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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바꾼 세 번의 제안.jpg


독일의 한 남작가에서 태어난 소년
베르너 폰 브라운
폰 브라운은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작곡가를 꿈꾸는 소년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망원경을 주었고

그 후로 이 소년은 천문학에 빠져들게 되지





소년은 공상 과학 소설들을 읽으면서
우주 탐험에 매료됐어
우주에 완전 매료 된 소년은
여태껏 해오던 음악을 때려 치우고
우주를 개척하는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돼ㅋㅋㅋㅋ






그 후로 폰 브라운은 수학과 과학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어

근데 참 이게 하고 싶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닌데
놀랍게도 소년의 수학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 했어

결근한 선생님을 대신해
수학 수업을 진행한 적도 있을 정도라나 뭐라나ㅋㅋㅋㅋㅋㅋㅋ







소년은 학교 공부시간 외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잊고
달나라 여행을 꿈꿨어

완전 우주 처돌이가 된 소년 폰 브라운은
급기야 17살에는 “우주여행협회”라는 모임에
가입까지 해가며 우주여행의 꿈을 더더욱 키워나갔지







그렇게 작곡가를 꿈꾸던 음악 소년은
1930년 베를린의 로덴부르크 공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완전히 로켓 연구에 모든 열정을 쏟았어








그러던 1932년 어는 날

폰 브라운이 가입한 우주여행협회는
군 관계자들을 한데 모아 놓고
액체연료 로켓 발사 실험을 진행했어



우주여행협회&군 간부들 : (기대)
하나


쏘세요!!







실험의 결과는 모두의 바람과는 달리
아주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어
하지만




당시 독일군의 로켓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던
발터 도른베르거 대위는
폰 브라운을 매우 눈여겨 봤어


아직은 초보 단계이지만 성공만 한다면
로켓이 아주 유망하게 쓰일 수 있다는 걸 알았던 도른베르거 대위는
폰 브라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

“대학원 과정을 지원 해줄테니 육군에 들어와서 로켓 개발 연구를 계속 해 보는 게 어떻겠나?”






도른베르거 대위의 말은
폰 브라운의 인생은 물론
앞으로의 인류의 역사를 바꾸게 될
첫 번째 제안이었어


폰 브라운의 대답은 당연히 예스였지







그렇게 폰 브라운은 1932년부터
본격적으로 로켓 연구에 들어갔어


그 후 같은 해 로덴부르크 공과대학을
무려 2년 만에 졸업하고,
곧바로 베를린 대학에 진학 했어

거기다 물리학을 전공한지 2년만인
1934년에 박사학위를 받음ㅋㅋㅋㅋㅋ




첫 대학에 진학한 후 4년 만에
박사학위까지 따냄ㄷㄷㄷ



그리고 같은 해 몇 번의 실패 끝에
결국 A-2 로켓을 만드는 데에도 성공 함





당시 브라운의 나이
고작 22세...!
도른베르거 대위의 원픽은 초대박이었음
ㅋㅋㅋㅋㅋㅋ







A-2 로켓이 성공하자 독일 정부에서는
로켓 개발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어



독일은 1936~1937년
발트 해안에 있는 페네뮌데에
아예 로켓 연구소를 설립해벌임

그리고 폰 브라운이 연구소 팀장이 되어
로켓 개발을 주도했지


존나 20대에 연구소 팀장이라니;;;;







폰 브라운이 한창 로켓에 미쳐서 일 하던 어느날
폰 브라운에게
두 번째 제안이 들어왔어










아니
그건 사실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어












1937년
독일은 폰 브라운에게 나치에 입당하라는
명령을 내렸어
폰 브라운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폰 브라운은 나치당에 가입했어
게다가 나치의 친위대인 SS에도 가입했지
<맨 앞 왼쪽=발터 도른베르거 장군, 빨간 동그라미=베르너 폰 브라운, 1941년 3월, 페네뮌데 연구소>






!
폰 브라운은 나치 당원이 되어서도
로켓 연구를 계속 했어





몇 번의 실패 끝

세계2차대전을 1년 앞 둔 1938년

폰 브라은 A-5 로켓 발사에 성공 했어





그 후 폰 브라운은 A-5 로켓의 결과를 토대로
이 전에 발사에 실패했던 A-4 로켓을
다시 설계하기 시작했지







A-4는 세 번의 실패 후 1942년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 무르익어 감과 동시에

발사에 성공했어
A-4 로켓의 성공은
독일에게 있어서 아주 큰 의미였어

초기 단계였던 로켓 개발 연구가
이젠 만드는 족족 발사에 성공할 정도로
기술력이 향상 된 건 물론이고,


지금까지 개발 된 로켓과 달리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거의 최초의 로켓이었거든

현대 로켓의 시조격인 셈이지








하지만 A-4 로켓이
바로 생산된 건 아니야

독일 군부의 내부 갈등 때문에
A-4 로켓에 대한 상부 보고가 미뤄졌거든




그래서 A-4 로켓 발사가 성공한지 1년이 지난 후에야
도른베르거 대위와 폰 브라운은
상부에 A-4 로켓에 대해 보고했어








도른베르거 대위와 폰 브라운이 보고 한 사람은
바로 히틀러였어
아까 A-4 로켓이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최초의 로켓이라고 했지?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A-4 로켓을 곧장
‘보복의 무기’로 사용하기로 했어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A-4 로켓은
독일에서 멀리 떨어진 대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하는데

너무나 안성맞춤인 무기였던거야






독일은 바로 이걸 노리고
로켓 연구를 시작 한 거였어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전국인 독일은 현재 일본처럼
군사력에 제한을 받고 있었어

독일군의 병력은 물론 비행기, 함정,
대포의 수까지 제한하는
베르사유 조약 체결(1919) 때문이었지
하지만
제한 대상에 "로켓"은 포함되지 않았어
다른 나라들이 독일을 제한 할 수 없는 부분을 찾아 낸 거야



독일은 이 맹점을 이용해 1930년부터
로켓 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그 연구를 이끌 사람으로 폰 브라운을 영입한 것,,!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A-4 로켓을 보복의 무기로 쓰겠다는
히틀러의 결정으로
이 때부터 A-4 로켓은 V-2 로켓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로켓의 이름에 들어간 알파벳 A는
독일어 ‘Aggregat(복합기계)’에서 따 온 거고
V는 독일어 ‘Vergeltung(보복)’에서 따 온 거야



성능이 입증되자마자
이름부터 복수로 바꾸다니;;

독일이 처음부터 로켓을 무기로 이용하려고
개발 했다는 걸
아주 잘 알 수 있는 대목임
도칸새끼덜;










보복의 무기로 V-2 로켓이 제일 처음,
그리고 제일 많이 향한 곳은
영국 런던이었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4,320발의 V-2 로켓이 발사됐는데,

특히 런던은 약 1,200발의 폭격을 받아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대
<V-2의 공격을 받고 파괴된 영국 런던 도심의 빌딩>







하지만 여기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V-2 로켓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자랑하는 만큼
V-2 로켓 1대가 생산 되기까지의 과정도
어마어마했다는 점이야




V-2 로켓 한 발 쏘는 데 드는 비용
=전차 수천대 생산비용



V-2 로켓 1개 생산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넘사벽>>>>>>>>>>>>>>>>>>>>>>>>>>>>>>미국이 각종 무기를 무한대로 찍어내는데 걸리는 시간

미국ver._쇼_미_더_머니.jpg




단시간에 동일 사양의 무기를
존나 미친 듯이 찍어내던 미국에 비하면
V-2 로켓은 가성비가 매우 안 좋았다고 볼 수 있지





근데 V-2 로켓 생산 비용이 조금만 더 쌌더라면?
V-2 로켓이 조금만 더 빨리 완성 됐다면?
히틀러에게 조금만 더 빨리 보고가 됐다면?











