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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마지막 생존자들 ㄷㄷ

이종격투기카페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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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기본적으로 100세를 넘겨야 어케 뭘하든 할듯
3세기를 걸쳐 사신 분도 계시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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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과 동물들
다들 알다시피 콜로세움 시합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다들 영화속에서 검투사 한마리 던져두고 사자 네다섯 풀어서 싸우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 했던 것..ㄷㄷㄷ 콜로세움이 완공되고 벌어진 첫 오픈 행사에서는 9천마리 이상의 동물들이 동원되었는데, 이 때 동원된 동물들이 모두 죽을때까지 대학살 게임이 벌어졌고, 이 시합 이후로 나일강 근처의 하마들이 씨가 말랐다고 한다. 당시 로마 근처에는 바바리 사자 라는 사자들이 살고 있었는데, 콜로세움에서 사용할 동물들을 찾던 중 어? 근처에 사자들이 살고있네? 하면서 눈에 들어온 이후 대부분이 포획되었고, 콜로세움에 동원되며 개체수가 급감. 이후 극소수가 숨어살다가 1900년대에 멸종하고 말았다. 최근에는 모로코의 술탄들이 과거에 선물받아 동물원에서 존속시키고 있던 개체들이 유전적으로 바바리 사자의 후계로 인정받아 20마리 정도가 생존해있다고 보는 추세라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BC 55년 폼페이 제독이 벌인 시합에서는 무려 사자 600마리 VS 코끼리 18마리 드림 매치가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코끼리로도 유명한 북아프리카 코끼리도 콜로세움의 주요 피해자 중 하나이다.. 그나마 소수가 수십년간 버텨왔던 바바리 사자와는 달리 얘네는 진짜 콜로세움 때문에 멸종했다... 동물 싸움 이외에도 당연히 짐승 VS 인간 경기에도 수십마리가 동원되었고 로마시대 검투사들은 코끼리들이랑 창과 방패를 들고 싸워야 했다... 코뿔소도 원정까지 가서 수십 수백마리를 잡아와 동원하였으며 아프리카까지 원정가서 기린도 수백마리를 공수해와 경기를 벌였다 타조들도 한 경기에 수백마리씩 투입시켰고 ㄷㄷㄷ 해전에는 악어들이 수십마리씩 동원되기도 했다. 경기장 중앙에 물과 성곽을 세워 해전 이벤트가 벌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검투사들은 악어들 때문에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고...ㄷㄷ 그것조차 질리면 인간들끼리의 전투 시합을 벌이다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굶주린 맹수들을 풀어 난전을 벌이게 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기장의 동물 소모 속도가 무시무시했기 때문에 더이상 로마 근처에서 쓸 만 한 야생동물들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고 이 때문에 해외에서 잡아다 공수하기 시작했으며 맹수들을 직접 사육하여 경기에 쓰기 위해 사육장들이 많이 건설되었고, 경기가 벌어지기까지 맹수들을 관리하는 것에 비용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맹수들을 활용한 동물 쇼가 이 때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북극곰까지 콜로세움 전투에 끌려왔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ㄷㄷㄷ 인간이 미안하다!!ㅠㅠㅠㅠㅠ 싱글벙글지구촌갤러리 펌
당신이 몰랐던 영화 <트루먼 쇼> 속 디테일들.jpg
트루먼이 (역할상) 엄마 집을 방문했을 때 있던 앨범 속에 어렸을 적 트루먼 사진 위에 쓰여있는 문구 'My little clown(나의 작은 광대)' 우주복 입은 우주비행사로도 볼 수 있지만, 안테나 두 개가 달린 텔레비전으로도 볼 수 있음 책상 위에 놓여있던 비타민D, 결국 트루먼이 사는 세상은 진짜가 아닌 햇빛이 없는 촬영장(돔)이라는 말 트루먼의 행동이 수상해지기 시작하자, 감시하는 사람이 LA 타임스 구직 광고를 보기 시작함 트루먼이 메릴과 씨헤븐 아일랜드를 떠나려고 할 때 다리 옆 표지판에 적혀있는 "Are you sure it's a good idea?(이게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까?) 트루먼이 하는 대사 "Good morning, and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미리 인사할게요. 좋은 하루 보내시고 좋은 밤 되세요.)" 는 다른 전 세계에서 이 방송을 보고 있을 수도 있음을 내포 트루먼이 해변가에 앉아있을 때 벼락이 치는데 동시에 달도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음 우리가 보는 평범한 달은 아니라는 것 신문지 발행번호를 보면 Vol.XXIX(29), No.10,765(29년 6개월) 즉, 트루먼이 태어나면서 같이 시작된 신문이라는 뜻 트루먼이 여행사 업체에 방문했을 때 화장하느라 늦게 온 이 사람 왜냐하면 평소에는 출근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나 당황+바쁘게 화장하고 왔으면 목에 묻지말라고 대놓은 것도 빼는 걸 까먹음 참고로 뒤에 브로셔가 꽂혀있는 곳 제일 위에   있는 검은 동그라미는 카메라 맨홀 뚜껑 위에 있는 벽, 이 말인즉슨 이 벽은 쇼를 위해 지어졌으며 아무런 실용성이 없는 것 추가로 닭 그림 포스터 위의 동그란 검은색 원형도 역시 카메라 생각 이상으로 영화 곳곳에서 발견하기 쉬운 카메라의 흔적 이런 트루먼을 구하고자 하는 실비아가 TV 인터뷰를 하려고 전화한 곳은 '헤이그' 네덜란드의 헤이그에는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재판을 다루는 국제사법재판소의 법원이 있음 트루먼 쇼가 제작되는 씨헤븐 스튜디오센터의 게이트에 적혀있는 문구는. 'UNUS PRO OMNIBUS, OMNES PRO UNO' 영어로 하면 One for all, all for one(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 트루먼이 사라지고 나서 나중에 찾기 어려워했던 이유, 예전에 역할상 아빠로부터 받았던 카메라가 달린 반지를 나중에 재회하면서 다시 그 아빠에게 돌려줬기 때문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각한 트루먼이 스튜디오를 탈출하기 위해 탔던 보트의 이름은 산타마리아 콜럼버스가 탔던 배와 같은 이름으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기 위함
별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 ㄷㄷㄷ
