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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지브리의 흥망성쇠...jpgif
(일본 영화업계 구조상, 순이익이 나려면 제작비 대비 최소 2배 이상을 벌어야 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제작비 4억엔, 흥행 수익 15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이때 얻은 자본과 기술력으로 스튜디오 지브리가 설립됨. 천공의 성 라퓨타 제작비 8억엔, 흥행 수익 12억엔 - 흥행 실패 특이사항 - 흥행은 실패했으나 대중들에게 '지브리'라는 특유의 아이덴티티를 각인시킨 작품.  반딧불의 묘, 이웃집 토토로 (동시상영) 제작비 12억엔, 흥행 수익 12억엔 - 흥행 실패 특이사항 - 당시 어린이 관객들이 처음엔 아기자기한 토토로를 보고 까르르 웃다가 곧이어 암울하기 그지없는 반딧불의 묘를 보고선 엉엉 울면서 집에 갔다고 함. 때문에 이상한 입소문을 타서 극장수입은 망했으나 2차상품, 특히 토토로 인형이 66만개나 팔리면서 제작비 회수. 마녀배달부 키키 제작비 4억엔, 흥행 수익 37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여기서 벌어들인 수익 덕분에 지브리의 숨통이 트임. 붉은 돼지 제작비 9억엔, 흥행 수익 54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비행기를 좋아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취향이 잔뜩 가미됨. 서양권 지브리 팬들이 센치로 다음으로 높게 치는 작품.  귀를 기울이면 제작비 7억엔, 흥행 수익 18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지브리 내의 젊은 스태프들이 주가 되어 만들었던 TV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에 대한 카운터 작품. 현재 실사 영화 제작중.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제작비 10억엔 흥행 수익 44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시 공산주의' 색채가 강한 작품. 같은 해 개봉한 라이온킹을 흥행에서 이김.  모노노케 히메 제작비 21억엔, 흥행 수익 193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지브리의 포텐이 터졌던 TOP3중 하나. 원작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1980년에 TV 방영용으로 계획했던 '도깨비 각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제작비 20억엔, 흥행 수익 304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일본 애니메이션 최고 흥행작. (이걸 따라잡을뻔 했던게 바로 '너의 이름은.') 지브리 최초로 CG가 사용된 작품.  고양이의 보은 제작비 20억엔 , 흥행 수익  64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귀를 기울이면'의 스핀오프작. 미야자키 하야오의 특유의 색채가 거의 없는 작품. 하울의 움직이는 성 제작비 24억엔, 흥행 수익 232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지브리의 황금기의 끝물. 이때부터 매너리즘에 빠진 모습이 조금씩 보임. 게드전기 제작비 22억엔, 흥행 수익 77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미야자키 하야오의 라이프워크.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제작함. 지브리 이름빨로 흥행은 성공했으나,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스토리텔링 때문에 지브리 최고의 흑역사로 남게 됨. 벼랑위의 포뇨 제작비 34억엔, 흥행 수익 155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기존의 심오한 작품의식등을 죄다 버리고 '순수한 어린아이들을 위한 만화영화' 컨셉으로 만듬. 마루 밑 아리에티 제작비 24억엔, 흥행수익  - 92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감독을 맡았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가 이후 지브리를 나가서 만든게 바로 '메리와 마녀의 꽃'.  코쿠리코 언덕에서 제작비 22억엔, 흥행 수익 45억엔 - 본전치기 특이사항 - 미야자키 고로의 두번째 도전작. 그냥저냥 평타는 침. 바람이 분다 제작비 30억엔, 흥행 수익 120억엔 - 흥행 성공 특이사항 - 전쟁범죄 옹호 논란으로 말이 많았음. 가구야 공주 이야기 제작비 52억엔, 흥행 수익 25억엔 - 흥행 실패 특이사항 - 수채화풍의 작화 방식을 채택하여 인건비가 어마어마하게 듬. 추억의 마니 제작비 12억엔, 흥행 수익 35억엔 - 본전치기 특이사항 -  위의 가구야 공주의 적자를 다 메꿀 정도로 많이 벌어야만 했는데 실패함. 출처ㅣ https://www.dmitory.com/comic/116337536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가 컨트롤타워에 있어야 하나봐요 . . 사실상 하야오가 곧 지브리라서 어찌보면 이게 약점인 듯 T_T
드로잉 끝판왕이라는 평가를 받은 한국인 만화 작가
무라타 유스케라는 일본 만화 작가가 있는데 현지에서는 '노력하는 천재' 라는 소리를 들음  이 사람 드로잉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냥 연재하는 만화 컷들을 연속으로 슬라이드 배치하면 애니메이션이 될 수준임  채색능력도 엄청나서 소년점프 2000호 기념 한정 컬러 포스터를 두 번이나 맡았는데 서로 다른 만화의 주인공들을 각 작품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그림체를 덧씌운 고퀄리티 작품을 뽑아 냈음  G펜과 마카를 이용한 수작업만 고집하는 방식으로 그런데 이런 완전체 같은 능력치를 가진 무라타 유스케가 '이런 사람이 천재구나' 라고 생각하고 교류를 시작한 만화가가 있으니  김정기라는 사람임  G펜과 마카를 애용하는 무라타 유스케처럼 이 사람은 붓펜이나 붓을 주로 사용하는데 작업 과정을 보면 천재가 누군가를 천재라고 부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됨  블리자드와 콜라보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드로잉 마블 스탭들 앞에서 직접 시연한 시빌워2 드로잉  안시성 개봉 당시 콜라보레이션 이 영상을 본 사람 중 몇 명은 영화보다 드로잉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  삼일절 기념 드로잉  지금은 전세계 돌아다니면서 드로잉 쇼도 하고 간간이 방송출연도 하는 중 출처 : 더쿠 개인적으로 김정기 작가님의 드로잉은 정말 경이롭다고 생각합니다 *_* 위 동영상들을 봐도 충분히 그렇다고 생각하실 듯 . . 정말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작가님이시죠 ! 추가로 몇가지 드로잉을 더 올려볼게요 - 영상도 꼭 꼭 보시길 바라요 :) 압도적인 드로잉 실력에 감탄을 연발하실듯 해요 어떻게 밑그림도 없이 이렇게 완벽한 그림을 그려내시는지 . . 이미지 출처 : 구글, 핀터레스트
주유 공근 (周瑜 公瑾) A.D.175~210
역사에 있어 가장 무의미 하면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만약에"(Maybe)라는 가정이 아닐까 한다. 특히 역사 속 인물들에 있어서 가장 많이 적용되는 '만약에'는 'OO가 더 오래 살았다면...'이 아닐런지. 오늘의 주인공은 삼국지를 읽어본 이들에게서 바로 저 '만약에...'를 가장 많이 되내이게 했을 인물 "주유". 삼국지에서 주유는 위에서 언급한 '만약에...'에 제일 많이 언급됨과 동시에 저승에서 나관중에게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었다면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린 나관중의 거듭된 항소에 3심까지 가더라도 무조건 다 승소할 만큼.. 삼국지연의 최대의 피해자나 다름 없는 너프를 먹은 비운의 인물이다. 삼국지 등장인물 중 가장 빼어난 용모 + 명문가의 귀족 + 최상류 부유층 금수저 + 너그럽고 대범한 성격 + 천부적음악재능 + 천재적 전략가 기질 + 미녀 아내 등등.... 엄친아를 넘어 먼치킨이던 이 남자는 촉빠에 제갈량빠인 나관중에 의해 "제갈량과 맞다이를 벌인 죄"로 앞뒤 안가리고 덤비는 다혈질에, 상황파악 못 하는 넌씨눈, 속 좁아서 제 성격도 못 이기는 쫌생이로 격하되었다. 어린 초딩시절, 당시 원술 휘하의 장수던 손견의 장남인 손책을 조우하고 그에게 반해 그때부터 마음 깊이 손책의 사람이 되기로 다짐한 주유는 당시 대대로 명문가에 양주지역의 큰 호족의 자제였음에도 고작 일개 장수의 아들에 불과한 손책에게 다방면의 호의를 베풀며 둘의 우정은 깊어간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생일은 손책이 빨랐고, 손책의 모친 오국태부인도 주유를 매우 예뻐 했으며 손견 또한 주유를 아들같이 대했고 주유는 자기네 집안이 보유한 가장 큰 저택을 손책에게 선물한 적도 있었다. (역시 친구를 잘 만나야..) 