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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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4

고3의 달력은 입시로 시작해서 입시로 끝난다. 서울대학교 수시 원서 접수로 시작한 수시전형은 최종적으로 서울대학교 수시합격자 발표로 끝난다. 그 중간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등등의 대학들이 조금이라도 더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옭아메기위한 입시 전략이 있다. 그 날은 연세대학교 수시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나의 학생은 아쉽게도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내가 배운 감정의 전략과 이성의 능력을 다해 만들어 놓은 나의 작품을 감히 탈락시키다니... 나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나의 학생은 나에게 위로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일찍 집에 갔다. 일상적이고 따분한 업무들과 고3담임들이나 알고있을 대학들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원서 접수를 사무적으로 돕고나서 나의 학생에게 문자를 했다. 언뜻보면 사무적이지만 무언가 염려와 걱정을 감추고있는 느낌을 주고싶었다. "고려대와 서울대가 남았어요. 너무 아쉬워말고 힘내세요. 내가 응원해줄께요” "감사합니다. 내일 아침 일찍 상담해도 될까요?" "그래요 7시에 교무실에서 봅시다" "네" (다음날 아침) 가을 아침이다. 말이 좋아 결실의 계절이지 사실 가을은 생명 탄생의 봄과 젊음의 절정인 여름을 지나고 이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흔적을 남기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이 가을이 더 깊어지면 여름내내 봉사하던 이파리들이 나무로부터 버려져 시체처럼 나뒹구는 쓸쓸한 시절이 된다. 그래서 가을은 늙음의 시작이고 죽음의 전조이다. 이 가을이 지나면 선생도 죽음을 맞이 한다. 정시 원서를 쓰고 나면 합격자 발표와 함께 선생은 버려진다. 그런 가을의 시작에 이 아이와의 상담을 위해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그 아이로부터 문자가 왔다. "선생님 저 교실인데 교실에서 상담해도 될까요?" "그래요 올라갈께요" 구지 교실에서 상담을 할 이유도 없지만 또 교실이어서 안될 이유도 없었다. 계단을 타고 오르며 내가 정성을 쏟은 학생을 연세대학에서 거부했다는 사실이 다시 떠오르고 다시 한번 불쾌감에 기분이 나빴다. 이 학생의 실패이기도 하고 동시에 나의 실패이기도 했다. 입시요강에 대한 분석의 실패인지 지원자 성향에 대한 분석 실패인지 혹은 이 학생에 대한 분석 실패인지 고민을 하다 교실에 도착했다. 역시 이 학생은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차분한 표정으로 창에 기대어 교실에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차분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연세대에 일부러 떨어졌다고 말하는 듯했다. "괜찮나요? 자네는 충분히 재능이 있으니 고려대와 서울대에서는 자네를 알아 볼꺼야" "선생님 저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선생님께서 저를 그렇게 보셨다면 맞겠죠. 저는 선생님을 믿어요." "그런데요. 선생님…..저 잠시만 안아주시면 안돼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 학생은 말을 이어갔다. "저 연세대학교에 떨어진 것은 괜찮은데요. 사실 제가 전교1등이라는 것은 힘들어요." "힘들고 지칠 때나 시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위로받을 사람이 없어요. 부모님들도 저를 이해 못하시고. 사실 저에게 신경 써주실 시간도 없고요." "저 그냥 조금만 안아주세요." 이 학생은 말을 마치고 나에게 조용히 안겼다. 이 학생을 안아주며 나는 이 녀석이 생각보다 강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이 만큼의 성적을 내려면 감정에 휩쓸리면 안될테니 말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힘든 순간이 있고 누군가 기대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또 삶이 힘들 때 그런 사람에게 안기고 싶은 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녀석을 가만히 안았을 때 나는 내 제자가 무척 약한 아이임을 알았고 감성적으로 무척 여린 아이임을 알았다. 아무리 선생과 친했어도 겨우 6개월 남짓 알아온 선생에게 힘겨움에 안아달라고 할만큼 이 아이는 여리고 사랑이 필요한 아이였다. 나에게 가만히 안겨있는 학생이 어릴적 비에 젖어 떨고 있던 병아리가 생각났다. 나에게 목숨을 맡기고 있던, 삶이 두려울 때 기댈 곳이 나뿐이던 그 병아리 말이다. 나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나의 따뜻한 관심이 이 아이의 마음을 열었고 이 아이의 예절바른 모습들은 살기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어릴적 지켜주지 못했던 병아리가 생각났다. 내 생애 처음으로 감정의 흐름에 따라 이 아이를 꼭 안아주었고 그때 나는 이 아이의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진짜 부모가 되기로했다. 이 결심은 나에게는 두렵고 중대한 결정이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행동하고 감성을 조절하던 나에게 내 자식이 아닌 누군가의 부모가 되기로 했다는 것은 완전하게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어떻게 나의 이성 위에 감성을 올려 놓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성이 감성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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