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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0원 가성비 무드라이트 차량용 가습기 후기

최근 날씨가 추워지면서 차 안에서 히터를 장시간 틀고 다니기에 차 안의 공기가 아주 건조해 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목도 칼칼해지고 콧속도 건조해지고 얼굴도 땅기는 듯한 느낌이 너무 많이 들기에 할 수 없이 차량용 가습기를 하나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가성비 좋은 차량용 가습기는 단돈 만 원도 안 하는 상품이지만 그 기능과 성능은 아주 뛰어난 제품이라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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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뉴스 #더] 의사는 '적자·폐업', 환자는 '오픈런·초치기'…이상한 소아과
'여보세요?여보세요?배가 아파요.배 아프고 열이 나면 어떡할까요?어느 어느 병원에 가야 할까요?여보세요?여보세요?나는 의사요 배 아프고 열이 나면 빨리 오세요.여기는 소아과 병원입니다.♪’ 어린 시절 많이 불렀던 동요'병원놀이'에는 아프면 소아과(소아청소년과)로 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그런데 동요에도 등장하는 이 소아과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17년부터5년 동안662곳의 소아과가 문을 닫았다. 2020년부터는 문을 연 곳보다 닫은 곳이 많아졌다. 국내 인구의20%에 가까운 소아청소년의 건강을 지켜줄 소아과는 대체 왜 줄어드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심각한 수준의 저출산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703만 명이었던 만 14세 이하 아이들의 인구는 올해 593만 명으로 감소했다. 아이들의 수가 줄었다는 것은 소아과의 입장에서 이용자와 잠재적 이용자가 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데 공급이 유지되거나 늘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은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알 수 있다. 소아과를 찾을 아이들이 줄고 있는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코로나가 창궐했다. 감염병이 퍼지면서 마스크 상시 착용, 손 씻기 생활화 등 개인 방역이 강화되면서 감기 환자가 줄었다. 콧물, 코 막힘, 기침 등 감기증세로 소아과를 찾는 아이들이 많았던 만큼 감기 환자의 감소는 소아과에 큰 타격을 줬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코로나가 창궐한 2020년 소아과 내원일수는 2019년 대비 35.9% 급감했다. 이는 환자 수가 35.9% 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아과는 특성상 비급여진료는 매우 적고, 의료수가가 낮은 질병의 진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환자 수 감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팬데믹 이후 적자를 기록하는 소아과가 많아졌다. '의사는 돈을 많이 번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하지만 진료과목별로 나눠서 살펴보면 온도차가 있다.개원의 중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진료과목은 흉부외과로,한 해에 평균4억8790만원을 번다.반면 소아과는 평균1억875만원으로 개원의 진료과목 중에서 가장 연봉이 낮다. 수요가 줄고 있어 불안한데 연봉마저 적은 소아과는 비인기 과목이다. 2023년도 국내 소아과 전공의 정원은207명이지만 지원자는 단33명이었다.전공의 지원율이80%였던2019년에도 소아과는 손이 부족했다.지원율이20%에도 미치지 못하는 내년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다. 이대목동병원은9월부터 중증질환이 아닌 소아환자의 응급실 진료를 중단했고,가천대길병원은12월12일부터 소아과 입원진료를 막았다.개원 소아과도 줄어드는데 상급종합병원 소아과도 인력 부족으로 점차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의사도 없고,환자도 줄어서 문을 닫는다는 소아과.그런데 환자의 입장에선 얘기가 조금 다르다. 요즘 개원 소아과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병원이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을 서는'오픈런'을 하는 환자가 많다.문을 열자마자 진료 접수가 마감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벌어지는 웃지 못 할 광경이다. 스마트폰을 이용,진료 예약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할 수 있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업무 개시와 동시에 마감되기에 엄마들 사이에서는 이를'초치기'라 부른다.