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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나쎈 조선 최초의 주미 대사.jpg

때는 1887년..
5년전에 구식 군인들이 일으켰던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허겁지겁 부르긴 했는데..
청나라는 군대 진압했으면 좀 꺼지지
조선에 눌러앉아서 온갖 간섭을 하려 했고

일본은 임오군란때 죽은 일본인과 불탄 일본 공사관을 들이밀며 배상 요구를 하려 한것임

심지어 언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지들 군대도 조선에 주둔시키겠다는 말같지않은 요구도 해버림

하지만..
고종
고종은 쩔수 없었다..

그 뒤로 조선은 지겹도록 청나라와 일본 간섭에 시달리게 됨

*잠시 당시 관계 설명*

이 당시 청나라는 서양 국가들에게 탈탈탈 털리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들 따까리 자리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하지만.. 원래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사대관념에 입각한 조공책봉 관계, 즉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보살펴주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는 그런 관계임. 말그대로 힘에 의한 관계라기 보단 이념에 따른 자발적 관계이고, 당연히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었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청나라가 자꾸 선넘더니 무력을 앞세워 국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는 것!
이때부터 조선인들도 머야시발;;하면서 청나라와의 전통적 관계를 끊고 동등한(=근대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조공을 철폐하려고 하는 등 한발자국씩 나아가던 시기였음

~다시 돌아와서~

조선의 여러 관료들은 청나라를 비롯한 외세의 개입이 갈수록 심해지는 이 시점에, 어떻게 하면 조선이 자주독립을 지키며 근대화를 이뤄낼 수 있을지 열심히 고민 또 고민했음

그 당시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외교>


조선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국제질서에 편입하고자 했음

그렇게 해서 청나라에도 조공책봉 사신이 아닌 동등한 주청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고, (물론 청나라는 전통 질서에 혼란 생긴다고 싫어했음 ㅎㅎ 우짤)
도쿄에도 주일 외교관을 파견하고자 했었음

하지만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바로

조선 최초의 주미 대사


주미특파전권대사 박정양을 파견했다는 것임


고종이 주미 대사를 파견한 것은

미국에 상주 외교관을 파견함으로써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주변국에게 보여주고,
서양의 현재세력 관계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고종의 빅 픽쳐 ㅎㅎ

조선은 당연히 파견하기로 결정한 후에 청나라한테도 알려줬음
: 정양이 일행 미국에 보낼거임 ㅎㅎ
위안스카이(원세개)
: 미쳤습니까 휴먼?

갑자기 청나라가 존나게 시비를 거는거임;;

대충 뭐라고 했냐면

조선이랑 미국 사이에는 상민도 없고 무역도 안하는데 전권공사는 왜 보내? 돈도없으면서 외교사절은 무슨 ㅎㅎ 낭비 ㄴㄴ 아니 그리고 니네 왜 우리한테 허락 안받음?? 이거 무효야 무효
응.. 개소리 한거임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미국 공사나 고문관도 청나라가 조선과 미국의 조약을 방해하는건 조약 위반이고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니 냅둬야 한다고 항의했음

이 민폐국 때문에 자꾸 출발이 늦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청나라가 요구하는 영약삼단을 받아들임

고종은 청나라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면서 박정양 일행에게는 “짐의 뜻을 잘 헤아려 처신하라”고 거듭 당부했다고..(대충 영약삼단 지키지 말라는 뜻)

영약삼단이란?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대한제국 공사는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
③ 대한제국 공사는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한줄요약: 청나라가 미국에서 조선이 자기네 속국이라고 홍보하기 위해 세가지 약속 지키라고 협박함

조선이 자주독립국인걸 보여주고자 했던게 어지간히 아니꼬웠나 봄 ㅎㅎ
어찌됐건 우여곡절 끝에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 일행!

청나라와의 약속 중 첫번째인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를 지켜야 할 차례였음

(조까~)

하지만 기존나쎔 박정양은 청나라 공사가 아닌 미국의 국무부 장관를 먼저 만나러 가면서 영약삼단을 무시해버림
당시 일행

조금 화난 위안스카이
: 영약삼단 지키라해;; 거슬린다해;;

박정양은 청나라가 항의하자

“님 ㅠㅠㅠㅠ 쏴리쏴리 ㅠㅠㅠㅠ 뚜이부치 ㅠㅠㅠ 정부가 청국 공사 먼저 만나러 가라고 나한테 말 안해줬음ㅠㅠㅠ 일부로 그런거 아님 ㅠㅠㅠㅠ”

이라고 해명함

청나라는 그냥 흠....하고 넘어가게 됨

하지만 그 뒤로도 박정양은

미국의 대통령을 만날 때 청의 외교관을 대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워싱턴에서 공사관의 부임 순서에 따라 방문하는 관례에 따라 28개국 중에 18번째로 청의 공사관을 방문했음
이후에 청국 공사에 방문한 박정양은 더 이상 “몰랐다”고 할 수 없으니 솔직하게

“미국에 도착해서 미국 국무부가 아닌 청 공사를 먼저 방문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이고, 이는 미국이 조선과의 교류를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조선과 미국의 국교라는 파견 명분을 해칠 수 있으므로 영약삼단을 지킬 수 없었다.”

고 말했고, 너무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청나라에서도 뭐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었음.

하지만.. 그 뒤로도 복장같이 사소한 걸로도 다 트집을 잡아서 시비를 걸었음 ㅎㅎ

물론 박정양은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나라의 압력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이는 엄청난 의의가 있는 행동이었다는 점

왜냐하면 청의 요구를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외교 활동을 했기 때문임

청나라 공사의 요구들을 거절하고 당당하게 단독으로 활동하며 자주적 외교와 독립국의 지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
(워싱턴 대한제국공사관)


당시 주미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이상재가 작성한 편지를 보면

"이곳의 인물 풍속 정치 법령은 오로지 우리나라와 일체 상반된다. 날마다 귀와 눈이 처음 듣고 처음 보는 것"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중국공사가 매번 체제사로 서로 양보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청나라가 가지가지 간섭해댔던 시절에도
우짤? 마인드로 조선의 외교를 위해 힘써줬던 그 옛날 기존나쎔 조선 외교관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가져와봄

