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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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해 식인을 했던 사례들 ㄷㄷㄷ

만일 너희들이 아사 직전의 극한 상황에 몰린다면
끝까지 이성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이때 식인(cannibalism)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극단적인 생존 방법이야
물론 그 선택은 당하는 사람이나 행하는 사람이나 의심할 바 없는 엄청난 비극이지

자 그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식량으로 삼았던 몇가지 사례들을 알아보자
맥퀴리 하버 탈출 사건 (macquarie harbour)


1820년대 초, 영국의 감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영국정부는 좀도둑부터 살인마까지
다양한 죄질의 범좌자들을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호주 남부 해안의 섬,
타스메니아(Tasmania)로 이동시켰어

지도 남쪽을 보면 주황색으로 칠해진 'TASMANIA' 라는 섬이 보이지?
바로 저기야

특히나 살인과 같이 죄질이 나쁜 죄수들은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시킨
맥쿼리 하버로 보내져 수년간 고된 노역을 해야 했지

이곳에서의 노역 생활은 악명이 자자했는데 죄수들은 차라리
교수형 당하는 것이 낫다 생각할 정도였다고 해

덕분에 몇몇 죄수들이 동료 죄수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어


1822년 9월, 공동 작업에 동원된 8명의 죄수들은 고된 노역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기로 결심해

그들은 간수를 뒤에서 덮친 후 나무에 묶고 약간의 식량과 도끼 하나만을 들고 도주하지
탈출한 8명은 배를 훔쳐타고 아시아쪽이나 남미로 가려고 했어

죄수들은 배를 훔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탈출 사실은 바로 들통나면서 간수들에게 알려졌고
결국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항구가 폐쇄당하고 말지

죄수들은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해 숲이 울창한 미개척지를 지나
육지의 다른 거주지로 향했어
육지로의 탈출을 감행한 죄수들은 여태 꽤 있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 중 단 한번도 성공한 탈옥은 없었다고 해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죄수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다른 방안은 없었어 
핑크색 화살표 보이지? 저게 죄수들이 이동한 경로야
왼쪽에 항구라고 적혀있는 곳이 맥쿼리 하버고

쨋든 그들이 가는 길목에 위치한 100km에 달하는 가파른 산맥에는
먹을 만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해

시간이 지나면서 8명의 죄수 중 로버트 그린힐이란 죄수가 무리의 리더가 되었지

그린힐은 선원 출신이었어서 태양과 별로 방향을 가늠할 줄 알았고
유일한 무기였던 도끼를 가지고 있던 자였어


탈출을 감행한지 8일째
그들은 완전히 기아상태가 되었지

앞서가던 5명의 죄수들은 체력이 약해서 자꾸 뒤쳐지기만 하던 3명을 귀찮게 여겼고
결국 무리는 강한 쪽과 약한 쪽 두 무리로 나뉘게 돼

리더인 그린힐과 그의 친구였던 트레버스, 보든햄, 매더스, 피어스가 한 무리를 이뤘고
달튼, 캐널리, 브라운이 또 다른 한 무리를 이루었지

밤이 되자 두 무리가 따로 불을 피우고 잠을 청했어
그때 리더인 그린힐이 자신의 무리에게 소름끼치는 제안을 했어

선원이었던 그린힐은 선원의 관습을 예로 들며 얘기를 꺼냈지

선원들의 관습이란 생존이 어려울 시 최후의 수단으로 제비뽑기를 해서
선택된 한 명을 먹고 나머지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한다는 거였어

절박했던 그린힐의 무리는 전원이 찬성하지

하지만 그들은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정하는 대신
약한 3명의 무리에서 그들의 희생자로 골랐어

희생자로 선택된 인물은 달튼이었어

선택의 이유는 죄수 캠프에서 달튼이 규율을 어긴 동료 죄수들을
간수 대신 채찍질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지
약한 무리의 3명이 모두 잠들자 그린힐은 달튼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쳤어
죽은 달튼의 시체는 농부 출신인 트레버스가 양을 도살해본 경험으로 손질했지

다들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지만 그날 밤 달튼의 살점을 먹은 사람은
그린힐과 트레버스뿐이었어

하지만 아침이 되자 고기 냄새에 이성을 잃은 나머지 죄수들도 달튼의 살점을 먹었어
배를 채운 죄수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어

죽은 달튼과 같은 무리였던 브라운과 케널리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고
앞의 5명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다시 맥쿼리 하버로 돌아갔어

다음 희생자는 자신들이 될 거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린힐의 무리는 한참 후에야 2명이 없어진 것을 알았고
이로 인해 그들의 생존 게임에는 큰 차질이 생겼어

5명의 죄수들은 한 번의 살인으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무리 중 또 다른 누군가가 죽게 되리란걸 알게 됐지
5일 후 고기가 바닥나자 다음 희생자를 정할 때가 왔고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어
결국 제비뽑기를 했고 당첨자는 보든햄이 됐어

보든햄은 그 즉시 도살당했고 나머지는 그의 살로 굶주린 배를 채웠지
이제 남은 사람은 4명뿐이었어 

4명의 관계를 살펴보면 도끼를 가진 그린힐과 그의 친구 트레버스가
무리 중 우위였고 나머지 매더스와 피어스가 약자였지

시간이 지나면서 굶주림이 다시 그들을 덮쳤고 어느덧 다음 희생자를 정할 때가 왔어

신변에 위협을 느낀 매더스는 피어스에게 둘이서
그린힐과 트레버스를 덮쳐 도끼를 빼앗자고 제안했어

하지만 피어스가 택한 건 강한 쪽이었어
피어스의 배신으로 매더스는 그들의 식사거리가 되었지

이제 친구 사이인 그린힐과 트레버스, 외톨이인 피어스 이렇게 세 사람이 남게 된다
누가 봐도 다음 차례는 피어스였지

트레버스에게 불행한 사고가 닥치기 전까진 말이야
숲에서 트레버스가 독사에 발목을 물린거야
그린힐은 그를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트레버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물린 부위는 썩기 시작했지

가망이 없음을 직감한 트레버스는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어
결국 트레버스가 다음 희생자가 됐어

마침내 두 명만 남게 되었어

그린힐과 피어스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어
언제든 상대방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둘은 서로를 죽이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그게 지켜지지 않으리라는건 둘 다 알고 있었겠지
때문에 둘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이제 누가 오랫동안 안 자고 버티냐의 싸움이 시작된거지
그들은 삼일 밤낮을 꼬박 샌 채로 계속 걸었어
상황은 극으로 치달았지만 죽지 않으려면 견디는 수 밖에 없었지

4일째가 되던 오후 결국 잠이 든 쪽은 그린힐이었어
그린힐이 잠들자 피어스는 곧바로 도끼를 집어들고 그의 머리를 쳐버렸지
이로써 알렌산더 피어스가 유일한 생존자가 됬어