그래서
지금보다 더 많은 V-2 로켓이
더 많은 나라로 발사됐다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는
V-2 로켓을 두고 이렇게 말했어

만일 V-2가 6개월만 먼저 나왔어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독일이 엄청난 무기를 개발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가성비가 너무 후달렸고,

1945년에 접어들면서 전쟁의 승기는
완전 연합군으로 기울었어






독일의 패전을 직감한 폰 브라운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






폰 브라운은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한 후
미국에 순순히 항복했어

미국은 폰 브라운을 어떻게 했을까?

항복했어도 나치니까 그 자리에서 죽였을까?
살려서 훗날 전범 재판에 세웠을까?













미국은 폰 브라운을 죽이지도,
전범 재판에 세우지도 않았어




당시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때의
전범 기술자을 빼돌려서
자기네 나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활용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미국은 독일 과학자와 기술자에 대한
일명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1순위가 폰 브라운이었다고 함ㅋㅋㅋㅋ
(여기에 731 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도 있음ㅡㅡ)





말만 블랙리스트지
실상은 위시리스트 아니냐;






폰 브라운이 왜 1위였는지는 V-2 로켓만 봐도
이미 전쟁 때 그 파괴력이 입증 됐쥬?


그런 위시리스트 넘버원이

제 발로 굴러들어오다니
미국 입장에서는 존나리 땡큐베리머치 아니겠숴?






하지만 폰 브라운은 모다?
나치쟈냐ㅇㅇ




그래서 미국 정부 내에서는
폰 브라운 처분 문제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어







하지만 결국 1945년 6월
미국 국무장관은
폰 브라운과 다른 전문가들을
미국으로 이송하는 것을 승인했어

근데 또 막상 얘를 대놓고 미국으로 데려가자니
나치였던게 넘나 걸리는 거야(염병;
나치랑 찍은 사진도 많아서
나치 아니라고 구라 칠 수도 없었음ㅋㅋㅋㅋ




그래서 폰 브라운은 일명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을 통해
아주 $은.밀.ㅎr.ㄱㅔ-★$
미국으로 보내졌어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 간 폰 브라운은
무려 15년 동안이나 미군과 함께 일하면서
로켓 개발 연구에 매진 했어



1953년 미국 최초의 대형 단거리 탄도미사일

레드스톤을 개발한 것도 폰 브라운임

우주 처돌이 폰 브라운은 로켓 개발 외에
미국의 우주개발 계획을 선전하는 모델로도
아주 왕성한 활동을 했어



수많은 대중 잡지에
우주개발의 미래에 대한 글을 기고했고,
그 중엔 우주정거장에 대한 개념을 제안 한 것도 있었어



게다가 우주여행에 관한 월트 디즈니 쇼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는가 하면
디즈니랜드의 기술자문을 맡기도 했대
<월트 디즈니와 전투기 모형을 들고 있는 폰 브라운, 1954년>







전쟁으로 돈도 두둑히 벌었겠다,
로켓 연구 1인자도 데리고 있겠다
미국의 어깨는 아주 하늘 높이 치솟았어







그러던 어느날
세계를 뒤흔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지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해벌임ㅋㅋㅋㅋ




미국은 이 일로
존나 충격을 받았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시발 우리가
원자폭탄에서는 4년이나 앞섰고,
수소폭탄에서는 2년을 앞섰는데
인공위성에서는 뒤졌다고...?
우리가?ㅋㅋㅋㅋ렬루?ㅋㅋㅋㅋㅋ..ㅋ.ㅋ...




위대한!!!!!!!!!!! 우리 유에쎄이가!!!!!!!!!!!!
고작!!!!! 소련 놈팽이들한테 뒤쳐지다니!!!!!!!!!!!!
세계 최초가 유에쎄이가 아니라니!!!!!!!!!
 으으으 분하다!!!!








소련이 무섭게 성장하자
똥줄이 타기 시작한 미국은
각잡고 인공위성 연구를 시작했어



 그리고 여기엔 아주 당연하게
폰 브라운이 참여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누구보다 우주 로켓 처돌이
+천재였던 폰 브라운은
자신이 개발한 탄도미사일 레드스톤을 개량해
주피터 로켓을 설계했어



그리고 이걸 더 개발해서
주노 1을 완성시켰고,


이듬해인 1958년, 무려 1년만에
주노1 로켓으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익스플로러 1호 발사 모습>
<우주에서의 익스플로러 1호>
<위성이 궤도에 진입했음을 확인한 윌리엄 헤이워드 피커링, 제임스 밴 앨런, 베르너 폰 브라운이 워싱턴 DC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익스플로러 1호의 모델을 선보이고 있는 모습>






존나 이제 만들기만 하면
다 성공임ㅋㅋㅋㅋ


이 후로 이제 미국은 본격적으로
우주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어








그래서 만들어진 게 바로
미국항공우주국, NASA야

NASA 설립 후 폰 브라운은
자신의 인생을 바꿀
세 번째 제안을 받게 돼




바로 나사에 취직하게 됨ㅋㅋㅋㅋㅋㅋ





1960년
폰 브라운은 NASA의 하부 조직인
마셜 우주비행센터의 소장이 되어
우주비행사를 운반할 수 있는 로켓을 개발하는 일을 맡게 됐어
<마셜 우주 비행 센터에서 촬영한 폰 브라운의 모습, 1964년 5월>















또 다시 미국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함ㅋㅋㅋㅋㅋㅋㅋ




1961년 4월 12일

소련이 이번엔 인류 최초
우주로 사람을 보내는 데 성공해벌인 것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은
보스토크 1호를 타고 무려 1시간 48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성공했음ㅋㅋㅋㅋ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한 인류 최초 우주인 유리 가가린>
<보스토크 1호의 모형>







최초 타이틀 뺏긴 미국 :

아 시발 소련이 또...!!!!(딥빡

당장 사람 태워서 우주로 날려버려!!!!!!




미국은 부랴부랴 우주비행사를 로켓에 탑승시켰어


하지만 대기 상층을 15분 동안 비행하는 데 그쳤고
우주 궤도에는 도달하지도 못했음ㅋㅋㅋㅋ







미국은 존나 분해서 참을 수 없었긔ㅋㅋㅋㅋㅋ




으으으 씨발!!
세계 최초, 인류 최초는
전부 우리 유에쎄이가 해야한다고오옭!!!!
소련 새끼들이 감히!!!!!!!

이 일로 미국은 렬루다가
자존심이 존나리 상했던지
당시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까지 나섰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이 나라가 10년 안에 사람을 달에 착륙시키고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도록 하는 목표를 완수할 것으로 믿습니다.”





