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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금 횡령한 공무원 최후.jpg


여기 홍순언이라는 조선시대 역관이 있음
(*역관이란? 통역 같은 역학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직)

중국 퉁저우(베이징 근처인가 봄 안중요하니까 넘어가자)기생집에서 놀다가 어떤 여자를 만남
홍순언은 기녀가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의아해하며 이유를 물었다고 함(우리는 백의민족이지만 중국에서는 흰색을 죽음의 색으로 꺼려서 장례때만 입는 걸로 알아.. 아님 말고ㅋ)

여자 "부모가 객사하여 장례 비용을 구해야하는데 돈이 없어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다"
헉 그럴수가...안되겠다 내 300금을 주겠소

홍순언이 건넨 300금으로 여자는 무사히 부모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음
....여기까지 보면 존나 아름다운 얘기지만
이 300금이 공금이었다는 문제만 빼면 완벽했을거임
참고로 당시 300금이면 쌀 60섬, 그러니까 쌀 8,640kg 어치였음.
여자가 불쌍하기로서니 공금에서 쌀 8톤어치 살 수 있는 돈을 빼돌렸다...?
완전 도라이죠
큰 금액을 삥땅친 죄로 홍순언은 옥에 갇힘
당연함.
그리고 이 시대의 왕=선조
조선의 왕들은 조선 건국을 한 태조 이후부터 계속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일이 있었음

바로 종계변무 였음
종계변무
종가의 혈통에 관한 억울함을 사리를 따져 밝혀냄
지들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나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이지, 남의 나라 역사 왜곡에도 도가 튼 건 아주 조상때부터 내려온 전통인지 짱깨들 책이었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조를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한 문제를 수정해줄 것을 1394년(조선 개국)부터 1588년(선조 시절)까지 자그마치 2백 년 동안 계속해오고 있었음.
야 ㅅㅂ 진짜 도저히 안되겠다
이새끼들 바꿔준다고 2백년간 아가리만 털고
이제는 진짜 고쳐야겠음
역관들 니네 중에 누가 가라
누가 갈래?
아 참고로 이번에 가서도 못 고쳐오면 모가지 날아간다


;;;;;;저번에 공금 횡령해서 옥에 갇힌 홍순언을
사면의 대가로 보내는 것이 어떠할까요


그렇게 홍순언은 중국으로 가게 됨
또 중국 퉁저우로 가게 되는데 퉁저우에 도착하자마자
으리으리한 잔치상이 차려지고
머 하여간 분위기 장난아님
근데 준비하던 사람들이
홍순언 님 언제 오냐고 묻는거임...?

게다가 명나라 고위 관료인 석성이 홍순언을 마중나옴

게다가 갑자기 홍순언에게로
뛰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석성의 아내인 류씨였음

헉쉬;; 님은 누구신데 저한테 절을 하시죠
은인께선 저를 오래되어 잊으셨습니까?

하며 울면서 젊을 적 홍순언이 건넨 300금을 받은 후
기생집을 나와 석성의 후처로 들어가게 된 얘기를 했음
일이 잘풀릴 운명이었는지
종계변무의 담당 부서였던 예부에서도 높은 관료가
바로 석성이었음;

그길로 바로 종계변무는 해결됨....ㅋ
야 장하다 홍순언
내 그대를 종2품 우림위장에 앉히겠노라
아니 전하;;
아무리 장해도 그렇지 역관은 종3품까지밖에
올라갈 수가 없는데요?

어 아냐 내맘대로 할거야
2백년간 골머리 앓은거 해결해 줬는데
뭘 못주겠냐

이렇게 홍순언이 선조의 신임을 얻고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터짐


야 나 중국 요동쪽으로 좀 도망가야겠다;;
홍순언 자네가 가서 나 좀 받아달라고 말 좀 잘해보게

그렇게 홍순언은 또 오랜만에 명나라로 가게 됨
명나라 황제에게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서 유린하고 있으니 지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함

어쩌지ㅠ 저렇게 단호한데 어찌 설득한단 말이냐
님 걱정 ㄴㄴ
나 지금 국방부 장관임ㅋㅋ
내가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음
운 무슨 일이냐고