피어스는 그린힐의 고기를 먹고 일주일을 더 걸어 탈출 50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어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 그는 다시 붙잡히는데
피어스에게 숲에서 일어난 식인에 대해 들은 간수들은 처음엔 이를 믿지 않았어
기독교를 믿는 영국인이 식인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간수들은 피어스가 나머지 죄수들이 추적을 피해 달아날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어
피어스는 다시 맥쿼리 하버로 이송됐고 다른 죄수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어

그 중 젊은 청년이었던 토마스 콕스란 놈이 재탈출하자고 피어스를 꼬드겨
지옥을 경험했던 피어스로는 처음엔 내키지 않아 했으나 결국 탈출에 동의했지

육로로의 탈출은 불가능하단걸 알고 있던 피어스는 이번엔 킹 리버를 헤엄쳐 건너기로 했어
그런데 5일간 걸어 킹 리버에 도착해 강에 뛰어드는 순간
킹 콕스가 갑자기 수영할 줄 모른다고 하는거야

개빡친 피어스는 변명을 늘어놓는 콕스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려
피어스는 콕스의 허벅다리와 종아리 살을 챙겨들곤 그 자리를 떠났지

그렇게 2~3일 가다 보니 후회가 엄습해왔고 피어스는 해안가에
맥쿼리 하버를 오가던 배를 붙잡고 자수를 해버렸어

따라서 피어스가 유죄를 받은 것은 물론이었지

1824년 7월 19일 알렉산더 피어스는 식인 행위로 교수행에 처해졌어








미뇨넷호 난파 사건 (mignonette ship)


1884년 여름 미뇨넷호 4명의 선원들은 요트 한 척을 본국인 영국에서
호주의 새 주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어

미뇨넷호에는 경험 많은 경주용 요트 조타수인 선장 탐 더들리랑
역시 경험 풍부한 선원 네드 브룩스
항해 담당 에드윈 스티븐스, 처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잔심부름꾼 리처드 파커가 승선해있었지
미뇨넷호는 14년 전에 만들어진 꽤나 오래된 배였고 상태는 아주 개판이었어
19세기에는 배들이 부실했기에 선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위험한 직업이었대
미뇨넷호가 침몰한 1884년만 해도 550여척의 영국 배가 침몰했다고 해

항해를 시작한지 7일 후인 7월 2일,
풍랑을 만나자 미뇨넷호는 어찌해 볼 새도 없이 침몰해버렸어

다행히 더글리 선장과 그의 선원들은 무사히 소형 보트에 옮겨탔지만
그대로 대서양을 표류하게 된거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통조림 2개, 나이프 하나, 경도 측정 시계뿐 마실 물조차 없었다고 해

배가 난파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세인트 헬레나'와
'트리스탄 드 코나'라는 곳으로 각각 북쪽과 남쪽 1200km 지점에 있었고
희망봉은 동쪽으로 2600km, 남미는 서쪽으로 3200km나 떨어져 있었어
빨간 점 보이지? 저게 그들이 난파된 지점이야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희망봉을 지나는 배들의 항로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지
표류한지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심한 갈증이 찾아왔어

통조림이랑 빗물, 바다거북따위로 잠깐 동안은 이를 견뎠지만
그마저도 바닥이 나니까 그들은 허기와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했지

표류한지 일주일 쯤 되었을까
갈증이 최고조에 다다랐고 항해가 처음이었던 파커는 목마름에 바닷물이라도 마시려 했어
선장인 더글리는 바닷물이 탈수증을 초래하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를 저지했지

더글리는 빨리 구조되지 못하면 선원관습에 따라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골라 인육이라도 먹어야 될 거라고 생각했어
더글리는 이를 선원들에게 말했고 다들 망설이는데 브룩스가 격하게 반발했어

결정은 유보되었고 표류한지 3주 가량이 지난 7월 20일 밤
파커는 갈증을 못참고 바닷물을 마셨어

아침에 잠에서 깬 동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파커를 보게 되지
파커가 죽으면 혈액이 응고되서 마실 피가 없어질거라 판단한 선원들은 결단을 내려야 했어
반발하던 브룩스에게 더글리는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라고 했대

파커만 빼고 모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거든
이 사람이 리처드 파커야
모두가 동의한 가운데 더들리가 파커의 목을 찌르고 그 피를 통에 담았지
더들리와 스티븐스, 맹렬히 반발하던 브룩스도
갈증을 못이기고 파커의 피를 허겁지겁 마시게 되었어

세 사람은 파커의 피로 목을 축인 후
살을 발라 날것으로 먹었고 남은 살점은 햇볕에 말렸어

작은 보트 안은 피와 살점들로 난자했어
위 사진의 배가 실제로 1884년 미뇨넷호 선원들이 탔던 구명보트야

그로부터 4일이 지났고 남은 고기는 거의 부패한데다 피는 상했어

7월 24일 또 한명의 희생자가 필요해진 순간
기적적으로 그들 눈 앞에 독일 배 한 척이 나타났어

그들은 다행히 구조되었고 2주간을 먹고 자기만 했다고 해

체력이 어느정도 회복되자 더들리 선장은
독일인 선장을 만나 그동안 있었던 상황을 털어놓았지

더들리는 동료를 죽이고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어
한 명을 희생해 나머지 3명을 살렸기 때문에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거지
얘가 토마스 더들리다

구조된 지 3개월이 지난 후 미뇨넷호 생존자들은
본국인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미뇨넷호의 주인에게 모든걸 털어놨어

더들리는 이걸 이유로 소송 당할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나봐
결국 세 사람은 모두 체포되었고 그들은 분노했지

선장이었던 더들리 입장에서는 선원 대부분을 살렸기 때문에
체포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봤는데

영국 정부는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식인은 용납할 수 없는 잔혹한 행위라고 규정지었어
당시 영토를 확장 중이던 대영 제국은 원주민들이
야만적이라 구원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거든
그에 대한 증거로 원주민들이 식인을 한다고 주장한거지

때문에 영국 선원이 식인을 했다는 사실은
정부 입장에선 영토 확장에 문젯거리가 되었던 셈이지

영국 정부는 선원 관습을 금지하기 위한 선례로 삼으려고
미뇨넷호 선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려고 했어

그들을 기소하기 위해 검찰은 살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브룩스를 검찰 측 증인으로 세워

브룩스는 증인을 해주고 기소를 면할 수 있었지만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리처드 파커에 대한 살인죄로 법정에 서게 돼

하지만 당시 여론은 선원들의 편이었지
이렇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림

1884년 11월 배심원들은 더들리와 스티븐스에게 동정적이었기때문에 무죄를 결정해
하지만 판사는 이를 무효화시키고 특별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전권을 넘기도록 압력을 행사했어

결국 재판에서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어

하지만 선원들의 관습에 제재를 가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영국 정부는
수감 6개월만에 두 사람을 석방했어

당시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더들리는 이런 말을 했대

" 이것으로 선원들의 관습을 금지시킨 줄 알겠지만 진실을 감추게 됐을 뿐이다.
조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관습을 따르되, 구조된 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모든 사건이 종결된 뒤 증언을 했던 브룩스는 떠돌이 서커스단에 스카우트되었어
서커스단에서 브룩스는 식인마로 분장하고 관객들 앞에서 날고기를 씹어댔지
그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결국 궁핍한 삶을 살다 죽었어