지금으로 치면 하버드를 졸업하고 잘 생긴데다 머리 좋고 돈 많은 신진그룹의 조태오가 아버지가 9사단에서 대대장 하시는 내 친구 창석이랑 친구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창석이네 아버지 예편 하시고 베스킨라빈스 하심) 삼국지연의에서 어쨌건 삼국의 한 축을 맡는 손가의 출발점인 손견에 대한 미화가 커서 그렇지, 사실 죽는 순간까지도 손견은 원술 휘하의 장수였고 더구나 손책과 주유가 알게 될 당시의 손견은 진짜 크게 대단할 게 없던 장수였다. 손책이 십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주유는 양주 일대의 여러 호족들에게 손책을 소개하고 친분을 쌓게 하고 안면을 트게 하는 등 손책을 키우기(?) 시작했고 물심양면으로 손책을 조건없이 도울만큼 손책에게 잘 대해줬다고 한다. 이후 손책의 바로 아랫동생인 손권과도 친분이 깊어졌고 손권 역시 하나님같이 여기던 형의 베프인 주유를 형님의 예로 모셨는데, 놀라운건 그래봤자 친구 동생이고 무려 일곱 살이나 어린 꼬맹이던 손권을 "깍듯이" 대했고 늘 존칭과 경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결과론적으로 주유가 손권 아랫 사람이 된 역사를 아는 우리 입장에서야 '당연한거 아님??' 이라지만 그때만 해도 손책이 그렇게 크게될 지, 손권이 그보다도 더 크게될 지는 알 수 없던 상황.... 심지어 손책은 부친 손견이 전사한 후, 원술에 의해 잉여쩌리 취급 받다 소수병력만 이끌고 독립했는데, 이 때만 해도 손책의 성공을 점치는건 고영욱이 뽀뽀뽀 진행자를 맡을 확률보다 낮았다. 아마도 주유는 손책의 대단한 포텐셜을 감지하고,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손책을 크게 성장시킬 마음을 먹고서 그랬던게 아니였나 하는 짐작을 해본다. 이전 제갈량편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전략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제갈량 이상이였고, 실제 역사에서 조조를 사실상 유일하게 처참히 발라버린 판의 총지휘자였다. 적벽대전 당시 고작 3만 여에 불과한 겁에 질린 오군을 이끌고 2만이 좀 안되던 유비군과 연합하여 당시 약 20만 ~ 24만 여 명으로 추산되던 조조군을 지워버린 가장 큰 주역은 각 군의 배치와 전술기획, 총 지휘를 한 주유였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 24만 VS 5만은 넘사벽 차이까진 아니라 보여질 수도 있지만, 무슨 첨단무기나 장비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쪽수가 깡패고 전술이던 당시 상황에서 저 차이면 대개 GG 치는 경우가 부지기수.. 더구나 저 때의 조조군은 중국 특유의 빅뻥을 가미, "100만 대군"을 자칭하며 장강(양쯔강) 상류에 진을 쳤고, 당시 분위기는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와 스파르타의 전쟁이나 엇비슷한 분위기, 상황이였는데 오히려 이길 수 밖에 없다는 자신감으로 뭉쳐서 여유있던 주유였다. 오의 대부분 고관대작들이 항복을 주창했으나, 항전론을 외친 최초 발언자는 "노숙"이였지만 노숙은 "우리가 이김!"이라기보다는 "아마 질거임...그래도 붙어보자능!!!" 이던데 반해 주유는 항전을 넘어, 승전을 자신했다. 그는 여느 전략가들처럼 혼자 이것저것 짜내기보다 여러 책사들과 장수들과 회의를 하고 거기에서 나온 여러 아이디어들 중 "될 만한" 기획안을 채택하는데 능한 '수석' 스타일이였다. 사실 저것도 대단한 게, 정말 뛰어난 대국안이 없으면 당연히 여러 아이디어 중 뭐가 옥석인지 알 수 없다. 적벽대전의 신의 한 수였던 "화공"도 주유나 제갈량의 아이디어가 아닌 무장이던 "황개"의 의견이였던걸 주유가 채택한 것... 게다가 유비를 대단히 경계했던 사람이였다. 당시 오 내부에서 대체로 유비를 그리 높게 보는 이가 없었고, 유이하게 노숙, 주유만이 유비를 높게 봤으나 둘의 대처는 달랐다. 노숙은 유비와의 화친을, 주유는 유비 및 유비세력의 조기견제를 주창.... 만약, 손권이 주유의 의견을 따랐다면 이후 황제까지 오른 유비는 없었을 것이나, 손권도 유비를 잠재적 위협요소라 인지는 했으나, 주유만큼은 아니였고 당시의 상황도 상황인지라 노숙의 의견을 따른다. 장로가 유장이 통치하던 익주를 공격하자, 그 소식을 듣고 손권에게 서촉정벌을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였다. 일단 천하패권보다 형과 자신이 일군 강동의 지배력 강화가 우선이던 손권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던 시각의 오 문무대신들에게, 성공할 시에는 천하의 남쪽 절반을 먹는 서촉 정벌은 실로 스펙터클 했다. 그러나 홈에서는 막강했어도 원정능력이 그닥이던 오군 이끌고 장거리 원정에 심지어 험준한 산지에다 오군 최대 장기인 수전을 벌일 수 없던 터라, 주유의 "서촉정벌"은 '하이리턴 & 하이리스크'로 받아들여졌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나는데 맞손뼉 없어 흐지부지 되었으나 이를 통해 주유의 야망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솔직히 이건 좀 많이 무리수였다...) 그는 실제로 서량의 마등&한수와 연합하고 요동의 공손일파와도 협력한 후 조조의 등 뒤를 흔든 틈을 타 형주와 서촉을 온전히 손에 넣어, 양쯔 이남 점령 후 북진하여 위를 쳐부술 플랜을 갖고 있었고... 그 당시에는 심지어 조조조차 천하통일을 염두 못한 시점에서 삼국지 등장인물 최초로 천하통일 플랜을 품었던 인물이였다. 제갈량과는 앙숙처럼 나오며 못 죽여 안달처럼 이미지가 각인 되었지만, 적벽대전 당시는 제갈량을 존중했고, 이후로도 비즈니스적으로만 적대했을 뿐, 그를 상당히 대우했다고 한다. "하늘은 어찌 주유를 낳고, 또 제갈량을 낳으셨나!" (旣生瑜, 何生亮) 주유는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주유가 화살 맞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제갈량 탓의 빡침에 상처가 터져 끝내 죽었다는 것은 픽션으로, 병사했고 학자들은 말라리아로 추정하는 쪽으로 무게가 기운다. 적벽대전 당시 위의 스파이 역의 장간이 연의에서는 주유와 동문으로 나오지만 이는 허구... 둘은 이 때 처음 본 사이였다. 손책과 주유의 아내인 대교와 소교가 유명한데, 대교와 소교를 얻을 당시 손책은 이미 정실이 있어서 대교를 첩으로 들였으나, 미혼이던 주유는 소교를 정실로 맞았다. 아내를 많이 사랑했는지, 굉장히 자상히 아내를 잘 챙겼던 듯 한 기록이 있다. 상당히 젠틀했고 사실상 오의 군권을 잡은 손권 다음 2인자였음에도 누구에게도 위압적이거나 하대 하는 법이 없이 예의바르고 겸손히 대했다고 한다. 손견부터 손가를 섬긴 노장 정보가 초반 그를 몹시 무시했으나 변함없이 예의바르고 자신을 공경하는 그에게 감화되어 끝내 잘못을 빌었다. 이건 왠만한 이들 잘 모르는데... 신은 공평했는지, 키는 좀 작았다고 한다.ㅋ 노숙에게 장신이던 제갈량과 마주하며 목이 아프단 말을 한 적 있다. 음악적 재능이 대단하여 아무리 정신없거나 술 취한 와중에도 곡의 연주가 틀리면 지적했다고 하고, 악기도 다루고 노래도 잘 했다고 한다. 굉장한 말술을 마셨다고 하며 오에서 손권 다음가는 주당이였으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진 않았고 술도 주위에 강권하진 않았다. 장남은 이것도 유전인지 요절, 차남은 개망나니, 막내딸은 남편이 요절.... 자식농사는 흉작이였던 듯..;;;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이 주유의 후손이라고 한다. 실제로 영화 적벽에서 원래 주유 역은 주윤발이 먼저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검술에 제법 조예가 있었다고 하며, 감녕과의 대련에서 호각지세를 이뤘다고 한다! 허나 그렇다고 감녕과 무력이 동급이라 할 수 없는게, 감녕은 전장에서 다수를 상대하는 마상창술 (말 타고 창질)에 능한 야전장수였기 때문. (또 실전이 아닌 '대련'이였고...) 이건... 진짜 깨는 정보인데... 주유가 오의 군권을 쥐고 있었고 오는 지리적 특성상 양쯔강의 수군이 주력이라, 오는 수군의 총사령관인 "도독"이 지상군과 수군을 총괄한다. 아무튼 주유는 그런 수군 사령관임에도 함선에 탄 적이 "거의" 없었다.(아예 없진 않음) 그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배멀미".... 수군 도독인데도 배멀미를 해서 함선을 왠만하면 안탔고 본인도 이게 되게 창피했는지 이를 숨기려고 꽤 애를 쓴 모양이다. (멀미약이 있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지도..) 아무래도 주유의 리즈가 적벽대전 당시이다보니 적벽대전 관련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적벽대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 단독으로 다룰 예정이라 일부러 너무 자세히 풀진 않았음! 또 주유가 워낙 손책과 베프인지라, 손책 이야기도 좀 나왔는데, 역시 손책도 나중에 자세히 다룰 예정.
