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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와 콜라

스위스에서 콜라를 사마시면서 이제까지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았다. 코카콜라를 스위스에서 생산하여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하이네켄과 마찬가지로 코카콜라 역시 어지간하면 현지 생산하는 나라/지역이 많기 때문에 그다지 신기할 것까지는 아닐 수 있겠지만, 왠지 생산비용이 높을 것 같은 나라에서 콜라같은 기초 음료수를 생산한다니 신비하다 할 수 있겠어요.

물론 속사정을 보면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스위스의 인구당 설탕 섭취율이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참조 1). 이 정도 되면 사탕무를 혹시 스위스에서 생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알고보니 그것도 사실입니다(참조 2). 설탕 자급률이 65%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설탕산업이 GDP 비중은 높지 않다 하더라도 스위스의 주요 전통산업(1811년부터 시작됐다)이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스위스의 사탕무가 스위스에서 만드는 콜라에 들어가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생산비용을 맞출 수 있던 듯 하고, 그때문에 스위스에서 판매하는 코카콜라가 미국에서 판매하는 코카콜라보다 더 맛있다는 의견(참조 3)도 있는 모양이다. 코카콜라 스위스 웹사이트에 따르면(참조 4), 스위스 콜라 성분의 95%는 스위스제이다.

자꾸 스위스와 콜라 얘기를 하는데, 이게 스위스의 한 자동차 판매업자 얘기부터 풀어나가야 합니다. 때는 1934년, 스위스의 자동차 리셀러인 Max Stooss가 자동차 신제품 수입을 위해 미국 디트로이트 출장을 다녀오면서 콜라의 맛에 빠진 것이다(참조 5). 타고난 사업가였던 그는 당장 코카콜라 본사와 직접 연락하여, 스위스에 코카콜라 공장을 세우겠노라고 나선다. 그래서 1936년 스위스 제네바와 보, 프리부르에서 코카콜라 생산이 시작된다. 지사는 취리히에 세운다.
스위스 코카콜라 광고, 메이드 인 스위스라고 독일어로 적혀 있음을 알 수 있다. 1959년작.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취리히 주변, Eglisau의 한 사내가 한 명 있었으니… Otto Müller라는 한 연구원은 코카콜라를 보고는 카메룬에서 수입한 콜라너트와 사탕무를 섞어서 음료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을 먹는다. 이미 프랑스의 오랑지나(1935년에 나왔다)를 본따서 Eglisana라는 음료를 만들어 팔고 있었으니 콜라를 베끼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렇게 해서 1938년 탄생된 스위스 콜라가 바로 Vivi Kola. 아직 코카콜라가 완전히 자리잡지 않았던 스위스에서 비비 콜라도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연도를 보세요, 세계대전이 곧 시작됩니다. 비비콜라는 국뽕 마케팅(Das Schweizer Tafelwasser!)과 함께, 스위스 군납을 통해 경영을 유지하고는 1949년부터는 투르 드 스위스 정식 스폰서가 된다(참조 7). 우승자가 콜라를 마시면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 촬영에 임하는, 앞광고의 대표적인 사진이 1949년에 나온다.

또 하나 획기적이었던 마케팅이 더 있다. 어린이들이 비비콜라 공장까지 견학을 오면, 아니 그냥 놀러 오더라도 공짜로 콜라를 줬던 것. 당시 청량음료가 그리 싼 제품은 아니었기에 어린이들은 취리히에서 자전거를 몰고 에글리자우까지 콜라 마시러 오고 그랬었다.

하지만 코카콜라 혹은 펩시콜라가 상징하는 미국식 라이프 스타일은 비비콜라의 입지를 결국 위태롭게 만들기 시작한다. 1970년대에 Kola를 Cola로 개명하기까지 했지만 비비콜라는 결국 1986년에 생산중단되고 시설은 펩시콜라 생산 공정으로 바뀐다(참조 8 ).
비비콜라 광고 포스터, 1962년작이다.

그랬던 비비콜라가 2010년 되살아난다! 에글리자우 출신의 Christian Forrer가 비비콜라 판권을 사들이고 다시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레서피는? 에글리자우 마을 박물관 창고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제품 디자인은? 포러의 본업이 그래픽 디자이너입니다. 어차피 가격 경쟁이 안 될 것을 염두에 뒀던 그는 프리미엄 콜라로 비비콜라를 선전했고, 이 전략은 성공한다.

