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d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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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한 오해

1950년 10월 말. 한국전쟁에 중공군들이 개입했습니다.
한국전쟁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중공군 하면 연상되는것이 바로 '인해전술'.

실은 중공군이 처음 개입할당시와 이 초반 공세때문에 UN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당시
중공군의 병력 숫자는 UN군 보다 많지 않았다는게 사실입니다.

나중엔 중공군 병력도 상당히 증강되긴 하지만 그땐 UN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때가 아니다.
개떼처럼 돌격하는것 같긴 하다.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가 쓴 책 '중국이 본 한국전쟁'을 보면 당시 투입된 중공군은 20여만명.

보병은 박격포 몇문정도 보유한게 고작이고,
구경이 큰 야포는 노새가 끌고다니는 어처구니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몰골의 중공군을 본 북한군과 소련측 사람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저꼴로 전차, 야포, 공군으로 중무장한 미군과 UN군을 상대한다는거야?"
◆ 징과 나발을 불며 돌격하는 중공군

당시 한국군 + UN군 병력은 40만이 넘었고,
처음 개입한 중공군은 겨우 20여만명에 장비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군과 UN군은 속수무책 후퇴를 했을까?

이건 중공군입장에선 신화에 가까운 전공이지만,
미군 즉 미군 수뇌부에서 헛발질을 했기 때문입니다.

맥아더는 1950년 10월 24일 모든 군단과 사단에게 총진격하여 중국과의 국경선까지
진격하란 속도전 명령을 내리는데 이것이 부대간 경쟁이 되어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고싶은 심리와 맞물려서 부대간 간격 유지가 엉망이 되든 말든,
서로 먼저 국경지대에 도달하기 위해 마구 마구 부대간 간격이 벌어진 전선이 되어버리고,
부대와 부대 사이 엄청나게 큰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이건 되려 중공군에게 아주 좋은 상황이 되었다.
결국 부대와 부대 간격이 크게 벌어져서 그 사이로 중공군이 돌파해버렸는데도
UN군은 모르는 지경이었습니다.
◆ 중공군이 수류탄을 던져대자 기겁하며 달아나는 UN군들

사실 '인해전술'이란 말도 이때 없었습니다. 그럼 이말이 어떻게 생겨난걸까?

당시 한국군 정보장교 김재영 중위(한국전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무 근무)가
중공군 개입초기에 중공군의 대령급인 소(邵)라는 자를 신문했는데
이때 소(邵)는 중공군의 전술은 월(越)국의 명장 범여를
손자가 격파한 '휴이대첩전(携李大捷戰)의 전술'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미군신문관이 김중위에게 현대 군사용어로
이 전술을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묻기에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고 답한 것이 오늘날의 관용어가 된 것이다.

중공군의 전술은 무대포 인해전술이 아니라, 사실은 손자병법이었던 것이다.

밤에는 징과,피리로 시끄럽게 떠들며 진격하고,
낮에는 되도록 많은 깃발을 흔들며 진격하라

이것도 손자병법에 나오는 병법중 하나입니다.

중공군은 맥아더의 잘못된 전술로 부대간의 간격이 넓게 퍼져있는 그 공간으로 들어와서
UN군의 후방에 위치하거나, 혹은 미군과 전투지경선을 이루는 한국군쪽을 맹렬히 공격하여
한국군을 돌파, 미군의 후방으로 가기도 했다.

"약한 곳부터 집중 공격하라"

이것 역시 전술의 상식입니다.
중공군의 지휘관들은 한국군 사단장들이 겨우 20대 30대 신출내기 일본군 장교출신이란것도 알았고, 미군보다 훈련이나 장비가 떨어지는것도 알았다

중공군은 되도록이면 미군과의 교전을 회피하고 미군과 떨어져있는
한국군쪽을 집중 공격하여 돌파해버립니다.

이에 전선의 한축이 돌파당하면 후방 포위를 우려한 다른 부대들도 덩달아 후퇴할 수 밖에 없는것이고 , 이것이 결국 1.4후퇴라는 서울을 다시 뺏기게 될만큼 초반에 정신 없이 밀린 이유지, 그냥 아무 전술도 없이 중공군이 머리숫자로만 밀어부친게 아니라는 것이다.
◆ 한국전 당시 중공군의 보병전술 4선12파 전법

이것은 전선의 약한곳이나, 혹은 부대와 부대사이 전투지경선에 병력을 집중하여
일렬로 차륜식 돌격, 돌파하는 전술로 일단 돌파하면 후방포위를 염려한
상대방 부대들은 후퇴할수밖에 없다.

한국전 당시 중공군의 보병전술 '4선 12파 전술'이란?