NASA 듣고있나?
딱 10년 준다. 잘 하자?ㅋ








대통령까지 저 난린데 어쩌겠어;;;
나사는 대통령의 뜻을 받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어






프로젝트의 이름은
“아폴로 프로젝트
(Apollo Project)”




그리고 아폴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핵심 연구진, 폰 브라운






폰 브라운 팀은 110m 높이의 대형 로켓 새턴을 개발했어



그리고 대망의 1969년 7월 16일

전 세계가 주목하는 앞에서
로켓 새턴이 발사 됐지






바로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를 태우고 말이야


<1969년 7월 16일 아폴로 11호 발사 성공 이후 발사 통제 센터실에서 기뻐하는 폰 브라운의 모습>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폰 브라운은 평생 염원하던
우주 탐험이라는 꿈을 이루게 된 거야





폰 브라운은 1972년 나사를 은퇴했어



이제 더 이상 미국 정부나 군대와 일 하지 않는
폰 브라운은 그 뒤로 어떻게 됐냐고?

이제라도 전범 재판을 받았을까?









아니

폰 브라운은 나치 전범 재판을 받기는 커녕
미국에서 기업가로 일 하다가
1977년 6월 16일 췌장암으로 사망했어



그리고 폰 브라운은 현재까지도
나치 전범이 아닌
로켓의 아버지로 남아있지
<폰 브라운의 공로를 기리는 명패를 공개하는 모습, 1970년,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






인류가 최초로 달에 도달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한때 인류를 끔찍하게 학살했던
나치 당원이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하지 않아?






역사에 만약이라는 건 없지만

만약에 독일이 로켓 개발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폰 브라운이 나치가 되어 V-2를 개발하지 않았더라면,
폰 브라운이 나사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만약 당신이 과거로 돌아 갈 수 있다면
폰 브라운을 살리시겠습니까, 죽이시겠습니까?


아니면

미국처럼 자국으로 데려와
자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쓰겠습니까?