(명나라 황제임)
그래 내가 석성에게 듣자하니 지원군은 보내주겠음
근데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건 안되지;
선조 요동으로 오는건 반대임

이렇게 지원군도 잘 받아내서 돌아오게 됨.
홍순언 운 죽인다...🤔
홍순언은 임진왜란 내내 전장에서 통역을 하다가
68세의 나이로 죽게됨
선조는 그를 종1품으로 올리고 당릉군으로 봉군해주기까지 함...
홍순언의 부고를 들은 석성도 명나라 황제에게
그의 죽음을 고하고 관직을 요청함
(대체 왜요)

안줄줄 알았는데 명나라 황제는
명나라 정3품 관직을 하사함

.....로 얘기가 끝났다면 좋았겠지?
명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을때
이미 명나라는 망조가 들었었음;;
그래서 안보낼라고 했는데 석성이 요청해서 보내준거
야, 임진왜란 7년동안 엄청난 병력과 전쟁비용을 들여서 우리나라 지금 망하게 생겼다;
니가 파병하자고 했지?
너 관직 내놔 그리고 너 참수시킬거임ㅇㅇ

ㅠ...
모 당연한건지도 모르지...
여하튼...
석성의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은 석성이 죽은 후에 계모인 류씨 부인(그 기생집에서 돈 준 그 사람임...)을 모시고 조선으로 망명해서 해주 석씨와 성주 석씨로 분적하고 뿌리를 내려 살고 있다고 해
공금을 횡령한 홍순언...
그러나 남을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횡령을 해서인지(?)
본인은 일 잘 풀리고 서얼로서는 받지도 못할
파격적인 관직을 받았음
(근데 선조가 전쟁 공신으로는 인정 안했대...왜일까)

물론..홍순언에 대한 고마움을 너무 극적으로 표현한
석성은 죽었지만 말이야...

