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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르세라핌 김채원 왜 인기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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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명작] 고양이의 속마음, 그 수천가지 의미 -6-
5편은 여기로 👇👇 담장위에서 왔다갔다하는 녀석들을 많이 봤어요. 시끄러운 소리를 내거나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구요. (다른집냥이들과마찰) (왼쪽구석에애기잔다ㅎ) 고양이는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서로 의사소통 할 일이 잦아졌지. 지금까지 고양이에 대해 알아봤으니 이들이 무슨말을 하려는지 맞춰볼까? 혹시 도움을 요청하는건지?! 연구팀이 처음부터 지켜봐온 고양이가있어. 이녀석은 도시생활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고있대 학자들은 이고영의 GPS 추적결과를 보고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 굉장히 활동적이긴 한데 범위는 아주 제한적이네요 (브래드쇼) 고양이는 보통 낮이든 밤이든 저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이지는 않죠 (제한적인 영역안에서의 활동이 많다는 뜻) 계속 (매우 자주 집을) 나왔다 들어갔다하는 걸보면 뭔가 신경쓰이는 게 있나봅니다. (얘 이야기임ㅎ) 밍키는 생후 18개월된 회색 범무늬 고양이로 평생을 이곳 하노버에서 살아왔대. 계속 냄새를 맡고, 자세를 낮춰 주위를 살피는 등의 행동을 보면 뭔가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이 행동을 잘 연구하면 밍키를 도울 수 있을지! (이가족이 집사들) 고양이문(현관문밑에뚫어놓은동물들전용문)으로 쉬지않고 들락날락해요 이렇게 살금살금 돌아다니면서요. 주위를 둘러보다가 멈칫하기도 하고 아무튼 긴장돼보여요. 조금만 느긋해졌으면 좋겠는데 늘 마음이 편치 않은것같아요. 아마 집을 지키려고 하는것같은데.. 그런거니..? 학자들은 우선 밍키를 불안하게 하는게 무엇인지 알아보기위해 CCTV를 설치했어 영상에는 이 집 정원을 침범한 낯선 고양이들이 포착됐어. 연구팀은 밍키를 괴롭히는 녀석들 중 한마리의 신원을 확보했어 요 '티거'라는 아이. (얘도 집사있는 집냥) 밍키를 힘들게하는 게 우리 티거일거란 말은 들었습니다. (남집사) 고양이문 맞은편에서 구멍으로 밍키를 뚫어져라 쳐다본다던데요? 정말그랬니..? 니가 그런거 아니지? ㅎ 에이~ 아닐거에요 증거를 대보세요. ㅋㅋㅋ (글로 쓰니까 왜케 얍실(?)해보이지;;) 이 두고양이는 하나의 영역을 두고 경쟁하는 중입니다. (이나라, 이마을 집냥이들은 외출이 자유롭다보니 집만 본인들 영역이 아니라 본인들 영역안에 집이 있는 개념ㅇㅇ 그렇다보니 요 둘처럼 영역이 겹치는 일이 생김) 하지만 밍키의 몸짓을 보면 티거보다 훨씬더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걸 알 수 있어. (얘꼬리 원래이럼. 품종따로 없고 믹스임) 연구팀은 티거의 목에 카메라를 달아서 평소 행동을 관찰해보기로 했어. ~새벽~ 아직 완전히 날밝기전 (적외선카메라라 어두워져도 찍힘) 새벽녘에 티거가 뒷마당으로 이어진 담장위를 거닐고 있어. (이카메라는 밍키관찰용. 티거아님) 티거가 움직일때 밍키도 움직임. 아무것도 모른채 티거 반대쪽에서 티거쪽으로 걸어감 그러다 마주침. 밍키가 티거를 알아보고 옆집마당으로 뛰어내리는데 티거가 쫓아감. 밍키뒤를 바짝쫓아감. 계속 감. 결국 막다른곳에 몰린 밍키는 하악질함 (둘 서열중 밍키쪽이 확실히 낮아보임) 경계중. 밍키가 어딜가든 계속 따라감 지금 본 영역다툼에서 일단 주도권을 쥐고있는 건 티거쪽. 날이 밝고 사라 앨리스 박사는 동물행동전문가이자 수의사인 레이첼 케이시박사와 함께 밍키와 티거의 주인을 찾아감. (왼쪽 빡빡아저씨가 티거보호자 오른쪽 분들이 밍키보호자)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해주려 옴! 빡빡아저씨가(장난으로) 요구한 증거물도 가지고!ㅋㅋ 요구안했어도 설명하기 위해선 필요했을듯. 아시다시피 그동안 촬영을 계속해왔구요 그걸 지금 보여드릴게요. 아침에 찍힌 티거의 영상이에요 (오른쪽) 고양이는 뛸때 참 귀엽다니까 ㅎㅎ (오른쪽) 저거 우리집 창문 맞지..? 지금 보니까 맞네요 티거가 밍키네 집 창문으로 뛰어들어감. 영역이 겹친뿐아니라 밍키네집 쳐들어감ㅋㅋㅋ 초반에 기억해? 이마을은 창문이랑 그런거 열어놔 냥이들이 들락날락하니까. 근데 그 창문으로 남의집 아이가 들어옴ㅋㅋ (빡빡) (티거가 밍키한테) 나와서 한판 붙어보자는 것 같네요 ㅎ 어! 저기 내방!! ㅎ 티거가 이집 딸랑구 방 창문으로 드감ㅋㅋㅋ 티거가 우리집안에도 들어왔었네!! ㅎㅎ (박사) 37분동안이나요ㅎㅎ (37분동안밍키네집휘젓고다님ㅋㅋ) (빡빡) 정말요? ㅋㅋㅋㅋㅋ ~머쓱~ (오른쪽집사) 농담이죠~? ㅋㅋㅋㅋㅋ 어 나온다ㅋㅋㅋㅋㅋ (오른쪽집사) 세상에.. 37분동안 우리집안에 있었다구요?