그건 바로 한국의 제 22 보병사단이다 왜 별들의 무덤이냐 1982년 제22보병사단으로 편입된 이후부터 저주라도 걸렸는지 수많은 사건 사고들로 사단장들이 유례없이 갈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럼 몇명의 사단장이 갈려나갔을까? 한번 알아보자 1984년 장기하 사단장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으로 사단장 해임 1998년 류준선 사단장 포탄 폭발 사고로 사단장 해임 2005년 임치규 사단장 황민호 월북으로 사단장 해임 2009년 이양구 사단장 민간인 월북으로 사단장 해임 2012년 조성직 사단장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으로 사단장 해임 2014년 서상국 사단장 총기난사 사건으로 사단장 해임 2021년 표창수 사단장 북한 이탈주민 철책훼손 귀순 + 2021년 민통선 무단침입으로 사단장 해임 2021년 정형균 사단장 어떤 여성의 거짓 미투로 논란이 되자(무혐의 판결) 보직해임 2022년 이승오 사단장 귀순자 월북 사건으로 원래같았음 보직해임급 이지만 취임한지 보름밖에 안된걸 감안하여 경고처분 X신같은 사람도 있지만 진짜 별 이상한 억까로 해임된 사람도 꽤 된단걸 볼수있다 물론 저런만큼 보직중에 큰 사건 사고만 안터지면 무조건 진급하는 사단이기도하다 그게 어려울뿐 ㄷㄷㄷㄷㄷ 싱글벙글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애플의 이모티콘 세계관 탐구보고서🧐🍎
애플 이모티콘의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여 연구에 몰두하게 되는데...🧐 ✅=연구완 ☑️=연구중 ✅연구대상 1 7월 17일자 영수증 미스피츠,, 무언가 맞지 않는 옷을 산걸까..? 네모난 못들과 동그란 구멍들.. 영수증 주인은 도대체 뭘 산걸까..? ✅연구대상 2 John Appleseed의 신용카드 영수증 주인인걸까..? 생각보다 고퀄인 애플의 이모콘티,, 호달달 <연구결과> John(Johnny) Appleseed 본명 John Chapman, 존 채프먼 미국인 묘목상으로 미국에 사과를 널리 알린 인물 ✅연구대상 3 7월 17일자 달력과 찢어진 7월 17일자 달력 애플 이모콘티의 달력은 항상 7월 17일.. 7월 17일을 찢었으면 18일이어야 하는데 이모콘티의 세계관은 17일에서 멈춘걸까..? 저 날짜에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연구결과> 애플이 2002년 ical를 출시한 날짜 이모콘티 세계관에선 7월 17일부터 시간이 시작된 것임 ㅎㅎ ㅊㅋㅊㅋ ✅연구대상 4 1월 9일자 라이브 콘서트 티켓 A존 7월 19일이 아닌 1월 9일!!! 시간은 오후 9:41분.. <연구결과> jan 9th 9:41 무려 아이폰이 처음으로 공개됐던 날짜와 시간!!! 그뒤로 모든 아이폰 공식 소개화면의 기본 세팅시간은 9:41 애플 공식 홈페이지 ☑️연구대상 5 The Apple Times 애플 타임즈 1면의 탑뉴스에 화산폭발 기사!!! 기사내용이 매우매우 궁금하지만 콩알만한 글씨로 읽기조차 불가능,, ☑️연구대상 6 무언가 빼곡히 적힌 노트들 애플 이모콘티의 노트 이모지는 1개 빼고 몽땅 뭐가 빼곡히 적혀있음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걸까..? 알지..? 보이면 삐삐쳐줘,, 유일한 빈 노트 이모콩티.. ✅연구대상 7 필기체 손편지 여태까지 이모콘티를 보면 말도 안되는게 적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보이는건 Here's for the 블라블라~~ <연구결과> Here's to the crazy ones. 미쳐 있는 이들을 위하여. The misfits, the rebels, the troublemakers, the round pegs in the holes, the ones who see things differently. 세상과 맞지 않는 이들, 반항아들, 문제아들, 사각 구멍에 안 맞는 둥근 못들, 세상을 다르게 보는 이들….. - ‘1997 Think Different’ 캠페인중 스티브잡스의 연설 밑줄 친 단어들은 연구대상 1에 영수증 계산목록들 ✅연구대상 8 10:09분을 가르키는 시계들 왜 모두 10:09분을 가르키고 있는걸까..? <연구결과> 전시 상 가장 완벽한 각도인 10:10 하지만 애플은 그보다 빠르다는 의미로 10:09를 추구하는 중 하지만 삼성은 애플보다 빠르단 의미로 10:08을 추구하는 중 ✅연구대상 9 ???? 주판 나는,, 주판을 볼 주,, 모른다,, 따흑 <연구결과> 주판이 나타내는 숫자 1976 1976년 = 애플의 첫 컴퓨터 애플1 탄생년도 -이모콘티 연구결과보고 끝- + 디테일해서 신기한 그 외 이모티콘들 출처
2차대전 당시 광기와 학살에 맞선 10명의 의인들
오스카 쉰들러 이 분야 최고 네임드. 흔히 선한 인간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나 실상은 부패한 기업인이자 외도를 일삼고 나치독일을 위해 간첩질까지 했던 기회주의자였다. 사실 나치독일은 협조적인 기업인, 쉰들러에게 강제노역 자원으로 유대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래 공짜 노동자로 유대인을 이용해먹으려던 쉰들러는 점차 유대인을 보호해주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아예 유대인들을 집단으로 빼돌려 학살로부터 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게슈타포에게 대량의 뇌물을 먹였고, 유대인을 살릴 음식과 물자를 암시장을 통해 몇 배나 비싼 값에 사야했으며 전쟁 말엽에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유대인 보호에 소모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전쟁 이후 사업 실패까지 겹쳐 파산, 설상가상으로 심장병에 걸린다. 이때 그가 살려주었던 1200명의 유대인들이 쉰들러의 생활비와 병원비를 댔으며 오스카 쉰들러는 1974년 사망 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묻혔다. 현재까지 이스라엘에 묻힌 유일한 나치 당원 출신이다. 소사 멘데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에 주재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외교관. 포르투갈은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유럽최강이 되어가던 독일의 환심을 사고자 했고 독일의 침공을 피해 오는 난민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프랑스 내 유대인, 집시, 반파시즘 지지자 등은 여전히 중립국인 포르투갈로 도주하고자 했다. 이에 본국의 명령인지, 양심인지 고민하던 멘데스는 결국 양심의 손을 들기로 결정. 72시간동안 밤을 새워 미친듯이 비자를 찍어냈고 그 비자를 받아 포르투갈로 도주에 성공, 목숨을 구한 이들이 3만명에 이르렀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간 멘데스는 책임을 지고 파면조치되었고 명예는 사라지고, 돈도 없는 궁핍한 여생을 살다가 1954년에 죽었다. 그의 명예는 1988년이 되어서야 포르투갈 정부에 의해 회복된다. 