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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트 앤 매직이라는 게임을 아시나요?

Might and Magic Book one: The Secret of the Inner Sanctum,
마이트 앤 매직은 뉴 월드 컴퓨팅이 제작하고 배급했던

RPG 장르의 게임으로 1986년 애플 II로 발매된 뒤 1987년 컴퓨터,
1990년 패미컴, 그리고 1992년 PC 엔진까지

꽤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게임이자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와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의 시작에 있는 게임입니다
뉴 월드 컴퓨팅의 첫 번째 게임이기도 한 마이트 앤 매직은 위저드리,
그리고 울티마와 함께 3개 RPG 시리즈로 불리는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의 문을 연 게임으로, VARN이라는
세계의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는 여섯 명의 모험가 중 한 명이 되어

게임의 부제처럼 이너 생텀에 담긴 비밀을 찾아나가는 데에서
재미를 챙길 수 있는 게임이었어요
유저가 조작하게 되는 모험가 일행이 최종 보스라고 할 수 있는 셸템을 찾아
돌아다니는 코락의 자취를 밟아나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결국 마지막엔 왕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셸템을 처치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사실 셸템은 죽은 게 아니라 CRON으로 도망친 거라는 걸

알지 못한 채 같은 세계로 이어진 게이트를 타고 넘어가 모험을 계속한다는 게
마이트 앤 매직의 전체적인 스토리였습니다
유저가 조작할 수 있는 캐릭터는 힘과 인내, 지능, 행운, 성격, 정확도
이렇게 6개의 스탯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서 다시

나이트, 클레릭, 로버, 소서러, 팔라딘, 그리고 아처까지 총 6개의 직업를
보유하고 있기에 각각 다른 역할을 부여할 수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하프오크와 인간, 엘프 드워프, 노움 같은 종족에 성별까지 존재해
판타지 세계에서 모험을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유물 수준의 그래픽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몰입할만한 수준의 그래픽으로

유저들은 구현되어 있는 지역들에서 다양한 적들을
상대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RPG 재미를 챙겨나갈 수 있었고

몬스터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더라도 랜덤 인카운터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어
갑자기 적들을 만나 전투에 돌입하기도 했어요
본격적으로 전투 페이즈에 돌입하기 전 유저들에겐 전투를 수행하거나
반대로 도망가는 것, 또는 적들에게 항복할 수 있는 것까지

다양한 선택지가 제공되지만 도망이나 항복이 먹혀들지 않았을 경우
그대로 전투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일반 공격이나 마법을 사용해 전투를 진행, 적을 처치하면 승리,
아군이 모두 쓰러지면 패배하는 아주 간단한 구성을 가지고 있어요
유저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건 마이트 앤 매직 3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마이트 앤 매직 역시 초창기 RPG 중 하나로써

뉴 월드 컴퓨팅이 킹스 바운티,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같은
굵직한 타이틀을 내놓을 수 있는 개발력을 갖췄다는 걸 보여주었고

마이트 앤 매직은 이후 꾸준히 시리즈가 이어지며
세계 3대 RPG 시리즈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재미를 오랫동안 선사해주었습니다
전세계에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게임들의
시작점에 놓여있는 RPG, 마이트 앤 매직!

이 게임을 아시나요?



