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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명언] 광복절 동주

광복절 77주년, 잊지 말아야 할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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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가의 눈으로 본 그때 그 조선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2 20세기 일본 화단의 대가로 꼽히는 이토 신수이(伊東深水, 1898-1972)가 그린 키스의 초상화이다.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 1919년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곧, 일제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풍습과 경관에 빠져들었고 깊은 애정으로 이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그림은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다가 2006년에야 재미동포 송영달 선생의 노력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됩니다. 아마,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을 터인데, 1920~1940년대 무렵 옛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름답고 정밀하게 나타나 있는 그림들을 보면 경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 Marriage Procession, Seoul_1921 혼례 행렬 이 그림은 혼례 행렬, 정확히 말하면 신부 행차입니다. 꽃가마가 아주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네요. 행렬 앞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신랑 집으로 가마를 인도하여 갑니다. 그 인도자는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습니다. 청사초롱을 든 사람들이 가마 앞뒤에 있고,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따라가고, 빨래하던 아낙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한 아낙은 길에다 물을 버리고 있네요. 뒤로 동대문이 보이는데, 다리는 청계천의 어느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East Gate, Seoul, Moonlight_1919 달빛 아래 서울 동대문 푸른 달빛 아래의 동대문(興仁之門). 이 그림에 보이는 돌담 표현은 목판화로는 하기 어려운 기법이라고 합니다. 키스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목판 원본이 소실되었고, 이 그림은 키스의 저서 <동양의 창>에 실린 것인데, 현재 누가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답니다. ◆ East Gate, Pyeng Yang, Korea_1925 평양의 동문 “1392년에 지은 평양 성곽 중 동쪽에 있는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서울에 있는 동대문만큼 웅장하지는 못하지만, 평양의 동문은 그 단순한 스타일과 함께 연륜의 은은함이 배어 있는 문이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은 그 건축법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더욱 절제된 형태로 발전시켜 한국 특유의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평양의 동문은 바로 이런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 Riverside, Pyeng Yang_1925 평양 강변 “대동강변의 이 정자는 약 150년 된 것이라고 하며, 그 주변 환경이 너무 완벽하여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정자 터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키스가 대동강변이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가 있는 근처인 듯싶습니다. ◆ Wonsan_1919 원산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 키스의 그림을 보니 과연 원산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겠습니다. 밤하늘의 별빛과 바다 위 배의 불빛이 기막힙니다 ◆ Korean Domestic Interior 한옥 내부 “비교적 여유 있는 집의 내부 풍경이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는데,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 준다.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방은 대문 가까이 있다.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길가에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마당이 있고 부유한 집은 안채 앞마당까지 해서 마당이 둘이다. 한국 사람들은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방바닥은 노란 장판지로 덮여 있는데 항상 반짝반짝 닦아놓고 있다. 사랑방 나무기둥에는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가리킨다.” ◆ The Eating House 주막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밖으로 새어 나온다. 주막은 추운 겨울날 먼 거리를 걸어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주막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달을 쳐다보는데 최고로 좋은 집 >” ◆ The Hat Shop 모자 가게 “간판에 ‘높은 모자, 둥근 모자, 리본 달린 것, 세상 모자란 모자는 다 있습니다’라고 써 있다. 이 자그마한 모자 가게의 주인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서 키가 큰 친구들까지도 가게 안에 다 들어오게 했다. 그들은 거기서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눈다. 한국에서 모자는 중요하다. 학자는 특별한 모자, 그러니까 검은 말총으로 된 모자(갓)를 쓰는데, 오로지 중국 고전을 다 읽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총각은 약혼식에서 노란 짚으로 만든 둥그런 모자를 쓴다. 결혼식 날에는 한 사람이 빨간 모자를 쓰고 손에는 백년해로와 신의의 상징인 기러기를 들고 간다. 이런 옛 풍습은 한국에서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 The School - Old Style 서당 풍경 “하늘 천, 따 지, 달 월, 사람 인. 후렴처럼 반복하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여름 해는 따갑게 비치고 있었는데, 서울 성문에서 멀지 않은 그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서당 안을 슬쩍 들여다본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을 외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앞뒤로 몸을 흔들어댔다. 