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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테토의 핸드폰 잠금화면 (feat. 초상화 주인찾기)

아이폰 ios16 업데이트한 잠금화면을 캡쳐해 인스타 스토리에 올린 마크테토
(Tmi. 아이폰 사진에서 객체를 자동으로 누끼따서 시간표시가 사진을 가리지 않도록 조정 가능함)
웬 초상화인가 했는데....🤔

마크테토가 2019년 한 경매에서 산 작품이었음.
남자의 눈빛에 매료되어 초상화를 샀지만 그림 속 인물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아 마크는 이 인물을 찾으려 하는데.....
기법 분석해서 시대도 예측해보고

화풍도 유추해봄


그러다 안면인식 프로그램도 돌려보는데...


비슷한 인물을 찾은 것 같음

이덕응 선생은 전주이씨 선원계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자 1919년 고종황제 승하소식에 슬퍼하며 황단을 설단하여 황단제를 행한 인물이라고 함.
결론은 초상화 속 인물이 이덕응 선생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마크테토는 이 초상화를 모나리자 부럽지 않은 귀한 작품으로 여긴다고 함.
그리고 실제 이덕응 선생이라면 이 작품이 문화재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도 하는 것 같더라고!




더 자세한 마크테토의 초상화 인물 찾기는 스토리 하이라이트에 박제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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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진(=일본): (툭~치면서) 야~!! 문동은(=한국): (겁먹은듯이) 응? 박연진: 미안해 문동은: (놀란듯이) 뭐라고? 박연진: (짜증내면서) 미안하다고~!!말끼를     못 알아들어? 내가 때리고 갈궈서 사과하는거다 문동은:(훌쩍거리며) 아..알겠어 박연진:(비웃는듯이) 사과했으니까 됐지? 나 간다~!! →→ 이제부터 추악한 피해자코스프레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이장면보면서 어떻게 생각할까? 이건 사과가 아니다 조롱이다 이딴 사과는 개나 주라고 해라 이것을 일본이 그대로 따라하고있다 우선, 난 좌파가 아니다 이 글보면 좌파라고 개거품물게 뻔하니 닉넴보면 모르나? 난 일본,북한/중국/러시아 모두 싫어한다 추악한 세력은 모조리 다 싫다 난 중도정파다 좌파라고 모욕하지 말라 일본의 사과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역대 고노,무라야마,고이즈미 담화때부터 제대로된 사과를 한것이 단 한번도 없었다 위안부,강제동원을 빼고 인정안하면서 형식적인 담화를 한거다 이걸 한국인이 뽑아준 일본대통령 윤씨가 이미 수십번사과했다고 억지부리는거다 기가막혀 말이 안 나온다 모름지기 사과는 이렇게 해야하는거다 유럽대표선진국 독일의 경우를 보자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고개숙이는 메르켈총리 그보다더해서 피해자에게 아예 무릎을 꿇고 사죄드리는 빌리 브란트 독일총리, 그것이 참된 지도자의 자세 똑똑히보아라 이것이 사과이자 사죄다 너희들은 한번도 진심으로 사죄한적 있느냐? 만약 한국께 죄송한 마음이 있다면 이렇게 해야한다 - 일왕,총리가 직접 위안부피해자(할머니),강제동원피해자와 일본만행산증인께 찾아가서 무릎꿇고 읍소해야함 우리가 너무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이렇게~ (하긴 일왕이 백제후손이니 괴리감없을거다) - 일본전범기업총수가 일왕과 마찬가지로 같이 행동하며 피해자께 직접 배상금전달 - 다시는 영토에 욕심 안 부리겠다는 서약과 독도영유권 주장 철회 - 야스쿠니신사참배 다시는 안하겠다는 서약 - 진실된 역사를 바로잡으며 교과서왜곡과 세뇌계획을 철회와 군국주의상징인 욱일기소멸화 약속 이렇게 해야한다 알겠냐? 추악한 제국주의무리들아 근데 참으로 더러운 일본정치인은 그와 반대로 가고 있다 - 한국산업을 망가뜨리기위해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지정 제외 : 이것때문에 일본불매의 시발점이자 한일경제역전의 도화선이 됨 -전범기업 배상금지급안 거부 -시도때도없이 독도영유권주장, 야스쿠니신사참배, 욱일기사용장려 -모든 경제적,외교적 능력을 총집결시켜 소녀상설치방해, 제국주의역사 교과서조작 참으로 추악한 정치인이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이렇게 추악한 집단은 없을것이다 그걸 국민의힘이 따르고 응원하고 있다 반일은 나쁜것이라는 몰지각한 주장으로 세뇌시키면서 또, 50년간 세뇌된 극우보수국민들이 2번을 찍어주고 있다 극우세력들은 말한다 케케묵은 과거는 잊자고~ 미래를 봐야 한다고 그 미래가 아름다울것 같은가? 추악한 역사를 부정하면서 왜곡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미래~ 정말 좋을거 같지? 모름지기 국민의 자세는 이래야한다 잘못된 역사와 과거를 바로잡고 그걸 타산지석으로 삼아 현재를 가꾸고 찬란한 미래를 준비해야한다 그것이 진리이자 숙명이다 헌데 일본은 그걸 반대로 하고있다 참으로 몹쓸 후진국이지 않은가? 우리 대한의 중도정파는 - 우리의 역사를 탐구하고 바로잡아 시대에 당당히 요구한다 - 우리를 망치려는 추악한 세력의 만행을 전세계에 널리 알린다 - 왜곡된 역사를 막기위해 악을 쓰는 무리는 맞서 싸우며 진실을 멀리멀리 퍼트리기위해 악을 쓴다 반대하면 더욱더 힘을 쓴다 그것이 대한의 진리이자 숙명이다
영국 화가의 눈으로 본 그때 그 조선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2 20세기 일본 화단의 대가로 꼽히는 이토 신수이(伊東深水, 1898-1972)가 그린 키스의 초상화이다.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 1919년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곧, 일제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풍습과 경관에 빠져들었고 깊은 애정으로 이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그림은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다가 2006년에야 재미동포 송영달 선생의 노력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됩니다. 아마,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을 터인데, 1920~1940년대 무렵 옛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름답고 정밀하게 나타나 있는 그림들을 보면 경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 Marriage Procession, Seoul_1921 혼례 행렬 이 그림은 혼례 행렬, 정확히 말하면 신부 행차입니다. 꽃가마가 아주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네요. 행렬 앞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신랑 집으로 가마를 인도하여 갑니다. 그 인도자는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습니다. 청사초롱을 든 사람들이 가마 앞뒤에 있고,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따라가고, 빨래하던 아낙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한 아낙은 길에다 물을 버리고 있네요. 뒤로 동대문이 보이는데, 다리는 청계천의 어느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East Gate, Seoul, Moonlight_1919 달빛 아래 서울 동대문 푸른 달빛 아래의 동대문(興仁之門). 이 그림에 보이는 돌담 표현은 목판화로는 하기 어려운 기법이라고 합니다. 