도탁스 앙ㅋ님 펌
hyund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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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진 않았는데 워낙 유명이라 많이 들어봤어요.
그래픽이 추억돋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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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마지막 군주들 비하인드
1. 불가리아 마지막 왕 시메온 2세 유치원~초딩 나이에 4년간 마지막 군주로 지낸 뒤 스페인에서 살다가 늙어서야 민주공화국이 된 고국으로 돌아옴 근데 그때 이상하게 인기가 좋아서 바로 총리 도전. 4년간 총리로 나라 다스리고 물러난 뒤 국가에서 옛 궁궐 일부를 쓰도록 허락해줘서 거기서 아직까지 잘 지내는 중 2. 그리스 콘스탄디노스 2세 70년대 초 군사정권에 의해 왕정이 폐지됨 군사정권 끝난 후 왕정 복고시도했으나 실패 그후로도 더 시도하는데 국민여론이 절대반대라서 전혀 안먹히게되자 왕정복고가 안된다면 왕정 시절의 재산이라도 돌려받겠다며 정부 상대로 소송전 현재는 대충 싸움 마무리하고 그리스 한쪽 구석에서 입 다물고 사는중 아내가 덴마크 왕족이라서 망명때부터 현재까지 처가한테서 계속 도움받고 살고있음 3. 청나라 푸이 말년을 정원사로 살았다는 이야기는 사실 과장이고 그것보다 더 편하고 높은 직위를 받음 그냥 쉽게말해 공산당 간부로서 요직에서 지냈음 정부에서 18살 연하 간호사를 소개시켜줘서 결혼해서 가정생활도 행복(결혼당시 푸이 나이 56세) 말년에 몸이 안좋을때도 정부에서 신경써줬을 정도임 4. 포르투갈 마누엘 2세 2년 밖에 왕 재임 못하고 물러났는데도 시대적 변화라면서 덤덤하게 받아들임 오히려 자신 때문에 내전이나 폭동이 일어날까봐 국민들에 대해 걱정함 퇴임 후 영국가서 책이나 쓰면서 지냄 주변에서 왕정복고 움직임 있을때도 바로 거절함 암 때문에 40대 초에 일찍 사망 5. 빌헬름 2세 바이마르 공화국때까지는 일단 몸 사리다가 나치정권이 들어서자 본인이랑 코드가 맞는다고 착각한건지 히틀러에게 왕정복고를 부탁 히틀러는 무시했고 심지어 몇몇 인간들이 히틀러를 내쫓고 왕정복고를 계획하려다 걸린 사건도 있어서 빌헬름 오히려 불쾌해했음 본인이 왜 거절당하는지도 모르고 나치에 편지만 쓰다가 2차대전 한창인 41년에 사망 6. 오스트리아 카를1세 왕정 폐지 후 멀리 안가고 가까운 나라인 스위스에서 지내며 왕정 부활 각을 계속 재면서 살았음 옛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헝가리에서도 왕정 간보다가 쫓겨남 그리고 이 사람의 큰아들이 아주 가끔씩 디시나 다른 커뮤에 올라오는 저 장례식 짤의 주인공임 아들은 그래도 여러직업가지면서 잘 지냈음 7. 대한제국 순종 일제시대에 잘 순응하고 살았음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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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전쟁 당시에 쓰인 총
사무라이의 몰락 사가에서는 16세기부터 쓰여온 매치락 화승총, 18세기~19세기에 두루 쓰인 활강식 머스킷, 강선이 파인 머스킷, 후장총 다양하게 등장한다. 실제 역사 속 보신전쟁에서도 몰락처럼 다양한 총기가 등장했을까? 그걸 알아보자 1. 철포 무대뽀할때의 대뽀가 뎃뽀, 바로 철포다. Matchlock 스타일, 흔히 화승총으로도 부르며 조선에서는 조총이라 불렀다. 역탈을 하지 않는 순수 햄탈 토붕이라면 제국 핸드거너가 이런 총을 쓴다고 생각하면 된다. 전국시대에 일본에 유입되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큰 인상을 남겼었다. 개항하기 전까지 일본의 주력 화기로 인식되곤 하지만 이미 개항 전부터 이런 스타일의 총이 구닥다리인건 당시 일본도 어느정돈 인식하고 신무기로 대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건 2번에서 후술하겠다. 