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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추천] 영어, 제대로 하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
안녕하세요! 책과 더 가까워지는 곳 플라이북입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생각하게 되는 공부, 영어가 아닐까요? 남녀노소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찾으시는 언어는 영어라고 생각합니다. '막상 시작하려 해도 어디서부터 하는 게 좋을까, 발음은 어떻게 해야 될까' 이런 고민 속에 놓게 되는 공부인데요. 공부라 생각하지 않고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수 있도록 책을 담아보았습니다! 영어와 친숙해질 5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교과서적 영어 공부를 피하고 싶은 이들에게 실생활 표현은 물론, 미국 문화까지 알려 주는 책 네이티브만 아는 진짜 영어 100 구슬 지음 ㅣ 시원스쿨닷컴 펴냄 책 정보 보러가기👉 https://bit.ly/3eUTKWB 당장 떠나도 쓸모 있는 영어를 익히고 싶을 때 다양한 상황에 처해도 생존케 하는 회화책 미국에서 기죽지 않는 쓸만한 영어 Sophie Ban(소피반) 지음 ㅣ 시대인 펴냄 책 정보 보러가기👉 https://bit.ly/2Im5IMT 스쳐가지 않고, 오롯이 남는 영단어 책 없을까? 쓰임새를 이해시키고 활용할 줄 알게 만드는 책 영어 회화의 결정적 단어들 서영조 지음 ㅣ 사람in 펴냄 책 정보 보러가기👉 https://bit.ly/3eJ3PWd 영문 읽기가 두렵거나, 곧잘 막히는 이들에게 120개 패턴을 통해 맥락을 파악하게 하는 책 영어를 해석하지 않고 읽는 법 황준 지음 ㅣ 동양북스 펴냄 책 정보 보러가기👉 https://bit.ly/3eQC9Pu 한 언어를 습득하려면 어떤 원리로 접근해야 할까? 영어를 어순대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와 체계적 학습법 영어의 정석 장시영 지음 ㅣ 비얀드 나리지 펴냄 책 정보 보러가기👉 https://bit.ly/2U9PRmK 책과 더 가까워지는 곳, 플라이북 👉 https://bit.ly/2Uankhd
무시할수 없는 캐나다의 국방력
캐나다는 지리적으로 북미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전쟁과는 동떨어져 보이나 실제로는 영국의 식민지로 시작했기 때문에 영국이 참전한 수많은 전쟁에 자동으로 참전했음 미영전쟁을 시작으로 보어전쟁, 제1, 2차 세계대전, 6·25전쟁, 아프간전 등 다양한 국제전쟁에 참전하여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았음 특히 미영전쟁 당시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점령해 백악관을 불태운것도 식민지 캐나다군의 활약 캐나다는 2차세계대전 전후로 캐나다의 경제,사회구조가 전반적으로 산업화되기 전까지 냉혹하기 짝이 없는 혹한의 캐나다 대자연과 싸우며 먹고 살아온 농부, 수렵꾼, 벌목꾼 같은 강인하고 인내심을 요구하는 1차산업 종사자가 많았기 때문에 병사들의 기량이 다른 나라 군대보다 높았음 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해 독일군한테 악명이 높았고 전쟁 당시 적을 가장 많이 사살한 저격수도 캐나다군이 배출함 (378명 사살한 원주민계 캐나다군 프랜시스 페가마가보) 역시 2차세계 대전에서도 활약했는데 캐나다군은 110만명이 참전하였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캐나다군은 상륙 15분만에 독일군 진지를 돌파해 주노 해변을 점령하고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차단해 독일군들을 포위섬멸해서 1시간 먼저 상륙한 미군보다 더 빨리 해변을 장악함 캐나다군이 상륙한 주노 해변은 미군이 상륙한 오하마 해변 다음으로 사망자 수가 나온 곳으로 캐나다군의 15분의 기적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캐나다군의 피지컬로 해냈다는것. 대전 기간에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만큼 캐나다 병사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6.25전쟁에서도 캐나다군은 미국,영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인들을 파병했는데 당시 캐나다군의 절반을 한국으로 보냈다. 6.25전쟁때 캐나다군이 가장 활약한 가평 전투는 캐나다군 보다 13배나 많은 중공군 6000명을 뉴질랜드군 포병대대의 지원 하나로 버틴 전투로 자신들의 참호에 포격요청을 했을정도로 긴박했는데 결국 캐나다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때 캐나다군은 1개 대대 수준인 450명으로 6000명이 넘는 중공군을 상대로 47명의 사망자와 99명의 부상자를 내고 중공군은 최소 1000명에서 최대 40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평 전투로 인해 중공군은 이후 더 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퍼붓지 못 하고 38선까지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어 한국전쟁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는 병사들의 기량만 높은게 아니라 방위산업도 상당이 높은편에 속한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가 생산한 군수품들은 소총 170만정 80만대의 군사차량 5만 대의 탱크 4만 대의 대공포 16000대의 군용기 1만톤급 선박 348대를 생산해서 연합국들한테 공급했다 이렇게 캐나다는 전쟁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고 산업화를 이루며 경제를 크게 키울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났을 때 캐나다는 세계 3위의 교역국이 되어 있었다. 