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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주기生涯週記 21

받기만 하려 하면 가난해진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단순히 보자면 일리가 있는 것이 받기만 하려다 보면, 그러니까 주려는 생각은 아예 없거나 거의 없다시피 하다 보면 이미 거래관계가 삐걱이기 시작하게 되고, 뭔가를 얻어낸다 해도 그것이 이미 가치가 없거나 진심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거래라는 것은 반드시 물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정말로 뭔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그에게 뭘 줄 수 있는지부터 생각한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그에 상응하는 거래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야 역시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뭔가가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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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문장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사람이 느끼는 슬픔을 의미하기도 하고 슬픔이라는 존재가 슬픔에 대해 공부하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의 가정이 있다면 두 가지 의미는 하나로 합치될 수 있다. 이 책의 후반부를 읽어갈 때쯤이면 그 가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신형철 평론가가 시, 소설, 에세이, 영화, 음악, 사회의 여러 가지 사건 등에 대해 써 내려간 글이다. 우리가 문학 평론가에게 기대하는 시와 소설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 한 움큼, 사회의 여러 사건들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의견 한 움큼, 작가가 좋아하는 영화와 책, 음악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 한 움큼, 주변인들에 대한 사랑과 타인의 슬픔에 대한 애도 한 움큼. 에세이 같기도 하고 평론집 같기도 한 이 한 권의 책으로 신형철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이 시대 가장 유명한 평론가 중 한 명인만큼 기대했던 대로, 아니 그보다 더 글을 잘 쓴다. 시나 소설에 대한 평론, 묵직한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담론을 다루면서도 글이 딱딱하지 않고 맛이 산다. 문학동네에서 진행하는 팟캐스트, 문학이야기에서 조곤조곤 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마치 그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그가 내 옆에서 책의 내용을 읽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시해놓은 인상적인 부분을 되짚어보니 무려 스무 곳이 넘었다. 평소 책에 잘 표시를 하지 않는 나로서는 과도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숫자다. 그만큼 이 책에는 내게 인상적인 문장과 사유가 많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줄곧 슬픔에 대해 다룬다. 책에 나오는 슬픔에 대한 여러 문장들 중 내가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문장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이 책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여기서 공부되는 슬픔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슬픔이다. 자신의 슬픔에는 누구나 민감하고 예민하다. 그러나 타인의 슬픔에 예민하고 민감해지는 것은, 그리고 그것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애도하는 것은 공부해야만 하고 또 공부되어야만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것이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이며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계속해서 슬픔을 들쑤신다. 세월호나 용산 참사, 천안함 사건과 같은 슬픔이라는 단어와 동치 될 법한 일들, 누군가 깊은 슬픔을 겪을 수밖에 없는 성소수자에 대한 시각, 슬픔을 논하는 시와 소설과 영화와 음악들까지.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내가 아닌 타인의 슬픔을 읽고 목격하고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통해서 타인의 슬픔을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배우고 또 연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될까. 타인의 슬픔이 없는 세상에는 사랑도, 배려도, 공감도 없다.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슬프지 않게 하는 것에서, 배려는 다른 이들이 슬픔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공감은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그것들은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 위에 세워져 있다. 슬픔을 공부해야만 비로소 인간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두 가지 뜻이 하나로 합치되도록 만드는 가정은 이것이다. [인간 = 슬픔]. 사실 인간이 곧 슬픔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고민할 수 있는 지능을 가졌으나 그 답을 알지 못한다.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답을 갈구하는 존재란 얼마나 슬픈가. 책 속 한 문장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지구에서 한아뿐