[Weekly BIZ] [Cover Story] 제 작품 50번이나 본다고요? 49번 볼 시간에 다른 경험하세요
日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一聲 아이들이 6세 될 때까지 TV시청 제한 바람직, 대신 책을 읽고 사물을 느끼게 해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면 날것 포착하는 능력 잃게 돼 독서와 체험이 나의 힘, 읽고 상상하는 재미 놓치지 마라 3D가 대세지만 2D 고집하는 건 과잉 시대엔 오히려 빼고 또 빼야 책도 잡지도 많이 만들어져 가치 없어져 제대로 봐야될 것까지 지나쳐 버리게돼 日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 은퇴를 선언한 미야자키 감독에게 “더 이상 당신의 새 애니메이션을 볼 수 없어 슬프다”고 하자, 그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역시 그런 말을 들을 때 은퇴하는 편이 좋아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도 마지막에 영화 만들었을 때는 다들 ‘이 영감 빨리 죽어라’ 그랬거든요(웃음)”. /이덕훈 기자 도쿄 최대 번화가 신주쿠(新宿)에서 전철을 타고 서쪽으로 30분쯤 달려 대학 캠퍼스와 주택가로 둘러싸인 히가시고가네이(東小金井) 역에 닿았다. 목요일 오전 작은 역사의 한적함을 뒤로하고 북쪽 출구를 나서 골목을 돌아 10분쯤 걸었다. 주택들 사이에 숨어 있던 3층 건물이 나타났다.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72) 감독 창작의 산실인 지브리 스튜디오다. 안으로 들어가니 왼쪽 사무실에 남녀 직원 3명이 앉아 있고, 책상 밑으로 고양이 두 마리가 어슬렁거렸다. 사무실 바깥벽에는 최근 개봉한 미야자키의 마지막 장편(그는 지난달 공식 은퇴했다)인 '바람이 분다'와, 지브리스튜디오의 공동 설립자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78) 감독의 올 11월 개봉 예정작 '가구야 공주 이야기'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안쪽 중앙에는 직원들이 쉬거나 식사하는 카페테리아가 있다. 1층 면적은 다 합쳐봐야 한 150평이나 될까? 메인 건물 외에 제2, 제3 스튜디오가 바로 옆에 있긴 하지만, 규모가 고만고만해 인근 주택들에 비해 전혀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다. 스튜디오를 나와 도보 5분 거리인 감독의 개인 사무실에 당도했다.(그는 스튜디오 외에 별도 사무실을 갖고 있다.) '플랜더스의 개'에 나올 법한 유럽풍 아기자기한 외관이 예뻤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자 창문 안쪽에서 보고 있던 미야자키 감독이 문을 열고 나와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 그의 30년 팬으로서 그의 사적 공간에서 가진 단독 인터뷰는 가슴 뛰는 일이었다. 일본에선 흔히 "지브리는 언론 홍보가 따로 필요 없다"고들 한다. 일본의 모든 담당 기자들이 미야자키 팬이기 때문이다. 1990년 전후로 중·고교를 다닌 기자는 친구들과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天空)의 성(城)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를 불법 복제 비디오로 돌려보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는 1979년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 성(城)'으로 장편 데뷔한 이래 '이웃집 토토로(1988)' '모노노케 히메(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등 내놓는 작품마다 전 세계 어린이들, 나아가 많은 어른까지 매료시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일본에서만 2350만명을 동원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 삶의 무게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야자키 감독의 표정은 '이웃집 토토로'에서 토토로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을 때의 약간 짓궂은 표정을 쏙 빼닮았다. 말은 아주 빨랐고, 말 중간 중간 아주 나직하게 "정말로요"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감독님은 작품에서 '살아라! 세상은 잔혹하지만,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 메시지에서 관객들이 큰 위안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건 어쩌면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 저는 그런 격려를 원했던 것인지 몰라요. 제가 어떤 아이였느냐 하면 몸도 안 좋고 내향적이고 모순에 가득 찬 아이였거든요." ―감독님의 일에 대한 철학은 무엇입니까. "'네게 주어진 것을 온 힘을 다해 이뤄라'는 말이 있는데요. 제 경우엔 '애니메이션을 선택했든 다른 뭐를 선택했든 정말 열심히 하라' '자신의 빵을 기뻐하며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다가 배가 아플 수도 있고, 온갖 일들이 일어날 테지만요. 어떤 직업이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특별하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다'거나 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창의성이 기업계의 화두가 된 시대에 미야자키 감독의 창의력 원천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다양한 체험과 독서' 딱 두 가지를 강조했다. 기자가 "'이웃집 토토로'나 '모노노케 히메'는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수십 번 반복해서 봤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자 그는 뜻밖에도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발끈했다. "제 작품을 50번 보는 대신 나머지 49번은 다른 경험을 해야죠. 반복해서 보는 49번의 시간에 무언가 잃고 있는 겁니다. 특히 어린이라면 뭔가 새로운 것을 경험할 기회를 놓치는 겁니다." 그는 "어린이가 여섯 살이 되기 전에는 TV도 보여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현실과 TV 속의 것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나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영상으로 장사하며 이런 말을 하는 게 딜레마이긴 하죠"라고 덧붙였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디지털 콘텐츠를 즐기는 경우도 많은데요. "일러스트의 시대가 지나고, 영화의 시대, TV의 시대를 지나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영상은 개인적인 것이 돼 버렸습니다.(누구나 언제든 영상을 접한다는 의미) 그러다 보니 현실에 접근하는 능력은 점점 더 약해져 갑니다. 날 것 그대로를 포착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던 그는 간접 체험이라 할 수 있는 독서의 중요성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책이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더라도 반드시 책부터 먼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셜록 홈스의 모험'을 책으로 보는 것과 영화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꼭 책으로 먼저 읽어야 합니다. 문자로 읽었을 때의 놀라움을 영상으로 옮기면 별 볼 일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언어로 읽는 것의 재미가 훨씬 강렬합니다. 어떤 무대인가, 어떤 풍경인가 스스로 생각하는 동안에 무엇인가와 만날 수 있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의 주요 작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지난달 은퇴를 선언했지만, 이는 감독으로서 창작 활동을 그만둔다는 의미이지 지브리스튜디오에서 손을 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여전히 개인 사무실에 일요일만 빼고 매일 출근하고, 지브리 미술관의 전시 작업에 관여하며, 지브리 사내 보육원인 '곰 세 마리 집'의 원장을 맡고 있다. 이번 인터뷰가 이뤄진 것은 지난 8월 한국에 출간된 그의 저서 '책으로 가는 문'이 계기가 됐다. 이 책은 일본의 '이와나미 소년문고' 창간 60주년을 계기로 미야자키 감독이 오랫동안 즐겨 읽은 소년문고 400여권 중 50권을 추천해 놓은 것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가 해주고 싶은 말들이 각각의 책 소개에 메모 형식으로 달려 있다. 지브리스튜디오는 "책 내용을 중심으로 한국 어린이들에게 책 읽기의 소중함을 전해 줄 수 있다면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했다. 애초의 약속 때문에 질문 내용이 다소 제약을 받았지만, 거장의 내면세계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체험하려 하지 않는 젊은 세대 다시 체험 이야기로 돌아가자. 미야자키 감독은 요즘 젊은이들이 뭔가 저지르고, 시행착오를 하고, 체험하려 하지 않는다고 걱정을 늘어놓았다. "일본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굉장히 싫어하는 말인데요. 사람은 누구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폐가 됩니다. 정말 폐를 끼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면 서로에게 아무도 없는 편이 좋을 거예요. 폐를 끼치지 않는 관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발톱을 세우지 않으면, 관계를 갖지 않으면 어떤 것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관계를 갖지 못하고 서로 폐를 끼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착한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 젊은 사람들의 모습이 병적인 오타쿠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건 사회가 쇠약해지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건 선인이나 악인을 논하기 이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체험이 부족한 젊은이들로 인해 애니메이션도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희는 뒤를 휙 돌아볼 때 눈의 초점이 먼저 돌아가고 나중에 고개가 돌아가는 표현 방법을 '미래 소년 코난'(1978년)에서 처음 시도했습니다(그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직접 시연해 보였다. 