오픈런,초치기를 모두 실패하면 진료가 가능한 소아과를 찾아 떠돌거나,기나긴 대기 시간을 견뎌야 한다. 소아과가 줄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입장에선10년 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10살과5살 두 아이를 키우는A씨는"얼마 전 아이들이 감기에 걸려 소아과를 갔는데 이미 접수가 마감됐었다.애플리케이션으로 진료 예약을 하려고 했지만 가능한 곳이 없었다.결국 근처 소아과 몇 곳을 돌다 타 지역으로 넘어가서야 진료를 볼 수 있었다.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소아과 가는 건 한마디로 전쟁이다"라고 한탄했다. 수요자의 입장에서는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왔는데,다른 시각에서 보면 수요가 줄면서 공급이 줄어들고 있는,이상한 소아과의 현실.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소아과의 아이러니한 현실을 풀어나갈 해답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해 보인다.소아과 의사 감소가 더욱 가속화돼 아이들이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이 오기 전에 찾을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글·구성 : 이석희 기자 seok@ 그래픽  : 홍연택 기자 ythong@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 푸아티에의 기욤의 기록
헤이스팅스 전투를 다룬 가장 긴 산문 기록은 푸아티에의 기욤이 쓴 '노르만인들의 공작이자 잉글랜드인들의 왕 윌리엄의 무훈' (Gesta Willelmi ducis Normannorum et regis Anglorum)이다. 푸아티에의 기욤은 노르만인이며, 처음에는 군인으로서 나중에는 군종사제로서 윌리엄 공작을 섬긴 신하였기 때문에 이는 매우 가치있는 기록이다. 그는 군사 분야의 전문가였고, 비록 1066년 원정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참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투가 있은 지 불과 몇 년 후인 1071년경에 이 기록을 썼다. 따라서 1066년의 원정에 대한 그의 설명은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편향된 시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노르만인이자 공작의 열렬한 숭배자이며, 그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영웅서사의 수사법과 고전의 이미지를 빌려온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앵글로색슨측의 명분과 행동에 대한 서술은 신뢰도가 떨어지며, 사건들에 대한 그의 해석과 표현은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Stephen R Morillo, The Battle of Hastings: Sources and Interpretations 공작은 교황이 보내준 깃발 뒤에 군대를 매우 효율적인 대형으로 배치한 뒤 전진시켰다. 그는 활과 쇠뇌로 무장한 보병들을 선봉에 배치했다. 사슬갑옷을 입은 더 강한 보병들이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후위에는 기병 부대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공작 스스로 정예 기병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후방에서 그는 명령과 동작으로 전군을 지휘할 수 있었다. 만약 고대의 작가가 해럴드의 군대의 행군을 묘사한다면, 그들이 지나간 길의 강이 말라붙고 숲이 평야가 되었다고 적었을 것이다. 수많은 잉글랜드인들이 잉글랜드 각지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사랑하는 조국을 외국인들로부터 지키려는 열망에 불탔고, (비록 그 명분은 부당했지만) 그중 일부는 해럴드를 흠모했다. 그들의 피의 동맹인 데인인들의 땅에서도 많은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윌리엄 공작을 노르웨이의 왕보다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감히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고 방금 지나온 숲 근처의 언덕 위에 진을 쳤다. 그리고 곧바로 말에서 내린 다음 밀집한 채 정렬했다. 공작과 그의 신하들은 지형의 불리함에도 전혀 겁먹지 않고, 가파른 경사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트럼펫 소리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노르만인들은 대담하고 신속하게 공격을 개시했다. 마치 법정에서 소송을 변론할 때 원고측이 먼저 발언을 시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노르만인 보병들은 많은 잉글랜드인들을 화살로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며 가까이 접근했다. (궁수들의 후방에서 진격하는 노르만 기사들) 잉글랜드인들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용감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투창을 비롯해 치명적인 도끼와 막대기에 묶은 돌 등 다양한 원거리 무기를 던졌다. 