'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제목부터 지구에서 한아(하나)뿐이다. 달달한 사랑 이야긴데 그 달달함이 조금 이상하다. 달달하긴 한데 지구인과 외계인의 러브스토리고 정말 달달하긴 한데 보다 보면 과연 나는 얼마나 환경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곱씹게 된다. 조금 희한하긴 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한아는 지구를 사랑하는 의류 리폼 디자이너다. 망가져가는 환경을 안타까워하고 지구에 인간이 너무 많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한아는 못 쓰게 된 옷들을 다시 리폼해주는 '환생'이라는 작은 옷 수선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의 남자 친구 경민은 자유분방이란 말이 어울리는,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한아를 놔둔 채 늘 어딘가로 떠나버리곤 한다. 이번 여름에도 캐나다로 유성우를 보겠다며 떠난 경민. 경민이 떠나고 며칠 뒤 뉴스에 캐나다에 운석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나온다. 한아는 바로 경민에게 연락하지만 경민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애타게 경민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한아. 다행히 경민은 무사히 돌아오고, 연락이 안 되는 경민에게 잔뜩 나 있던 화는 막상 경민을 보자 여름날의 눈처럼 스르륵 사그라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아는 돌아온 경민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다. 전보다 너무 다정해졌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지도 않는다. 팔에 있던 커다란 흉터가 사라졌고 못 먹던 가지무침도 맛있다며 먹더니, 급기야 경민의 입에서 초록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목격한 한아. 경민은 진짜 외계인인 걸까? 그렇다면 원래의 경민은 어디로 간 걸까? 이 소설은 누가 뭐래도 달달한 사랑 이야기다. 한아를 만나러 2만 광년 떨어진 지구까지 날아온 외계인과의 러브스토리라니. 오직 한아를 만나기 위해 커다란 빚을 지고 엄청난 거리를 넘어온 외계인. 그 노력만 해도 지극정성인데 그 외계인이 한아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100점짜리 남자 친구다. 늘 한아를 배려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남자 친구. 유일한 단점은 외계인이라는 것뿐. 한아는 외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외계인이 경민의 겉모습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거리감을 느끼지만 점점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외계인에게 자신도 사랑을 느낀다. 경민의 탈을 쓰고 있지 않아도, 초록색 돌덩어리인 본모습이라도 사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초록색 돌덩어리라도 사랑할 수 있어. 한아의 말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에는 아름다운 외모, 외계인이라는 사실, 성별의 유무, 나와 전혀 다르게 생긴 모습, 그 무엇도 중요치 않다. 상대방을 아끼고 배려하고 생각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중요할 뿐. 어찌 보면 오글거리기도 하고 뭐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하겠지만 사랑이라 불리는 많은 것들 중에 저 단순한 문장을 만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어떤 사랑은 상대의 존재가 아니라 상대의 능력, 외모, 재력이 사랑의 조건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랑은 저 단순한 문장을 한없이 만족시킴에도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그저 같은 성별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한아와 경민의 사랑을 좀 본받을 필요가 있다. 이 소설에서 다른 하나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환경에 대한 내용이다. 한아는 지구와 환경을 사랑하는 환경주의자고 외계인 경민이 한아에게 반한 이유도 한아가 환경을 사랑하는 모습과 맞닿아 있다. 고래형 외계인들이 지구의 바다 오염에 힘들어하는 고래들을 도와주는 에피소드나 얼음별에 사는 무당벌레 모습을 한 외계인들이 점점 더워지는 별의 환경 때문에 멸종되어가는 모습, 지구를 동경한 한 부자 외계인이 지구를 본떠 만든 어딘가 부족한 제2의 지구, 광합성인들의 행성을 그 모습 그대로 보존시켜주겠다는 우주의 약속 등, 소설 속 우주의 모습들은 지구의 여러 단면들을 떠오르게 한다. 