나이 많은 훈장은 실내용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한시를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훈장은 조금도 학생들의 공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반장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긴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다가 학생의 외는 소리가 끊긴다거나 조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 곧바로 등이고 어디고 내려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린 학생은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글 읽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 Temple Interior 절의 내부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이 사당은 전쟁의 신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노란색의 작은 지붕 밑에 나무로 깎은 시커먼 조각상은 약 3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 한국을 지켜주었다고 믿어지는 중국 장군의 영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사당은 이상한 모양의 조각상들로 꽉 차 있었고 내부는 어두컴컴하였다. 얇고 가벼운 치마를 입고 땅에 납작 엎드려 염불하는 여인들은 마치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떨어진 꽃잎처럼 보였다.“ ※ 여기서 말하는 사당은 지금도 동대문 인근에 있는 관제묘를 말합니다. 동묘라고도 하고 관운장을 모시고 있죠. ◆ White Buddha, Korea_1925 흰 부처 이 그림의 흰 부처는 현재 서울 홍은동 보도각에 있는 백불(白佛)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A Game of Chess_1936 장기두기 “전형적인 한국 시골의 두 노인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때로는 길가에 앉아서도 한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틀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그네는 대개 소나무에 줄을 맨 것이지만, 때로는 벽돌로 세운 기둥에 매기도 한다. 그네는 이런저런 명절에 타기도 하지만 주로 봄에 타는 듯하다.” ◆ Kite Flying 연날리기 “서울은 연날리기에 최고로 좋은 도시이다. 연 날리는 철이 돌아오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온통 형형색색의 연으로 뒤덮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각종 크기의 연을 파는데, 값도 싸서 어떤 것은 불과 일전밖에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려본 것은 전형적인 아이들의 연 날리는 모습이다.” ◆ New Year's Shopping, Seoul_1921 새해 나들이 키스는 자신의 저서 <동양의 창>에 “정월 초하루인 설은 한국 최대의 명절이다. 이 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썼습니다. 광화문 해태 상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이 풍선을 가지고 놀고 있군요. 옛 우리의 세시풍경을 그린 귀중한 그림입니다. ◆ Young Korea_1920 한국의 어린이들 색동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 두루마기에 예쁜 꽃신을 남자아이들을 나란히 앉혀 놓고 그림을 그렸군요. 키스의 초기작 중 하나인데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이들이 설빔차림을 한 것 같군요. ◆ Two Korean Child_1925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아이들의 의상은 그 디자인에 있어서 부모나 조부모가 입는 옷과 다를 바가 별로 없으나 색깔이 더 다양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분홍장미 색깔의 넓은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오게 입고, 어린 남자아이들도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조금 큰 남자아이들의 바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통이 넓고 발목까지 온다. 갓난아기들의 저고리에는 색동 소매가 달려 있다.” ◆ Country Wedding Feast_1921 시골 결혼잔치 한국인의 풍습을 흥미를 가지고 관찰한 키스는 결혼식 장면을 여러 장 그렸습니다. 혹 그보다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더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번은 신부 행렬을 보려고 급히 따라가다가 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아이 어른 다 합하면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흥겹게 잔치를 치르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 Korean Bride_1938 한국의 신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자리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디어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신부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라는 키스의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격세지감을 들게 합니다. ◆ Wedding Guest_1919 결혼식 하객 결혼식 하객으로 온 이 부인은 머리에 장식이 달린 조바위를 쓰고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키스의 관찰입니다.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 Returning from the Funeral_1922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 밖에 묻는 것이 법이라, 겨울 저녁 어두워진 후에 등불을 켜 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성문의 현판에 ‘東大門’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은 아니로군요. 키스가 영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영국 왕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 The Widow_1919 과부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 Embroidering, Korea_1921 자수놓기 긴 머리에 빨간 댕기를 하고 수를 놓고 있는 처녀. 혼기를 맞아 자신의 혼수 준비를 하는 걸까요. ◆ Woman Sewing 바느질하는 여자 “중류 가정의 한 여자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그녀의 옆에는 바느질 그릇과 인두가 꽂혀 있는 놋화로가 놓여 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 A Hamheung Housewife_1921 함흥의 어느 아낙네 “한반도 북쪽에 있는 함흥의 여자들은 서울 여자들보다 키도 크고 자세도 더 꼿꼿하다. 독특한 옷차림으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닌다. 