이 치명적인 우박 아래에서 노르만인들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기사들이 그들을 구하러 왔고, 그렇게 후위가 선봉으로 바뀌었다. 기사들은 원거리 전투를 멸시하고 거부하여 검을 들고 대담하게 공격을 가했다. 노르만인들과 외국인들이 곳곳에서 지르는 커다란 함성이 무기 부딪치는 소리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찬 신음에 파묻혔다. 그렇게 한동안 양측 군대는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잉글랜드군의 방패벽에 돌격하는 노르만 기사들) 잉글랜드인들은 높은 지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방어에만 전념하는 전술의 이점, 많은 병력과 밀집대형, 그리고 방패와 다른 방어 장비들을 쉽게 관통하는 그들의 전쟁 무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그들은 감히 검을 뽑아 들며 공격해온 적들을 완강하게 막아서거나 쫓아냈다. 심지어 멀리서 투창을 던지는 적들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그래서 이 맹렬한 반격에 겁을 먹은 좌.익의 보병들과 브르타뉴 기사들, 그밖의 보조병들이 등을 돌려 도망쳤고, 무적의 노르만인들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공작의 전열의 대부분이 패주했다. (브르타뉴 빤스런) 육지와 바다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던 로마 제국의 군대도, 자신들의 지휘관이 전사한 것을 알았거나 그렇게 믿었을 때는 도망쳤다. 노르만인들은 공작이 전사했다고 믿었고, 그들의 후퇴는 부끄러운 도주가 아니라 비탄에 잠긴 퇴각이었다. 공작은 잉글랜드군의 상당수가 노르만인들을 추격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고, 도망치는 부하들을 가로막고는 창대로 때리며 위협해서 멈춰 세웠다. 그는 투구를 벗어 올려 얼굴을 드러내고는 이렇게 외쳤다. "날 봐! 난 살아있고, 주님의 도움으로 승리할 것이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도망치는 거야? 너희에게 열려있는 퇴로 따윈 없다! 양처럼 도살할 수 있는 나약한 적들에게 쫓기고 살해당하는 꼴을 봐라! 너흰 패배와 영원한 불명예를 얻기 위해 승리와 불멸의 명성을 포기하고 있어. 지금 도망치면 너희들 중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용기를 되찾았다. (윌리엄 공작의 생존 확인) 공작은 신하들의 앞에 서서 돌격했고, 왕인 자신에게 반역했으므로 죽어 마땅한 반항적인 종족을 검으로 베어 넘겼다. 그것을 보고 사기가 오른 노르만인들은 자신들을 추격해오던 수천 명의 잉글랜드인들을 포위해서 순식간에 학살했고, 단 한 사람도 살려 보내지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노르만인들은 잉글랜드군의 본대를 향해 다시 강한 결의를 가지고 진격했다. 방금 입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인들의 숫자는 전혀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잉글랜드인들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싸웠고, 특히 대열에 틈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대열이 얼마나 빽빽한지, 전사자들이 바닥에 쓰러질 공간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빼어나게 용맹한 기사들의 검 아래에서 곳곳에 길이 뚫렸다. 비록 그들 중에는 멘, 프랑스, 브르타뉴, 아키텐 출신의 기사들도 있었지만, 가장 돋보인 것은 노르만 기사들이었다. 젊은 노르만 기사 로베르는 보몽의 로제의 아들이며 묄랑 백작 위그의 조카이자 후계자로...... (후략) (노르만 기사들의 2차 돌격) 노르만인들과 그들의 동맹군은 자신들이 처음 도주했을 때 일어난 일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들은 단단하게 밀집한 적군을 큰 피해 없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등을 돌려 도망치는 척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환호했고, 승리의 함성으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노르만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도망치는 적을 쫓아 수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마치 날갯짓하듯 뛰어 내려왔다. 노르만인들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고 그들을 포위해서 전부 학살했다. 같은 수법이 두 번이나 성공하자 사기가 오른 노르만인들은 다시 잉글랜드군 본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적의 대열은 여전히 위협적이고 틈이 없었다. 