키스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목판 원본이 소실되었고, 이 그림은 키스의 저서 <동양의 창>에 실린 것인데, 현재 누가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답니다. ◆ East Gate, Pyeng Yang, Korea_1925 평양의 동문 “1392년에 지은 평양 성곽 중 동쪽에 있는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서울에 있는 동대문만큼 웅장하지는 못하지만, 평양의 동문은 그 단순한 스타일과 함께 연륜의 은은함이 배어 있는 문이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은 그 건축법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더욱 절제된 형태로 발전시켜 한국 특유의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평양의 동문은 바로 이런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 Riverside, Pyeng Yang_1925 평양 강변 “대동강변의 이 정자는 약 150년 된 것이라고 하며, 그 주변 환경이 너무 완벽하여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정자 터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키스가 대동강변이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가 있는 근처인 듯싶습니다. ◆ Wonsan_1919 원산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 키스의 그림을 보니 과연 원산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겠습니다. 밤하늘의 별빛과 바다 위 배의 불빛이 기막힙니다 ◆ Korean Domestic Interior 한옥 내부 “비교적 여유 있는 집의 내부 풍경이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는데,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 준다.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방은 대문 가까이 있다.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길가에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마당이 있고 부유한 집은 안채 앞마당까지 해서 마당이 둘이다. 한국 사람들은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방바닥은 노란 장판지로 덮여 있는데 항상 반짝반짝 닦아놓고 있다. 사랑방 나무기둥에는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가리킨다.” ◆ The Eating House 주막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밖으로 새어 나온다. 주막은 추운 겨울날 먼 거리를 걸어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주막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달을 쳐다보는데 최고로 좋은 집 >” ◆ The Hat Shop 모자 가게 “간판에 ‘높은 모자, 둥근 모자, 리본 달린 것, 세상 모자란 모자는 다 있습니다’라고 써 있다. 이 자그마한 모자 가게의 주인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서 키가 큰 친구들까지도 가게 안에 다 들어오게 했다. 그들은 거기서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눈다. 한국에서 모자는 중요하다. 학자는 특별한 모자, 그러니까 검은 말총으로 된 모자(갓)를 쓰는데, 오로지 중국 고전을 다 읽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총각은 약혼식에서 노란 짚으로 만든 둥그런 모자를 쓴다. 결혼식 날에는 한 사람이 빨간 모자를 쓰고 손에는 백년해로와 신의의 상징인 기러기를 들고 간다. 이런 옛 풍습은 한국에서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 The School - Old Style 서당 풍경 “하늘 천, 따 지, 달 월, 사람 인. 후렴처럼 반복하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여름 해는 따갑게 비치고 있었는데, 서울 성문에서 멀지 않은 그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서당 안을 슬쩍 들여다본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을 외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앞뒤로 몸을 흔들어댔다. 나이 많은 훈장은 실내용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한시를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훈장은 조금도 학생들의 공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반장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긴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다가 학생의 외는 소리가 끊긴다거나 조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 곧바로 등이고 어디고 내려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린 학생은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글 읽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 Temple Interior 절의 내부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이 사당은 전쟁의 신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노란색의 작은 지붕 밑에 나무로 깎은 시커먼 조각상은 약 3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 한국을 지켜주었다고 믿어지는 중국 장군의 영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사당은 이상한 모양의 조각상들로 꽉 차 있었고 내부는 어두컴컴하였다. 얇고 가벼운 치마를 입고 땅에 납작 엎드려 염불하는 여인들은 마치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떨어진 꽃잎처럼 보였다.“ ※ 여기서 말하는 사당은 지금도 동대문 인근에 있는 관제묘를 말합니다. 동묘라고도 하고 관운장을 모시고 있죠. ◆ White Buddha, Korea_1925 흰 부처 이 그림의 흰 부처는 현재 서울 홍은동 보도각에 있는 백불(白佛)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A Game of Chess_1936 장기두기 “전형적인 한국 시골의 두 노인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때로는 길가에 앉아서도 한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틀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그네는 대개 소나무에 줄을 맨 것이지만, 때로는 벽돌로 세운 기둥에 매기도 한다. 그네는 이런저런 명절에 타기도 하지만 주로 봄에 타는 듯하다.” ◆ Kite Flying 연날리기 “서울은 연날리기에 최고로 좋은 도시이다. 연 날리는 철이 돌아오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온통 형형색색의 연으로 뒤덮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각종 크기의 연을 파는데, 값도 싸서 어떤 것은 불과 일전밖에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려본 것은 전형적인 아이들의 연 날리는 모습이다.” ◆ New Year's Shopping, Seoul_1921 새해 나들이 키스는 자신의 저서 <동양의 창>에 “정월 초하루인 설은 한국 최대의 명절이다. 이 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썼습니다. 광화문 해태 상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이 풍선을 가지고 놀고 있군요. 옛 우리의 세시풍경을 그린 귀중한 그림입니다. ◆ Young Korea_1920 한국의 어린이들 색동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 두루마기에 예쁜 꽃신을 남자아이들을 나란히 앉혀 놓고 그림을 그렸군요. 