불행하긴 스티븐스도 마찬가지였지
그는 당시의 충격으로 다신 배를 타지 못했고 브룩스와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어

더들리는 호주에서 사업가로 성공했지만 페스트로 사망한 최초의 호주인이 되었다고 해
우루과이 공군기 571편 조난사고


1972년 10월 13일 금요일 우루과이 공군의 쌍발 터보 프로펠러기인
페어차일드 FH-227D는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 있는 스텔라 마리스 대학의
럭비 선수단을 싣고 칠레의 산티아고를 향해 안데스 산맥을 거치는 항로를 비행하고 있었어

페어차일드는 칼라스코 국제공항에서 출발했지만 출발 전날인 10월 12일부터
산맥상공의 날씨로 인해 아르헨티나 멘도사 부근에 착지해 있었다고 해

이게 그 페어차일드임
왼쪽에 산티아고 보이지?
저기로 이어지는 선이 본래 예상경로이고
굵은 선은 실제로 항해한 경로, X는 추락 지점이다
추락 후 동체만 남은 비행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하 40도의 극한 환경에서 72일간을 생존해야 했어

사고 당시 사망 12명 행불 5명으로 생존자는 총 28명이었지

구조대가 오길 기다렸지만 정작 구조대는 2주간의 수색 동안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자 이들이 죽었다고 단정지어 버려

이틀 후 생존자들은 자신들을 찾는 구조 비행기가 지나가는걸 목격하게 돼

그 중 한 비행기가 좌 우로 흔들어대며 신호를 보냈다는데
이걸 목격한 생존자들은 구조대가 자기들을 봤다가 착각을 하지

결국 생존자 중 하나가 구조대가 곧 올거라며 그동안 모아두었던 식량 대부분을 먹어치웠어
하지만 구조대는 오지 않았어


수색대를 만들어 비행기 잔해로부터
약간의 식량을 찾았지만 그들이 모두 먹기엔 부족했지

그러던 중 탑승객이었던 의사 두 명이 식인을 하자고 주장해

생존을 위해서는 단백질이 필요하고 최고의 단백질은
자신들이 매장한 시체로 섭취할 수 있다고 말이지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먹어도 좋다며 설득해


탑승한 럭비팀의 이름이 'Old Christians'이었던 만큼
탑승객 대부분은 카톨릭 신자들이었어 

이들은 계기판에 몸이 끼어서 고통받으며 죽어가던 조종사가
권총으로 죽여달라고 애원해도 종교적 신념으로 거절했던 아주 독실한 신자들이었던거지

거기다 이들이 꺼내 먹어야 했을 시체들은 다름 아닌 친구, 형제, 부모였다고 해
하지만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들은 결국 시체에 손을 대지

구조대에 대한 희망이 점차 사라지는 상황에서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할 수 밖에 없었어

그래서 건장한 몇몇 생존자를 뽑아 안데스를 넘어 칠레로 구조 요청을 보내기로 했어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재차 시도하여 결국 칠레 진입에 성공해
그들은 20km나 되는 눈밭을 뚫고 지나간거지
다행히 한 농부를 발견하여 구조 요청을 하고
나머지 생존자들도 결국 구조되는데 성공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16명의 생존자들