또한 세계 4위 규모의 공군력을 갖게 됐고, 전쟁전 불과 수 척의 군함밖에 없었던 해군은 400대 이상의 군함을 보유한 해군으로 성장해 있었다. 뿐만아니라 6·25전쟁 중 한반도 상공을 수호하던 항공기 중 상당수가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캐나다의 방위산업은 2차대전 중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육·해·공 전 분야에서 독자적인 기술과 전문기술인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됐다. 군사갤러리 ㅇㅇ님 펌
2차대전 당시 광기와 학살에 맞선 10명의 의인들
오스카 쉰들러 이 분야 최고 네임드. 흔히 선한 인간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나 실상은 부패한 기업인이자 외도를 일삼고 나치독일을 위해 간첩질까지 했던 기회주의자였다. 사실 나치독일은 협조적인 기업인, 쉰들러에게 강제노역 자원으로 유대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래 공짜 노동자로 유대인을 이용해먹으려던 쉰들러는 점차 유대인을 보호해주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아예 유대인들을 집단으로 빼돌려 학살로부터 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게슈타포에게 대량의 뇌물을 먹였고, 유대인을 살릴 음식과 물자를 암시장을 통해 몇 배나 비싼 값에 사야했으며 전쟁 말엽에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유대인 보호에 소모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전쟁 이후 사업 실패까지 겹쳐 파산, 설상가상으로 심장병에 걸린다. 이때 그가 살려주었던 1200명의 유대인들이 쉰들러의 생활비와 병원비를 댔으며 오스카 쉰들러는 1974년 사망 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묻혔다. 현재까지 이스라엘에 묻힌 유일한 나치 당원 출신이다. 소사 멘데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에 주재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외교관. 포르투갈은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유럽최강이 되어가던 독일의 환심을 사고자 했고 독일의 침공을 피해 오는 난민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프랑스 내 유대인, 집시, 반파시즘 지지자 등은 여전히 중립국인 포르투갈로 도주하고자 했다. 이에 본국의 명령인지, 양심인지 고민하던 멘데스는 결국 양심의 손을 들기로 결정. 72시간동안 밤을 새워 미친듯이 비자를 찍어냈고 그 비자를 받아 포르투갈로 도주에 성공, 목숨을 구한 이들이 3만명에 이르렀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간 멘데스는 책임을 지고 파면조치되었고 명예는 사라지고, 돈도 없는 궁핍한 여생을 살다가 1954년에 죽었다. 그의 명예는 1988년이 되어서야 포르투갈 정부에 의해 회복된다. 하인트 지크프리트 하이드리히(우측) 사진의 두 소년은 우애가 깊었던 하이드리히 형제로, 모두 독일의 군인이었다. 형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무뚝뚝한 성격이었으나 동생과 조카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전쟁 중 체코 망명정부와 영국정부에게 암살당했고 형의 유품을 정리하던 동생 지그프리트는 형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된다. 사실 라인하르트는 게슈타포를 만들어 민간인 사찰 및 학살을 일삼고 힘러와 함께 홀로코스트를 주동한 인물로, 그야말로 인간 백정이었던 것이다. 이를 깨닫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지그프리트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형의 죄를 속죄하고자 유대인 구출을 시작한다. 그는 유대인둘의 신분증을 위조해 탈출시키거나 수용소에서 빼돌려 중립국에 풀어줬다. 그러나 2년째 이 작업을 하던 1944년, 지그프리트는 게슈타포가 자신을 수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그리고 체포와 대한 두려움과, 고문으로 유대인들의 정보를 털어놓게 될 것을 우려해 그는 권총으로 자살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종전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게슈타포의 수사는 단지 사소한 문제로 인한 것이었을 뿐 지그프리트가 유대인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라울 발렌베리 스웨덴의 외교관. 1944년, 히틀러는 나치독일과 동맹은 맺었으나 비협조적이었던 헝가리 정권을 갈아치웠고 이에 헝가리의 유대인들이 그대로 학살 위기에 내몰렸다. 발렌베리는 이때 스웨덴 대사관의 이름으로 2만명의 유대인들에게 가짜 서류와 비자를 발급했고 사비까지 털어가며 1만 3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은신처를 마련, 더 나아가서는 독일군을 협박해 7만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추가로 구했다. 