하인트 지크프리트 하이드리히(우측) 사진의 두 소년은 우애가 깊었던 하이드리히 형제로, 모두 독일의 군인이었다. 형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무뚝뚝한 성격이었으나 동생과 조카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전쟁 중 체코 망명정부와 영국정부에게 암살당했고 형의 유품을 정리하던 동생 지그프리트는 형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된다. 사실 라인하르트는 게슈타포를 만들어 민간인 사찰 및 학살을 일삼고 힘러와 함께 홀로코스트를 주동한 인물로, 그야말로 인간 백정이었던 것이다. 이를 깨닫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지그프리트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형의 죄를 속죄하고자 유대인 구출을 시작한다. 그는 유대인둘의 신분증을 위조해 탈출시키거나 수용소에서 빼돌려 중립국에 풀어줬다. 그러나 2년째 이 작업을 하던 1944년, 지그프리트는 게슈타포가 자신을 수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그리고 체포와 대한 두려움과, 고문으로 유대인들의 정보를 털어놓게 될 것을 우려해 그는 권총으로 자살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종전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게슈타포의 수사는 단지 사소한 문제로 인한 것이었을 뿐 지그프리트가 유대인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라울 발렌베리 스웨덴의 외교관. 1944년, 히틀러는 나치독일과 동맹은 맺었으나 비협조적이었던 헝가리 정권을 갈아치웠고 이에 헝가리의 유대인들이 그대로 학살 위기에 내몰렸다. 발렌베리는 이때 스웨덴 대사관의 이름으로 2만명의 유대인들에게 가짜 서류와 비자를 발급했고 사비까지 털어가며 1만 3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은신처를 마련, 더 나아가서는 독일군을 협박해 7만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추가로 구했다. 이는 발렌베리의 가문이 유럽 제일의 재벌 가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치독일은 발렌베리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헝가리는 소련에게 점령되면서 독일군은 퇴각하게 된다. 하지만 1945년, 유대인 문제를 논의하고자 소련군을 찾아간 발렌베리는 실종됐고 현재까지도 명확한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다. 가장 유력한 설은 그를 스파이 취급한 소련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가 1947년에 처형당했다는 설로, 스웨덴 정부도 이 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욘 라베 중일 전쟁 당시 독일의 재벌 기업 지멘스의 중국 담당 간부. 그는 나치당에 가입한 나치 당원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나치의 본격적인 전쟁 및 확장 이전이었고, 더군다나 독일 본토를 떠나 회사의 해외지부 생활 30년 째였던 욘 라베에게 히틀러는 힘들었던 조국의 경제를 살리고 1차대전 패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지도자였으리라 추측된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무차별 학살을 시작하자 욘 라베는 자신이 평생동안 모은 재산을 모조리 털어 안전지대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안전지대는 어떤 울타리도 없이 그냥 도로가 경계였고 욘 라베와 그를 도운 외국인들은 온몸으로 일본군의 안전지대 진입을 막아야 했다. 이조차도 욘 라베가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시민이자 나치당원이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안전지대까지 위태로워지자 그는 히틀러에게 편지를 써 학살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독일은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중국과 우호적이었으며,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히틀러는 합리적인 지도자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동맹국 지도자의 압력이면 이 미친 학살을 막을 수 있을 거라는데 마지막 희망을 걸었으나 독일 본국은 그의 편지를 당연히 묵살했다. 종국에는 일부 일본군이 안전지대까지 뚫고 들어와 학살과 강간을 일삼았지만 결국 욘 라베는 20~30만이 죽은 난징 학살의 현장에서 20만에 달하는 목숨을 구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귀국 후 동맹국 군사작전 방해를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종전 후에는 나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연합국에 체포, 난징에서의 일과 재판으로 전재산을 날렸다. 욘 라베가 가족 부양마저도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는 소식을 들은 난징 시민들은 2차대전 때 도시가 초토화되고 이어진 국공내전으로 재건도 못하던 1948년, 돈과 물자를 긁어모아 욘 라베에게 전달했지만 당시 중국 경제가 너무도 어려워 큰 지원은 못됐다. 결국 1950년, 욘 라베는 여전히 가난한 생활 속에서 사망하였다. 1997년 그의 묘지는 난징으로 이장되었고, 현재 난징에는 그가 살던 집이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허펑산 오스트라아에 주재하고 있던 중화민국의 외교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유대인들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그들을 구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은 내륙국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탈출을 위해 반드시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했는데, 어떤 나라도 그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내 32개 대사관이 모조리 유대인에 대한 비자 발급을 금지하고 있을 무렵 허펑산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이 당시 중국 상하이는 국제 조계지라 비자 발급에 어떠한 조건도 필요가 없었다. 이를 간파한 허펑산은 오스트리아 내 유대인들이 상하이를 거칠 수 있는 서류들을 찍어내기 시작한다. 