마무리는 이상재의 편지 중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 개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使命)을 욕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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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니 민주주의니 해도 세계는 힘의논리가 아직도 많이 작용함 힘없는 외교따위는 스스로 위안밖에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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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그럴듯해서 더 무서운 미국 공항 음모론.jpg
혹시 덴버공항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곳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미국의 콜로라도 주에 위치한 덴버의 국제공항입니다. 이 아름다운 덴버공항 곳곳에 있는 조형물 등이 뭔가 음산하면서의 미스테리함이 사람들의 이목과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덴버공항에는 수많은 음모론들이 존재한다고도 합니다. 먼저 이 사진을 보면 푸른색의 야생마가 있는데, 공항 출입로에 이 동상이 세워져있다고 합니다. 뭔가 섬뜩하고 기괴해 보이죠. 심지어 밤에는 이 눈이 붉게 빛납니다. 밤에 비행기를 타고 착륙하는 승객들은 이동상을 보고 살기까지 느껴진다고 한데요; 동상은 1992년 루이스 히메네스(Luis jimenez)라는 건축가에 의해 무려 16년간 제작이 되었고, 높이는 약 10미터, 무게는 4톤에 육박한다네요. 제작자는 2006년 5월에 크레인으로 옮기던 조각상이 다리에 떨어져서 사망했습니다. 이후 유가족들이 이 동상의 나머지 작업을 완료했기에 비로소 이 푸른 말을 덴버공항에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사람들은 동상의 모습과 이러한 이야기 때문에 푸른 말 철거를 원한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람들이 이 동상을 꺼리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계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성경에서도 보다시피 청황색 말은 죽음을 의미하다고 해서 덴버 지역 주민들은 아주 불경하다, 이상하다 하는데 제작자인 히메네스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에 거센 저항은 하지못한다고도 하네요. 이외에도 아누비스 상이 있어요. 아누비스가 죽음의 신이잖아요. 이건 뭐 안전하게 착륙하고 이륙해야 하는 공항에 죽음의 신 동상을 세워논건 무슨 조합이죠. 하지만 다른 건물들과 지하철등 많은 시설들이 점점 들어서게 되면서 현재는 이 아누비스상은 철거되었어요. 이것은 가고일 동상인데 가고일은 형상은 갖가지이지만 대개는 인간과 새를 합성해놓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부리와 날개가 있는 움직이지 않는 석상이라고 정의합니다. 원래 이 가고일은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에서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제작이 된 것으로 알려져서 교회를 수호하는... 요괴? 정도로 아시면 될텐데 구태여 이 동상이 왜 덴버 공항에 있는 걸까요. 악마라도 존재하는 걸까? 다음 보여드리는 사진 부터는 덴버공항에 그려져있는 벽화입니다. 우선 그림을 살펴 보면 아래 세분의 여성이 관에 누워있는 것 같아요. 또, 동물들이 많이 지치거나 죽어있는 것 같고 어떤 유리상자로 갇혀있어요. 배경은 뒤에 나무들이 불타고 있네요? 하나하나 보면 먼저 그림의 중심에는 표범이 죽어있습니다. 사자도 호랑이가 아닌 표범은 흰 바탕에 검은 점을 가졌으므로 백인 나라의 혼혈이라는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왕은 왕이나 진짜 왕이 아닌 대리 권력 수준의 왕 또는 지도자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벽화 상단 우측에 있는 유리 상자 안에 갇힌 새의 이름은 '케찰(QUETZAL)'이구요. 이 새는 과테말라의 국조이며 '왕의 임재', '왕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왕권이 갇혀있다는 식으로 해석이 됩니다. 아래 그림을 확대시키면 왼쪽은 아프리카여인 중간은 인디언 여인 오른쪽은 유태인 어린이로 보는데, 여기서 인디언 여인은 인형을 품에 안고 있어요. 근데 그인형을 자세히 보면 방독면을 쓰고 있네요. 게다가 프리메이슨 상징인 컴퍼스 모양의 목걸이도 목에 걸고, 손에는 종도 쥐고 있어요. '종'은 대부분 아시는 것처럼 '때를 알리는' 도구이죠. 종말, 죽음의 시기를 알린다고 해석이 돼요. 거북이는 그물에 걸려 괴로워하고 고래는 피를 흘립니다. 유리 박스 안에 있는 것은 멸종된 동물들입니다. 신세계를 맞은 아이들이랍니다. 방독면을 쓴 남자 한 손엔 총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데 밑으로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칼로 찌르고 있네요. 뭔 가 독가스로 대량학살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옆쪽까지 이어진 뉴에이지 사상을 상징하는 무지개 그림이 그려져있어요. 여기서 뉴에이지란 전 세계 종교를 통합하고 세계를 통합한 정부를 수립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이들의 일종의 단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하단에도 편지 같은 게 보이시죠? 사진을 확대시키면 "나는 옛날에 한 어린아이였다. 다른 세상을 갈망하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나는 공포를 알았기 때문에 증오하는 것을 배웠다 얼마나 처참한지, 그때, 적들과 함께, 교수대의 로프들과 함께 사는 나의 젊은 시절. 아직, 난 여전히 믿는다. 난 단지 오늘 잠을 자고 있다는걸. 난 부활할 것이다. 한 아이로 다시, 그리고 웃고 즐기기 위해 시작할 것이다." - 아누스 해치 버그 14세에 1943년 12월 18일에 아우슈비츠 에서. 라고 아우슈비츠에서 감금되었던 한 소년의 편지가 쓰여있어요. 결국에는 저 그림은 나치의 만행을 의미하는 그림이 아닐까요. 이 그림은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교체가 되었다고 들은 것 같아요. 세 번째 벽화입니다. 신성한 기운의 무지개가 아이들을 포근하게 둘러싸고 있고, 센터의 남자아이가 들고 있는 망치로 칼을 부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있네요. 그리고 각 나라의 국기로 무기를 봉인시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모습 같아요. (왼쪽 중간에 한복 입은 우리나라 아이들도 보이네요!) 뭔가 기분이 조금 나쁘고 공항이랑은 안 어울리는 이미지들입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벽화들이 공항 내부 터미널에 그려져있어요. 화가는 단순히 사람들의 탐욕, 폭력 등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써 경고를 하고 싶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외에도 많은 음모론이 있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터미널 바닥에 석판이 세워져있는데 신세계 공항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대놓고 프리메이슨의 심벌마크가 새겨져있어요. 또 석판 밑에는 타임캡슐이 있어 100년 후인 2094년에 열어서 메시지를 확인할 수도 있다네요. 또 하늘에서 바라본 덴버공항의 모습이 마치 나치의 심벌마크와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이러한 기괴한 이유 덕에 덴버공항을 아는 사람들은 이곳이 신세계 질서라는 음모론의 본거지라고 추측하기 시작하죠. 신세계 질서 즉 지구상 각 나라의 엘리트들이 각 나라의 정부를 타도하고 국가의 장벽을 부셔 하나의 정부로 통합하자는 개소리입니다. 그들은 인구 감축을 목표로 하고 적은 군사와 산업 기술의 제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썰은 공항 건설 초기에 극비리로 지진 규모 8 정도까지 견딜 수 있는 지하 도시가 있어서 이후 신세계 질서 사람들의 본거지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야기는 일루미나티의 본부가 있다는 썰도 있어요. 왜 예전에 아무런 소식도 없이 오바마 대통령이 갑자기 이 덴버공항으로 왔었던 적도 있다고 하네요. 피신인가? 출처 미국 음모론중에는 사실인게 많다던데,...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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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라는게 진짜 준니 하드코어하구나.. 를 느낀 일화들 잼나는 것도 있고 안타깝고 씅나는 내용도 있고 재밌어서 퍼옴 ㅇㅇ 어진을 찾을 수 없는 왕들은 걍 뭐 대충,,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를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4.태종은 운명론자가 아닌 현실론자였는데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어느날은 우연히 하급관리 두명의 토론을 듣게 되었다. 한명은 부귀영화는 모두 임금에게서 나오는것이라고 하였고 도 한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현실론자였던 태종은 부귀영화가 임금에게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한품계를 올려주려 하려고 그 관리에게 '지금 가는 아무개에게 한 품계를 올려주도록 하시오'라는 종이를 세종에게 전해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관리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운명론자인 관리에게 대신 종이를 전해주라 하였고 결국은 그 관리가 진급을 하였다. 5. 조선왕들중 가장 많은 자식을 가진 왕으로 12남 17녀, 29명의 자식을 가졌다.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 준 얘기도 있다. (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 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 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 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 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을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양녕대군과 세종은 원래 우애가 깊지 않았다. 