교훈: 공금 횡령하지 말자
개인적인 감정을 공적인 일에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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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진짜 무슨일 ㅎㅎ 공금이었긴 하지만 진짜 좋은 마음으로 돈만 준게 맞나보네요 그러니 남편까지 저렇게 은인으로 모시지… 기생에게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마음이 많이 여린 사람이었나봐요 그래도 공금에 손대면 안되지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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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네요. 대한독립만세! 외치고 시작합니다. #36 1917년 전기 충전 자동차 #37 히로시마 원폭 진원지에서 1,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망한 3세 소년의 세발자전거, 1945 #38 1968년 경마장에서 영국 여왕과 남편 #39 부모와 함께 있는 2살짜리 엘비스 프레슬리, 1937 #40 1945년 5월 베를린 전투 중 베를린의 폐허를 걷는 여성 #41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균형을 잡는 곡예사, 1934 #42 탈락된 에펠탑 디자인들 #43 1945년 12월 21일 주인이 죽은 날 조지 S. 패튼 장군의 애완견 #44 1983년 이탈리아 교도소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 남자 메흐메트 아그카와 이야기를 나누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45 1910년, 미국에서는 아이를 소포로 부치려는 부모들이 많았다. 1913년에 도입됨 사진은 오하이오의 Jesse와 Mathilda의 8개월 된 아들 James. 제임스는 소포를 통해 할머니에게 보내졌다. 철도 티켓보다 저렴한 15c만 들이면 됐던 것. 보험은 50달러였다. 그리고 1920년부터 우체국은 더이상 어린이를 배달하지 않기로 했다. #46 1948년 "어린이 4명 팝니다." 1948년 8월 5일 인디애나 주 발파라이소의 The Vidette-Messenger에 실린 사진. 임신한 엄마가 아이들을 팔려고 내놓은 후 부끄러워 사진 작가에게 얼굴을 숨길 때 아이들은 포즈를 취하며 약간 혼란스러워 보인다. "시카고의 어느 집 마당에 있는 커다란 'For Sale' 표지판은 아파트에서 쫓겨나는 Ray Chalifoux 부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댈 곳이 없는 무직 석탄 트럭 운전사와 그의 아내는 네 자녀를 팔기로 결정합니다. Lucille Chalifoux 부인은 아이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동안 카메라 위에서 고개를 돌립니다. 맨 위 계단에는 Lana(6세)와 Rae(5세)가 있습니다. 아래에는 Milton(4세)과 Sue Ellen(2세)이 있습니다. 가족들은 어머니가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돈을 받았다고 비난했으며, 이는 이야기의 일부였을 수도 있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자녀를 파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년 만에 모든 어린이 사진과 당시 그녀가 안고 있던 아기가 다른 집에 팔렸습니다." #47 Moko 얼굴 문신이 있는 미라 머리(Mokomokai) 미라를 만들기 위해 뇌와 눈을 제거하고 두개골의 모든 구멍을 아마 섬유와 잇몸으로 막았다. 그런 다음 머리를 오븐에서 찐 후 불에 태우고 며칠 동안 햇볕에 둔다. 그 후 머리는 상어 오일로 수분을 공급한다. - 마오리 문화 - #48 런던의 '노커 업'(1929). 알람 시계가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막대기로 문과 창문을 두드려 클라이언트를 깨움으로써 돈을 벌었다. #49 1900년대 뉴욕시. (컬러링) #50 1936년에 만들어진 보조개 만드는 기계 (출처) 그러니까 이건 광복절 특집 시리즈였습니다. 전쟁 그만.
조선시대 산후우울증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비
1473년, 성종 재위기 당시 중전 한씨는 조선 최대 권세를 누리던 한명회의 딸이었음 왕위 계승 1순위가 아니었음에도 남편 성종이 왕이 된 까닭이 한명회의 사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 될 만큼.. 하지만 혼인 4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고 이에 후궁을 들이게 됨 후궁으로 간택된 것은 윤씨 규수인데, 보통 왕비가 자식이 없어 후사를 보기 위해 들이는 후궁의 경우 명문가에서 뽑는 경우가 많음에도 한미한 가문의 딸이었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려운 집안 형편에 직접 베를 짜 어머니를 봉양하던 효성 깊기로 유명한 규수 ㅇㅇ.. 아마 아들을 낳더라도 중전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한 게 아닌가 추측.. 다행히 숙의 윤씨는 금방 성종의 첫아이를 회임함 그런데 회임 중에 중전 한씨가 병에 걸려 죽고 윤씨는 곧 첫아들을 낳음 하지만 이 아이는 채 반년이 되지 않아 죽고 말았음 중전의 국상 중이고 당시 영아가 죽는 것은 흔한 일에 장례도 잘 치르지 않았으므로 이 왕자의 죽음도 비슷하게 치러졌음 윤씨는 첫 아이가 죽고 그 다음해에 두번째 임신을 함 그리고 임신 중에 중전으로 책봉됨(아마 앞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또 아들을 낳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을 듯) 당시 기록을 보면 윤씨는 너무나도 모범적인 중전감이었음 사치하지 않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남편의 사랑도 받고... 