그래서 내가 비비콜라를 먹어보려고 스위스에 가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알아보니 스위스의 양대 수퍼마켓 체인망인 COOP과 MIGROS 모두 비비 콜라를 취급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이 아예 폴란드 산 코카콜라(참조 9)를 판매하거나 아예 자체 상품인 해피콜라를 생산하여 유통하는 등(참조 10), 가격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힙스터로 간다! 온라인 혹은 카페, 식당 등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광고는 좀 기괴하지만(참조 11), 맛은? 매우 좋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판매가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맛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거의 구할 수가 없는 스위스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대량 생산력이 좀 안 되는 나라가 스위스이다. 이러니 콜라 하면 스위스 아니겠습니까? 주말 특집이었습니다.
비비콜라는 보시면 아실 테고, 사이에 Goba Cola를 보실 수 있다. 이 고바 콜라 또한 스위스 아펜첼의 가족기업(22년 3월 투자사인 F.G. Pfister에 인수됐다)이 만드는 고유의 콜라이다.
스위스는 콜라의 나라일까? 제품을 협조해준 김진경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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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2. Why Switzerland props up its ailing sugar industry(2021년 12월 9일) : https://www.swissinfo.ch/eng/behind-switzerland-s-support-of-its-ailing-sugar-industry/47171084

3. Why does Coca-Cola taste better in Europe than in the United States? : https://www.reddit.com/r/AskReddit/comments/16lzpy/why_does_cocacola_taste_better_in_europe_than_in/




7. DIE VIVI KOLA LEGENDE: https://vivikola.ch/geschichte/

8. Die Schweizer Cola sprudelt wieder(2016년 9월 20일): https://www.faz.net/-iay-8lj5w

9. 가령 Coop은 가격이 안 맞다는 이유로 스위스에서 만드는 코카콜라의 판매를 안 하고 있었다.



11. 80 JAHRE JUNG, IMMER NOCH SPRITZIG! : https://youtu.be/TufyLfr-q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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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선구자들③/ 인스턴트 커피 개발자
... 일본에 커피가 정식으로 수입된 건 1877년, 도쿄 우에노에 일본 최초의 커피숍(가히차칸, 可否茶館)이 생긴 건 그 11년 뒤인 1888년이다. 세월이 지나 “그렇게 귀하고 비싼 커피를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생각한 일본인이 있었다. 인스턴트 커피의 탄생이었다. 일본인 가토 사토리 세계 최초 개발 하지만 상품으로는 출시 되지 못해 이후 미국인 조지 워싱턴이 특허 따내 미국에 살던 가토 사토리가 최초로 개발 일본 커피 전문가 5인이 공동으로 쓴 ‘커피장인’(다이보 가쓰지 외 5인 공저, 방영목 옮김, 나무북스 엮음)이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1903년 시카고에 살던 가토 사토리가 세계 최초로 인스턴트 커피를 개발, 미국 특허를 받았지만 상품화 되지는 못했다.>(204쪽) ‘일본의 선구자들’ 시리즈 3편은 인스턴트 커피 개발자 사토 가토리로 정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본 발명연구단이 쓴 ‘위대한 발명, 탄생의 비밀’(이미영 옮김, 케이앤피북스)이라는 책은 그를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고 했다. 내용은 이렇다. <커피에 매료된 한 남성이 있었다. 이름은 가토 사토리(加藤サトリ)라고 하며, 나이나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커피를 대중적인 음료수로 보급시킨 인스턴트 커피 개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문헌이나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은 가토 사토리에 대해 “일본의 화학자이며, 인스턴트 커피 개발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이름과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인 조지 워싱턴이 제조법 이어 받아 특허 1953년에 설립된 ‘전일본커피협회’ 사이트를 참조해 봤다. 