태종은 양녕과 효령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유독 충녕, 즉 세종을 편애 하였다. 게다가 세종은 알려진것과 같이 머리가 아주 좋았고 공부를 좋아했다. 태종이 충녕에게 나중에 '너는 할일이 없으니 놀아라'라고 하며 글씨,그림, 비파등을 마련해준 때가 있었다. 그 때 양녕은 충녕에게 비파를 배우며 서로 친해졌고 다른 면에서 보면 자신의 경쟁자였던 충녕이 공부를 포기 했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다. 그 후로는 양녕대군도 공부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비파, 글씨 등에 관심이 있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다시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양녕에게 많은 충고를 하였다. 양녕은 열등감으로 인해 방황하였고 다시 비행에 빠져들게 되어,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자리는 세종이 차지하게 됬다. 8.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세조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 라고 시키자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 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 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3. 신숙주가 영의정었을 때 구치관이라는 사람이 좌의정이 됐다. 이때 세조가 신숙주하고 구치관을 불러서 "내 오늘 경들에게 질문을 할 테니 대답을 잘 못하면 벌을 줄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신 정승!"하고 부르니까 신숙주가 대답했는데 세조가 "나는 새로 된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벌주를 먹였다. 그리고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니 그리고는 "나는 옛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구치관한테도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 다시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이번에는 신숙주가 대답했다. 근데 이번에는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을 잘 못하는구료" 하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서 또 "신 정승!"하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는데 구치관한테도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은 잘못 대답하였소" 하고 벌주를 먹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신 정승! 구 정승!" 하고 부르니까 둘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을 안하는건 예의가 아니라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고 한다. 성종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 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 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을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 보너스 연산군에 대한 잘못된 사실들 연산군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하고 폭군의 모습을 다소 보인점은 사실이지만, 몇가지 왜곡된 사실들이 있다. 1.연산군은 궁궐 담장 아래 백척 내에 있는 민가들을 철거하여 쫓아냈다. - 하지만 이것은 원래 불법주택들이였다. 선왕, 후궁들의 모습이 민간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법도에 의한 것들이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오히려 봄까지 기다려주고 주택의 등급을 나눠 무명을 보상으로 주고 대토 와 거주지까지 마련해 주었다 2.궁을 짓기 위해 열한 고을의 백성들을 내쫓았다 - 백성들을 내쫓은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는 500여호에 불과했고 열한고을은 사관이 의도적으로 과장해서 쓴것이다. 또 지나가는 자는 죽여서 시신을 구경시키는 형을 내린다고 했으나 무덤이 있는 자들에게 명절 출입을 허가했으며 불법주택에도 보상을 해준 연산군이 보상을 안해줬을 가능성은 적다. 게다가 궁은 큰집 50칸으로 몇몇 사대부들의 99칸 집들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3.연산군은 음란했다. -연산군이 비구니를 간음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기생의 출입도 소문이 두려워 꺼렸던 인물인데 늙은 비구니를 몽둥이로 쫓고 젊은 비구니들을 간음했다는것은 말이 맞이 않는다. -연산군이 여성 음악인들을 혼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그들을 예술가들였을뿐이며 오히려 여성 음악인들은 사대부들에겐 첩을 들이는 통로였다. 사대부들은 연산군에게 연산군이 남성음악인들만 잔치때 내려주자 불만을 갖고 여성음악인들 을 내려달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좋은 왕으로 묘사되는 성종은 16남 21녀를 가졌으나 그의 아들 연산군은 4남3녀만을 두었다. - 연산군이 백모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죽자 임신을하고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를 추측해보면 그 때는 이미 쉰세살에서 쉰다섯으로 당시에 그나이엔 잉태가 불가능했다. 4.정치는 하지않고 사냥을 즐겼다 -연산군은 군사력 강화를 원했던 왕이다. 연산군 5년 여진족이 백성들을 사로잡자 연산군은 정벌에 나서려 했으나 그때마다 신하들은 반대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노비들이 부역에 나가는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냥은 군사력 강화를 위했던것이고 이것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된 결과가 임진왜란이다. 5.폐비 윤씨사건으로 폭군이 되었다 -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지만 연관인들의 처형은 신하들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였기도 하다. 그러나 훈구파를 무너트렸으면 사림을 불러들였어야 하는데 사림들조차 적으로 만들었으니 그를 보호할 사람은 없었다. 결국 연산군은 백성들에게는 폭군은 아니였지만 모든 사대부들에게는 적이였다. 그 결과 사관들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기록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믿어지고 있다.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5.조울증을 가지고 있었다. 명종에게는 손빈이라는 총애하는 환관이 있었는데, 그에게 집과 많은 값비싼것을 하사했으면 원하는것들은 모든지 들어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장령을 만났을때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명종으로부터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벼슬길도 막혔다. 명종의 조울증에 관환 일화는 이밖에도 많으며 아침에 파면했다가 저녁에 회복시켜주는 일들도 많았다.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리며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 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가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4.연산군을 폐위할 때, 중종을 보호하려 군사들이 오자 중종은 자기를 잡으러 온줄 알고 놀라서 자결 하려고 했다. 다행히도 그의 부인 신씨가 말려서 중종은 살아서 왕이 되었다. 5. 중종이 연산군 폐위후 왕위에 즉위했을때, 위에서 말한 신씨는 당연히 왕비책봉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반정때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을 죽였는데 보복이 올줄도 모른다는 이유로 조강지처였던 신씨를 중종은 '조강지처'라는 말 한마디의 저항을 딱 한번 하고는 출궁시켰다. 중종 11년 3월 28일,ㅡ 그는 고려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배운 부분은 최충헌 최충수가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하는 부분이였다. 최충수는 배필이 있던 태자에게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신종을 협박했다. 신종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태자비를 폐출시켰다. 이 부분을 읽으며 중종은 울먹거리며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종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선조 1.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이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2.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어오는 바람에 의주로 도망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명에 혼자 도망가기 위해 망명을 요청하였다. 명은 일국의 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거절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명에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시위를 했다. 결국 명은 그렇게 오고싶으면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북경까지 건너오라고 무안을 줬고 선조는 그제서야 망명을 포기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 지원군이 선조앞에 도착했고 이여송은 선조가 보는 앞에서 조선의 대신들의 싸대기를 후려치면서 어찌 나라를 이지경까지 만들었냐며 타박을 주었으나 선조는 아무말도 못하였다. 