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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패션의 부상(浮上)

주말에는 역시 논문 특집이죠. 생각해보면 궁금한 주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어째서 하필이면 이탈리아가 프랑스 외의 패션 대국으로 떠올랐냐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사진부터 얘기를 하자면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중 하나인 엘리오 피오루치(Elio Fiorucci, 1935-2015)의 “패션 읽는 법/Come leggere la moda”이며,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촬영했다. 사실 이 사진에 이탈리아 초기 패션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사진 자세히 보면 미국과 영국의 유명인사들이 정가운데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국가로서 이탈리아 패션 산업을 일으킨 곳이 미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를 어쩌면 능가할 수도 있었을 이탈리아가 그냥 프랑스의 경쟁국에 머물고 만 것은 스스로의 분열에 있었다. 문제의 논문은 아래 링크에 있다.

Exploring the marriage between fashion and ‘Made in Italy’ and the key role of G.B. Giorgini(2020년 9월 30일) :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09654313.2020.1833842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 시작은 무솔리니다. 그의 파시즘이 갖는 핵심이 민족주의이고, 그에 따른 산업의 이탈리아화 관점에서 패션 부흥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프랑스만 쳐다보고 있는 이탈리아 패션계를 바꾸기 위해 1932년 Mostra Nazionale Permanente della Moda (EAMNPM, 국립패션위원회..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를 토리노에 설립하고 각 패션 업체들에게 만드는 옷의 25% 이상이 “이탈리아”스러워야 한다면서 사진과 패브릭 샘플을 제출하도록 명령한다.

정부가? 옷 사진과 패브릭을? 판단해? (대충 김성모의 그 짤)

무솔리니 정부는 나름 오뜨 쿠튀르 업체들에게 금장(marca d’oro)도 주고 했지만 업체들이 순순히 따를리 만무했고, 이탈리아 업체는 물론 잡지들은 여전히 최신 파리 패션 동정을 보고 배우고 보도했었다. 그래도 이런 노력 덕택인지 조금씩 패션 스타일의 국산화가 시작된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때마침 페라가모(미국에서 이탈리아로 역이동한 특이 사례이다)와 구찌, 푸치(Pucci)와 같은 브랜드들이 지명도를 쌓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쟁 직후, 원래 EAMNPM이 있던 토리노는 민관이 합작하여 이탈리아패션위원회/Ente Italiano Moda(EIM)을 세운다. 토리노를 이탈리아 패션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피에몬테가 그렇게 한다 이거지? 롬바르디아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즉, 밀라노도 이탈리아패션센터/Centro Italiano Moda(CIM)를 만든다. 다만 토리노가 먼저 선빵을 날렸으니, 밀라노에게는 우군이 필요했다.

로마다. 그래서 CIM은 첫 패션쇼를 밀라노가 아닌 로마에서 1949년 4월에 하고 그 외에는 1950년 4월에 취리히에서, 1950년 9월에 베네치아에서 개최한다. 이러니 로마는 생각했다. 우리도 하나 만들면 되겠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부터 로마는 미국 영화 스타들의 결혼 장소였다. CIM이 패션쇼를 개최한지 딱 한 달 뒤, 로마는 이탈리아 패션위원회/Comitato della Moda (CM)을 설립한다. 이때 어지러운 이탈리아 천하를 통일한 영웅이 홀로 나타나시니…

Giovanni Battista Giorgini (1898–1971) 후작이다. 원래 토스카나의 물건들을 미국 백화점에 수출하는 일을 하던 그는 1951년 피렌체 패션쇼를 기획하면서, 토리노나 밀라노, 로마도 아닌 피렌체(토스카나에 있다)를 패션 수도로 삼고 외세를 불러온다. 미국이다.