나치 독일은 즉시 중화민국 영사관 건물을 박탈, 허펑산을 탄압하려 했으나 그는 근처 임대아파트에 숨어서 계속해서 서류를 발행했다. 결국 독일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중화민국이 그를 강제 송환하기까지 그는 4천 명의 유대인들이 상하이를 거처 호주나 홍콩 등지로 도망칠 수 있도록 하였다. 본국으로 송환 당한 허펑산은 크게 질책 당했지만 이후 중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 하고, 독일도 미국에 선전포고 하면서 어찌됐건 적을 엿먹인 셈이라 계속해서 외교관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밀려난 이후에도 외교관으로 일했고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조르조 페를라스카 이 이탈리아인은 인생 자체가 다이나믹했다. 젊은 시절 뼈 속까지 파시스트였던 그는 무솔리니를 맹신하며 따랐다. 심지어 외국, 스페인의 내전에까지 파시스트로 참전했으며 거기서도 미친놈처럼 싸웠다. 얼마나 광신적이었는지 후일 스페인의 독재자가 되는 프랑코를 직접 만나 "귀하는 이태리인이지만, 위급한 일이 생기면 스페인 사람으로 대우하겠다."는 서류를 받을 정도였다. 스페인 내전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또 2차대전에 참전, 헝가리에서 이탈리아 군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면서 그의 인생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무솔리니는 거꾸로 메달려 처형당했고, 헝가리는 연합군에 항복한 이탈리아의 군인들을 구금했다. 이에 페를라스카는 탈옥을 감행, 즉시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갔고 위에서 언급된, 프랑코에게 받은 서류를 내밀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에게 스페인 대사는 함께 유대인을 구출하자고 제안했고 학살에는 반대하는 파시스트였던 페를라스카가 이를 승낙한다. 그는 스페인 사람으로 위장, 곳곳에서 유대인을 빼돌린 후 돌봐줬고 심지어 아이히만이 보는 앞에서 유대인을 빼돌린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라울 발렌베리와도 협력했던 그는 소련이 헝가리를 해방시키자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40년 간 지인, 친구, 가족 등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1987년이 되어서야 은혜를 갚고자 그를 수소문하던 유대인들에 의해 행적이 알려졌고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이스라엘 등으로부터 훈장을 받으며 세계의 영웅이 됐다. 이후 1992년 82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알베르트 괴링 나치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의 친동생이다. 이 형제는 오늘날에도 대표적인 역사의 아이러니로 꼽힌다. 형은 나치당 창설 초반부터 참여, 나치독일의 기틀을 만들고 이끈 2인자였으나 동생은 처음부터 나치의 폭력성을 혐오하는 반나치주의자였다. 그는 2차대전 이전부터 반나치 운동을 하고 반나치 인사들을 국외로 빼돌렸다. 2차대전 발발 이후엔 형의 배경을 이용, 나치독일의 군수공장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이 공장들을 이용해 유대인들을 노동자로 쓴다는 명목으로 빼돌렸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파업을 독려, 생산도 제대로 안했으며 체코의 레지스탕스들을 지원하고 소련군 포로들도 수용소에서 빼내 중립국에 풀어줬다. 너무 대놓고 반나치였던만큼 몇 번씩이나 체포되었지만 그때마다 형의 이름을 팔아 풀려나거나, 심지어 형인 헤르만 괴링이 직접 구해주기도 했다. 헤르만 괴링은 알게 모르게 동생의 이러한 행동을 도우며 동생을 보호했다. 전후 형이 전범으로 체포되자 이번엔 자신이 형을 구하고자 형이 자신을 도왔음을 근거로 필사적으로 구명했지만 결국 헤르만 괴링은 사형을 선고, 면회에서 만난 동생에게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이때 알베르트 괴링은 굉장히 슬퍼했다고 한다. 전후 '괴링'이라는 이름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음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이름을 개명하지 않았다. 홀몸임에도(혼외 자식이 있었지만 41년 전사) 결혼하지 않고 형의 가족을 돌봐주었다. 또 그는 자신이 전쟁 중 한 행동을 알려 유명세를 타려고 하지도 않았다. 1966년, 남편이 죽으면 아내에게 남편의 연금이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는 힘들었던 자신 곁을 수년 간 지켜준 가정부와 혼인신고를 하고 일주일 뒤 병사했다. 빌헬름 호젠펠트 나치 독일의 군인. 초반에는 나치를 옹호하고 지지했으나 반유대주의, 반가톨릭 정책에 실망했다. 이어 폴란드에 부임한 그는 나치가 폴란드에서 저지르는 학살을 목도하며 경악했고 사상적 전향을 하게 된다. 그는 폴란드어를 배워 폴란드인 포로들과 소통했다. 또 직권으로 포로들이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인간답게 대우했다. 나아가 수감된 폴란드인들을 형기보다 빨리 내보냈으며 자신이 부임하는 곳마다 폴란드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위조 신분증을 주고 고용해 학살로부터 지켰다. 그는 나치독일 정부에 공식적으로 학살을 멈추라며 반항하기도 했다. 또 호젠펠트는 전쟁 막판 한 폴란드계 유대인을 살려주는데 그 사람이 영화 피아니스트로 각색되는 이야기의 주인공, 불라덱 슈필만이었다. 그러나 호젠펠트의 최후는 오늘 다루는 그 어떤 이들보다 잔혹했다. 그는 폴란드에 들어온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혀 사형을 선고받았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포로수용소장이었으며,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선 온갖 범죄들이 행해졌으니까. 그가 구해준 유대인, 폴란드인들이 떼지어 호젠펠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탄원했으나 사형을 25년 형으로 감형받는데 그쳤고, 소련은 그를 가두고 고문했다. 너무 심한 고문에 뇌졸증을 여러 번 겪던 그는 종국에는 지능도 7세 수준으로 퇴화, 자신이 왜 고문받는지도 모르는 채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렇게 잊혀진 호젠펠트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슈필만에 의해 재조명됐고 10년에 걸친 조사 끝에 아무런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 2009년 훈장이 추서되고 명예가 회복됐다. 니콜라스 윈턴 2차대전 당시 영국의 은행원이었다. 