ㅋㅋㅋㅋㅋㄱ 사람들 다 빵터지고 아저씨는 그만본다고 눈가림ㅋㅋㅋㅋㅋㅋ 대리장피해져서ㅋㅋㅋ 근데 또 궁금은 해서 금방 손내리고 이어서 말해달라함ㅋㅋㅋㅋㅋ 티거 아빠니께ㅋㅋㅋ 아까 찍힌거. 티거가 밍키따라가서 하악질한것도 보여줌 (티거아빠) 티거가 못된짓 많이 했네... 어쩌면 많은 집이 다닥다닥붙은 골목에선 흔할수도 있는일. 분명한건 고양이들마다 상황대처방식이 크게 다르다는것. 이동네에는 고양이가 아주 많아요. 다 저마다 자신들의 영역을 가지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어하죠. 하지만 주변에 고양이가 많을 수록 그러기가 어렵습니다. 이 두고양이의 차이는 이거죠. 티거는 다른 고양이와 자주 마주쳐도 덜 불안해하고 밍키는 다른고양이를 만나는걸 굉장히 힘들어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고양이의 의사소통에 대해 더 많은 걸 알 수 있었어. 밍키에겐 티거같은 다른고양이를 집에서 쫓아내는 일이 쉽지않은거야. (아까 그 딸랑구 방 창문) 연구진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곤 밍키만의 공간을 따로 만들어주는 일! 예컨데 정원쪽에 이 나무로된 통로를 설치해서 위기때 도망칠 수 있게 해주고 다른 고양이들은 밍키네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두는것. 반면 티거는 도시생활에 잘 대처하고 있는듯해. (뒷발 귀여워서 캡초ㅑ)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항상 티거의 한쪽면만 보다가 평소엔 뭘하고다니는지 볼 수 있었으니까요. 밖에서는 완전히 다르네요. (밖에선)마음 내키는대로 하고 가고싶은대로 가고 경계도 무시하구요.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티거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ㅎㅎ 그럼 이둘의 차이는 뭘까? 티거는 어떤생각을 가지고 살기에 밍키보다 훨씬 스트레스를 덜 받는걸까? 케이시 박사는 고양이들의 심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실험을 준비했어. 지금 하려는건 '인지적 편향'에 대한 실험입니다 고양이의 생각을 읽고 고양이의 느낌이나 기분, 감정상태를 알아보는데 도움이 될겁니다. 출처 담편이 진짜 막편 !! 담편에서 만나요 ~
일본 최초의 흑인 대학 총장
우스비 사코(佐古 ウスビ) 교토세이카대학 학장(총장) (사진 중앙) 1966년 말리 공화국 수도 바마코에서 태어난 사코는 30명 정도의 친척과 같이 살 정도로 (말리는 이게 보통이라고함) 평범한 수준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교육열 덕에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함. 그런데 학교를 다니면서 성적이 계속 떨어지니 (말리는 성적이 나쁘면 유급시킴. 2번 유급하면 퇴학) 이모가 학교 선생이 사코에게 저주를 걸고 있어서 성적이 떨어지는 거라며 주술사한테 굿을 받기도 했지만 성적은 계속 떨어져서 배고파야 정신차린다는 아빠의 결정에 시골 친척집에 보내서 거기서 6년간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님. (실제 말리 시골) 6년간 지옥같은 시골생활 속에서 탈출하고 싶던 사코는 ㅈ빠지게 공부한 결과 (말리의 명문고등학교 Lycée Technique de Bamako정문) 수도 바마코에 있는 명문고등학교 입학에 성공해서 본가에 돌아올 수 있었음. 고등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 임용이 보장된 국비유학생으로 해외 유학을 할 수 있었는데 냉전 시기였고 말리가 소련, 중국이랑 친하다보니 중국 난징에 위치한 둥난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하게 됨. 여기서도 열심히 공부한 사코는(성적이 떨어지면 강제 귀국) 학교생활을 잘 이어나가고 있었으나 유학시기가 하필 천안문 사태(1989년) 직전이라 학생운동이 활발한 시기였고 중국인 학생이 아프리카 학생한테 맞았다는 이유로 (실상은 억압받던 중국인에 비해 자유롭게 생활하는 아프리카인에 대한 질투)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있던 아프리카인 기숙사에 중국인 300명이 쳐들어와서 폭동을 일으키고 사코는 대사관으로 도망침. 이런 상황이니 몇명은 본국으로 귀국했으나 사코는 여기서 포기하면 답없다는 생각에 계속 중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고 90년에 둥난(동남)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함. (대학원 시절 교토 카와유카의 술집) 그런데 본국 말리는 경제상황이 나빠져서 공무원 채용이 연기되고 중국에서 계속 살자니 항상 검열만 하고 학문에도 제약을 두니 여기선 경력을 쌓기 어렵다고 판단한 사코는 일본 교토대학(그 명문대 맞음)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함. 그 과정에서 1년만에 일본어 실력을 키워서 대학원에 바로 입학함. 그후 1999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석박사를 획득한 사코는 2001년 교토세이카대학에서 강사로 채용되었고 2013년엔 학부장으로 취임했고 18년엔 총장으로 취임하게 됨.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결혼 후 2명의 아들도 얻고 본인 노력으로 일본 명문 미대 총장으로 취임한 샤코 ㄷㄷㄷ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남베트남 패망의 배경과 원인