그는 이탈리아가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종목이 패션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피렌체에서 기획한 패션쇼에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몬트리올의 거물들을 이탈리아로 초청했고, 이탈리아에서 지금도 보기 쉽지 않은 거의 완벽한 영어 가이드를 제작했으며, 여기에 참여하는 이탈리아 의류 업체들에게 조건을 붙였다. 이탈리아 전통에 맞는, 프랑스 풍을 찾을 수 없는 스타일만 주문한 것이다.
1952년 피렌체 패션쇼 후, 바이어들이 드레스를 살펴보고 있다.
출처, POLIMODA CELEBRATES THE 70TH ANNIVERSARY OF THE FIRST ITALIAN FASHION SHOW :https://www.polimoda.com/70-years-ago
피렌체 시와 토스카나 지자체 또한 적극적으로 그를 돕는다(뭔가 당연하게시리 이탈리아패션 피렌체 센터Centro di Firenze per la Moda Italiana도 설립된다.. 게다가 미국 패션 언론들도 잔뜩 모셔온 그는 이탈리아 패션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 결과가 아무래도 1952년 라이프 지의 이탈리아 패션 특집일 것이다. 오뜨 쿠튀르만이 아니라 부티크 장르(프레타 포르테와 오트 쿠튀르의 사이쯤?)를 내세운 것도 특히 주효했다.
1952년 4월 미국 라이프 지, 이탈리아 패션 특집이었다.
출처, Life Magazine, April 14, 1952 - Italian fashions :https://oldlifemagazine.com/april-14-1952-life-magazine.html
당시 때마침 미국에서 프랑스 패션이 너무 고가인지라 가격대가 좀 더 저렴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패션을 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시 어디를 가도 근본이 있어 보이는 이탈리아이고, 피렌체 하면 메디치 아니겠나. 본인이 귀족이기 때문에(만초니 가문과 관련 있다) 귀족 자제들을 모아서 별도의 이벤트나 패션쇼를 하니, 근본 있는 귀족 좋아하는 미국은 이탈리아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가격 경쟁력이 중요했다. 가령 당시 오트 쿠튀르 한 벌을 파리에서 맞추면 500 달러 정도 할 텐데, 이탈리아에서 맞추면 90에서 150 달러 정도밖에 안 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디오르가 미국에서도 옷을 제작하는 바람에 자기가 남편 비서와 비슷한 옷을 입을까봐 두려워한 미국 사모님들이 이탈리아 옷을 사재기 시작했다. 결과가 그대로다. 1960년이 넘어가면 미국에 대한 패션업 수출량에 있어서 이탈리아는 프랑스를 두 배 가까지 추월한다.

그러나 그 영광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이탈리아답게(…) 다시금 도시들 간 내전에 돌입하기 때문이었다. 패션업계 길드(!)가 차례로 성공하는 걸 본 이탈리아 다른 도시(가령 팔레르모나 나폴리)들도 패션센터를 만들기 시작했고, 토리노는 피렌체로부터 왕좌를 빼앗기 위해 밀라노와 연합한다. EIM과 CIM이 합세하여 피렌체를 몰아내기 위해 해외 업체/언론과 직접 연락하기 시작했고, 피렌체 패션쇼에 각자 소속 업체들이 불참하도록 독려한다.

물론 호락호락 당할 피렌체는 아니었으나, 결정적인 한 방은 로마로부터 나왔다. 로마가 토리노-밀라노 연합에 합류한 것이다. 이쯤 되면 피렌체가 동탁이 되어버렸다. 로마의 오뜨 쿠튀르 업체들(좀 알려진 곳이라면 폰타나 시스터즈/LE SORELLE FONTANA와 시모네타/Simonetta?)이 별도로 이탈리아하이패션협회/Sindacato Italiano Alta Moda(SIAM)를 설립한다. 이들이 어떻게 피렌체를 공격한다? 피렌체 패션쇼에 참석한다고 해놓고서는 이틀 전에 자기들끼리 패션쇼를 로마에서 개최하니 어떻게 보면 더 영악하다. 밀라노는? 1955년부터 피렌체에 불참했다.

사실 밀라노도 매우 중요했던 것이, 밀라노의 패션 업계 뒤에는 텍스타일을 공급하는 산업단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도 피렌체와 커넥션을 끊으니, 피렌체의 이탈리아 패션 수도 역사는 10년을 못 갔다.