거기엔 “알고 계십니까? 사실 인스턴트 커피를 발명한 것은 일본인이었습니다”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1년 미국 뉴욕주 버팔로에서 개최된 ‘전미박람회’에 세계 최초로 ‘가용성(솔루블) 커피’라는 것이 출품되었습니다. 솔루블(soluble)은 녹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발표한 이는 시카고에 거주하는 화학자 가토 사토리. 1899년 가토 박사는 커피를 일단 액화 한 후 분말로 만드는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빛을 보지 않고 바다를 건너 미국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가토 사토리의 아이디어는 이후 어떻게 됐을까. ‘위대한 발명, 탄생의 비밀’이라는 책은 계속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조지 콘스턴트 워싱턴(Gorge Constant Washington)이라는 사람이 가토의 제조법으로 특허를 따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군용 보급품에 포함되면서 순식간에 대중화 되었다. 바로 이 무렵 가토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스위스의 네슬레사가 네스카페라는 상표로 1960년 일본으로 진출했다.> 네슬레가 인스턴트 커피 공정을 더 개선해 네스카페를 시장에 내놓은 게 1938년이다. 2차 세계 대전 중 미군 병사들에게 공급되었다고 한다. 이후 1956년 인스턴트 커피가 일본에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수입이 자유화 된 건 1961년이다. "물에 녹는 인스턴트 커피 영국에서 처음" 가토 사토리가 아이디어를 내놓기 이전에 인스턴트 커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일본 IT매체 와이어드재팬은 “물에 녹는 인스턴트 커피가 처음으로 빛을 본 것은 1771년 영국”이라며 “하지만 곧 향이 나쁘고 제품 저장 가능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이 시기의 제조법은 이내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이 매체는 “미국 남북전쟁 전인 1853년에는 미국인이 인스턴트 커피에 도전, 분말 상태로 커피를 굳힌 것이 만들어졌다”며 “하지만 이 역시 저장할 수 없어 팔리지 않았다”고 했다. 와이어드재팬은 가토 사토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일본인 가토 사토리씨는 물에 녹는 인스턴트 녹차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커피 수입업자와 로스팅 업자가 가토씨에게 커피 수분 제거법을 의뢰 했다. 가토씨는 미국인 화학자의 도움으로 1901년 4월 17일 특허 출원 서류를 제출했다. 거기에는 보존의 문제점과 이를 해결한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가토씨의 Kato Coffee사는 같은 해 뉴욕주 버팔로에서 개최된 ‘전미박람회’에서 제품의 무료 샘플을 나눠 주었다. 1903년 8월 가토씨는 특허를 취득했지만 버팔로에서 배부된 그의 제품은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오사카 만국 박람회 통해 캔커피 폭발적 판매 일본의 커피산업은 60년대를 전후로 빠르게 발전했다. 그 한 예가 캔커피다. 1969년 일본커피의 강자인 UCC가 우유를 넣은 최초의 캔커피를 판매했다.(1965년 시마네현의 커피가게 요시다케가 내놓은 ‘미라커피’를 세계 최초의 캔커피라 부르기도 한다) UCC의 캔커피는 1970년 개최된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폭발적으로 팔리게 됐다고 한다. ‘커피 장인’이라는 책은 “1985년엔 일본 캔커피 시장에서 코카콜라의 ‘조지아’가 UCC를 제치고 판매 순위 1위를 기록했다”고 썼다. 코카콜라는 1886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약사 존 팸버튼 박사가 만든 음료로 출발했다. 커피 브랜드에 조지아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93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스위스 시계의 위기