1. 남베트남 패망의 간단한 배경 남베트남(Republic of Vietnam)은 서기 1955년에 세워진 국가이다. 건국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19세기 이후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략했는데 이후,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고 프랑스 측 정부 관계자들을 억류하였음. 그러다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 북쪽은 중화민국군이 남쪽은 영국군이 담당하기로 하였음. 하지만, 주둔하는 데 까지 시간이 걸렸고 이 틈을 이용해 호치민은 베트남 북부를 장악하고 북베트남(베트민)을 선포하였고 당시 중화민국은 내부 사정으로 인해 베트남에 개입하지 않고 북베트남의 통치를 인정하였음. 그 후에 프랑스는 영국으로부터 남베트남 행정권을 위임 받게 되었는데 문제는 식민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는 남베트남에 괴뢰국을 세우고 베트남 전부를 손에 넣기 위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First Indochina War)을 일으켰음. 그러나, 1954년 디엔비엔푸(Battle of Dien Bien Phu)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크게 패하게 되면서 프랑스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 미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하였음. 결국,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담이 열렸고 제네바 합의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으로 분단되게 되었다. 그렇게 베트남에는 2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분단이 된 이후 1년만에(1955년) 양국간에 교전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러다 1964년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 발생하면서 미국과 동맹국들이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결정함에 따라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미국의 피로와 휴유증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당시 미국에 세계경제 전략이었던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종결되었을 정도였음. 결국, 미국은 1973년에 파리 조약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되었다. 그 후, 북베트남이 조약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1975년 남베트남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2.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멸망한 이유 남베트남의 멸망 원인에는 국외 요인도 크게 작용했지만 일단 국내적인 요인들을 주로 다루어보겠음. - 국민들에게 신뢰받지 못한 정부와 지도층의 부패 당시, 남베트남 사람들은 비교적 참신했던 젊은 지도자 응오딘지엠(NgoDinhDiem)이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얻어 남베트남을 이끌게 되면서 남베트남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듯했음. 하지만, 지엠 정부는 ‘전략촌(Strategic Hamlet)’ 건설 등 현실에 부합되지 못한 정책들을 무리하게 밀어 붙이면서 점점 족벌(族閥)에 의한 독재정치로 기울게 되었음. 여기에,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부패가 만연되면서 정부의 발목을 잡았으며 정부와 민심을 이간질시켰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가 높아지자,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하였고 오히려 정부에 대한 불만은 더 심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였음. 