으로 각각 북쪽과 남쪽 1200km 지점에 있었고 희망봉은 동쪽으로 2600km, 남미는 서쪽으로 3200km나 떨어져 있었어 빨간 점 보이지? 저게 그들이 난파된 지점이야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희망봉을 지나는 배들의 항로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지 표류한지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심한 갈증이 찾아왔어 통조림이랑 빗물, 바다거북따위로 잠깐 동안은 이를 견뎠지만 그마저도 바닥이 나니까 그들은 허기와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했지 표류한지 일주일 쯤 되었을까 갈증이 최고조에 다다랐고 항해가 처음이었던 파커는 목마름에 바닷물이라도 마시려 했어 선장인 더글리는 바닷물이 탈수증을 초래하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를 저지했지 더글리는 빨리 구조되지 못하면 선원관습에 따라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골라 인육이라도 먹어야 될 거라고 생각했어 더글리는 이를 선원들에게 말했고 다들 망설이는데 브룩스가 격하게 반발했어 결정은 유보되었고 표류한지 3주 가량이 지난 7월 20일 밤 파커는 갈증을 못참고 바닷물을 마셨어 아침에 잠에서 깬 동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파커를 보게 되지 파커가 죽으면 혈액이 응고되서 마실 피가 없어질거라 판단한 선원들은 결단을 내려야 했어 반발하던 브룩스에게 더글리는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라고 했대 파커만 빼고 모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거든 이 사람이 리처드 파커야 모두가 동의한 가운데 더들리가 파커의 목을 찌르고 그 피를 통에 담았지 더들리와 스티븐스, 맹렬히 반발하던 브룩스도 갈증을 못이기고 파커의 피를 허겁지겁 마시게 되었어 세 사람은 파커의 피로 목을 축인 후 살을 발라 날것으로 먹었고 남은 살점은 햇볕에 말렸어 작은 보트 안은 피와 살점들로 난자했어 위 사진의 배가 실제로 1884년 미뇨넷호 선원들이 탔던 구명보트야 그로부터 4일이 지났고 남은 고기는 거의 부패한데다 피는 상했어 7월 24일 또 한명의 희생자가 필요해진 순간 기적적으로 그들 눈 앞에 독일 배 한 척이 나타났어 그들은 다행히 구조되었고 2주간을 먹고 자기만 했다고 해 체력이 어느정도 회복되자 더들리 선장은 독일인 선장을 만나 그동안 있었던 상황을 털어놓았지 더들리는 동료를 죽이고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어 한 명을 희생해 나머지 3명을 살렸기 때문에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거지 얘가 토마스 더들리다 구조된 지 3개월이 지난 후 미뇨넷호 생존자들은 본국인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미뇨넷호의 주인에게 모든걸 털어놨어 더들리는 이걸 이유로 소송 당할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나봐 결국 세 사람은 모두 체포되었고 그들은 분노했지 선장이었던 더들리 입장에서는 선원 대부분을 살렸기 때문에 체포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봤는데 영국 정부는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식인은 용납할 수 없는 잔혹한 행위라고 규정지었어 당시 영토를 확장 중이던 대영 제국은 원주민들이 야만적이라 구원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거든 그에 대한 증거로 원주민들이 식인을 한다고 주장한거지 때문에 영국 선원이 식인을 했다는 사실은 정부 입장에선 영토 확장에 문젯거리가 되었던 셈이지 영국 정부는 선원 관습을 금지하기 위한 선례로 삼으려고 미뇨넷호 선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려고 했어 그들을 기소하기 위해 검찰은 살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브룩스를 검찰 측 증인으로 세워 브룩스는 증인을 해주고 기소를 면할 수 있었지만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리처드 파커에 대한 살인죄로 법정에 서게 돼 하지만 