권문세가 출신에(무려 명나라 황실과 사돈간) 세조한테 '폭빈'이라고 까지 불리던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아낄 정도였음 중전이 된 윤씨는 아들을 낳게 되고, 그게 바로 훗날의 연산군임 적자로 태어난 윤씨의 아들은 바로 원자에 봉해짐 그런데 원자가 태어난 지 4개월 이후부터 이전과 다른 기록들이 보이기 시작함 후궁들을 지나치게 투기하기 시작해서 저주를 거는 방법의 책을 읽고 비상(독약)을 몰래 중궁전에 숨겨둠 이건 진짜 큰일이었기에(여차하면 왕이 암살 당할 수도 있으니까..) 조정에 논의가 되었고, 원자를 낳은지 6개월도 안되었던 상황에 윤씨는 1차로 중전 자리에서 쫓겨남 후궁인 빈의 첩지를 받고 별궁으로 보내짐 다행히 그 다음 해에 성종과 윤씨의 사이는 회복되어 윤씨는 자연스럽게 중전 자리에 복귀함 그리고 그 해 말 윤씨는 세번째 출산을 함(이 아이 또한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함) 이 이후 갑자기 다시 윤씨는 문제가 되는 행동들을 시작함 후궁과 침수 중인 왕의 방에 불쑥 쳐들어가거나, 늦잠을 자거나(왕과 함께 침수든 후에는 꼭 왕보다 먼저 일어나야 했는데 이걸 못했다고함 ㅋㅎ....) 왕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거나..(용렬한 무리라고 했다는데 실록은 원래 점잖게 돌려 쓰기도 하니 걍 찌질이새끼 이정도 했다고 생각하면 될 듯) 대비가 혼내면 째려보거나.. 참고로 보통 임금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낸 게 라스트팡처럼 사극에 자주 나오는데 이건 실록에 나오는 기록은 아님 결국 윤씨는 폐위되고, 우리가 아는대로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왕이 되어서 어머니의 한을 풀겠다며 미친 짓을 하게 됨.. 성종 조차도 실록에서 중전이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라고 할 만큼 윤씨는 중전이 된 이후 갑작스레 이상한 행동을 보임 무기력하거나, 기분 조절을 못하거나(위에는 분노를 표출한 것만 적었는데 갑자 기 기분이 막 좋거나 했던 기록도 있음) 하는 등의 행동들.. 그런데 이건 중전이 된 이후이기도 하지만, 아이를 낳은 뒤기도 함 <폐비 윤씨와 양극성 장애>라는 논문을 보면 윤씨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양극성 장애와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게 윤씨의 기질일 수도 있지만 산후에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산후우울증(산후 기분장애)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음 참고로 연산군도 양극성 장애로 보이는 징후들이 실록에 많이 나타난다고 함...이 경우 윤씨의 양극성 장애는 가족력일 수도 있음 출처
서울나들이 ㅡ 북촌한옥마을 둘러보기
서울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회색빛의 높은빌딩숲. 사람들로 빼곡한 출퇴근지하철. 매연.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등등 숨가쁘게 발전하고 개발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런데 서울에 600년의 세월을 느낄수 있는 아직도 사람 살아가는 장소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북촌한옥마을이라는 곳입니다. 누군가들에게는 삶의 장소이고 누군가들에게는 여행지가 되는 북촌한옥마을.... 부산의 감천문화마을 통영의 동피랑 처럼 서울의 문화관광컨텐츠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여행의 목적지쯤으로 여기고 방문하는 곳이지만 삶의 공간이기에 지켜줘야할 에행객 에티켓도 있죠. 1.소곤소곤대화하기 2.금연 3.쓰레기버리지 않기 4.집안을 몰래 촬영하지 않기 5.집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않기 6.전화기는 진동으로 7.노상방뇨금지 8.불법주차 하지 않기 9.확성기 사용하지 않기 이고도 차츰 옛것과 현대의 감각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듯합니다. 북촌 한옥마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재동, 삼청동 일대의 한옥이 모여 있는 곳. 경복궁과 창덕궁, 금원(비원) 사이 북악산기슭에 있는 한옥 보존지구로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으로 북촌이라고도 한다. 북촌은 고관대작들과 왕족, 사대부들이 모여서 거주해온 고급 살림집터로 한옥은 모두 조선시대의 기와집이다. 원래 이 지역에는 솟을대문이 있는 집 몇 채와 30여 호의 한옥만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말부터 한옥이 많이 지어졌고, 1992년 가회동한옥보존지구에서 해제되고, 1994년 고도제한이 풀리면서 일반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총 2,297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 가운데 1,408동이 한옥이고 나머지는 일반 건물이다. 북촌 거리에는 북촌양반생활문화전시관과 북촌 한옥촌 상징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옛 선조의 생활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가회동 전통 마을축제가 열린다. 주변에 경복궁·창덕궁·덕수궁·금원·삼청공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