2. 활강식 머스킷 페리의 개항 이전까지 일본은 쇄국정책을 고수해 서구 세력과의 통상을 거부했으나 유일하게 네덜란드와의 교류는 끊지 않았었다. 다른 동양 국가들이 강제로 갑자기 개항하든 스스로 문을 열던 준비되지 않아 어설프게 문을 여는 바람에 피를 보는 와중에 그나마 개항으로 피해를 덜 본 이유가 네덜란드를 통해 꾸준히 서구권에 대한 정보를 접해오고 있었던 덕이 컸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개판이 났을때 당시 나가사키에서 관리로 근무하던 타카시마 슈한은 그 강국이었던 청나라가 영국에 의해 굴육을 맛보았단 사실을 알고 서구식으로 군사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타카시마는 네덜란드로부터 1840년대부터 서양식 머스킷과 대포를 수입해 네덜란드 교본에 따라 시범으로 만들어진 신식군대를 훈련시켰다. 이에 설득된 막부는 서양식 화기의 도입을 승인했지만 1852년, 막부가 경계하던 도자마 다이묘 번인 사츠마와 사가 번이 서구식 공정을 도입해 자체적으로 서양식 화기 생산에 필요한 철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흐름이 바뀌게 된다. 도자마 다이묘들의 성장을 두려워하던 막부 보수파들이 타카시마를 비난해 그를 실각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카시마의 공로로 일본은 개항 이전부터 서양식 머스킷이 유입되었고 장기적으로 보면 자체적으로 생산이 가능하게 되는 기반까지 깔아놓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몰락에서 징집병 따위들이 구식 철포가 아닌 머스킷을 들고 나올 수 있던 것은 타카시마 덕이라 보면 된다. 3. 미니에 라이플 본래 강선이 없는 활강식 머스킷이 주류인 시대에도 강선이 파인 라이플은 꾸준히 쓰여왔으나 강선을 파게 될시 장전이 불편해지는 문제로 인해 총신을 짧게 하고 소수의 특등사수들에게만 지급되는 무기에서 벗어나질 못했었다. 하지만 미니에 탄이 도입되면서 모든 보병이 강선이 있는 머스킷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게 되면서 활강식 머스킷은 차츰 도태되기 시작한다. 미니에 탄은 강선이 파인 라이플에서도 장전이 편한데다가 탄두가 원뿔형이라 구형의 탄에 비해 살상력이 오르는 소소한 효과도 있었다. 막부파의 머스킷은 상술한 활강식 머스킷이 많았던 반면에 영국과 일찍이 붙어먹었던 존왕파는 영국제 엔필드 라이플을 주력으로 사용해 사격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역덕후가 아닌 대중적인 라스트 사무라이의 이미지에서는 총, 칼, 활 조금더 봐주면 화승총 수준의 무기로 신식 서양식 무기와 싸운 이미지였겠지만, 실제로는 서구식 머스킷 vs 더 진보된 서구식 머스킷의 양상이었다고 보면된다 대충 이 친구들이 바닐라 상태면 활강식 머스킷, 대장간에서 명중 버프 붙고 나왔으면 미니에 라이플이라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3. 후장총 사실 후장총이라 하면 단순히 전장식이 아닌 총으로 굉장히 그 범주가 넓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뒤로 장전한다는 발상은 이미 초기의 화포였던 불랑기포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그 발상 자체는 굉장히 오래 되었다 할 수 있다. (불랑기포의 원형이 되는 기술은 무려 14세기에 등장했다. 사실상 화약의 등장과 함께했다는 것) 18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엠토에서도 후장총인 퍼거슨 소총이 등장한다. 