당시 여론은 선원들의 편이었지 이렇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림 1884년 11월 배심원들은 더들리와 스티븐스에게 동정적이었기때문에 무죄를 결정해 하지만 판사는 이를 무효화시키고 특별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전권을 넘기도록 압력을 행사했어 결국 재판에서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어 하지만 선원들의 관습에 제재를 가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영국 정부는 수감 6개월만에 두 사람을 석방했어 당시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더들리는 이런 말을 했대 " 이것으로 선원들의 관습을 금지시킨 줄 알겠지만 진실을 감추게 됐을 뿐이다. 조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관습을 따르되, 구조된 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모든 사건이 종결된 뒤 증언을 했던 브룩스는 떠돌이 서커스단에 스카우트되었어 서커스단에서 브룩스는 식인마로 분장하고 관객들 앞에서 날고기를 씹어댔지 그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결국 궁핍한 삶을 살다 죽었어 불행하긴 스티븐스도 마찬가지였지 그는 당시의 충격으로 다신 배를 타지 못했고 브룩스와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어 더들리는 호주에서 사업가로 성공했지만 페스트로 사망한 최초의 호주인이 되었다고 해 우루과이 공군기 571편 조난사고 1972년 10월 13일 금요일 우루과이 공군의 쌍발 터보 프로펠러기인 페어차일드 FH-227D는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 있는 스텔라 마리스 대학의 럭비 선수단을 싣고 칠레의 산티아고를 향해 안데스 산맥을 거치는 항로를 비행하고 있었어 페어차일드는 칼라스코 국제공항에서 출발했지만 출발 전날인 10월 12일부터 산맥상공의 날씨로 인해 아르헨티나 멘도사 부근에 착지해 있었다고 해 이게 그 페어차일드임 왼쪽에 산티아고 보이지? 저기로 이어지는 선이 본래 예상경로이고 굵은 선은 실제로 항해한 경로, X는 추락 지점이다 추락 후 동체만 남은 비행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하 40도의 극한 환경에서 72일간을 생존해야 했어 사고 당시 사망 12명 행불 5명으로 생존자는 총 28명이었지 구조대가 오길 기다렸지만 정작 구조대는 2주간의 수색 동안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자 이들이 죽었다고 단정지어 버려 이틀 후 생존자들은 자신들을 찾는 구조 비행기가 지나가는걸 목격하게 돼 그 중 한 비행기가 좌 우로 흔들어대며 신호를 보냈다는데 이걸 목격한 생존자들은 구조대가 자기들을 봤다가 착각을 하지 결국 생존자 중 하나가 구조대가 곧 올거라며 그동안 모아두었던 식량 대부분을 먹어치웠어 하지만 구조대는 오지 않았어 수색대를 만들어 비행기 잔해로부터 약간의 식량을 찾았지만 그들이 모두 먹기엔 부족했지 그러던 중 탑승객이었던 의사 두 명이 식인을 하자고 주장해 생존을 위해서는 단백질이 필요하고 최고의 단백질은 자신들이 매장한 시체로 섭취할 수 있다고 말이지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먹어도 좋다며 설득해 탑승한 럭비팀의 이름이 'Old Christians'이었던 만큼 탑승객 대부분은 카톨릭 신자들이었어  이들은 계기판에 몸이 끼어서 고통받으며 죽어가던 조종사가 권총으로 죽여달라고 애원해도 종교적 신념으로 거절했던 아주 독실한 신자들이었던거지 거기다 이들이 꺼내 먹어야 했을 시체들은 다름 아닌 친구, 형제, 부모였다고 해 하지만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들은 결국 시체에 손을 대지 구조대에 대한 희망이 점차 사라지는 상황에서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할 수 밖에 없었어 그래서 건장한 몇몇 생존자를 뽑아 안데스를 넘어 칠레로 구조 요청을 보내기로 했어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재차 시도하여 결국 칠레 진입에 성공해 그들은 20km나 되는 눈밭을 뚫고 지나간거지 다행히 한 농부를 발견하여 구조 요청을 하고 나머지 생존자들도 결국 구조되는데 성공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16명의 생존자들 1줄 요약 인간은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살기위해서 윤리고 나발이고 사람도 잡아먹음 끝 공포갤러리 히죽님 펌