서울나들이 ㅡ 경복궁에서
#서울나들이 #경복궁 오랫만의 서울나들이 다녀왔네요. 서울구경차 다녀온건 아니구요, 서울에 업무차 다녀오면서 잠시 짬을 내어 경복궁엘 들렸네요. 보통 사적지들은 월요일엔 휴관하는 곳이 많은데 경복궁은 월요일에도 입장이 가능하더군요. 경복궁에 가보니 의외로 아주많은 외국인들이 한복입고 다니는 모습을 볼수가 있더군요. 아마도 여행사측에서 제공하는 한복입기체험이 아닐까 싶더군요. 우리도 여행사통해서 외국여행가면 해보는것처럼 우리나리여해온 외국관광객들도 마찬가지 일듯하네요. 개설 사적 제117호.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리었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연생전(延生殿) 3칸, 경성전(慶成殿) 3칸, 왕의 평상시 집무처인 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簡儀臺)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강녕전 외에 교태전(交泰殿)·연생전·흠경각·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며 만류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 경복궁에서 단종이 쫓겨난 일이 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정전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에 이어 사약을 받은 일 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해군도 한때 경복궁성을 수축케 하고 중건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전각은 융문당(隆文堂)을 포함하여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含元殿)·만경전(萬慶殿)·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인(日人)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가, 1971년에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지어진 목조기와건물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박물관이, 1986년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이 건물로 이건되었다. 구 총독부청사는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 원래 있던 흥례문 권역이 2001년 10월 복원·낙성되었다. 한편, 일제에 의해 건물이 훼철되는 피해를 입은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내용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建春)·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萬春殿)·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서쪽에 함광각(含光閣)·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흥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廡)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밖에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며, 복원된 건물은 강녕전·자선당·태원전·광화문 등이다. 근정전(국보 제223호)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근정문(보물 제812호)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보물 제809호)은 침전건물의 하나인데, 이 건물에는 후원의 담장과 굴뚝에 묘사된 십장생(十長生)무늬가 특히 주목된다(경복궁자경전십장생굴뚝, 보물 제810호). 사정전 북쪽에 있는 아미산은 여러 단의 화계(花階)와 그 사이의 나무·괴석 등이 눈길을 끌며 전체적으로 사철의 변화에 따른 조화를 보여 주는 한국식 정원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도 봉황·귀면·당초문 등을 새긴 육각 화문(花文) 장식의 굴뚝(경복궁아미산의굴뚝, 보물 제811호)이 있다. 이밖에 18세기에 만든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기기인 풍기대(風旗臺)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보물 제847호).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경천사십층석탑을 비롯한 국보·보물로 지정된 석조물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용산에 새로 지어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대부분 옮겨져서 현재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 일부만 남아 있다. 특징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의의와 평가 경복궁은 비록 궁내의 건물들 대부분이 없어져서 근정전과 경회루를 제외한 많은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창건 때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 조선왕조 정궁의 면모를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왠지 뭉클해지는 역사의 한 순간들 #2