키스의 초기작 중 하나인데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이들이 설빔차림을 한 것 같군요. ◆ Two Korean Child_1925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아이들의 의상은 그 디자인에 있어서 부모나 조부모가 입는 옷과 다를 바가 별로 없으나 색깔이 더 다양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분홍장미 색깔의 넓은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오게 입고, 어린 남자아이들도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조금 큰 남자아이들의 바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통이 넓고 발목까지 온다. 갓난아기들의 저고리에는 색동 소매가 달려 있다.” ◆ Country Wedding Feast_1921 시골 결혼잔치 한국인의 풍습을 흥미를 가지고 관찰한 키스는 결혼식 장면을 여러 장 그렸습니다. 혹 그보다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더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번은 신부 행렬을 보려고 급히 따라가다가 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아이 어른 다 합하면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흥겹게 잔치를 치르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 Korean Bride_1938 한국의 신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자리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디어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신부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라는 키스의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격세지감을 들게 합니다. ◆ Wedding Guest_1919 결혼식 하객 결혼식 하객으로 온 이 부인은 머리에 장식이 달린 조바위를 쓰고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키스의 관찰입니다.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 Returning from the Funeral_1922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 밖에 묻는 것이 법이라, 겨울 저녁 어두워진 후에 등불을 켜 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성문의 현판에 ‘東大門’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은 아니로군요. 키스가 영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영국 왕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 The Widow_1919 과부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 Embroidering, Korea_1921 자수놓기 긴 머리에 빨간 댕기를 하고 수를 놓고 있는 처녀. 혼기를 맞아 자신의 혼수 준비를 하는 걸까요. ◆ Woman Sewing 바느질하는 여자 “중류 가정의 한 여자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그녀의 옆에는 바느질 그릇과 인두가 꽂혀 있는 놋화로가 놓여 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 A Hamheung Housewife_1921 함흥의 어느 아낙네 “한반도 북쪽에 있는 함흥의 여자들은 서울 여자들보다 키도 크고 자세도 더 꼿꼿하다. 독특한 옷차림으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닌다. 큰 두건 같은 머릿수건은 치마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대낮에 그렸다. 그녀는 땡볕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빨래를 담은 붉은 함지를 이고 있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가락지 두 개를 정성스럽게 끼고 있었다.” 이 그림과 아래의 ‘아침 수다’는 같은 소재의 그림입니다. ◆ A Morning Gossip, Hamheung, Korea_1921 아침 수다 "아침에 빨랫감을 이고 씻어야 할 요강을 들고 냇가로 나가던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머릿수건을 기술적으로 두르는 것이 풍습이며, 어떤 때는 치마나 아이들 옷으로 머리를 둘러싸기도 한다. 치마는 풍선처럼 넓게 퍼져 있고 저고리는 무척 짧다.“ ◆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_1939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 “중하층 계급에 속하는 한국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추운 겨울이라 머리에는 털이 안으로 달린 남바위를 쓰고 그 위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있다. 하얀 무명옷에는 솜을 넣어 방한을 하고 있다.” ◆ The Country Scholar 시골 선비 “이 선비는 원산 사람이다.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인 선비 의상은 8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모자도 옛날식이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는 끝 부분이 백옥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복장과 잘 어울렸다..선비는 그 부분이 잘 보이도록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옷고름은 연홍색 비단이고 옷은 엷은 옥색이었는데 까만 단하고 훌륭한 색깔의 조화를 이루었다. 이 나이 많은 한국 선비와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좋은 가정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 등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매너는 은근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는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 Young Man in Red 홍복을 입은 청년 "이 청년은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입궐할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다. 붉은색의 겉옷 밑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백색 옥돌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패옥 소리가 낭랑했다. 거북이 등과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는 꼭 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 위로 둥그렇게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내린 에이프런에는 금으로 된 단추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 등급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색 칠을 했고, 신발은 넓적하고 코끝이 뭉특해서 발이 작아 보인다.“ ◆ A Daughter of House of Min_1938 민씨 가문의 규수 “이 처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살된 명성황후의 친척이다.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또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한국 양반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얇은 천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발에 아주 잘 맞았다. 만약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그의 멋진 발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으리라! 