1줄 요약


인간은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살기위해서 윤리고 나발이고 사람도 잡아먹음






공포갤러리 히죽님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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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모티브사건도 식인했다던...
사진은 15명인디~~
@mun4370 하늘소... 하늘소오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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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몽타주에 담긴 이야기
영국의 한 경찰서에서 형사의 손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사람의 머리스타일은 어떻게 생겼나요?' '정돈이 안된 더벅머리 였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그의 손은 천천히 범인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복장은요?' '짧은 반바지에 반팔티를 입고 있었습니다.' '어디 그럼 종합해 보면... 이렇게 생겼겠군요.' 그렇게 범인을 묘사한 몽타주는 완성되었고 이것은 결국 범인을 잡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몽타주가 작성되고 난 뒤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였다. 이 이야기는 25년간 영국의 한 마을을 두려움에 떨게한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다. 리틀 헤이븐은 아름다운 해변을 자랑하는 영국 펨브룩셔에 위치한 손꼽히는 명소이다. 해안가의 절경으로 인해 휴일을 맞이하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리틀 헤이븐은 영국에서 제일 낮은 범죄율을 가진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1989년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6월 아름다운 해변 마을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리틀 헤이븐으로 여행을 간 저의 부모님의 행방을 찾을수가 없습니다.' 리틀 헤이븐 경찰서로 걸려온 한통의 전화 자신을 토마스 딕슨이라고 소개한 남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부모를 찾았고  그 즉시 경찰은 해안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수색이 진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은 2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된 두 사람은 휴일을 맞이하여 옥스포드에서 리틀 헤이븐으로 여행을 온 피터와 그웬다 딕슨 부부였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누구나 그들과 친구가 되고싶을 정도로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딕슨 부부는 휴일을 맞아 리틀 헤이븐의 해안가를 따라 캠핑을 하며 주변의 절경을 탐사하는 것을 즐겼지만 휴일의 마지막 날에 참변을 당한 것이다. 발견 당시 부부의 시신은 양손이 묶인채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발견되었다. 피터는 마치 '처형' 당하듯 묶인 채 뒤통수에 3발의 엽총으로 인한 총상을 입었고, 그의 지갑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부인인 그웬다는 하의가 사라진 채로 강간 당한 흔적과 범인에게 저항을 하다 입은 것으로 보이는 후두부의 치명적인 총상이 있었다. 이후 경찰의 감식 결과 범인은 피터를 먼저 살해한 뒤 그웬다를 살해하기전 성폭행을 시도한 것으로 보여졌다. 단순 강도의 의한 살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참혹한 현장에 경찰들은 치를 떨수 밖에 없었다. 평화롭던 작은 해변마을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은 금새 마을 전체로 퍼졌고 마을 사람들은 4년 전 마을에서 일어난 '그 일'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햇다. 4년전인 1985년 한창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준비로 바쁜 하루를 보내던 12월 23일 새벽 리틀 헤이븐 한 근교의 농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연기를 본 주민들이 급히 신고를 했고 이 후 출동한 소방대원들의 노력으로 인해 불은 크게 번지지 않고 빠르게 진화되었다. 소방대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욱한 연기사이로 집주인였던 헬렌과 리처드 토머스 부부는 시신으로 발견 되었고  화재를 진압한 뒤 발견한 부부의 상태는 일반적인 화재 사고의 시신과는 매우 달랐다. 헬렌의 시신은 2층의 자신에 방에서 두손이 묶인 채 꿇어앉은 상태로 발견되었고 리처드의 시신은 카페트에 말린 채로 발견 되었기때문이다. 이것이 사고가 아닌 범죄현장임을 느낀 대원들의 신고로 그 즉시 경찰들이 출동했다. 경찰들의 조사 결과 두 부부의 사인은 화재로 인한 질식이 아닌 근거리에서 맞은 총탄이였다. 두 부부의 사인과 현장의 증거를 토대로 경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집에 혼자 있던 헬렌을 범인이 제압한뒤 결박했고 그 후 그녀의 뒷머리에 엽총을 발사하여 살해한 뒤  뒤늦게 돌아온 리처드를 집 밖 마당에서 엽총으로 살해하고 리처드의 시신을 집안으로 끌고 와 카페트 로 감싸고 그 위에 불을 지른것' 경찰의 수색에도 불구하고 결국 범인을 찾을 수 없게 됬고 이는 그동안 평화롭던 작은 마을 리틀 헤이븐의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 그 후 토마스부부의 끔찍한 사건이 잊혀질 무렵 발생한 딕슨 부부의 사건은 토마스 부부의 사건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범죄가 일어난 시각은 두 사건 모두 새벽이였으며, 두명의 남녀가 살해당했고 그들을 살해한 무기는 '엽총'이였기 때문이었다. 이 천인공노할 범죄는 곧 주민들에게 퍼져 주민들은 '엽총 살인마:Shotgun Killer'가 나타났다며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더벅머리에 정돈이 안된 수염을 가진 건장한 체격의 백인 남성. 목격 당시 자전거를 탄 상태로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있었음' 하지만  안타깝게도 목격자의 기억력에 의지하는 한장의 몽타주만으로는 범인을 찾기란 무리였다. 1989년 당시에는 체계적인 과학수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는 점점 어려움을 겪게되었고 총 6000여명의 용의자를 조사했지만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진 못한채 수사는 미궁으로 빠지게 되었다.  결국 영국경찰은 팸브룩셔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엽총 살인마'는 끝내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 시간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엽총 살인마에 대한 기억을 점점 지워나갔고  결국 리틀 헤이븐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 끔찍한 범죄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갔다. 아마도 범인은 자신의 완전범죄가 영원히 세상밖으로 밝혀지지 않기를 바랬을것이다. 하지만 범인의 희망과 달리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딕슨부부가 살해된 지 17년이 지난 2006년 미제사건을 전문으로 다루는 전담반의 팀장 '스티브 윌킨스'는 자신의 전담반을 이끌고 이 작은 소도시 리틀 헤이븐에서 일어난 2건의 미제사건인 '엽총 살인마 사건'을 재수사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두 사건에 사용된 범행도구인 '엽총'이었다. 