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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야기] 한글의 아름다움을 배우다! 세종이야기!!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 세종대왕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한글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전시가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역사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세종이야기 전시~ 지금 만나보세요~ http://blog.naver.com/otastestory/220124724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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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만세~
대한민국만세
한글을 사랑합시닷
이번 한글날엔 꼭 보러 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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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스터들과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울에서의 세 번째 집은 이 근처에 있었어요. 손기정 체육공원에서도 가깝고, 아현시장에서도 멀지 않고, 서울역도 지척인, 주소지에 이름 붙여진 길 이름만 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만 같은 곳이었죠. 그 동네에 박물관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개관하면 가 봐야지 생각만 한 것이 일년여. 얼마 전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네요. 어쩔 수 없는 집순이, 헤어날 수 없는 게으름... 후. 오랜만에 찾은 동네가 어찌 그리 낯선지, 더구나 지척인데도 자주 가지 않던 이 길은 더 생경하더군요. 박물관 가는 길의 도심 속 기찻길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 집행지였어요. 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 거리 광장이었기에 본보기로 사형 집행을 하기 딱인 곳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곳에 들어서게 된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소문 밖 네거리 역사 유적지에 담긴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잘 구현해 낸 데다가 꼭 신자들이 아니어도 누구나 와서 쉬어갈 수 있게끔 대중적으로 잘 구성된 공간이기도 해요. 전시관 내부는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로 나뉘어져 있고, 상설 전시에서는 조선 후기의 사상사를 옅볼 수 있어요. 상설 전시관은 이렇게, 종교적인 색체를 현대식으로 잘 담아낸 디자인을 택했고요. 뭔가 성스러우면서 밀레니엄 st. 이 곳에는 역사적 의미가 깃든 사료들 뿐 아니라 이런 조각 작품, 설치 작품들도 곳곳에 전시되어 있어요. 동선을 따르다 보면 위안을 주는 공간, 순교자들의 무덤인 콘솔레이션 홀을 만나게 되는데요. 이 곳에서는 미디어아트로 둘러싸인 위안을 만날 수 있어요. 계절을 담아낸 그림이 흐르고, 레퀴엠이 흘러 나오죠. 홀의 정 가운데는 순교하신 성인 다섯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마주오는 빛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하늘이 뻥 뚫린 공간을 만나게 되는데요. 이 곳이 바로 힙스터들의 성지, 인스타에 올릴 인생샷을 찍기 위해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찾는 하늘 광장입니다. 야외 전시가 펼쳐진 옆으로 삼각대를 든 커플들이, 모델처럼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옷 매무새를 다듬고 있는데요. 물론 이 사진은 작품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을 피해 저도 힙스터들의 배경이 되어 준 벽돌벽을 가득 담아 봤습니다. 거 사진 찍기 참 좋은 날씨로구먼. 하늘광장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두면 하늘길이라는 미디어 아트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늘길의 끝에는 자연광을 받고 있는 '발아'라는 작품이 있고요. 돌아가는 길은 다른 계단을 이용해 봅니다. 내부에 미사를 드리는 곳도 마련이 되어 있어서 신자들도 많이 찾아 오시더라고요. 젊은이들은 하늘광장에서 줄 서서 인생샷을 남기고, 신자들은 미사를 드리거나 상설 전시관에서 역사를 나누고 계시는 모습들이 대조돼서 흥미로웠어요. 공원도 잘 조성되어 있으니 날 좋은 날 방문해 보시길 :)