광해군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 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효종 1.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2.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그에 반대하는 유후성이 싸웠다. 이에 왕이 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고 말했는데 침이 혈락(血絡)을 범하여 과다출혈로 사망. 어의 가귀는 조사결과 수전증 있는걸로 밝혀졌다. 현종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숙종 1.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2.관우의 팬이였다고 한다. 인조 1.소현세자는 손톱밑이 시커멓게 변하고 얼굴은 검게 변하며 죽었다. 전혀 확인되지 않은 병이었다. 독살이라는 소문은 퍼져나갔지만 인조는 이것에 대한 조사를 피하려 했으며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2.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영조 1.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 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 면 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정조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규장각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 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끊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 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 6. 정조 20년, 이정용이라는 유생이 술에취해 늦은밤 궁궐 담장 아래에서 잠에 들었다 잡혀간적이 있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했던 정조는 요즘 유생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데 술을 좋아한다고 칭찬을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생들이 숙박하던 잡촌과 집춘영은 벽을 맞대고 있으니 이정용은 잡촌에서 잤던거라는 궤변을 펼쳐서 오히려 상까지 주어서 보냈다. 헌종 1. 이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참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고종 1. 고종 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3.당시 1887년대, 전신(전보총국)의 등장과 함께 최초 궁궐에 가설된 전화를 경험한 고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 이 생각에 고종은 상당한 고액의 전화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 홍릉에 설치한다. 그 곳은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씨)의 무덤. 전화의 설치가 끝난 직후 고종은 아침마다 그 곳으로 통화를 걸어 말을했다.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 죽은 민씨에게 안부를 전했고 매일아침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멀리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까지는 못 하는구나." 그럼에도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는 그 날에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고려청자 '매병'의 반전쩌는 사용 용도.jpg
일단 아래 사진을 보자 이건 "梅甁"이야 '매병'이라고 읽어 매병은 정의상 "아가리(도자기는 입구를 이렇게 표현함 ; 혹은 '구연부(口緣部)')가 좁고 어깨(구연부에서 몸통으로 내려가는 부분)가 넓고 풍만하며, 동체(몸통)가 저부(바닥부분)로 갈 수록 홀쭉해지는 형태" 를 말해 (아휴 길기도 해라) 우리가 아주 잘 아는 학 무늬의 청자야 이건 알다시피 국보🤩야 (정확히는 국보 제86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개인적으로 '매병'은 영화로 치자면 떡밥회수가 매우 잘 된 스릴러라고 생각하는데 입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은 완만한데에 비해 어깨에서 바닥으로 흘러가는 선은 매우 과감해서 활자로만 보면 균형감이 없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실제 도자기는 그 균형이 정말 잘 잡혀있잖아? 👍 완전 굳이지 굳 (마쟈 내 취향이야 그니까 굳임😋) ㅋㅋㅋ 문제는 "이게 실제로는 어떻게 쓰였을까🤔?" 야 우리가 문화재를 잘 이해하는 혹은 잘 감상하는? 그런 방향 중에 하나는 '이 유물이 그때는 어떻게 쓰였을까?'를 상상해보는거야 우리가 지금 '문화재'로 감상하는 대부분의 유물이 최초로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실용품'이었다는 것을 알면 꽤 재밌어 그래서 '매병'도 "실제로는 어떤 쓰임이었을까🧐?" 라고 상상해보는거야 우리가 이런 도자기를 '매병'이라고 부르지만 이 "매병"이라는 이름은 사실 18세기 중국 문헌에서나 확인할 수 있어 그런데 우리가 아는 '고려'청자의 고려는 918년. 그러니까 10세기에 건국되었는데!? 18세기면 1700년대 조선이잖아😮?! (임진-병자전쟁도 끝난 뒤임) 😊 그래서 우리가 "고려청자 운학문매병"이라고 부르는 도자기가 사실은 "매병"이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사실 이런 도자기는 중국 '당唐' 때부터 등장하는 형태야 (이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더 덧붙일 수 있겠는데 일단 스킵하쟝) 어쨌든 매병의 '梅'는 '매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화병花甁(꽃병) 아니었을까? 괜히 그런 이름을 후대에 덧붙였겠어?" 라는 의견이 있었고 "술병일 수도 있지! 대부분의 그릇들이 술그릇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잖아?" 라는 의견도 있었고 "뭔 소리야. 야, 딱 봐라. 저걸 누가 썼겠냐? 딱 봐도 사치품인데, 귀족들의 관상용일 수도 있지!" 라는 의견도 있었어 사실 각 의견마다 충분히 납득될 만한 증거들이 있었어 매병 형태의 도자기가 등장하는 그림이나 비슷한 형태의 쓰임새, 그에 대한 기록 등등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 (사실 술병일 것이라는 의견이 좀더 컸음) 일대의 사건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는데... 태안 앞바다에서'옛날 배'가 발견된 거임😮 이 배는고려시대의 무역선혹은조운선(세금운송선)으로 생각되는데 우리가 주의깊게 봐야할 보물선은  2010년에 수중발굴된 "태안 마도 2호선"임 이 보물선에서 다름아닌 '매병'이 발견되는데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부속품'이 함께 발견됨 그게 바로 "목간木簡"임 이 '목간'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상품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음 이 상품이 무엇이다~ 라고 설명해주는 거임 (발견 당시에는 '목간'이라고 기사가 많이 났으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죽찰竹札'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이하 '죽찰') 그러니 이 말이 무슨 말? 이 도자기가 무슨 도자기인지 알 수 있다는 말!!!!!!!!! 태안마도 2호선에서 이런 죽찰이 발견된 매병은 두 개인데 놀랍게도 이 두 개에는 매병의 정체가 적혀있음 딱 봐도 위의 도자기와 함께 있는 죽찰과 밑의 죽찰에 써있는 글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텐데 앞 뒤로 다른 글자가 써있어서 그럼 하나는 重房都將校吳文富 宅上眞盛樽封 앞면 : 중방도장교오문부 뒷면 : 택상진성준봉 요렇게 쓰여있고 다른 하나는 重房都將校吳文富 宅上精蜜盛樽封 앞면 : 중방도장교오문부 뒷면 : 택상정밀성준봉 이렇게 쓰여있음 두 죽찰에서 "重房都將校吳文富(중방도장교오문부)"라는 글자가 겹치는데 '어라?'하는 부분이 있을 거임 "중방重房" ㅇㅇ 맞음 그 '중방'의 중방임 고려시대 무신들의 합좌기구이자 무신정변 이후에는 고려 최고의결기구가 된 그 중방을 말하는 거임 그 뒤의 "도장교都將校"는 당시 정8품의 무관직을 말하는 거임 그 다음의 "오문부吳文富"는 그냥... 그냥 사람 이름임😊! (오늘날로 치면 옥뮤다 같은 곳으로 택배가 빠져서 영영~ 못 받게 되신 분임) 그러니까 두 죽찰의 앞면에 써진 글자는 '회사-직책-이름' 순으로 일종의 수취인을 쓴 거임 "중방에서 근무하시는 오문부 도장교 귀하께" 정도 되는거임 그럼 뒤에 써진 "宅上眞盛樽封" "宅上精蜜盛樽封" 은 무엇일까 "택상宅上" = 받들어 올리다 "진眞" / "정밀精蜜" = 참기름 / 꿀 "성준봉盛樽封" = 준(樽)에 담아(성盛) 봉(封)하여 참...기름??? 꿀이요????????? 녜... 참기름 & 꿀단지였던 거임ㅇㅇ 세상에서_가장_비싼_포장용기.jpg 앙대ㅠㅠㅠ 이렇게 이쁜 내 고려청자가 고작 포장용기일리가 없어!!! 실제로 죽찰의 발견 당시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해보지 못한 쓰임새라서 학계에 일대의 파란...까지는 아니고 놀라움?을 선사해주었고 지금도 대학교 한국미술사 or 한국도자사 수업을 들으러 가면 교수님과 강사님들이 아주 재미있게 말해주는 일화 중에 하나😉 ^^ 어케 끝내 이거... 처음 썼을 때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망설였엉 +덧 죽찰의 발견으로 우리가 '매병'이라고 부르는 것이 고려 당시에는 "준(樽)"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덧2 "도장교都將校"는 정8품의 '하급'무관직임 하급무관이 저런 도자기를 선물(혹은 뇌물?) 받았을만큼 당시 무신들의 위세(혹은 오문부吳文富 아저씨의 위세?)가 컸음을 알 수 있음 +덧3 설마 포장용기로만 썼겠..썼을까? 다 쓰고 꽃병으로든 술병으로든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쨌든 '참기름&꿀단지'로 쓰인 실사용례를 아주 정확하게 알게 된 사례😊... 자, 마지막으로 죽찰과 발견된 매병을 보자! 둘다 보물로 지정되었음 참기름단지 국보 제1783호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꿀단지 국보 제1784호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ㅎㅎㅎ 안녕!