큰 두건 같은 머릿수건은 치마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대낮에 그렸다. 그녀는 땡볕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빨래를 담은 붉은 함지를 이고 있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가락지 두 개를 정성스럽게 끼고 있었다.” 이 그림과 아래의 ‘아침 수다’는 같은 소재의 그림입니다. ◆ A Morning Gossip, Hamheung, Korea_1921 아침 수다 "아침에 빨랫감을 이고 씻어야 할 요강을 들고 냇가로 나가던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머릿수건을 기술적으로 두르는 것이 풍습이며, 어떤 때는 치마나 아이들 옷으로 머리를 둘러싸기도 한다. 치마는 풍선처럼 넓게 퍼져 있고 저고리는 무척 짧다.“ ◆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_1939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 “중하층 계급에 속하는 한국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추운 겨울이라 머리에는 털이 안으로 달린 남바위를 쓰고 그 위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있다. 하얀 무명옷에는 솜을 넣어 방한을 하고 있다.” ◆ The Country Scholar 시골 선비 “이 선비는 원산 사람이다.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인 선비 의상은 8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모자도 옛날식이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는 끝 부분이 백옥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복장과 잘 어울렸다..선비는 그 부분이 잘 보이도록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옷고름은 연홍색 비단이고 옷은 엷은 옥색이었는데 까만 단하고 훌륭한 색깔의 조화를 이루었다. 이 나이 많은 한국 선비와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좋은 가정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 등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매너는 은근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는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 Young Man in Red 홍복을 입은 청년 "이 청년은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입궐할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다. 붉은색의 겉옷 밑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백색 옥돌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패옥 소리가 낭랑했다. 거북이 등과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는 꼭 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 위로 둥그렇게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내린 에이프런에는 금으로 된 단추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 등급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색 칠을 했고, 신발은 넓적하고 코끝이 뭉특해서 발이 작아 보인다.“ ◆ A Daughter of House of Min_1938 민씨 가문의 규수 “이 처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살된 명성황후의 친척이다.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또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한국 양반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얇은 천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발에 아주 잘 맞았다. 만약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그의 멋진 발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으리라! 훗날 나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이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모녀에게서 그 아버지의 우아함이나 온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영어를 잘하고 꽤 똑똑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난 듯해 기뻤다.” 처녀의 아버지는 조선 말기 최초의 프랑스 공사였다는 것으로 보아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권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02년에 주불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공사로 활약한 민영찬으로 추정됩니다. 민영찬은 국권을 빼앗긴 것을 분히 여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입니다. ◆ The Gong Player_1927 좌고 연주자 이 악기는 조선 말기 화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도 보이는 좌고(座鼓)로 생각되는데, 좌고는 궁중음악 연주에 사용되는 북입니다. 보통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으로 연주하거나 춤 반주를 할 때 좌고를 치는데, 앉은 채로 연주할 수 있도록 높이가 낮은 틀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칩니다. 좌고의 북통에는 용을 그리고, 북면에는 태극 무늬를 그려 넣습니다. ◆ The Flute Player_1927 대금 연주자 "이 사람은 과거 국악원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음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잇다. 다행히도 나는 국악원 사람을 몇 명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종묘제례 때 보았던 아주 희귀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제일 보기 드문 악기는 다듬지 않은 옥같이 보이는 삼각형의 돌을 여러 개 나무틀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편경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치면 전 음계의 음정을 낼 수가 있었고 소리가 아주 좋았다. 대개는 피리소리의 효과를 높이는 데 사용하였다. 또 오리 모양으로 만든 나무딱따기도 있었는데,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전후좌우로 돌아가면서 소리를 냈다.(박을 가리킵니다). 북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는데 언제나 피리소리가 제일 고음이었고 또 제일 아름다웠다. 이 대금 연주자는 연주도 잘하지만 행동도 점잖아서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이 잘생겼으며, 대금을 부는 사람의 섬세한 손놀림이 정말 보기 좋았다.“ ◆ Court Musicians, Korea_1938 궁중악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전통 한국음악의 정수인 궁중음악이 사라져갈 무렵, 키스는 궁중악사들을 애써 찾아 몇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아마 이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종과 순종 재위 시에 궁중음악을 연주하던 마지막 궁중악사들로 생각됩니다. 출처