통상 증강된 1개 보병연대에 돌파정면은 100~200m 부여한다.
1개 연대는 4개 대대(주 : 중공군은 삼각편제이나 주공연대에는 통상 1개 대대를 추가로 배속)를전후 4개 조로 분류하고 대대는 다시 3개 보병중대를 전후로 3개의 공격제대로 구분하며
소위 4선 12파의 공격대형을 취한다.

공격시기는 야음과 악천후를 이용하며 각 제대간의 시간차는
10~20분 간격으로 계속적인 공격을 실시한다.

공격시 지원화력으로는 박격포를 돌파정면에 집중, 짧은 시간에 집중사격을 하며
공격부대는 주공과 조공으로 구분, 상황에 따라 양공(陽攻)을 실시하여
적을 기만시키고 공격전에 심리전과 위계전술(僞計戰術)을 사용하여
적을 정신적으로 위축시킨다.

그런데 중공군의 이런 전술도 알고보면 충분히 막을 방법이 있습니다.

그 한가지 예가 바로 한국군6사단의 용문산 전투입니다.

용문산전투를 이야기 하자면 여러가지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요약하자면, 중공군이 '약하게'보고 집중 공략한곳(6사단 2연대3대대)이 예상외로 안뚫리자,
제풀에 지쳐서 퇴각하고 그 퇴각하는 중공군을 UN군과 6사단이 쫓아가서 괴멸시킨 전투이다.
정리하자면 인해전술이란 말은 사실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 단어이고,
중공군의 총병력이 한국군, UN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서도 아니며,
(초반엔 오히려 중공군 총병력이 적었다.) 중공군의 전술(손자병법도 응용한)그 전술이
약한곳에 몇배에 해당하는 병력을 집중하여 돌파하는 전술을 쓴것이며
약한곳에 배치된 부대 입장에서는 자기들보다 몇배에 해당하는
중공군이 차륜전으로 돌격해오자 쪽수로 밀어부친다는 인식이 생겨난것이다.
손자병법 제7군쟁편 : 중공군이 징, 꽹가리, 북, 깃발, 피리 등을 사용하는 이유

軍政(군정)에 曰 言不相聞故(왈 언불상문고)로 爲之金鼓(위지금고)하고 視不相見故(시불상견고)로 爲之旌旗(위지정기)니라 : 군정(兵書 이름)에서 말하기를, 말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기 때문에 징과 북을 사용하고, 신호가 서로 보이지 않으므로 깃발을 사용한다고 한다.

夫 金鼓旌旗者(부 금고정기자)는 所以一人之耳目也(소이일인지이목야)라 人旣專一(인기전일)이면 則勇者 不得獨進(즉용자 부득독진)하고 怯者 不得獨退(겁자 부득독퇴)하나니 此(차)는 用衆之法也(용중지법야)라 : 대체로 징, 북, 깃발 등은 사람들의 이목을 하나로 모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지면 용감한 자도 혼자만 나아갈 수는 없고, 비겁한 자도 혼자 물러설 수는 없으니, 이것이 병력 운용법이다.

故(고)로 夜戰(야전)에 多火鼓(다화고)하고 晝戰(주전)에 多旌旗(다정기)는 所以變人之耳目也(소이변인지이목야)라 : 그러나 야간전투에 불과 북소리를 많이 쓰고 주간전투에 깃발을 많이 쓰는 것은 적군의 귀와 눈을 현혹시키기 위함이다.

故(고)로 三軍(삼군)을 可奪氣(가탈기)며 將軍(장군)을 可奪心(가탈심)이니 : 그리고 적 부대는 가히 사기(기세)를 빼앗아야 하며, 적 장수는 가히 마음(자신감, 불안감)을 빼앗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군지휘관이 죄다 일본군출신
이쯤하면 일부러 밀린게 아닐까싶네요 ㄷ ㄷ ㄷ