그때 모습은 일흔 넘은 노인이 아닌, 30년 전 TV에서 봤던 '미래 소년 코난'의 주인공들 얼굴 표정 그대로였다. 표정, 눈매, 입 모양, 고개를 돌릴 때의 경쾌한 움직임 등은 '빙의'라 할 만했다). 이렇게 말이에요. 아시겠죠? 우선 눈부터 시선이 '사악' 벗어납니다. 순간적이지만 고개보다 눈이 먼저인 거죠. 그런데 30년도 더 전에 했던 것을 이번 '바람이 분다'에서도 똑같이 하는 직원들이 있었어요. 매너리즘 덩어리인 겁니다. 좀 슬펐습니다(웃음). '내가 30년 전에 가르쳤던 것을 그대로 지금까지 하고 있단 말이야? 적당히 좀 해, 스스로 좀 생각하라고'라는 거죠. 예전 애니메이션에서는 인물의 눈동자가 가끔 깜박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분다'에서는 눈 깜빡임을 일부러 다 지웠습니다. 실사 영화를 보면 실제로 배우들은 눈을 깜빡이지 않아요. 눈을 깜박일 때를 보면, 피곤해서가 아니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사악 뜨면서 연기를 할 때 의도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동안 저희는 그냥 관성적으로 눈 깜박임을 넣어 온 것이었어요. 일본에서 TV 애니메이션이 시작된 지 50년이 지났는데 말입니다. 옛날에 가르쳤던 것을 그냥 스스로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눈 깜박임은 넣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여겨 온 것뿐입니다. 제 아들(미야자키 고로 감독)도 애니메이션 일을 하고 있는데, 저는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네가 정말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면 좀 더 스스로 다른 것을 배워라. 지금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해라. 애니메이션으로부터 그림을 시작하지 마라. 실제의 것을 보고 스케치 데생으로부터 시작해라'라고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조언해 주실 말이 있다면? "기술은 이 세계에 들어오면 금방 마스터할 수 있습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핵을 확실히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영향력과 표현력을 넓히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듬어지지 않아도 좋아요.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이렇게 미숙한 실패를 하다니'라는 말을 들어도 좋아요. 잎을 피우는 필연의 힘을 가진 줄기만 있다면, 그 후 잎을 피우고 꾸미는 것은 서로 지혜를 짜내면 어떻게든 됩니다. 물론 최고의 이야기는 그러면서도 이파리와 그곳을 기어다니는 벌레들까지 생생하게 그리는 것이겠지만요. 지금의 일본 문화는 모든 게 희박하고 만화적이 되어 모두가 얄팍함밖에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일본은 생산하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조금씩 의심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생활 자체가 서브컬처로 완전히 메워져 대단히 흐리멍덩해지고 있죠. 이건 민족을 망하게 하는 근원입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미야자키 감독이 문 앞으로 나와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요즘 애니메이션은 3D 컴퓨터그래픽이 대세이지만, 지브리스튜디오는 여전히 2D를 고수한다. 미야자키 감독의 '바람이 분다' 공개 기자회견 때 한 기자가 "3D를 만들 계획이 없느냐"고 묻자 "없다"고 잘라 말했다. 미야자키 감독이 2D를 고집하는 이유는 단순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철학과도 연결된다. 그는 "요즘 영화들은 과잉"이라고 말했다. "과잉으로 세밀하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TV 영상을 보면, HD 영상이 돼서 화면도 아주 크고, 구석구석까지 다 보이죠. 하지만 그런 것까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제 얼굴보다 더 큰 아나운서의 얼굴 같은 것은 보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TV를 보지 않는 사람이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브리 미술관에서만 상영한 단편 애니메이션 '보물찾기'에는 음성도 아예 넣지 않았습니다. 빼고 빼고, 점점 더 빼다 보니 '대사도 필요 없어'라는 식이 된 거죠. 그랬더니 마음이 아주 후련해졌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좋구나'라고 생각했죠. 영화 '바람이 분다'도 그 연장선입니다. 돌비사운드로 여러 방향에 스피커를 배치해서 이런저런 입체 음향이 나오도록 하는 일을 '바람이 분다'에서는 아예 안 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 20~30명이 꼭 웅성거려야 반드시 좋은 게 아닙니다. 2명으로도 잘할 수 있습니다. 옛날 라디오 드라마를 보면 다 그런 식이지요. 일본이 안고 있는 문화적인 문제는 '너무 많다'는 겁니다. 너무 많은 양은 질 그 자체를 바꿔버립니다. 지금은 책도 잡지도 너무 많이 만들어져 한 권 한 권의 가치가 없어질 뿐 아니라, 제대로 봐둬야 하는 것까지 지나쳐 버리게 만듭니다. 정말 필요한 것이 뭔지 판단하는 게 중요합니다." 3D 애니메이션의 정상에는 미국 영화사 픽사(Pixar)가 있다. 그런데 픽사의 존 래스터 감독은 2009년 칸 영화제에서 "오래전부터 미야자키 감독의 엄청난 팬이었다"며 "'천공의 성 라퓨타'를 비롯해 그의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픽사의 모든 영화는 미야자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2D이지만, 미야자키 영화의 묘사는 매우 생생하다. 그에게 묘사란 무엇일까. "근육을 그린다고 해보죠. 근육이라는 것은 의지입니다. 의지를 근육이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서 있는 때에도 뭔가 근심에 사로잡혀 있거나, 필사적으로 뭔가를 생각할 때는 어딘가 몸이 굳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한 조금의 선의 차이로 인해 인물이 무언가 생각한다든지 걱정한다든지 하는 느낌이 나오게 되는 거죠.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게 아니라 근육의 일부로 그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근육의 움직임이 옷에도 그대로 전해지게 됩니다. 머리카락도 그렇지요. 뭔가 기분이 좋다든지, 기분이 안 좋다든지 할 때 머리카락에도 나타납니다. 저희는 이 순간적인 변화를 포착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세계는 아주 심오한 겁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생각할까, 어떤 기분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리게 되면, 갑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서 '세계의 비밀로 통하는 문'이 열리게 됩니다. 애니메이터들에게 그런 것을 익혀달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하고 있는데요. 생각만큼 잘되지 않네요(웃음). 세상은 아주 깊은 겁니다. 그런 것에 눈을 뜨게 되면 자신이 개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다른 뭔가가 더 없을까 계속 찾게 되겠지요. 많은 것이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세 차례 은퇴 번복했던 이유 미야자키 감독은 지난달 은퇴 기자회견을 가졌지만, 그는 전에 세 번이나 은퇴 선언을 했다가 번복한 전례가 있다. 체력적 한계를 이유로 물러나려 했던 그가 번번이 복귀한 것은 지브리스튜디오에 마땅한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란 것이 정설이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감독님의 뒤를 이을 뛰어난 젊은 인재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애니메이션이 잔뜩 있는 시대에 그걸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어려운 겁니다. 모델이 너무 많은 거죠. 애니메이션이 없었던 시대 쪽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꿈이 강했던 겁니다. 요즘 애니메이션 하는 친구들은 대개 '미래 소년 코난'을 보고 애니메이션을 하게 됐다는 식이에요. '백 투 더 퓨처'인 거죠." ―지브리가 작품화하기도 했고 '책으로 가는 문'에서 감독님이 추천하기도 한 아동서 '마루 밑 아리에티'와도 연결되는 내용인데요. 작품 속의 인간 세상에서 사는 소인(小人)들이 사실 우리일 수 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인간들은 크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엄청난 무력감입니다. 무력감의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정부는 방사능이 지하수로 유출되는 것을 멈추겠다고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어느 시기까지 사람은 자신들이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지만, 현대의 특징은 무력감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들 하지만, 결국 소인인 것입니다."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 사무실 바깥으로 나와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줬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그 모습을 포착하고 카메라 연사 버튼을 쉴 새 없이 눌러대자 '허, 참!'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까지 포즈를 취해 줬다. 아쉬운 순간을 조금이라도 기억에 담고 싶은 마음을 알아줬기 때문이었을까?