남태평양 티니안 섬
남태평양 사이판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가량 가면 '티니안'이라는 섬이 나옵니다. 서태평양 북 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작은 섬으로 인구는 약 3천 명, 원주민은 차모로족입니다. 따뜻한 남쪽 섬 주민들의 표정은  매우 여유롭습니다. 그런데 티니안 섬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입니다. 아무리 봐도 남태평양 사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한국인의 얼굴입니다. 그 사람들의 성은 King, Shing, Kiosshin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김 씨, 신 씨, 강 씨였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일부 조선인들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로 강제로 끌려가서 전쟁 노동자, 전투병으로 착취당하다 전쟁이 끝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거나  살아남은 사람들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티니안 섬에 45%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그때 힘겹게 살아남았던 조선인이거나  그 후손들입니다. 지옥 같은 강제노동과 총알받이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상륙한 미군에게 자발적으로 협조하며 근근이 받은 봉급을 모아 미군에게 성금을 보내거나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는 독립자금으로 보내는 것에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일제가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입니다. 미군이 찾아낸 조선인 희생자 암매장 터에는 한국인 위령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들의 후손은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알고 한국 방문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후예임을 자각하고 역사 인식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만리 떨어진 타지에서  원주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아픈 역사입니다. 일제강점기 그 시절, 한민족에게 너무나 많은 아픔과 슬픔과 비극이 넘쳤습니다. 어찌나 많은 비극이 만연했는지 우리조차 아직도 잘 모르고 있는 아픈 역사가  여기저기 슬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은폐하고 왜곡한다고 해도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거짓에 굴하지 말고 우리의 슬픈 역사를 똑똑히 기억하여 다시는 이 비극을  답습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과거를 기억 못 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 조지 산타야나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차분하게 뜨겁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 영화 솔직후기/리뷰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입니다. 대만여행 다녀오자마자 피곤함이 가시기도 전에 바로 영화관부터 갔네요ㅋㅋ 하지만 아직 밀린 영화도 많고...볼 영화도 많고... 정말! 개강만 아니면 참 좋을텐데! 오늘의 영화는 뜻깊은 오늘을 기억하는,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건 국뽕영화가 맞아요. 한국인이라면 안 보기 힘든 내용과 주제죠. 그러나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이 정도 작품이면 보는게 좋다는 뜻입니다. 전체적으로는 흑백영화이지만 부분적으로 색깔이 배치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흑백에서 유채색으로 색깔이 번지는데요. 억압받고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 속, 자신의 선택으로 겸허히 자유를 받아들이는 듯한 느낌이었어요.스스로 선택한 죽음도 자신의 자유라고 여겼던 유관순 열사의 감정이 잘 드러났습니다. 그녀도 분명 그저 순수한 여고생이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고 어쩌면 스마트폰도 하고 SNS에 글도 올리는 사람 중 한명이었겠죠. 그만큼 지극히 평범하고도 어린 한 여학생의 얘기었기에 내용은 더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요즘 기성세대 분들은 젊은 세대를 보고 많은 불만을 드러내곤 합니다. 우리 때는 저러지 않았다, 요즘 애들은 열정과 끈기가 없다고들 하십니다. 설령 정말 그렇게 보이더라도 모든 젊은이들이 한심한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그 난세에 태어났다면 유관순이 될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을테니까요. 영화는, 유관순은, 모두가, 누구나, 만세를 외칠 자격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작품을 보면 정말 그 순간에는 유관순조차 겁을 먹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실을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너무나 어린 나이였고 가혹한 일제의 억압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더 현실적이었고 유관순의 이야기를 가장 진정성있게 담았습니다. 상업적인 면모 없이 담담하게 얘기했기에 이 작품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저는 고아성이 유관순에 어울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누구나 생각은 다르기에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만, 저는 고아성의 유관순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앳되고도 강렬한, 여리고도 우직한 모습이었습니다. 당연히 작품을 다 보면 일본에 화가 나고 지나간 역사에 한탄하고 희생한 그녀가 안타까워집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억지스러운 설정은 없었습니다. 그저 사춘기의 고집이 일제에 저항하고픈 열정으로 변했다고만 보입니다 이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기보다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누군가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싸웠고 사람 취급조차 안 하는 일제의 악랄함을 버티지 못해 싸웠습니다. '만세'라는 같은 단어를 외쳤지만 각자의 염원은 다를 수 있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위인전을 읽기 어렵다면 이런 작품을 통해서라도 기억해주시길!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기모노를 입은 이유는?