문제시 크리스탈
5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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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행보가 달랐던 것이 이후 우주 개발에 대한 방향이 바뀌게 되는데... 미국은 과학자를 데려온 반면에 소련은 독일에 남아 있던 기술자를 데려갔다고 해 그래서 이미 있는 기술을 가공 해서 초반은 소련이 빨랐지만 한계에 도달했고 미국은 기본 이론이 튼튼해 초반에 기술을 쌓아올리는데 시간이 걸려 늦어진 반면에 확장성이 좋아서 결국 역전했다고 하지
친일파가 능력있다고 용서하자는 말로 들리네요.
그래서 과학자도 역사,윤리등 인문교육을 받아야 함 그것도 많이...
그레고리 팩 닮았네‥ 죽이느냐 살리느냐 그것이 문제란 말쌈이죠? 살리되 평생 전쟁피해자들에게 속죄하는 기부.캠페인.참배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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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갔을까? (길지만 재밌는 글)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중에 일부분인데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대략 우리가 좀 비루하게 인식하기도 하는 조선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가 하는 부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 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출처 : http://dotty.org/2699099
미안하지만, 네 불행엔 아무도 관심없다.
이 세상의 행복의 총량이란 것이 정해져있어서 누군가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행복할 만큼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되는가? 자신은 나름 좋은 사람으로 범법 행위 하나 저지르지 않고 열심히 살아보려 아등바등 거리고 있는데, 무심한 하늘은 그런 나를 방관하기는커녕 네가 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사지로 몰아넣으며 시험하는 것 같은가? 세상의 모든 사람과 뜻이 나를 적대시하고 느껴지는가? 그래서 그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어 주고, 위로해주고, 기운 내라는 말을 해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가? 그렇다면 안타깝게도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너의 불행에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다. 너의 불운에 대하여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부류로만 나눠질 뿐이다. 첫 번째는 너의 찌질한 삶에 쓸어있는 곰팡이를 보면서 자신의 삶은 그래도 이것보다는 나아 다행이지 않냐며 위안을 삼을 사람들, 두 번째는 시간당 몇 만 원에 육박하는 상담비를 받고 직업 삼아 네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담사들이다. 네 슬픔, 네 억울함, 네 풀 죽은 모습은 어느 누구의 감정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동정심은 남의 불행에 선처를 베풂으로 인해서 얻는 개개인의 알량한 자기만족 수단 행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가? 너는 또 네 불행을 팔아 남들의 위안이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관심이 있는 것은 네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는지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표면적인 위로에 너의 불행은 더욱 초라하고 싸구려가 돼버릴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자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네가 불행에 침식될 때가 아니다. 닥쳐오는 모진 한파에 운명을 순응하듯 그대로 얼어붙어 눈 밑으로 소리 소문 없이 고꾸라지는 네 모습이 아니다. 세상은 네가 만들어 내는 소음에 주목한다. 네가 불행에 맞서 내는 악에 받친 씩씩 거림에 화들짝 놀라 돌아 본다. 모든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순응하는 네 모습이 아니라, 부당하다며 있는 대로 깽판을 부리며 난리를 치는 네 모습에 너의 불행을 돌아볼 것이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미치광이처럼 날뛰어라. 협잡꾼처럼 세상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흥정하려고 달려들어라. 3살박이 어린아이처럼 길에 나동그라지며 울고불고 소리를 꽥꽥 질러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투견처럼 이빨을 다 드러내고 으르렁거려라. 세상에서 제일 무식한 사람처럼 왜라고 계속 물음표를 붙이며 꼬치꼬치 캐물어라. 네 불행을 못 살게 굴어야 한다. 네 불행이 너에게 넌덜머리가 나도록 지독하게 치대야 한다. 계속 이유를 묻고, 몸싸움을 걸고, 화를 내고, 울부 짖으며 부당하다고 표현해라. 불행한가? 그렇다면 하소연할 상대를 잘 못 골랐다. 운명에 흠씬 두들겨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그대로 나동그라져서 뒤져버렸으면 하는 세상에 보란 듯이 다시 어기적거리고 일어나 분에 겨운 소리를 질러라. 어차피 세상이 바라는 것은 운명이라는 것들은 매듭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너 스스로 걸어가서 교수형에 처하길 원하는 간교한 뚜쟁이들의 고급스러운 표현일 뿐이다. 보란 듯이 네 앞에 걸려 있는 교수대를 발로 걷어차고 침을 뱉고 우악스러운 두 손으로 갈가리 찢어 놓아라. 찢기 않아도 물어뜯어라. 절대, 네놈들 뜻대로 내 두 발로 스스로 교수대로 걸어가 목을 매다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며 비웃어 줘라. 네 불행 앞에서 비웃고 침을 뱉고 비아냥거리다가 쥐어 터진 몰골로 교수대를 등지고 다시 걸어 나가라. 네 불행은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난봉꾼들 놀음에 상식적인 인과관계를 도출하는 미련한 행위 좀 멈춰라. 그저 한번 크게 비웃고, 교수대에 걸린 동아줄이 먼저 썩나 내 몸이 100살이 넘어 먼저 문드러지나 내기를 해보자며 다시 가던 길을 가라. 그것이 네가 네 불행에게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다. 네 불행에 침을 뱉고, 야유를 퍼붓고, 욕지거리를 퍼부어라. 그들이 너에게 질려서 오던 발걸음도 되돌릴 만큼 지독하게 투쟁하라. ----- 굉장히 와닿는 글이라 감명깊게 읽었는데 출처가 불분명하게 커뮤를 떠돌더라고요 - 이 불행을 깨고 나올수있는 것도 결국 나 ! 이악물고 이겨내자고요 😬💪
미국인들은 왜 높은 곳에서 떨어질때 제로니모! 라고 할까?
미국인들은 비행기나 절벽에서 떨어질때 제로니모! (Geronimo) 라고 하더라고…? 제로니모가 대체 뭐길래 미국놈들이 그 이름을 외치는 것일까…? 대체 왜…? 때는 1940년 미국 이때 미국 군대는 “스카이 다이빙을 전투에서 써먹을수 있는지에 대한 시범훈련”이 막 시작됐었나봐 말이 실험이지 걍 군인들 데리고 “마 함 뛰어바라 싸울수 있나 보자” 한거 같긴 한데… 어쨌든 그렇게 첫 빠따로 스카이 다이빙을 하게 된 재수도 드럽게 없는 Aubrey Eberhardt 긴장을 떨치기 위해 군대 칭구칭긔들이랑 영화도 한판 때려 주고~ 맥주도 마시면서 “스카이 다이빙 화이탱!!!” 하면서 목도 좀 축인거지 근데 칭긔놈들이라는게 술 몇잔 들어가니께 Aubrey Eberhardt를 놀리기 시작함 얔ㅋㅋ 니는 거기 일단 올라가면 무서워서 니 이름도 까먹을걸ㅋㅋㅋㅋ Aubrey Eberhardt 또한 술 몇잔 들어가니께 가뜩이나 첫빠따라 무서운데 놀려서 개빡침 그리고 술기운 덕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올라오는 Aubrey Eberhardt는 이렇게 말했대 “알겠어 이 쓰애끼덜아 존나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느그 농담에 장단 맞춰서 내가 내일 스.다 뛰기 전에 GERONIMO 라고 외침 ㅇㅇ 기대해라” 참고로 엄청난 오역이야 아 그니께 도대체 그 제로니모가 먼데~~~~! 저 사람은 자기 이름 대신 그걸 외친다고 했을까??? 이 사람이 제로니모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원래 이름은 “하품하는 자”였다고 해. 근데 멕시코 군인들이 기독교 성자 세인트 제롬을 닮았다고 제로니모로 부르기 시작한거야 이 제로니모는 아파치족 주장으로 멕시코와 미국을 다 깨부시고 다녔던 존나 쎈 전사이기도 했대 백인들이 벌벌 떨 정도 걍 존나세… 그러자 1939년에 이 사람을 모티브로 한 영화가 개봉했는데 인기도 많았다고 함 그니까 미국군인들이 봤던 영화가 제로니모 였던거지! 즈그가 침략해놓고 영화까지 만들어서 즈그가 감동을 받았는지 뭔지…. 미국군인놈은 친구들에게 제로니모를 외치겠다 선언하였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후발주자들도 따라 외치는 것이 굳어져서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거라고 하네… 끝