결국은 이탈리아 중앙정부 주도로 1962년 국립패션협회/Camera Nazionale della Moda (CNM)가 설립되고, 지오르지니는 여기 협회장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되어 결국 하이 패션/오뜨 쿠튀르는 로마로, 프레타포르테 혹은 부티크는 토리노/밀라노로 갈라지게 되고, 이 인식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로마의 패션위크가 “Alta Roma/하이 로마”로 불리는 것이다. 다만 오트 쿠튀르의 비중이 적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탈리아 유일의 패션 수도 왕좌는 이제 밀라노가 가져가게 됐다.
로마의 Fernanda Gattinoni 아틀리에의 모습, 오드리 헵번이나 마를레네 디트리히 등 유명인사들이 애용했던 오트 쿠튀르이다.
출처, C’è ancora spazio per la moda a Roma?(2022년 7월 15일):https://www.nssmag.com/it/fashion/30407/moda-roma-valentino/image:419469
그래도 피렌체가 남긴 것이 있지 않느냐… 당연히 있습니다. 이탈리아 스타일을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해외, 특히 미국을 위주로 한 언론과 기업들을 챙긴다는 점이다. 이탈리아가 1950년대 패션업을 하나의 도시 위주로 크게 뭉쳤다면 이야기가 달려졌을 수 있겠지만, 이탈리아가 그럴리가 없…

여담 1) 여러 다른 큰 나라들을 볼 때, 중앙집중과 한 도시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는 측면으로 본다면 프랑스나 영국 외에 어디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나마 한국 아닐까 싶다.