그래서 한쪽은 못이 박힌 듯 굳건히 서서 움직이 않고 다른 쪽은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을 가하는 특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군은 갈수록 약해졌고, 마치 패배로써 죄를 자백하고 있는 것처럼 고통을 감내했다. 노르만인들은 화살 세례를 가했고, 잉글랜드인들을 부상 입히고 제자리에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죽어서 바닥에 넘어지고 있는 전사자들이 살아서 서 있는 자들보다 더 역동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경미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동료들의 밀집한 대열 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짓눌려 죽었다. 그렇게 운명은 서서히 윌리엄 공작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은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와...... (후략) 적들 중 상당수는 한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기마 전사의 모습을 보고 싸우기도 전에 겁에 질렸다. 공작의 말 세 마리가 전투 도중 죽어서 쓰러졌다. 그는 위기에 굴하지 않고 세 번 모두 땅으로 뛰어내렸고, 준마를 잃은 원한을 지체 없이 갚았다. 여기서 공작의 속도와 체력과 용기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분노를 실은 칼날로 끊임없이 방패와 투구와 사슬갑옷을 꿰뚫었고 방패로 많은 공격을 받아쳤다. 많은 기사들이 부상당하고 지쳤음에도 공작이 도보로 싸우는 것을 보고 경탄하여 다시 용기를 얻었다. 심지어 피를 많이 흘려 쇠약해진 부상자들도 일부는 방패에 몸을 기댄 채 용감하게 싸웠다. 싸우지 못하는 부상자들은 동료들이 두려움 없이 공작을 따라가 승리를 놓치지 않도록 말과 몸짓으로 격려했다. 공작 자신도 많은 부상자들을 돕거나 구조했다. (해럴드 왕의 죽음) (해럴드의 동생들의 죽음) 날이 저물 무렵 잉글랜드인들은 노르만인들에게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많은 병력을 잃어서 약해졌으며, 왕 자신과 왕의 형제들, 그리고 왕국의 귀족들 중 많은 수가 전사했고, 남은 병사들도 거의 탈진해서 어떠한 구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노르만인들이 동료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약해지지 않고, 마치 싸움 도중 새로운 힘을 끌어낸 것처럼 처음보다 더 맹렬하게 밀어붙이는 것을 보았다. 공작은 분노에 가득 차서 적들에게 아무런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오직 승리만이 군인으로서의 열정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등을 돌려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도망쳤다. 일부는 말을 잡아탔고, 나머지는 두 발로 도망쳤다. 일부는 길을 따라 뛰었고, 나머지는 인적 없는 삼림으로 들어갔다. 일부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나머지는 너무 쇠약해져서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 (잉글랜드인들의 도주) 군사갤러리 prevot님 펌
새해에도 서해에서
23년 새해가 밝았네요. 감기에 걸려 골골 거리다 연말 누워서 보내고 자고 일어나니 한결 좋아져 새해니까 새 공기좀 마셔볼까 하고 나왔습니다. 제부도가 꽤 가까운 편이라 전에 유툽에서 본 바다전경 무인카페가 있다고 해서 가봤어요. 카페에서 라면도 먹을 수 있는줄 알았는데 라면카페는 1층에 따로 있더랍니다. 진, 삼양, 짜파, 주먹밥 삼양 오랜만에 먹는데 옛날 맛이 안나는건 제 입맛이 변한고겠쥬? 짜장면보다 짜파게티가 맛있다는 10살 전곡항 - 제부도를 잇는 케이블카 어제 오늘 바닷길이 계속 열려 있어서 차도 많이 들어가네요. 라면카페 내부. 라면 종류는 많지 않고 주먹밥은 먹을만 했습니다. 근데 청소 등등 관리 좀 하셔야 될듯… 저기 보이는 이층이 카페예요. 냉동 피자도 있어서 전자렌지에 돌려먹는거 같습니다. 커피에 반하다 라는 브랜드로 무인운영 하시는거 같은데 사장님 계시는듯 ㅎㅎ 너무 추워서 밖에 못있겠다… 제부도 왔는데요. 주차하느라 길가 오픈형 카페 주차장에 주차하고 차 주문하러 갔는데…. 하아… 너무 지저분해서 시켜놓고 못마시겠더라구요 ㅠㅠ 제가 작년에 바리스타2급 배우면서 제일 먼저 배우는게 무조건 청결이었는데 진짜.. 최악이었어요 ㅠㅠ 추워도 2호는 안 춥다… 가자.. 배고파… 우리동네 맛집 마초그릴 또 왔어요 ㅎㅎ 이번엔 안먹어본 메뉴 돈부리, 떡볶이, 고기추가 애들은 깨짝.. 저랑 남편이 다 먹었어요 ㅋㅋ 여기는 먹고 있으면 사장님이 계속 왔다갔다 하시면서 맛있는지 물어봐주세요. 매우 친절 하십니다. 내부도 정말 멋진데 사람들이 있어수 사진찍기가 민망하더라구요 ㅎㅎ 테이블도 마초맨님이 직접 만드셨대요. 드디어 마초맨님과 사진 찍었어요. 인사 방법은 마초~! 외치며 경례 ㅎㅎ 울 1호 연옌 만난 느낌으로 좋아했답니다. 여러분도 마초그릴 가시면 꼭 같이 사진 찍으세요. 이 분 크게되실 분입니다 ㅎㅎ