인테리어쟁이가 알려주는 리모델링 상담 잘받는법
경기도 모 지역에서 인테리어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파트만 맡아서 하고있는데 아래 내용은 아파트 기준입니다. 간혹 인테리어 피해사례도 보고 몇천만원을 투자하는 리모델링을 너무 모르고하는분들이 많아 상담이나 견적받을때 참고하시라고 글써봅니다. 1. 아파트 구조 확인하기 내가 이사할집을 보지도않고 계약하진 않으시잖아요 기본평면도는 알고가시는게 좋습니다. 아파트는 같은평수 같은평면도라도 현관에서 들어왔을때 주방이 왼쪽에있냐 오른쪽에있나 달라요 예를들면 101호가 입구왼쪽에 주방이 있다면 102호는 입구오른쪽에 주방이 있는 방식입니다. 또 베란다 확장이 되었는지 여부도 확인하시고 확장이 되어있다면 확장된 부분에 난방공사 했는지 여쭤보셔야됩니다. 2. 각 공간의 활용 용도를 계획하기 보통 제일 큰방을 안방으로쓰고 나머지 방들을 아이방, 옷방, 서재, 놀이방, 손님방 등 내가 쓰고싶은 공간으로 만들 계획을 세워야합니다. 보통 아이가 한명있는 3인가족의경우 방3칸짜리 아파트를 리모델링한다면 안방,아이방을 기본으로 가져가고 남은 방 하나를 옷방으로 쓴다던지 서재로 쓴다던지 구체적인 계획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살 집인데 이정도는 기본인거죠 안방을 침실로만 쓰려면 가벽을세워 드레스룸을 따로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건 상담을통해 나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해줘야됩니다. 3. 가구/가전 계획세우기 리모델링을 하면서 가전과 가구를 새로 바꾸시는분들도 많으신데 내가 사려고하는 가전의 스펙을 정확히 알아둬야 좀더 예쁘게 꾸밀수 있습니다. 요즘 제일 핫한 삼성 비스포크냉장고나 LG 오브제의 경우 키친핏이라고해서 가구와 선이 딱 떨어지게 나오는데 양문형의 경우 문이 열리는 간격까지 계산해서 장을 짜야 불편함이 없습니다. 이런식으로 냉장고를 양문형+김치냉장고 넣으려면 두 냉장고가 활짝열리는 간격을 계산해서 딱떨어지게 장을 짤수가 있는겁니다. 업자한테 사이즈 알려주면 알아서 짜주니 나는 가전의 스펙만 캡쳐해놓고 넘기면 됩니다. (간혹 냉장고를 직구로 구매하시는분이 계신데 키친핏으로 장을 짜놓고 냉장고는 키친핏이 아닌 일반냉장고를 직구하시면 냉장고가 튀어나오는 불상사가 생깁니다...) 베란다를 확장한다면 베란다에서 수도를 쓸것인지 안쓸것인지 결정하고 배관이설을 원하는 위치에 해달라고 하시는것이 좋습니다. 이건 제일 중요한 콘센트위치입니다. 보통 30평아파트에 2구콘센트가 15개정도 들어갑니다. 내가 원하는 위치에 콘센트가 위치하도록 가구배치를 짜서 업자에게 공사 시작전 알려주는게 좋습니다. 컴퓨터책상이 올 자리에 콘센트가 있어야되고 침대자리에 콘센트가 있어야 핸드폰 충전도 하고 안마의자 놓을자리에 콘센트가 있어야 멀티탭이 필요없어지고 지저분해 보이는 선이 안나옵니다. 물론 콘센트이동하는건 추가비용이 들지만 하는게 좋아요 3. 예산 측정 1차상담때는 내가 하고싶은걸 다 집어넣어보고 결정하세요. 샷시도 싹다바꿔보고 확장도 해보고 내가 생각했던 모든걸 견적받으면 100% 예산초과입니다. 그중에서 현실과 타협하여 결정하시는게 좋습니다. 샷시가 쓸만하다면 필름작업만 해도되고 도어도 쓸만하다면 필름으로 커버 가능합니다. 1차견적에서 예산에맞춰 줄이는데 무조건 대공사 시키려는 업체는 거르는게 좋습니다. 4. 컨셉잡기 우리집은 화이트톤으로 할지 우드톤으로 할지 네이비나 블랙계열로할지 전체적인 톤을 생각해줍니다. 이렇게 우드의 중후함으로 갈 수도 있고 깔끔한 화이트로 갈수도 있지요 지금당장의 트렌드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길로 가는게 맞습니다. 그런 취향을 확인하고 제안해주는게 업자의 몫이구요 5. 업체선정 제일 중요합니다. 나의 취향과 맞는 포트폴리오. 정확한 피드백. 꼼꼼한 마감. AS기간 등등 여러가지 잘 따져봐야됩니다. 6. 견적비교 이것도 중요한건데 여러 업체의 견적서를 비교해보면서 가격차이나는 부분을 확인해보세요 예를들어 같은 실크벽지인데 A업체는 도배가 150만원인데 B업체는 250만원이 나올수도 있습니다. 도배지를 덧방(기존벽지에 덮어서시공)치는지 싹뜯고 퍼티잡고 도배하는지 차이도 있습니다. 조금 더 디테일한 견적을 주는 업체가 무조건 좋다는건 아니지만 공사하면서 빠진부분이 있는지없는지 확인할땐 좋습니다 꼭 좋은업체 찾아서 스트레스 안받는 인테리어 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내가 원한게 바로 이런 글이었음 개꿀팁
막걸리 좋아해? 전국 지역별 특색있고 특산물로 제조한 막걸리 모음.JPG
서울 한강주조 나루생막걸리 6% / 11.5% 서울 성수동에서 재배한 경복궁 쌀로 만든 서울 1호 특산주 경기 배상면주가 느린마을 막걸리 6% 무 아스타팜, 단맛과 부드러운 맛이 특징 김포 금쌀 탁주 김포선호 생 막걸리 6% 70년 전통과 역사가 있는 명문가 막걸리, 김포에서 자란 금쌀로 제조 천연감미료 사용 포천 일동 담은막걸리 화이트 6.5% 하얀 구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90년 전통 막걸리 청계산의 맑은 물 사용,합성감미료 X 충청남도 사곡양조 공주 알밤 밤막걸리 6% 막걸리 제조에 사용하는 밤은 품질이 좋은 최상급 밤을 사용 진한 밤맛이 특징 한산모시 생막걸리 5% 한산에서 난 모시잎을 사용해 만든 막걸리 모시잎을 사용해 은은하게 퍼지는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 이상헌 탁주 14% 충남 아산에서 난 쌀로 만든 탁주 엄선한 누룩을 사용해 백여 일 간 발효해 만들어 프리미엄 막걸리라 부른다 모든 공정 수작업이라 한정된 수량만 제조 충청북도 장희도가 세종대왕 어주 13% 유기농 쌀(현미 찹쌀)로 만든 막걸리 ,초정 약수 사용 무 첨가물 용두산 강냉이 막걸리 6% 제천 100년 전통 양조장에서 제조한 막걸리 옥수수가 들어가 옥수수 향과 걸쭉한 느낌이 드는 막걸리 명세주가 가덕 순쌀막걸리 6% 우렁이 농법으로 재배한 친환경 충북 청원쌀을 사용 100% 우리 쌀로 만들어 깔끔한 맛이 특징 전라남도 담양죽향도 대대포 생막걸리 6% 미네랄,비타민이 풍부한 지리산 벌꿀과 댓잎을 첨가해 감칠맛이 있는 막걸리 인공 감미료 X 편백 숲 산소 막걸리 딸기 스파클링 6.8% 전남 장성군 특산물인 딸기를 사용해 제조 딸기향이 느껴지며 스파클링이라 청량한 맛이 특징 남도 탁주 정고집 나주 쌀 생 막걸리 5% 다른 막걸리와 다르게 백설기와 찐쌀을 사용해 제조 전라북도 국순당 자연담은 복분자 막걸리 6% 국순당 고창명주에서 제조 고창에서 재배한 쌀과 특산물인 복분자로 만든 막걸리 복분자 우유를 마시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함 전주 애모주 1.5% 생강,계피,대추,배 등을 넣어 제조 계피와 대추향이 강한 막걸리 내변산 쌀 바나나막걸리 4% 바나나 맛이 아닌 바나나 향에 가까운 막걸리 바나나 탄산맛을 느낄 수 있고 얼음 넣어 마시면 좋다고 한다 경상남도 금정산성 토산주 막걸리 8% 대한민국 1호 민속주 이화백주 순탁주 6% 우리 쌀에 옛날 누룩을 100% 사용하며 서로 마실수록 이롭다는 뜻을 담고 있음 햅쌀을 사용해 제조하고 막페인(막걸리+샴페인)이라고 부름 복순도가 손막걸리 6.5% 100% 우리쌀로 빚어 호불호가 적은 막걸리 경상북도 두술도가 희양산 막걸리 9 / 15% 희양산 주변에서 재배한 쌀과 우리밀 누룩을 사용 요구르트처럼 담백한 맛을 내는 게 특징 문경주조 오미자 생막걸리 6.5% 우리 쌀과 문경 동로산에서 자란 오미자로 빚은 막걸리 분홍분홍한 색감이 이쁘다 문경주조 문희 13% 재료를 세번에 담는 전통 삼양주 기법으로 빚은 막걸리 90~100일간 황토방에서 숙성해 진짜배기 막걸리만 추출함 강원도 호모루덴스 12% 유희의 인간이라는 뜻을 지닌 막걸리 강원도 홍천 한의사가 만든 막걸리로 유명하다 삼양주 기법으로 지어 맛이 풍부 전통주조예술 만강에 비친 달 10% 홍천 특산물인 단호박을 사용해 제조 백자주 막걸리 10% 백자란 잣나무 열매 잣을 가리키는 말로 홍천 명물 잣을 사용해 제조 제주 낙화곡주 우도 땅콩 생막걸리 6% 우도 명물 땅콩을 사용해 제조 땅콩을 사용해 땅콩 특유의 고소한 맛이 특징 출처