훗날 나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이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모녀에게서 그 아버지의 우아함이나 온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영어를 잘하고 꽤 똑똑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난 듯해 기뻤다.” 처녀의 아버지는 조선 말기 최초의 프랑스 공사였다는 것으로 보아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권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02년에 주불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공사로 활약한 민영찬으로 추정됩니다. 민영찬은 국권을 빼앗긴 것을 분히 여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입니다. ◆ The Gong Player_1927 좌고 연주자 이 악기는 조선 말기 화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도 보이는 좌고(座鼓)로 생각되는데, 좌고는 궁중음악 연주에 사용되는 북입니다. 보통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으로 연주하거나 춤 반주를 할 때 좌고를 치는데, 앉은 채로 연주할 수 있도록 높이가 낮은 틀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칩니다. 좌고의 북통에는 용을 그리고, 북면에는 태극 무늬를 그려 넣습니다. ◆ The Flute Player_1927 대금 연주자 "이 사람은 과거 국악원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음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잇다. 다행히도 나는 국악원 사람을 몇 명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종묘제례 때 보았던 아주 희귀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제일 보기 드문 악기는 다듬지 않은 옥같이 보이는 삼각형의 돌을 여러 개 나무틀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편경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치면 전 음계의 음정을 낼 수가 있었고 소리가 아주 좋았다. 대개는 피리소리의 효과를 높이는 데 사용하였다. 또 오리 모양으로 만든 나무딱따기도 있었는데,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전후좌우로 돌아가면서 소리를 냈다.(박을 가리킵니다). 북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는데 언제나 피리소리가 제일 고음이었고 또 제일 아름다웠다. 이 대금 연주자는 연주도 잘하지만 행동도 점잖아서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이 잘생겼으며, 대금을 부는 사람의 섬세한 손놀림이 정말 보기 좋았다.“ ◆ Court Musicians, Korea_1938 궁중악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전통 한국음악의 정수인 궁중음악이 사라져갈 무렵, 키스는 궁중악사들을 애써 찾아 몇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아마 이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종과 순종 재위 시에 궁중음악을 연주하던 마지막 궁중악사들로 생각됩니다. 출처
독일인들이 히틀러에 공감한 이유...jpgif
1차대전 이후, 베르샤유 조약은 독일을 짓누르고 있었으며, 독일인들은 절망에 허덕이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강력히 주장했던 '독일에게 굴욕을 줄 정도로 가혹할 정도의 채무'에 반대했으나 프랑스-벨기에는 채무 불이행을 근거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 서부 최대 공업지역 루르 지역을 침공하여 강제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루르 점령'(Ruhrbesetzung) 사건이다. 1923년 3월 독일 루르, 프랑스 군의 행렬.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지 않는 독일인들이 프랑스 장교로부터 폭행당하고 있다. 2년에 걸친 강제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 군대는 130여 명의 독일인을 총살했다. 군대를 제한당한 독일은 변변찮은 항의를 할 수가 없었으며, 2년의 점령기간 동안 9억 달러의 차익을 남긴 프랑스 군은 25년 철수했지만 이를 계기로 독일 민중 사이에선 베르사유 조약과 승전국에 대한 적개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 때, 히틀러와 나치가 등장했다. 나치 독일, 베르사유 조약의 무효를 외치며 '라인란트 재무장' 선포 대독일의 통일을 외치며 오스트리아, 체코 주데텐란트 지역 합병, 폴란드 침공 이를 본 영국-프랑스-벨기에 3국 연합군 결성 영국-프랑스-벨기에 대 독일 동맹,  나치 독일에 공식 선전포고 독일이 영국-프랑스 동맹과 정면으로 싸워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 아무리 독일이 발빠른 경제성장을 일궈내 막강한 공업능력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들, 상대는 로마 제국 이후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인류 역사상 최강국인 대영제국과, 그 대영제국을 상대로 수백년을 나란히 경쟁한 프랑스 식민제국이었다. (중략) ... ' 1939년 프랑스 식민지담당장관 폴 레노의 모병 연설과 1940년 독일 국방군 모병 포스터의 문구 1940년 5월 독일 군수참모 요한 폰 킬만제크 준장, 제국화학청으로부터 각성제 용도의 '페르비틴' (메스암페타민, 필로폰) 30,000정 인수완료. "마스강 도착까지 3일! 4일 째 마스강을 건넌다! 필요시, 본인은 귀관들에게 3일 정도는 취침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제19기갑군단 하인츠 구데리안 기갑대장- 제1기갑사단 프리드리히 키리히너 소장 및 전투병력 전원 제7기갑사단 에르빈 롬멜 소장 및 전투병력 전원 각성제 페르비틴 (메스암페타민) 복용.  프랑스전 개전, 독일군 진격 시작 진격하는 독일 제1기갑사단 "조국의 모든 전우들이 우리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 뚫어내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 우리가 길을 연다. 우리는 대 독일의 선봉사단이다. 죽더라도 달리다가 죽자!"  -1940년 5월 9일, 제 1기갑사단장 프리드리히 키르히너 소장-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선전포고에  프랑스 본토로 치고 들어가는 독일군 141개 사단의 진격속도.   벨기에군 50만 궤멸, 네덜란드군 15만 궤멸, 프랑스군 250만 궤멸, 수세에 몰린 영국의 30만 대륙원정군 독일 15기갑군단 제7기갑사단 에르빈 롬멜 소장, 프랑스 최정예 프랑스 제1기갑사단, 제4기갑사단 격파. 독일군 프랑스 마스강 도하 덩케르크에 포위된 영국 대륙원정군 30만 '독일의 형제들이여! 우리가 마침내 해냈다!' - 나치 독일 기관지 '검은 방패'의 당시 1면 헤드라인 -  대서양과 맞닿은 프랑스의 서쪽 끝, 브리타뉴를 점령한 독일군 프랑스 수도,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는 독일군 보병사단 휘날리는 나치깃발 파리 입성 선봉부대의 사열을 받으며 항복 서명장에 도착한 히틀러. 항복 서명은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것과 같이,  똑같은 기차칸에서 이루어졌다.  6주만에 프랑스를 정복한 독일군 귀국열차를 향한 환영인파  독일 장병들이 탑승한 열차가 역을 지나갈 때, 모든 일반 열차는 운행을 멈추었다. 독일 장병들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독일인들. 1940년 독일 베를린, 라디오에서 격앙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장병들이 도착했다는 긴급 보도를 송출했다.  히틀러와 귀환한 군인들을 보기위해 생업을 멈추고 몰려드는 독일인들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고 귀국한 히틀러 시가행진 인산인해를 이룬 베를린 프랑스에 대한 복수심으로, 부작용은 전부 씹고 필로폰 30,000정을 투약하고 개전선포하던 시절 독일 ... 출처 : 이종격투기