환경오염에 힘들어하는 고래들의 모습은 지구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무당벌레 외계인의 멸종은 지구 온난화와 멸종 위기종들의 모습을, 제2의 지구에서 고통받는 만들어진 생명체들의 일화는 인간이 만든 동물원의 모습을, 광합성인들의 행성을 보존시켜주겠다는 약속은 아마존 열대우림 보존에 관한 첨예한 대립을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수많은 동물들이 멸종되었고 멸종 위기 상태에 있으며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은 엄청난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는다. 심지어 동물원에서는 인간의 유희를 위해 백호나 백사자 같이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생겨나지 않는 동물들을 강제로 만들어내기도 하며 아마존의 보존과 개발에 관해서는 지금도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우주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지구의 모습을 보고 지구의 환경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한아의 말대로 지구에 인간이 너무 많은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본격 환경친화적 외계 로맨스 소설 되시겠다. 환경은 환경대로, 로맨스는 로맨스대로, 외계인과 우주라는 양념을 적절히 쳐서 비볐더니 이토록 다채로운 모습을 가진 소설이 나왔다. 삶이 힘든 사람에게, 다 때려치우고 싶은 사람에게 이 소설을 권하고 싶다. 환경 문제도, 사랑에 대한 고민도 너무나 다정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이 책은 충분히 당신의 삶을 두텁게 감싸 안아준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면 작가가 건네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당신은, 지구에서 한아뿐이라고. 소설 속 한 문장 소리 없이, 먼 우주의 휘어진 빛들이 두 사람의 저녁에 내려앉았다.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종이 동물원> / 켄 리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종이 동물원>, 꽤 두꺼운 켄 리우의 단편집이다. 총 열네 편의 소설이 들어있으며 열네 편 전부 SF 혹은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소설들이다. 작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켄 리우는 중국인이다.(물론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긴 했지만) 그러다 보니 소설 속에서도 중국의 문화, 역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사실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 중, 일을 서로 떼 놓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한국, 조선에 대한 이야기들도 군데군데 출현한다. 어려운 과학적 설정이나 원리 같은 것도 그다지 없어서 한국 독자가 처음 SF 소설을 읽을 때 추천할 만한 소설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한국)의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몰입하기 쉬울 테니 말이다.(두껍긴 하지만 단편집이라서 시간 날 때 한편씩 읽기 딱 좋다) 켄 리우의 소설은 지난번에 리뷰했던 테드 창의 소설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테드 창의 소설이 소설을 빙자한 과학적 시뮬레이션(?)에 가깝다면 켄 리우의 소설은 Science "Fiction"이다. 켄 리우의 소설 속에서 과학은 Fiction의 설정이자 배경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을 바탕으로 한 배경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가라고 할 수 있다. 켄 리우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Science가 아니라 Fiction이므로 <종이 동물원>에 실린 소설들에는 SF가 아닌 소설도 많다. 심지어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부터가 SF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다른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다. <상태 변화>는 현대 판타지이고 <파자점술사>는 중국의 전통적 주술 문화, 파자점이 이야기의 주춧돌이 되며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중국의 요괴와 SF적 요소가 뒤섞여 매력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이게 켄 리우라는 작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SF 작가도 아니고 판타지 작가도 아니며 장르문학 작가라고 한정 짓기도 꺼림칙하다. 그는 장르의 경계나 영역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SF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SF를, 판타지적인 배경이 필요하다면 판타지를, 역사나 신화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그 또한 거리낌 없이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정통 SF 소설만을 애정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집에 오히려 실망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의 소설에는 경계도 제한도 없다. 