인간미가 느껴지는 조선왕들의 일화 (꿀잼 시간순삭)
왕이라는게 진짜 준니 하드코어하구나.. 를 느낀 일화들 잼나는 것도 있고 안타깝고 씅나는 내용도 있고 재밌어서 퍼옴 ㅇㅇ 어진을 찾을 수 없는 왕들은 걍 뭐 대충,,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를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4.태종은 운명론자가 아닌 현실론자였는데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어느날은 우연히 하급관리 두명의 토론을 듣게 되었다. 한명은 부귀영화는 모두 임금에게서 나오는것이라고 하였고 도 한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현실론자였던 태종은 부귀영화가 임금에게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한품계를 올려주려 하려고 그 관리에게 '지금 가는 아무개에게 한 품계를 올려주도록 하시오'라는 종이를 세종에게 전해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관리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운명론자인 관리에게 대신 종이를 전해주라 하였고 결국은 그 관리가 진급을 하였다. 5. 조선왕들중 가장 많은 자식을 가진 왕으로 12남 17녀, 29명의 자식을 가졌다.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 준 얘기도 있다. (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 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 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 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 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을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양녕대군과 세종은 원래 우애가 깊지 않았다. 태종은 양녕과 효령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유독 충녕, 즉 세종을 편애 하였다. 게다가 세종은 알려진것과 같이 머리가 아주 좋았고 공부를 좋아했다. 태종이 충녕에게 나중에 '너는 할일이 없으니 놀아라'라고 하며 글씨,그림, 비파등을 마련해준 때가 있었다. 그 때 양녕은 충녕에게 비파를 배우며 서로 친해졌고 다른 면에서 보면 자신의 경쟁자였던 충녕이 공부를 포기 했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다. 그 후로는 양녕대군도 공부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비파, 글씨 등에 관심이 있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다시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양녕에게 많은 충고를 하였다. 양녕은 열등감으로 인해 방황하였고 다시 비행에 빠져들게 되어,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자리는 세종이 차지하게 됬다. 8.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세조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 라고 시키자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 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 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3. 신숙주가 영의정었을 때 구치관이라는 사람이 좌의정이 됐다. 이때 세조가 신숙주하고 구치관을 불러서 "내 오늘 경들에게 질문을 할 테니 대답을 잘 못하면 벌을 줄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신 정승!"하고 부르니까 신숙주가 대답했는데 세조가 "나는 새로 된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벌주를 먹였다. 그리고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니 그리고는 "나는 옛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구치관한테도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 다시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이번에는 신숙주가 대답했다. 근데 이번에는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을 잘 못하는구료" 하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서 또 "신 정승!"