글 하나로 초한지 속성 마스터하기 (feat. 패왕별희).jpg
때는 기원전 2세기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라고 해서 한반도의 삼국시대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음. 이 중국을 통일하고 최초로 황제가 된 사람이 등장하니 그 유명한 진시황 되겠음. 불로초 찾고 병마용갱 지은 그 할배 맞음ㅇㅇ그러나 진시황의 폭정으로 인해 진나라는 통일과 동시에 망테크를 타고 있었음. 이때 등장하는 초한지의 주인공 1이 항우임. 사실 항우는 중국의 전통적인 영웅관에 완전히 어긋나는 인물임. 중국은 한반도보다 땅이 훨씬 넓고 다민족 국가잖아? 그래서 중국의 이상적인 군주라 하면 (본인의 지력이나 무력이 좀 딸리더라도) 능력 있는 신하를 알아보고 적절하게 등용할 줄 알며 포용력과 너그러움을 갖춘 군주임. 한국인에게 조금 더 익숙한 삼국지를 예로 들자면, 유비는 지 능력 조또 없음. 싸움은 관우랑 장비가 다 하고 지혜는 제갈량이 냄. 하지만 유비는 그들을 이끄는 인덕이 있는 사람임ㅇㅇ 항우를 냉정하게 평가하면 지휘관으로서는 정말 말하는 게 입 아픈 명장이지만 그거 빼면 무력과 카리스마에 스탯 몰빵한 망캐임. 대가리 멍청하고, 군주로서의 자질은 바닥이고, 성격 더럽고, 백성을 사랑하는 너그러움 따위 눈을 씻고 봐도 없음. 하지만 항우는 중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영웅 중 하나임.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함께 알아보겠음. 항우는 초나라 명장 집안의 후손이었음. 초록색이 초나라인데, 중국이 여러 제후국으로 갈라져있던 춘추전국시대 때 진나라와 더불어 가장 강력하던 국가임. 항우는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루무렵 태어났지만 삼촌 항량이 지역의 유지였기 때문에 모자람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냄. 간단히 말해서 귀족 도련님이었음ㅇㅇ 항량은 조카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치지만 항우 존나 건성건성함. 빡친 항량이 항우를 꾸짖자 항우의 대답이 "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할 뿐입니다. 검술 역시 한 사람과 싸워 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둘 다 배우기는 충분치 못하니, 만인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겠습니다." 였음. 만인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은 병법을 뜻함. 군대를 이끌고 배치하고 전투하는 전술 ㅇㅇ 당시 진시황은 툭하면 전국을 순례했는데, 그 웅장한 행차를 지켜보던 항우는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해야지!!" 라고 포부를 드러냄. 항우는 키가 180이 넘었음. 지금도 큰 키인데 기원전인 저 때는 그냥 존나 거인임. 거기에 힘도 쎄서, 삼촌 항량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도 내심 조카의 미래를 기대하게 됨. 이렇게 항우가 성장하던 중 진시황이 불로초 찾기에 실패하고 뒤짐ㅋㅋ.. 진시황이 죽고 아들 호해가 즉위하는데, 호해의 곁에는 조고라는 환관이 있었음. 조고는 간신배의 조상 같은 사람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긴 했지만 아직 국가로서 완벽하게 자리 잡지는 못했음. 이전까지 각자 다른 나라였잖아?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서로 다른 나라였고, 반란이 끊이질 않음. 예를 들어 삼국시대가 끝나고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했을 때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부흥 운동을 한 것처럼ㅇㅇ 진시황부터 만리장성 건설, 불로초 찾기 등 온갖 대건축과 사치를 부리느라 가혹한 세금을 매기고 엄벌주의를 앞세운 정치를 해서 불만이 많은 상태였음. 근데 호해가 즉위하고 지 애비보다 더한 사치와 방탕 행보를 보이니 사람들이 가만 있겠음? 전국시대 6국을 재건하려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남. 항량은 조국 초나라 왕의 후손인 웅심 이라는 양치기를 찾아 왕으로 옹립하고 전쟁에 뛰어듬. 항우는 당연히 삼촌의 진영에서 종군함. 이 때 초한지의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니..... 유방임. 유방은 항우보다 15살 많은데, 원래 패현이라는 마을의 동네 건달 백수였음. 소하, 번쾌 등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움박질하고 똥 폼 잡는 삼류 양아치 같은 인간이었지만 주인공의 자질인 패기 하나는 제대로 있어서, 시황제의 행차를 보고 "오호! 대장부라면 모름지기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고 함. 항우가 비슷한 멘트를 쳤을 때 삼촌 항량이 기겁한 걸 생각하면 저런 무모한 패기가 초한지 주인공의 필수조건인가 싶음. 여튼 이렇게 백수짓하며 사고 치고 말단 벼슬이나 하던 유방은 어느 날 여공이라는 사람의 집들이에 가게 됨. 여공은 다른 지방 사람인데 패현으로 이사온 거였음. 여공이 패현의 현령과 아는 사람이다 보니 다들 잘 보이려고 하례금을 바치고 있었음. 거기 등장한 유방은 대뜸 하례금 일만전 < 이라고 적은 어음을 내밈. 물론 땡전 한 푼 없는 채로(....) 패현의 서기 겸 유방의 친구였던 소하는 여기가 무슨 외상 술집인 줄 아냐고 기 막혀 하지만 관상 보길 좋아하던 여공은 유방의 관상과 기세에서 비범한 기운을 느끼곤 귀히 대접함. 여공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유방을 따로 불러 자기 둘째 딸 여치를 소개시키며 결혼을 주선함. 여공의 부인은 "동네 건달 따위를 사위 삼다니 님 미침???" 했지만 여공이 강력하게 혼사를 밀어붙여서 유방과 여치는 결국 결혼하게 됨. 진짜 관상에 뭐가 있었나 봄. 한편 이 시기 진나라는 진시황릉을 만드느라 온갖 사람을 동원해 일을 시키고 있었음. 말단 벼슬을 하던 유방은 패현의 죄수들을 공사 현장으로 데리고 가는 업무를 맡게 되는데, 공사 현장이 원체 시궁창이다 보니 죄수들이 하나둘 도망침. 그걸 지켜보던 유방은 대뜸 행렬을 멈추더니 "가고 싶은대로 가라. 나도 튈 거임ㅋㅋ" 이러고 속 편하게 술을 진탕 마심(....) 죄수들은 대부분 도망쳤지만 그 중 몇은 유방을 따르고 싶어했고, 유방은 그들과 함께 도피생활을 하다 진시황이 죽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날 무렵 친구 번쾌의 연락을 받고 패현으로 돌아와 마찬가지로 거병함. 하지만 패현의 젊은이들이라고 해봤자 고작 몇 천임. 유방은 몇 번의 전투를 겪고 항우가 모시는 초 회왕의 아래로 들어가게 됨. 물론 진나라가 괜히 통일 국가가 아니라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 진나라 최후의 명장인 장한은 부활한 위나라를 멸망 시킨 후 초나라 군대를 역습하고, 항량은 전사함. 항우와 유방이 이끄는 초나라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후퇴함. 한편 초 회왕은 먼저 관중에 입성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공표한 상태였음. 지도에 표시된 땅이 진나라의 중심인 관중인데, 생산력이 좋아 당나라 시대까지 대부분 국가의 수도였던 중요한 땅임. 관중의 제후가 되는 건 당연히 누구나 혹할 제안이었음. 아버지 같은 삼촌을 진나라 군대에 잃은 항우는 당연히 서쪽의 진나라 땅으로 가고 싶었음. 하지만 항우는 얼마 전 양성이란 곳을 공격할 때 결사항전하는 주민들 때문에 자기 예상보다 힘든 싸움을 하자 분노해 함락한 양성 주민 5천명을 전부 죽여버린 전적이 있었음. 다시 말하지만 이건 기원전 시대임. 지금처럼 인구가 많지 않기에 백성 하나하나가 곧 국력일 때임. 항우가 얼마나 잔인하며 군주로서 자질이 없는지 보여주는 예시임. 더군다나 관중 땅은 가장 중요한 요충지임. 회왕의 측근들은 항우를 보내면 저 잔혹한 성격 때문에 민심이 돌아설 거라며 항우보다 군사적 역량은 좀 떨어지더라도 유방을 보내는 게 낫다고 조언함. 한편 항량을 죽인 장한은 북으로 진군해 부활한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었음. 