다이버의 무덤 다합의 블루홀
다이버의 무덤이라 불리는 잠수 장소는 여러 군데가 있는데 일명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잠수 장소”라는 제이콥의 우물(12명 사망)은 동굴의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비좁은 통로로 들어간 다이버들이 물장구를 치기 위해 바닥의 미세진흙을 걷어차는 바람에 시계가 암흑이 되어 나오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당황하여 빙빙 돌다 공기가 떨어져 사망 사례가 다수 발생했다고 함. 수중 동굴에 붙어있던 사인. 예전엔 다이버의 안전을 위해 출구까지 이르는 가이드라인을 설치해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가이드라인으로 인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초보다이버들이 너무 죽어서 제거하고, 전문다이버들이 직접 가이드라인을 설치하며 다이빙하도록 했더니 사망률이 감소했다고 함 원초적 매력과 쉬워보이는 환경이 다이버들을 유혹해 죽이는 자연적 개미지옥을 만들어버렸다 이런 사연을 갖고 있는 제이콥의 우물은 가장 유명한 곳이지만 실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다이버가 사망한” 장소는 이제 소개할 다합의 블루홀(200여명 사망 추산)임. 아치 구조가 있어서 무리하게 통과하려다 사망한다는데, 언뜻 사진만 보면 아주 무해해 보이는 아름다운 장소 같다 다합의 블루홀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홍해 부분에 위치해있으며, 깊이가 3천미터에 달한다. 압축공기를 사용한 레크리에이션 다이빙의 경우 수심 30미터까지가 제한이라고 함. 이보다 깊이 가려면 특수혼합공기와 전문 훈련이 필요하고, 세계기록은 332m인 모양이다. "다이버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다이버의 천국"이라고도 불린다. 관광객이 많고 세계구급으로 유명해서 애초에 잠수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임. 그러니 사고 비율도 높을 듯. 게다가 여러 잠수 업체가 주변에서 장비를 빌려주고 있는데, 때로 잠수 훈련이나 가이딩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모양임. 주 경로는 근처 산호초에 형성된 El Bells라는 좁은 통로로 내려가 -> 작은 아치 (Arch) 를 통과해 -> 큰 바다로 진출 -> 해류를 따라 산호초 절벽을 타고 대각선 방향으로 조금씩 올라가서 -> 얕은 입구인 the Saddle을 넘어 -> 블루홀에 들어가는 흐름인 것 같다. 드라마적 기승전결이 돋보인다. 그런데 이 경로 자체가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 첫 사진의 발랄한 지도가 사용되는 모양인데, 아래쪽에 아주 작게 "Exit from Blue Hole"이라는 부분이 있다. 위협감이나 혹은 호기심을 갖게 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보일듯 말듯하게 그려놨으나, 사실 저 부분이 용의 아가리인 "the Arch" 구조임. 문제는 산호초 절벽을 따라 블루홀의 입구로 향하는 루트 바로 아래에 아치가 있다는 거임 심해에서 아치는 반대편 수면에서 들어오는 푸른 빛을 발하고 있을 거임. 입구로 착각할 수도 있고, 혹은 호기심을 느껴 들여다보고 싶어질 수도 있음. 망설여 멈춘 사이 조류가 그쪽으로 몸을 실어간다. 그런데 저 경로에서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도 30미터 구간임. 이 쯤에서 "질소마취"현상이 나타난다고 함. 여러 기체에 대한 압력차로 인해 탱크 속의 공기 중 질소가 부각된다는데, 마치 술에 취한 듯 판단력이 마비되고 자신감이 늘며 공간 및 방향감각이 상실되어 "심해황홀증"이라고 불림. 게다가 이 부근 해수는 매우 맑고 따뜻하다고 함. 맑아서 빛이 잘 전해지고, 해수면도 아치 건너편도 실제보다 가까워보임. 심해인데도 따뜻해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지만 거부감이 없음. 그리하여 다이버는 질소에 헤롱헤롱 취한 채 아치를 보며 "가까운데? 