세상을 떠난 사람의 빈자리에서 살아나가고 있는, 남겨진 사람들을 그린 만화들.jpg
위국일기 -35세 소설가 주인공이 언니 부부의 장례식에서 고아가 된 언니의 딸을 친척들이 서로 떠넘기는 걸 보고, 발끈하여 충동적으로 자신이 맡겠다고 나서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만화. -2019년 일본 만화 대상 4위, 2020년 일본 만화 대상 10위, 2019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 여성편 4위, 2019년 차세대 만화대상 17위 수상. -6권까지 정발됐음. 오빠의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오빠와 함께 살아오던 주인공. 그런데 반 년 전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오빠마저 과로사로 잃게 되었고, 그 후 오빠의 아내와 단둘이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만화. -3편 완결 단편이었는데 반응 좋았고 독자들에게 호평 많이 받아서 장기 연재하게 된 케이스. -6권까지 정발됐음. 장송의 프리렌 -용사 일행이 마왕을 무찌르고 50년 뒤, 용사는 수명이 다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용사 일행의 마법사였던 엘프 주인공이 용사 일행과 함께 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여행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만화. -2021년 일본 만화대상 1위, 이 만화가 대단하다! 2021년 남성편 2위 수상. -3권까지 정발됐음. 봄의 저주 -주인공의 전부였던 동생이 죽고, 동생의 추억을 더듬기 위해 동생의 약혼자였던 사람과 동생과 둘이서 갔던 장소에 나를 데리고 가달라는 조건을 붙여 교제를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만화. -이 만화가 대단하다! 2017년 여성편 2위 수상. -2권 완결 단편. 정발됐음. 마이 브로큰 마리코 -업무상 외근 중 소중한 친구가 수면제를 먹고 3층 베란다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주인공. 지금이라도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 자문하다가 친구의 유골을 떠올리고, 친구에게 가정폭력, 학대, 성폭력을 일삼았던 친구 아버지의 집에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만화. -2021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 여성편 4위, TV bros. 만화상 ‘브로스 코믹 어워드 2020년’ 대상,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신인상 수상. -1권 완결 단편. 정발됐음. 다 봤는데 정말 좋은 작품들임... 강추함 만약 이런 소재의 만화가 또 있는데 이 글에는 없다면 댓글로 추천 부탁! 출처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2.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삼국지를 보다 쉽고 재미지게 접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팁들을 준비해 봤다. 삼국지를 아직 읽지 않았다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고 이미 읽어본 분들 역시 한결 넓게 바라볼 수 있게끔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2 Start!! 1. 무기. 삼국지연의 속 장수들은 저마다의 무기들을 쓰고 이 무기들은 곧 그 유져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분신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정말 다양한 무기들이 등장한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의 장팔사모, 손견의 고정도, 전위의 쌍철극, 여포의 방천화극, 정보의 철등사모, 기령의 삼첨도, 서황의 개산대부, 황개의 철편, 유비의 자웅일대검 등등.. 열거하기 귀찮을만큼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숱한 무기들 중의 대다수는 당시에 실존하지 않았던 것들. 대표적인게 관우의 트레이드 마크인 "청룡언월도". 먼저, '도(刀)'는 한쪽만 날이 있는 칼, '검(劍)'은 양쪽 모두 날이 있는 칼을 뜻한다. '청룡도'는 너비가 넓은 도를 일컫는 말이며, '언월도'는 '월도'라고도 했는데 이는 긴 자루가 달린 도를 일컫는다. 고로, '청룡도 + 언월도 = 청룡언월도'라 함은 긴 자루 달린 청룡도를 말한다. 너비가 넓다보니 일정 수준 이상 부피가 있던 무기인 청룡언월도는 대체로 일반 도검들에 비해 중량이 좀 나가는 무기였고, 찌르기보다 베기용이긴 했다만.. 날카로움으로 벤다기 보다는 무게로 내리찍는 용도의 무기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제철수준으로 큰 월도를 날카롭게 제련하는 기술력의 한계가 있었고, 설령 내가 쓰는 질레트 마하3 면도기날처럼 어찌어찌 날카롭게 만들었다 한들... 몇 번만 쓰면 금새 날이 무뎌지기 마련. 게다가 날카로우려면 단면이 얇아야 하고 또 얇게 만들다보면 그만큼 가벼워지니 살상력이 떨어진다. 쉽게 말해, 청룡언월도에 맞으면 영화나 만화처럼 '뎅겅~'하고 썰리는게 아니라, 짓뭉개지며 박살이 나는건데, 심지어 연의에서의 묘사에 의하면 관우가 썼다는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무려 "82근"! 혹자는 한대의 한 근은 지금의 한 근보다 가벼워, 당시의 여든 두 근은 대략 18kg쯤이라고 하는데, 나관중이 명나라 사람이라 명대의 도량형으로 설명 했기에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48kg이 맞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무기 + 그 무기 휘두를 덩치 + 갑옷 + 안장 + 마갑 = 어림잡아도 230kg을 넘어가는데 그럼 말은 도대체 무슨 죄인가? 더구나 아무리 장사여도 저 중량의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마상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데, 그 시대에는 말 타며 균형 잡고자 발을 거는 등자가 몹시 어설퍼, 제 기능 발현이 어렵던 시기였다. 일단 송나라 때에나 등장한 청룡언월도를 관우가 썼을 리 없고 정사기록에 "관우가 안량을 찌른 후 목을 베었다"라는 구절을 볼 때, 관우는 '삭'으로 불리는, 당시 기병의 보편적 주무장인 찌르기용 창을 썼다고 본다. 그리고 '여든 두 근'이란 표현도 실제 측량무게가 아닌 관우의 파워의 대단함을 묘사키 위한 나관중의 중국인 종특인 과장의 산물이다. 소설과 인물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부여된 일종의 아이템같은 개념이였던 것이다. 장비의 "장팔사모" 역시, 지금 추산 시 5m가량의 기나긴 창으로 묘사되지만 한대에는 그런 긴 창은 쓰지도 않았거니와 동서양 역사에서의 그런 길고 긴 창은 보병의 대기병전용 무장이였지, 말 위에서 휘두르기는 너무 불편한 무기였다. 당시의 백병전은 인정사정 없었고 사소한 실수, 작은 삑사리 하나로 장애인이 되거나 바로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리스크가 될 수 있기에... 여든 두 근 청룡도니, 한 장 여덟 척 장팔사모니 하는 후까시용 무기보다는 그저 실용적이고 쓰기 편한 무기가 답이였다. 여포의 방천화극 또한 그 "방천화극" 자체가 역시 청룡언월도와 마찬가지로 송나라 중엽에서야 등장하는 무기였기에 픽션이며 그냥 찌르기용 '극'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지 등장 장수의 거의 8할이 "찌르기용 창"을 실제로 썼는데, 이는 '베기'보다 '찌르기'가 더욱 적은 에너지와 운동각으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기에 체력소모와 한 번 움직임에서 다음 움직임 까지의 인터벌을 최소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베는 창을 쓸 경우, 창을 더욱 높이, 크게 휘둘러야 상대에게 치명상 입힐 수 있는 반면... 빗나갈 경우 오히려 상대에게 역관광을 당하기 제격이다. 그렇다고 적은 각도로 움직이면 운동에너지나 원심력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상대에게 그만큼 데미지를 많이 주지 못 한다. 