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베트남 패망의 배경과 원인
1. 남베트남 패망의 간단한 배경 남베트남(Republic of Vietnam)은 서기 1955년에 세워진 국가이다. 건국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19세기 이후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략했는데 이후,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고 프랑스 측 정부 관계자들을 억류하였음. 그러다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 북쪽은 중화민국군이 남쪽은 영국군이 담당하기로 하였음. 하지만, 주둔하는 데 까지 시간이 걸렸고 이 틈을 이용해 호치민은 베트남 북부를 장악하고 북베트남(베트민)을 선포하였고 당시 중화민국은 내부 사정으로 인해 베트남에 개입하지 않고 북베트남의 통치를 인정하였음. 그 후에 프랑스는 영국으로부터 남베트남 행정권을 위임 받게 되었는데 문제는 식민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는 남베트남에 괴뢰국을 세우고 베트남 전부를 손에 넣기 위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First Indochina War)을 일으켰음. 그러나, 1954년 디엔비엔푸(Battle of Dien Bien Phu)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크게 패하게 되면서 프랑스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 미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하였음. 결국,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담이 열렸고 제네바 합의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으로 분단되게 되었다. 그렇게 베트남에는 2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분단이 된 이후 1년만에(1955년) 양국간에 교전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러다 1964년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 발생하면서 미국과 동맹국들이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결정함에 따라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미국의 피로와 휴유증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당시 미국에 세계경제 전략이었던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종결되었을 정도였음. 결국, 미국은 1973년에 파리 조약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되었다. 그 후, 북베트남이 조약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1975년 남베트남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2.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멸망한 이유 남베트남의 멸망 원인에는 국외 요인도 크게 작용했지만 일단 국내적인 요인들을 주로 다루어보겠음. - 국민들에게 신뢰받지 못한 정부와 지도층의 부패 당시, 남베트남 사람들은 비교적 참신했던 젊은 지도자 응오딘지엠(NgoDinhDiem)이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얻어 남베트남을 이끌게 되면서 남베트남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듯했음. 하지만, 지엠 정부는 ‘전략촌(Strategic Hamlet)’ 건설 등 현실에 부합되지 못한 정책들을 무리하게 밀어 붙이면서 점점 족벌(族閥)에 의한 독재정치로 기울게 되었음. 여기에,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부패가 만연되면서 정부의 발목을 잡았으며 정부와 민심을 이간질시켰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가 높아지자,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하였고 오히려 정부에 대한 불만은 더 심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였음. 남베트남 정부가 민심을 잃게 되면서 베트콩의 지원세력이 늘어나게 되었고 집권 초기 그를 도왔던 세력들이 반대세력으로 돌변하게 되었음. 결국, 지엠 정부는 1963년 11월 쿠테타로 무너지게 되었지만, 국가는 계속 혼란에 빠져있었음. 정권은 수시로 바뀌었고 여기에 정부 정책도 일관성 없이 계속 변경되었음. 기득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권유지에 급급했고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부패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군인들은 나라의 안보를 미군 등 연합군에게 맡긴 채 전선에서 싸우는 것보다 사이공에서 이루어지는 정권의 향방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음. 이러한 실책들로 인해, 남베트남의 정부의 역할을 유명무실해졌고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 국민들의 잘못된 민족주의 의식과 집단 이기주의 남베트남 정부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면서 혼란을 거듭하게 되자 국민들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민족주의 의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음. 당시, 남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에 지원을 받아 우리를 학대하는 꼭두각시 정부라는 발상이 퍼지게 되었음. 그 결과 정부를 상대로 무장투쟁에 나선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활동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베트콩에 가담하는 주민들이 점차 늘어 나기 시작했음.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 안주하고 있던 대부분의 주민들도 혼란을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 챙기기에 나섰음. 학생은 학생대로,종교인은 종교인대로,기업가는 기업가대로, 노동자와 농부 등 누구 할 것 없이 각각 집단적인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이득을 얻으려 하였음. 이와 같이 각계각층의 욕구가 충돌하면서 집단간, 계층간, 지역간에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결과적으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republicandemocracy)가 자리를 잡기 도 전에 다원주의적 민주주의(pluraldemocracy)현상의 만연으로 공론(publicjudgment)과 여론(publicopinion)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음. 