남베트남 정부가 민심을 잃게 되면서 베트콩의 지원세력이 늘어나게 되었고 집권 초기 그를 도왔던 세력들이 반대세력으로 돌변하게 되었음. 결국, 지엠 정부는 1963년 11월 쿠테타로 무너지게 되었지만, 국가는 계속 혼란에 빠져있었음. 정권은 수시로 바뀌었고 여기에 정부 정책도 일관성 없이 계속 변경되었음. 기득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권유지에 급급했고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부패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군인들은 나라의 안보를 미군 등 연합군에게 맡긴 채 전선에서 싸우는 것보다 사이공에서 이루어지는 정권의 향방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음. 이러한 실책들로 인해, 남베트남의 정부의 역할을 유명무실해졌고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 국민들의 잘못된 민족주의 의식과 집단 이기주의 남베트남 정부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면서 혼란을 거듭하게 되자 국민들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민족주의 의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음. 당시, 남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에 지원을 받아 우리를 학대하는 꼭두각시 정부라는 발상이 퍼지게 되었음. 그 결과 정부를 상대로 무장투쟁에 나선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활동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베트콩에 가담하는 주민들이 점차 늘어 나기 시작했음.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 안주하고 있던 대부분의 주민들도 혼란을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 챙기기에 나섰음. 학생은 학생대로,종교인은 종교인대로,기업가는 기업가대로, 노동자와 농부 등 누구 할 것 없이 각각 집단적인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이득을 얻으려 하였음. 이와 같이 각계각층의 욕구가 충돌하면서 집단간, 계층간, 지역간에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결과적으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republicandemocracy)가 자리를 잡기 도 전에 다원주의적 민주주의(pluraldemocracy)현상의 만연으로 공론(publicjudgment)과 여론(publicopinion)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음. 그 과정에서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음. 그리고 정권과 체제에 대해 관심조차 없던 일반 국민들까지 북베트남과 호찌민을 선망하게 되면서 점차 베트콩을 지원하는 NLF의 배후세력으로 변해갔음.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남베트남 사람들조차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호찌민이다.”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주월 한국군사령부에서 사무보조원으로 근무하는 남베트남 여성도 그녀의 부모가 사이공 정부의 고위직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찌민은 베트남의 가장 훌륭한 민족지도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였음. 호찌민이 1969년 9월 2일, 79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는 많은 남베트남 주민들이 공개적으로 검은 리본을 달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남베트남 주민들의 잘못된 민족주의와 호찌민에 대한 흠모는 그들이 지향하는체제가 공산주의인지,자본주의인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남베트남 사람들은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실망의 대안으로 북베트남과 NLF를 지지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민족주의는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켜주지 못한 정부에 대한 반발로부터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음. 