놀랍게도 "쌍철극"의 경우, 정사에 전위가 80근의 쌍철극을 휘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그 당시의 사료이므로 한대의 도량형에 따라 지금 기준 약 16~18kg가량의 무기가 맞다. 2. 일기토. 일본어의 "잇키우치(いっきうち, 一騎討ち)"에서 한자어인 '一騎討'만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기마무사간의 1vs1 대결을 의미한다. 사실 한, 중에서는 거의 안쓰는 한자어인데, 국내에서는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탓에 1대1 결투의 일반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정말 숱하게 등장하는게 바로 저 일기토이지만... 놀랍게도 실제 역사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일기토 기록은 열 손 이내 밖에 없다. 192년 "여포 VS 곽사" (장안) 놀랍게도 곽사가 먼저 결투 신청. 그럼 그렇지, 여포의 창에 맞고 죽기 직전에 부하들이 곽사 구출. 196년 "손책 VS 태사자" (곡아) 말 타고 싸우던 중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나쁜새끼), 태사자의 창을 빼앗자, 태사자는 낙마하며 손책쪽으로 넘어지며 손책의 투구를 슈킹. 196년 "학맹 VS 조성" (하비) 여포에게 반기를 든 학맹과 조성이 싸우던 중 고순이 나타나 학맹을 죽임.(읭?) 196년 "마초 VS 염행" (서량) 그 천하의 마초가 염행의 창에 찔려 죽을 위기 맞음. 단, 당시의 마초는 만 19세로 아직은 경험미숙.. 200년 "관우 VS 안량" (백마) 추후 관우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음. 202년 "방덕 VS 곽원" (평양) 방덕이 당시 난전 중에 적병을 그냥 막 죽이던 와중에 곽원도 섞여 죽음.(이건 좀...;;) 208년 "여몽 VS 진취" (강하) 유표군과 싸울 당시 선봉이던 여몽이 적 수비대장 진취와 맞서 싸움. 2011년 "김형수 팀장 VS 이민형 과장" (백림호프) 만취한 이과장이 김팀장에게 반말로 도발하자 이에 격한 김팀장이 숟가락 볼록면으로 이과장의 정수리를 갈겨 단 일 합에 이과장을 처단. 사실, 일기토 자체가 성사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는게, 저건 보는 사람이나 재미있지... 당사자들로서는 자신 뒤의 수 많은 군세의 기세를 책임진 상태에서 사소한 실수 하나로 자기 목숨은 물론, 전술적 승패를 갈음 짓는 1대 1 대결은 실로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기고 있거나 우세한 군세의 우두머리가 이겨도 본전에 지면 그야말로 대참극의 아비규환을 불러올지 모를 그딴 제안에 응할 리가 없다. 그럼 상대가 응하지 않는데 홀로 싸울 수도 없다. 그리고 어지간한 급의 장수들은 영화나 만화처럼 행군 중이나 군사들간 대치 상황에서 가장 맨 앞에 나와 보란듯이 있지 않았다. 그럴 경우, 상대방의 활에 의한 저격에 피격될 위험성이 높기 때문. 물론, 장수의 화려한 차림새나 그 주위의 대장기를 든 호위대 등으로 분명 눈에는 띄었을 것이나, 가장 선두에 다 보란듯이 나와 있진 않았다고 한다. 솔직히 이게 뭐라고 쓰는데 두 시간 걸린다는.... 쓰고 나면 지치지만 여러분들이 주시는 관심 가득한 피드백들이 그런 피로를 잊게 해줍니다ㅎ 연재가 더디긴 해도 심도깊은 내용으로 차차 다룰 소재들이 매우 많으니 인내를 갖고 기다려 주시길 양해 바라며 타인을 비방하거나 불쾌히 만들 댓글은 자제 부탁 드려요. 궁금하신 점 등은 댓글로 문의 주시면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답변 드리고 있습니다! 주관적 견해를 바탕으로 한 논쟁은 도돌이표인 경우가 많고 감정만 상하기 부지기수라 응하지 않습니다. 역사와 삼국지라는 다소 고루하며 남성적인 소제를 다룸에도 예상외로 적잖은 분들의 관심과 기대에 늘 고마움 갖고 정성껏 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장합 준애 (張郃 儁乂) A.D.?~231
누차 말했듯... 픽션(허구)이 가미된 "소설"인 삼국지연의는 여러 인물들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반면 그네들의 영웅화 ~ 신격화를 위해 숱한 이들을 엿 먹이기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도 역사범죄자 나관중에 의해 너프 당한 또 한 명의 피해자, "장합"에 대해 다뤄 보기로..! 장합은 삼국지정사, 위의 역사록인 위지, 후한의 역사록인 후한서, 본인의 열전인 위서의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에도 생년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사망 당시의 연령을 알 수는 없지만 원소에게서 조조 휘하로 들어갈 당시 대략... 40대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저 '장악우장서전'은 조조가 자신이 공을 이루는데 그 기여가 으뜸이라며 추켜세운 다섯 장수인,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을 묶어 편찬된 열전이다. 저 다섯을 일컬어 당시에 "오자양장(五子良将)"이라 불렀고, 촉한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과 살짝 비슷한 뉘앙스인데, 오호대장군이란 별칭은 그 때는 없었고 후대 사람들이 붙인데 비해 저 오자양장은 당시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오호대장군같은 저 시절의 '드림팀' 또는 '어벤져스' 느낌의 패키징은 위의 다섯 장수가 원조다. 고향은 당시로는 기주의 하간군 막현(오늘날 중국 허베이성 중남부 인근)이라는 그때 치고도 꽤나 궁한 시골 작은 마을 출신이였다. 참고로 진짜 중국이 겁나 드넓긴 드넓은게... 삼국지 게임 내의 맵에서 기주는 작은 주로 나오나, 조운의 고향인 기주 상산군과 장합의 고향인 기주 하간군의 거리는 무려 166km고, 이 거리는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보다 멀다..ㅎㄷㄷ 만화, 게임, 책, 기타 여러 미디어물들을 봐도 다른 네임드급 인물들과는 달리, 외형 이미지가 일관적이지 못한 편인데... 이는 사료 어디에도 장합의 외모 묘사가 일언반구도 없고 그를 그린 그림조차 몇 없는데다, 그것들 마저 묘사가 모두 중구난방이다보니 도무지 이미지 통일이 안된 것. 다만, 장합의 리즈시절이 펼쳐지는 것이 조조에게 투항 이후인데 그 당시의 추정 연령이 위의 언급처럼 40대로 보고, 조조세력 합류 후부터도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활약하다 전장에서 전사한만큼, 사실상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젊은'느낌의 장수로 표현하는 것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장합은 조조 휘하 장수들 중 가장 많은 전장에 참전했고, 위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전공이 많은 장수였으며, 주/부장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여러 숱한 전투에서 닳고 닳은 백전노장이였다. 그러다보니 큰 전장의 주요한 임무는 물론, 작은 전장의 자잘한 임무까지 가림없이 두루 맡았고 야구로 치면 4~5선발과 롱릴리프, 경우에 따라 급하면 불펜으로까지 던지면서 하루 걸러 등판하며 혹사 당하는 노예투수 비슷한 포지션의 장수였다. 그 깐깐한 조조가, 또 당시 휘하에 숱한 명장, 용장, 맹장들이 수두룩 빽빽 채이고 밟히고 널렸던 위에서 저토록이나 빈번히 굴렸다는건 그만큼 능력 있기에 믿고 쓸만큼 훌륭한 장수였다는 증거다. 심지어 백발노인 되어 집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탑골공원가서 장기두며 야쿠르트나 얻어 마실 나이에 전장에서 한창 싸우다 전사하니... 죽어 눈감는 그 순간까지 위의 군밀레에 갈려나간 군돌이였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각종 미디어물들을 보면 장합은 그냥 본인의 무예와 전장에서 구르며 익힌 짬밥으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장수로 그려지나... 위에서 언급하듯, 저렇게 숱한 전장을 누볐고 또 깐깐깐돌 조조에게 신임받으며 주장으로도 쓰인만큼 사실 전략적 대국안도 상당히 뛰어난 "지략을 갖춘" 장수였다. 