하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는데 구치관한테도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은 잘못 대답하였소" 하고 벌주를 먹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신 정승! 구 정승!" 하고 부르니까 둘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을 안하는건 예의가 아니라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고 한다. 성종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 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 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을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 보너스 연산군에 대한 잘못된 사실들 연산군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하고 폭군의 모습을 다소 보인점은 사실이지만, 몇가지 왜곡된 사실들이 있다. 1.연산군은 궁궐 담장 아래 백척 내에 있는 민가들을 철거하여 쫓아냈다. - 하지만 이것은 원래 불법주택들이였다. 선왕, 후궁들의 모습이 민간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법도에 의한 것들이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오히려 봄까지 기다려주고 주택의 등급을 나눠 무명을 보상으로 주고 대토 와 거주지까지 마련해 주었다 2.궁을 짓기 위해 열한 고을의 백성들을 내쫓았다 - 백성들을 내쫓은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는 500여호에 불과했고 열한고을은 사관이 의도적으로 과장해서 쓴것이다. 또 지나가는 자는 죽여서 시신을 구경시키는 형을 내린다고 했으나 무덤이 있는 자들에게 명절 출입을 허가했으며 불법주택에도 보상을 해준 연산군이 보상을 안해줬을 가능성은 적다. 게다가 궁은 큰집 50칸으로 몇몇 사대부들의 99칸 집들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3.연산군은 음란했다. -연산군이 비구니를 간음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기생의 출입도 소문이 두려워 꺼렸던 인물인데 늙은 비구니를 몽둥이로 쫓고 젊은 비구니들을 간음했다는것은 말이 맞이 않는다. -연산군이 여성 음악인들을 혼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그들을 예술가들였을뿐이며 오히려 여성 음악인들은 사대부들에겐 첩을 들이는 통로였다. 사대부들은 연산군에게 연산군이 남성음악인들만 잔치때 내려주자 불만을 갖고 여성음악인들 을 내려달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좋은 왕으로 묘사되는 성종은 16남 21녀를 가졌으나 그의 아들 연산군은 4남3녀만을 두었다. - 연산군이 백모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죽자 임신을하고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를 추측해보면 그 때는 이미 쉰세살에서 쉰다섯으로 당시에 그나이엔 잉태가 불가능했다. 4.정치는 하지않고 사냥을 즐겼다 -연산군은 군사력 강화를 원했던 왕이다. 연산군 5년 여진족이 백성들을 사로잡자 연산군은 정벌에 나서려 했으나 그때마다 신하들은 반대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노비들이 부역에 나가는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냥은 군사력 강화를 위했던것이고 이것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된 결과가 임진왜란이다. 5.폐비 윤씨사건으로 폭군이 되었다 -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지만 연관인들의 처형은 신하들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였기도 하다. 그러나 훈구파를 무너트렸으면 사림을 불러들였어야 하는데 사림들조차 적으로 만들었으니 그를 보호할 사람은 없었다. 결국 연산군은 백성들에게는 폭군은 아니였지만 모든 사대부들에게는 적이였다. 그 결과 사관들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기록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믿어지고 있다.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5.조울증을 가지고 있었다. 명종에게는 손빈이라는 총애하는 환관이 있었는데, 그에게 집과 많은 값비싼것을 하사했으면 원하는것들은 모든지 들어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장령을 만났을때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명종으로부터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벼슬길도 막혔다. 