도탁스 펌
6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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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 나라팔아먹고 625로 공세우고 대대손손 해쳐먹는..
70년전이나 지금이나 짱꼴라들은 우리나라에 해만 되는 존재 ᆢ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다
625전쟁때의 중공군,손자병법에 관한 이야기군요. 서울이 3일만에 함락된 것은 한국군의 병력이 모두 휴가 나간틈이었고 한국군에는 제대로 갖추어진 무기가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나라에 UN이 돕지 않았다면 전국이 공산당에 의해 함락되어 공산화 되었겠지요. 625가 일어나기 전 이승만대통령이 전국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분배하라고 하였기때문에 소작농을 하던 농민들이 개인의 소유재산이 생김으로 부를 조금씩 축적하게 되었고 그것을 맛본 이전의 소작농민들은 공산주의를 반대하게 되었지요. 당시에 전국에는 이미 공산주의로 가면 나라에서 배급도 받고 좋다며 많은 국민들이 공산주의에 물들어있었고 공산당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왠만하면 쉽게 공산주의로 넘어가게 되었을텐데 이승만대통령이 전국의 소작농들이 농사짓고있던 땅을 소작농에게 분배하게 하였기때문에 공산화가 되지 않았다고합니다. 지금 돌아보면 자유민주주의를 얼마나 어렵게 지켜왔는지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네요.^^
아‥열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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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경우가 아주 많긴함 ㅋㅋ)  임고 현역 때 티오가 엄청 줄어드는 바람에 도지역으로 응시해서 합격했고, 현직으로 몇 년 일하다가 가정 사정으로 인해 지역 이동을 해야 해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두 번째 임용을 봤고, 광역시에 합격했음.    물론 초등 임용이 다른 시험들에 비해 경쟁률이 낮긴 하지만, 교대 4학년, 재수생, n수생 까지 다 보는 시험이라 허수도 없는 편이고 두 번째 임용시험에서는 가산점 (임용 경력이 없는 사람만 받을 수 있는 가산점과 지역 가산점이 있음) 도 하나도 못 받았지만, 경쟁률이 높았던 광역시에 합격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큰 성취였음. 나 잘났다는게 아니라, 그만큼 뿌듯했다는 의미야 ..^^  공부에 왕도란 없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래도 아예 잘못된 방법으로 공부를 하고 있거나, 갈피를 못 잡아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써볼게.  <이 글은 읽으면 좋을 사람들> -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감이 안잡히는 사람 -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노력한 것에 비해 항상 시험 점수가 좋지 않은 사람 - 공부에 집중 하기가 힘든 사람  - 효율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  <본론 : 공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수업 (강의)를 집중해서 듣기   학교 수업이든, 인강이든 상관 없어. 수업을 최대한 집중해서 듣는 것이 모든 것의 바탕이야. 솔직히 최상위권 학생이나, 정말 정말 공부 머리가 좋은 소수의 사람들은 혼자서도 공부 할 수 있긴 함.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사 (강사)의 설명을 최대한 집중해서 듣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야. 수업 안들으면 혼자서 1.5배 이상으로 노력해야하니까 이왕 시간 쓰는거 집중해서 듣기 위해 노력하자!  2. 자신의 언어로 풀어서 완벽하게 이해하기.   열심히 들은 강의 내용을 나의 언어로 받아들여서 완전히 씹어먹을 수 있어야 함.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배운 내용을 직접 설명해보거나, 남에게 가르쳐보는거야. 사람을 상대로 하면 좋긴 하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마음속으로라도, 자기 스스로 설명해보면 좋음.  3. 이해한 내용을 보기 쉽게 깔끔히 정리하기.    아무리 좋은 옷이 많아도 옷장에 쑤셔박아 두거나 바닥에 뱀 허물 처럼 벗어두면 보기도 안좋고, 필요한 옷을 빨리 찾기도 힘들겠지? 학습 내용도 옷을 정리하는 것 처럼 보기 좋게 정리해두면 머리 속에서 함께 정리가 되고 기억도 오래 가며, 나중에 복습 효율도 엄청나게 올려줌.  4. 3번을 바탕으로 엑기스만 뽑아서 <단권화> 작업 하기    거창하게 '단권화' 라고 했지만,,, 그냥 자기가 정리해놓은 자료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어려운 것, 내가 가장 기억하기 어려운 것들을 모아서 한번 더 정리된 자료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돼. 사실 3번만 잘 해놓아도 되지만, 단권화까지 한다면 공부가 몇 배로 많이 되긴 해. (정리를 다시 한 번 더 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거나 오히려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면 개인 판단에 따라 생략해도 ㄱㅊ.) 5. 