하지만 뒤로 장전할 때의 문제는 화약이 연소할때 발생하는 가스압을 완전히 폐쇄하지 못해 위력이 감소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19세기 중반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에 상술한 미니에 라이플의 완성형이라 평가받는 로렌츠 머스킷을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군과 최초의 볼트액션 라이플인 드라이제 소총을 사용하는 프로이센군의 대결에서 야전에서는 연사력이 뛰어난 드라이제 소총이 압승이었으나 엄폐물을 낄 경우 가스압이 새지 않아 명중률과 사거리가 뛰어난 오스트리아군의 머스킷이 후장총인 드라이제 소총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음을 입증한 바가 있다. 요약하자면 19세기 중반까지만해도 후장총은 나오자마자 머스킷을 도태시킬 정도의 고급기술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3.1. 트랩도어 후장총 1800년대 중반의 후장총에서 가장 흔한 타입이자 보신전쟁에서도 많이 쓰였던 타입은 트랩도어 스타일이다. 트랩도어는 단순히 '경첩을 달고 열고 닫는 방식'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트랩도어 방식은 기존 머스킷을 개조해서 만들기 쉽다는 특징이 있었다. 실제로 보신전쟁 당시 존왕파 번들이 사용한 후장총에는 처음부터 후장총으로 설계된 물건뿐만 아니라 기존 머스킷을 트랩도어 방식으로 개조한 물건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한 존왕파의 주력 머스킷인 엔필드 라이플을 개조한 스나이더-엔필드 라이플 또한 존왕파의 주력 무기였다. 막부파에서도 스나이더 소총을 사용한 번들이 있었는데 쇼나이 번과 사무라이의 몰락에서도 등장하는 나가오카 번이 있다. 이 둘은 독일 상인들과 협력 관계에 있어 독일 상인들이 상하이에서 구매해온 서양식 무기를 사용해 아직 전장식 머스킷밖에 없는 존왕파 군소 번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3.2. 볼트액션 후장총 이 시기 가장 고급기술이며 현재까지도 저격수의 무기로는 볼트액션 방식이 남아있을 정도로 신뢰성이 있는 방식이었다. 물론 상술했듯이 최초의 볼트액션 소총 드라이제조차 가스압 차단이 완벽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랩도어보단 확실히 진보한 방식이었다. 막부는 독일의 드라이제 소총과 프랑스의 샤스포 소총을 도입했으나 드라이제 소총의 경우 도입한 것은 분명하나 실제로 쓰였다는 기록은 잘 나오지 않으며 샤스포 소총의 경우 막부의 근위대이자 프랑스식의 신식군대 전습대가 쓴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총만 도착하고 그 총으로 훈련을 하지 못해 보신전쟁에서는 원래 쓰던 머스킷을 들었다고 한다. 3.3. 레버액션 레버액션은 그 유명한 터미네이터가 오토바이 타면서 쏘는 샷건에 사용된 방식이다 보다싶이 레버를 당겨서 탄피를 배출하고 다음 탄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동시기 후장총들이 한발 쏘고 한발 장전해야 했던 것과 달리 관형탄창을 쓸 수 있어 속사에 가장 유리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레버액션 방식은 결국 후장총의 주류가 되지 못했는데 레버액션 방식은 사용할 수 있는 탄종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버액션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관형탄창을 사용할 경우 뾰족한 탄두가 앞에 있는 탄을 찔러 폭파하는 사고가 날 수 있었기 때문에 탄두의 형태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보병들의 소총보다는 기병용 카빈에 많이 사용되었다. 보신전쟁에서 사용된 레버액션 소총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제 스펜서 연발소총으로스펜서 연발소총의 관형탄창에는 7발의 탄이 들어갔다. 왕파의 도사 번이 특수유닛으로 보유한 도사 소총병의 주무기도 스펜서 연발소총이다. 막부파에서는 아이즈의 여걸이었던 야에가 사용한 총이었다. 토탈워갤러리 브라우닝자동소총님 펌
한국 스마트폰에 와이파이가 탑재되기 시작한 건 사실 애플 덕이 아니다