지구 기준으로 지구 바깥을 어느 정도 알아보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지상에서 위를 바라보면 대류권부터 외기권까지 지구중심으로 존재하는데 대류권은 보통 지상에서부터 고도가10~11km까지며 성층권사이에는 오존층이 존재하며 보통 열권부터 흔히 말하는 스페이스(space)라 부르게된다 지구에서 외기권까지의 거리는 대략 10,000km이다. 지구밖을 완전히 벗어나면 가장가까운 위성인 달이 보이는데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대략 384,400km이며 라고한다. 태양방향으로 태양(중심) 수성 금성이 존재하고 반대방향으로는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혜왕성 명왕성(태양계행성아님) 카이퍼벨트 오르트구름이 존재하며 오르트구름 바깥으로 나가야 진정한 태양계 바깥공간이 된다. 태양계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운석들은 오르트구름에서 오는것들이다. 태양에서 카이퍼벨트까지의 거리는 대략 50AU이다 (AU:지구에서 태양까지의 평균 거리 = 약 1억5천만km) 오르트구름가장 바깥까지의 거리는 대략 50,000AU(0.8광년)이다. (광년:빛이 1년동안 가는 거리 = 약 9조 4608억km) 태양계 바깥을 벗어나면 가장먼저 기다리는 외계항성이 존재하는데 바로 프록시마 센타우리라는 항성이다. 지구에서 프록시마 센타우리까지의 거리는 대략 4.244광년이다. 우리은하의 지름은 대략 100,000광년이며 우리은하에 소속한 항성은 대략 5,000억~6,000억개가 존재한다. 우리은하의 중심에는 거대하고 아주강한 인력체인 궁수자리 A라는 블랙홀이 존재한다. 우리은하에서 가장가까운 은하 2개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대마젤란은하이고 하나는 소마젤란 은하이다. 우리은하에서 대마젤란은하까지의 거리는 대략 157,000광년이며 우리은하에서 소마젤란은하까지의 거리는 대략 197,000광년이다. 대마젤란은하 소마젤란은하 더 나아갈 수 있는데 머리 아프다. 나중에 알아보도록 하자~ 우주갤러리 잠만자고싶다님 펌
남베트남 패망의 배경과 원인
1. 남베트남 패망의 간단한 배경 남베트남(Republic of Vietnam)은 서기 1955년에 세워진 국가이다. 건국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19세기 이후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략했는데 이후,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고 프랑스 측 정부 관계자들을 억류하였음. 그러다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 북쪽은 중화민국군이 남쪽은 영국군이 담당하기로 하였음. 하지만, 주둔하는 데 까지 시간이 걸렸고 이 틈을 이용해 호치민은 베트남 북부를 장악하고 북베트남(베트민)을 선포하였고 당시 중화민국은 내부 사정으로 인해 베트남에 개입하지 않고 북베트남의 통치를 인정하였음. 그 후에 프랑스는 영국으로부터 남베트남 행정권을 위임 받게 되었는데 문제는 식민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는 남베트남에 괴뢰국을 세우고 베트남 전부를 손에 넣기 위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First Indochina War)을 일으켰음. 그러나, 1954년 디엔비엔푸(Battle of Dien Bien Phu)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크게 패하게 되면서 프랑스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 미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하였음. 결국,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담이 열렸고 제네바 합의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으로 분단되게 되었다. 그렇게 베트남에는 2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분단이 된 이후 1년만에(1955년) 양국간에 교전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러다 1964년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 발생하면서 미국과 동맹국들이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결정함에 따라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미국의 피로와 휴유증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당시 미국에 세계경제 전략이었던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종결되었을 정도였음. 결국, 미국은 1973년에 파리 조약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되었다. 그 후, 북베트남이 조약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1975년 남베트남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2.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멸망한 이유 남베트남의 멸망 원인에는 국외 요인도 크게 작용했지만 일단 국내적인 요인들을 주로 다루어보겠음. - 국민들에게 신뢰받지 못한 정부와 지도층의 부패 당시, 남베트남 사람들은 비교적 참신했던 젊은 지도자 응오딘지엠(NgoDinhDiem)이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얻어 남베트남을 이끌게 되면서 남베트남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듯했음. 