그날의 공부 내용을 머리 속으로 되내어보기    이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아. 이건 샤워하면서, 밥 먹으면서, 걸어다니면서, 틈만 나면 아웃풋 연습을 하는 거임. 지금까지의 과정이 인풋이었다면, 시험은 아웃풋이 필요하므로 일상 속에서 항상 아웃풋에 익숙해지게 해야해. 나 같은 경우에는 두 번째 임용 준비할 때 퇴근하면 밥 사먹고 도서관으로 직행해서 공부했었는데, 공부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샤워하면서 항상 그 날에 뭐 공부했는지를 쭉~ 생각해봤었어. 책의 목차처럼 큰 주제부터 하나 하나 떠올려보고, 디테일한 부분이 기억나지 않으면 씻고 나와서 다시 확인해보고 그랬음.  6. 각 잡고 백지 쓰기   공부한 내용을 모조리 백지에 적어보는거임. 이때 못 쓰는 내용은, 내가 공부했지만 내 머리에는 없는거야. ㅋㅋㅋ 백지 쓰기도 너무 많이 하면 시간 잡아먹고, 손도 엄청 아프기 때문에 개인 취향에 따라 키보드로 타이핑 하는 것도 좋음.  (토익 공부 같은 것은 굳이 백지 쓰기를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암기를 요하는 종류의 시험은 백지 쓰기 효과 진짜 좋음!)  7. 백지 쓰기에서 부족했던 내용을 보충하기   이 과정은 3,4를 잘 해놨다면 전혀 어렵지 않음. 아웃풋 결과를 보고, 부족했던 인풋을 다시 해주고 백지를 다시 채워넣는 과정에서 또 아웃풋 연습이 되는 것!  8. 위의 과정을 반복하며 인풋과 아웃풋의 밸런스 맞추기  양질의 인풋 + 익숙한 아웃풋 => 시험 합격, 고득점임!! 시험의 왕도는 없다지만 이건 뭐 공식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음!  9. 인풋과 아웃풋에 어느정도 자신이 생겼다면 문제 풀이 하기   문제 유형에 익숙해지는 연습, 자신의 레벨 확인을 할 수 있음. 하지만 중요한건 문제 풀이 자체가 아니라 그 전까지의 과정이 탄탄해야 한다는 것임.  10. 문제 풀며 일희일비 하지 말기   맞았다고 자만한다? 응 그 문제 실제 시험에 안나올 가능성이 더 높아~   틀렸다고 좌절한다? 틀린 김에 몰랐던걸 알아갈 기회가 생긴거야~     문제 푸는건 실전 감각 키우는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모의고사를 포함해서 모든 문제풀이는 공부라기보다는 트레이닝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돼! 11. 문제 풀이는 정~말 꼼꼼히 하기   문제를 많이 푸는 것 보다는, 풀이를 제대로 하는 것이 훨씬 도움 됨. 그냥 100문제 푸는 것 보다, 30문제를 풀더라도 꼼꼼히 풀이하면 시간도 더 오래 걸리고 확실히 공부가 되는거야. 맞았네~ 틀렸네~ 끝! 이렇게 넘어갈게 아니라 내가 왜 맞았는지, 왜 틀렸는지를 끈질기게 분석해야해. 1번에서 수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문제 풀이 만큼은 문제풀의 강의나 선생님 설명에 의지할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진돗개마냥 끝까지 물고 늘어지길 추천해. 내가 70%쯤 아는데 운 좋게 맞춘 문제도 있고, 90%를 알고도 결정적인 것 하나를 놓치는 바람에 틀린 문제가 있을거임.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니라 자기 자신이 1타 강사보다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거야. 풀이를 꼼꼼히 안 한다면 수박 겉핥기식 공부밖에 되지 않음을 명심하자.  <번외: 그 밖에 도움이 되는 마음가짐이나 팁> * 모르는 것은 꼭 짚고 넘어가자 - 나는 학창시절에도 따로 질문만 적어두는 메모지가 있었어. 공부 하다가, 수업을 듣다가, 모르는게 생기는 즉시 빨리 메모해두고 나중에 스스로 해결하거나, 그게 어려울 경우에는 내가 이해될 때 까지 질문 하고 도움을 구했음. '엥...? 이게 무슨 소리지?' 또는 '아, 이거 뭐였더라?' 하는게 있으면 꼭 적어두고 해결하자. 안적어두면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게 놓친 나의 빈틈은 나중에 실전에서 내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도 있다....ㅠ * 집중하기가 어렵다면 뽀모도로 공부법!! - 일정 시간동안 학습과 휴식을 번갈아서 하는 거야.   뽀모도로 검색하면 관련 어플 많이 뜨니까 아무거나 다운 받아서 쓰면 됨.    나는 시작이 엄청 어려운 스타일이고, 핸드폰, 인터넷 등 중독도 심한 편이라 끈기 있게 공부 하기 힘들었음. 그런데 뽀모도로를 알고나서부터는 훨씬 나아졌어! 집중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40분 공부, 10분 휴식 이렇게도 할 수 있는데 나는 그게 힘들어서 25분 빡세게 공부, 5분 맘대로 놀기 했음 ㅋㅋ 이렇게 하면 일단 타이머 울리면 공부 시작하고, 중간에 진짜 놀고싶다가도 아 .... 그래도 휴식 타임에 해야지 ㅠㅠ 쫌만 더 참자.... 이렇게 할 수 있었어. 25분이라는 시간도 생각보다 엄청 길기 때문에, 집중만 한다면 꽤나 많이 공부할 수 있었음!    가끔 삘 받아서 25분이 넘었는데도 흐름 끊고 싶지 않을 경우에는, 2번째 서클을 곧바로 이어서 하고 나중에 쉴 때 10분 쉬고 이런 식으로 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스터디 타이머 쓰면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던 시간은 알아도, 풀 집중한 시간은 알기가 어려운데 뽀모도로 타이머를 쓰면 하루에 몇 서클을 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학습 시간 파악하기에도 효과적이었어! 