윌킨스의 팀은 지난 20년간 팸브룩셔 일대에서 엽총을 사용한 살인사건 용의자들을 토대로 조사했지만 엽총살인마에 대한 수사는 몇달이 지나간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채 난황을 겪게 되었다. 지지부진한 수사가 계속되던 어느날 윌킨스의 눈에 한 용의자가 포착되었다. 용의자의 이름은 '존 윌리엄 쿠퍼' 그는 팸브룩셔 일대에서 30여건의 강도 및 강간 혐의로 1998년에 16년형을 받은 범죄자였고 범행도구는 '엽총'이었다.  윌킨스는 이 점을 주목했고 그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지만 역시 쿠퍼가 미제사건의 용의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윌킨스는 한가지 기묘한 사실을 알게됬다. 바로 쿠퍼가 오래 전 한 유명한 TV쇼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국 방송국 ITV의 협조를 통해 경찰서 내부의 자료실에서 오래된 영상을 틀기 시작했다. '불스아이' 다트를 던져 경품을 받는 TV쇼 불스아이는 25년 간 영국에서 인기를 끌던 장수 TV쇼였으며  평균 시청자 수 17만명의 인기 프로그램이였다. 1989년도 영상속의 사회자는 호기롭게 TV쇼의 이름인 불스아이를 외치며 등장했고, 곧 이어 출연자들에 대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영상을 바라보던 윌킨스의 눈에 젊은 시절의 쿠퍼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윌킨스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윌킨스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바로 그때 영상 속 쿠퍼가 등을 돌리는 화면이 나오자 윌킨스는 영상을 멈추었고  자료실을 뒤엎으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찾아낸것은 바로 한장의 몽타주였다.  17년전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범인의 인상착의를 담았던 몽타주를 말이다.  떨리는 손으로 TV화면속의 쿠퍼와 자신에 손에 들린 몽타주를 비교하던 윌킨스의 입에서 외마디의 말이 튀어나왔다. '놈이다.' 16년전의 몽타주가 오랜 세월을 지나 끔찍한 살인범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이였다. TV화면속의 쿠퍼는 만면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사회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회자 : 혹시 하고 계시는 취미가 있나요? 쿠퍼 : 스쿠버 다이빙을 즐깁니다. 특히 리틀 헤이븐의 해안가에서 즐기는걸 좋아합니다. 쿠퍼가 말하던 곳은 바로 딕슨부부가 살해당한 그 해안가였다. 만약 진짜 쿠퍼가 범인이라면 쿠퍼는 이 방송에 나온 뒤 1달 뒤에 딕슨부부를 살해한 것이었다. 윌킨스는 쿠퍼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수사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특이한 영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쿠퍼가 강도죄로 검거 될 당시의 경찰서 내의 조사실의 영상이였다. '어째서 범행을 저질렀나.' 담당형사의 말에도 수갑을 찬 쿠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형사의 계속되는 취조에도 입을 다물고 오히려 벽을 등진 채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무런 말없이 형사의 취조를 계속 듣고있던 쿠퍼는 영상이 끝날 무렵 단 한마디의 말만 꺼냈다. 형사 : 혐의를 인정하나? 쿠퍼 : 네 장시간에 걸친 취조끝에도 입을 열지 않던 쿠퍼가 형사의 마지막 말에는 멀쩡히 답변을 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범죄자라면 보통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변명을 늘어놓는것이 일반적인 예지만 쿠퍼의 상황은 뭔가 부자연스러워 보인 것이다.  마치 한시라도 바삐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 것처럼  윌킨스는 이것이 단지 강도 혐의만을 받고자 하려는 쿠퍼의 속셈임을 알아차렸다. 그가 감옥에 간다면 사람들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리틀 헤이븐의 살인사건들은 잊혀질거라는 속셈 하지만 쿠퍼가 간과한 하나의 사실이 있었다. 바로 과학수사의 발전이였다.  1985년과 1989년에는 과학수사의 개념조차도 없었기때문에 범죄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쓸만한 증거를 찾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였지만  2006년에는 상황이 달랐다. 윌킨스는 쿠퍼의 자료와 증거물들을 모아 유전자 검사를 요청했지만 증거물들의 기간이 너무나도 오래됬기 때문에 유전자 검사를 시도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성공유무 자체 또한 매우 희박했다.  하지만 2년뒤 2008년 윌킨스가 그토록 기대하던 유전자 검사가 결과가 나왔고 증거품들에 묻어있던 DNA들은 쿠퍼가 범인임을 알리고 있었다. 바로 쿠퍼가 강도 혐의로 압수당한 물품에서 지난 두 건의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의 DNA가 나온것이었다. 쿠퍼가 사용한 엽총의 총구부분과 쿠퍼의 집에서 압수한 바지에서 피터 딕슨의 DNA가 나왔고 그가 범행 당시 사용 착용했던 장갑에서 리처드 토마스의 DNA가 나왔다. 2010년 윌킨스는 조사실에서 쿠퍼에게 명백한 살인의 증거물들을 보이며 그를 추궁했고 쿠퍼는 1999년의 조사실에서와는 달리 신경질적이며 화난 목소리로 자신은 결백하다며 소리쳤다. 결국 2011년 쿠퍼는 2건의 살인사건과 5건의 강도질 그리고 2건의 강간사건의 용의자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완벽 범죄를 꿈꾼 범인은 단 한장의 몽타주로 인해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공포갤러리 히죽님 펌
기괴한 장례문화
사티는 남편이 죽어서 시체를 화장 할 때 아내가 불 속에 뛰어 들어 남편의 시체와 함께 불타는 풍습임. 1829년 동인도 회사의 총독 벤틱 경이 금지했지만 1843년 마하라자만 싱 왕의 장례식때 그의 15명 아내들이 사티로 죽기 전 손바닥 도장 흔적이 있을 정도로 사티는 계속 되었음. 1987년 9월 라자스탄 주의 데오랄라 마을에서 18세 과부가 사티로 죽었는데 애초에 라자스탄 주정부는 사티를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강행 되었다고 함. 남편의 가족들이 과부를 마취 시키고 장작더미에 밀어 넣었다고. 그리고 지키고 있으면서 불구덩이 속에서 빠져 나오려는 과부를 몇 번이고 다시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었다고 함. 경찰은 그 가족들을 구속했으나 별 문제 없이 석방 되었다고 함. 에휴. 2006년 8월 22일에 있었던 사티에서는 과부가 불에 탄 후 남은 재를 만져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들면서 관광특수까지 누렸다고 함. 남편이 죽으면 과부는 친척들로부터 가문의 남성들 중 한 명과 동침할 것을 강요 당했다고 함. 그리고 남편을 잡아 먹었다는 낙인으로 평생 집안에서만 살아야 했는데 힌두교 관습에 따라 과부들은 재혼을 해서도 안되고 다른 남성을 유혹해도 안되었다고 함. 머리카락을 전부 밀고 대머리인 채로 살면서 장신구를 걸치거나 색깔 있는 옷을 입는 것도 금지였다고 함. 이렇게 감금과 멸시를 당하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랬다고 산 채로 불 타 버리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임. 살아 있는데 불 속에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반항을 덜 하게 하기 위해 환각제를 먹이고 기둥에 묶어 두는데 화장을 야외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시신이 불타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려 길면 10시간이 넘도록 과부는 불태워지게 됨. 