스위스의 대표적인 제조업 제품 중 일반에 제일 잘 알려진 것은 CNC… 아니 시계다. 물론 애플워치가 등장하면서 게임은 끝났다. 애플워치가 스위스 시계산업 전체 매출을 뛰어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스위스 시계 업계에 거의 cosmic horror가 애플워치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주말 특집, 스위스 시계업계가 겪은 위기들입니다. 스위스가 하필이면 시계 제조업을 발달시킨 이유 중 하나는 쟝 칼뱅에게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그 칼뱅이 맞는데, 그가 모두들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쥬네브 주민들에게 장신구를 금지시키면서, 쥬네브에 번성하던 보석 업자들이 시계 제작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쥬네브에서 시계 산업이 발달한 이유가 또 있다. 길드가 17세기 때부터 만들어졌고, 복제품을 막으려는 시도가 18세기 때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적인 도움 덕분인지 쥬네브는 아예 시계 산업의 중심지가 된다. 그래서 승승장구(참조 2)하던 스위스의 시계 산업이 첫 시련을 겪게 되는데… 첫 번째 위기는 아무래도 막 산업혁명을 시작한 미국이었다. 이제까지 장인들이 한땀한땀 수제로 만들던(참조 3) 스위스 시계에 비해, 미국의 American Waltham Watch Company가 처음으로 기계 제조 시계를 들고 나온 것이다. 단계별로 잘게 기업들이 쪼개어져 있는 스위스와는 달리 이 미국 회사는 수직통합 체계였다. 표준화와 부품 제조의 기계화 및 그에 따른 대량생산은 저렴한 시계를 낳았고, 미국은 결국 프랑스를 제치고 스위스에 이어 세계 2위의 시계생산국에 오른다. 당시 미국 업체들의 등장으로 스위스 시계업계가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1877년 대미 수출액(350만 프랑)이 1872년 대미 수출액(1,830만 프랑)의 1/6 수준으로 격감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노동자 1명은 1년에 시계 150개를 만들었다. 스위스는? 40개였다. 당시 스위스는 어떻게 대응했는고 하니, 당연히 대형화밖에 없었다. 쥬네브와 쥐라 지역에 산재해 있던 시계 제조 체인망을 한곳에 모아놓고 집단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분업 체계는 유지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품질은 다른 나라가 따르기 어렵다 하더라도, 저런 집단 공장 안에 미국 회사가 들어온다면? 실제로 미국의 Bulova가 스위스에다가 공장을 짓자, 스위스 업계는 체인망을 한 곳에 모으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협회(Société Générale de l'Horlogerie Suisse, 1931)”를 조직한다. Bulova가 “마데 인 스위스”로 시계를 내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스위스 종특(…), 이게 꼭 단일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Tissot와 Omega는 별도의 협회인 Société suisse pour l'industrie horlogère를 1930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이중 협회 체제가 한동안 유지가 된다. 일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두 번째 위기는 일본의 세이코였다. 보통 “쿼츠 위기(Crise du quartz)”라 부르는 시기(1975년-1985년) 동안 스위스의 시계 관련 업체는 2/3가 사라졌고, 종사자 수도 9만명에서 3만명으로 줄어든다. 이유는 단 하나, 스위스가 발명했지만 특유의 느린 체제로 인해 채택 안 하고 있던 쿼츠를 일본 세이코가 채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야기했던 첫 번째 위기만큼이나, 일본이 야기한 두 번째 위기도 심각했다. 해법은? 역시 구조조정, 다른 누구도 아닌 UBS와 SBS라는 대형은행들이 이를 부추겼고, 두 협회는 통합된다. 그래서 새로이 협회(Société suisse de microélectronique et d'horlogerie)가 창설되고, 회장으로 니콜라스 하예크(Nicolas Hayek)가 오른다. 바로 스와치 그룹의 탄생이다. 스와치가 전반적인 스위스 시계 산업을 살린 것은 맞는데, 한편으로는 고급 브랜드들이 더욱 더 고급이 천착하게 만드는 계기도 된 것이 바로 쿼츠 위기였다. 그래서 파텍 필립이 “You never actually own a Patek Philippe. You merely look after it for the next generation”과 같은 광고 캠페인(참조 4)을 하는 것. 스위스 시계업계가 1차 위기는 업체들의 재편성으로, 2차 위기는 단일화 및 구조조정(물론 스와치 그룹에 속하지 않은 회사들도 여전히 있다)으로 이겨냈다. 애플워치의 위협으로 대표되는 3차 위기는… 위기로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애플워치가 워치라기에는 너무 거대한 무언가이기 때문에 스와치 정도만 죽이고 지나가 버릴 바람이라는 느낌? -------------- 참조 1. 짤방 출처, 사실 이 1949년 광고의 바슈롱 콩스탕탱은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 중에서 최초 급으로 수직통합을 이룬 기업이었다. 물론 여기 시계는 루이-나폴레옹의 으제니 황후를 광고모델로 쓸만큼 비싸기도 매우 비쌉니다요. Vintage 1949 Vacheron Constantin Oldest in Tradition Swiss Print Ad Publicite Suisse Montres : https://www.ecrater.com/p/23741300/vintage-1949-vacheron-constantin-oldest-in-tradition 2. 