이는 발렌베리의 가문이 유럽 제일의 재벌 가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치독일은 발렌베리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헝가리는 소련에게 점령되면서 독일군은 퇴각하게 된다. 하지만 1945년, 유대인 문제를 논의하고자 소련군을 찾아간 발렌베리는 실종됐고 현재까지도 명확한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다. 가장 유력한 설은 그를 스파이 취급한 소련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가 1947년에 처형당했다는 설로, 스웨덴 정부도 이 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욘 라베 중일 전쟁 당시 독일의 재벌 기업 지멘스의 중국 담당 간부. 그는 나치당에 가입한 나치 당원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나치의 본격적인 전쟁 및 확장 이전이었고, 더군다나 독일 본토를 떠나 회사의 해외지부 생활 30년 째였던 욘 라베에게 히틀러는 힘들었던 조국의 경제를 살리고 1차대전 패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지도자였으리라 추측된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무차별 학살을 시작하자 욘 라베는 자신이 평생동안 모은 재산을 모조리 털어 안전지대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안전지대는 어떤 울타리도 없이 그냥 도로가 경계였고 욘 라베와 그를 도운 외국인들은 온몸으로 일본군의 안전지대 진입을 막아야 했다. 이조차도 욘 라베가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시민이자 나치당원이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안전지대까지 위태로워지자 그는 히틀러에게 편지를 써 학살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독일은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중국과 우호적이었으며,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히틀러는 합리적인 지도자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동맹국 지도자의 압력이면 이 미친 학살을 막을 수 있을 거라는데 마지막 희망을 걸었으나 독일 본국은 그의 편지를 당연히 묵살했다. 종국에는 일부 일본군이 안전지대까지 뚫고 들어와 학살과 강간을 일삼았지만 결국 욘 라베는 20~30만이 죽은 난징 학살의 현장에서 20만에 달하는 목숨을 구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귀국 후 동맹국 군사작전 방해를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종전 후에는 나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연합국에 체포, 난징에서의 일과 재판으로 전재산을 날렸다. 욘 라베가 가족 부양마저도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는 소식을 들은 난징 시민들은 2차대전 때 도시가 초토화되고 이어진 국공내전으로 재건도 못하던 1948년, 돈과 물자를 긁어모아 욘 라베에게 전달했지만 당시 중국 경제가 너무도 어려워 큰 지원은 못됐다. 결국 1950년, 욘 라베는 여전히 가난한 생활 속에서 사망하였다. 1997년 그의 묘지는 난징으로 이장되었고, 현재 난징에는 그가 살던 집이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허펑산 오스트라아에 주재하고 있던 중화민국의 외교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유대인들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그들을 구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은 내륙국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탈출을 위해 반드시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했는데, 어떤 나라도 그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내 32개 대사관이 모조리 유대인에 대한 비자 발급을 금지하고 있을 무렵 허펑산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이 당시 중국 상하이는 국제 조계지라 비자 발급에 어떠한 조건도 필요가 없었다. 이를 간파한 허펑산은 오스트리아 내 유대인들이 상하이를 거칠 수 있는 서류들을 찍어내기 시작한다. 나치 독일은 즉시 중화민국 영사관 건물을 박탈, 허펑산을 탄압하려 했으나 그는 근처 임대아파트에 숨어서 계속해서 서류를 발행했다. 결국 독일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중화민국이 그를 강제 송환하기까지 그는 4천 명의 유대인들이 상하이를 거처 호주나 홍콩 등지로 도망칠 수 있도록 하였다. 본국으로 송환 당한 허펑산은 크게 질책 당했지만 이후 중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 하고, 독일도 미국에 선전포고 하면서 어찌됐건 적을 엿먹인 셈이라 계속해서 외교관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밀려난 이후에도 외교관으로 일했고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조르조 페를라스카 이 이탈리아인은 인생 자체가 다이나믹했다. 