처음에는 불타는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지만 전신이 3도 화상으로 뒤덮이면서 신경이 죽을 때 쯤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스스로 자신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며 생을 마감한다고 함. 사티를 강요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옛날 열녀문이 있었던 것처럼 사티를 행하면 여신으로 승격 되어 사원이 지어지고 친척들은 막대한 기부금을 받게 된다고 함. 그렇다보니 친정이고 시댁이고 할 거 없이 합심해서 산채로 태워 버리는 사티를 종용하는 것. 아까도 말했지만 감금과 멸시를 당해도 강제로 산 채로 불타 죽는 것 보다는 나을 테고 법적으로 금지가 되어 있음에도 강제적으로 끌어내 살해하는 경우도 생겨남. 1802년 한 해 동안 인도의 캘커타 지방 주위 50km 반경안으로 438명의 과부가 사티 풍습으로 죽었다고 함. 현재는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시골에서는 사티 풍습으로 죄 없는 과부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지고 있다고 함. 공포갤러리 히죽님 펌
다이버의 무덤 다합의 블루홀
다이버의 무덤이라 불리는 잠수 장소는 여러 군데가 있는데 일명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잠수 장소”라는 제이콥의 우물(12명 사망)은 동굴의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비좁은 통로로 들어간 다이버들이 물장구를 치기 위해 바닥의 미세진흙을 걷어차는 바람에 시계가 암흑이 되어 나오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당황하여 빙빙 돌다 공기가 떨어져 사망 사례가 다수 발생했다고 함. 수중 동굴에 붙어있던 사인. 예전엔 다이버의 안전을 위해 출구까지 이르는 가이드라인을 설치해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가이드라인으로 인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초보다이버들이 너무 죽어서 제거하고, 전문다이버들이 직접 가이드라인을 설치하며 다이빙하도록 했더니 사망률이 감소했다고 함 원초적 매력과 쉬워보이는 환경이 다이버들을 유혹해 죽이는 자연적 개미지옥을 만들어버렸다 이런 사연을 갖고 있는 제이콥의 우물은 가장 유명한 곳이지만 실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다이버가 사망한” 장소는 이제 소개할 다합의 블루홀(200여명 사망 추산)임. 아치 구조가 있어서 무리하게 통과하려다 사망한다는데, 언뜻 사진만 보면 아주 무해해 보이는 아름다운 장소 같다 다합의 블루홀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홍해 부분에 위치해있으며, 깊이가 3천미터에 달한다. 압축공기를 사용한 레크리에이션 다이빙의 경우 수심 30미터까지가 제한이라고 함. 이보다 깊이 가려면 특수혼합공기와 전문 훈련이 필요하고, 세계기록은 332m인 모양이다. "다이버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다이버의 천국"이라고도 불린다. 관광객이 많고 세계구급으로 유명해서 애초에 잠수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임. 그러니 사고 비율도 높을 듯. 게다가 여러 잠수 업체가 주변에서 장비를 빌려주고 있는데, 때로 잠수 훈련이나 가이딩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모양임. 주 경로는 근처 산호초에 형성된 El Bells라는 좁은 통로로 내려가 -> 작은 아치 (Arch) 를 통과해 -> 큰 바다로 진출 -> 해류를 따라 산호초 절벽을 타고 대각선 방향으로 조금씩 올라가서 -> 얕은 입구인 the Saddle을 넘어 -> 블루홀에 들어가는 흐름인 것 같다. 드라마적 기승전결이 돋보인다. 그런데 이 경로 자체가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 첫 사진의 발랄한 지도가 사용되는 모양인데, 아래쪽에 아주 작게 "Exit from Blue Hole"이라는 부분이 있다. 위협감이나 혹은 호기심을 갖게 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보일듯 말듯하게 그려놨으나, 사실 저 부분이 용의 아가리인 "the Arch" 구조임. 문제는 산호초 절벽을 따라 블루홀의 입구로 향하는 루트 바로 아래에 아치가 있다는 거임 심해에서 아치는 반대편 수면에서 들어오는 푸른 빛을 발하고 있을 거임. 입구로 착각할 수도 있고, 혹은 호기심을 느껴 들여다보고 싶어질 수도 있음. 망설여 멈춘 사이 조류가 그쪽으로 몸을 실어간다. 그런데 저 경로에서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도 30미터 구간임. 이 쯤에서 "질소마취"현상이 나타난다고 함. 여러 기체에 대한 압력차로 인해 탱크 속의 공기 중 질소가 부각된다는데, 마치 술에 취한 듯 판단력이 마비되고 자신감이 늘며 공간 및 방향감각이 상실되어 "심해황홀증"이라고 불림. 게다가 이 부근 해수는 매우 맑고 따뜻하다고 함. 맑아서 빛이 잘 전해지고, 해수면도 아치 건너편도 실제보다 가까워보임. 심해인데도 따뜻해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지만 거부감이 없음. 그리하여 다이버는 질소에 헤롱헤롱 취한 채 아치를 보며 "가까운데? 해볼만 한데?"하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 거임. 그런데 바닷속에서 공간감각을 잃은 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터널 입구에 도착하면, 여기가 -53미터 깊이임. 이쯤해서 고압축 산소 중독이 발생하기 시작함. 증상으로는 저림, 부분 마비, 현기증, 구토와 시야 제한 등. 약 10%의 사람은 발작이나 실신을 하게 되며, 이는 익사로 이어진다 함 아치는 건너편까지 26미터 길이임. 아파트 한 층이 2.6미터쯤 되니까 아파트 10층 정도 되는 거리를 헤엄쳐가야 함. 문제는, 아치가 블루홀의 물이 빠져나오는 구멍이라는 점임. 물독 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호스를 튼 듯 거센 물길이 흘러나오잖아. 한마디로, 반대쪽에서 물살이 몰아치는 26미터임. 게다가 깊이 잠수하면 그만큼 탱크의 공기가 압축되어 빠르게 소모됨. 수심 10m 깊이로 잠수하면 압력이 땅에 있을 때의 대기압과 비교했을 때 두 배로 늘어나 탱크 속 공기의 부피가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함. 수심 50미터면 5기압이라고 함... 뭔지 모르겠지만 폐도 압축되는 모양임 입구가 코앞인데 헤엄쳐도 나아갈 수가 없고, 질소중독으로 술취한 듯하고, 산소중독으로 몸은 마비되고 시야는 어둡고...  그 가운데 공기가 떨어져가며 경보음이 울리는 거임. 제정신이 아닌 다이버는 핸드폰이 시끄럽다고 생각해 전화를 받으려는데 얼굴에 뭐가 씌워져 있어 방해가 되네. 그래서....... 다합의 블루홀에서 사망한 "유리 립스키"라는 다이버의 사망 직전 마지막 동영상 https://youtu.be/1mek8CCyoek 공포갤러리 히죽님 펌
사실상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 천민계급