명종의 조울증에 관환 일화는 이밖에도 많으며 아침에 파면했다가 저녁에 회복시켜주는 일들도 많았다.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리며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 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가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4.연산군을 폐위할 때, 중종을 보호하려 군사들이 오자 중종은 자기를 잡으러 온줄 알고 놀라서 자결 하려고 했다. 다행히도 그의 부인 신씨가 말려서 중종은 살아서 왕이 되었다. 5. 중종이 연산군 폐위후 왕위에 즉위했을때, 위에서 말한 신씨는 당연히 왕비책봉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반정때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을 죽였는데 보복이 올줄도 모른다는 이유로 조강지처였던 신씨를 중종은 '조강지처'라는 말 한마디의 저항을 딱 한번 하고는 출궁시켰다. 중종 11년 3월 28일,ㅡ 그는 고려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배운 부분은 최충헌 최충수가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하는 부분이였다. 최충수는 배필이 있던 태자에게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신종을 협박했다. 신종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태자비를 폐출시켰다. 이 부분을 읽으며 중종은 울먹거리며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종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선조 1.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이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2.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어오는 바람에 의주로 도망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명에 혼자 도망가기 위해 망명을 요청하였다. 명은 일국의 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거절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명에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시위를 했다. 결국 명은 그렇게 오고싶으면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북경까지 건너오라고 무안을 줬고 선조는 그제서야 망명을 포기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 지원군이 선조앞에 도착했고 이여송은 선조가 보는 앞에서 조선의 대신들의 싸대기를 후려치면서 어찌 나라를 이지경까지 만들었냐며 타박을 주었으나 선조는 아무말도 못하였다. 광해군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 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효종 1.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2.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그에 반대하는 유후성이 싸웠다. 이에 왕이 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고 말했는데 침이 혈락(血絡)을 범하여 과다출혈로 사망. 어의 가귀는 조사결과 수전증 있는걸로 밝혀졌다. 현종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숙종 1.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2.관우의 팬이였다고 한다. 인조 1.소현세자는 손톱밑이 시커멓게 변하고 얼굴은 검게 변하며 죽었다. 전혀 확인되지 않은 병이었다. 독살이라는 소문은 퍼져나갔지만 인조는 이것에 대한 조사를 피하려 했으며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2.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영조 1.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 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 면 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정조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규장각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 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끊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 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 6. 