젊은 시절 뼈 속까지 파시스트였던 그는 무솔리니를 맹신하며 따랐다. 심지어 외국, 스페인의 내전에까지 파시스트로 참전했으며 거기서도 미친놈처럼 싸웠다. 얼마나 광신적이었는지 후일 스페인의 독재자가 되는 프랑코를 직접 만나 "귀하는 이태리인이지만, 위급한 일이 생기면 스페인 사람으로 대우하겠다."는 서류를 받을 정도였다. 스페인 내전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또 2차대전에 참전, 헝가리에서 이탈리아 군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면서 그의 인생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무솔리니는 거꾸로 메달려 처형당했고, 헝가리는 연합군에 항복한 이탈리아의 군인들을 구금했다. 이에 페를라스카는 탈옥을 감행, 즉시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갔고 위에서 언급된, 프랑코에게 받은 서류를 내밀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에게 스페인 대사는 함께 유대인을 구출하자고 제안했고 학살에는 반대하는 파시스트였던 페를라스카가 이를 승낙한다. 그는 스페인 사람으로 위장, 곳곳에서 유대인을 빼돌린 후 돌봐줬고 심지어 아이히만이 보는 앞에서 유대인을 빼돌린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라울 발렌베리와도 협력했던 그는 소련이 헝가리를 해방시키자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40년 간 지인, 친구, 가족 등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1987년이 되어서야 은혜를 갚고자 그를 수소문하던 유대인들에 의해 행적이 알려졌고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이스라엘 등으로부터 훈장을 받으며 세계의 영웅이 됐다. 이후 1992년 82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알베르트 괴링 나치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의 친동생이다. 이 형제는 오늘날에도 대표적인 역사의 아이러니로 꼽힌다. 형은 나치당 창설 초반부터 참여, 나치독일의 기틀을 만들고 이끈 2인자였으나 동생은 처음부터 나치의 폭력성을 혐오하는 반나치주의자였다. 그는 2차대전 이전부터 반나치 운동을 하고 반나치 인사들을 국외로 빼돌렸다. 2차대전 발발 이후엔 형의 배경을 이용, 나치독일의 군수공장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이 공장들을 이용해 유대인들을 노동자로 쓴다는 명목으로 빼돌렸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파업을 독려, 생산도 제대로 안했으며 체코의 레지스탕스들을 지원하고 소련군 포로들도 수용소에서 빼내 중립국에 풀어줬다. 너무 대놓고 반나치였던만큼 몇 번씩이나 체포되었지만 그때마다 형의 이름을 팔아 풀려나거나, 심지어 형인 헤르만 괴링이 직접 구해주기도 했다. 헤르만 괴링은 알게 모르게 동생의 이러한 행동을 도우며 동생을 보호했다. 전후 형이 전범으로 체포되자 이번엔 자신이 형을 구하고자 형이 자신을 도왔음을 근거로 필사적으로 구명했지만 결국 헤르만 괴링은 사형을 선고, 면회에서 만난 동생에게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이때 알베르트 괴링은 굉장히 슬퍼했다고 한다. 전후 '괴링'이라는 이름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음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이름을 개명하지 않았다. 홀몸임에도(혼외 자식이 있었지만 41년 전사) 결혼하지 않고 형의 가족을 돌봐주었다. 또 그는 자신이 전쟁 중 한 행동을 알려 유명세를 타려고 하지도 않았다. 1966년, 남편이 죽으면 아내에게 남편의 연금이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는 힘들었던 자신 곁을 수년 간 지켜준 가정부와 혼인신고를 하고 일주일 뒤 병사했다. 빌헬름 호젠펠트 나치 독일의 군인. 초반에는 나치를 옹호하고 지지했으나 반유대주의, 반가톨릭 정책에 실망했다. 이어 폴란드에 부임한 그는 나치가 폴란드에서 저지르는 학살을 목도하며 경악했고 사상적 전향을 하게 된다. 그는 폴란드어를 배워 폴란드인 포로들과 소통했다. 또 직권으로 포로들이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인간답게 대우했다. 나아가 수감된 폴란드인들을 형기보다 빨리 내보냈으며 자신이 부임하는 곳마다 폴란드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위조 신분증을 주고 고용해 학살로부터 지켰다. 그는 나치독일 정부에 공식적으로 학살을 멈추라며 반항하기도 했다. 또 호젠펠트는 전쟁 막판 한 폴란드계 유대인을 살려주는데 그 사람이 영화 피아니스트로 각색되는 이야기의 주인공, 불라덱 슈필만이었다. 그러나 호젠펠트의 최후는 오늘 다루는 그 어떤 이들보다 잔혹했다. 그는 폴란드에 들어온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혀 사형을 선고받았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포로수용소장이었으며,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선 온갖 범죄들이 행해졌으니까. 그가 구해준 유대인, 폴란드인들이 떼지어 호젠펠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탄원했으나 사형을 25년 형으로 감형받는데 그쳤고, 소련은 그를 가두고 고문했다. 