여타 다른 고.중세 국가들처럼 일본은 과거 신분에 따라 직업이 달랐음  특히 죽음과 관련되거나 보편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됐던 직업 식육,피륙,쓰레기처리,매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전부 천민계급이었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부라쿠(부락),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부라쿠민이라 불렀음 문제는 현재까지도 이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이어지고 있음 한국의 지역 차별 같은 것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심각한 차별임 몇가지 유명한 예시를 들어보면 1. 1975년 일본 기업들 사이에서 이 부라쿠민에 대한 신상정보를 모은 블랙리스트가 거래되다 적발됨 (이런 부라쿠민 블랙리스트 관행은 현재까지도 암암리에 흔히 이뤄지고 있음) 2. 2009년 구글어스에서 옛 일본 지도와 현재 지도를 겹쳐보는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라쿠 지역이 특정돼 넷상에서 '더러운 동네' 라는 이름으로 해당 지역 정보가 퍼짐 3. 일본 정치인 아소 다로가 부라쿠민 출신 정치인에게 "부라쿠민 따위는 일본 총리가 될 수 없다" 고 폭언함 4. 1963년 사이타마현에서 여고생 납치 피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범인을 잡지 못하자 경찰이 근처 부라쿠 지역에서 이시카와 카즈오라는 사람을 체포해 고문을 통해 무고 자백을 받아냄 이시카와 카즈오는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97년 가석방됨 뉴스로 나올만큼 큼지막한 사건만 몇개 정리했을때 이 정도고 사실상 현재까지도 신분제가 이어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심각하지만 일본인에게 외국인이 이 이야기를 꺼내면 언제적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며 굉장한 모욕으로 여김 기본적으로 일본 사회내에선 금기어나 마찬가지이고 '부락'이란 단어는 일본내 미디어에선 사실상 검열 대상임 아래는 일본 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부라쿠민 차별 사진들 차별 금지 정책은 보통 '동화'라는 단어를 많이 씀 실제로 일본에선 초등학생때 부터 '동화교육'이란 이름으로 차별 반대 교육을 받는다고 함 이 외에도 부라쿠민 뿐만 아니라 아이누족, 류큐인 같은 소수민족이나 재일 조선,한국인들도 만만찮은 차별이 받으며 살아가고 있음 도탁스 펌
중국의 티베트 만행
이 사건을 설명하려면 우선 티베트불교의 환생과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의 관계, 중국과 티베트에 대해 설명해야함 1. 티베트에서는 모든사람이 환생한다고 믿음 2. 티베트불교의 몇 고승들은 환생을 찾아 지위를 이어감 3. 판첸라마와 달라이라마는 현재 11대, 14대째 환생자임 4. 중국은 티베트지역을 봉쇄하고 티베트승려들을 탄압중 환생이라는게 우리한테는 흠..스럽지만 암튼 저쪽지역에서는 쭉 이어져온 세계관(?)이라 하니 뭐 걍.. 그런갑다..하고 읽으면 사건이 이해가됨 이 사람은 티베트 불교서열 1인자 13대 달라이라마임. 중국과 티베트가 영토분쟁 중이던 1933년에 죽음 티베트 불교계의 서열 2인자인 판첸라마가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를 찾고, 공인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음 이에 따라 9대 판첸라마가 현 14대 달라이 라마를 찾아서 교육했음 이사람이 9대 판첸라마임 ↓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는 2년후 티베트 국경지역 농민의 아들로 태어남 그리고 네 살의 나이에 티베트 국왕에 즉위함 아래 막 찾았을당시 아기 달라이라마 우리가 아는 얼굴은 이거일거임 1937년에 9대 판첸라마가 급사하고 14대 달라이라마가 10대 판첸라마를 찾아서 교육함 50년대에 같이 찍은 사진임 왼쪽이 10대판첸, 오른쪽이 14대달라이 이 10대 판첸라마는 1989년에 죽음 10대 판첸라마가 죽었기 때문에 11대 판첸라마를 찾아야 했고 달라이라마와 판첸의 제자들이 수년동안 환생자를 찾아다닌 끝에 1995년 한 티베트 마을에서 6세의 소년 '게둔 최끼 니마'를 판첸라마의 환생자로 확인하고 공표함 얘가 게둔 최끼 니마임↓ 환생자를 찾고나면 일정한 의식을 거쳐 즉위식을 한 후 대대로 판첸라마가 주지로 있던 타쉬룬포 사원의 주지가 되어야함 그러한 절차를 남겨놓고 있었는데.. 여기서 짚고 가야할것이 타쉬룬포 사원은 현재 중국에 속해있음 환생자를 찾았다고 공표한지 3일만에 중국 정부가 이 소년과 가족들을 납치함ㅋ 그리고 자기들이 진짜 판첸라마를 찾았다면서 기알첸 노르부라는 애를 11대 판첸라마라고 마음대로 앉힘ㅋㅋ ↓기알첸 노르부 즉위식 참고로 이 애의 부모는 공산당원이었음 그리고 이 아이는 사원의 주지스님으로 중국의 비호 아래 자랐고 성인이 되고나서 아래처럼 중국인민정치위원이됨 ㄷㄷㄷ 이런 상황이 당연히 문제일 수 밖에 없는게, 리얼 판첸라마의 환생자를 찾고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14대 달라이 라마 사후 환생한 15대 달라이 라마를 찾아서 공인할 자격은 판첸라마에게 밖에 주어지지 않았음 현 달라이라마는 알다시피 언제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임 중국은 이 점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내세운 판첸라마를 이용해 후대 달라이 라마 역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인물로 내세우려는 것..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독일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환생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침 (오래된 전통을 끝낼수도 있다) 그러자 중국이 노발대발함ㅋㅋㅋㅋ "왜 니맘대로 환생 안한다고함? 너 환생해야됨ㅋㅋ 니맘대로 정하지마" 라고함ㅋㅋㅋㅋㅋㅋㅋㅋ 미신같은거라면서 티베트불교를 탄압하던 중국정부가 달라이라마보고 환생하라고 윽박지르는 상황이됨ㅋㅋㅋㅋ 아래는 2011년 유툽에 올라온 티베트 잠입취재인데 티베트지역에 들어가면 폰이안터지고 인터넷도 안되며 외국인은 출입금지임 저상황이 지금까지 계속되고있음 중국정부는 중국에 반대하는 승려들을 다 죽이거나 강제로 파계시키고 (강제로 남승과 여승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계를 맺게해서 스스로 파계하게 만들거나 자살하게 만들기도 함 개막장임) 친중국성향 승려들로 그 자리를 채워넣고있음 현재 티베트지역은 이주 한인들이 기득권을 차지해버렸고 경제난속에 회유당한 티베트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 이러한 상황이라 달라이 라마가 죽고나면 지도자를 잃은 티베트의 독립은 정말로 힘든 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 참고로 중국정부에 의해 납치된 게둔최끼니마는 아직까지 행방이 불분명함 중국정부가 몇년전에 "우리의 보호아래 평범한 삶을 살고 있으며 부모는 당에 고용되었고 아이의 형제자매는 대학에 다니고 있음^^" 이라고 말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음 ㄷㄷㄷ 이종격투기카페 펌
남편 바람으로 가정 파탄난 분들 꼭 상간녀 소송 하십시요. (사이다 주의)
현재 저는 이혼한 30대 후반 여자입니다. 유부남 남친이 있다는 글을 보고 빡이 쳐서 글을 씁니다. 제 남편도 바람이 주특기인 새끼였습니다. 처음 걸렸을 때 제가 봐주고 넘어간게 화근이었죠. 바람핀 거 걸리고 4개월도 안 지나서 또 바람을 피우더군요. 일단 제가 한 첫마디가 뭔지 아시나요? 부부사이에 믿음이 깨졌다고 폰 검사하고 그런거 아닌 거 같다. 믿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야근 한다고 해서 고생한다고 일부러 술자리도 보내줬어요. 그리고 그놈 잘때 카톡 스샷, 통화내역 다 찍어놨습니다. 블랙박스도 꼼꼼히 확인해서 동영상으로 남겼구요. 그리고 증거가 모일만큼 모였다고 판단되서 남편한테 말도 안하고 상간녀 소송을 했습니다. 소장이 날아갈때까지 그냥 이가 갈리고 치가 떨렸는데 최대한 참아가면서 살았습니다. 소장 받고 난 뒤 그 상간녀랑 남편은 화들짝해서 오해다 그런 거 아니다 난리를 쳤지만 저는 남편에게 나는 너랑 이혼 안해. 상간녀만 조질거야. 라고 말했고 남편은 결국 가출해서 그년이랑 동거 상태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전 이러한 내용을 회사에 내용증명으로 보내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내가 할수 있는 모든 내용증명을 보냈습니다. 그 상간녀 주소지가 본가로 되어있고 부모님 명의로 얻어주신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고 그 집까지 내용증명 다 보냈습니다. 그리고 민사를 걸면 통장 가압류 부동산 가압류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전 민사 걸고 통장 가압류를 걸어 놓은 상태로 1년 4개월 만에 승소해서 월급 가압류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재판 결과를 또 내용증명하여 보냈습니다. 결국 그 여자는 회사에서 짤리고 퇴직금도 가압류 조치를 해놓고 제가 다 챙겼습니다. 