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궁궐에 드리운 검은 구름.
“이렇게까지 하려는 연유가 무엇이냐.”
노인은 막 당도하여 장의를 벗는 윤화를 향해 물었다. 윤화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그래서 이 무화산을 고집한 것이냐.”
“…….”
“무녀로 살지 않겠다, 지난 날 그리도 발버둥 치더니. 무녀였던 니 할머니가 평생 지낸 이곳을 다신 발도 들이지 않겠다, 그리 호언장담하고 가출까지 마다하지 않던 니가.”
“…….”
“고작 그 분을 돕기 위해 그리 꼴도 보기 싫어하던 이 무화산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냐.”
“고작 이라니.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게 해주신 귀하신 분이야.”
“…….”
“그때, 마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난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 배웅도 못 해드렸을 거야. 그리고 난 아마 그날 그 우상댁 부인에게 곤장만 맞고 내팽개쳐졌을 테지.”
윤화는 무덤덤하게 그 말을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지체했더라면…엄마는…쓸쓸히 죽어갔을 거야. 저잣거리 왈짜패들에게 쫓겨 달아나고 있었으니…난 마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왈짜패들에게 잡혔거나, 우상댁 부인에게 잡혀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해줬겠지….”
“니 할머니도 그런 위험한 일은 마다하셨다. 니가 지금 하려는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기는 아는 것이야?”
노인은 한숨을 쉬며 털썩, 마당에 주저앉았다.
“할매가 그랬어.”
“…….”
“모든 것엔 다 연유가 있다고. 까닭 없는 것들은 없어.”
“…….”
“처음엔 무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어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겠다, 몸부림 쳤었지. 그래서 운명을 거스르는 위험한 내 행동에 결국 엄마가…죽고 말았지.”
“네 탓이 아니다, 연화야. 네 어미는 오래 앓던 병 때문에…”
“그래. 그 오래 앓던 병 때문에 그 해, 갑자기 돌아가신 건. 나의 위험한 행동에 엄마의 명줄을 재촉한 것이겠지. 나에게 무녀가 되라고 하늘이 점지해주신 까닭은 분명 있을 거야.”
“…….”
“그리고 그 연유를 난 그 날 찾았을 뿐이고. 그 날 나는 무녀로 살아야겠다, 마음먹었어. 처음으로 내 스스로를 무녀라 칭한 날이야.”
“…….”
“내게 무녀라는 운을 헛되이 내려주시진 않았을 거라, 할매가 맨날 얘기했었어. 그리고 난 이제야 그 말을 알 것 같고.”
“윤화야.”
“그 운명을 거스르는 것. 내 눈에 보이는 그 분들의 운명을 바로잡아 주지 않고 외면하는 것.”
“…….”
“그것만큼 위험한 일이 어디 있겠어.”
윤화는 허탈해하는 노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곤 괜찮다는 의미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열흘 뒤에 떠날 거야.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무사히 있으면 돼.”
그 말을 남기고 윤화는 방으로 들어섰다. 노인은 그런 윤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부녀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이가 있었으니….
“열흘…뒤에 떠난다라.”
* * *
“세자가 이리 어린데 벌써 빈 얘기라니요, 대비마마.”
중전과 후궁 최씨가 대비 전에 나란히 앉아 다과를 들고 있었다. 희끗희끗 머리가 센 대비가 찻잔을 조심히 내려놓으며 중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이가 지긋했지만 곧추 선 허리에서나, 힘 있는 목소리에서나, 날 선 눈빛에서나 권력의 힘이 그대로 묻어났다.
“세자가 책봉된 지 꽤 되었습니다. 미리 세자빈을 물색해놓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리 이른 것은 아닙니다, 중전.”
“하지만…”
최숙원은 중전과 대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생각해두신 규수는 있으십니까, 대비마마?”
“세자빈은.”
“…….”
“예로부터 하늘이 점지해준다 하였습니다. 이 뒷방 늙은이가 생각해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비는 무언가 속내를 감춘 듯한 얼굴로 찻잔을 다시금 쥐었다. 중전은 그런 대비의 속내를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최숙원도 이번 세자빈 간택 때 한 유세 펼치셔야지요?”
“예, 예…대, 대비마마?”
대비의 갑작스런 말에 최숙원은 화들짝 놀라며 중전의 눈치를 살폈다. 중전은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안 그렇소, 중전? 최숙원이 세자의 친모이니.”
“…대, 대비마마.”
“어찌 보면 모후 아니오? 그러니 아들 낳은 유세, 이럴 때 아님 언제 부려보겠습니까.”
도발이었다. 그것은 중전에 대한 대비의 도발이었다. 대비는 그 말을 그렇게 내뱉고 나선 농이라는 듯 허심탄회하게 웃어버렸다. 중전 역시, 대비의 말에 화를 낼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쓴 웃음을 지으며 최숙원을 돌아보았다.
대비와 중전의 기 싸움에서 최숙원만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렇지요. 최숙원이 세자의 친모이니…, 세자빈 간택 때는 중전인 나보다 더 발 벗고 나서야지요.”
“황, 황공하옵니다…중, 중전마마.”
“무얼 그리 떱니까, 최숙원. 가볍게 웃어넘기자 하는 소리들 아닙니까, 허허허.”
대비는 여전히 호탕하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중전은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대비는 애써 화를 억누르고 있는 중전의 표정을 살피며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세자빈은 하늘이 정해준다고는 하지만.”
“…….”
“내 눈여겨 두고 있는 규수가 있기는 한데.”