정조 20년, 이정용이라는 유생이 술에취해 늦은밤 궁궐 담장 아래에서 잠에 들었다 잡혀간적이 있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했던 정조는 요즘 유생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데 술을 좋아한다고 칭찬을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생들이 숙박하던 잡촌과 집춘영은 벽을 맞대고 있으니 이정용은 잡촌에서 잤던거라는 궤변을 펼쳐서 오히려 상까지 주어서 보냈다. 헌종 1. 이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참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고종 1. 고종 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3.당시 1887년대, 전신(전보총국)의 등장과 함께 최초 궁궐에 가설된 전화를 경험한 고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 이 생각에 고종은 상당한 고액의 전화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 홍릉에 설치한다. 그 곳은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씨)의 무덤. 전화의 설치가 끝난 직후 고종은 아침마다 그 곳으로 통화를 걸어 말을했다.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 죽은 민씨에게 안부를 전했고 매일아침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멀리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까지는 못 하는구나." 그럼에도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는 그 날에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디뮤지엄, 2020년 첫 전시 <SOUNDMUSEUM: 너의 감정과 기억> 개최
디뮤지엄 개관 이래 최대 규모로 선보인다. 디뮤지엄(D MUSEUM)이 듣는 경험과 보는 것을 통해 감성을 확장하는 새로운 장르의 공감각적 기획 전시 <SOUNDMUSEUM: 너의 감정과 기억>을 개최한다. 세계적인 작가 10팀의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관객주도형 퍼포먼스, 인터렉티브 라이트 아트, 비주얼 뮤직 등의 사운드&비주얼 아트 작품을 다양한 범주로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기존 두 층의 전시실과 함께 숨겨져 있던 특별한 공간까지 확장되어 디뮤지엄 개관 이래 최대 규모로 선보인다. 전시는 듣고 보는 경험을 소리, 빛, 공간 등 다양한 감각이 결합된 작품으로 선보이며, 관객이 눈, 귀, 손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온몸으로 느끼는 과정에서 각자에게 전달되는 신체와 감정적 자극을 실감할 수 있도록 다각적으로 기획됐다. 참여 작가로는 공간음향의 거장 로빈 미나드(Robin Minard)를 비롯해 유럽 사운드 퍼포먼스 아트를 대표하는 다비드 헬비히(David Helbich), 미니멀리즘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으로 널리 알려진 크리스틴 오펜하임(Kristin Oppenheim), 프랑스의 인터렉티브 디자인 아티스트 그룹 랩212(Lab212), 상황적 재현을 통해 국내외 미술계에서 주목 받고 있는 박보나(Bona Park), 노이즈 뮤직으로 세계 유수의 뮤직 아트 페스티벌에서 화제를 일으킨 도론 사제(Doron Sadja), 베를린 테크노의 전설이자 현대전자음악의 아이콘 로버트 헨케(Robert Henke), 세계 최대의 비주얼 음악 필름 아카이브 센터 CVM(Center for Visual Music), 4D 공간 사운드 시스템의 선구자 모놈(MONOM), 기술에 예술을 입혀 동화적 감성을 자극하는 디자인 스토리텔러 듀오 바스쿠와 클루그(Vasku & Klug)가 함께한다. 한편, 온몸으로 소리를 감각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갖게 될 전시 <SOUNDMUSEUM: 너의 감정과 기억>은 오는 2월 21일 개최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의 확산 예방을 위해서 심사숙고 끝에 3월 25일로 재조정됐다. 디뮤지엄 서울시 용산구 독서당로29길 5-6, Replace 한남 F동 더 자세한 내용은 <아이즈매거진> 링크에서
한국을 질투한 일본의 역대급 사기극