나같은 경우에는 하루에 9서클만 해도 진짜 힘들더라고 ㅠㅠ 225분 (22*9)이면 4시간도 안 한건데도 그만큼 풀 집중으로 공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음.... 그래도 효율이 진짜 짱 좋음!  * 독서를 취미로 해보자   인문학 서적 등 좋은 책들 읽는 것도 좋지만, 일단 자기가 가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서 읽어봐. 재미있는 소설이 얼~마나 많게요? ^^ 독서는 산책, 음악 감상 등과 함께 스트레스 해소에 엄청나게 효과가 좋은 활동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더라. 우리가 책을 멀리하는 이유는 책이 엄청 싫어서라기 보다는 책보다 재미있는 다른 것들이 더 많아서잖아? 핸드폰 사용 시간을 과감하게 줄인다면, 책도 엄청 재미있어져 ㅋㅋ 책을 읽으면 배경 지식도 많이 쌓이고, 문해력도 좋아지기 때문에 여러 모로 너무 좋다고 생각해. 실제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엄청 즐겼고, 고등학교 때도 야자시간에 책읽다가 엎드려서 자는 바람에 감독 선생님한테 책으로 맞아본 적도 있음...ㅎㅎ 그래서 그런지 국어는 공부를 해 본적이 없이 항상 1등급만 나왔음. 그리고 다른 과목도 모두 글을 해석하는 것 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독서는 최고의 공부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아.  * 삼성노트 등 자신에게 맞는 어플이나 전자기기 사용해서 공부하기    나는 여전히 활자는 종이로 봐야 최고야~~ 종이로 해야 공부지~~~하는 쪽에 더 가깝긴 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신기술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는 위의 공부법에서 3번 공부 내용 정리하기 할 때 내가 쓰는 갤럭시 폰에 기본으로 있는 노트 어플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해서 정리해두곤 했어. 이렇게 하면 나중에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도 바로 검색해서 찾아보기가 편하더라!  * 인터넷, 커뮤니티 등 줄이는 방법    헤비 더쿠 유저인 내가 활용하는 방법이야.... 인터넷을 아예 끊어내지 못하겠거든, 보는 게시판의 종류와 페이지 수를 정해두는 것이 도움이 돼. 예를 들어 스퀘어에는 하루 종~~일 엄청난 수의 글이 올라오지만 핫게에 올라가는 글은 그 중에서 일부잖아? 스퀘어를 계속 보고 있으면 끝이 없지만, 핫게에 글만 보겠다고 정해두면 훨씬 조절하기가 쉬움.    그리고, 무한 알고리즘의 덫에 빠지기 쉬운 유튜브의 경우! 나는 일단 영상을 바로 보지 않고 '나중에 볼 영상' 에 추가해뒀어. 그리고 내가 쉬는 시간이나 놀 때 보기도 했음. 그리고 영상 하나 볼 때 마다 스쿼트 20개 하기를 마음먹고 (학교나 밖에서는 불가능하겠지?ㅋㅋ) 진짜 그렇게 했음 ㅋㅋ 보고 싶은 영상 보면서 스쿼트 딱 20개만 하고, 그 다음 영상 볼 때도 다시 20개 했음. 영상 한 4~5개만 봐도 더 하기 싫어지더라 ^^  *눈 앞의 일에 집중하며 불안감이나 자괴감 떨치기    공부를 안해서 스트레스 받고, 오히려 공부 하면 괜찮아지는 느낌 받아본 적 있니? 공부가 드럽게 안되서 놀고 있으면 자괴감이 들어서 더 힘들고, 공부 안했으니까 불합격 할까봐 (시험 점수 안나올까봐) 불안하고, 불안해서 공부가 더 잘 안되고.... 이런 악순환의 굴레에서 헤매던 때가 있었어. 첫 임용 시험 때 이런 자괴감과 불안감이 너무 심했는데 이럴 때 답은 그냥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더라. 시험에서 떨어지는 것이 최악의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해. '아.... 조금만 더 했으면 됐을 것 같은데....ㅠ' 이런 상태가 최악이지 않을까?   두 번째 임용 시험 때는 퇴근 후 공부하며 절대적인 학습 시간도 부족했고, 가산점까지 받지 못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첫 번째 임용 준비할 때 보다 심적으로 힘든 것이 없어서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 다들 공부하며 멘탈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면, 다른건 다 잊고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공부를 시작하자! 억지로라도 시작하면 오히려 훨씬 편해진다는 것을 알게 될거야. 최대한 짧은 시간에 수험 생활 끝장낸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나중에 어떤 결과가 있든 시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거야.    가끔은 하루 종일 놀거나 해도 괜찮아! 그 뒤까지 자괴감에 괴로워하며 시간 날릴 바에야, 공부도 확실히, 쉬거나 노는 것도 확실히 하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공부했으면 좋겠어.  <맺는 말>   와.... 이렇게 길어질줄은 진짜 몰랐네. 물론 배우는 즐거움이 있기야 하겠지만, 시험을 준비하고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나 포함 ㅋㅋ) 아마 있다면... 그 분들은 학자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까?    누구에게나 공부가 지루하고 어려우며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경험을 바탕으로 위의 방법들을 실천해본 결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것 대비 만족할만한 결과가 있었던 것 같아.    내 글이 공부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모두들 미련 없이 노력하고, 원하는 결과 얻기를 바랄게!  출처