하지만, 지엠 정부는 ‘전략촌(Strategic Hamlet)’ 건설 등 현실에 부합되지 못한 정책들을 무리하게 밀어 붙이면서 점점 족벌(族閥)에 의한 독재정치로 기울게 되었음. 여기에,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부패가 만연되면서 정부의 발목을 잡았으며 정부와 민심을 이간질시켰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가 높아지자,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하였고 오히려 정부에 대한 불만은 더 심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였음. 남베트남 정부가 민심을 잃게 되면서 베트콩의 지원세력이 늘어나게 되었고 집권 초기 그를 도왔던 세력들이 반대세력으로 돌변하게 되었음. 결국, 지엠 정부는 1963년 11월 쿠테타로 무너지게 되었지만, 국가는 계속 혼란에 빠져있었음. 정권은 수시로 바뀌었고 여기에 정부 정책도 일관성 없이 계속 변경되었음. 기득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권유지에 급급했고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부패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군인들은 나라의 안보를 미군 등 연합군에게 맡긴 채 전선에서 싸우는 것보다 사이공에서 이루어지는 정권의 향방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음. 이러한 실책들로 인해, 남베트남의 정부의 역할을 유명무실해졌고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 국민들의 잘못된 민족주의 의식과 집단 이기주의 남베트남 정부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면서 혼란을 거듭하게 되자 국민들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민족주의 의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음. 당시, 남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에 지원을 받아 우리를 학대하는 꼭두각시 정부라는 발상이 퍼지게 되었음. 그 결과 정부를 상대로 무장투쟁에 나선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활동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베트콩에 가담하는 주민들이 점차 늘어 나기 시작했음.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 안주하고 있던 대부분의 주민들도 혼란을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 챙기기에 나섰음. 학생은 학생대로,종교인은 종교인대로,기업가는 기업가대로, 노동자와 농부 등 누구 할 것 없이 각각 집단적인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이득을 얻으려 하였음. 이와 같이 각계각층의 욕구가 충돌하면서 집단간, 계층간, 지역간에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결과적으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republicandemocracy)가 자리를 잡기 도 전에 다원주의적 민주주의(pluraldemocracy)현상의 만연으로 공론(publicjudgment)과 여론(publicopinion)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음. 그 과정에서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음. 그리고 정권과 체제에 대해 관심조차 없던 일반 국민들까지 북베트남과 호찌민을 선망하게 되면서 점차 베트콩을 지원하는 NLF의 배후세력으로 변해갔음.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남베트남 사람들조차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호찌민이다.”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주월 한국군사령부에서 사무보조원으로 근무하는 남베트남 여성도 그녀의 부모가 사이공 정부의 고위직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찌민은 베트남의 가장 훌륭한 민족지도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였음. 호찌민이 1969년 9월 2일, 79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는 많은 남베트남 주민들이 공개적으로 검은 리본을 달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남베트남 주민들의 잘못된 민족주의와 호찌민에 대한 흠모는 그들이 지향하는체제가 공산주의인지,자본주의인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남베트남 사람들은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실망의 대안으로 북베트남과 NLF를 지지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민족주의는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켜주지 못한 정부에 대한 반발로부터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음. 