그러자 그 천년의 사랑같은 남편과 상간녀 싸우고 헤어지더니 남편은 집에 들어와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너랑 이혼 안해라고 말하고 일다니고 제 생활 열심히 했고요. 남편은 결국에 시댁으로 가서 생활하고 별거 아닌 별거 상태로 1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상간녀가 혼전 임신으로 결혼한다는 sns를 봤습니다. 결혼식장 날짜 다 아는 순간 저는 판결문 둘이 나눈 카톡 프린트 하고 블랙박스 usb에 담아 그 상간녀 결혼식장에 가서 축의금 통에 5만원 제 남편 이름으로 축의금 냈고 사돈되실 어른들한테 가서 증거가 담신 봉투를 건내고 식이 끝나면 보셔라 말하고 집에 왔습니다. 결국 그거 보고 혼전임신이지만 결혼식만 치룬채 그 상간녀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남편은 저보고 끝난 사이인데 그랬다고 노발대발 하길래 조용히 말했습니다. 니가 그런거야. 누가 먼저 꼬셨든 넌 가정을 지켰어야 했어. 니가 나를 이렇게 만들고 쟤가 저런 불행을 겪게 했어. 너는 나, 저 여자, 저 여자랑 결혼할 남자 이렇게 셋 인생을 쓰레기 통에 집어 넣은 거야. 너가 그런 거니까 앞으로 바람필 때 늘 생각해. 라고 말하고 이혼 소장을 내밀고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법원에 친정 부모님과 동행해서 부모님은 그놈한테 개쌍욕을 퍼부으셨고 고소를 하네 마네 하길래 고소하는 순간 이혼은 없다. 너가 또 누군가 만나고 있는 거 안다. (그냥 찍은 겁니다.) 걔 인생도 한번 나락 보내줄까? 했더니 입 쳐닫고 조용히 이혼 절차 밟았고 제가 그 놈한테 한 말은 병신이었습니다. 지금 유뷰남 만나시는 년님들아 결혼식장에 저같이 판결문으로 축의금 내서 잣되기 싫으시며 남의 남자랑 쳐자는 창x같은 짓 하지 마시구요. 남편이 바람피는 분들아 울지 마세요. 화내지 마세요. 겁 먹지도 마세요. 애 있어서 이혼 안하고 ATM으로 쓰실려면 쓰세요. 단, 상간녀 소송은 꼭 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람피는 그 새끼한테 꼭 말해주세요. 니가 쟤 인생을 망쳤다고. 니 양심 있다면 조금이라도 자책하고 죽고 싶길 바란다다고. 최고의 복수가 잘 사는 거라는 말 거짓말이예요. 최고의 복수는 잘 괴롭히다 버리는 겁니다. 내 인생이 괴로워서 그렇게 안하면, 이혼하면 그때 뭐라도 할걸 후회합니다. 꼭 복수하시길. 그리고 이 상간녀 미친x들아 니들이 만만해서 데리고 자는 거야 병신들 진짜. ㅊㅊ 혹시 엥? 간통법 없어졌자나ㅠ?? 라고 생각하시는 사람들~ 형사는 없어졌지만 민사는 쌉가능이야 ㅇㅇ 손해배상으로 진행된대 이혼할 때 상간자소송을 하면 가정법원에서 가정파탄의 원인을 두고 소송 진행하는 거고 이혼 안 하고 소송만 걸면 민사로 위자료 청구 하는 거고 ㅇㅇ 둘 다 위자료 청구하는건데 이혼하면 더 많이 내야 한다고 함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은데 상간녀, 상간남 소송 중복소송 걸수도 있다고 함
역사속 기괴한 가면들
흑인 흙 가면 (dirty eater mask) 16~19 세기에 신대륙으로 잡혀온 흑인들에게는 흙을 먹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서아프리카지역으로 부터 유례한 이 전통은 아프리카 지역에 널리 퍼져서 여러가지  맛의 흙을 모아서 거래하는 시장이 생길정도였다는데... 하지만 흑인 노예들의 주인장님들은 흙을 먹는게 여러 질병을 초래한다고 여기고 자신들의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서 저런 마스크를 씌운체로 들판에서 일을 시켰다고.... 로울리 여사의 미인 가면 (toilet mask) 여성들의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는 욕망을 이용한 사기는 19세기에도 성행했다 저 가면을 착용한체로 잠만자도 미백효과와 주름, 잡티제거 까지된다고 선전한 로울리 여사는 저 과학적인(?) 발명품을 특허까지 냈다고 한다. 마스크 팩의 시초쯤 되는건가? 스플래터 가면 (splatter mask) 1차 세계대전중 북부 프랑스 캉브레 전투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탱크가 사용된 전투) 영국군 탱크 조종사들이 쓴 보호가면. 가벼운 총격에도 탱크안에 대갈못 (rivets) 이나 페인트 조각이 얼굴에 튀었기 때문에 가죽과 쇠사슬로 만든 가면으로 얼굴을 보호했다 유아용 방독면 (baby gas mask) 1차 대전중 화학폭탄들의 위험으로부터 영아들을 지키기 위해 발명됬음. 굉장히 거추장 스러운 저 유아용 방독면은 옆에 달려있는 수동 펌프로 공기를 주입 시켜줘야된다고 한다 폭격이 떨어지는 비상사태중에는 무용지물일듯..... 알렉산더 페덴의 가면 (Alexander Peden's mask) 1661년 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금지하자 장로교 목사였던 페덴은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도망생활중 얻은 아이디어는 바로 위에있는 저 가면을 쓰고 다니는것... 지금보면 참 허접한 저가면을 쓴채로 10년을 넘게 도망다녔다니다가 결국엔 잡혔다 무협지에 나오는 인피가면이 저런거였다보다... 수치의 가면 (mask of shame) 17~18세기 독일에서는 저 가면을 씌우는 형벌이 존재했다고 한다. 남의 험담이나  야한 농담등의 사회상규를 어기는 실례를 범한 죄인들은 저 가면을 쓰는 치욕을 받았다 페스트 의사 가면 (plague doctor mask) 중세 유럽에 전염병이 퍼지는 도시에는 저 가면을 쓴 의사들이 나타났다. 당시엔 페스트가 냄새로 전염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저 새의 부리같은 가면에는 라벤다나 민트등의  다른 향신료를 넣고 다녔다고 한다. 유명한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도 페스트 의사 출신임 비자드 가면 (visard mask) 16세기 유럽 여성들이 쓰고다녔던 벨벳이나 비단으로 만든 검정색 가면. 햇볕으로 부터 얼굴을 보호하고 뭔가 신비한 기운을 나타내기 위해 귀족여성 들이 썼는데 저가면은 입쪽에 달린 구슬을 깨물어서 고정시켰다니 아마도 잔소리를 듣기 싫었던 남편이 개발하신듯 공포갤러리 히죽님 펌
이혼 후 딸과 아파트로 이사 왔는데 천장에선 검은 물이 떨어지고 수돗물에선 머리카락이 나와..gif
공포영화임 못보는 사람들 뒤로가기! 마츠바라 요시미는 이혼 후 다섯 살 된 딸아이 이쿠코의 양육권을 얻기 위해 법정 소송 중이다. 비오는 어느 오후, 두 모녀는 새 집을 구하기 위해 강가에 인접한 낡고 허름한 콘크리트 아파트를 찾아온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바닥엔 물이 고여있고, 가만히 다가오는 누군가의 손길에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딸 이쿠코가 갑자기 사라지는가 하면, 옥상에서 발견한 딸의 어깨엔 주인 모를 빨간 가방이 걸려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지만 딸과 함께 아파트 305호로 이사 오는 요시미. 그러나 버려도 버려도 빨간 가방은 딸에게로 다시 돌아오고 천장의 검은 물 자국은 날이 갈수록 퍼지더니 급기야 물방울이 되어 뚝뚝 떨어지기까지 한다. 관리인에게 항의도 해보지만 무관심한 반응 뿐. ㄷㄷㄷㄷㄷ 수돗물에선 머리카락이 섞여 나오고, 위층에선 아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요시미는 405호를 찾아가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다. 그 후로 자주 빗속에 노란 우의를 입은 여자아이의 환영을 보는 요시미 그러던 어느 날, 이쿠코의 유치원을 찾은 요시미는 노란 우의에 빨간 가방을 맨 소녀의 그림을 발견한다. 그 소녀는 바로, 유아실종 전단에서 보았던 '가와이 미츠코' 한편 시름시름 앓던 이쿠코가 405호에 쓰러진 채 발견된 날, 요시미는 그 집 문패에서 '가와이 미츠코'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며칠 후 두 모녀 앞에 빨간 가방은 다시 나타나고, 요시미는 갑자기 아파트 옥상으로 향한다. 홀로 남겨진 이쿠코 앞에, 검은 물 밑에서 솟구쳐 나온 죽음의 손길 요시미는 쓰러진 이쿠코를 안고,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는데...! 공포영화 검은 물 밑에서(2002) 출처 이거 어릴때 진짜 무섭게 봤던 영화인데!!!! 지금 요런 느낌 공포영화는 잘없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