1870년 당시 세계 시계 시장의 70%가 스위스였다고 한다. Comment la «menace étrangère» a façonné l’industrie horlogère suisse(2021년 5월 28일): https://www.swissinfo.ch/fre/comment-la--menace-étrangère--a-façonné-l-industrie-horlogère-suisse/46637548 3. 다만 분업체계가 갖춰져 있기는 했다. manufacture(Ebauches가 유명하다)라고 하여 부품 제조업체들이 부품을 만들면 이를 établisseur가 조립하고 포장한다. Les manufactures horlogères: https://www.chronotempus.com/guide/manufacture-horlogerie/ Ebauches(2009년 7월 2일): https://hls-dhs-dss.ch/fr/articles/041960/2009-07-02/ 4. Patek Philippe airs new "Generations" ad(2016년 10월 6일): https://youtu.be/hjfXUpVtINE
Coca Cola Le Parfum (코카코라 르 빠흐퍼) by 디자이너 이원찬
학상 시절때부터 평상시에 눈여겨 보던 디자이너 이원찬님. 디자인 스타일이 매우 깔끔하고 very Sophisticated. 최근에 케이블 방송사에서 한 케이디자인에 출현도 하셨었죠. 최근에 새로운 개인 프로젝트를 선보였는데요 바로 Coca Cola Le Parfum. 전세계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코카콜라가 만약에 향수로 재탄생한다면 어떨지 가상 코카콜라 향수 라인을 내놓았습니다. 코카콜라의 클래식한 면을 최대한 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던함을 보여주려고 노력을 했다고 하네요. 향수로 재해석한 코카콜라 정말 멋집니다. 두가지 향수 라인을 작업하셨는데 하나는 그냥 클래식한 라인 (코카콜라 아이덴티티가 녹아든 테마), Belle 라인 (20-30대 여성들을 타겟으로 한 여성스러운 라인). 디자이너 이원찬님 포트폴리오 사이트 가서 다른 작품들도 감상해보세요. 정말 잘하심. 군더더기없이 매우 깔끔한 디자인을 하십니다. 디자이너 이원찬 개인 웹사이트: http://wonchanlee.com/index.html 비헨스 사이트: https://www.behance.net/wonchan **시간 투자해서 카드 쓴 겁니다. 외부로 퍼가실때 출처: vingle.net/rachelykim , 이미지 원문 출처: http://wonchanlee.com/index.html, https://www.behance.net/wonchan )** 꼭 밝히세요.
테슬라 긴장해
스위스 슈퍼충전기 8분 충전에 194km 전기차를 단 8분만 충전하면 194.4km(120마일)을 달리게 해 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전기차(EV)충전기가 등장했다. 지금까지 가장 빠른 것으로 알려진 테슬라 충전기 보다도 3배나 빠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데일리메일은 27일(현지시각) 스위스 엔지니어링회사 ABB가 개발했다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전기자동차용 충전기(모델명 테라 하이파워DC)를 소개했다. 뉴아틀라스에 따르면 이 충전기는 350kW의 전력을 제공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평균 충전 전력량보다 훨씬 많다. ABB는 이 고속충전기가 고속도로와 주유소용으로 최적이라고 말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 초고속충전기는 50개국에 6500대가 판매, 설치됐다. 이처럼 점점더 고성능화하는 전기차 충전기술은 이 차량 도입을 장려하는 데 도움이 될 전망이다. ABB, 50개국에 6500대 판매, 한번에 350kW 충전 기존 충전기는 ABB가 제안한 기계보다 상당히 느리게 충전된다. 예를 들면 최근 폭스바겐에 의해 채택된 채드모(CHAdeMO) 충전기는 약 62.5kW의 전력만을 충전해 준다. 현재 ABB의 초고속 충전기는 한번에 여러 대의 자동차를 한꺼번에 연결하는 경우에만 작동한다. 최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350kW로 애들 장난감에만 전력을 공급하게 될 것”이라고 조크를 날렸지만 테슬라 슈퍼충전기(Tesla Superchargers)는 겨우 120kW 정도를 충전하는데 그치고 있다. 한편 테슬라는 꾸준히 미국 전역에 자사의 슈퍼충전기 설치를 늘려가고 있다. 지난 9월, 테슬라는 슈퍼충전기 네트워크를 시카고와 보스턴에 설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도심 및 시내로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테슬라는 높은 사용률을 지원하고 충전소의 공간을 줄이기 위해 특별히 작고 새로운 슈퍼충전기를 개발하고 있다. 이 회사는 고속도로 및 인기있는 주행도로에 슈퍼충전기 충전소를 설치해 더 긴 주행을 할 수있도록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미 호텔,리조트,레스토랑 등에는 ‘데스티네이션 차저전’커넥터를 설치해 무료 충전을 지원하고 있다.