해볼만 한데?"하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 거임. 그런데 바닷속에서 공간감각을 잃은 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터널 입구에 도착하면, 여기가 -53미터 깊이임. 이쯤해서 고압축 산소 중독이 발생하기 시작함. 증상으로는 저림, 부분 마비, 현기증, 구토와 시야 제한 등. 약 10%의 사람은 발작이나 실신을 하게 되며, 이는 익사로 이어진다 함 아치는 건너편까지 26미터 길이임. 아파트 한 층이 2.6미터쯤 되니까 아파트 10층 정도 되는 거리를 헤엄쳐가야 함. 문제는, 아치가 블루홀의 물이 빠져나오는 구멍이라는 점임. 물독 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호스를 튼 듯 거센 물길이 흘러나오잖아. 한마디로, 반대쪽에서 물살이 몰아치는 26미터임. 게다가 깊이 잠수하면 그만큼 탱크의 공기가 압축되어 빠르게 소모됨. 수심 10m 깊이로 잠수하면 압력이 땅에 있을 때의 대기압과 비교했을 때 두 배로 늘어나 탱크 속 공기의 부피가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함. 수심 50미터면 5기압이라고 함... 뭔지 모르겠지만 폐도 압축되는 모양임 입구가 코앞인데 헤엄쳐도 나아갈 수가 없고, 질소중독으로 술취한 듯하고, 산소중독으로 몸은 마비되고 시야는 어둡고...  그 가운데 공기가 떨어져가며 경보음이 울리는 거임. 제정신이 아닌 다이버는 핸드폰이 시끄럽다고 생각해 전화를 받으려는데 얼굴에 뭐가 씌워져 있어 방해가 되네. 그래서....... 다합의 블루홀에서 사망한 "유리 립스키"라는 다이버의 사망 직전 마지막 동영상 https://youtu.be/1mek8CCyoek 공포갤러리 히죽님 펌
유령 총기, R9-Arms를 알아보자
2006년, 크로아티아 경찰이 불법 무기 공장을 기습해서 급조 폭발물을 비롯해 총기 수십 정을 압수했어 당시 경찰은 압수한 총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무기를 직접 조사한 검사관들의 의견은 달랐어 'R9-Arms Corp. U.S.A.' 문구가 새겨진 권총이 있었거든 미국에서 생산된 총이 동유럽에 유통되는 일은 거의 없어 동유럽을 비롯한 제3세계에는 불법 무기 공장이 많아서 오히려 총기 밀수 절차가 현지 생산보다 복잡할 수 있어 무엇보다 비용과 시간을 고려하면 생산이 더 경제적이야 아무튼 ATF(미 화기 및 폭발물 단속국)에 조회했는데 R9-Arms Corp. U.S.A.는 존재하지 않는 총이었어 총기 생산자가 생산 후 의도적으로 문구를 새겨넣은거야 합법 생산된 총기에는 저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파고들수록 경찰의 의구심은 점점 커져갔어 대부분의 불법 무기는 기존 총기의 카피 제품인데, 때문에 성능이나 품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카피라서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법 공장의 설비로는 설계를 완벽히 구현하지 못하니 당연히 본점에 비해서 성능이 떨어지는거야 그런데 R9-Arms는 크로아티아 코멘트의 표현처럼 훈련된 총기 전문가의 독자 설계품이 확실한 상황이야 모든 압수 총기가 거의 일정한 품질을 가지고 있어서 의지가 충분하다면 대량 생산도 가능하다고 알려져있어 주조 및 가공에도 정밀공정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며 제3세계에 흔한 UZI와 탄창 호환이 가능하고, 사진처럼 소음기나 조준경도 쉽게 부착이 가능해 분당 850발의 발사속도를 가지며 30m내 집탄율도 높아 아주 준수한 성능의 기관권총이라는 이야기야 그래서 유럽 각국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지 2010년에 이탈리아, 12년에 네덜란드에서 발견됐고, 2015년에 다시 크로아티아,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크로아티아를 시작으로 유럽 전체에서 발견됐어 하지만 수사에 큰 진전은 없었어 최초 발견 장소(크로아티아)와 관련된 유력한 용의자는 조사 전에 유치장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애초에 해당 공장의 설비로는 생산이 불가능했어 그래서 생산자가 아닌 단순 판매책일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2018년, 영국 도버항에서의 발견을 마지막으로 2022년 현재까지 다시 발견된 사례가 없어 R9-Arms에 대한 경찰의 관심이 높아진 2015년 전후로 생산을 중단하고 설비를 은폐했다는게 유력한 주장이야 때문에 전문가들은 범인 검거가 불가능하다고 말해 독자 설계가 가능한 총기 제작 전문가를 동원하고, 생산 및 정밀공정이 가능한 장비와 자금을 가졌으며, 수많은 유럽 정보기관의 추적을 1n년동안 피할 수 있는 R9-Arms 생산 배후에 어떤 단체가 있을까? 공포갤러리 ㅇㅇ님 펌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에 대한 모든 것