"엥 이게 무슨 소리야? 아이폰이 K-통신사 카르텔을 깨부순 건 '상식' 이라고?" 물론 아이폰의 등장이 휴대폰 시장의 판도를 크게 바꾸었고 특히 한국에서 대격변을 일으킨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만 2000년대 초반부터 IT 커뮤니티에서 놀던 틀딱으로서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명제가 사실 반만 맞는 얘기란 걸 이 글에서 설명해 보고자 함 때는 온 국민이 월드컵에 열광하던 2002년 카메라도 안 달린 휴대폰에 64화음 벨소리 나온다고 좋아하던 이 시절에 FIFA 공식 후원사였던 KT는 전세계에 IT 대한민국을 알리고자 무려 국내 최초로 지하철역, 공공장소 등에서 쓸 수 있는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출시하게 됨 이름하야 '네스팟'. 네스팟은 월정액에 가입하고 써야 하는 유료 서비스였고 휴대폰과는 달리 송신기에서 일정 범위 이상 벗어나면 연결이 끊겨버려서 이동하면서는 쓸 수 없단 단점이 있었음 바로 네스팟이 다름아닌 요즘 말하는 공공 Wi-Fi의 마케팅명이었기 때문이었는데, 뭐 2002년이면 생각보다 엄청 일찍부터이긴 한데 유료 와이파이 좀 팔아 먹었다고 아이폰이랑 뭔 상관이 있나 싶을거야 근데 중요한 건 KT의 자회사인 KTF (현재는 통합) 에서 출시하는 스마트폰에도 이 네스팟 월정액을 팔아먹기 위해 일찍부터 와이파이 하드웨어를 탑재하고 팔았다는 것임  이게 그 당시에 KTF에서 팔던 '스마트폰' 임. 네스팟 로고가 박혀 있고 즉 와이파이 하드웨어가 탑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 물론 SKT나 LGT로 팔리는 동일 모델은 와이파이를 빼고 십수만원의 비싼 데이터 요금제와 함께 팔렸음ㅋ 이 당시 스마트폰은 윈도우 모바일 운영체제를 탑재하고 피쳐폰 대짜처럼 생긴 모양새로 느려터졌지만 증권맨, 보험사 직원 등이 이동하면서 업무를 그럭저럭 볼만은 한 퍼포먼스를 뽑아주었음. 일반 사용자들 중에서도 다양한 앱을 깔아서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떄부터 꽤 있었고... 2007년 미국에서 아이폰이 출시되고 점차 출시 국가를 늘려가던 와중에 국내의 IT기기 덕후들에게 대단히 우려스러운 소식이 들려옴 바로 중국에 출시되는 아이폰 3G에는 와이파이 기능을 빼고 출시하기로 결정이 났다는 소식이었는데... 당연히 통신사 (특히 스마트폰에도 와이파이를 빼던 SKT) 의 각종 횡포에 지쳐있던 국내 IT덕후들은 한국판 아이폰도 저렇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에 빠지게 됨 물론 KTF를 통해서만 출시된 아이폰 3GS는 빠진 하드웨어 단 하나도 없이 글로벌과 같은 모델로 출시됨. 당시에 돌던... KTF에서 SKT의 국내 1위 자리를 빼앗아 오기 위해 굴욕적인 협상에 사인하고 애플의 모든 조건을 수용하여 출시했다- 하는 루머도 그래서 말이 안 되는 거임 KT 입장에선 와이파이로도 돈을 벌고 있는 입장에서 굳이 애플과 큰 의견 차이가 생길 이유가 없었음ㅋㅋㅋ 즉 아이폰 덕분에 와이파이를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다- 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는 무리가 있는 거지. 그런데, 사실 흔히 말하는 '통신사 카르텔이 외산 스마트폰 진입을 차단하고 한국 시장을 갈라파고스화 시키려고 했다' 자체는 또 맞는 말임 그리고 아이폰의 등장으로 인해 이것이 해제된 것도 맞음 그 주범은 바로 '위피' (wipi) 라는 건데, 간단히 말해서 잼민이시절 누르면 뒤지는줄 알았던 '그 버튼' 을 얘기하는 거임 아이폰 이전에는 국내에 출시되는 휴대폰은 스마트폰이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통신사 무선인터넷과 다운로드 보관함을 지원해야 했음. 이건 법적으로 강제된 사항이었음. [애니콜 PDA폰에 깔린 매직엔 다운로드 보관함] 즉 PDA폰을 쓰더라도 리듬스타 슈퍼액션히어로 영웅서기를 하면서 굳이 비싼 돈 내가며 피쳐폰 게임을 다운받지 않아도 윈도우 모바일의 방대한 앱 라이브러리까지 즐길 수 있었는데 문제가 뭐였냐 하면 이 법의 존재가 노키아, HTC, 소니 같은 외산 휴대폰의 진입을 철저히 막고 있었다는 거였음.  