여담 2) 전기자동차를 생각하면 자동차 부문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을 뛰어넘는 게임체인저 역할을 전기차가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해외 수출을 위주로 해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비교적 비싸지 않은 값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사례를 볼 때, 우리나라는 (국가든 기업이든) 중앙집중이니 아마 일본을 분명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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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긴 역사를 가진 다이아몬드.jpg
16세기초 무굴제국을 건국한 "바부르"는 187캐럿의 거대한 다이아몬드에 대한 기록을 남김. 그의 기록에 따르면 이 거대 다이아몬드는 14세기초 어떤 왕이 한 인도 남부의 왕국을 침략했을때 얻은 것이라고. 이 다이아몬드는 여러 왕국을 거쳐 바부르가 전리품으로 들고왔음. 참고로 바부르는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사망함 그리고 시간이 흘러흘러 1739년, 페르시아 황제 나디르가 침략했고 다이아몬드는 그때 약탈되었음. 나디르는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를 보고는 감탄하여 "코이누르" 즉 페르시아ㅡ힌디어로 "빛의 산"이라는 이름을 붙여줌(이후 나디르는 부하에게 살해당함) 이후에도 거대하고 유명한 다이아몬드, 코이누르는 몇백년간 여러 왕조에 옮겨다녔음. 페르시아 다음엔 아프가니스탄 두라니 왕국으로 그다음엔 시크 왕국으로.... 그리고 시크왕국의 펀자브 지방이 영국령으로 편입되던 1849년. 「The gem called the Koh-i-Noor, which was taken from Shah Sooja-ool-moolk by Maharajah Ranjeet Singh, shall be surrendered by the Maharajah of Lahore to the Queen of England 」조약 中 다이아몬드는 빅토리아 영국왕 손에 떨어졌음 (영국에 넘어가기 전 마지막 모습을 그린 것) 그리고 이 돌의 못생긴 모양(영국사람들이 보고 실망했다고)은 1852년 다듬어졌는데 이때 코이누르를 굉장히 깍아내서 100캐럿 정도가 되었다고 함 (이후 빅토리아 왕이 브로치로 착용한 모습) 이 코이누르는 브로치로 사용되다가 1901년에 왕관에 올려졌고(사진은 에드워드 7세의 왕비. 1902) 1937년 영국왕 왕관에 올려졌음. 당연히 이 다이아몬드는 소유권 문제에 시달리고있는데,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영국) 2010년 인도 방문 중이던 영국 총리가 ""전례가 되면 대영박물관은 순식간에 텅 빌 것"" 이라고 머리 텅빈 소리 한것도 바로 이 다이아몬드 소유권 논쟁 때 나온 말임(떼잉....제국주의 놈들) 참고로 코이누르는 이제까지 "남자들"의 손에서 다사다난했기에 영국 왕조에서는 "남자들"이 착용하면 불운을 가져온다!! 하는 소문이 돌았고 따라서 지금까지 영국 왕조 여자들만 착용하고있다고함 출처 영국.. 대애단하군요 ㅎ..
조선시대 산후우울증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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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군주국에서 여성이 차기 후계자인 나라들.jpg
참고로 연령대를 고려해서 즉위가 가까운 순서대로 정리해봤음. < 왕세녀 기준 > 1.(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 나이 : 1977년 7월 14일생 (46세)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의 장녀로 그녀가 유넌기 시절에는 왕실이 남성왕족의 왕위만 인정해서 여왕이 될수 없었으나 법이 개정되면서 성별 차별없이 장자 우선순위가 됨 그래서 왕세녀가 되었음. 한때 부모의 아들편애로 인해 거식증도 앓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데 결혼 후 극복하고 남편과 함께 국민들로부터 큰 호감도를 누리며 왕세녀로 생활 중 부왕 칼 구스타프 16세가 77세 고령이지만 스웨덴 왕실이 장수집안인터라 즉위까지 15~20년정도 남은것으로 추정됨. 빅토리아 공주의 증조부는 92세, 고조부는 93세까지 산터라 아마 공주 역시 왕위에 오른 시기에는 나이가 환갑 남짓해야 즉위할듯 빅토리아 왕세녀는 슬하에 1남 1녀 자녀들이 있는데 큰 자녀가 공주이기에 왕세손(녀) 즉 차차기 국왕도 스웨덴은 여왕 즉위가 확정이나 다름없음. 2.