그 과정에서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음. 그리고 정권과 체제에 대해 관심조차 없던 일반 국민들까지 북베트남과 호찌민을 선망하게 되면서 점차 베트콩을 지원하는 NLF의 배후세력으로 변해갔음.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남베트남 사람들조차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호찌민이다.”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주월 한국군사령부에서 사무보조원으로 근무하는 남베트남 여성도 그녀의 부모가 사이공 정부의 고위직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찌민은 베트남의 가장 훌륭한 민족지도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였음. 호찌민이 1969년 9월 2일, 79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는 많은 남베트남 주민들이 공개적으로 검은 리본을 달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남베트남 주민들의 잘못된 민족주의와 호찌민에 대한 흠모는 그들이 지향하는체제가 공산주의인지,자본주의인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남베트남 사람들은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실망의 대안으로 북베트남과 NLF를 지지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민족주의는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켜주지 못한 정부에 대한 반발로부터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음. 따라서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북베트남과 NLF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공산주의 세력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세력이었음.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확고한 신념도 없었으며 또한 나라를 지킬 필요조차도 없었음. - 군대의 무사 안일주의와 부패 197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된 후 미군을 비롯한 연합국 군대가 철수하자, 당시 남베트남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넘겨준 최신 장비와 함께 100만 명이 넘는 지상군, 세계 4위를 자랑하는 공군력 등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음. 따라서 낡은 재래식 장비와 빈약한 보급체계를 가지고 있는 북베트남과 NLF의 군사력은 남베트남과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75년 1월,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남베트남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불과 4개월 만에 최후를 맞이했음.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큰 요인은 내 나라를 내가 스스로 지킨다는 국민 안보의식의 부재와 무사안일에 빠진 군대를 들 수있다. 당시 남부지역에서 활동했던 베트콩들은 강제로 동원된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여성도 20만여 명 정도가 포함되어 있었다.북베트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00만여명 이상의 여성이 참전했으며 그 중 6만여 명은 호찌민 통로의 험준한 전장에서 남성들과 동일하게 전투를 수행했다. 반면 남부의 젊은이들은 풍족한 물질문화에 익숙해져 있어 생활수준이 높을수록 어려운 일에 종사하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많은 고위층 자녀들은 유학을 이유로 외국에 거주하면서 병역을 연기 또는 면제받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경제력이 뒷받침된다면 전투지역에 가지 않는 방법은 많았다. 일정액의 뇌물로 장기휴가를 얻어 사이공에서 빈둥거리는 군인이 부지기수였다. 이들을 ‘유령군인’이라고 불렀다.또한,장군 등 고위층의 사병(私兵)으로 그의 기업체에서 직원 또는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일명 ‘꽃군인’도 있었다. 이들 유령군인과 꽃군인을 모두 합할 경우 10만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58만여 명이었던 정규군의 20%에 육박하는 숫자인 것이다. 정상적으로 군에 근무하고 있던 군인들의 대적관도 엉망이었다.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산악과 늪지대에 은거하면서,외부의 보급이 없더라도 생존은 물론 장기간에 걸친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남베트남 군대는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자신들의 여건에 부합된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지 못하고 미군의 전투방식에 젖어 있었다. 가난한 나라가 부자(富者)나라의 전쟁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임. 고도의 정밀무기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과 함께 운영유지를 위한 기술과 보급 등 정밀한 지원체제가 필수적이었음. 그러나 미군이 없는 남베트남은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음. 이로 인해 미군이 넘겨준 정밀무기들은 얼마되지 않아 고철이 되고 말았음. 현실이 그랬음에도 남베트남 군대는 자신들에게 부합된 전략과 전술 개발은 도외시한 채 미군이 넘겨준 장비에만 의존했다. 그 결과 수준 높은 무기체계와 상대방을 능가하는 대규모 군대를 보유했던 남베트남 군대였지만 빈약한 재래식 무기 및 보급체계를 가진 북베트남군과 NLF의 상대가 될 수 없었음. 즉 결론을 말하자면, 남베트남은 부정부패로 인한 민심 이반 + 집단 이기주의와 잘못된 민족주의로 인한 혼란 + 특히 심각한 군사 부패로 인해 멸망했다고 보는 편이 바람직함. 물론, 남베트남 패망에 공산 간첩의 역할도 매우 크지만, 간첩들이 활개치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앞서 말한 문제들이 만들어준 거임. 간첩 이야기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일부러 안 넣었음. 출산율갤러리 ㅇㅇ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