따라서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북베트남과 NLF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공산주의 세력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세력이었음.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확고한 신념도 없었으며 또한 나라를 지킬 필요조차도 없었음. - 군대의 무사 안일주의와 부패 197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된 후 미군을 비롯한 연합국 군대가 철수하자, 당시 남베트남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넘겨준 최신 장비와 함께 100만 명이 넘는 지상군, 세계 4위를 자랑하는 공군력 등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음. 따라서 낡은 재래식 장비와 빈약한 보급체계를 가지고 있는 북베트남과 NLF의 군사력은 남베트남과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75년 1월,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남베트남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불과 4개월 만에 최후를 맞이했음.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큰 요인은 내 나라를 내가 스스로 지킨다는 국민 안보의식의 부재와 무사안일에 빠진 군대를 들 수있다. 당시 남부지역에서 활동했던 베트콩들은 강제로 동원된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여성도 20만여 명 정도가 포함되어 있었다.북베트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00만여명 이상의 여성이 참전했으며 그 중 6만여 명은 호찌민 통로의 험준한 전장에서 남성들과 동일하게 전투를 수행했다. 반면 남부의 젊은이들은 풍족한 물질문화에 익숙해져 있어 생활수준이 높을수록 어려운 일에 종사하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많은 고위층 자녀들은 유학을 이유로 외국에 거주하면서 병역을 연기 또는 면제받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경제력이 뒷받침된다면 전투지역에 가지 않는 방법은 많았다. 일정액의 뇌물로 장기휴가를 얻어 사이공에서 빈둥거리는 군인이 부지기수였다. 이들을 ‘유령군인’이라고 불렀다.또한,장군 등 고위층의 사병(私兵)으로 그의 기업체에서 직원 또는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일명 ‘꽃군인’도 있었다. 이들 유령군인과 꽃군인을 모두 합할 경우 10만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58만여 명이었던 정규군의 20%에 육박하는 숫자인 것이다. 정상적으로 군에 근무하고 있던 군인들의 대적관도 엉망이었다.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산악과 늪지대에 은거하면서,외부의 보급이 없더라도 생존은 물론 장기간에 걸친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남베트남 군대는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자신들의 여건에 부합된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지 못하고 미군의 전투방식에 젖어 있었다. 가난한 나라가 부자(富者)나라의 전쟁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임. 고도의 정밀무기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과 함께 운영유지를 위한 기술과 보급 등 정밀한 지원체제가 필수적이었음. 그러나 미군이 없는 남베트남은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음. 이로 인해 미군이 넘겨준 정밀무기들은 얼마되지 않아 고철이 되고 말았음. 현실이 그랬음에도 남베트남 군대는 자신들에게 부합된 전략과 전술 개발은 도외시한 채 미군이 넘겨준 장비에만 의존했다. 그 결과 수준 높은 무기체계와 상대방을 능가하는 대규모 군대를 보유했던 남베트남 군대였지만 빈약한 재래식 무기 및 보급체계를 가진 북베트남군과 NLF의 상대가 될 수 없었음. 즉 결론을 말하자면, 남베트남은 부정부패로 인한 민심 이반 + 집단 이기주의와 잘못된 민족주의로 인한 혼란 + 특히 심각한 군사 부패로 인해 멸망했다고 보는 편이 바람직함. 물론, 남베트남 패망에 공산 간첩의 역할도 매우 크지만, 간첩들이 활개치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앞서 말한 문제들이 만들어준 거임. 간첩 이야기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일부러 안 넣었음. 출산율갤러리 ㅇㅇ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