19세기 프랑스의 시체 관람
1886년 8월, 프랑스 파리 한적한 외곽에서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시체가 발견됐다. 프랑스 신문사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호기심 가득한 파리 시민들은 소녀의 시체를 보기 위해 시체 안치소로 몰려 들었다. 무려 1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시체 안치소로 몰려들면서 인근 교통이 전부 마비되었다. 자신이 먼저 보려고 주위 사람들을 밀치는 바람에 이곳에서 저곳에서 드잡이질이 벌어졌고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옷이 찢어지거나 기절하는 사람하는 사람까지 속출했다. 소녀 시체에 대한 관심은 이상할 정도로 고조된 편이지만, 사실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시체 안치소에서 시체 관람을 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리 벽으로 만들어진 시체 관람소는 파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 명소였다. 시체 안치소 내부가 훤히 보이는 유리창으로 도배한 용도는, 신원 불명 시체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시체를 확인할 수 있게 돕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 그런 식으로 시체를 찾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었다. 관광 명소가 될 정도로 사람들이 왕창 몰려 들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대부분 한가지, 죽은 자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은 자의 사인이 극적이거나 수수께끼일수록 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언론사들은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대서특필하며 온갖 추측성 기사를 쏟아냈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고 이틀 뒤 세느강 가에서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 시체가 발견되자 어떤 프랑스 일간지는 두 소녀를 엮어서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자매'라는 소설을 기사로 내보기도 했다. 이 기사가 나가고 소녀들의 시체를 보려는 구경꾼은 한층 더 늘었다. 1885년, 미국인 기자가 묘사한 파리 시체 안치소의 정경을 쓰자면,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치켜세운 신사들은 시체를 구경하며 히히덕거렸다. 노인들은 장터에서 물건을 흥정하듯 큰소리로 시체의 사연을 떠들었다. 창백한 안색의 귀부인이 동정어린 어투로 죽은 자의 명복을 빌었으나 시체 구경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시체가 옮겨질 때마다 양팔을 휘두르며 환성을 내질렀다. 오로지 시체 구경을 하기 위해 방문하는 방문객 숫자가 늘어나자, 파리 시청은 시체 안치소의 관람 구역을 확장했다. 노점상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시체 안치소 주위에 몰려들었다. 시체 안치소는 일주일 내내 아침 9시부터 새벽까지 개장했으며, 시체를 보기 위한 관광객은 더욱더 늘어났다. 어떤 시기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방문하는 관광객보다 시체 안치소를 구경하려는 사람 숫자가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시체 안치소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면서 시체의 유류품 역시 관광 상품이 되었다. 이에 따라 시체 안치소는 마치 백화점 쇼윈도 같은 형태로 재개장되었다. 초기에는 시체의 부패를 늦추기 위해 천장에 달린 수도 꼭지에서 차가운 물을 시체 위에 방울져 떨어지게 하는 방식을 취했으나, 1882년, 본격적인 냉장 시스템의 도입으로 시체 안치소의 시체들은 좀 더 오랫동안 구경거리가 되었다. 파리 경찰은 시체 관람을 범죄 수사에 활용하기도 했다. 1888년, 살인 용의자를 시체 안치소에 데려가서 희생자와 대면시키는 행위를 공식 절차에 추가 시켰다. 제 아무리 완고하게 무죄를 주장하던 용의자도 밝은 빛 아래에서 희생자의 유해를 마주하고 나면 금방 죄를 자백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시체 관람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점차 인기가 사그라들다 1940년대를 전후해서 완전히 금지되었다. 출처:한류열풍 사랑
기존나쎈 조선 최초의 주미 대사.jpg
때는 1887년.. 5년전에 구식 군인들이 일으켰던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허겁지겁 부르긴 했는데.. 청나라는 군대 진압했으면 좀 꺼지지 조선에 눌러앉아서 온갖 간섭을 하려 했고 일본은 임오군란때 죽은 일본인과 불탄 일본 공사관을 들이밀며 배상 요구를 하려 한것임 심지어 언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지들 군대도 조선에 주둔시키겠다는 말같지않은 요구도 해버림 하지만.. 고종 고종은 쩔수 없었다.. 그 뒤로 조선은 지겹도록 청나라와 일본 간섭에 시달리게 됨 *잠시 당시 관계 설명* 이 당시 청나라는 서양 국가들에게 탈탈탈 털리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들 따까리 자리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하지만.. 원래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사대관념에 입각한 조공책봉 관계, 즉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보살펴주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는 그런 관계임. 말그대로 힘에 의한 관계라기 보단 이념에 따른 자발적 관계이고, 당연히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었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청나라가 자꾸 선넘더니 무력을 앞세워 국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는 것! 이때부터 조선인들도 머야시발;;하면서 청나라와의 전통적 관계를 끊고 동등한(=근대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조공을 철폐하려고 하는 등 한발자국씩 나아가던 시기였음 ~다시 돌아와서~ 조선의 여러 관료들은 청나라를 비롯한 외세의 개입이 갈수록 심해지는 이 시점에, 어떻게 하면 조선이 자주독립을 지키며 근대화를 이뤄낼 수 있을지 열심히 고민 또 고민했음 그 당시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외교> 조선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국제질서에 편입하고자 했음 그렇게 해서 청나라에도 조공책봉 사신이 아닌 동등한 주청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고, (물론 청나라는 전통 질서에 혼란 생긴다고 싫어했음 ㅎㅎ 우짤) 도쿄에도 주일 외교관을 파견하고자 했었음 하지만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바로 조선 최초의 주미 대사 주미특파전권대사 박정양을 파견했다는 것임 고종이 주미 대사를 파견한 것은 미국에 상주 외교관을 파견함으로써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주변국에게 보여주고, 서양의 현재세력 관계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고종의 빅 픽쳐 ㅎㅎ 조선은 당연히 파견하기로 결정한 후에 청나라한테도 알려줬음 : 정양이 일행 미국에 보낼거임 ㅎㅎ 위안스카이(원세개) : 미쳤습니까 휴먼? 갑자기 청나라가 존나게 시비를 거는거임;; 대충 뭐라고 했냐면 조선이랑 미국 사이에는 상민도 없고 무역도 안하는데 전권공사는 왜 보내? 