70만년 전 구석기인에게 주먹도끼란 최첨단 도구 주먹도끼는 하나를 가지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가능한데 1. 가죽 찢기 2. 사냥 3. 나무 가공 등등등등 오늘날로 따지면 맥가이버 칼과 같음 즉 당시 기술의 집합체가 주먹도끼라는 것 그런데 이 주먹도끼가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출토됨 동아시아에서는 발굴이 안됐었음 이것이 정설로 내려오고 있었음 여자친구가 우리나라 사람이였음 상미씨! 고고학자였던 그렉고웬은 데이트 중 발견한 돌을 보고 "원래 동아시아에는 주먹도끼가 없는데 내가 한반도에서 발견한 것 같다" 그래서 정밀검사를 요청함 그동안 쓰여졌던 논문도 다 바꿔야 하는 동아시아권의 역사를 뒤바꾸는 위대한 사건이 됨 그렉과 상미씨는 결혼했다고 함♥ 다니던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구석기 유물을 찾으러 다님 고고학 전공도 아님 이 시간은 시기했던게 음~~ 이쯤에서 구석기시대인들이 살았을 것 같다 해서 파보면 뭔가 쑥하고 나옴 그래서 80년대 초반에 일본의 구석기시대 역사를 널리알리게 됨 그러나 오랜 기간 땅에 묻혀있었으면 축축해야 하는데 냄새가 나~ 느낌이 있어~ 자기자랑하기 바빴음 그래서 기자는 이 이후에 국제 고고학 학술대회가 있었는데 겨우 참석한 학술제에서도 꿀먹은 벙어리로 있었다고 함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건 70만년전의 이야기가 국격과 이어지는 문제로 전쟁처럼 이어지고 있다는 것 관심좀 주세요.. 귀찮으실까봐 댓글 달아달라고 못하는데 클립과 하트 정말 좋아해요...♥
[펌]냉혹한 2차대전의 꽐라 썰
군필들은 군대만큼 알콜이 절실한 동네도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한 잔 빨고 선임 새끼 똥구멍에다 소주병을 쑤셔넣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닐테니까 군대란 집단이 만들어진 순간부터 군대와 술은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최초의 거대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 군대만 해도 병사들한테는 무조건 맥주와 유희왕 카드를 보급했을 정도다 생각해봐라 아무 생각없이 밭갈고 살던 농민들을 창칼 앞으로 닥돌시키려면 역시 술이랑 유희왕 카드만한게 없다 맥주 진탕 빨고 죽은자의 소생을 품에 넣고 있으면 닥돌하다 죽어도 왠지 묘지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 같지 않냐 물론 못 돌아옴 고대 이집트 때는 죽은 자의 소생은 금지카드였대 단순히 술을 전투전에 리더십 버프용으로만 먹은 건 아닌게, 옛날에는 물 들고 다니는 것만 해도 보통일이 아니라 금방 썩기 일쑤였다 그리고 물 자체도 개같이 맛이 없는데다 세균도 득실거림 그에 비하면 술은 썩지도 않고 맛도 그럭저럭 있는 편인데다가 옛날 술은 농도가 진해서 칼로리도 제법 됐다. 짬밥이 개같이 맛없으면 걍 술에다 섞어먹어도 되고 팔 잘렸는데 소독제 없으면 급하게 술 들이부어도 된다 여러 모로 물보단 술 들고 다니는게 군대 입장에선 편했던 것이다 그래서 깡패 국가 로마 땅개들은 '포스카'라 불리는 물 탄 포도주를 처마시면서 알딸딸한 상태에서 유럽을 정복했고 몽골은 말젖을 짜다가 술을 담가먹고 꽐라가 된 상태로 유럽놈들을 조지고 다녔던 것이다 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이 시절 군대는 군대에서 이등병 영창을 보내는게 아니라 술 배급을 끊어서 처벌을 줬을 정도다 남들 맛난 맥주 마실 때 혼자 썩내나는 초록색 물 들이키는건 확실히 굉장히 개같았을거야 땅개는 그렇다치고 특히 해군에서 이런 형벌을 존나 잘 써먹었는데 왜냐면 해군들은 술 끊기면 미쳐 뒤질 지경까지 가기 때문이다 왜냐면 옛날 해군은 술을 하루에 250ml씩 꼬박꼬박 줄 정도로 술이 존나 중요했기 때문임 생각해봐 옛날 배는 존나 쫍아 냄새도 썩었어 놀 것도 없어 거기다 ㅅㅂ 음식까지 쓰레기야 바다 위에선 보통 이딴걸 처먹으라고 준다고 맨정신으로 못 처먹지 그래서 불쌍한 해군들은 하루종일 일과 끝나고 저녁에 나오는 술만 기다리게 된다 그거 말고는 할 것도 없었으니까 이렇게. 매일매일 꼬박꼬박 럼주가 250ml씩 나옴. 소주병 한병이 360ml 정도니까 매일매일 준다는걸 감안하면 생각보다 양이 제법 됨. 게다가 선상용 럼주는 독한 물건이라 물 타서 주는 거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취할 정도는 된다 이렇게 대충 수천년 정도 군대와 술은 떨어지지 않는 사이였다 지금쯤 군필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왜 내가 짬밥 처먹을 땐 소주가 안 나왔을까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당연히 꽐라되서 선임 죽빵 갈길까봐 안 주는 거임 옛날엔 그럼 안 갈겼냐고? 물론 걔들이 죽빵 갈겼으니까 요즘 술이 안 나오는 거임 ㅇㅇ 하도 술처먹고 지들끼리 싸움질하다가 심지어 장교까지 쏴죽이는 진상짓이 많이 터지다보니 윗대가리들은 틈만 나면 술을 끊으려고 시도했고 2차대전 들어서면 슬슬 술 배급량이 존나 줄어들기 시작함 그리고 이런 사태에 가장 직격으로 피해를 입은 꽐라들은 잠수함꽐라들이었다 잠수함 생활은 진짜 할 게 못된다 존나게 좁아터진 곳에서 존나게 냄새나는 남정네들이랑 존나게 부대끼면서 존나게 할짓없이 시간을 보내는게 잠수함 생활임 이런 상황이니만큼 산소보다도 중요한게 알콜인데 그걸 끊어버리겠단다 미쳐돌아갈 지경이지 특히 쪽바리 때려잡으라고 태평양에 죽치고 있던 천조국 잠수함꽐라들이 제일 불만이 많았다 이것이 당신의 잭 다니엘입니다 뭐야 ㅆㅂ 돌려줘요 니들 꽐라됐다가 실수로 어뢰 터뜨리면 ㅈ돼잖아 싫어 안 줄 거임 뻐큐드샘 ㅆㅂㄴ 뭐 확실히 아무 이유없이 뺏어간건 아니긴 했다. 