(네덜란드) 카타리나 아말리아 왕세녀 나이 : 2003년 12월 7일생 (20세) 네덜란드 국왕 빌럼 알렉산더의 장녀로 네덜란드의 차기 국왕이 사실상 확정이며 생전 양위받는 네덜란드 왕실의 전통으로 인해 명단 속 왕위계승자들중 가장 먼저 즉위할수도 있음. 네덜란드는 여왕의 나라로도 유명한데 카타리나의 외할머니 베아트릭스, 외외증조할머니 율리아나, 외외외고조할머니 빌헬미나까지 여왕이 재임한 기간이 100년이 넘었다고 함. 참고로 빌럼 알렉산더 국왕은 슬하에 딸만 3명인터라 공주들이 차기 왕위계승서열 1~3위를 차지하고 있음 3.(벨기에) 엘리자베트 왕세녀 나이 : 2001년 10월 25일생 (22세) 벨기에 국왕 필리프의 장녀로 즉위 시 벨기에 최초의 여왕이 되는 인물, 벨기에도 과거에는 아들만이 왕위에 오를수 있었는데 법이 개정되서 공주도 즉위가 가능해짐 벨기에도 네덜란드처럼 선왕(왕세녀의 조부)이 생전에 양위한터라 공주도 어쩌면 20~25년뒤 비교적 이르게 왕좌에 오를 가능성이 있음. 4.(스페인) 레오노르 왕세녀 나이 : 2005년 10월 31일생 (18세) 스페인 국왕 펠리페의 장녀로 스페인 왕위계승서열 1위 왕세녀로 알려짐. 스페인도 선왕인 왕세녀의 조부가 생전에 아들에게 양위함 이처럼 왕세녀의 아버지 펠리페가 생전에 레오노르 왕세녀에게 양위할 가능성이 꽤 있음. 어쩌면 생각보다 일찍 왕위에 오를수도 있음. < 왕세손녀 기준 > 1.(스웨덴) 에스텔 왕세손녀 나이 : 2012년 2월 23일생 (11세) 스웨덴 왕세녀 빅토리아의 딸로 칼 구스타프 16세의 장손녀이자 왕세손녀 즉 왕위계승서열 2위로 차차기 국왕이 유력함 그런데 왕실이 워낙 장수집안인지라 어쩌면 에스텔도 환갑이 넘어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음. 2.(노르웨이) 잉그리드 왕세손녀 나이 : 2004년 1월 21일생 (19세) 노르웨이 호콘 왕세자의 장녀로 현 왕세손녀이자 계승서열 2위, 할아버지 하랄 5세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왕위를 지키고 있음. 노르웨이도 생전 양위사례가 거의 없어서 즉위하려면 25~30년 이후에야 가능할듯함. 즉위 시 노르웨이 두번째 여성군주가 됨. 오 새삼 군주제가 이렇게 많이 남았다는게 신기하네 ㄷㄷ
미모로 유명했던 역사적인 인물들의 실제 초상화와 조각상
옥타비아우스 아우구스투스 로마 초대 황제 보기드문 미남인데 외모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함. 그런데 또 대중 선전용으로는 자기 미모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정치력만렙인간 옥타비아 그 옥타비아누스가 매우 사랑한 누나 옥타비아. 우아하고 교양있고 상냥한 성품이라 로마시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당대 기록에 의하면 남편 안토니우스를 뺏어간 클레오파트라보다 훨씬 아름다웠다고 함 클레오파트라 로마시민들이 죽도록 미워한 클레오파트라. 그리스 마케도니아 혈통이고 대대로 근친혼을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여왕이라 외형적으로 완전히 코카시안임 클레오파트라를 백인이 연기한다고 화이트워싱이라고 하는게 오류. 체자레 보르지아 이탈리아 통일과 황제위를 꿈꿨던 교황의 사생아 체자레 보르지아.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모델로 유명한 문제적 인물 정치적으로나 사생활면에서나 나쁜 남자의 전형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체사레의 유일한 여동생. 이탈리아의 진주라는 찬사와 오빠들과의 근친상간이나 독살 루머를 달고 삶 마리아 테레지아 합스부르크 황실의 마리아 테레지아. 카리스마와 지력과 미모를 다 활용해서 20대 초반에 이미 외교전을 휩쓴 군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마리아 테레지아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손녀 마리 테레즈의 남편. 신체비율은 별로였지만 얼굴은 정적들도 인정하는 미남. 마리 테레즈도 할머니 덕분에 미인이라 둘 사이에 태어난 로마왕도 미청년이고 매우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었다는데 아버지처럼 강한 군인이 되고 싶어서 무리한 군사훈련을 받다가 요절... 폴린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고 재능도 없고 사고뭉치인걸로 유명했는데 그중 그나마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한 폴린도 미모로 유명. 왜냐면 엄마가 초미인... 메리 스튜어트 큰 키와 미모, 매력적인 성격과 교양으로 칭송받은 메리 스튜어트. 생후 백일도 안 돼서 스코틀랜드 여왕이 됨. 프랑스 왕비 지위에도 올랐고 영국 왕위 계승권도 있었지만 남편이 요절한 후로 인생이 심각하게 꼬임. 남자보는 눈 최악+정치력 최악=참수형 이 중에서 미인박명 아니고 할 일 다 하고 장수하면서 해피엔딩으로 인생 마무리한 경우는 아우구스투스와 마리아 테레지아 정도? 둘의 공통점은 끝까지 정치력과 자제력이 뛰어났다는 것 출처