오늘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에 대해서 알아보겠슴댱!!!!! 다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때 중국에서 진시황 본인이 최초 황제라고 칭했던 시대가 바로!!! B.C 247년 ~ B.C 210년이었다는 사실!!!! 실제 역사기록에 보면은 진시황은 매우 엄격했으며 폭군이였다고 전해집니다!!! 중국 대륙을 통일했던 왜 그가 폭군이였을까요?!?! 실제로 그는 포악했을까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사실!!! 그 이유는!!!!!!!! 진시황은 조조,백기 다음에 버금가는 대량 학살자 칭호를 딴 황제입니다!!! 이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지었을 때 많은 사람을 생매장 시켰던 인물입니다!!! 만리장성을 시행했던 기술자 그리고 감독자 노동자들을 모두 생매장 시켰답니다!! 그리고 유생들과 그의 기록물들도 모두!!! 불태우고 했죠!!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알아볼건데요!!!! 이 분서갱유라는 것은 유생들이 자신만의 그릇된 사상을 퍼트렸고 진시황에게 "이 뜻은 안맞다 저 뜻은 안맞다" 라는 상소문을 자주 올렸다고 합니다 이에 극대노한 진시황은 그 유생들이 적었던 기록물을 모두 불태웠고 상소문을 올린 유생들을 모두 생매장 시켰답니다!!! 그 이후로 진시황은 암살에 매우 시달렸고 합니다!! 하물며 그를 죽이려고 하는 나라가 엄청나게 많았고 자객도 많았고 첩자도 많았다는 것이죠!!!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인물도 많았고 이를 각색해서 영화도 나왔답니다!!! 그 영화가 바로 영웅이죠!!!!!! 여러분들이 모르는 사실!!!! 진시황은 황제이기도 했지만 무술 유단자였다는 것....! 천하의 진나라 장군들도 진시황에게 졌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그만큼 무예에 뛰어난 인물입니다!! 무술 유단자에 소드 마스터 타이틀까지 있었던 황제입니다!! 암살에 시달리고 나서 배운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진시황은 황제가 되기 이전에 엄청난 무예의 달인이라는 칭호가 뒤따라 다녔던 인물이라는 사실!!! 진시황의 모든 초상화를 보면 항상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무예에 뛰어났고 검술에도 뛰어났다는 걸 볼 수 있죠 왜 그동안 자객들이 진시황을 못 죽였는지 왜 항상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답니다!!! 다른 황제들은 검은 그냥 장식물이고 상징이였지만 진시황은 그 반대였다는 사실....!! 당시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묘사입니다!!! 단이라는 사람이 진시황에게 항복 의사를 밝히고 항복의 의미에서 본인 나라의 지도를 갖다 바치는 의식 도중에 커다란 칼을 뽑아 들었지만 옷자락만 자르며 실패하게 되고 진시황은 재빠르게 칼을 뽑아 들며 그에게 맞섭니다 역부족이었던 단은 최후의 수단으로 비수를 날리게 되지만 비수 마저 피하게 됩니다 이를 본 단은 재빠르게 도망을 갔답니다!! 그의 적수가 안됐다는 것이었죠!!! 이쯤에서 되면 단이라는 사람이 개ㅈ밥인거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단이라는 사람도 어린 시절부터 검을 갖고 놀았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그도 검술에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진시황에게 적수가 못 되었죠 이에 극대노한 진시황은 연나라를 패망시키게 되었고 그 나라를 멸망 시켰답니다!!!! 그가 얼마나 강력하고 무서웠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ㅎㄷㄷ;; 한마디로 자객 조차 그의 적수가 못됩니다 그런 그에게도!!! 