의외로 고양이의 대한 지식이 많았던 조선시대
조선의 온것을 환영하오 젊은이여 변상벽(변고양이) <묘작도> 당지 조선시대는 의외로 고양이의 대한 지식이 많았는데 (자주 보네요 대군?) 양녕대군이 세자시절 재상의 집에 있던 금빛고양이를 달라고 떼쓰다가 빠꾸 먹었는데 이때 양녕대군은 "금빛고양이는 수컷이 귀하다길래 한번 보고 돌려주려고했어." 핑계를 댐 사실 금빛고양이는 80% 확률로 수컷임. 변상벽(변고양이) <묘작도> 오히려 삼색이가 90% 확률로 암컷이라 수컷이 더 귀함 양녕대군이 둘을 햇갈린건지 내려오는 썰이 와전되서 그런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당시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미 털색에 따라 암수의 특징이 있다는걸 이미 알고있었다는말ㅇㅇ 그리고 단순히 고양이가 가축에서 분양이 가능하게 반려(애완)으로서 입지가 올라갔다는것ㅇㅇ. 그리고 세종말에 나온 선택요략이라는 책에서는 장승업 <고양이> 고양이가 가축으로 등장하며 "정묘" 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는데 이 정묘라는 말은..... 고양이의 거세를 말함 이미 조선초기에 고양이의 중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 어떻게 중성화를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도 한 중성화 지금도 고양이를 위해 잘 해야겠쥬? 그리고 조선중기 허준과 동시대의 의원이었던 양예수와 정경선은 의림촬요라는 자신이 쓴 책에서 고양이가 개박하를 먹으면 취한다. 라고 기록되어있음. 이 개박하라는건 현재 우리가 부르는 캣닢임 고양이가 캣닢에 미친다는걸 이미 알고있었다는것ㅇㅇ 그리고 조선 후기때 사람들은 고양이의 동공으로 시간을 가늠하기도했음 시계가 없던 당시에 해시계처럼 시간을 대략적으로 측정한것.ㅇㅇ 즉 고양이가 빛에는 동공이 작고 어둠에는 동공이 커진다는걸 알고있었음 비록 어두울때는 잘 안보여서 약간의 오차가 있긴했지만 아주 유용한 시간체크 ㅋ 이익이란 실학자는 오전 12시 전후로 고양이 동공이 좁아진다고 생각했음 뭐 약간의 오차가 있긴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 대단하지라~ 하나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어느날 이익이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정전기가 일어나자 이익 : 오잉? 고양이 털안에 불티(불씨)가 있나?? 이익 : 고양이는 차가운곳(서쪽)에서 온 동물인데 이익 : 어떻게 몸에 열기를 품고있을까??? 고민하딘 이익은 이익 : 고양이는 참 알 수 없는 것이로다~ 했다고한다. 사실 우리나라에 고양이 경로는 서아시아 -> 중국 -> 우리나라인데 이때 이미 고양이의 기원(?)에 대해 알고있었다는것! 당시 이익은 서극(서쪽)을 해가 지는곳이라 추운곳으로 생각했나보다.ㅋㅋㅋㅋㅋ (또 나왔네 양ㅡ하!) 그리고 양녕대군에 금빛고양이 일화에서 스승신하가 세자인 양녕대군을 혼내기위해 이런 말을 하는데 스승신하 : 고양이는 사냥개만큼 사납지는 않지만 귀여워하기 어려워 구경하기 어려운 동물입니다 근데 신효창 재상에게 빼았으려하시다니요 세줄 요약 : 고양이는 사냥개보다 안사납지만 성격도 지 마음대로고 니 말 잘 듣고 사람을 따르는 동물이 아님 ㅡㅡ 변상벽 (변고양이) <묘작도> 조선시대에도 고양이는 도도하고 키우는 사람들은 집사라는 이미지가 있었나봄ㅋㅋㅋㅋㅋㅋ 변상벽(변고양이) <묘작도> 김득신 <야묘도추> 그럼 냥ㅡ바~ 출처
영국 화가의 눈으로 본 그때 그 조선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2 20세기 일본 화단의 대가로 꼽히는 이토 신수이(伊東深水, 1898-1972)가 그린 키스의 초상화이다.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 1919년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곧, 일제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풍습과 경관에 빠져들었고 깊은 애정으로 이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그림은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다가 2006년에야 재미동포 송영달 선생의 노력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됩니다. 아마,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을 터인데, 1920~1940년대 무렵 옛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름답고 정밀하게 나타나 있는 그림들을 보면 경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 Marriage Procession, Seoul_1921 혼례 행렬 이 그림은 혼례 행렬, 정확히 말하면 신부 행차입니다. 꽃가마가 아주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네요. 행렬 앞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신랑 집으로 가마를 인도하여 갑니다. 그 인도자는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습니다. 청사초롱을 든 사람들이 가마 앞뒤에 있고,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따라가고, 빨래하던 아낙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한 아낙은 길에다 물을 버리고 있네요. 뒤로 동대문이 보이는데, 다리는 청계천의 어느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East Gate, Seoul, Moonlight_1919 달빛 아래 서울 동대문 푸른 달빛 아래의 동대문(興仁之門). 이 그림에 보이는 돌담 표현은 목판화로는 하기 어려운 기법이라고 합니다. 키스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목판 원본이 소실되었고, 이 그림은 키스의 저서 <동양의 창>에 실린 것인데, 현재 누가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답니다. ◆ East Gate, Pyeng Yang, Korea_1925 평양의 동문 “1392년에 지은 평양 성곽 중 동쪽에 있는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서울에 있는 동대문만큼 웅장하지는 못하지만, 평양의 동문은 그 단순한 스타일과 함께 연륜의 은은함이 배어 있는 문이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은 그 건축법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더욱 절제된 형태로 발전시켜 한국 특유의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평양의 동문은 바로 이런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 Riverside, Pyeng Yang_1925 평양 강변 “대동강변의 이 정자는 약 150년 된 것이라고 하며, 그 주변 환경이 너무 완벽하여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정자 터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키스가 대동강변이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가 있는 근처인 듯싶습니다. ◆ Wonsan_1919 원산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 키스의 그림을 보니 과연 원산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겠습니다. 밤하늘의 별빛과 바다 위 배의 불빛이 기막힙니다 ◆ Korean Domestic Interior 한옥 내부 “비교적 여유 있는 집의 내부 풍경이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는데,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 준다.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방은 대문 가까이 있다.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길가에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마당이 있고 부유한 집은 안채 앞마당까지 해서 마당이 둘이다. 한국 사람들은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방바닥은 노란 장판지로 덮여 있는데 항상 반짝반짝 닦아놓고 있다. 사랑방 나무기둥에는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가리킨다.” ◆ The Eating House 주막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밖으로 새어 나온다. 주막은 추운 겨울날 먼 거리를 걸어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주막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달을 쳐다보는데 최고로 좋은 집 >” ◆ The Hat Shop 모자 가게 “간판에 ‘높은 모자, 둥근 모자, 리본 달린 것, 세상 모자란 모자는 다 있습니다’라고 써 있다. 이 자그마한 모자 가게의 주인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서 키가 큰 친구들까지도 가게 안에 다 들어오게 했다. 그들은 거기서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눈다. 한국에서 모자는 중요하다. 학자는 특별한 모자, 그러니까 검은 말총으로 된 모자(갓)를 쓰는데, 오로지 중국 고전을 다 읽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총각은 약혼식에서 노란 짚으로 만든 둥그런 모자를 쓴다. 결혼식 날에는 한 사람이 빨간 모자를 쓰고 손에는 백년해로와 신의의 상징인 기러기를 들고 간다. 이런 옛 풍습은 한국에서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 The School - Old Style 서당 풍경 “하늘 천, 따 지, 달 월, 사람 인. 후렴처럼 반복하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여름 해는 따갑게 비치고 있었는데, 서울 성문에서 멀지 않은 그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서당 안을 슬쩍 들여다본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을 외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앞뒤로 몸을 흔들어댔다. 