사라진 1900여벌의 드레스,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jpg
2016년 어느 평화로운 오후 인터넷에 한 커다란 천의 사진이 올라왔슴둥 사진은 이 천을 설명하기를, 영국 한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제단 천으로 쓰이다가 1909년부터는 교회 북쪽 벽에 전시되어 무려 106년 동안이나 걸려있다는 천이었음 그리고 이 천의 사진을 점심 먹다 우연히 보게 된 엘레리 린(Eleri Lynn) 엘레리는 영국 복식사를 연구하던 왕실 예술품 박물관 큐레이터임ㅋㅋㅋㅋㅋㅋㅋ 사진을 본 엘레리는 심장이 반응했음 저겨저겨 그 천 제가 직접 가서 볼 수 있을까여? 보게 해주세여ㅠㅠㅠ 제발여ㅠㅠㅠ 그렇게 엘레리가 도착한 곳은 영국 잉글랜드 노폭에 위치한 작은 마을 백턴(Bacton) 엘레리는 곧장 천을 소장하고 있다는 교회로 향했음 천은 정말로 액자에 보관 된 채로 교회 벽에 걸려있었음 웅-장 WOW!!!!!헠헠 가까이 가서 봐도 대나여? 제발여ㅠㅠㅠㅠㅠ 엘레리는 가까이 다가가 천을 자세히 보자마자 이 천은 베리 베리 스페샬한 물건이 틀림었다고 생각했음 왜냐면 천의 소재가 무려 실크와 은으로 짜여있었걸랑 영국에서는 오직 왕족과 가장 높은 수준의 귀족만이 옷감에 금과 은을 넣을 수 있었다고 함 무슨 웅앵웅 법이 있었댜;; 그렇다면 역대 영국 역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 중 누가 이 천의 주인이었을까? 실마리는 생각보다 쉽게 풀렸음 놀랍게도 천이 걸려있던 교회가 블랑쉬 패리의 기념비가 있던 곳이었던 것! (사진상의 왼쪽 여자 조각이 블랑쉬 패리) 블랑쉬 패리는 25~26세 무렵 자신의 이모를 따라 영국 왕실에 들어와 평생을 영국 왕실과 자신의 군주에게 헌신했던 왕 전속 하인이었삼 (평민X, 왕 전담 하인은 귀족 신분이어야 가능) 블랑쉬 패리가 자신이 섬기게 될 주인과 처음 만난 건 주인이 아직 핵꼬맹쓰일 때 였음 그래서 블랑쉬 패리는 쥔님을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능ㅋㅋㅋ 하지만 주인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었어 그럼에도 블랑쉬 패리는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음 심지어 자신의 주인이 억울하게 런던 탑에 수감되어 있을 때 조차도 말이지 시간이 흘러 현 국왕이 사망하고 다음 왕위를 누가 이을 것인가가 문제가 됨 그리고 이 때 블랑쉬 패리의 주인은 극적으로 왕위 계승권을 얻게 됨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때 가졌던 왕위 계승권을 강제로 박탈당했다가 이제야 되찾은 것 그렇게 1558년 블랑쉬 패리의 주인이 즉위했음 영국의 영원한 영광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블랑쉬 패리는 왕실 하인의 최고 명예라 할 수 있는 왕의 개인실(또는 침실)을 담당하는 시녀장이 됨 그 말은 즉 블랑쉬 패리는 엘리자베스 1세가 매우 아끼던 하인이었음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충실한 하인이었던 블랑쉬 패리가 죽자 엘리자베스 1세는 블랑쉬 패리에게 남작 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모든 장례비를 지불했다고 해 ~다시 돌아와서!~ 천을 자세히 살펴 보던 엘레리는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을 발견함 이 천에는 바로바로 패턴 커팅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 그 말은 즉 이 천이 원래는 ‘드레스’였다는 말씀!! 하지만 블랑쉬 패리는 귀족 가문의 친척집 태생이긴 하나 그다지 고위 귀족 가문은 아니었음 그렇다면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들에게만 허용 된다던 은이 들어간 옷감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하급 귀족이었던 블랑쉬 패리가 도대체 어떻게 갖고 있는 걸까? 