스위스 연방지도청의 장난
https://eyeondesign.aiga.org/for-decades-cartographers-have-been-hiding-covert-illustrations-inside-of-switzerlands-official-maps/ 스위스 연방 지도청(Swisstopo)은 역사가 거의 200년 된 제일 오래된 스위스 연방관청이다. 곧 스위스 내 가톨릭 주(Sonderbund, 참조 1)의 반란을 진압하게 될(!) 스위스연방의 기욤 앙리 뒤푸르(Guillaume Henri Dufour) 장군은 군사용으로 보다 더 정확한 지도가 있었으면 했었다. 그래서 세워진(1838) 곳이다. 여담이지만 그는 후에 앙뤼 뒤낭과 함께 적십자를 만드는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정확하기로 소문난 스위스 지도청의 역사가 아니다. 스위스 연방 지도청의 “장난질”이다. 물론 지도를 만들 때, 군사 시설처럼 공개하기 어려운 곳은 그냥 일반적인 창고 건물로 만든다든지, 아니면 그냥 허허들판으로 만드는 등의 수정사항이 있기는 하다. 특히 냉전 당시 그런 식으로 지도를 제작했다고 하는데, 스위스 정부 소속 외청에서 만드는 지도에 거미나 사람 얼굴, 벌거벗은 여자, 등산객, 물고기, 마멋(marmot)이 들어가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는가? 물론 지도 안에서 거의 월리를 찾아라 급이며, 월리보다 찾기가 더 어렵다. 얼핏 보면 지도의 등고선과 다를바 없기 때문에 장난삼아 그려 넣은지 한참 후에 발견되곤 한다. 즉, 실제로 그런 장난을 친 제작자가 은퇴한 다음에 발견되기 일쑤이기 때문에 공개적인 질책 혹은 해고는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발견된 이후에는, 다음 버전의 공식 지도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제일 최근에 발견된 장난이 바로 마멋이었다. 짤방에서 보시듯 스위스 알프스에 숨어있다가 2016년, 한 취리히 공대 교수가 발견하여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면서 드러났었고 원래는 지도청 내부에서만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지도청 대변인의 말에 따르면, “이들 지도에는 창의력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한다. 다행히 지도청 웹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다(참조 2). 제일 먼저 알려진 사례는 “거미”였다. 1981년에 제작된 지도에서, Eiger 산 정상에 웬 거미가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참조 3). 이 거미를 그려넣은 장본인은 알려져 있다(참조 4). Othmar Wyss라는 제작자였는데, 거미는 7년 후의 버전에서 사라졌다. 1997년 지도에서 발견된 등산객을 보자(참조 5). 사실 이 등산객이 들어간 부분은 스위스 땅이 아니라 인접한 이탈리아 지역인데, 이탈리아로부터 협조를 많이 받지 못 하여 정보가 부족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여백에 등산객을 그려넣은 것이다. 1980년대 초 지도에 나타난 물고기도 뺄 수 없겠다(참조 6). 이 장난은 누가(Werner Leuenberger) 했는지 알려져 있다. 호수에는 물고기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는데, 이번에는 프랑스 쪽 지역이었다. 발견된 이후 1989년판 지도에는 사라졌다. 다시 2016년에 발견된(참조 2) 마멋으로 돌아가자면, 이 마멋은 지도청 내의 암석 지대 전문 지도제작자인 Paul Ehrlich이 그렸으며 그는 2011년에 이미 은퇴했었다. 지도청에서 캐물어 보니(참조 4) 지도를 그릴 때 보니까 마멋이 들어가기에 딱 알맞는 장소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연히 지도청은 그에게 지도에다가 또다른 장난을 친 것이 없는지 물어봤다. 그는 수많은(!!) 아이디어를 실험해 봤지만 마멋이 제일 뛰어났다(génial)고만 답했다. 뭔가 또 있다는 뉘앙스다. -------------- 참조 1. 1845-1847, “특별한 연합”을 의미하는 독일어이다. 불어권 칸톤(Fribourg와 Valais)이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대체로 독일어권 칸톤들이 참여했다. 2. 주소: https://map.geo.admin.ch/?topic=swisstopo&lang=fr&bgLayer=ch.swisstopo.pixelkarte-farbe&layers_timestamp=20101231&X=140152.36&Y=645918.00&zoom=10&layers_visibility=false 3. 