김마리아 개화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와 삼촌, 고모들 사이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06년 서울로 이주해 정신여학교에 입학하게 된 선생은 을사조약 이후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맹렬하게 전개되던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였고, 또 삼촌인 김필순 선생의 집에 드나들던 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민족의식을 더욱 키워가게 되었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김마리아 선생은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였고, 1913년에는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수학을 가르치다가 루이스 교장의 추천과 지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유학생들은 이를 독립의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김마리아 선생은 황애덕 선생 등 여자 유학생들이 거둔 성금을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여하였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국내에도 전파하여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해 국내로 몰래 들여왔고 여성계, 교육계, 기독교계, 천도교계 등 다방면의 지도자들을 만나 국내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난 당일에도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3.1운동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약 6개월간 갖은 고문을 받고 출감한 선생은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다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을 확대하였고 국권회복을 위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은 선생은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 1921년 8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김마리아 선생은 중국 남경대학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였고,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3년 미국 유학을 위해 중국 상해를 떠난 김마리아 선생은 미국에서의 고학 생활 중에도 한 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8년,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7월 귀국한 선생은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1944년 3월 13일 순국하게 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더쿠 스퀘어방
조선시대 백정은 왜 차별받았는가
백정이 조선시대에 최하위 계층이었다는건 다들 알거임 왜 이들이 이렇게 욕을 먹었는가에대해 알아보자 다만 나는 이 차별을 정당화하려는건 아니므로 이상한 오해는 금지 이들은 유목민의 후예로 추측되는데,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말을 잘 탔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려시대에는 '양수척'이라고 불렸었다. 신하들 : 전하 백성들이 양수척이랑 같이 지내기 싫어합니다. 불쌍하니까 얘네한테 토지 줘서 농사짓게 합시다. 그럼 얘네들도 일반 백성처럼 변하지않을까요? 왕 : ㅇㅇ그렇게하게 신하들 : 이름도 바꿉시다. 백정이라고 지으면 딱 좋을듯. 고려시대에는 백정=일반 백성 이었으므로 조정에서는 나름 좋은 의도로 백정이라는 이름을 붙인거였다. 이들이 일반 백성과 함께 살길 바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나게 되는데... 어느날 어느 마을이 불타게되는데 신하들 : 전하 어제 화재난거 범인을 잡았는데요 백정 무리들이었습니다. 근데 다는 못잡고 몇명만 잡았는데 얘네들은 무기들고 다녀서 생포하긴 어려워요 범인은 백정이었다. 