혹시 이 천의 원래 주인은 엘리자베스 1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영국 복식사를 연구하던 엘레리는 마침 또 하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필 이 때!!! 튜더 시대 복식사를 연구하던 중이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정도면 천이 자기 좀 조사 해 달라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 수준) 한창 튜더 시대 복식에 열정을 불사지르던 엘레리는  천에 은이 사용 되었다는 점과 천에 수놓아진 화려하고 정교한 자수들을 보고 이 천이 엘리자베스 1세의 드레스였을 거라고 확신했음 잠시만 근데 내가 이거를 어디서 봤더라.....? 분명 본 것 같은데....? 아!!!!!!! 그 초상화!!!!!!!! 엘레리는 수많은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중 어떤 한 작품을 떠올림 그 작품은 바로 영국 솔즈베리 후작의 컬렉션 중 하나인 'The Rainbow Portrait' 어때 다덜 찾았슈? 초상화 속 엘리자베스 1세는 백턴 교회에서 발견 된 천과 매우 유사한 가운을 입고 있다는 거슬,,!! 초상화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고, 왕실 예술품을 다루는 박물관 큐레이터들은 이 천이 엘리자베스 1세가 소유했었다는 1900여벌의 드레스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발견 된) 드레스 조각이라고 결론지었음 엘리자베스 1세의 드레스 일부가 어떻게 하인이었던 블랑쉬 패리의 무덤이 있는 곳에  있던 거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1. 왕이 종종 자신이 총애하는 하인에게 갖가지 좋은 선물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서 그 선물들 중에 이 드레스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 2. 자신의 평생을 제게 바친 시녀장을 기리기 위해 엘리자베스 1세가 블랑쉬 패리가 묻힌 교회로 드레스를 보냈다는 의견이 있음 암턴 어쨌든 아주 중요한 물건이 발견되었으니 좀 더 세밀한 작업에 들어가보실까유? 보존팀은 아주 조심조심 천의 묵은 때를 벗겨냄 천 상할까봐 아주 부드러운 메컵용 스펀지로 벗겨냈다고 함ㅋㅋㅋㅋ 묵은 때가 벗겨지자 드러난 것은 저세상 정교함을 보여주는 화려한 자수들이었음 함 보실까여? 자수 퀄 도라방스 보존상태 와우내 이거시 여왕 드레스의 위엄인 거신가!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르다구ㅋ 보존팀은 자수가 놓아진 천 뒷부분에 이렇게 또 다른 천이 덧대어져 있는 걸 발견했음 이들은 뒤의 천을 뜯어내는데.....! 60초 후에 공개됩니다 뒤에 붙어있던 천을 걷어내자 서서히 보이는 속살 놀랍게도 안 쪽엔 앞면과 같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한 자수가 놓아져있었음 마침내 자수가 완전히 드러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넘나 놀라벌임 눈에 보이는 건 경이로움 그 자체였음 자수가 정교하고 화려한 건 둘째 치고, 안 쪽 자수에 쓰인 색들이 원색, 형광색, 인디고, 붉은 색 등 아주 매니 컬러풀했는데 이 모든 색상들이 아주 펄풱하게 보존되어있었다는 사실!!! 언빌리버블~!~!~!!! 이 쯤에서 다시 보는 앞 쪽 자수.JPEG 비교하니까 느낌 확 오쥬 조명 차이가 절대 아니아니아니 아니라능 어떻게 이렇게 보존이 잘 될 수 있었냑오? 이 천이 1909년 교회 벽에 걸리기 전 까지 무려 400년 동안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있던 결과였음 (벽에 걸린 후에도 교회 자체가 어두웠던 탓도 있음)  엘리자베스 1세가 소유했다는 1900 여벌의 드레스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드레스 조각으로 평가 받는 이 엄청난 천의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19.10.12.-2020.02.23. 동안 영국 햄튼 코트 궁에서 <The Lost Dress of Elizabeth I>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기도 했답니당 유일하다니까 괜히 실물 보고 싶기도 하구 그릏냄 언젠가 실물을 볼 수 있을 날을 기대하며 이만 빠이룽~!~! 출처 보존상태 와우..! 이정도면 진짜 자기 발견해달라고 드레스가 적임자를 부른 수준 아닐까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