나이 많은 훈장은 실내용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한시를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훈장은 조금도 학생들의 공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반장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긴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다가 학생의 외는 소리가 끊긴다거나 조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 곧바로 등이고 어디고 내려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린 학생은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글 읽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 Temple Interior 절의 내부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이 사당은 전쟁의 신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노란색의 작은 지붕 밑에 나무로 깎은 시커먼 조각상은 약 3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 한국을 지켜주었다고 믿어지는 중국 장군의 영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사당은 이상한 모양의 조각상들로 꽉 차 있었고 내부는 어두컴컴하였다. 얇고 가벼운 치마를 입고 땅에 납작 엎드려 염불하는 여인들은 마치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떨어진 꽃잎처럼 보였다.“ ※ 여기서 말하는 사당은 지금도 동대문 인근에 있는 관제묘를 말합니다. 동묘라고도 하고 관운장을 모시고 있죠. ◆ White Buddha, Korea_1925 흰 부처 이 그림의 흰 부처는 현재 서울 홍은동 보도각에 있는 백불(白佛)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A Game of Chess_1936 장기두기 “전형적인 한국 시골의 두 노인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때로는 길가에 앉아서도 한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틀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그네는 대개 소나무에 줄을 맨 것이지만, 때로는 벽돌로 세운 기둥에 매기도 한다. 그네는 이런저런 명절에 타기도 하지만 주로 봄에 타는 듯하다.” ◆ Kite Flying 연날리기 “서울은 연날리기에 최고로 좋은 도시이다. 연 날리는 철이 돌아오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온통 형형색색의 연으로 뒤덮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각종 크기의 연을 파는데, 값도 싸서 어떤 것은 불과 일전밖에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려본 것은 전형적인 아이들의 연 날리는 모습이다.” ◆ New Year's Shopping, Seoul_1921 새해 나들이 키스는 자신의 저서 <동양의 창>에 “정월 초하루인 설은 한국 최대의 명절이다. 이 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썼습니다. 광화문 해태 상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이 풍선을 가지고 놀고 있군요. 옛 우리의 세시풍경을 그린 귀중한 그림입니다. ◆ Young Korea_1920 한국의 어린이들 색동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 두루마기에 예쁜 꽃신을 남자아이들을 나란히 앉혀 놓고 그림을 그렸군요. 키스의 초기작 중 하나인데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이들이 설빔차림을 한 것 같군요. ◆ Two Korean Child_1925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아이들의 의상은 그 디자인에 있어서 부모나 조부모가 입는 옷과 다를 바가 별로 없으나 색깔이 더 다양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분홍장미 색깔의 넓은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오게 입고, 어린 남자아이들도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조금 큰 남자아이들의 바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통이 넓고 발목까지 온다. 갓난아기들의 저고리에는 색동 소매가 달려 있다.” ◆ Country Wedding Feast_1921 시골 결혼잔치 한국인의 풍습을 흥미를 가지고 관찰한 키스는 결혼식 장면을 여러 장 그렸습니다. 혹 그보다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더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번은 신부 행렬을 보려고 급히 따라가다가 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아이 어른 다 합하면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흥겹게 잔치를 치르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 Korean Bride_1938 한국의 신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자리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디어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신부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라는 키스의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격세지감을 들게 합니다. ◆ Wedding Guest_1919 결혼식 하객 결혼식 하객으로 온 이 부인은 머리에 장식이 달린 조바위를 쓰고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키스의 관찰입니다.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 Returning from the Funeral_1922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 밖에 묻는 것이 법이라, 겨울 저녁 어두워진 후에 등불을 켜 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성문의 현판에 ‘東大門’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은 아니로군요. 키스가 영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영국 왕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 The Widow_1919 과부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 Embroidering, Korea_1921 자수놓기 긴 머리에 빨간 댕기를 하고 수를 놓고 있는 처녀. 혼기를 맞아 자신의 혼수 준비를 하는 걸까요. ◆ Woman Sewing 바느질하는 여자 “중류 가정의 한 여자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그녀의 옆에는 바느질 그릇과 인두가 꽂혀 있는 놋화로가 놓여 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 A Hamheung Housewife_1921 함흥의 어느 아낙네 “한반도 북쪽에 있는 함흥의 여자들은 서울 여자들보다 키도 크고 자세도 더 꼿꼿하다. 독특한 옷차림으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닌다. 큰 두건 같은 머릿수건은 치마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대낮에 그렸다. 그녀는 땡볕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빨래를 담은 붉은 함지를 이고 있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가락지 두 개를 정성스럽게 끼고 있었다.” 이 그림과 아래의 ‘아침 수다’는 같은 소재의 그림입니다. ◆ A Morning Gossip, Hamheung, Korea_1921 아침 수다 "아침에 빨랫감을 이고 씻어야 할 요강을 들고 냇가로 나가던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머릿수건을 기술적으로 두르는 것이 풍습이며, 어떤 때는 치마나 아이들 옷으로 머리를 둘러싸기도 한다. 치마는 풍선처럼 넓게 퍼져 있고 저고리는 무척 짧다.“ ◆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_1939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 “중하층 계급에 속하는 한국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추운 겨울이라 머리에는 털이 안으로 달린 남바위를 쓰고 그 위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있다. 하얀 무명옷에는 솜을 넣어 방한을 하고 있다.” ◆ The Country Scholar 시골 선비 “이 선비는 원산 사람이다.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인 선비 의상은 8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모자도 옛날식이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는 끝 부분이 백옥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복장과 잘 어울렸다..선비는 그 부분이 잘 보이도록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옷고름은 연홍색 비단이고 옷은 엷은 옥색이었는데 까만 단하고 훌륭한 색깔의 조화를 이루었다. 이 나이 많은 한국 선비와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좋은 가정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 등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매너는 은근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는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 Young Man in Red 홍복을 입은 청년 "이 청년은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입궐할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다. 붉은색의 겉옷 밑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백색 옥돌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패옥 소리가 낭랑했다. 