그는 휴가로 스위스에 갔다가 친구가 보여준 나치독일의 체코의 수용소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자신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친구들과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외국의 유대인 아이들을 입양해 독일로부터 구하는 인도적 운동이 한창이었다. 윈턴은 이를 이용해 체코에서 유대인 아이들을 빼내 영국에 입양보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재산을 털어 경비를 마련했고, 나치 장교들에게 뇌물을 먹였다. 결국 그는 여러 번의 위기 끝에 669명의 아이들을 입양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더 이상은 위태로워 마지막으로 250명을 입양보내기로 하고 모든 절차를 밟은 뒤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그에게 들려온 소식은 기차를 나치독일이 강탈, 250명의 아이들이 실종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전쟁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250명 중 전후 생존한 유대인은 2명 뿐이었다. 이들을 구하지 못한데 엄청난 죄책감에 짖눌린 윈턴은 자신이 한 일들을 발설하지 않았다. 1988년이 되어서야 그의 아내가 창고에서 아이들의 목록을 발견하였고 윈턴은 이것도 태워버리려고 했지만 아내가 설득해 그의 선행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구한 669명의 아이들은 6천명의 가족으로 불어나있었고 감동적인 재회 후 윈턴은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며 106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을 자다가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참 잘된 일이지만, 호젠펠트와 비교하면 뒷맛이 좀 씁쓸하기도 하다. 싱글벙글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최근 몇년 간 그것이 알고 싶다 인상 깊었던 편들 추천.jpg
1062회 흔적 없는 증발 - 부산 신혼부부 실종 사건 그것이 알고 싶다를 조금 봤다고 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인상깊은 미스테리한 사건.  신혼부부가 실종되었는데 나가는 장면은 찍혀있지 않는 이상한 사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남편의 전 여자친구.  1068회 죽음을 부른 실습 - 열아홉 연쇄사망 미스터리 최근 영화 <다음 소희>의 모티브가 된 회차. 초반에 어떻게 사망하게 된 지의 추리가 상당히 긴데 지금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보게 되면 조금 길다고 느껴질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듯 함.  1076회 열여덟 계단 밑 백골, 덕성 63 - 부평 콘크리트 암매장 사건 :백골 시신이 콘크리트에 암매장 된 채 발견된 사건. 용의자를 찾는 과정이 상당히 인상깊은 사건.  1077회 아침의 살인자 - 배산 여대생 피살 사건 미스터리 :개인적으로 가장 소름 돋았던 편 중에 한 편임. 유명한 회차 중에 한 편. 선입견에 대한 생각을 뒤집었던 회차.  1090회 DNA와 단추의 증언 - 미입주 아파트 살인사건 미스터리 많은 사람들이 교수를 용의자로 추측하고 있는 데 이 회차를 전체적으로 보면 사건 자체가 미스테리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어서 인상깊었던 회차. 1134회 빨간 대문집의 비극 - 고 허은정 양 납치살인사건 : 유일한 목격자인 할아버지가 사건 이후 몇달만에 돌아가셨던게 안타까워서 기억남는 회차. 상당히 잔인했던 내용이라 기억에 남는 회차. 1154회 드레스룸의 마지막 메세지 - 전주 20대 여성 사망 미스터리 : 피해자가 일란성 쌍둥이 중 한명인데 아이가 이모를 보고 울음을 터트린게 너무 안타까웠던 기억이 남. 길게 얘기하긴 그렇지만 남편의 행동에 석연치 않은게 한두가지가 아님. 안타깝게도 무죄 판결.  (시체가 나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 - 나왔다면 정정 부탁할게)  1160회 새벽 4시의 울음소리 - 마지막 목격자는 누구인가? :정나리씨의 실종 사건. 이 사건이 기억 남는 이유가 그알 측에서 제보를 받았는데 피해자가 살던 원룸 근처에서 피해자의 것으로 추측되는 루이비통의 가방을 주웠다는 여성의 제보가 있었음. 진품에다가 싫증 나서 버릴 제품이 아니라는 전문가의 말에 수사 증거물로 이관됨.  1162회 그 남자의 매니큐어 -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 그알이 아니고도 다른 여러 방송에서 많이 다뤘던 사건. 16년만에 새로운 제보가 들어왔는데 이 사건 5일 전 납치당할뻔하다가 탈출한 사람이 있었고 그런 면에서 인상깊었던 회차. 유력 용의자가 자살을 함.  1169회 실종 3년의 비밀 - 사라진 신혼부부와 노르웨이의 여인 처음에 소개한 부산 신혼부부 살인사건의 연장선상 방송. 유력 용의자가 살고 있는 노르웨이까지 직접 방문하였으나 재판과정에서 문제가 생겨서 용의자는 한국에 오지 않음.  1173회 사라진 손목, 잘려진 손톱 - 영동 여고생 살인사건 경찰의 빡치는 반응 때문에 더 분노를 일으켰던 사건. 잊어버리기에 급급하고 덮어버리기에 급급한 모습들에 분노했던 사건. (2014년 방송 연장선상 방송)   1186회 오후 2시의 미스터리 - 양산 여학생 실종 미스터리 오후라는 대낮에 2명이나 실종되어 기억에 남는 사건. 부산에서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두 사람이랑 비슷한 제보를 받게 되어 앵벌이 쪽으로 깊게 타고 들었지만 크나큰 소득은 없었음.  1190회 그날의 접촉 - 부산 농수로 살인사건 <아침의 살인자>편 이후로 내가 가장 인상깊었던 편. '즉시성 시강' 이라는 상태가 피해자한테 왔는데 너무 긴장해서 힘을 강하게 주다가 사망한 현상. 강제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후 공포끝에 강한 힘을 주다가 그 자세 그대로 세상을 떠나신게 안타까웠던 회차. 경찰들이 끝까지 추적할거라는 의지를 나타낸 회차.  1195회 컴퓨터 로그기록의 비밀 - 수의대생 이윤희는 어디로 사라졌나 여러모로 미스테리가 많았던 회차. 사람들이 끔찍한 결론을 추측하곤 했는데 아무래도 그 추측이 맞는거 같아서 그런 의미에서 공포스러운 회차.  1212회 사라진 엄마와 마지막 고객 - 자동차 영업사원 윤남희 씨 실종 사건 엄마가 실종되고 나서 이모가 육아를 도맡아했는데 아이가 '엄마를 찾아주세요' 라는 동화책을 이모에게 자주 읽어달라고 해서 이모(님)이 많이 속상해했던게 기억남는 회차.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도 어머니에 대한 모든 흔적을 남기고 싶어 이 편을 DVD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던 회차임. 