#21 1915년 1차 세계 대전 중 구조견에게서 붕대를 꺼내는 영국 군인 #22 동베를린에 사는 조부모에게 아이들을 보여주는 서베를린 주민들, 1961년 #23 휴대용 레모네이드 디스펜서를 사용하여 레모네이드를 파는 베를린 소년, 1931. #24 바게트를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소년들, 프랑스 1950 #25 전투의 충격으로 울고 있는 독일군의 16세 대공군인 Hans-Georg Henke. 그는 1945년 독일 헤센에서 미 9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26 1917년 11월 2차 파스첸달 전투에서 담배를 피우는 캐나다와 독일 군인 #27 베트남전의 군인 헬멧에 쓰여진 낙서, 1967- "전쟁은 좋은 사업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투자하십시오" #28 마치 합법적인 것처럼 #29 담배 피는 수녀들, 영국, 1960년대 #30 Rysstad 마을, 노르웨이, 1888 - 2013 #31 자유의 여신상 - 프랑스 파리 - 1886(미국으로 운송되기 전) #32 남북 전쟁 중 게티스버그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왼쪽: 앨런 핑커튼, 오른쪽: 존 매클레넌드 장군. 1863. (채색) #33 전쟁으로 폐허가 된 쾰른에 전재산을 짊어진 채 홀로 앉은 독일 여성, 1945년 #34 투탕카멘 왕의 3,300년 된 샌들 #35 나키모프 해군 학교에서 4명의 생도에게 경례를 받고 있는 소련 참전용사 아나톨리 골롬비예프스키(2차 세계 대전 중 노보로시스크 전투에서 두 다리를 잃음) (출처) 전쟁이 남긴 상흔이란. 이게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너무 무섭습니다.
영화배우 캐스팅에 관련된 몇가지 뒷이야기들
과속 스캔들 (2008) 차태현이 맡았던 배역은 먼저 임창정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임창정이 제의를 거절했고, 그 자리에 들어온 차태현. 영화는 대박이 났죠. 차태현 역시 굉장히 좋았지만, 임창정이 대신 연기를 했더라면 또 새로운 느낌이 들었을 것 같네요. 임창정 역시 극중 차태현의 역할과 같은 코믹한 연기를 많이 해본 경험이 있고, 어떻게 보면 차태현보다 더욱 내공이 쌓여있는 배우라 상상만 해도 굉장히 재밌네요. 올드보이 (2003) 극중에서 유지태가 맡은 이우진 역할은 원래 한석규에게 제일 먼저 제의가 갔다고 합니다. 한석규의 절친인 최민식의 강력한 요구였다고 해요. 당시에 최민식과 유지태가 학교 동창, 끽해야 몇살 차이 안날텐데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인다고 말이 많았었죠. 유지태 역시 젊은 나이에 '슬픈 악당'이라는 만만치 않은 배역을 잘 소화했긴 했지만,(유지태 섭외 당시 최민식이 유지태의 캐스팅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한석규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당시 한석규가 올드보이 배역을 거절한 이유는 단 하나. '영화의 넘버원 주연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석규는 99년을 기점으로 충무로계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가는 상황이었고, 그 때 올드보이에서 제의가 들어옵니다. 당시 한석규의 매니저이던 한석규의 형은 "석규가 다시 충무로계의 톱스타 반열에 오르기 위해선 임팩트 있는 넘버원 주연을 해야만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의 서브 역할을 하는 게 과연 옳을까라는 고민 끝에 고사했다고 합니다. 이후, 한석규는 새로운 영화를 준비했는데, 그 영화는 아쉽게도 개봉되지조차 않았다고 하네요. 만일 한석규가 연기했더라면, 올드보이에 대한 평가는 지금보다 더욱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석규가 출연 제의를 거절하고, 이후에 캐스팅된 배우는 바로 이병헌. 이병헌조차 출연이 무산되자, 그제서야 배역은 유지태에게 갔죠. 이병헌이라..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분노에 찬 복수극을 연상해볼 때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극중 이우진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이병헌은 개인적으로 잘 매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주관적인 생각) 아무래도 이병헌이었다면, 유지태와는 다르게 이우진 역할을 소화했겠죠? 개인적으로는 한석규의 올드보이, 이병헌의 올드보이 모두 보고싶네요. 넘버3 (1997) 넘버3하면 아마 다들 한석규를 떠올릴겁니다. 당시 최민식도 나왔었죠.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된 배우는 바로 송강호였습니다. 조연으로 출연했음에도, 우스꽝스러운 건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 당시 영화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었죠. '헝그리 정신'에 대한 설교 장면은 언제봐도 재밌더군요. 무튼, 송강호를 유명하게 해준 이 영화. 송강호가 캐스팅 된 뒤에는 바로 한석규가 있었다고 하네요. 비슷한 시기 초록물고기에서 각각 주연과 조연으로 영화에 출연했던 두 사람. 당시 한석규가 송강호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넘버3 캐스팅 당시 '송강호'라는 배우를 적극 추천했다고 하죠.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추창민이 감독하고, 이병헌의 배우로서의 재조명, 그리고 류승룡을 스타반열에 올려준 2012년 최고의 핫한 영화 광해. 사실 이 영화의 감독은 강우석이 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우석과 친분이 짙던 '정재영'이 이병헌 대신 영화에서 '광해'와 '하선'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병헌이 연기를 너무 잘한 탓인지.. 