본래 기주의 군소 군주인 한복 휘하에 있다가 한복이 패망하자 원소의 세력에 속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장의 시국을 살핀 후 원소나 원소의 책사들에게 여러 전략들을 입안 했으나 거의 다 씹혔다.... 원소는 사람 자체가 선입견, 편견 이런 게 가득한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데다 또 고집은 있는 전형적 꼰대인 우리 회사 김대현 이사님같은 스타일이라 그저 야전에서 뒹구는 장수인 장합의 계책을 귀 담아 들어주질 않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는 전형적 예였던 당시 원소의 책사들 역시, 지들끼리도 서로 내가 옳네, 내가 맞네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장합까지 거기 껴서 자기 의견을 제출하니 고스란히 즈려밟아 무시했다. 이렇듯, 자기 아이디어와 의견이 매번 밟히던 끝에, 원소 VS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도 자기가 낸 계책이 원소의 책사 중 한 명인 곽도에게 씹혔고... 그 전투에서 결국 패하며 장합이 옳았음이 드러나자 곽도가 원소에게 장합을 모함하였으며, 이에 겁 먹은 장합은 결국 원소군 내에서 베프면서 역시 원소의 아쉬운 대우에 불만가득하던 '고람'과 함께 원소군의 망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한다. 역사기록에는 이 "방화 후 이적"이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패배 전인지, 후인지가 안나와 있으나 어쨌건 장합과 고람이 불 싸지른 망루는 당시로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레이더'역할을 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였기에 이를 없앤 것 자체는 어쨌건 원소군에게 치명적이긴 했다. 삼국 정립 이후에는 주로 대촉전선에 투입되었고 이유는 조조가 양쯔강을 끼고 있던데다 북진의사가 거의 없는 손권에 비해, 명목상 "한실부흥" 내세워 줄기차게 자신들에 덤벼 오는 유비세력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여겼기 때문. 그때 손권과 대립하는 동부전선은 장료와 악진으로 묶어 두고 가용 가능한 네임드 장수들은 대부분 대촉전선에 투입되던 시기였다. 장합은 유비도, 유비 사후의 제갈량도 상당히 껄끄러워 하던 장수였다. 대촉전선의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하후연과 조홍보다 장합의 위치는 아래였으나 이는 위에서의 커리어, 또 하후, 조 두 장수는 조조와의 친인척 관계인지라 그럴 뿐... 장수로서의 자질은 저 둘을 뛰어넘던 장합이였으며 그래서인지 조홍과 하후연은 장합을 꽤나 견제했다. 아무리 자신들의 커리어가 앞서고 조조와 혈족이긴 하다지만 철저히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던 조조는 언제던 장합이 더 유능하다 드러나면 속절없이 자기들보다 장합이 더 상전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이를 막아낸 위방어군의 총사령관은 연의와 달리 사마의가 아닌 장합이였고, 4차 북벌 때, 목문도에서 유인책 쓰며 거짓 후퇴하는 촉군을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쫓자며 바득바득 우기고 쫓아가다 기어이 전사하는 연의와 역시 또 달리... 당시 제갈량의 흉계가 의심된다며 추격을 만류하던건 오히려 장합이요, 이에 대해 군령까지 내세워 제갈량을 추격할 것을 밀어붙여 장합을 사지로 내몬게 사마의였다. 이에 대해서도 또 제기되는 설이.... 당시 장합과 사마의는 위의 대촉전선에서 은연중에 경쟁관계였었다. 쟁쟁한 커리어의 백전노장 장합, 그리고 위 군부 신진세력의 주축이던 사마의는 서로 견제하던 관계였으며 당시 직급상 사마의가 높았지만 그렇다해도 사마의에게 장합은 결코 직위로 쉽게 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고.... 그런 장합을 이이제이 방식으로 간접 제거 하고자 제갈량의 계책을 눈치채고도 등 떠밀었다는 설이다. 연의에서의 묘사처럼 빗발치는 화살에 벌집이 되어 바로 죽기보다 화살을 여기저기 맞고 후퇴하던 중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다. 기록에는 허벅지에 맞은 화살로 인한 과다출혈이 결정적 사인이라 나와 있다. 참고로 허벅지는 대동맥을 비롯 여러 혈관 뭉치들이 지나는 곳이라 흉기에 잘못 찔리면 지혈도 힘들만큼 과다출혈이 발생하여, 옛날 야쿠자나 조폭들도 서로 칼부림 당시 오히려 방어하기 좋아 찌르기 여의치 않은 복부나 흉부보다 허벅지를 많이 노렸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했는지, 직접 먹이를 주며 키우던 개가 있었다는 설이 있고 자신이 타던 말이 힘들까봐 행군하는 경우에는 중간중간 말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사료기록은 아니다.) 원소 휘하에서는 고람과만 거의 이야기를 나눴으나 조조에게 투항 후 각기 다른 부대에 배치되며 연이 끊어진 듯... 여러 장수들과 열전이 묶음으로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상과 일상에 대한 기록이 그닥 없다. 쉽게 말해 위의 장수로서의 공적인 기록은 좀 있지만 인간 장합으로서의 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 장합이 커리어나 능력에 비해 그닥 인기 많은 인물은 아니다보니 왠지 이번편은 반응이 별로일거 같은 좀 불길한 예감이... T-T 그래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 드린다는 ;;;
제갈량 공명 (諸葛亮 孔明) AD.181~234
"삼국지"가 큰 영향력 갖는 동아시아 3개국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 꼽으라면 중국은 관우, 일본은 조운, 한국은 바로 "제갈량"이다. (예로부터 문을 숭상한 전통기조 탓인지...) 이 칼럼의 첫 포문도 그래서 제갈량으로 준비했다.. 여러분이 읽었던 삼국지에는 잘 나오지 않은 소제들 위주로 갈테니 다들 Focus! 고향은 서주 낭야현.(지금의 장쑤성 쉬저우) 조조가 부친 잃은 빡침으로 서주 제노사이드 자행 시 부친 제갈규가 형주로 거처 옮길 때 함께 이주. 부친 사후 숙부 제갈현 슬하에서 자란다. 3남2녀 중 넷째였고 당시 기준으로 신장이 무려 189cm가량으로 전란과 기근 탓에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0cm중후반이던 3세기 중국 기준 가히 거인이나 진배없던 장신에 용모도 잘 생겼단 기록이 남아있고 마른 체형이였다고 한다. 당시의 선비들의 주류 학업스타일은 토시 하나까지 달달달 외우던 방식이였는데, 제갈량은 그런 암기 위주가 아닌 요약정리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후한 마지막 천자인 헌제와 동갑인데다 사망한 해도 같았다. 그 유명한 유비와의 "삼고초려"는 나관중의 각색이 들어가긴 했으나, 실제로 사료에도 유비가 세 번 찾아간 끝에 제갈량을 만났다고 남아있다. 연의에서처럼 제갈량이 유비를 피한건 아니였고 정말 서로 타이밍이 안맞았으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이다보니 당시로서는 어찌보면 다짜고짜 찾아가서 마침 딱 만나는것도 쉽진 않았기에 그랬던듯 싶다. 그는 딱히 유비를 따를 마음은 없었으나, 임관하여 모실 마땅한 군주가 없던데다 당시 절친이던 서서의 권유도 있고 해서 유비를 모신다.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컷트되던 유망주가 입사제의 하는 중소기업 들어간 꼴. 연의내용과 달리 모친이 인질 잡혀 서서가 조조에게 가기 전까지 한 동안 제갈량과 서서는 유비 휘하에 있었고 방통과도 인척 관계였는데, 제갈량의 누나 중 한 명이 방통의 숙부의 아내.. 즉 숙모였다. 유비에게 임관 후부터 관우, 장비 형제의 그에 대한 텃새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였다. 장비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재사를 공경하는 편이라 제갈량이 일정 수준 능력을 보인 후로는 그닥 태클이 없었으나, 유비 다음은 자신이라 자부하던 관우의 견제와 경계는 제갈량으로서도 관우 사망시까지 참 벅찬 일이였다. 