시신 없는 살인 사건.  1242회 아라뱃길 살인사건 미스터리 - 범인은 무엇을 숨기려 했나 치아치료까지 할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왜 찾는 사람도 없을까. 아니면 범인이 살아있다고 숨기면서 사는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게하고 마지막즈음이었나 아리랑이 나오는데 그렇게 구슬플수가 없음.  1248회 단칸방의 유령들 사건은 아니고 복지제도 등에 대해 너무나 참담함을 많이 느꼈음. 우리나라는 진짜 이런 복지제도 면에서는 아직도 후진국임. 발전이 없음. 그리고 뒷북이야. 그런면에서 너무나도 슬펐던 회차. 그렇다고 복지담당자들만 탓하기는 너무 힘들었던 일.. 결국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인원과 예산을 확충해야 함.  1271회 다락방의 침입자들 - 제주 중학생 살인사건의 진실 어머니를 지켜주겠다던 아들인데 옛 아버지에게 참혹하게 살해되서 너무나 안타까웠던 회차임. 범인으로부터 지속적인 폭행으로 신변보호를 요청했는데도 그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 비상호출용 스마트워치를 지급했으나 실수로 지급이 늦어졌고 그 스마트워치를 받기 전에 살해 당하고 만 것. 분노할 수밖에 없었음.  1281회 나비약과 뼈말라족 걸그룹 등 여자연예인의 지나친 마름을 동경해 프로아나 등 나비약 등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고발한 회차. 문제는 방송에 나온 병원이 방송 후 더 사람이 많아졌다는(...) 그러라고 한 방송이 아닐텐데.  1293회 악마의 이상한 선택 - 막대기 살인사건 미스터리 내가 알고 있는 살인사건 중 상당히 엽기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살해함. 그냥 영상을 보는 것인데도 상당히 고통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주로 어리거나 아랫사람에게 폭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음.  1324회 고발과 증발 - 마지막 통화 미스터리 가스라이팅이 의심되는 실종 사건. 울고 웃다가를 반복해서 그녀의 조울증이 의심되었던 회차. 유력한 용의자가 있지만 물증이 없다고 함.  1325회 공포의 하얀 차 - 연쇄 성폭행범 김근식의 출소 최근 성폭행범 중에 가장 기사화가 많이 됐던 성폭행범. 당시 인천에서 하얀 승합차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한게 유명했던 이유가 이 사건 때문. 오직 아동과 청소년만을 노렸던 끔찍한 성폭행범.  1341회 1216호에 갇힌 진실 - 정다금 사망 사건 최근 그것이 알고 싶다 회차 중 화제가 된 사건. 학교폭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고 이 사건은 싸이월드 전성기 시절부터 유명했던 사건이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편. 가해자로 추측되는 4명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정다금씨가 어떻게 사망한 건지 아무도 모를 듯한 사건.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로 대표되는 장기간의 혼란기가 저물어 가던 기원전 4세기, 당시 유라시아 세계를 뒤흔들어 놓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불세출의 정복군주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의 등장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의 군사 강국들을 시작으로 이집트, 페르시아 등 당대의 대국들을 모조리 깨부수며 남아시아까지 진출, 대제국을 건설하고 오늘날 헬레니즘 문화라고 불리는 그리스풍 문화를 전파해 훗날 극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대이동으로 그리스 문화 뿐만 아니라 역방향의 전파도 이루어지게 되는데, 제국의 관리를 위해 그리스계 이주민들이 제국 각지에 흩어지게 되면서 그리스인들 역시 전세계의 문화를 접하고 받아들이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세계의 넓음을 깨닫고 새로운 문화에 감명을 받은 그리스 여행자들이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계의 여러 절경과 랜드마크가 알려지게 된다. 이를 최초로 모아 정리한 기원전 2세기 시인 안티파트로스는 세계의 명물 중에서도 7개의 건축물을 최고로 소개했다. "나는 전차들이 그 옆을 따라 경주를 할 법한 난공불락의 바빌론 성벽과, 알페우스 강변의 제우스를 목도하였다. 공중정원과, 태양의 거상과, 장대한 인공산이라 할 만한 높다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보았다. 그러나 내가 구름에 닿을 만큼 우뚝 서있는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전당을 보았을 때, 이 모두가 그 그늘에 가려졌으니, 태양마저 올림푸스 밖에서 그와 견줄만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 기원전 4000년경 부터 이어져 온 세계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바빌론은 기원전 그야말로 세계의 수도라고 불릴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한 후에도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의 대도시 중 하나로 손 꼽히던 바빌론은 이후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로 대접받았다. 당시 압도적인 존재감의 바빌론은 바빌로니아에게 핍박받던 유대인들에게 제대로 찍혀 구약 성경에서 멸망해야 할 죄악의 도시로 온갖 저주와 디스를 당하기도 할 정도였으며 도시의 중심인 에테멘앙키 신전이 후일 야훼의 분노를 사는 바벨탑으로 각색된 바도 있다. 그 위용에 걸맞게 바빌론에는 7대 불가사의가 2개나 존재한다. 그 위에서 전차가 달릴 수 있다고 언급된 바빌론의 성벽은 놀랍도록 거대한 규모로 도시를 감싸고 있었으며 특히 가장 거대한 '이슈타르의 문'과 그 앞 개선로인 '행진의 거리'는 아름다운 외양으로도 유명했다. 청금석으로 화려한 푸른 장식을 두르고 용과 사자, 황소 장식이 늘어서 있었다. 또 하나의 불가사의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으로 앞서 본 바벨탑과 성벽을 모두 건설한 장본인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기원전 7세기 아내를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고층 식물원이다. 왕비 아미티스는 초목이 우거진 고원지대였던 메디아에서 정략 결혼을 온 이후 황량한 바빌론에 적응하지 못해 향수병을 앓았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한 선물이었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수차와 유사한 방법으로 고층까지 물을 공급했다고 추정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건물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고. 