이 녀석들은 말을 타고 무기를 들고다녔으며 화재도 저지르고다니는 노답 개무리였던거다 괜히 일반백성들이 피해다녔던게 아니다 거기다 잡힌 백정 중에는 남장한 여자도 있었는데 이들도 남자들과 함께 말타면서 강도짓하고 다녔다. 왕 : 그래도 어떻게 좀 해봐 어떻게든 교화시켜서 백성들이랑 잘 지내게해야지 신하들 : 그럼 군대도 보내고 교육이라도 시킬까여? 왕 : ㅇㅇ그렇게해봐 나름 조선 정부에서는 얘네들 학교도 보내줬다... 그러나 백정들은 바뀌지않았고 일반 백성들과의 사이는 계속 나빠졌다. 농민은 백정을 살해하고 백정은 농민을 살해하고 같은 백정끼리도 개싸움하다가 서로 죽이는 개노답 상황이 된 것이다. 왕 : (ㅅㅂ...왕도 못해먹겠다 진짜....) 신하들 : 전하 얘네들한테 토지 주고 교육 기회 줘도 전혀 말을 안듣는데 그냥 얘네들 싹 다 어디 쳐넣으면 안돼요? 어차피 범죄자들 절반 이상은 다 백정이던디 왕 : 그래도 얘네 교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자 수령들이 마을에 있는 백정들 좀 제대로 관리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관리들 : 야 이 백정 놈들아ㅠㅠ 너네 왜 농사안짓냐 우리가 땅까지 다 줬잖아ㅠㅠㅠ 백정 : 야 농사 짓는거 개힘들더라ㅋ 힘들게 그 짓을 왜함??ㅋㅋㅋㅋㅋ 남의 꺼 뺏으면되지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조선은 포기하지않는다 신하들 : 전하 오랫만에 좋은 소식 들고왔습니다^^ 한 백정이 도둑놈을 떼려잡았다는 소식입니다 왕 : 오ㄹㅇ? 그것 참 좋은 소식이구만 걔한테 벼슬도 주고 다줘 드디어 효과가 나오는건가?ㅎㅎㅎㅎ 신하들 : 응 아니야 범죄자들 중 8할이 다 백정임ㅎ 이 새끼들 강도 살인 방화 등 안저지르는 범죄가 없음요 아예 백정마을 자체가 합심해서 단체로 강도짓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리고 걔네들 체포하려고 하면 활 들고 설쳐서 오히려 우리 관군들이 다치고옴;; 상황이 이렇다보니 백정이 농사 안짓고 범죄 저지름 → 백성들이 피함. 관리들도 어차피 쟤네들 농사안하니까 땅도 안주기 시작 → 백정들은 땅이 없어서 농사를 더 안하게됨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기 시작한다 얼마나 이들의 범죄율이 높았는지 과거시험에 백정들의 범죄율을 낮추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가 문제로 나온적도 있었다. 신하들 : 전하 그냥 백정과 백정끼리 결혼못하게 합시다 강제로 일반 백성들과 혼인시키면 어떻게든 동화되지않을까요? 농민들 : 뭐래.... 우리가 왜 저런 범죄자들이랑 결혼해야함;; 농민들에게도 백정은 믿고거르는 놈이 되어버렸다. 신하들 : 전하 이제 백정이라는 말 사용못하게합시다 좋은 의도로 지은 백정이라는 호칭은 이제 욕이 되어버렸다 이 당시 패드립으로 "니 아빠 백정"이 쓰였을정도니 말 다한거다 신하들 : 전하 백정이 또 왕 : 그놈의 백정백정ㅅㅂ!!! 노이로제 걸려 뒤지겠네ㅠㅜ 수령들한테 백정 관리 좀 잘하라고해 그리고 요즘 백정한테 땅 안주는 관리들도 있다던데 그러지마라 진짜ㅡㅡ 신하들 : 아니 전하 100년간 노력했는데도 실패했다는건 안된다는 겁니다.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그 새끼들은 족쳐야한다니까요? 밤에 백정 마을 한번 덮칩시다 왕 : ㅅㅂ... 물론 이들의 노력이 완전 헛수고인것은 아니었다. 중종 대에 오면 백정들의 범죄는 상당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백정에대한 이미지가 그나마 괜찮아지나 싶었다. 임꺽정 : 응 아니야^^ 명종 대에 백정출신의 도적인 임꺽정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그를 의적이라고 알고있지만 실제 실록을 보면 딱히 의적의 모습은 드러나지않는다. (다만 당시 너무 살기 어려웠기 때문에 도적이 나타날만 하다는 사관의 평이 있긴하다) 임꺽정의 처형 이후로 백정들의 범죄율은 많이 사라지게 된다. 백정들이 드디어 정착하며 살게됐기 때문이다. 선조 : 백정들 잘 싸우잖아 걔네들을 군대에 편입시키면 안되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백정을 병력에 활용하려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는데 신하들 : ㄴㄴ예전 백정이랑 지금 백정은 다름 요즘 백정들은 존나 비리비리해가지고 오히려 군대가면 더 민폐입니다. 이 때의 백정은 예전백정과 달리 이미 한 곳에 정착한 상태였던지라 딱히 전투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처럼 초기 백정과 후기 백정은 아예 다른 집단으로 봐도 될 만큼 성질이 달랐다. 농민들 : 백정?? 걔네들 완전 무개념 집단 아니냐? 그러나 백정=범죄자 라는 인식은 전국민들에게 완전히 자리잡혀 시간이 가도 사라지지 않게 된다. 출처 오 완전 흥미진진썰 ㅋㅋ 이렇게보니까 또 완전 색다름