국내에 많이 팔릴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국내 전용 규격의 앱을 실행할 수 있도록 추가적으로 한국 시장용 펌웨어를 개발해야 하니 안해ㅅㅂ 하고 말았다는 거지. 그래서 해외시장에서 어깨좀 펴고 다녔던 여러 메이커들이 피쳐폰이든 스마트폰이든 한국 시장에 진입 자체를 못했는데... 이 위피 의무화 법은 아이폰이 공개되기 전인 2007년 초부터 꾸준히 비판을 받다가 아이폰이 국내 출시를 준비하던 2009년 초에 폐지되게 됨. 위피 의무화 법이 폐지되며 국내 시장의 빗장이 풀렸고 09년 11월 아이폰 출시 이전에 몇몇 외산폰들이 한국 땅을 먼저 밟기도 함. 결과적으로 애플이 K-스마트폰에 와이파이를 허했다! 이건 위의 중국판 아이폰 와이파이 미탑재 소동과 위피 논란이 합쳐지며 와전된 얘기임. 즉 정리하자면 아이폰이 출시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스마트폰으로 와이파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었다 -> X. KT 모델을 구입하면 아이폰의 아 자도 없던 시절부터 네스팟에 가입하지 않아도 집에 공유기를 설치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 SKT, LGT 모델도 2006~7년 경부터 와이파이가 탑재되었다. 아이폰이 없었다면 위피 의무화 법은 계속 존속되었을 것이다 -> X. 아이폰이 출시되기 전 다른 외산 메이커의 스마트폰 때문에라도 꾸준히 비판받던 법 아이폰이 이슈메이킹을 함으로써 다른 외산 스마트폰들도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시장이 열렸다 -> O. 결과적으로 아이폰 출시 즈음에 위피 의무화 법이 폐지되게 되었다. 출처
근대 지질학 역사상 가장 흥미로웠던 파리쿠틴 화산 폭발사건
세계 제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8월, 멕시코에서 옥수수 농사를 짓던 디오니시오 풀리도는 밭에서 지름 5m, 깊이 1.5m 의 구덩이를 발견했다. 디오니시오는 그것이 야생동물이나 혹은 자신의 옥수수밭을 노리는 일당이라고 생각했고, 그 이후 한동안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1943년 2월 20일. 밭일을 하던 디오니시오는 갑작스러운 지진을 느꼈고 이후 썩은 계란의 냄새와 함께 땅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두려움을 느껴 말을 타고 바로 마을로 향한 디오니시오.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모두 그가 폭발에 의해 죽은줄 알았고 기쁨의 상봉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 검은 연기와 열기는 점점 강해져왔고 부풀어오른 땅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바로 파라쿠틴 화산의 분출이었다. 폭발지 인근 수백명이 살던 마을들이 용암과 화산재에 매몰되었고 여러명의 사람들이 다치거나 사망했으며 이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화산 범위 밖에 두개의 마을이 새로 만들어졌고 2차 세계대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서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화산은 첫 폭발 이후 9년간 지속적으로 분화하며 평지였던 옥수수밭은 424m 까지 높아져 하나의 산이 만들어졌다. 파리쿠틴 화산은 학자들에게 화산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화산의 수명을 완벽하게 기록한 최초의 사례로 해당 화산이 폭발하는 동안 수십~수백건의 논문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고 현재 화산연구의 대부분은 이 파리쿠틴 화산의 폭발로 이루어져 있다. 도탁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