너무 심한 고문에 뇌졸증을 여러 번 겪던 그는 종국에는 지능도 7세 수준으로 퇴화, 자신이 왜 고문받는지도 모르는 채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렇게 잊혀진 호젠펠트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슈필만에 의해 재조명됐고 10년에 걸친 조사 끝에 아무런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 2009년 훈장이 추서되고 명예가 회복됐다. 니콜라스 윈턴 2차대전 당시 영국의 은행원이었다. 그는 휴가로 스위스에 갔다가 친구가 보여준 나치독일의 체코의 수용소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자신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친구들과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외국의 유대인 아이들을 입양해 독일로부터 구하는 인도적 운동이 한창이었다. 윈턴은 이를 이용해 체코에서 유대인 아이들을 빼내 영국에 입양보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재산을 털어 경비를 마련했고, 나치 장교들에게 뇌물을 먹였다. 결국 그는 여러 번의 위기 끝에 669명의 아이들을 입양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더 이상은 위태로워 마지막으로 250명을 입양보내기로 하고 모든 절차를 밟은 뒤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그에게 들려온 소식은 기차를 나치독일이 강탈, 250명의 아이들이 실종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전쟁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250명 중 전후 생존한 유대인은 2명 뿐이었다. 이들을 구하지 못한데 엄청난 죄책감에 짖눌린 윈턴은 자신이 한 일들을 발설하지 않았다. 1988년이 되어서야 그의 아내가 창고에서 아이들의 목록을 발견하였고 윈턴은 이것도 태워버리려고 했지만 아내가 설득해 그의 선행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구한 669명의 아이들은 6천명의 가족으로 불어나있었고 감동적인 재회 후 윈턴은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며 106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을 자다가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참 잘된 일이지만, 호젠펠트와 비교하면 뒷맛이 좀 씁쓸하기도 하다. 싱글벙글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15가지 미스테리
1. 인간이 블랙홀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옛날부터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사람은 블랙홀에 떨어지면 다른차원으로 갈 때까지 자신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라고 전해져 왔지만 2012년 발표된 이론에서는 “엄청난 화염의 벽에 부딪혀 순식간에 숯이 될지도 모른다" 라고 했다. 또 다른 이론에서는 블랙홀에 가까워진 인간은 중력에 의해 신체가 늘어나면서 죽는다고 하는데 이를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스파게티 피케이션 현상이라고 부른다. (스파게티처럼 길게 늘어지기 때문) _ 참고로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늘어난 몸이 결국 분리되면서그후로 점점 분해되어 가루가 된다고 한다. 상상하기 싫은 일이지만 물리학이 앞으로 증명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인 것이다. 2. 토마토는 왜 인간보다 유전자가 많은 것인가? 토마토는 3만개의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인간은 2만개~3만개의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식물학자를 괴롭혀 온 "C밸류 역설"이라고 하는 문제이다. C밸류 역설은 생물의 DNA의 크기가 진화의 정도와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이 문제에 도전하는 이론은 몇가지 있지만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이다. 3. 플라시보 효과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인가? 우리말중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이말은 옛날에 원인모를 병에 걸려 해결방법을 모를 때 염소똥이나 알 수 없는 것을 환자들에게 "이 약을 먹으면 나을 것입니다" 라고 의식시켜 준 뒤 염소똥을 먹게하면 원인 모를 병이 낫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프라시보 현상이라고 한다. 비록 의사가 준 약이 똥이나 설탕 덩어리라 해도 그게 정말 자신의 병에 듣는 약이라고 믿고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플라시보 효과는 약에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마취 수술후 잠에서 깨어난 환자에게 “수술은 성공적으로 되었고 지금 회복하는 중이다"라고 전해주면 정말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중요한것은 실제로 수술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 화성 탐사기 바이킹이 1970년대에 발견한 생명은 무엇이었나? 