해부 극장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 22학번, 이들은 생각했다. 마침 대학을 창설하고 의대를 활성화시키려면 해부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실습이 많이 필요하다. 즉, 해부를 할 특별한 교실이 필요하다는 결론. 이때가 1222년이며, 파도바 대학은 (최초는 아니지만) 정말 초창기 세워진 대학다운 대학이었다. 그래서 사진과 같은 일종의 “극장”이 생겨난다. 지금도 수술실을 operating theater라 부를 때가 있는데(물론 operating room이 더 일반적일 것이다), 극장이라는 명사가 붙는 까닭이 있다. 다만 “교실”이 이런 극장화된 것은 300여년이 지난 후인 1593년부터이다. 어째서 300년씩이나? 기록에 따르면 전설의 22학번들도 분명 해부를 실습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해부용 시체를 구하기가 녹록지 않았고, (불법까진 아니었지만) 시각도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해부 극장(!)은 임시 구조물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이게 흥행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입장료 수입도 있을 테고, 일단 대중이 이런 쇼를 좋아했다. 천주교 입장에서도 하느님의 신비를 직접 보여주기에 해부학 쇼만큼 좋은 것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교육적인 목적이 강화됐기 때문에 해부 실습은 공개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다. 이른바 파도바 대학교의 해부실(Teatro Anatomico, 참조 2)이 그 시작입니다. 사진은 7월 말 베네치아의 프라다 재단에서 촬영한 것으로서, 프라다 재단의 전시회 이름 자체가 HUMAN BRAINS(참조 1)이다. 이 전시회가 일반적인 미술관의 일반적인 전시회가 아님부터 알려야겠는데, 인간의 두뇌 및 정신과 관련된 자료를 시대별로 전시하고 관련된 영상을 상영하는 형식이다. 미술관이 통상적인 개념의 미술만을 전시할 이유가 없다는 고민이 담겨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두 사진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 사진은 200여명이 관람 가능한 6층짜리 파도바 대학교 의대의 원형 해부 극장 모형이다. 둘로 갈라진 객석을 합치면 완성되는 형태인데, 1층에는 학장과 시 고위관계자들(한 번은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도 직접 구경했다고 한다, 참조 3), 귀족들이 착석 가능했고, 학생들은 2층부터 앉을 수 있었다. 아마 고학번부터 앉았을 것이다. 그런데 두세 층이면 관계자 모두가 앉을 수 있잖았을까? 나머지는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이탈리아의 고질적인 경쟁이 낳은 또 다른 해부실이랄 수 있을 텐데, 파도바 대학이 만들었으니, 파도바 대학을 배출한 볼로냐 대학이 빠질 수 없다 이겁니다. 이 사각형의 해부실이 바로 볼로냐 대학의 해부실이었다. 1637년에 세워졌으며, 차별화를 위해 파도바 대학교와는 달리 사각형으로 지어졌고, 여러 유명인사들(갈레아누스, 히포크라테스 등등)의 흉상과 함께 그유명한 Memento Mori라는 글귀가 쓰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부 극장 시설이 이탈리아에만 그치지 않았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방식 쇼로 둔갑한 곳은 아무래도 네덜란드일 테고(참조 4), 네덜란드에서는 흥을 돋구기 위해 해부 실습을 할 때, 라이브 콘서트도 개최됐다(참조 3). 파리와 런던, 웁살라, 마드리드, 베를린은 당연하거니와 미국에도 퍼졌다(참조 5). 이런 식으로 "수술 극장"이 있었다는 사실. 출처는 참조 7번 기사. 위에서 언급했지만 당연하게도 이 해부 극장은 수술 극장으로도 이어졌는데, 해부에서 수술로의 전환은 해부 극장 자체의 쇠퇴로도 이어진다. 이제 대중용 극장이 아닌, 실무 외과의사의 프리젠테이션(참조 6) 및 교육의 의미만 남는 것이다. 19세기 들어가면 해부 말고도 많은 볼거리는 물론 미디어가 출연한다. 대중이 굳이 시체만 보러갈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 이름, ‘극장’만은 수술실 명칭에 남았다. 20세기 초까지는 그런 극장으로서의 의미가 있었으나 점차로 수술 장면은 그냥 사진과 영상 기록만 남기고, 위생상 이유와 함께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교육과 해부학 실습은 별도의 방에서 이뤄지는 시대가 됐다(참조 7). 한국의 경우는? 예전 사진들을 보면 수술 극장이었던 형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연세대 의학박물관(동은의학박물관)에는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 주말 특집이었습니다. ---------- 참조 1. HUMAN BRAINS : https://www.fondazioneprada.org/project/human-brains-it-begins-with-an-idea/ 2. https://www.unipd.it/teatro-anatomico 3. 