개인적으로 켄 리우라는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배경을 바탕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설을 쓰게 된 데에는 그의 삶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많은 혼란과 의문이 그의 청소년기를 뒤덮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중국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이렇듯 수많은 의문 끝에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내가 어디 속하는지 혹은 어느 집단의 일원인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작가가 된 켄 리우는 마찬가지 생각으로 소설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쓰는 소설이 SF인지, 판타지인지, 역사나 신화 소설인지가 아니라 내가 쓰는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켄 리우는 머리말에서 위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들을 한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계속해서 위의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저 문장이 켄 리우의 소설들에 새로움과 놀라움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경계가 허물어질 때, 구분이 사라질 때,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합쳐질 때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기 마련이니까. SF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과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모노노아와레>를, 환상과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즐거운 사냥을 하길>과 <송사와 원숭이 왕>, <파자점술사>를, 소설 속 드라마를 느끼고픈 이들에게는 <종이 동물원>과 <레귤러>,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권하고 싶다. 만약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소설집 전체를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어나가길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안 풀려도 괜찮은 이유
인생은 퍼즐조각을 모으고 그것들을 이어 하나의 완성품을 만드는 과정같다는 생각이 든다 퍼즐 조각 하나하나는 가치가 없어보이고 이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조각들을 이어나가고 완성하고 나면 그제서야 그 퍼줄조각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퍼즐 조각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 내 삶에는 수많은 퍼즐조각들이 마주하고 있고 나는 이것들을 모으고 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모양의 퍼즐을 만들게 될것이며 퍼즐을 완성하는데는 공식이 있지도 않다. 모두 똑같은 퍼즐 조각을 같은 순서대로 완성해 나갔다면 그것은 개성과 가치가 없을 뿐더러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다보니 모두 똑같은 결과물을 만들 수도 없다.  아직도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퍼즐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중이고 어떻게 완성이 될지 알 수 없고 어떤 조각들을 모으며 살아야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남들이 만들고 있는 퍼즐과 비교하거나 그것을 따라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일이 안풀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남들이 모두 갖고있고 필수라고 말하는 퍼즐조각을 갖고있지 않다고 낙담할 필요가 없다 스티븐 잡스가 학비가 비싸 대학교를 자퇴한 이후 남들 모두 듣고있던 정규과목을 듣지 않고 본인이 흥미가 있다고 생각한 서체 교양 수업을 몰래 청강했을 당시에는 미래와 연결할 수 없는 아무가치없는 퍼즐조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을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퍼즐 조각이었는지 그때서야 알게 된다 지금 나에겐 아무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지금은 아무가치가 없어 보이는 조각도 나중에 완성을 하고 보면 그 조각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네 인생은 완성된 모습을 알 수 없는 퍼즐이다 ~~ 그니까 조각조각 만들어가보자구요 화이팅 !!
개인적으로 읽는 내내 감탄했던 배우의 필력 ㄷㄷ