화성 탐사기 바이킹은 1976년에 외계 생명체를 찾기 위해 3번의 실험을 실시했다. 첫번째의 실험 결과는 "생명 반응이 있다" 였지만 그 후 두 결과는 "생명 반응 없다" 였다. 그래서 1970년대에는 이 생명 반응이 있다는 결과는 어떠한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12년 NASA의 연구 팀이 발전된 과학 기술을 가지고 당시의 실험 결과를 다시 해석해 보니 놀랍게도 정말 "생명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과연 화성에 살고 있던 생명은 무엇이었던 것일까? 5. 지구가 탄생한 후 짧은 기간안에 물이 생겨난 이유는? 지구가 탄생했을 때 태양은 지금만큼 뜨겁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구상의 얼음이 녹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 24억년에서 38억년 전에 수분이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이러한 의문을 해석하려는 이론은 여럿 있었지만 모두 완전한 설명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6. 우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흔히 말하는 "페르마 역설"이라는 모순이기도 하다. 은하계에는 태양보다 오래된 행성이 수십억개도 존재하고 있다. 만일 그 중 몇개는 지구 같은 환경을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는 지적 생명체도 존재하고 있다고 하자. 그 지적 생명체 중의 소수는 우주 공간을 마음대로 지나다닐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왜 그들은 우리를 만나러 안 올까? 물론 "우주인은 존재하지만 우주 공간을 마음대로 지나다닐 문명 수준이 아니다" "우주인은 원래 존재하지 않으니 그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등등 이러한 이론은 자주 제시되고 있지만 아직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7. HNLC해역에만 식물 플랑크톤이 적은 것은 왜일까? 남극 대륙의 일부 바다에서 "HNLC해역"라는 해역이 존재하는데 이곳은 고농도의 영양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물 플랑크톤이 별로 없다. 이 문제는 "남극 역설"이라 하며, "철의 부족이 원인인 것이 아닌가?' 라는 공통의 이론은 나오고 있지만 완벽한 설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다. 8. 인간보다 몸이 큰 생물이 인간보다는 암이 걸리지 않는 이유 본래 암이란 세포의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증식이 조절할 수 없이 세포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일어나는 증상의 일을 말한다. 그렇다면 본래 세포의 수가 많은 거대한 생물 일수록 암이 되기 쉬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관측 또는 연구에 따르면 생물의 크기는 암 발생률은 관계가 없다고 알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페트의 역설"이라고 하여 생물학자"리처드 페트"로부터 유래한다. 지금까지 왜 세포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암 발생률이 안 오르는지는 의문의 상태다. 9. 우주 공간에 대량으로 있을 리튬은 어디 있는가? 현대의 물리학 이론에서는 우주에는 다량의 리튬이 존재하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주 공간의 리튬량을 계산해 본 결과 이론의 3분의 1의 리튬밖에 관측되지 않았다. 태어나지 얼마 지나지 않은 별에 존재하는 물질의 비율은 우주 탄생 순간에 존재했던 물질과 비율과 비슷할 것이니 물리학자가 생성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별의 리튬량을 관측해 보았는데 역시나 리튬의 양이 현저히 낮다고 한다. 도대체 우주 공간에 존재할 리튬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10. 왜 자석은 반드시 N극과 S극을 가지는가? 예를들어 S극과 N극을 가진 자석을 둘로 나누면 한쪽은 S극 한쪽은 N극이어야 할 텐데 몇번이나 자석을 둘로 나누어도 그 조각은 반드시 N극과 S극 모두를 가진다. 양자 역학에 따르면 자석의 한쪽의 특성(N극 또는 S극)만을 가진 "자기단극자 “라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 최근 이 자기 단극자가 어느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러한 특수 환경이 아닌 자연세계에서 자기단극자를 가진 자석을 볼 수는 없다. 11. 영국의 해안선의 진짜 길이 해안선을 자로 재는 경우 길이를 측정하는 것은 간단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작은 자를 써 보면 큰 자로는 눈치채지 못한 작은 울퉁불퉁한 곳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원래 있던 작은 소수 점 이하의 오차가 드러나는 완벽한 해안선의 길이를 재기는 어렵다고 한다. 이것을 "프랙탈”이라고도 한다. 