목숨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얼마가 적당할까?.jpg
* 달러를 원화로 환산한 금액은 요즘 환율때매 다를 수 있어요 ㅎㅎ 참고 !!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란? 공공의 행복, 고통을 뺀 행복을 극대화하는 행동이 정당한 행동이다 모든 이익(행복)을 숫자로 환산하고 그 비용(고통)을 뺀 나머지 값 중에 이익의 값이 더 크다면, 그것이 올바른 일이다 그걸 극대화 시켜야 한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일이다.... 가 벤담이 말하는 공리주의임 워.... 저 손익 계산이 너무 하지 않아?ㅠㅠ 야레야레.. 아직 충격받긴 일러..☆ 뒤에서 차를 들이받으면 연료탱크가 터진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포드측.. 근데 왜 시정하지 않았을까? 경ㅋ악ㅋ ㅋㅋㅋ갑자기 어떤 학생이 인플레이션도 계산해야한다고 해서 학생들 다 터짐ㅋㅋㅋㅋㅋㅋ 참고로 200만 달러는 우리나라 돈으로 21.5억정도 됨 한마디로 사람이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낸 이익 = 휴대전화 사용으로 사망했을 시 발생하는 손실 그러나 사람 목숨에 값을 매기는 건 실수가 아니었을까? 쟈갑다 쟈가워..... 참고로 라울이 "그렇습니다!" 라고 했다기 보단 너 진짜 공리주의자구나? 했을 때 .. 네.. 그렇다고 하죠 뭐... okay.. 이런 느낌이었음 당장 이 자리에서 구해볼 수는 없지만 구할 수 있다고 하는 라울..ㅎ.. 참고로 100만 달러는 10억 8천만원쯤 다수의 의견이 정당하고 옳은 것이라면 소수의 의견은 정당하지 않고 묵살되어도 좋은 것인가? 집단 황홀경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다수의 로마인들이 콜로세움에서의 그 '스포츠'를 즐기고 선호했다는 이유로 사자밥이 되었던 기독교인들의 죽음은 정당한 죽음이었을까? 이게 공리주의의 허점 캔자스에서 빵터진 학생들ㅋㅋㅋㅋㅋㅋㅋ 제일 많은 돈을 요구한 게 뭐였을 거냐고 물어보니까 사방에서 캔자스! 라고 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욕구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봤다시피 공리주의의 기본적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어떻게 보면 좋은 의도인 것 같지만 그것은 아주 커다란 허점을 가지고 있어 다른 소수의 의견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목숨까지 가치없다고 볼 수 있는게 최대 허점인 것 같아 진짜 위험해질 수 있는 관점이지 출처
이재명 "항일운동가 '특별예우금' 매월 지급할 것"
경기도내 10명 생존 애국지사 대상, 취임 첫 광복절 정책 이 지사 월 지급액 규모에 대해 직접 SNS 설문 조사중 "지금이라도 인고의 세월 살아온 초고령의 유공자 예우해야 마땅" 15일 오전 경기 수원 경제과학진흥원에서 열린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이영수 애국지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사진=경기도청 제공) 항일운동 등을 한 경기도내 애국지사들에게 공로를 기리는 연금(애국지사 특별예우금)이 지급될 예정이다. 애국지사 특별예우금 지급 정책은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제73회 광복절을 맞아 관련 부서에 지시함에 따라 시행계획이 마련된 상황이다. 15일 경기도에 따르면 국가보훈법 제19조(예우 및 지원)와 경기도 국가보훈대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 제3조(예우 및 지원대상) 및 제7조(복지지원 등) 등을 근거로 경기도 거주의 생존한 애국지사들을 대상으로 내년 1월부터 특별예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경기도내 생존 애국지사 10명.(자료=경기도청 제공) 생존 애국지사는 37명(전국)으로, 이중 10명이 경기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광복군 출신의 김유길(99·군포), 김우전(96·성남), 민영주(95·파주), 이태순(94·평택), 김국주(94·안양), 이영수(94·수원)씨를 비롯 ▲학생운동으로 항거한 박기하(90·용인)·권태염(91·성남)씨 ▲국내항일 운동을 한 이준호(93·남양주)씨 ▲중국에서 광복운동을 한 오희옥(92·용인)씨 등이 경기도내에 생존한 애국지사들이다. 