돈도없으면서 외교사절은 무슨 ㅎㅎ 낭비 ㄴㄴ 아니 그리고 니네 왜 우리한테 허락 안받음?? 이거 무효야 무효 응.. 개소리 한거임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미국 공사나 고문관도 청나라가 조선과 미국의 조약을 방해하는건 조약 위반이고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니 냅둬야 한다고 항의했음 이 민폐국 때문에 자꾸 출발이 늦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청나라가 요구하는 영약삼단을 받아들임 고종은 청나라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면서 박정양 일행에게는 “짐의 뜻을 잘 헤아려 처신하라”고 거듭 당부했다고..(대충 영약삼단 지키지 말라는 뜻) 영약삼단이란?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대한제국 공사는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 ③ 대한제국 공사는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한줄요약: 청나라가 미국에서 조선이 자기네 속국이라고 홍보하기 위해 세가지 약속 지키라고 협박함 조선이 자주독립국인걸 보여주고자 했던게 어지간히 아니꼬웠나 봄 ㅎㅎ 어찌됐건 우여곡절 끝에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 일행! 청나라와의 약속 중 첫번째인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를 지켜야 할 차례였음 (조까~) 하지만 기존나쎔 박정양은 청나라 공사가 아닌 미국의 국무부 장관를 먼저 만나러 가면서 영약삼단을 무시해버림 당시 일행 조금 화난 위안스카이 : 영약삼단 지키라해;; 거슬린다해;; 박정양은 청나라가 항의하자 “님 ㅠㅠㅠㅠ 쏴리쏴리 ㅠㅠㅠㅠ 뚜이부치 ㅠㅠㅠ 정부가 청국 공사 먼저 만나러 가라고 나한테 말 안해줬음ㅠㅠㅠ 일부로 그런거 아님 ㅠㅠㅠㅠ” 이라고 해명함 청나라는 그냥 흠....하고 넘어가게 됨 하지만 그 뒤로도 박정양은 미국의 대통령을 만날 때 청의 외교관을 대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워싱턴에서 공사관의 부임 순서에 따라 방문하는 관례에 따라 28개국 중에 18번째로 청의 공사관을 방문했음 이후에 청국 공사에 방문한 박정양은 더 이상 “몰랐다”고 할 수 없으니 솔직하게 “미국에 도착해서 미국 국무부가 아닌 청 공사를 먼저 방문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이고, 이는 미국이 조선과의 교류를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조선과 미국의 국교라는 파견 명분을 해칠 수 있으므로 영약삼단을 지킬 수 없었다.” 고 말했고, 너무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청나라에서도 뭐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었음. 하지만.. 그 뒤로도 복장같이 사소한 걸로도 다 트집을 잡아서 시비를 걸었음 ㅎㅎ 물론 박정양은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나라의 압력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이는 엄청난 의의가 있는 행동이었다는 점 왜냐하면 청의 요구를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외교 활동을 했기 때문임 청나라 공사의 요구들을 거절하고 당당하게 단독으로 활동하며 자주적 외교와 독립국의 지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 (워싱턴 대한제국공사관) 당시 주미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이상재가 작성한 편지를 보면 "이곳의 인물 풍속 정치 법령은 오로지 우리나라와 일체 상반된다. 날마다 귀와 눈이 처음 듣고 처음 보는 것"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중국공사가 매번 체제사로 서로 양보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청나라가 가지가지 간섭해댔던 시절에도 우짤? 마인드로 조선의 외교를 위해 힘써줬던 그 옛날 기존나쎔 조선 외교관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가져와봄 마무리는 이상재의 편지 중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 개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使命)을 욕보이는 것이다." 문제시 삭제 출처
프랑스가 만든 민항기, 다쏘 머큐리를 알아보자
1970년의 항공 산업은 보잉, 록히드마틴, 맥도널 더글라스 등등 여러 미국 기업들이 피터지게 싸우던 시절이였음. 보잉은 747-100의 엔진 문제 등을 개선한 747-200을 출시하고 중단거리 시장을 노린 737 오리지널 시리즈를 런칭했음. 록히드마틴은 늘어나는 항공 수요에 맞춰 첫 광동체 여객기인 L-1011을 출시했고, 맥도널 더글라스는 록히드마틴이 첫 광동체 여객기를 런칭했다는 소식에 허둥지둥 DC-10의 개발을 진행시켜 출시하게 됨. 우리가 알아볼 프랑스의 여객기, 다쏘 머큐리는 보잉의 중단거리 시장을 노린 737 오리지널을 경쟁 상대로 삼고 개발을 시작함. 프랑스의 기업 다쏘는 보잉에 견주는 유구한 항공 산업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기업임.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설립된 다쏘는, 세계대전 후 첫 제트전투기인 우라강을 선보이고, 그 뒤 미라주 시리즈를 런칭하며 그 당시엔 베스트셀러 급으로 팔려나가게 됨. 특히 미국, 소련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제3세계 국가들이 미라주를 사들였고 이는 다쏘가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되는 발판을 깔아줌. 이러한 성장세에 한껏 고무된 다쏘는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여 첫 협동체 민항기, 머큐리를 런칭할 계획을 세우게 됨. 당시 다쏘가 얼마나 의욕적이였는지, 공장도 먼저 세우고 초도비행도 계획 수립 후 4년만에 이루어 낼 정도로 빠른 개발 과정을 보여주었음. 또한 다쏘 그룹의 또 다른 계열사 중 하나인, 다쏘시스템의 그 당시엔 최신 기술이였던 컴퓨터 설계로 머큐리는 경쟁 기종으로 지목했던 737 오리지널보다 속도도 빠르고 비행 효율도 좋은 항공기를 완성하게 됨 바로 이 항공기가 다쏘의 첫 협동체 민항기, 머큐리임. 앞서 설명했던 장점만 보면 출시하자마저 무지막지하게 팔려나갔을거 같지만, 머큐리엔 장점을 쌈싸먹어버리는 매우 큰 단점이 있었음. 바로 항속 거리, 즉 비행기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냐가 심각하게 조루였던 것! 이 항속 거리가 얼마나 짧았냐, 수치상으로는 1700km~2100km 이였음 수치상으로는 실감이 안나니 우리에게 친숙한 노선으로 따지면, 인천-나리타를 겨우 오갈 수 있는 수준이였던 것. 유럽 대륙으로 따져도 주요 도시를 겨우 연결할 수 있는 수준이였음. 머큐리의 경쟁 상대였던 보잉 737 오리지널 중 하나인 737-200이 4,300km을 날아갈 수 있었던 걸 보면 말 다했지. 이런 하나의 거대한 단점을 안고 시장에 나온 머큐리는 말 그대로 대폭망. 사진에 나와 있는 항공사인 에어인터가 이 항공기의 유일한 고객이였음.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정부의 자금도 투입된 탓에 에어인터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 항공기를 구매할 수 밖에 없었음. 게다가 이 항공기가 출시된 시기인 1970년대엔 오일 쇼크로 인해 불경기가 찾아왔고, 당시 달러화가 평가 절하되어 각국의 항공사들은 신뢰성 있는 737을 싸게 구입할 수 있었음. 최종적으로 다쏘 머큐리는 유일한 고객 에어인터의 주문량 10대 + 시제기 2대를 합해 총 12대만 생산된 체 생산을 중단하게 됨. 사실상의 사망 선고가 내려진 셈. 에어인터가 주문한 머큐리들은 1995년까지 하늘을 날다가 퇴역하게 됨. 이렇게 커다란 실패를 안겨준 머큐리는 다쏘의 영원한 흑역사로 남을 줄 알았으나, 오히려 커다란 결실을 맞이하게 됨. 머큐리의 실패 이후 프랑스도 유럽연합의 항공기 제작사인 에어버스와 함께하게 되면서 다쏘 머큐리를 기반으로 새로운 협동체 여객기를 설계하게 되는데... 이는 737 시리즈의 유일한 라이벌로 불리게 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A320 시리즈임. 어찌보면 다쏘의 노력이 완전히 헛되게 된 것은 아니게 된 셈이다. 지구촌갤러리 코마츠타미나루님 펌