상명하복이 투철한 전형적인 군인이라 제갈량의 지시도 잘 이행하여 케미가 잘 맞은 덕에 제갈량이 가장 의지하던 무관은 "조운"이였다. "마량"과도 코드가 맞았는지, 사석에서는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촉빠에 제갈량빠던 나관중에 의해 가장 주인공버프 크게 받은 인물 중 하나인 제갈량이였기에 소설 속 모습은 거의 닥터 스트레인지에 가깝게 묘사되나 그도 사람인지라 완벽의 면모만 있던건 아니고...ㅋ 분명 단점도 있었고 매사에 뛰어난건 아니였다. 우리에게 그는 탁월한 전략가의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로 전장에서의 전략과 전술, 병법에 능했던건 맞으나 당시 그 분야의 최강자는 사실 아니였다. 당대의 평가 등과 커리어들을 볼 때, 그는 전략가보다는 오히려 정치가로서의 실적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업적도 그쪽이 훨씬 많았다. 전체적 판세를 파악하는 전략적 면모는 오히려 주유, 조조가 앞섰고.. 전투에서의 전술적 재량은 방통, 법정에 뒤졌으며.. 후방보급에서는 순욱도 결코 제갈량 못지 않았고 심리전에 있어서는 가후나 정욱이 더 나았고 방어전술은 사마의가 우위였다는 평가가 지배적. 특히 중국에서의 책략,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따질 때 큰 척도로 삼는 것은 기책.. 쉽게 말해 창의적이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임기응변 더 쉽게 풀어 전술적 "에드립"여부였는데, 제갈량은 앞서 말한 책사들에 비해 이 부분이 특히 좀 빠지는 편이였다. (중국 역사상 이 분야의 갑은 바로 "한신") 역사기록에서나, 소설에서나 제갈량 전술의 주요패턴은 지형 및 기후 등의 사전정보 철저 숙지를 베이스로 한 정석 응용이였던 범생 스타일. 그의 임기응변 부족론에는 반론도 있었는데, 사실 유비를 처음 섬기는 순간부터 오장원에서 숨 거둘 때까지 그는 남만정벌같은 일부를 제하면 대부분 조조~위를 상대하며 늘 열악한 자원과 인력으로 압도적인 적을 맞이했고.... 그가 이끄는 것은 유비세력 & 촉의 거의 전부였기에,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시의 리스크가 큰 기책을 선뜻 쓰기는 무리였다는 반론이 그것. 정치적인 치적은 소설에는 잘 안나오는데, 그는 촉의 경제발전 및 과학기술 개발과 심지어 사법제도 개편 및 군의 현대화 등 여러 분야의 내정에서 눈부신 업적들을 이뤄냈다. 당시 서천지방의 대표적 특산물은 "비단"이였는데 이 비단의 생산량과 퀄리티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량을 시도했고, 이 비단사업의 대성공 덕에 촉한의 비단재벌들은 중원의 어지간한 부호들 싸닥션을 날릴 수준의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농지개간과 경작법도 많이 손봤고 천연가스 시추에 성공했으며, 내륙이라 소금이 금값이던 그때에 암염이라는 바위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도 개발, 놀라운 건 당시로는 의심만 받아도 목이 날아가고 삼족 멸하는건 우습던 위나 오와 달리 전문 수사관 시스템을 도입하여 증거와 증인심문 등 통한 체계적 수사시스템을 구축했던 것도 제갈량이였다. "인간" 제갈량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였고, 상당히 도덕적이였으며 청렴했음은 물론, 매사에 꼼꼼을 넘어 깐깐한 완벽주의자로 자신이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심 못 하는 스타일로서... 지금으로치면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비서실장, 외교부장관, 행정부장관, 산업경제부장관, 감사원장, 국정원장, 경찰청장, 대법원장, 검찰총장을 합친 것보다 많고 다양한 업무들을 일일히 서류 뒤적이며 직접 처리했다. 이런 사람이 부하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직위가 황제 바로 아래인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이였기에 이런 사람이 상관이면 아랫것들 여럿 죽어나가는거 일도 아니였다... 제갈량 본인도 끝내 과로사했지만, 위, 촉, 오 통틀어 촉의 고위관료 과로사 비율이 가장 높은건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참고로 그는 유비 사후 그냥 승상이 아닌, 황태자와 동급에 왕보다 높은 "상국"의 지위였으며, 그의 사후 승상직 자체가 영구 결석 처리되어... 촉한 역사상 유일한 승상이였다. 어벙띠리하기 그지 없던 유선도, 부친 유비의 유조도 있었고 제갈량의 영향력과 충심이 워낙에 굉장했던터라 제갈량을 부친처럼 대했고 꼬박꼬박 경어를 썼으며 제갈량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 및 토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입헌군주제 수준이였으며, 오너는 따로 있으나 전반적 경영은 제갈량이 일임하는 전문 경연인체제의 C.E.O.나 다름 없었다. 지금까지만 보면 퍼펙트같은 제갈량의 단점은 사람 보는 "안목"이 그닥이였다는거다... 촉에서 사람 잘 보는 분야의 최고수는 "유비"였는데, 이에 반해 제갈량은 그 뛰어난 여러 분야에도 불구.. 사람 보는 안목은 별로였다. 그가 발탁한 이들의 대표적인 케이스를 보자면.. 장완 - 결과적으로 훌륭했으나 대체로 직무태만인 스타일로서 제갈량이 뒤봐주지 않았다면 유비에게 밉보인 그로서는 진즉 Fired... 마속 - "읍참마속"이란 고사를 만들어 낸 대표적인 실패작으로서 전투경험 전무에 글로 전투 배우고 나대다 끝내.....-_-;; 이엄 - 제갈량이 평하길, "육손에 견줄만 하다!"라고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육손 근처도 못 감. 양의 - 업무능력에 대해 제갈량이 치켜세웠으나 인성 쓰레기에, 제갈량 사후 위연과의 불화로 위연의 사망을 초래. 위연 - 제갈량이 발탁하진 않았으나, 유비는 잘만 활용한 최고의 맹장이건만 제갈량은 내내 겐세이만 줬고 결국 위연과 양의의 불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를 줌. 강유 - 능력과 인성은 좋았으나, 근자감에 휩싸여 끝없는 북벌시도로 촉한을 멸망으로 가는 특급열차에 태운 일등공신. 마량 & 비위 - 능력 자체는 대단들 했으나 단명. 오에서 마지막에 대장군 직위까지 오른 친형, "제갈근"과는 서로 모시는 주인이 달랐고 둘 다 각자의 소속집단의 중역이였기에 볼 일이 거의 없어 주로 편지를 주고 받았고 막상 만나도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마흔 후반대에 들어 유일무이한 자식(제갈첨)을 하나 얻었고 꽤나 예뻐했는지, 제갈근에게 어린 첨의 자랑으로 가득 채운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다. 위, 촉, 오는 모두 이민족(그들 기준 오랑캐) 문제가 난제였는데 무력으로 굴복 시키거나 축출 일변도였던 위나 오에 비해 제갈량의 남만정벌은 비록 무력으로 제압은 했으나 이후 먼저 교섭 시도 후, 이민족들로 하여금 지금으로보면 "자치구"개념의 자율통치권을 인정하여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대이민족 대응법을 보여줬다.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맵고 짠 음식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편식이 좀 있었던거 같다. 그리고 식사도 정해진 때에, 정해진 장소에서 먹기 보다 대강대강 챙겨서 이런저런 일들을 보며 아무곳에서나 먹었다고 한다.(가정교육이...ㅋ) 이건 정확한 건 아니지만, 무릎이나 고관절 쪽이 좋지 않아서 장년 이후 휠체어 비슷한 작은 의자형 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있다. 적벽대전 앞두고 오에 가서 그곳의 재사들의 다구리를 말발로 역관광 시킨 이야기는 허구다. 짚단을 실은 배를 타고 노숙과 함께 조조군 진영으로 가서 화살 10만 개를 슈킹해온 일화도 허구다. 과로사는 분명해 보이지만, 정확한 사인으로는 "폐결핵"설과 "위암"설이 팽팽하다. 워낙 불규칙한 식습관과 수면부족 및 극도의 스트레스, 과로 등 암 발병에는 최적이긴 했다. 첫 칼럼인데, 두서도 없거니와 일단 너무 양 많고 내가 봐도 지루하다.... 그래도 뭐 읽을 사람들은 읽겠지 T-T 피드백 괜찮으면 앞으로도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중적이지 않은 스토리 위주로 갈 예정. 삼국지 관련 궁금증에 대한 질문이나 다뤄줬으면 하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신청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