주소: https://map.geo.admin.ch/?layers=ch.swisstopo.zeitreihen&bgLayer=voidLayer&timeseries_minYear=1980&timeseries_fadeTime=2000&timeseries_current=20031231&zoom=7&timeseries_direction=forwards&timeseries_tab=compareTab&Y=643261.00&X=158790.50&timeseries_maxYear=1988&timeseries_compareOpacity=100&topic=swisstopo&lang=fr&layers_timestamp=19811231&catalogNodes=1392,1396,1397 4. Les dessins cachés des cartes nationales(2016년 12월 21일): https://www.swisstopo.admin.ch/fr/home/meta/search.detail.news.html/swisstopo-internet/news2016/didyouknow/161221.html 5.주소: https://map.geo.admin.ch/?layers=ch.swisstopo.zeitreihen&bgLayer=voidLayer&timeseries_minYear=1995&timeseries_fadeTime=2000&timeseries_current=20031231&zoom=6&timeseries_direction=forwards&timeseries_tab=compareTab&timeseries_maxYear=2003&timeseries_compareOpacity=0&topic=swisstopo&lang=fr&layers_timestamp=19971231&time=1997&E=2820860.00&N=1158250.00 6. 주소: https://map.geo.admin.ch/?layers=ch.swisstopo.zeitreihen&bgLayer=ch.swisstopo.pixelkarte-farbe&timeseries_minYear=1970&timeseries_fadeTime=2000&timeseries_current=1982&zoom=6&timeseries_direction=forwards&timeseries_tab=compareTab&Y=510390.00&X=180025.00&timeseries_maxYear=1980&timeseries_compareOpacity=0&topic=swisstopo&lang=fr&layers_timestamp=19801231&time=1980&catalogNodes=1392,1396,1397 7. 사실 스위스에는 공식적인 그림에 대한 장난질의 전통이 있다. 이를테면 스위스 베른에 있는 국민의회(Conseil National/연방하원)에 1902년부터 걸려있는 루체른 호수 내의 Urnersee를 묘사한 그림을 보자. “연방의 요람(Die Wiege der Eidgenossenschaft)”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스위스 화가 샤를 지롱(Charles Giron)이 그렸다. (공유한 기사에서는 그냥 루체른 호수 그림으로, 그리고 1901년에 완성된 것으로 나온다.) 그림 제목을 연방의 요람이라 한 이유는, 그림이 묘사하는 지역이 스위스/헬베티카 연방의 탄생지(Schwyz 및 Rütli)이기 때문인데, 자세히 보시면 왼쪽 암벽 사이에 웬 송어 한 마리가 놓여 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국민의회 의사당 개장을 4월 1일에 했기 때문에, 만우절(불어권에서는 만우절을 poisson d’avril이라 하여, 당일 물고기를 등에 몰래 붙이는 풍습이 있다) 농담으로 송어를 그려넣은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그림을 보시라.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a/Painting_Swiss_National_Council.jpg
스위스는 어째서 침략을 받지 않았는가
주말은 역시 역사지.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스위스를 침략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몇 가지 설을 알고 계실 것이다. (1) 터널을 파괴하겠다는 협박, (2) 산지 지형에서의 게릴라전, (3) 중립국(…) 등등인데, 사실 좀 미덥잖았다. 단순히 그런 이유 뿐이었을까? 짤방 설명부터 하겠다. 이 사진은 스위스 연방정부 사이트(참조 1)에 올라와 있는 것으로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스위스 군대 소집을 기념한 포스터다. 사의(謝意) 증서(certificat de remerciement)로서 앙리 기장(Henri Guisan) 장군이 당시 소집에 응한 스위스 군인들에게 정부가 수여한 것이다. 자, 나치가 스위스를 침력하지 않은 이유로서 저 세 가지가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같은 중립국이더라도 나치는 벨기에와 덴마크, 노르웨이 등을 쳤으니 스위스를 안 친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터널을 파괴하고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은 이유가 될 만하기는 하지만 독일과 비시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가 한꺼번에 스위스를 친다면(참고 2)? 