이대로 진나라 군대가 제후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면 초나라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움. 회왕은 결국 유방을 서쪽, 관중으로 보내고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도와주게 하면서 항우를 송의의 차장으로 임명함. 서쪽에 못 가는 것도 짜증 나는데 별 공적도 없는 송의 휘하에서 진군하라니 항우는 빡쳐 돌아가실 지경이었음. 항우는 간신히 화를 참고 송의와 함께 조나라로 가지만 송의는 장한을 공격할 생각은 않고 마냥 시간만 보냄. 폭발한 항우는 송의를 죽여버린 후 회왕에게 "송의가 초나라를 배신하려고 해서 처단했음ㅇㅇ" 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함. 초나라를 재건 시킨 주축이 항우의 삼촌인 항량인데다 앞서 말했듯 무관으로서의 자질은 정말 킹왕짱인 항우였기에 회왕은 하는 수 없이 항우의 쿠데타를 승인하고 항우에게 상장군 직을 넘겨줌. 항우는 곧장 출정해 진나라 군대를 박살 내고, 장한에게서 항복을 받은 후 말을 돌려 진나라 수도로 감. 근데 여기서 역대급 병크를 또 터뜨려버림(....) 신안대학살임. 항우가 장한의 항복을 받고 서쪽으로 진격하던 시기, 자영이라는 진나라 황족이 조고를 처단하고 진나라의 왕이 됨. 하지만 진나라의 국운은 이미 다 한 상태였음. 자영은 스스로 성문을 열고 유방에게 항복의 의사를 표함. 몇몇 장수들은 자영을 죽이자고 했지만 유방은 "회왕이 나를 관중으로 보낸 건 내가 관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항복을 한 사람을 죽이는 건 옳지 않다." 며 자영을 살려주고 법삼장을 약속함. 살인을 한 자는 죽이고, 남을 다치게 한 자는 중죄로 처벌하고, 물건을 훔친 자는 감옥에 가둔다. 이 세가지 법 외에 나머지 법은 전부 없앤다는 뜻이었음. 진나라의 가혹한 엄벌주의 정치와 세금에 고통 받던 백성들은 유방을 환영하며 유방이 황제가 되기만을 바라게 됨. 문제는 유방이 진나라의 멸망 소식을 항우에게 안 전했다는 거였음(.....)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 인해 항우 진영 분위기는 개판이었음. 그도 그럴 게 초나라 군사들은 진시황릉 공사에 끌려가 개고생을 했거나, 가족이 만리장성 건설 현장에서 죽었다는 식으로 진나라에 원한을 가져 초나라 부흥군에 합류한 경우가 많았음. 아무리 장한이 항복했다지만 초나라 군사들 눈에 진나라 군사들이 곱게 보일 리 없음. 반대로 진나라 군사들도 불안했음. 초나라 군사는 자기들을 노예 취급하며 괴롭혀대니 "이러다 우리 죽는 거 아님....?" 걱정이 저절로 나옴. 양쪽이 다 이러니 자연히 진영 분위기는 개판이 됨. 하루라도 빨리 관중으로 가야했던 항우는 포로들의 존재가 점점 거슬렸음. 군대 분위기는 엉망이지, 행군 속도는 느려지지, 군량도 부족하지. 군량 문제가 제일 컸음. 송의가 조나라 땅에서 지체한 탓에 안 그래도 군량이 부족한데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송의&유방을 기용한 회왕이 항우의 군대를 제대로 지원해 줄 리 넚었음. 참다 지친 항우는 야심한 밤 포로들을 전부 죽여버림. 무려 20만명을 ㅇㅇ...이게 신안성에서 일었나기 때문에 신안대학살이라고 부름. 항우의 선택은 인간된 도리를 떠나 군주로서 정말 멍청한 짓이었음. 유방은 관중 땅에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잖아? 애초에 진나라 군사들도 진시황의 건축 사랑 때문에 많이 고생한 사람들임. 좋게 말로 설득해서 자기 사람으로 회유하거나, 정 감당이 안 되면 그냥 풀어주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되는 거였음. 이렇듯 항우는 업보를 적립하며 관중으로 진격하는데..... 엥....이미 유방이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상태였음. 이러다간 중원의 알짜배기 땅인 관중이 유방의 소유가 되게 생김. 게다가 유방은 관중 땅이 욕심 나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함곡관을 독단적으로 막아버리는 실책을 저지른 후였음. 또 빡친(....) 항우는 함곡관을 단숨에 박살 내버리곤 유방을 죽일 결심으로 홍문이라는 곳에 진영을 침. 항우의 또다른 삼촌인 항백은 유방의 책사인 장량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항우의 성격에 다 죽일 게 뻔해 보이자 몰래 장량을 찾아가 항우의 계획을 전해주며 너라도 도망치라고 충고함. 유방이 관중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다곤 하지만 항우랑 비빌 처지는 아니었음. 더군다나 전쟁으로는 더더욱. 어이가 털린 장량은 유방에게 항우가 빡쳤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너 제정신임??? 함곡관을 왜 쳐막고 지랄임 미친새끼야!!!!" 라고 지랄하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유방은 장량에게 빌디시피 조언을 청함. 장량은 일단 항백을 소개 시켜주고, 유방은 자존심 다 버리고 항백에게 술과 식사를 대접하며 싹싹 빔. 요지인 즉 "저는 항우 장군 오시기만 기다릴 뿐 사사로운 욕심은 조금도 없습니다ㅠㅠㅠ 함곡관을 막은 건 도적들을 막기 위해서일 뿐입니다ㅠㅠㅠㅠ하...저는 항상 항우 장군을 위해 충성했는데 이렇게 죽는 군요.....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항우 장군과 이렇게 틀어지는 건 너무 안타깝고 슬픕니다....하이고......." 라며 개쩌는 감성팔이를(.....) 시전함. 사실 함곡관은 입구가 좁아 적은 병력만 배치해도 도적떼를 막을 수 있음. 유방의 변명은 당연히 개소리임. 저딴 개소리로 항우&항백을 속여먹을 생각을 한 유방이 대단한 건지 저딴 개소리에 속은 항우&항백이 대단한 건지(........) 물론 항우에게도 책사는 있었음. 범증이라는 사람인데 얘가 그나마 항우 진영의 머리 역할을 함. 범증은 당연히 안 속았고, 유방을 살려두면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될 테니 죽이자고 설득함. 어쨌든 유방은 꼬리를 내렸고, 다음날 장량과 번쾌 등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홍문의 항우 진영으로 감. 홍문에서 열린 연회라고 해서 홍문연이라고 부르는데 초한지의 명장면으로 손 꼽히는 장명임. 유방은 당연히 항우 앞에서도 온갖 아부를 했음. 범증이 유방을 죽이자고 신호를 보냈지만 항우는 껄껄 웃으며 술을 마실 뿐 무시했고, 보다 못한 범증은 항우의 친척 동생을 불러내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재촉함. 친척 동생이 "술자리에 즐길 만한 게 별로 없으니 제가 검무를 춰서 흥을 돋워보겠음ㅇㅇ" 하고 칼을 빼들지만 눈치를 챈 항백이 함께 추자며 칼을 막은 덕에 유방은 죽지 않음. 이쯤 되면 항백이 존나 스파이임ㅋㅋㅋㅋㅋ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단 걸 눈치 챈 장량은 슬쩍 빠져나가 번쾌를 부름. 번쾌는 패현에서부터 유방과 알고 지낸 동생 겸 부하 장수인데, 여공의 막내딸과 결혼해 유방과 인척 관계기도 했음. 모시는 유방의 목숨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번쾌는 연회장에 난입해 "남의 장수들은 밥을 안 주니 배고프고 추워 들어왔슴다!!!" 라며(....) 이상한 패기를 시전함. 근데 그게 항우의 마음에 들었음(......) 역시 이 새끼는 그냥 전장에서 평생 굴렀어야 함. 항우는 번쾌의 호탕한 모습이 재밌었는지 술과 고기를 내렸고, 장량은 이 틈을 타 유방을 피신 시킨 후 유방이 만취해 먼저 돌아갔다고 인사하고 준비한 선물을 바침. 단순무식한 항우는 유방이 자기한테 쫄았단 거에 흡족해하지만 범증은 극대노함. 범증은 "이래서 어린애와 대사를 도모하면 안 된다니까 ㅅㅂ 우리 이제 나중에 유방한데 다 뒤질거임 십새끼야" 라고 갈궜다구 함.... 이렇게 관중 땅에 입성한 항우는 항복했던 자영을 죽이고 진나라 황궁을 약탈하고 불태우는 또다른 병크를 저지름. 앞서 말했든 관중 땅은 매우 풍족한 요충지였고, 항우의 책사는 항우에게 관중을 거점으로 삼으라고 조언하지만 이미 관중은 불탄 폐허였고 항우는 고향에 돌아 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음. 초 회왕을 황제로 높여 의제로 칭한 항우는 고향인 팽성 땅을 차지한 후 자기를 '서초패왕'이라고 부르고, 유방을 포함한 나머지 장군들을 각지의 제후로 삼음. 아직 의제가 살아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항우라고 할 수 있겠음ㅇㅇ 물론 항우도 아주 바보는 아니라 유방을 경계했고, 가장 외진 땅인 파촉 땅을 줌. 파촉 땅은 산골짜기 벽지라 대대로 유배지로나 쓰이는 땅이었음. 한반도로 치면 저어기 연평도나 남해안의 섬 정도? 