한가지 약점이 있었는데요!!! 바로!!!!!! 죽기를 싫었다는 사실!!!!!! 그가 오래 살지 못한 이유가 바로 수은 때문인데요!!! 이 수은이 그를 재빠르게 저 세상으로 보냈답니다!! 진시황은 죽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며 신하들에게 불로초라는 불로불사 약초를 캐오라고 명했습니다 그는 "불로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라" 라는 명령을 내렸는데요!! 이 뜻은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오면 죽이겠다는 뜻이죠!! 준나게 강한 황제에 대들기에는 너무나도 겁에 질렸고 반드시 이를 찾아야만 했답니다!! 그래서 불로초를 찾는 임무를 맡은 한 신하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불로초를 캐기에는 불가능했고 죽기 싫어했던 그는 기상한 기발로 황제를 속이게 됩니다!!! 바로!!! 수은인데요!!!! 그 시대에 수은을 생각해보면 신비로운 존재였답니다!!! 불로초를 찾는 임무를 맡은 신하는 죽기 싫어서 수은이라는 것을 떠올려 황제에게 바쳤는데 진시황은 이것을 보고 이게 자신을 영원히 살게 해줄 것이라 굳게 믿었답니다!!! 즉 신하는 "불로초 약초즙을 짜서 만들어 내었사옵이다" 라고 거짓말을 고한 것이죠!!! 그때는 수은이 몸에 해로운 것인지도 몰랐으니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진시황은 조금씩 조금씩 수은 중독에 시달려 몸이 쇠퇴해져 갔죠!!! 자신이 수은 중독에 됐다는 사실조차 모르면서도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쇠약해져 가면서 죽음을 인지했는데 이때 그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병사들을 똑같이 만들고 거대한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시황릉이였답니다!!!! 병사 하나 하나 다른 모습으로 빚었으며 색도 입혔다고 합니다!!!! 결국 진시황은 수은 중독에 시달리다가 B.C 210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위 사진이 바로 진시황이 묻혀져 있는 무덤인데요!!! 얼마나 큰지 실감이 될겁니다!! 그리고 지금 발굴된 진시황릉은 코딱지 부분만큼 발굴이 안되었다는 사실!!!!!! 한마디로 진짜 진시황이 있는 곳은 발굴을 못하고 있죠!!! 왜 지금까지 진시황릉을 발굴하지 못하느냐??? 첫 번째 이유는 진시황릉이 묻혔던 무덤에는 엄청난 양의 수은이 방출되고 있다는 사실...(지하에) 한마디로 그의 무덤엔 수은으로 가득하다는 것이죠!!! 사마천 사기에 등장하는 진시황릉 지하궁전 모습을 본따 만든것인데요!!! 실제로 진시황이 묻혀있던 지하궁전은 자신이 살았던 궁전처럼 지었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함정들과 강은 수은으로 되어있으며 수시로 수은이 흘러내린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한마디로 지하궁전 자체가 수은때문에 수시로 반짝반짝 빛난다는 거에용!!! 그래서 지금 진시황릉을 발굴하지 못하는 이유가 가장 첫째로 기술이고 수은을 막아줄 방호복의 문제입니다!!! 자칫 잘못 발굴했다간 그 지역이 수은으로 범벅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B.C 시대에 이런걸 만들었다는 자체가 하이테크입니다... 지금까지도 발굴을 못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리고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여기서!!!! 무덤 설계자와 무덤 감독자 무덤 건설자들도 마찬가지로 진시황과 함께 생매장을 당했다는 것...!!! 즉 진시황은 죽기 전에 "내가 죽으면 내 밑의 신하들과 군사들을 함께 묻혀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시황을 묻혀주러 갔던 사람들과 그 무덤 안에 있던 사람은 모두 다 그 안에 갇혀 수은 중독으로 같이 사망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무덤을 만들었던 사람이 자신의 무덤에 갇혀 죽은 꼴이죠.... 자!!! 이렇게 보면 엄청난 폭군인걸 이제 아시겠죠?! 진시황에 대한 역사를 알아보았으니 이제 전 20000~~~~~~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