현재 터키에 위치한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영묘는 정교하고 거대하기로 유명한 무덤으로 오늘날에도 마우솔레움이라는 단어가 영묘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남아있을 정도이다. 한 변의 길이가 125m에 달하는 정사각형 기단의 무덤이었다. 기원전 4세기 이 지방의 통치자였던 마우솔로스와 부인이 안치되었고 11~14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어 이슬람 세력이나 십자군에게 석재를 털렸다고 한다. 무덤의 주인장은 대충 이렇게 생겼다.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은 기원전 5세기 제우스 신전에 바쳐진 신상으로 상아로 마감한 뒤 금과 흑단으로 치장한 12m 높이의 거상이다. 보는 사람들을 모두 압도하는 위용이 있었다고 하며 신전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거대했으나 4세기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후 수십년 뒤 화재로 소실되었고 신전 역시 로마가 기독교를 채택하며 파괴되었다. 로도스의 청동 거상은 콜로서스라는 단어를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태양신 헬리오스에게 승전 기념물로 봉해진 30미터가 넘는 동상이다. 기원전 3세기 로도스 섬 항구의 랜드마크였으나 56년만에 지진으로 쓰러지고 800년 후 이슬람 우마이야 제국이 뜯어내 유대 상인들에게 고철로 팔아버렸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안티파트로스가 7대 불가사의 중에서도 최고로 뽑은 건물으로 무려 올림푸스에 견줄 정도로 찬양을 한걸 보니 상당한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자그마치 3번이나 다시 지어졌는데 그 중 두번째 건물은 웬 고대 관종이 병신짓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불을 질러 태워먹었다. 청동기 시절부터 존재했고 3세기 경 고트족에게 털리는 등 수난을 겪다가 역시 기독교화 된 로마에 의해 5세기에 폐쇄된다. 기자의 대 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불가사의로 아이러니하게도 불가사의 중 가장 먼저 만들어져 최후까지 살아남았다. 높이 138.5미터에 외부 석회암과 금 도장이 남아있던 시절에는 146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로서는 정말 경이적인 높이로 157m의 쾰른 대성당이 600년 만에 완공되기 전까지 3800년 동안 인류 문명의 가장 높은 건축물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26세기에 지어져 7대 불가사의로 선정되던 당시에도 2000년이 넘은 고대 유적으로서 외화 벌이의 주력 관광 상품이었다. 안티파트로스에 의해 선정된 초대 불가사의 이후 가끔 멤버의 변동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알렉산드리아 파로스의 등대가 유명하다. 안티파트로스 입장에서는 워낙 자주 보던 건물이라 익숙해서 선정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던데 아무튼 130m의 높이에 30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고 43km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밝아 후대에 불가사의 중 하나로 자주 뽑히고는 한다. 벼락이나 지진으로 자주 고생하다가 마침내 14세기 대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콜로세움은 서기 1세기에 완공된 건물으로 짬이 딸리는 편이라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일부 후대 기록에 선정되는 경우가 있다. 5만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으로 공사를 기념하며 선배 불가사의들을 모조리 디스하는 행사시가 유명하다. 이건 좀 길어서 걍 나무위키 가서 보도록 하자 그 외에도 동 시대에 존재한 거대 건축물로는 마야 엘 미라도르의 라 단타 피라미드나 중국 진나라의 진시황릉 등이 있었지만 아무리 그리스 여행자들이라고 해도 거기까지 가보지는 못했기에 불가사의는 지중해와 중동에서만 선정되었다. 싱글벙글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일본 장애인 유튜버의 휠체어로 대중교통 이용기
몸이 불편한 일본인 이 유튜버는 약 10년 전부터 휠체어 타고 대중교통 이용하는거에 대해서 찍어올렸는데 일본이 상당히 장애인 이동보장이 잘되어있어서 올림 *코로나 전에 올린것들이라 마스크 다들 안썼음 1. 도쿄 시내버스 우리나라로 치면 저상버스의 경우임 2014년엔 도쿄 버스는 승차문 바로 옆에 캐비넷? 열면 발판을 꺼낼 수 있게 해놓음 이걸 꺼내서 휠체어가 올라탈수 있게 기사가 발판을 깔아줌 최근엔 아예 버스 입구 발판이 뚜껑 접이식?으로 해서 열면 발판으로 놓을 수 있게 해놓음 승객은 올라타기만 하면됨 휠체어석 옆 하차벨을 누르면 운전석 하차벨 램프에 장애인 마크가 뜸 (이러면 내릴때도 발판 놓을 수 있게 기사가 운전석에서 나옴) 2. 일반 전철 같이 플랫폼까지 가서 발판을 깔아줌 *보통은 같이 안가고 이용자가 혼자 내려가면 플랫폼에서 상주하면서 대기하는 직원을 만나는 경우도 있음. 장애인이 타는 탑승구역은 한정되어있기 때문 탑승 완료 3. 신칸센 (우리나라로 치면 KTX) 휠체어 이용자의 경우 휠체어석을 구매 할 수 있다. 이경우 티켓에 휠체어 마크가 붙음 이때도 직원이 안내를 위해 나와서 같이 플랫폼까지 이동함 휠체어석으로 이동 참고로 신칸센은 턱이 없어서 발판이 필요 없음 KTX도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할 때 전용엘베를 사용할 수 있음 KTX는 탑승구에 계단 있음 휠체어석의 경우 보통 3인이 앉는 자리에 의자 하나가 빠져서 휠체어 놓을 수 있게 해줌 통로도 확보가능 참고로 코레일 KTX도 넓은 장애인석이 있어 근데 예매등 문제로 뒷얘기가 많음 ㅠㅠㅠ (장애인석은 현장예매만 된다거나 KTX가 탑승구에 계단이 있어서 탑승할때 리프트로만 가능하니 이래서 지연되어서 클레임 들어온다 만다 얘기가 많더라구...쩝) 그리고 열차내에 있는 다목적실 공간도 넓은 곳인데 탑승중 상태가 안좋아지거나 몸이 매우 안좋은 사람을 위해서 쓸수 있다고 함 시트를 펼치면 침대로 변신 가능 바로 옆엔 다목적 화장실도 있음 휠체어 들어가고도 남는 공간 열차에 비상용 휠체어를 상시 구비한다고 함 고객에 탄 휠체어(특히 전동휠체어)가 크기 문제로 통로를 지나갈 수 없을 때 지나가기 위해서 사용한다고 4. 번외) 대만 여행 갔을 때 대만전철 이용기 휠체어 마크가 있는 곳에서 대기 탑승장과 전철의 턱이 차이가 없이 평평해서 스무스하게 발판없이도 탑승 가능 탑승완료 역에 있는 다목적 화장실 문 여는 스위치 위치가 알맞게 있음 그 안은 매우 넓음. 옆에 어린이용 변기도 변기 사이에 바로 옆에 휠체어 세우면 딱임 다목적이라 옆공간엔 기저귀 교환대도 있음.