군사적으로 스위스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즉, 나치가 그냥 스위스를 독립국으로 놔두는 편이 나치에게 더 이익이었다는 논리가 더 그럴듯하다는 결론이다. 어째서일까? -------------- 스위스의 중립국 선언이라는 것이 반드시 꼭 “중립(中立)”은 아니었다. 워낙 독일에 대한 수출이 많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스위스가 제조업 국가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오늘날에도 해당한다). 스위스의 전체 수출 중 대-독일 수출의 비중은 1938년 15%에서 1942년 41%로 크게 증가한다. 그러나 정말 유용한 것은, 스위스의 대-독일 전략물자 수출보다는 “스위스 프랑”(CHF)이었다(참조 3).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파운드와 프랑의 통제에 들어간다. 적성국에게 환전을 안 해준다는 의미다. 1940년 5월 당시 자유로운 환전이 가능하면서 금본위제에 묶여 있는 통화는 미국 달러와 스위스 프랑, 단 두 가지 뿐이었다. 독일은 전쟁중이다. 따라서 물자가 아주 많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 대금 처리를? 스위스 은행에 금을 팔아 스위스프랑으로 했다는 얘기다. 당연히? 미국은 미국 내 스위스 자산(주로 금)을 동결시킨다. 그러나 스위스는 독일 석탄에 의존하는(스위스에는 별다른 천연자원이 없다) 경제였기 때문에 독일과 거래를 중단시킬 수 없었고, 독일로서도 소위 중립국 통화로서 스위스프랑을 이용해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 잠깐, 유대인들이 스위스를 이용해서 탈출했잖아요? 스위스의 그 유명한 고객 비밀유지가 그 유대인들 계좌를 숨기려고 했던 것 아닌가요? 스위스의 긍정적 이미지 제고에 한 몫 한 것은 맞지만 애석하게도 그 주장은 틀리다. 스위스 은행들의 고객 비밀유지는 유대인들 때문이 아니었다. 1932년 프랑스 총선에서 좌파 연합이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푸조 가문과 르 피가로를 소유한 코티 가문 등 부유층들이 자산을 대거 스위스로 옮기는 사태가 일어난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가 스위스 은행들을 강하게 압박했던 것.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는 프랑스 부유층들의 절세(…) 작업 덕분에 생긴 전통이다(참조 4). 그렇다면 스위스가 무려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순간 85만명까지 동원한 군사력 외에도, 스위스 프랑이라는 (지금도) 강력한 통화와 경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물론 이런 이유들이 가려져있지는 않았다. 연방법에 따라 1996년-2002년 동안 창설된 CIE(독립전문가위원회)라 하여 베르지에 위원회(Commission Bergier)가 세계대전 중 스위스의 나치 협력에 대해 밝힌 바가 있었다. 물론 대중에 잘 알려져있지는 않으며, 스위스는 군사력으로 위기에서 벗어났고 난민을 보호했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계속 하고 있다. -------------- 참조 1. Trésors de nos collections particulières : voici 80 ans, la mobilisation générale de 1939(2019년 9월 2일): https://www.big.admin.ch/fr/home.detail.news.html/big-internet/2019/schatzkiste-spezialsammlungen---80-jahre-mobilmachung-1939.html 2. 실제로 유사한 계획이 존재했다. 전나무 작전(Operation Tannenbaum)을 가리킨다. 독일이 이 계획을 철회한 이유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3. 스위스중앙은행 보고서를 보시라. 특히 3-1-2장. Monetary policy background to the gold transactions of the Swiss National Bank in the Second World War(1999년 5월): https://www.snb.ch/en/mmr/reference/gold_transactions_ww2/source/gold_transactions_ww2.en.pdf 4. The Origins of the Swiss Banking Secrecy Law and Its Repercussions for Swiss Federal Policy(2000년 여름호): https://www.jstor.org/stable/3116693?seq=1 5. 본 글타래 작성은 아래 링크를 매우 많이 참조했다. https://twitter.com/alexandreafonso/status/1215315600727334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