일단 완벽하지 않다라고는 하지만 "어느정도"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영국 정부 육지 측량부에 의하면 1: 10000비율로 계측한 경우 영국의 해안선 길이는 약 17819.88킬로미터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정확한 해안선의 길이는 측정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12. 태양의 대기가 열을 방출하는 표면보다 뜨거운 이유는? 태양 대기 코로나로 불리는 이 가스층은 때로는 수백km 먼저 그 열풍을 분사할 때도 있는데 그 온도는 섭씨 200만도를 넘는다. 그러나 그 열의 중심인 태양의 표면(채층)은 단 5000도 이다. 이 이유는 아직도 해석되지 않고 있다. 13. 예오세 시대에 지구가 더웠던 이유 에오세시대란 지금으로부터 약 5600만년부터 3400만년 전 시대를 의미한다. 에오세 시대와 신생대는 시대의 하나이며 이 시대는 공룡 등의 대형 동물이 멸종해 새로운 포유류나 조류가 발생된 시대로 명명되었다. 이 시대에는 약간 기온의 저하가 보였지만 에오세시대에는 기온이 대폭 상승해 약 섭씨 15도에서 20도로 신생대 중 가장 기온이 높은 시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기온 상승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아직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 14. 화성에 있는 검은 얼룩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위의 사진에 있는 화성의 검은 얼룩은 화성이 따뜻해지는 시기에 갑자기 산 꼭대기 부근에서 나타나 물처럼 산 정상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 추운 시기에 들어가면 서서히 그 모습을 지워간다. 이를 본 과학자들은 처음엔 얼음이 녹아 그 물이 산 꼭대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NASA의 화성 조사기 마스 리코넷 산스 오비터"는 수분을 관측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대체 화성에 있는 이 검은 얼룩은 무엇일까..? 15. 기원을 모르는 우주 선(Cosmic ray)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GZK한계라는 것은 이론상 우주 선이 가진 에너지의 한계의 말하는 것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제기되는 이론의 하나이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이들의 이론에 들어맞지 않는 GZK한계를 돌파한 우주 선을 관측했다. 이 우주 선이 도대체 어디에서 발사된 것인지 아직도 그 수수께끼는 밝혀지지 않았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로 대표되는 장기간의 혼란기가 저물어 가던 기원전 4세기, 당시 유라시아 세계를 뒤흔들어 놓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불세출의 정복군주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의 등장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의 군사 강국들을 시작으로 이집트, 페르시아 등 당대의 대국들을 모조리 깨부수며 남아시아까지 진출, 대제국을 건설하고 오늘날 헬레니즘 문화라고 불리는 그리스풍 문화를 전파해 훗날 극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대이동으로 그리스 문화 뿐만 아니라 역방향의 전파도 이루어지게 되는데, 제국의 관리를 위해 그리스계 이주민들이 제국 각지에 흩어지게 되면서 그리스인들 역시 전세계의 문화를 접하고 받아들이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세계의 넓음을 깨닫고 새로운 문화에 감명을 받은 그리스 여행자들이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계의 여러 절경과 랜드마크가 알려지게 된다. 이를 최초로 모아 정리한 기원전 2세기 시인 안티파트로스는 세계의 명물 중에서도 7개의 건축물을 최고로 소개했다. "나는 전차들이 그 옆을 따라 경주를 할 법한 난공불락의 바빌론 성벽과, 알페우스 강변의 제우스를 목도하였다. 공중정원과, 태양의 거상과, 장대한 인공산이라 할 만한 높다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보았다. 그러나 내가 구름에 닿을 만큼 우뚝 서있는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전당을 보았을 때, 이 모두가 그 그늘에 가려졌으니, 태양마저 올림푸스 밖에서 그와 견줄만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 기원전 4000년경 부터 이어져 온 세계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바빌론은 기원전 그야말로 세계의 수도라고 불릴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한 후에도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의 대도시 중 하나로 손 꼽히던 바빌론은 이후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로 대접받았다. 당시 압도적인 존재감의 바빌론은 바빌로니아에게 핍박받던 유대인들에게 제대로 찍혀 구약 성경에서 멸망해야 할 죄악의 도시로 온갖 저주와 디스를 당하기도 할 정도였으며 도시의 중심인 에테멘앙키 신전이 후일 야훼의 분노를 사는 바벨탑으로 각색된 바도 있다. 그 위용에 걸맞게 바빌론에는 7대 불가사의가 2개나 존재한다. 