관중에 가장 먼저 입성한 유방은 당연히 분노함. 유방은 "ㅅㅂ 싸우다 뒤지더라도 항우랑 함 싸워봐?" 했지만 유방의 오랜 친구이자 책사인 소하가 뜯어말림. 소하는 은거하며 힘을 기르다 보면 언젠가 전세가 바뀔 거라고 유방을 설득했고, 유방은 결국 파촉으로 향함. 이게 기원전 206년의 일임. 이제 초한지의 하이라이트인 팽성대전임. 앞서 말했듯 항우는 초 회왕을 의제로 삼고 여러 제후에게 땅을 나눠줬는데, 부활한 제나라의 전씨 일족은 만족하지 못했음. 우리가 제나라를 부활할 때 너네한테 딱히 도움 받은 게 없는데 왜 우리가 초의 제후국이 돼서 내정간섭을 받아야함?ㅡㅡ 이 정도. (항씨랑 전씨는 이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건 너무 길고 재미 없으니까 생략) 제나라의 전영은 반란을 일으키는 동시에 다른 제후들도 이간질하고, 항우는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됨. 그 과정에서 의제가 전영이나 유방에게 붙을 게 걱정 됐는지 의제도 죽여버림. 물론 무력과 카리스마 스탯 하나는 풀인 항우라 한방에 전영의 군대를 박살내고 전영을 죽이지만, 문제는 위치였음. 항우는 제나라와 전쟁하느라 자기 본거지인 팽성을 떠나 제나라 깊숙한 곳에 있었고, 이 틈을 탄 유방이 파촉을 떠나 팽성을 향해 진군함. 여기서 항우는 자기의 잔인한 행보에 발목을 잡힘. 잔인하기로 유명한 징기즈칸도 "저항하는 새끼는 죽이지만 깔끔하게 항복한 놈은 살려준다ㅋ 항복해라ㅋ"는 스탠스를 취한데 반면, 항우는 전영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내기 위해 제나라 땅을 누비며 모든 성과 가옥을 불태우고 항복하든 말든 전영의 군사는 다 죽여버림. 여자와 노인만 살려 포로로 삼을 뿐 남자는 싹 생매장해버림. 항우가 왜 이랬는지 정확히는 모름. 항우는 이렇게 잔인한 성격과 별개로 자기 사람과 자기 가족에게는 정말 신의 있고 관대했는데, 항우에게 아버지나 다름 없던 삼촌 항량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압박할 때 교전하다 역습 당해 전사함. 항량의 죽음을 제나라 탓이라고 생각해 보복한 걸 수도 있고 두 번 다시는 자기한테 반기를 들지 못하게 본보기를 세우려던 걸 수도 있음. 이유야 어쨌든 항우의 이런 선택은 자충수였음. 싸우다 져도 뒤지고 항복해도 뒤지는데 누가 항복함ㅠ 전영의 동생인 전횡이 남은 제나라 군사들을 모아 성양 땅에서 죽기 살기로 항전하기 시작하면서 항우는 성양에 발목이 묶임. 이 틈을 탄 유방은 의제를 시해한 항우를 처단하자는 명분으로 근처의 제후들을 연합하고, 제후 연합군은 쉽게 팽성을 점령함. 항우를 포함한 병력이 거의 제나라에 가 있으니 당연히 쉬움ㅇㅇ 소식을 들은 항우는 나머지 군사들은 성양에 그대로 두고 최정예 군사 3만을 데리고 팽성으로 내려감. 당시 팽성에 있던 유방 연합군은 57만 명이었음. 항우가 이기면 기적인 수준이었음. 근데 항우가 이김. 일단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음. - 유방은 항우의 군대가 습격할 길은 북쪽 뿐이라고 생각해 북쪽을 위주로 막고 대비했음. 하지만 팽성은 항우의 본거지였고, 누구보다 팽성의 지형을 잘 알고 있던 항우는 팽성을 빙 둘러 서쪽으로 우회한 후 동쪽으로 밀고 들어가는 전략을 취함. 항우 군대 >>>>>> 유방 진영 이런식으로 - 3만 VS 57만. 아무리 초나라 군대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도 격파한 정예병이라고 해도 전면전으로는 가망이 없는 숫자임. 항우는 야심한 밤에 기습하는 전략을 선택했고, 아무런 대비 없이 습격 당한 유방의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감. 항우의 3만 군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유방의 군대는 57만 중 절반 이상이 몰살 당함. 얼마나 피해 규모가 컸는지 시신이 너무 쌓여 강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함. 이 과정에서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는 항우의 포로가 됨. 여담으로 유방은 도망치는 길에 고향 패현에 들러 자식들을 챙겼는데, 마찬가지로 유방의 가족을 사로 잡으려던 항우의 군대가 쫓아오자 수레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지 새끼들을 버림(.....) 부하 장수 하후영이 도로 아이들을 챙기며 "한낱 짐승도 자기 새끼 귀한 것은 아는데 니는 뭐하는 새끼임 대체 ㅅㅂ" 라고 갈구자 그제야 부끄러움을 느껴 아닥했다고. 또 한편 유방의 아내인 여치는 측천무후&서태후와 함께 중국 3대 악녀로 손 꼽히는 사람인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포로로 잡힌 후에도 겁 먹기는 커녕 항우 면전에 대고 "그래봤자 너는 내 남편 상대가 안 되니 어디 죽여볼 테면 죽여봐라"고 당당하게 소리 쳐서 그 항우조차 말을 잃었음. 이때부터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한신임. 소하&장량과 더불어 한삼걸로 불리는 명장임. 간신히 도망친 유방이 전력을 재정비하는 사이 한신은 3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차근차근 북쪽 땅을 정벌함. 또한 유방도 형양 땅을 본거지 삼아 죽을 기세로 버텼음. 항우가 제나라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관중 땅을 점령한 덕에 사전적 재기할 여력이 충분했음. 게다가 지속적으로 말해왔던 항우의 능력 부족이 서서히 본인의 발목을 잡기 시작함. 항우의 중요한 책사였던 범증도 죽었고ㅇㅇ 항우와 유방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음. 항우는 장군 내지는 전략가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대신 큰 그림을 보고 정치하며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이 없고 지나치게 잔인함. 반대로 유방은 사람은 좀 찌질하고(...) 멋 없을지언정 주변의 충고를 듣고 인망을 쌓는 건 항우보다 훨씬 나았음. 유방의 지휘관 스탯이 항우에 비해 좀 딸릴 뿐 없는 것도 아니었고. 지지부진하던 초한전쟁은 항우의 부하인 용저가 유수 전투에서 한신에게 패배하며 기울기 시작하고........ 해하 전투가 벌어짐. 유수 전투에서 진 후 항우는 포로였던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를 돌려보내며 자기가 이끄는 초나라가 동쪽 땅을,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가 서쪽 땅을 다스리는 협약을 맺음. 협약이 성사된 후 항우는 팽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이번 기회에 항우를 끝장내야한다는 참모들의 설득을 들은 유방은 항우의 군대를 공격함. 이게 초한전쟁 최후의 전투인 해하 전투임. 항우와 맞붙은 한신은 밀리는 척 후퇴하며 항우를 깊숙이 유인하고, 한나라의 나머지 병력이 좌우에서 초나라 군대를 공격함. 초나라 군사 10만명 중 8만이 전사하고, 항우를 포함한 나머지 2만도 포위당함. 이때 한나라 군사들이 초나라 군대의 사기를 완전히 꺾기 위해 초나라 고향 노래를 부른데서 나온 사자성어가 사면초가. 여담으로 자기가 선봉으로 나선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 해하 전투에서 딱 한 번 패배함. 항우는 결혼하지 않았고, 대신 사랑하는 여자 한 명이 있어 어딜 가든 항상 함께함. 원체 옛날이다 보니 출신에 대한 기록은 없고 성이 우씨라는 것만 남아 우희 혹은 우미인이라고 불림. 역사 속에선 패자인 항우가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우미인임. 한 때 패왕으로 군림하며 엄청난 권력을 누렸던 항우인데 평생 한 여자만 만났다니 로맨스 소설이 안 나올 수가 없음ㅇㅇ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항우는 늦은 밤, 자신의 군막으로 연인 우희를 불러 술을 마시며 해하가라는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림.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도다. 時不利兮骓不逝 시운이 불리하니 추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는 항우가 아끼는 명마. 삼국지의 적토마 같은ㅇㅇ) 骓不逝兮可奈何추 추마저 나아가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하는가. 虞兮虞兮奈若何 우희(虞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은가. 