잠수함 그 쫍아터진 장소에서 꽐라가 득실대면 진짜 뭔 일이 터질지 모른다. 근대 그렇다고 꽐라들의 불만이 줄어드는건 아니었다. 특히 니들이 비싸고 잘나고 중요한 어뢰 터뜨릴까봐 못 준다는 이유가 개빡치는거였는데, 왜냐면 당시 미군이 쓰던 이 어뢰란 새끼가 비싼 건 몰라도 절대 잘나거나 중요한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때 미군이 쓰던 어뢰로 말할 것 같자면 이 새끼들이 쓸모있는 용도라곤 어뢰칸 채우는 용도가 전부였다 잘 안 나가고, 잘 안 맞고, 잘 안 터지는 그야말로 환장의 트리오를 모두 갖춘 어뢰계의 적폐였던 것이다 쪽바리도 아니고 미군에서 이런 일이 터졌다는게 잘 안 믿길 정도로 쓰레기 어뢰라 이거 개발한 새끼들 모가지가 죄다 날아가는 초대형 스캔들까지 터졌는데 뭐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꽐라 얘기하다 갑자기 어뢰 얘기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이 새끼 연료가 알콜임 올ㅋ 알콜 특)마시면 취한다 당연한 원리를 잠수함 꽐라들이 모를 리가 없다. 물론 어뢰에 들어가는 알콜이 술에 들어가는 알콜이랑 같을 리는 없지. 아세톤도 듬뿍 들어가고 에탄올은 물론이고 먹으면 바로 좃되는 유독물질인 메탄올까지 존나게 처들어가서 색깔까지 시뻘건 일명 '핑크 레이디' 알콜이었음. 마시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전적인 의미로 시체가 된다. 당연하지만 잠수함꽐라들한테는 사소한 문제였다. 이리하여 꽐라가 되고 싶은 잠수함꽐라들이 어뢰 연료를 술로 바꾸려는 기상천외한 시도가 시작된다. 어차피 터지지도 않는 어뢰 뭐에 쓰냐 술이라도 담가먹어야지. 첫번째 단계는 핑크레이디 알콜을 쓱싹 쌔벼오는 것이다. 이건 쉬웠다. 잠수함 안에서는 어뢰 이마빡에 탈모가 올 때까지 어뢰를 닦아대는 거 말고는 할 일이 별로 없다. 어뢰 닦다가 슬쩍 눈치봐서 뚜껑 까고 연료 쌔벼오면 된다. 근데 이 뒤부터 살짝 까다롭다. 방금 적었지만 핑크레이디를 그대로 마시면 골로 간다. 여기서부터 친절한 후임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씹새야 씹새야 저녁식사가 중요하니 저녁술이 중요하니" "당빠 후자죠?" "야 너두? 그럼 저녁으로 나온 식빵 좀 내놔" "아니 씨빵 왜요 씨빵" 느닷없이 빵이 필요한 이유가 뭐냐면 빵을 존나게 뭉치면 이게 필터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핑크레이디에 들어있는 메탄올 아세톤과 알콜은 각자 융해도가 다르다. 즉 핑크레이디를 뭉친빵으로 존나게 거르고 거르고 또 거르다보면 언젠가는 순수한 알콜이 나온다는 거다 이 과정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씹새들의 식빵이 희생되었을까 아무튼 이제 알콜은 얻었으니 이걸 이제 마시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잠수함꽐라들은 그냥 취하기만 하는 걸로는 불만이 많았다. 뭐 마시는 느낌이라도 나야 술이라고 부르지 여기서 또 친절한 후임들의 협조가 필요해진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미군 잠수함에선 술은 안 나왔어도 맛스타는 나왔다. 대량생산된 파인애플 쥬스가 매일매일 보급이 나왔던 것이다. "씹새야 씹새야 저녁음료수가 중요할까 저녁술이 중요할까" "아 진짜 좀" 후임들의 친절한 협조로 맛스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면 이제 핑크레이디를 걸러 얻은 알콜과 파인애플 맛스타를 2:3 비율로 섞어먹으면 된다 이게 2차대전을 풍미한 전설의 칵테일 어뢰쥬스다 막강한 도수, 그럭저럭 달콤한 맛, 뭣보다 공짜였다. 그야말로 꽐라들의 집념이 빚어낸 기적인 것이다...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아니지 "히끅 ㅆㅂ 눈이 안 보여 히끅" 빵 하나로 아세톤이나 메탄올을 걸러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뢰주스를 마신 잠수함 꽐라들에게는 불행한 일이 닥쳐왔는데, 취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재수없으면 몸에서 경련이 일어나고, 독성이 위장을 녹여버리는 바람에 장출혈이 발생해서 말 그대로 피똥을 싸고, 그리고 제일 치명적인 메탄올 때문에 실명까지 겪게된다. 당연하지만 잠수함 꽐라들에게는 몹시 사소한 문제였다. 어뢰쥬스는 저 문제의 병신 어뢰가 몽땅 교체될 때까지 쭉 잠수함 내에서 신나게 유통된다. 잠수함마다 레시피가 달라서 나중에는 특산품 비스무리한 것까지 생겼다. 꽐라꽐라 [출처 - 디시인사이드 고질라맛스키틀즈] 매번 퍼오면서 느끼는 거지만 원글 작성자는 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많은 걸 다 알고 있는거지?? 그리고 왜 저기서 저런 글을 쓰는거지???