1968년 미국 국립 의학도서관의 논문을 보시라. Old anatomical theatres and what took place therein. :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1033863/ 4. 해부학의 라이벌, 빌도와 라위스(2019년 8월 25일): https://www.vingle.net/posts/2661779 5. 토마스 제퍼슨이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 계획을 세울 때, 해부 실습 극장 도안도 그렸었다. Drawing 4를 보시라. Thomas Jefferson's Plan for the University of Virginia: Lessons from the Lawn (Teaching with Historic Places) Drawing of the University of Virginia with several buildings facing open square. https://www.nps.gov/articles/thomas-jefferson-s-plan-for-the-university-of-virginia-lessons-from-the-lawn-teaching-with-historic-places.htm 6. 몇 번 언급한바 있는 드라마, The Knick의 의사들이 수술하기에 앞서, 수술극장에서 장황하게, 수술을 어떻게 하겠노라 강연하는 장면이 나온다. The Knick (2014) 시즌 1(2014년 10월 20일): https://link.medium.com/O7ybA0Rx24 The Knick (2015) 시즌 2(2016년 1월 2일): https://medium.com/@minbok/the-knick-2015-%EC%8B%9C%EC%A6%8C-2-3064a20b7bdb 7. Inside the Operating Theater: Early Surgery as Spectacle(2015년 12월 9일): https://daily.jstor.org/inside-the-operating-theater-surgery-as-spectacle/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완벽한 거짓이다.
모국어를 빼앗긴 피점령국의 슬픔과 고통을 아이의 눈으로 생생하게 그려낸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이야기는 거짓입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국민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우리말을 빼앗긴 아픈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큰 감동을 주었지요.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날조된 이야기입니다. 먼저 간단한 줄거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소년 프란츠는 들판에서 노는 것이 더 신나 맨날 학교를 빠지던 아싸(아웃사이더) 어린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만에 뭔 바람이 들었는지 학교에 갔는데 엄숙한 분위기에 놀랍니다. 웬일로 선생님은 정장 차림이었고, 교실 뒷자리에는 많은 마을 사람들이 앉아 있었거든요. 선생님은 부드럽고 무거운 목소리로 오늘 수업이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이라고 말합니다.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패해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북부 독일왕국)에 빼앗김에 따라 프랑스어 수업을 금지당하고 대신 독일어만 가르치게 되었다는 겁니다. 프란츠는 그동안 프랑스어 공부에 게으름을 피운 자신을 마음 속으로 자책합니다. 선생님이 “국어를 굳건히 지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는 순간, 학교의 괘종시계는 12시를 알리고 프로이센 병사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쓰고는 수업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불량 소년 프란츠는 크게 뉘우치며 조국을 잃은 슬픔 속에서 프랑스어를 지키겠노라 맹세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 실상은 180도 달랐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낀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지역에는 중세 내내 게르만 소국들이 있었습니 다. 이후 석탄과 철광 등 풍부한 지하자원이 묻힌 알짜배기 땅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프로이센(북부 독일)과 프랑스 간 영역 다툼 끝에 주민 다수가 게르만족임에도 파워가 셌던 프랑스 땅으로 넘어갔지요. 지금도 프랑스 철광석의 90%는 이 지역에서 채굴되고 있어요.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해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임을 선포하면서, 그간 프랑스에 빼앗겼던 알자스-로렌 지역이 다시 독일 땅이 됩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프랑스 지배를 벗어나 게르만 동족 품에 돌아가 독일어를 배우게 되어 환호했을 겁니다. 소설 속 아이 이름도 프란츠(Franz), 즉 독일식 이름이에요. 