이제야 속내를 드러내는 구나, 중전은 속으로 생각하며 덤덤하게 찻잔을 쥐었다.
“대비마마께서 점해두신 규수가 있다면 아마 세자빈으로 꼭 맞는 아이일 테지요. 어느댁 규수를 눈여겨 두고 계시옵니까.”
중전의 물음에 대비는 묘한 웃음기마저 거두고 대비는 진지한 낯빛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번에 좌상이 딸아이를 낳았다지요.”
“좌상댁…여식말입니까?”
“좌상의 성품이나 정경부인의 인품은 말해 무엇합니까. 입만 아프지. 안 그렇소?”
“예. 그렇지요.”
“가문도 가문이거니와 좌상과 정경부인 사이에서의 아이는 분명 세자빈으로 손색없을 아이일 겝니다. 세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에요.”
대비의 본심을 들은 중전은 다시금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최숙원은 좌상이라는 말에 가만히 차를 들이켰다. 남몰래 우상댁의 여식을 세자빈으로 점지해두고 있던 중전은 이렇게 또 한 번 대비와 맞서게 되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 중전의 마음을 읽은 듯 대비는 한 수 굽히고 들어갔다.
“하지만 뭐 이건 어디까지나 이 늙은이의 생각인 게지요.”
“…….”
“중전이 며느리를 보는 것이니, 중전이 생각해두고 있던 규수가 있으시면 이 늙은이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중전 뜻대로 하세요.”
그러고 대비는 흐음, 헛기침을 하며 몸을 살짝 비틀어 앉았다. 중전은 미묘한 미소만 띤 채, 말없이 차만 들이켰다. 둘 사이에 낀 최숙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가만히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자빈은. 늘 그래왔듯이.”
“…….”
“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지고 금혼령이 떨어지는 것은 백성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관례일 뿐이지.”
“…….”
“다, 미리 점지해두고 간택령을 내립니다.”
“…….”
“잘, 아시지요 중전? 중전 역시 그리 간택되신 것이니.”
“그렇지요, 대비마마.”
“세자빈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최숙원과 주상과 잘 논의하여 세자빈을 간택토록 하세요. 그것이 곧. 하늘의 뜻일 터이니.”
* * *
대비 전을 나오며 중전은 붉은 치맛자락을 꾸욱 쥐었다.
“이 번만큼은 내 대비전과 맞서고 싶지 않았거늘.”
“…….”
“어쩔 수 없지. 해보시자는 게지.”
“중전마마.”
중전은 대비 전을 한껏 노려보았다. 사사건건 부딪히는 대비와 중전이었다. 슬하의 자식 하나 없는 중전이 왕가의 혈통을 중시 여기는 대비에겐 늘 눈엣가시였다. 결국 최숙원의 몸을 빌려 낳은 수안을 원자로 봉하였고 곧 수안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중전에게 곧 남은 궁 생활은 시한부와도 같았다. 자신을 이 넓은 궁에서 지켜줄 이는 하나 없었다. 중전은 그래서 세자빈만큼은, 자신의 세력에서 간택하고자 했다. 그래도 자신을 지켜줄, 지금의 왕이 죽고 최숙원의 몸에서 나온 수안이 임금이 되었을 때 자신이 이 넓은 궁에서 쫓겨나지 않고 버틸 힘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금의 모후가 아닌 자신이 대왕대비 전에 앉아 그래도 궁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후에 자신의 자리에 앉게 될 세자빈이 자신이 세운 사람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중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이상궁을 불렀다.
“우의정을 들라하라.”
자신의 뒷배를 봐주는 세력이자, 폭주하는 야망과 검은 속내를 지닌 어쩌면 지금의 중전과 꼭 닮은 우의정, ‘조민환’을 중전은 늘 가까이 했으며 믿고 따랐다. 그리고 그의 여식인 ‘민선’을 중전은 꼭 세자빈으로 세워야만 했다.
“대비마마와 결국 또 척을 지려 하십니까.”
“나를. 이 넓은 대궐에서 나를 지켜줄 이는 그 누구도 없다. 지금의 전하가 승하하시고 나면 내 목숨 줄은 썩은 동아줄과 다름없겠지. 지금의 좌상은 그 세력이 대단하다고 하나, 언젠간 그 곧고 바른 성품 때문에 좌상의 날개가 꺾일 날이 있을 게야.”
“…….”
“지금의 전하는 좌상을 가까이 하시겠지만. 후에 세자가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면.”
“…….”
“내가 그 세력을 바꾸어 놓아야지. 그때쯤이면 대비도…죽고 없어지겠지.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세자빈만큼은…우의정 여식이 되어야 해. 나도 지금부터 내 목숨 줄 하나는 부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중전마마…듣는 귀가 많사옵니다.”
중전은 붉은 치맛자락을 꾹 쥔 채, 성큼성큼 중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중전을 뒤에서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던 최숙원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김상궁.”
“예 숙원마마.”
“궁궐에 검은 구름이 드리우려 하는 구나. 아무래도 중전마마께서는 우의정댁 규수를 세자빈으로 점지해 두셨나 보다. 은밀히 우의정의 뒤를 살피게.”
“예.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나도…다음 보위에 오를 왕세자…내 아들을, 내 방식대로 지켜야 겠습니다, 중전마마.”
최숙원의 푸른 치맛자락이 봄바람에 사뿐 사뿐 흩날렸다. 분홍빛으로 옅게 물든 최숙원의 양 볼이 햇빛을 받아 복숭아처럼 탐스럽게 빛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