정재영이 연기하는 모습은 쉽게 상상이 안가네요. 그리고 류승룡이 연기한 허균 역할은 '유준상'이 연기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한효주의 배역! 원래 '한혜진'의 것이었죠. 개인적으로 한혜진이 맡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박하사탕 (2000) 당시 무명배우에 가깝던 설경구를 일약 최고의 배우로 올라서게 해준 영화. 우리나라의 역대급 영화로 불리우는 박하사탕. 이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맡았던 영호 역할은 원래 '한석규'에게 먼저 캐스팅 제의가 갔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초록물고기로 이창동 감독과 작업해본 적이 있고, 또 영화 역시 성공했기 때문에 이창동 입장에선 한석규가 가장 부담도 없고 완벽한 선택이었겠죠. 그러나 한석규는 제의를 거절! 사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의 연기는 가히 최고였기에, 이 자리에 누가 들어와도 당시 설경구만큼의 임팩트를 보여주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한석규가 했더라면 또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석규가 제의를 거절하고 바로 설경구가 캐스팅됬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문성근'이었죠.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문성근이 정치인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냥 배우 출신 정치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성근은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3회나 수상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톱배우였습니다. 한석규가 90년대 중후반을 주름잡기 전, 박중훈, 최민수와 함께 충무로의 원탑이었죠. 여튼, 문성근은 극중에서 내가 대학생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제의를 거절했답니다. 궁금하시죠? 어떻게 무명배우 설경구가, 특출나게 잘생긴것도, 그렇다고 목소리가 좋은것도, 그렇다고 아우라가 지대로도 아닌데 박하사탕 주연을 맡게 되었을까.. 박하사탕 주인공 캐스팅이 시작되었고, 몇백명의 지원자가 있었답니다. 다들 자신감 넘치고 당차 보이고 주눅들지 않는 모습. 개중에는 잘생긴 사람들도 아주 많았겠죠. 그러나 설경구를 보고 이창동이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니 저 친구는 왜 저렇게 평범하지? 자신감도 없어보이고 너무 주눅들어 있는데.." 이게 이유였죠. 극중에서 영호가 보여줘야 하는 연기는 당차고 멋진 모습이 아닌, 그야말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에서의 비참하고 타락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이창동은 설경구의 '초라함'에, 그리고 '평범함'에 반한 것이죠. 쉬리 (1998) 송강호 연기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오점으로 남은 쉬리. 당시 한석규, 최민식에 이은 세 번째 주연으로 출연한 송강호는 역할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었죠. 유일하게 송강호 치고 연기를 잘 못한 영화로 사람들이 '쉬리'를 꼽곤 하죠. 그 쉬리에서 송강호의 역할은 원래 '차인표'가 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차인표 역시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는 아니지만, 적어도 쉬리에서의 송강호 역할과는 어느정도 어울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베를린 (2013) 하정우,한석규,류승범,전지현에 감독은 류승완. 그야말로 최고의 스타 감독,배우들이 결합해 만들어진 영화 베를린. 사실, 이 영화에서 하정우의 역할은 이병헌이 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심 끝에 베를린이 아닌 광해를 선택했고, 그 대안으로 하정우가 캐스팅된 것이지요. 광해가 대박이 나서 이병헌의 선택은 옳았지만, 이병헌, 한석규, 류승범의 조합.. 새롭네요. 악마를 보았다 (2010) 이병헌의 엄청난 내면 연기와 최민식의 광기어린 싸이코패스 연기, 거기에 김지운 감독님의 연출력까지 더해지며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한국의 싸이코 영화인 '악마를 보았다.' 사실, 영화에서 이병헌이 맡은 분노 어린 복수심을 품은 선우 역할은 최민식이 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민식이 맡은 싸이코 연쇄살인마 장경철 역할은 한석규가 맡을 예정이었다는데, 한석규 역시 배역을 받아들이고 크랭크인만을 기다리고 있던 도중, 영화의 크랭크인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유인즉슨, 악마를 보았다의 제작자가 한석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결국 한석규는 진전이 되지 않자 SBS 뿌리깊은 나무에 출연하기로 결정했고, 한석규를 대신해 이병헌이 캐스팅되었죠. 또한 최민식이 선우 역할이 아닌 장경철 역할을 맡기로 했고 이병헌은 자연스레 선우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후문. 출처ㅣ오늘의 유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