편의점이 폐업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1층의 편의점이 폐업했다. 편의점인데 12시면 문을 닫으니 나같은 올빼미의 편의에는 썩 맞지 않는 편의점이었다. 다른 편의점은 길 건너에나 있으니 이제부터 담배는 줄고, 충치가 덜 생기고, 더 건강해질 것이다. 처음 여기로 이사왔을때 자기 딸이 좋아한다며 싸인을 부탁하던 편의점 아줌마는 그 후로 내가 다녀가는 내내 끼니를 챙겨 묻고, 일은 잘되는지 묻고, 더 필요한건 없는지 물으며 서비스를 챙겨주었다. 밥은 먹었다고 했고, 일은 잘되고 있다고 했고, 더 필요한것은 없다고 했지만 기어코 옆구리로 찔러주시는 음료수를 받아들고 머쓱하게 감사인사를 하곤했다. 어떤 날은 그 친절이 너무 불편해서 담배를 참고 차에 올라타 매니저의 것을 뺐어 문 적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식사는 하셨냐는 그 흔한 인사 한 번 먼저 건낸적도 없을 만큼 나는 무심한 단골이었고,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아줌마는 내 이름 뒤에 '씨'자를 못 떼냈던 것 같다. 아인씨. 아인씨. 지독히도 불편한 그 이름. 아마도 대구의 부모님 집에 살며 학교를 다니거나 이렇게 밤마다 술을 푸겠다고 놀러를 다니거나 했다면 우리 엄마가 그러지 않았을까. (물론 엄마는 나를 홍식이라고 하지만,) 난 또 그 마음이 그렇게 싫고 귀찮아 다정하게 대답 한 번 제대로 해주지 않는 무뚝뚝한 아들 노릇을 했겠지. 경상도 남자라 무심하다는 어쭙잖은 핑계로 10년쯤 후에는 매일 저녁 전화해 엄마의 안부를 묻겠다고 다짐한다. 어리석게도. 엊그제 마지막으로 편의점엘 갔을때. 그때도 이미 가득 찬 봉투 사이로 공짜 햇반을 꾹꾹 찔러 넣으며 아줌마는 내게 소녀처럼 수줍게 작별인사를 건냈다. "일 잘되고, 담배 좀 줄이고 아, 나 교회가면 아인씨 기도 해요. 나 기도빨 진짜 잘먹거든. 그니까 아인씨 진짜 잘될꺼야." 그런 말엔 무방비였다. 습관처럼 감사하단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진짜요? 기대할께요!'하며 장난스럽게 받아칠 그만큼의 세련된 구석도 내겐 없었다. 하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엄마에게 내가 느끼는것 처럼 죽도록 어색하고 간지러운 마음만 있을뿐. 서울에 사는 내내 1년 마다 집을 옮겨 다니며 만나왔던 기억도 나지 않는 우리집 1층의 편의점 아줌마, 아저씨, 알바생들. 내 엄마 보다 더 자주 나를 맞이하던 그 사람들. 어쩌면 처음으로 그들중 한 사람의 인사를 진짜라고 믿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흐릿하게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나는 서둘러 편의점을 나섰다. 그날따라 문에 달린 방울이 더 요란하게 흔들렸다. 내겐 기억할 필요 없는 소리. 딸랑딸랑. 딸에게 조금 더 가까운 엄마로 돌아가는 편의점 아줌마에게 그 방울소리가 얼마나 아련하고 고된 추억일지에 대해 감히 추측해 본다. 어젯밤. 담배를 사러 나가며 같은 시간이면 원래도 불이 꺼져있을 그 편의점이 그렇게도 아쉬웠던 것은 굳이 횡단보도를 건너야하는 불편 때문이 아니라 이 정신없이 바쁜 세상에 12시면 문을 닫는 편치 않은 우리 아파트 편의점 아줌마의 지독히도 불편했던 친절 때문이었으리라. 뒷통수가 간지러운 과한 친절들을 뻔뻔하게 누리던 삶을 잠시 접고 밤이면 감지도 않은 머리에 모자하나 얹고 어슬렁어슬렁 담배나 사러 나가는 보통의 삶 속에서 내가 다시 그런 불편한 친절을 느낄 수 있을까 되뇐다. 그것이 얼마나 사소하고, 가슴 뜨거운 행운이었는지. 출처: 이종격투기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앙테크리스타> / 아멜리 노통브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읽으면서 이입하다 못해 화가 나는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주인공의 친구로 나오는 크리스타가 너무 꼴 보기가 싫었는데 거기에 주인공 가족의 대처까지도 답답해서 화가 두배로 나는 것이다. 주인공 가족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갈 정도의 아량을 보이는데 그것이 마치 숭고한 행위처럼 쓰여있지만 정말 숭고한 행위인지는 의문이다. 현대 한국에 사는 나로서는 숭고하다기보다는 미련한 짓으로 보였는데 어쩌면 문화 차이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답답함은 어쩔 수 없었다. 주인공은 블랑슈라는 십 대 여자 아이다. 누구에게도 주목받거나 사랑받아 본 적이 없고 제대로 된 친구조차 없다. 블랑슈는 같은 대학을 다니는 크리스타라는 아이를 동경한다. 반짝반짝 빛나고, 누구에게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수많은 친구를 거느리고 다니는 크리스타. 어느 날 크리스타가 블랑슈에게 말을 걸고 블랑슈는 그 은총에 어쩔 줄 모르다 무엇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에 먼 거리에서 대학을 다녀 새벽같이 등교를 해야 하는 크리스타에게 학교에 가까운 자기 집에서 묵어도 된다고 말한다. 드디어 친구가, 그것도 아름답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친구가 생긴 블랑슈. 그러나 크리스타가 블랑슈와 단 둘이 있을 때 보이는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블랑슈를 조롱하고 멸시하고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려 든다. 블랑슈는 다른 이들과 있을 때 크리스타가 보이는 천사 같은 모습과 자신과 둘이 있을 때 보이는 악마 같은 모습 사이에서 헷갈려하다가 다른 이들과 있을 때의 그녀가 크리스타(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이름, Christa)라면 자신과 둘이 있을 때의 그녀는 앙테크리스타(사이비 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이름, Antéchrista)라고 생각한다. 블랑슈에 의해 크리스타의 앙테크리스타적 면모가 드러나면서 생기는 사건들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크리스타가 정말 꼴 보기 싫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한다. 