여기에 우희가 부른 답가가 화화왕가 漢兵已略地 한군이 이미 천하를 다 빼았으매 四面楚歌聲 성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大王義氣盡 대왕의 의기가 다하셨다면 賤妾何聊生 천첩이 살아서 무엇하리요. 한 때 전국을 호령했던 영웅이 자기 최후를 예감하고 사랑하던 연인을 걱정하며 눈물 흘린다는 게 참 드라마틱한 소재잖음? 저기서 파생된 작품이 장국영의 패왕별희 ㅇㅇ 패왕별희 뜻 자체가 패왕 항우와 우미인의 이별임. 장국영이 맡은 청뎨이는 동명 경극에서 우미인 역, 샬로는 패왕 역. 이후 우희가 어떻게 됐는지는 사서에 안 나옴. 항우에게 짐이 되기 싫어 자결했다는 말도 있고, 난전 중에 죽었다는 말도 있고, 항우가 죽음 앞에 목숨을 걸고 우희를 피신 시켜 조용한 곳에 숨어 여생을 보냈다는 썰도 있고. 보통의 작품에서는 자결을 택하는데 난 후자였으면 좋겠넴. 고향 노래를 들은 초나라 군사들은 하나둘 탈영하기 시작함. 항우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도망치지만 유방이 보낸 5천 명의 기병대가 항우를 추격하고, 100명의 군사로 5천명을 뚫는(....) 기적을 일으켜 동성에 도착하지만 항우의 곁에 남은 건 28명 뿐이었음. 이제 여기부터는 거의 뭐 드라마임. 참고로 연의처럼 소설적 허구가 섞인 기록 아니고 사마천이 지은 사기임....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그 동안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어 죽였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하였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 없이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겠다." 라고 외친 항우는 남은 28명의 군사를 사방으로 뛰게 만든 후 앞으로 말을 달려 한나라 장수를 죽이고 100명이 넘는 병사들을 죽임. 이 과정에서 죽은 초나라 병사는 딱 두 명. 미친놈임. 남은 26명을 데리고 계속 도망친 항우는 오강 이라는 강에 도착함. 오강을 관리하던 말단 관리는 항우를 맞이하며 "강동(江東)의 땅은 비록 협소하다고 하나 사방 천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숫자는 수십만에 이르고 있어 가히 그곳을 다스릴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속히 배에 오르시어 강을 건너시기 바랍니다. 이 강 안에는 오직 이 배밖에 없어, 비록 한군이 쫓아오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함. 이에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강을 건너서 무엇하겠는가? 또한 옛날 내가 저곳 강동의 자제 8천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왔다가 모두 전사하고 오늘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준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비록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항우 혼자만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답하고 그대가 충신임을 알겠다며 이 관리에게 자기의 명마, 오추마를 넘김. 이때 항우를 따른 26명의 군사들은 탈영하지 않고 항우를 따라 죽을 각오를 한 장병들이었음. 이들이 항우와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는 썰도 있고, 항우가 "지금 주군의 명령을 어길 셈이냐? 어서 배에 타라." 라고 윽박 질러 그들은 피신 시켰다고 하는 책도 있음. 이후 항우는 혈혈단신으로 한나라 기병대 5천에 맞서 수백명을 죽이고(....?......)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 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노라." 라는 유언과 함께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고 함. 이 때 항우의 나이 31세. 항우의 시신은 유방이 건 상금에 눈이 나간 한나라 군사들이 달려들며 수십조각이 났고, 유방은 그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뤄주고 노공으로 봉함. 썰에 따르면 본인도 그 장례식에 와서 울다 갔다나 뭐라나. 이렇게 해서 초한지는 유방의 승리로 끝남. 유방은 한나라의 황제가 되는데,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통일 제국임. 이 한나라가 망해갈 즈음 벌어지는 이야기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장면으로 유명한 삼국지ㅇㅇ 이제 밑으로는 여담 타임 + 여치 이야기 여담 1 장기 판에 적힌 게 초나라 한나라임. 빨간 색이 한나라 / 파랑이나 초록이 초나라 여담2 유방의 승리에 가장 크게 기여한 한신은 이후 반란 혐의로 유방에게 제거 되는데, (소하나 장량은 천수 누리다 감) 여기서 유명해진 사자성어가 토사구팽.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 이전부터 있었던 말인데 한신의 일화로 유명해져 널리 쓰이게 됨. 여담 3 유방이 황제가 되면서 아내인 여치는 황후가 되어 여후라고 불리게 됨. 여후는 유방이 사고 치고 다니던 건달 시절 유방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유방이 거병한 후 묵묵히 내조를 해준, 말 그대로 조강지처였음. 더군다나 팽성 대전의 패배 이후 항우 진영에서 포로 생활도 함. 황제가 된 유방은 여러 후궁을 두고 총애했음. 뭐 여기까지는 괜찮을 수 있었음. 정치에 간섭하는 여후가 거슬렸던 건지 뭔지, 갑자기 여후 소생의 태자 유영을 '성정이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하고 가장 총애하는 척 부인 소생의 아들 유여의를 태자 삼으려고 함. 진나라의 처참한 말로를 아는 대신들이 적통인 유영을 폐위하면 안 된다고 기를 쓰고 말려 수포로 돌아갔지만... 여후는 이 원한을 간직하다 유방이 죽자 본색을 드러냄. 원래 다정한 성격이었는데 결혼 후 고생하면서 성격이 점점 변해 독해졌다고 하니 만악의 근원은 유방이지만, 여후가 중국 3대 악녀로 손 꼽히는 이유가 있긴 함....이하 잔인함 주의. 유방이 죽고 여후와 유방의 아들 혜제가 황제가 된 직후, 여후는 척 부인을 연금 시키고 아들인 유여의를 황궁으로 부른. 어머니와 달리 심약하고 정이 많은 혜제는 어머니가 유여의를 죽이지 못하게 동생과 함께 먹고 자며 보살핌. 하지만 어느 날 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을 가자 어린 유여의는 혼자 남겨지고, 여후는 곧장 12살의 유여의를 죽인 다음 척 부인에게 데려가 아들의 시신을 보여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척 부인의 눈을 뽑은 후 귀, 혀, 손, 발을 자르고 돼지 우리에 넣어 인간 돼지라고 부르며 아들 혜제를 불러 그걸 보게 함. 유여의와 척 부인을 잔인하게 죽인 거야 그렇다 치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혜제한테 보여준 건진 모르겠음. 이복 동생을 지키려고 그렇게 노력한 사람한테 굳이....? 심지어 이때 혜제도 고작 16살이었음. 얼마나 심하게 훼손 됐던지 처음에는 누군지도 못 알아보다가 뒤늦게 척 부인이란 걸 알고 충격 받은 혜제는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태후마마의 아들인 저 또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비난한 후 앓아눕고, 이후 실의에 빠져 술만 마시다 23살의 나이로 요절함. 여후는 혜제가 죽었을 때 눈물 한 방울 안 흘렸고, 혜제 사후 멋대로 황제를 세우고 섭정하며 나라를 주무르다 노환으로 사망함. 이 횡포가 나중에 독이 되어 여후의 여동생을 포함한 여씨 일족 사람들은 맞아죽었다고,,,, 이때가 남존여비 시대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권리는 있어서, 첩이 정실 부인을 무시하고 방자하게 군다면 어느 정도의 처벌은 용인 됨. 중국 사극에서 황후가 건방진 후궁 꿇어 앉히거나 화내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 것도 이래서ㅇㅇ. 다만 여후는 혜제 사후 나라를 망칠 뻔 하기도 했고, 척 부인에게 한 보복이 정말 듣도 보도 못할 수준으로 잔인해서 악녀 소리 듣는 것. 힘들었다. -끗-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