거북이 등과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는 꼭 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 위로 둥그렇게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내린 에이프런에는 금으로 된 단추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 등급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색 칠을 했고, 신발은 넓적하고 코끝이 뭉특해서 발이 작아 보인다.“ ◆ A Daughter of House of Min_1938 민씨 가문의 규수 “이 처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살된 명성황후의 친척이다.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또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한국 양반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얇은 천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발에 아주 잘 맞았다. 만약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그의 멋진 발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으리라! 훗날 나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이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모녀에게서 그 아버지의 우아함이나 온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영어를 잘하고 꽤 똑똑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난 듯해 기뻤다.” 처녀의 아버지는 조선 말기 최초의 프랑스 공사였다는 것으로 보아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권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02년에 주불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공사로 활약한 민영찬으로 추정됩니다. 민영찬은 국권을 빼앗긴 것을 분히 여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입니다. ◆ The Gong Player_1927 좌고 연주자 이 악기는 조선 말기 화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도 보이는 좌고(座鼓)로 생각되는데, 좌고는 궁중음악 연주에 사용되는 북입니다. 보통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으로 연주하거나 춤 반주를 할 때 좌고를 치는데, 앉은 채로 연주할 수 있도록 높이가 낮은 틀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칩니다. 좌고의 북통에는 용을 그리고, 북면에는 태극 무늬를 그려 넣습니다. ◆ The Flute Player_1927 대금 연주자 "이 사람은 과거 국악원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음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잇다. 다행히도 나는 국악원 사람을 몇 명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종묘제례 때 보았던 아주 희귀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제일 보기 드문 악기는 다듬지 않은 옥같이 보이는 삼각형의 돌을 여러 개 나무틀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편경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치면 전 음계의 음정을 낼 수가 있었고 소리가 아주 좋았다. 대개는 피리소리의 효과를 높이는 데 사용하였다. 또 오리 모양으로 만든 나무딱따기도 있었는데,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전후좌우로 돌아가면서 소리를 냈다.(박을 가리킵니다). 북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는데 언제나 피리소리가 제일 고음이었고 또 제일 아름다웠다. 이 대금 연주자는 연주도 잘하지만 행동도 점잖아서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이 잘생겼으며, 대금을 부는 사람의 섬세한 손놀림이 정말 보기 좋았다.“ ◆ Court Musicians, Korea_1938 궁중악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전통 한국음악의 정수인 궁중음악이 사라져갈 무렵, 키스는 궁중악사들을 애써 찾아 몇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아마 이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종과 순종 재위 시에 궁중음악을 연주하던 마지막 궁중악사들로 생각됩니다. 출처
블루홀 끝까지 탐사하기 (심해공포증 주의)
블루홀 미스테리 바다속 은밀한 세계 블루홀이 생각보다 매우 넓네... 사진에 보이는 '?'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곳임 하늘에서 내려다 본 블루홀. 근데 블루홀이 잘 안보임ㅋ 저희가 직접 뛰어들어 보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왠지 빨려들 것만 같음 또 다른 블루홀. 이 섬엔 블루홀이 많은 듯. 블루홀의 소용돌이. 이 소용돌이에 휩쓸려서 죽은 다이버의 동영상이 많이 떠돎. 실제로 블루홀 입구의 소용돌이 때문에 빨려들어가 죽은 다이버가 정말 많다고 함 세간에선 유리 립스키는 아직 살아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음. 블루홀의 입구 근처 구조 자 이제 블루홀 속으로 들어가 보겠음. 입구의 소용돌이가 보임  블루홀의 입구 부분 여기서 좀 더 들어가면 이런 곳들이 나옴   그리고 블루홀 내에서 발견 된 생물들 remipede라는 벌레인데 3억년 동안 거의 변함이 없어서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함. 독니로 독을 주입해서 동굴새우 같은 갑각류를 사냥한다고 함. 빛이 없는 블루홀에서 발견한  Agostocaris 동굴 새우는 무색 생물임. 소화기관 일부에만 색을 갖고있다고 함 그리고 탐험은 계속됨  심해 110m 부근 격자무늬 지역에서 몇 Lucayan 인도인 두개골을 발견. 역사적인 발견임. 몇 세기 전의 유골이라고 함.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산소가 거의 없는 박테리아 황화수소층도 나옴. 유독하므로 굉장히 위험하다고 함. 황화수소층 사진은 저 스쿠버들이 던진 조명탄 색이 붉은 색이라(물속에서 발화되는 수중조명탄) 사진에 플래시가 터지면서 조명색이 섞여 들어간 듯합니다. 그 외 다른 색상을 가진 조명탄도 있음. 이렇게 탐험은 끝을 향해 달림  지상으로 통하는 또 다른 블루홀. 모험이 끝난건 해가 지는 저녁이었음... 세상은 넓고 아직 인간이 모르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양반과 노비가 한이불 덮고 잤던 조선 시대의 주막
양주를 손님에게 먹이는 주모가 젊다. 1900년이전에도 양반 자제들은 양주를 마셨다. 주막에서는 보통 음식값만 받고 숙박료는 받지 않았다. 1 ~ 2칸의 방에 보통 10여명이 묵었다고 한다. 미국 선교사 무스 "주막안의 사람들은 상자안의 정어리처럼 포개져 있었다." 흔히 조선 시대의 주막이라 하면 술집을 떠올리지만, 사실 주막은 동네 주민들이 술을 마시거나 외식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 여행객이 잠시 머물며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술집보다는 여관이나 식당에 가까운 곳이었다. 조선 시대에 여행객이 아닌 일반인이 집 밖에서 술을 마시고 밥을 사먹을 수 있는 곳은 도시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술집이나 식당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개항 이후 근대사회에 들어서고, 우리나라에 외식 산업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1980년대 무렵부터다. 밥 그릇 크기가 모두 예사롭지않다. "하룻밤만 묵어갈 수 있소?" 당시 사람들이 여행길에 먹고 자고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곳은 ‘역驛’과 ‘원院’이 있었다. 당시 ‘역’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역마와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로서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었고,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원’이었다. 퇴계원, 혜음원, 인덕원, 다락원 등의 지명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원’은 고려 시대에 절에서 관리하던 숙박업소로, 때로는 행려병자의 치료와 빈민 구제 사업도 겸했던 다양한 목적의 시설물이었다. 1902년 주막의 멍석위에서 식사를 하는 손님들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불교 탄압 등으로 절에서 관리하기 어려워지자 민간인들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고, 결국 땔나무나 마실 물 밖에 제공하지 못하는 영락한 시설물로 퇴락하고 말았다. 17세기에 박두세가 서울에 과거 보러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남 아산의 요로원(要路院)이라는 곳에서 묵게 된 과객의 이야기로 소설을 썼는데, ‘원’을 아주 삭막한 곳으로 표현했다. 주인공은 침구는 물론 반찬으로 장과 소금에 절여 말린 청어도 갖고 다녀야 했고, 심지어 주막에 도착해서는 쌀을 꺼내 밥도 지었다. 방안에서 불을 밝히기 위한 관솔도 갖고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 원이 없으면 주막에서 자야 했는데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주막은 거의 찾기 힘들었다. 1390년에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하륜은 경주에서 울산까지 90리 길을 가는 동안 머물러 쉴 곳이 없어 맹수가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채 수풀 속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200년 가량 지난 16세기 말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 오희문은 70일간 여행을 하면서 한 번도 주막에 머문 적이 없었다. 그는 일가친척이나 평소 안면이 있는 양반의 집, 또는 그 종의 집, 일반 백성의 집을 찾아 다니며 잠자리를 해결했는데 전혀 안면이 없는 양반 집에서는 한 번도 묵은 일이 없다. 