따라서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북베트남과 NLF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공산주의 세력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세력이었음.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확고한 신념도 없었으며 또한 나라를 지킬 필요조차도 없었음. - 군대의 무사 안일주의와 부패 197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된 후 미군을 비롯한 연합국 군대가 철수하자, 당시 남베트남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넘겨준 최신 장비와 함께 100만 명이 넘는 지상군, 세계 4위를 자랑하는 공군력 등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음. 따라서 낡은 재래식 장비와 빈약한 보급체계를 가지고 있는 북베트남과 NLF의 군사력은 남베트남과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75년 1월,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남베트남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불과 4개월 만에 최후를 맞이했음.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큰 요인은 내 나라를 내가 스스로 지킨다는 국민 안보의식의 부재와 무사안일에 빠진 군대를 들 수있다. 당시 남부지역에서 활동했던 베트콩들은 강제로 동원된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여성도 20만여 명 정도가 포함되어 있었다.북베트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00만여명 이상의 여성이 참전했으며 그 중 6만여 명은 호찌민 통로의 험준한 전장에서 남성들과 동일하게 전투를 수행했다. 반면 남부의 젊은이들은 풍족한 물질문화에 익숙해져 있어 생활수준이 높을수록 어려운 일에 종사하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많은 고위층 자녀들은 유학을 이유로 외국에 거주하면서 병역을 연기 또는 면제받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경제력이 뒷받침된다면 전투지역에 가지 않는 방법은 많았다. 일정액의 뇌물로 장기휴가를 얻어 사이공에서 빈둥거리는 군인이 부지기수였다. 이들을 ‘유령군인’이라고 불렀다.또한,장군 등 고위층의 사병(私兵)으로 그의 기업체에서 직원 또는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일명 ‘꽃군인’도 있었다. 이들 유령군인과 꽃군인을 모두 합할 경우 10만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58만여 명이었던 정규군의 20%에 육박하는 숫자인 것이다. 정상적으로 군에 근무하고 있던 군인들의 대적관도 엉망이었다.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산악과 늪지대에 은거하면서,외부의 보급이 없더라도 생존은 물론 장기간에 걸친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남베트남 군대는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자신들의 여건에 부합된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지 못하고 미군의 전투방식에 젖어 있었다. 가난한 나라가 부자(富者)나라의 전쟁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임. 고도의 정밀무기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과 함께 운영유지를 위한 기술과 보급 등 정밀한 지원체제가 필수적이었음. 그러나 미군이 없는 남베트남은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음. 이로 인해 미군이 넘겨준 정밀무기들은 얼마되지 않아 고철이 되고 말았음. 현실이 그랬음에도 남베트남 군대는 자신들에게 부합된 전략과 전술 개발은 도외시한 채 미군이 넘겨준 장비에만 의존했다. 그 결과 수준 높은 무기체계와 상대방을 능가하는 대규모 군대를 보유했던 남베트남 군대였지만 빈약한 재래식 무기 및 보급체계를 가진 북베트남군과 NLF의 상대가 될 수 없었음. 즉 결론을 말하자면, 남베트남은 부정부패로 인한 민심 이반 + 집단 이기주의와 잘못된 민족주의로 인한 혼란 + 특히 심각한 군사 부패로 인해 멸망했다고 보는 편이 바람직함. 물론, 남베트남 패망에 공산 간첩의 역할도 매우 크지만, 간첩들이 활개치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앞서 말한 문제들이 만들어준 거임. 간첩 이야기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일부러 안 넣었음. 출산율갤러리 ㅇㅇ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