무시할수 없는 캐나다의 국방력
캐나다는 지리적으로 북미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전쟁과는 동떨어져 보이나 실제로는 영국의 식민지로 시작했기 때문에 영국이 참전한 수많은 전쟁에 자동으로 참전했음 미영전쟁을 시작으로 보어전쟁, 제1, 2차 세계대전, 6·25전쟁, 아프간전 등 다양한 국제전쟁에 참전하여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았음 특히 미영전쟁 당시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점령해 백악관을 불태운것도 식민지 캐나다군의 활약 캐나다는 2차세계대전 전후로 캐나다의 경제,사회구조가 전반적으로 산업화되기 전까지 냉혹하기 짝이 없는 혹한의 캐나다 대자연과 싸우며 먹고 살아온 농부, 수렵꾼, 벌목꾼 같은 강인하고 인내심을 요구하는 1차산업 종사자가 많았기 때문에 병사들의 기량이 다른 나라 군대보다 높았음 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해 독일군한테 악명이 높았고 전쟁 당시 적을 가장 많이 사살한 저격수도 캐나다군이 배출함 (378명 사살한 원주민계 캐나다군 프랜시스 페가마가보) 역시 2차세계 대전에서도 활약했는데 캐나다군은 110만명이 참전하였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캐나다군은 상륙 15분만에 독일군 진지를 돌파해 주노 해변을 점령하고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차단해 독일군들을 포위섬멸해서 1시간 먼저 상륙한 미군보다 더 빨리 해변을 장악함 캐나다군이 상륙한 주노 해변은 미군이 상륙한 오하마 해변 다음으로 사망자 수가 나온 곳으로 캐나다군의 15분의 기적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캐나다군의 피지컬로 해냈다는것. 대전 기간에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만큼 캐나다 병사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6.25전쟁에서도 캐나다군은 미국,영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인들을 파병했는데 당시 캐나다군의 절반을 한국으로 보냈다. 6.25전쟁때 캐나다군이 가장 활약한 가평 전투는 캐나다군 보다 13배나 많은 중공군 6000명을 뉴질랜드군 포병대대의 지원 하나로 버틴 전투로 자신들의 참호에 포격요청을 했을정도로 긴박했는데 결국 캐나다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때 캐나다군은 1개 대대 수준인 450명으로 6000명이 넘는 중공군을 상대로 47명의 사망자와 99명의 부상자를 내고 중공군은 최소 1000명에서 최대 40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평 전투로 인해 중공군은 이후 더 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퍼붓지 못 하고 38선까지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어 한국전쟁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는 병사들의 기량만 높은게 아니라 방위산업도 상당이 높은편에 속한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가 생산한 군수품들은 소총 170만정 80만대의 군사차량 5만 대의 탱크 4만 대의 대공포 16000대의 군용기 1만톤급 선박 348대를 생산해서 연합국들한테 공급했다 이렇게 캐나다는 전쟁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고 산업화를 이루며 경제를 크게 키울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났을 때 캐나다는 세계 3위의 교역국이 되어 있었다. 또한 세계 4위 규모의 공군력을 갖게 됐고, 전쟁전 불과 수 척의 군함밖에 없었던 해군은 400대 이상의 군함을 보유한 해군으로 성장해 있었다. 뿐만아니라 6·25전쟁 중 한반도 상공을 수호하던 항공기 중 상당수가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캐나다의 방위산업은 2차대전 중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육·해·공 전 분야에서 독자적인 기술과 전문기술인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됐다. 군사갤러리 ㅇㅇ님 펌
독일차 브랜드들은 나치독일 시절 어떠했을지 알아보자
너무도 익숙한 엠블럼들 독일 자동차 기업들은 나치독일 시절 어떠했을지 대략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BMW FW190 전투기의 엔진 제작 바이에른 엔진 제작소로 시작한 기업이고 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군납이 확 꼬라박자 오토바이와 자동차 사업까지 늘렸음 벤츠 군용트럭과 군용승용차 그리고 전차까지 만들어 납품 군용트럭은 벤츠LG3000 군용승용차는 벤츠170vk 전차는 3호전차임 또한 마이바흐는 독일전차엔진 거의 전부를 만듦 포르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를 필두로 독일군이 운용한 거의 대부분의 군용차 설계를 했고 전차 또한 납품했는데 짤에 있는 전차는 박사의 이름을 딴 페르디난트 구축전차임 오펠 군용차 납품 짤은 오펠 블리츠 폭스바겐 군용차 납품 짤은 퀴벨바겐 아우디 군용차량 납품 짤은 반더러w11 마지막으로 폭스바겐을 한번 더 언급하겠다 당시 나치 독일은 아우토반을 건설했고 마이카 시대를 열어 전국민에 차를 타고 독일전국을 돌길 희망했다 그러므로 저렴한 차량의 보급이 절실했으며 당시 히틀러는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승용차 디자인초안을 만든다 그게 바로 이것이다 디자인 초안대로 만들어진 소형목업을 관찰하는 히틀러 좌측에 소형목업의 트렁크 부분을 만지며 설명하는분이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다 바로 이 차량이 폭스바겐 비틀이다 폭스바겐 자동차공장 기공식을 열어 연설하는 히틀러 비틀 컨버터블에 시승해보는 히틀러 역시 그 옆에는 페르디난트 포르쉐박사가 있다 나치 그 자체 ㅎㄷㄷㄷ 그... 그만 알아보도록 하자....ㄷㄷㄷ 자동차갤러리 니짜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