아마 크리스타의 본모습은 앙테크리스타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사랑스럽고 빛나는 아이를 연기하지만 그 내면에서는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을 것이고 거기서 오는 불안감, 자괴감을 외면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자신을 꾸미고 연기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크리스타는 블랑슈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본모습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블랑슈였던 것이다. 결말부에 이르러 크리스타는 이렇게 소리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끝까지 믿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크리스타는 블랑슈가 앙테크리스타적인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도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주길 바랐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안식처인 블랑슈가 자신의 밑바닥까지 보고 경험한 뒤에도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길 원했던 것이다. 크리스타가 하는 짓이 짜증 나는 건 변함이 없지만 그 속이 어떤 마음인지는 이해가 가니 소설을 읽고 나서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블랑슈라면 아마 진작 크리스타를 손절했을 테니 한편으로는 블랑슈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와는 별개로 마지막에 나오는 블랑슈와 그녀의 부모님의 대처가 아주,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사랑과 배려가 무조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대처는 일견 아주 선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매우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블랑슈와 그녀의 부모님은 자신들이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안다는 것, 자신들이 이토록 선한 사람이라는 것에 스스로 도취된 느낌까지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무척 이기적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그러한 대처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 피해자이지만 그럼에도 비난과 고통을 견디면서 자신들의 도덕적 결백함에 도취되는, 자신들을 오해하고 비난하던 이들이 거짓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진실을 알릴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마치 그리스도처럼 타인들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믿고 도덕적 우월감에 젖어가는 모습.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크리스타만큼이나 꼴 보기 싫었다. 사실 이 소설은 아침드라마 보듯이 단숨에 완전히 이입해서 읽었다. 아주 짧고 또 아주 재밌는 소설이다. 어떤 이에게든 별 무리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소설 속 한 문장 '저 애의 이름은 크리스타가 아니야! 앙테크리스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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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와 서술어의 호응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 맞추기는 글쓰기의 기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수한다. 주술 관계가 헷갈리지 않으려면 문장이 짧아야 한다. 주어는 길게 쓰지 말자. 예) 운동장에는 강아지와 새가 날고 있다 -> 운동장에는 강아지가 뛰고 있고, 새가 날고 있다. 수식어는 수식 대상에 가깝게 놓기 수식어는 수식하는 대상에 가깝게 놓는 게 좋다. 그래야 수식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헷갈리지 않는다. 수식어의 위치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다. 예) 낮에 너무 더워서 진짜 얼음 물을 마시고 싶었다. -> 나제 너무 더워서 얼음 물을 진짜 마시고 싶었다. 능동형 쓰기 우리말에서는 피동형보다 능동형을 많이 사용한다. 부득이하게 피동형을 써야 뜻이 전달되는 경우에만 쓴다. 타동사뿐마 아니라 자동사까지 피동형으로 잘못 쓰는 일은 피하자. 예) 우리 학교는 용산구에 위치한다. -> 우리 학교는 용산구에 있다. ‘~의’ 사용 자제하기 ‘~의’는 일본어의 ‘~의(-の)’ 표현이다. 일본어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の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말은 띄어쓰기가 있으니 ‘~의’를 쓰지 않아도 된다. 예) 그 대학의 학생의 평균 학점의 수준 -> 그 대학 학생의 평균 학점 수준 소리 내 읽기 마지막으로, 자신이 쓴 글을 소리 내 읽어보자. 읽다보면 어색한 부분들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만약 그런 점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읽히는 단어나 문장으로 바꿔보자. Contributing editor 박이나 출처: 알렛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