세종대왕이 뇌물 먹인 관리에게 내린 형벌.jpg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신인 조말생 어른. 고려시대 때 과거로 장원을 했고 태종의 사돈을 했을 정도로 잘나갔던 인물임. 하지만 감히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뇌물을 받는 엄청나게 흠좀무한 짓을 저질러버림. 심지어 조말생이 받은 뇌물은 법정 한도의 10배.... 당장 저잣거리에서 교수형을 당해도 이상할리 없는 상황임 조선은 무슨 나라? 헤이, 유 세이 유! 미 세이 학! 유학! 유학! 한 나라임. 당연히 신하들은 난리가 났음. 즈으어어언하아아~ 뇌물을 사사로히 받는 조말생을 살려둬서는 안되옵니다. 법도에 따라 사형에 처하십시오~ 하지만 당시 왕이었던 세종은 영 떨떠름했음. 야......조말생이 뇌물을 받을 건 죽일 짓이긴 한데 그래도 나름 명망 높은 사람이고 공신인데 죽이는 건 좀...... 콜! 좋게 좋게 사약으로 갑시다!!! (당시 사약은 몸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양반 등 고위층에게 내리는 명예로운 사형법이었음) 아니, 죽이지 말자고 ;;;;; 이번에도 떨떠름하신 대왕님 그러면 죽이지 말고 머리에 불로 달군 도장으로 인을 콱!!! 찍는 건 어떻겠습니까? (실제로 있었던 형벌) 어우, 크리피해. 좀 평화로운 거 없냐. 그럼 귀양을 보낸 뒤에 영영 한양 땅을 못밟게 만들죠!!! 그것도 좀..... ... 그냥 귀양 보내고 끝내쟈!!!!  이렇게 조말생은 세종대왕의 비호를 받아 죽을 위기를 극복하고 귀양을 갔음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가서 사면 받음. 요시! 목숨 겟또 다제! 캬, 연줄이 오지고 지리고 렛이고 여러분도 연줄 있으면 목숨 건질 수 있음당. 어? 왔엉? 조말생을 반갑게 맞아주시는 대왕님 껄껄. 대왕님 덕에 무사히 목숨 건져서 이렇게 다시 복귀했습니다. 어휴, 능력 있는 신하는 살려야지. 그래서 일할 준비는 됐지? 껄껄.구해주셨는데 당연하지요.  무슨 일을 할깝쇼? 이렇게 조말생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후에 78살로 나이가 들어 사망 할 때까지 세종 치하에서 엄청나게 부려먹혀진다. 살아서 퇴직 못한 그는 죽어서 겨우 퇴직했다. 진짜 일하다가 죽은 것이다. 세종 15년 병에 걸린 조말생은 제발 퇴직좀 시켜달라고 빌었지만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차라리 자기를 파직시켜달라고 했지만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따 세종은 상대가 70살 먹은, 지금 나잇대로 보면 100살도 넘은 노인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따 그의 노동력을 정말 한 톨까지 짜먹었따. 황희 정승도 세종대왕이 승하하기 4달 전에 겨우 퇴직 했지만 조말생은 그런 것도 없었따.  세종의 치하에서 그가 자유를 얻는 방법은 죽는 것 밖에 없었다 세종은 쉴틈따위는 주지 않았다 뇌물 받아 먹은 관리에게 휴식 따위는 과분하기에......    죽은 관리는 부려먹을 수 없잖아,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