그러니 알고 보면 불량 소년이라서 학교에 안 간 것이 아니라 프랑스어 수업이 싫어서 안 들어간 애국 독일 소년이라 마지막 수업 때 드디어 학교에 간 거지요.  한편 제1차 세계대전 때는 48년 만에 다시 프랑스가 이 지역을 점령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는 다시 독일이 자기네 땅으로 편입했지만, 2차대전 후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어 철저히 독일어 공부를 금지합니다. 하지만 해당 주민들의 독일어 교육 요구가 끊임없이 일어나 1982년에야 독일어 공부(소위 ‘알자스어’라고 부름)를 허용한 상태입니다. 일본의 우리말 금지 정책보다 더 지독했던 거예요. 두 차례 세계대전의 주범으로 전 유럽인들에게 찍혀 찍소리 못하고 있지만, 독일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뭐라고 생각했을까요? 이 소설이 출간된 시기는 보불전쟁에서 패한 지 2년 후인 1873년이니, 알퐁스 도데가 프랑스 국민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독일 품으로 되돌아간 알자스-로렌 지방 사람들이 지금도 프랑스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자기네들끼리 우쭈쭈한 겁니다. 이를 우리나라에 대입해보면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여 조선 땅을 떠난 뒤, 한 일본 소설가가 조선인들이 일본을 그리워하며 일본말을 소중히 지키고 있을 거라고 판타지 소설을 쓴 것인데, 이런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학교에서 지금껏 감동 소설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출처.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우리말 우리글 편-
왠지 뭉클해지는 역사의 한 순간들
#1 초상화를 완성하는 동안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빅토리아 시대 부부, 1890년대 #2 베오그라드 근처 최전선까지 자신을 방문하러 온 아버지와 함께 잠든 세르비아 군인, 1914/1915 #3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아침, 동독 국경 수비대가 베를린 장벽 너머로 꽃을 건네고 있다, 1989 #4 도쿄의 국수 배달부, 1935년 #5 아메리카 원주민 어머니와 그녀의 아이, 1900년대 #6 제2차 세계 대전 중 부다페스트. 유대인들은ㄴ 도나우강변으로 끌려가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에 따른 후 총살 당했다. 지금은 60켤레의 철제 신발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강둑을 따라 늘어서 있다. Can Togay와 Gyula Pauer의 '다뉴브 산책로의 신발'. #7 1967년 7월 17일, 실수로 고압선을 만져 4000볼트의 전기에 감전돼 심정지가 온 동료에게 인공호흡을 하는 전기공. 동료의 빠른 응급처치 덕분에 Champion은 사고에서 살아남았고 다음 주에도 출근했다고 한다. #8 2차 세계대전 중 부상 당한 개를 태운 동물 구급차 #9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시기, 캘리포니아의 마스크를 쓴 사람들, 1918년 #10 아버지, 아들,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뉴기니, 1970 #11 도르레를 이용해 강을 건너 학교에 가는 아이들. 모데나, 이탈리아, 1959년 #12 두 다리가 잘린 장애인 철도 신호수 제임스 와이드(James Wide)가 애완동물이자 조수인 잭 개코원숭이와 함께 일하는 모습, 케이프 타운, 1880년대 James Wide는 1881년에 차크마 개코원숭이를 구입하여 휠체어를 밀고 감독 하에 철도 신호를 작동하도록 훈련했다. 개코원숭이는 하루 20센트, 매주 맥주 반 병을 받았고, 철도 회사에서 9년 동안 일하면서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3 노예 남성이 3년간 다리에 착용하고 있던 사슬을 제거하는 영국 선원 이 노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왕립 해군이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만 해안에서 노예 무역 기지를 탈출했다.⁣(1907) #14 1902년 프랑스의 나이프 그라인더, 그들은 허리를 보호하기 위해 누워서 일했고 온기를 위해 개를 다리에 앉혔다. #15 연구원이 한 번에 최대 8권의 책을 작업/읽을 수 있게 해주는 18세기 장치 #16 9/11 테러, 81층에서 걸어 내려가 1층에 막 도달한 순간 무너져내린 세계무역센터의 먼지 구름을 뒤집어쓴 여인 먼지의 여인 Marcy Borders는 2015년 8월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암이 그 날 흡입한 먼지 때문에 악화되었다고 생각했다. 9/11 피해자 보상 기금과 세계 무역 센터 건강 프로그램은 지난 18년 동안 2,000명 이상이 그날의 사고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17 2001년 9·11테러를 부시 대통령이 처음 알게 된 순간 #18 독일 베를린, 1985-2018 #19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한 10년 후 찍은 필리핀계 미국인 가족 사진, 1912 #20 2800년 된 키스 (출처) 먹먹하기도, 웃음이 지어지기도, 또 괜스레 뭉클해지기도 하는 역사적 순간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