이들 모두 나이가 90~99세로 초고령에 해당한다. 도는 "지금이라도 경기도 차원애서 나라를 위해 애쓴 분들의 공로에 대한 예우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이 지사의 의중" 이라고 밝혔다. 특별예우금은 도가 직접 애국지사 본인의 계좌에 송금하게 되며 사망 및 다른 지역 전출, 주민등록 말소 등이 발생할 시에는 지급이 중지된다. 도는 현재 1인당 월 100만 원(연 1천200만 원)을 지급, 1억2천만 원 예산이 투입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나 아직 금액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도는 이와관련, 오는 10월 중 보건복지부와 사회보장지원 신설·변경 협의를 할 방침이며 11월에는 경기도 국가보훈대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 개정 및 조항 신설 등을 통해 애국지사 특별예우금 지원근거를 명확히 마련할 복안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트위터 캡처. 관련 사항을 보고받은 이재명 지사는 이날 오후 1시께 자신의 트위터에 '광복절 맞이 긴급 의견수렴' 이란 제목의 트윗을 남겼다. 이 지사는 이 글에서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을 위해 헌신한 경기도 항일운동가분들에게'경기광복유공연금'을 시작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어 "경기도에 10분이 생존해 계신데, 연금은 얼마가 적당할까요?(정부지원금과 별도)" 라며 매월 50만 원, 100만 원, 150만 원, 200만 원 등 4가지 보기를 제시했다. 이 지사의 해당 트윗이 등록된지 4시간 여가 지난 이날 오후 5시 31분 현재 2천520표가 이뤄진 가운데 '매월 200만원'을 선택한 네티즌이 51%로 가장 많고 100만원(28%), 150만원(12%), 50만원(9.0%) 등이 뒤를 이었다. 투표는 16일 오후 1시께 마감된다. 한편 이 지사는 이날 오전 수원시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행사에서 "민족의 자주독입을 위해 일제에 맞서 목숨 바쳐 싸우신 애국선열들과 독립 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에 진심어린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인고의 세월을 살아오신 독립유공자와 유가족들께도 존경과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고 밝힌바 있다.
밀양시립박물관을 둘러보다.
각 도시마다 박물관을 운영합니다. 우리나라 111년 기상관측이래 최고의 폭염일에 방문했던 밀양시립박물관.. 밀양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여행지가 우리나라 3대 루이며 영남의제일루라 일컽는 영남루와 그 주변의 객사,얼음골 정도였었는데요, 이번에 다녀온 밀양시립박물관도 주변분들이라면 다녀오실만 할듯 합니다. 특히나 밀양아리랑대공원 내에 건립되어 있어서 자연과 어린이놀이시설 밀양아트센터등과 함께 둘러보신다면 하루정도 시간을 내어도 좋을듯 합니다. 밀양시립박물관은 2층의 박물관시설과 박물관건물에서 진입이 가능한 독립운동기념관도 둘러볼수 있어서 자녀에겐 역사공부에도 참좋은 그런곳인듯 합니다. 1층은 역사실 2층은 유학ㆍ서화실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각 층마다 작지만 휴게실도 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1층 역사실은 구석기유적인 밀양 고례리 유적의 설명으로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의 다양한 유물들로 꾸며처 있습니다. 아랑의전설과 밀양의 다양한 민속속놀이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제인 밀양의 백중놀이에 대해서도 알수 있네요. 밀양은 이만여전인 후기 구석기새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것 같습니다. 2층의유학ㆍ서화실입니다. 그림과 글에 대한 설명공간 입니다. 인쇄술의 발달과정등을 알수 있는 공간이죠. 목판과 탁본, 금속활자에 대한 내용과 옛조상과 선비들의 그림과 글씨 그리고 문집이 전시되어 져 있네요. 1층로비에서 입장이 가능한 독립운동기념괜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밀양지역의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