그 위에서 전차가 달릴 수 있다고 언급된 바빌론의 성벽은 놀랍도록 거대한 규모로 도시를 감싸고 있었으며 특히 가장 거대한 '이슈타르의 문'과 그 앞 개선로인 '행진의 거리'는 아름다운 외양으로도 유명했다. 청금석으로 화려한 푸른 장식을 두르고 용과 사자, 황소 장식이 늘어서 있었다. 또 하나의 불가사의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으로 앞서 본 바벨탑과 성벽을 모두 건설한 장본인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기원전 7세기 아내를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고층 식물원이다. 왕비 아미티스는 초목이 우거진 고원지대였던 메디아에서 정략 결혼을 온 이후 황량한 바빌론에 적응하지 못해 향수병을 앓았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한 선물이었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수차와 유사한 방법으로 고층까지 물을 공급했다고 추정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건물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고. 현재 터키에 위치한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영묘는 정교하고 거대하기로 유명한 무덤으로 오늘날에도 마우솔레움이라는 단어가 영묘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남아있을 정도이다. 한 변의 길이가 125m에 달하는 정사각형 기단의 무덤이었다. 기원전 4세기 이 지방의 통치자였던 마우솔로스와 부인이 안치되었고 11~14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어 이슬람 세력이나 십자군에게 석재를 털렸다고 한다. 무덤의 주인장은 대충 이렇게 생겼다.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은 기원전 5세기 제우스 신전에 바쳐진 신상으로 상아로 마감한 뒤 금과 흑단으로 치장한 12m 높이의 거상이다. 보는 사람들을 모두 압도하는 위용이 있었다고 하며 신전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거대했으나 4세기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후 수십년 뒤 화재로 소실되었고 신전 역시 로마가 기독교를 채택하며 파괴되었다. 로도스의 청동 거상은 콜로서스라는 단어를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태양신 헬리오스에게 승전 기념물로 봉해진 30미터가 넘는 동상이다. 기원전 3세기 로도스 섬 항구의 랜드마크였으나 56년만에 지진으로 쓰러지고 800년 후 이슬람 우마이야 제국이 뜯어내 유대 상인들에게 고철로 팔아버렸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안티파트로스가 7대 불가사의 중에서도 최고로 뽑은 건물으로 무려 올림푸스에 견줄 정도로 찬양을 한걸 보니 상당한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자그마치 3번이나 다시 지어졌는데 그 중 두번째 건물은 웬 고대 관종이 병신짓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불을 질러 태워먹었다. 청동기 시절부터 존재했고 3세기 경 고트족에게 털리는 등 수난을 겪다가 역시 기독교화 된 로마에 의해 5세기에 폐쇄된다. 기자의 대 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불가사의로 아이러니하게도 불가사의 중 가장 먼저 만들어져 최후까지 살아남았다. 높이 138.5미터에 외부 석회암과 금 도장이 남아있던 시절에는 146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로서는 정말 경이적인 높이로 157m의 쾰른 대성당이 600년 만에 완공되기 전까지 3800년 동안 인류 문명의 가장 높은 건축물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26세기에 지어져 7대 불가사의로 선정되던 당시에도 2000년이 넘은 고대 유적으로서 외화 벌이의 주력 관광 상품이었다. 안티파트로스에 의해 선정된 초대 불가사의 이후 가끔 멤버의 변동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알렉산드리아 파로스의 등대가 유명하다. 안티파트로스 입장에서는 워낙 자주 보던 건물이라 익숙해서 선정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던데 아무튼 130m의 높이에 30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고 43km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밝아 후대에 불가사의 중 하나로 자주 뽑히고는 한다. 벼락이나 지진으로 자주 고생하다가 마침내 14세기 대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콜로세움은 서기 1세기에 완공된 건물으로 짬이 딸리는 편이라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일부 후대 기록에 선정되는 경우가 있다. 5만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으로 공사를 기념하며 선배 불가사의들을 모조리 디스하는 행사시가 유명하다. 이건 좀 길어서 걍 나무위키 가서 보도록 하자 그 외에도 동 시대에 존재한 거대 건축물로는 마야 엘 미라도르의 라 단타 피라미드나 중국 진나라의 진시황릉 등이 있었지만 아무리 그리스 여행자들이라고 해도 거기까지 가보지는 못했기에 불가사의는 지중해와 중동에서만 선정되었다. 싱글벙글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