2차대전 때 미해군 수병들은 무엇을 먹었는지 알아보자
이 글은 2차대전 시기만 다룸, 미해군 수병들은 평균적으로 4,000칼로리를 하루에 소비하는데 이런 폭발적인 열랑의 소모를 메꾸기 위해서 미해군은 새로운 직별을 1900년대에 창설함, 조리병에서 시작해서 제빵사, 요리사, 도축업자, 그리고 조리최선임 담당관이였음, 최선임 담당관은 함선의 식량 수량을 확인하고 조리병들한테 재료를 배분하고, 또한 주방에선 주방장을 도와 식단을 짜기도 함, 대부분의 배는 조리장, 빵집, 그리고 정육소가 있었음, 대부분의 장구류는 수백명의 수병들의 수요를 맞춰서 거대했음, (BB-35 텍사스의 조리실) 조리실은 오븐과 구이용 팬, 그리고 사람만한 찜통이 있었음(위 사진에서 보이는 흰색의 통들), 제빵사는 사람만한 혼합기와 도축업자는 소고기를 한번에 썰수 있는 톱을 배당받았음, (BB-55 노스캐롤라이나의 제빵소) 요리책은 수준급의 식사와 효율성을 위한 조리법으로 구성되었음, 조리법은 기본이 100인분이였음, 조리법에는 가끔가다 비엔나 소시지와 고구마같은 괴식이 나오기도 했지만 영양학적으론 필요한 식단이였음, (BB-55 노스캐롤라이나의 감자 깎기실) 감자 깎기는 매체에서 흔한 처벌 수단으로 나타나지만 의외로 효율성이 영 좋지 않아서 나중에는 기계식 감자 깎기 기계를 도입했음(사진 왼쪽의 흰색 기구) 전투배치 상황에서도 조리병들은 수병들을 위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비하며 일했음, 2차대전 미해군의 식단 예시는 다음과 같았음, 봄, 금요일의 식단으로는 아침 반으로 자른 자몽, 밀로 만들어진 시리얼, 구운 콘밀 무쉬, 메이플 시럽, 바삭한 베이컨, 버터, 토스트, 우유, 커피 점심 토마토 주스, 연어 구이,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자요리, 버터랑 같이 볶은 당근, 견과류와 포도를 넣고 섞은 샐러드, 스펀지 케이크, 빵, 버터, 커피 저녁 양배추와 함께 구운 소고기, 웨지감자 비슷한 구운 감자, 양상추 심지 샐러드와 1000드레싱, 반으로 자른 배, 코코넛 버터 쿠키, 빵, 버터, 코코아 이외에도 아침, 점심, 저녁의 구성은 다음을 따라야 했음, 아침 과일:신선한, 동결된, 가루형, 건조, 혹은 통조림 과일은 에피타이저와 영양학적 이유로 포함되지만 굳이 아침에 제공될 필요는 없고 식단에 따라 조정될수 있음, 시리얼:시리얼은 힘의 근원이며 또한 우유와 함께 먹을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상황에 따라 뜨거운 혹은 차가운 우유와 배식됨, 주식:주식은 햄이나, 베이컨, 계란, 소시지, 크림 건조된 소고기, 구운 무쉬, 프렌치 토스트, 핫케이크, 아니면 다른 음식이 올라갈수 있음, 프렌치 토스트나 구운 무쉬가 올라간다면 잼이나 시럽, 젤리도 같이 배식되었음, 빵:빵은 토스트나 롤케이크, 옥수수빵, 비스킷, 혹은 커피 케이크 형태로 배식됨, 도넛이나 팬에 구운 빵도 배식될수 있음, 잼과 젤리:잼과 젤리는 버터를 대체하여 배식될수 있음, 음료류:음료는 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가 배식되었음, 점심 수프:수프는 아침이나 저녁식사라도 배식받을수 있음, 만약에 야채수프가 배식된다면 샐러드도 같이 배식되었음, 수프는 수병들의 주된 야채 섭취원중 하나임, 고기:고기는 언제나 가장 선호되는 음식임, 해군에서 구매되는 고기는 최상급이지만 부주의한 요리 방식으로 많은 양이 낭비될수 있음, 과조리를 삼가하며 배식됨, 그래이비:그래이비 소스는 고기와 함께 배식됨, 좋은 그레이비는 부드럽고 간이 잘되있으며 느끼하지 않음, 뜨겁게 배식할것, 채소:감자를 제외한 초록색 혹은 노랑색의 채소는 맛과 비타민적인 요소로 필요함, 절임:절임은 샐러드를 대체하여 나올수 있음, 주로 당근 절임과 양파, 무, 순무, 양배추 절임이 배식됨, 피클이나 비트도 배식될수 있음, 샐러드:고기나 초록색 채소, 과일로 만들어진 샐러드는 차갑고 아삭한 상태로 배식됨, 디저트:디저트는 행복감을 위해 필요함, 대부분은 단 디저트를 선호함, 무거운 식사에는 가벼운 디저트가 배식됨, 음료류: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 그리고 과일음료가 배식됨, 저녁 주식:고기는 보급품 현황에 따라 쓰일수도 안쓰일수도 있음, 저녁은 대부분 점심보다 가벼웠음, 하지만 수병들의 일과에 따라 변동됨, 고기와 쌀, 마카로니와 치즈, 찹 수이, 크림 소고기, 걸쭉한 차우더, 베이크드 빈즈, 그리고 비슷한 요리들이 배식됨, 또한 점심으로부터 남은 재료들이 재활용됨, 샐러드:채소와 과일로 만든 샐러드, 혹은 주방장이 만든 샐러드는 주식과 함께 배식되며 영양학적으로 중요함, 디저트:디저트는 저녁의 양과 칼로리 수준에 따라 변동됨, 음료류: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 그리고 과일음료가 배식됨, 날씨에 따라 냉차나 차가운 과일음료가 배식되었음, 이런 식단들은 함의 보급품 현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었음, 미해군 수병이 배식이 권장된 음식의 수량은 다음과 같은 우유:470ml 계란:1알 육식류:1번 이상의 배식 콩류(땅콩버터 포함):주마다 1~2번 버터:20~50g 시리얼과 빵:2번 이상의 배식 과일:2번 이상의 배식, 귤류는 자주 배식할것, 채소:감자를 제외해서 2번 이상의 배식, 초록색 혹은 노랑색 채소는 날마다 샐러드 형태로 배식 (이오지마로 항해하는 배 안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수병들) (미해군 바지선 Quartz에서 아이스크림 배식을 받는 수병들) (해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인 조세프 클린턴 클리프턴 대령이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퍼먹는 모습) 아이스크림은 미해군의 거의 모든 함정, 심지어 잠수함에도 제조기가 달렸을정도록 아이스크림 보급에 열정적이였음, 육군만해도 3척의 아이스크림(그리고 냉동식품)보관용 바지선을 건조해서 운영했을 정도로 미군 전체가 아이스크림에 열광함, 미해군은 구축함 선원들한테 추락한 조종사 1명마다 일정량의 아이스크림 보급을 약속함, USS Hancock의 선원이던 Daniel W. Klohs가 2005년 사망하기전 쓴 회고록에 따르면, 조종사 1명당 25갤런의 아이스크림과 함장과 부장한테는 2병의 위스키를 보급하는게 맞지만 아이스크림은 10갤런씩 포장되어 왔기 때문에 총 30갤런을 보급받음, 또다른 선원인 Tom Kocurko의 회고에 따르면 조종사 1명당 10갤런의 아이스크림을 배급받았기 때문에 그 당시 농담으로 하나 격추시키진 말이 나왔다고함, 다만 조종사들은 자신이 고작 아이스크림에 비교당하는게 좀 아나꼬왔음, 미해군 조종사인 중령 Norman P. Stark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해군 구축함인 USS Yarnall에 구조당했을땐 수병들이 잃어버린 형제라도 찾은듯 반겨줬다고함, 그 당시엔 몰랐지만 조종사 1명당 10갤런 아이스크림의 가치가 있다는걸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함, 항모로 복귀하고 USS Yarnall의 수병들이 떠나면서 던진 말에 비로소 자기가 10갤런의 아이스크림의 가치를 가진걸 알고 불쾌한 표정을 지음, 또다른 유명한 이야기로 1942년 렉싱턴이 침몰하던중 수병들은 조리실 냉장고로 뛰어가 빠루를 가지고 냉장고를 따기 시작함, 그렇게 따인 냉장고에선 수병들이 주변에 잡히던 모든것을 동원해서 아이스크림을 주워 담음, 심지어 땀범벅인 헬멧에다가 담아서 깨끗이 핣아먹은 수병도 있었다고 전해짐, 미해군 공식 페북 계정 피셜론 미해군 수병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스크림 보급선에서 2명의 장교가 끼어들자 뒤에서 뒷통수에 쌍욕을 갈김, 쌍욕을 갈긴건 다름아닌 해군 대장 윌리엄 할시였음, 2명의 장교의 행방은 지금까지 전해지진 소식이 없음, USS Quartz는 미해군이 바지선을 개조해서 아이스크림 보급함으로 만든 예시임, 2000갤런(7,570리터)의 아이스크림을 수용하고 7분마다 10갤런(37리터)의 아이스크림을 생산했음 (2차대전때 현역이던 USS Quartz와 현재 브리티쉬 컬럼비아에 방치된 USS Quartz) 1945년 추수감사절 당시에 미해군이 소모한 음식의 수량은 약 7,400명이 600마리의 6.8kg짜리 칠면조를 먹어치우고 또한 같이 먹어치운 음식의 수량은 다음과 같음, 1,300kg의 컬리플라워, 680kg의 방울다다기양배추, 907kg의 감자, 90kg의 크랜베리, 450kg의 견과류, 1,580kg의 사탕류, 1,136kg의 아이스크림, 378kg의 홀스레디시 소스, 1,000개의 호박파이, 12,000개의 롤케이크, 378kg의 피클, 그리고 전원한테 공짜 담배 1갑이 배급됨. 군사갤러리 ravdozka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