사극을 보면 양반이 길을 걷다 해가 저물면 민가 앞에서 “이리 오너라” 하여 하룻밤 재워주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는 듯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주막 이러한 여행길의 불편함은 18세기쯤에는 교통 요충지 대로변에 주막이 생겨나고, 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주막이 집단적으로 형성된 주막촌도 형성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또 해가 기울면 어두워져서 길을 갈 수도 없지만 야행성인 호랑이가 덮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나루터 주변이나 산기슭 대로변에도 주막이 들어섰다. 18세기 말에 황윤석이 전라도 흥덕현 고창의 고향집과 서울을 오르내릴 때에는 군데군데 점막에서 잠을 잘 수 있었고 밥을 사 먹을 수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주막 그러나 그때에도 주막은 잠자리와 식사, 말먹이만을 해결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당시의 주막은 요즘의 여관이나 모텔처럼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진 곳이 아니었다. 주막은 오직 흙바닥에 자리를 깔아 놓고 목침만을 갖추어 놓았으며 그것도 대개는 여러 명이 한 방에서 뒤엉켜 자야 했다. 침구도 스스로 마련하여야 했으므로 여행객의 짐보따리에는 온갖 옷가지, 세면용구, 비상식량에 요와 이불까지 끼어 있었다. 다만 군불만큼은 방바닥이 뜨거울 정도로 때어 주었다. 19세기 말, 처음 조선의 주막에 들른 영국인 지리학자 비숍(Bishop)은 호랑이의 위협 때문에 방문도 열지 못하는 방안에서 방구석에서 메주 띄우는 냄새까지 뒤섞인 40도에 가까운 열기에 잠을 설쳤으며, 몇 해 뒤에 입국한 스웨덴의 기자 아손 그렙스트(ASON Grebst)는 조선인들은 아침이면 방에서 빵처럼 구워져 나온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소련인 카르네프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고문같았다. 한겨울인데도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비숍 "조랑말의 말린 똥까지 때는 주막의 방은 언제나 과도할 정도로 뜨거웠다. 섭씨 33도가 평균이고 그 이상도 자주 올라간다. 숨이 막혀서 문이라도 열면 호랑이가 온다고 닫게 했다.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숨을 쉴 수 밖에 없었는데 몸을 지지는듯한 40도의 온도를 조선인들은 즐기는 듯 했다." 한겨울에도 따듯한 방에는 늘 벌레들이 득실거렸다. 어떤 곳은 너무 많아 발을 디딜곳도 없었다고 한다. 밥과 여물을 늘 준비해야하는 탓에 한 여름에도 모든 방의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했고 숙박객들은 밖에 멍석을 깔고 잠을 자야 했다. 주막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길손들 조선 시대의 주막(酒幕)은 ‘술막’이라고도 했는데, 술막이라는 이름이 변해 숯막, 탄막이라고도 했고, 점막(店幕), 점사(店舍)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주막의 규모는 대부분 일반 민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쉽게 말해 지금의 민박집과 비슷했다. 초창기의 주막은 아주 소박했지만 19세기말의 주막에서는 돈을 주면 밥, 국, 김치에 각종 나물이나 미역무침, 달걀 따위를 먹을 수 있었고, 때로는 국수에 닭고기에 닭보다 싼 꿩고기를 사먹을 수도 있었다. 미국 선교사 무스 "조선의 주말에서는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따로 없었다. 김치 특유의 발효 냄새로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인 혼마 "주모가 음식을 조리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호걸이라도 수저를 드는 일에 주저할 것이다. 주모는 자기 입속에 들어간 숟가락으로 계속 간을 본다. 젓가락같은 것은 거의 씻은 적이 없고 콧물을 닦은 손으로 항아리에서 김치를 꺼내 썰고 있었다." 또한 주막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사람이 하룻밤 묵어가듯 말에게도 꼴을 먹이고 재우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룻밤 묵고 먹는 값을 연가(煙價)라 했는데, 사람 하나의 연가와 말 한 마리의 연가가 똑같았다. 18세기 실학자 황윤석 "주막에서 잠을 자면 1인당 10푼(현 4,000원), 말 1필당 10푼이었고 식사를 하면 끼니당 40푼(16,000원), 떡은 20푼(8,000원)에 사먹을 수 있었으며 술은 1잔에 15푼(6,000원)이었지만 안주는 공짜였다. 짚신은 한짝에 50푼(20,000원), 참빗은 하나에 25푼(10,000원)이었다." 100년뒤 미국 선교사 무스 "미국돈으로 대략 10센트(약 3,000원)이면 숙박료가 포함된 저녁과 아침 식사가 가능했다. 미국에서 3달러나 받는 고급 여관을 생각하면 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선에서 10센트는 최고 수준의 주막에서 쉴 수 있으며 더 허술한 주막에서는 절반으로도 이용할 수 있었다. 일반 노동자가 하루 꼬박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10센트였으니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으려면 하루 일당을 모두 바쳐야 한다." 문경세재 주막 여행객들에게 잠자리는 제공하지 않고 식사만 제공하는 간이 주막들도 꽤 있었다. 18세기의 김홍도나 김득신이 그린 풍속화를 보면 길가의 밥집에서 주모가 부뚜막에 솥 하나를 걸어놓고 국밥을 팔고 있다. 손님은 나무 그늘 밑 땅바닥에 자리를 펴고 앉아 밥을 먹거나 부뚜막 앞에 앉아 국과 두어 가지 찬에 밥을 먹었다. 이곳에서는 술도 함께 팔았는데 안주값을 따로 받지는 않고 술을 사면 술상에 간단한 안주가 딸려 나왔다고 한다. 물론 이런 주막이 간판이 있을 리 없었다. 유럽에서는 문 앞에 담쟁이 가지를 걸어 놓아 술집 간판 대용으로 썼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술 거르는 용수를 높이 걸어놓거나 ‘주(酒’) 자가 쓰인 등을 걸어 그곳이 주막이라는 것을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때로는 국수를 파는 집에서는 종이를 국수 모양으로 길게 찢어 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여행자가 여행 경비를 모두 갖고 떠나기엔 엽전 돈다발은 굉장히 무거웠고 주막에서는 여행자들의 돈을 대신 맡아주었다. 여행자는 처음 묵는 주막에 엽전 꾸러미를 맡긴 후에 영수증을 받았다. 이후 거쳐가는 주막마다 영수증을 제출하면 주막에선 여행자가 쓴 경비를 확인하여 영수증에 표기했다 여행이 끝나면 가까운 주막에 가서 영수증을 보여주고 정산 후 남은 돈을 거슬러 받았다. 이렇게 하면 돈을 모두 가지고 다니지 않고도 편리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전국 주막 주인들의 조직은 광범위하고 일원화와 체계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막 주인이 영수증을 받지 않거나 돈을 떼어먹는 일은 없었다. 나그네들이 술 한 잔에 살아온 인생 이야기나 새로운 소식들을 풀어내면 이야기를 들은 주모가 다른 나그네에게 전달하거나 옆자리 나그네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또 은밀히 만나 통치자를 비판하는 모의와 거사를 논의하거나 유배지로 향하는 선비들이 잠시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유배 길의 애통함을 담은 정약용의 시 ‘율정별(栗亭別)’도 나주의 한 주막에서 탄생했다. 그런가 하면 탐관오리의 부패한 행적을 은밀히 조사하던 암행어사가 반드시 거치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 암행어사는 하사된 봉서를 펼쳐봐야 자신이 감찰할 곳을 알게 되는데, 대개 생면부지의 장소가 대부분이었다. 이때 정보를 얻을 유용한 장소가 주막이었던 것. 널리 이름을 떨친 암행어사 박문수도 고을에 도는 눈물겨운 이야기와 억울한 사연을 수집하러 가장 먼저 들렀던 장소다. 출처
쓸데없이 스케일 큰 고전소설.jpg
《삼한습유》 조선 순조 때 쓰여졌고, 무려 중국에도 수출됐던 소설임 고전소설 치고는 의외로 내용이 존나 흥미진진함 때는 삼국시대, 주인공은 신라 여자 '향랑' 얘는 남주 '효렴'. 여주랑 연인사이임 근데 부모가 반대하는 바람에 향랑은 마음에도 없는 남자랑 결혼하게됨ㅠ 남편은 존나 못돼쳐먹었음ㅡㅡ 일단 첫날밤에는 이 새끼가 술쳐마시느라 둘이 자지도못했고, 그 다음날에는 이 새끼가 여종이랑 바람핌 그러던 어느날 남편 : 야 오늘 너 좀 예뻐보인다?ㅋ 향랑 : 또 술을 드셨군요. 낮부터 이러시는건 예의에 맞지않습니다. 남편 : 존나 깐깐하게구네ㅋㅋㅋㅋ 솔직히 너 나랑 결혼하기전에 남자있었지? 야 너 우리집에서 나가ㅡㅡ 그렇게 남편집에서 쫓겨나게된 향랑.. 친정집으로 갔으나 부모님도 얼마안가 돌아가신다 외숙모 : 앞으로 너 혼자 살 순 없으니 다른 남자랑 재혼이라도 하는게 어떻겠니? 향랑 : (효렴이 아니면 싫은데...ㅠ 다른 남자랑 또 결혼할 바에는 걍 죽을래...) 진짜로 자살함 그리고 얼마 후 이런저런 이유로 남편이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남편 : (이번 생은 망했군...) 그때 하늘이 번쩍거리더니 향랑이 등장한다 향랑(귀신) : 저는 저 사람의 죽은 부인입니다. 제발 저 사람을 죽이지 말아주세요. 존나 개답답;; 착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아무튼 향랑의 도움으로 남편새끼는 목숨을 건진다 남편 : 부인, 내가 미안했소 당신의 사당을 지어 평생 당신에게 사죄하며 살겠소. 향랑 : 살아서 부부의 연이 끊어졌으니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독자들은 답답터지지만 이걸로 마음이 후련해진 향랑은 이제 효렴이랑 결혼할 생각을 하게됨. 근데 다들 알다시피 향랑은 이미 죽어버렸음 과연 향랑은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후토부인(여신) : 여긴 무슨 일로? 향랑 : 님 여신이시죠? 저 다시 환생해서 효렴씨랑 잘 살아보고싶어요 여신님의 힘으로 좀 어떻게 안될까요?? 후토부인 : 음 아쉽지만 그건 나 혼자 결정할 수있는 일이 아니라서ㅎ 향랑 : 제발요ㅠ 저도 한번정도는 행복하게 잘 살아보고싶어요 후토부인 : 뭐 니가 그렇게 부탁하니까 위에 일단 건의해보긴 하겠음ㅎ ~그렇게 시작된 천상회의~ 옥황상제 : 니들은 어떻게 생각해? 환생 시켜줘야한다고 생각함? 공자 : ㅇㅇ애가 안쓰럽잖어 옥황상제 : ㅇㅋㅇㅋ 환생시켜주겠음 그렇게 인간으로 환생하게 된 향랑.... 효렴 : (....갓난애기인거 실화야?) 효렴의 걱정과는 달리, 이 아기의 성장속도는 엄청나서 7일만에 성인이 되었다. 그렇게 향랑과 효렴은 혼인을 하게되는데 이 혼사의 주선자는 김유신 장군(...)이었다. 아니 이분은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시는지 한편 그 시각 마계에서는... 마귀 : 마왕님;; 천상계에서 웬 여자애 하나를 지들 마음대로 환생시켰다는데여;;; 마왕 : 미친거아냐? 그걸 왜 지들끼리만 결정해? 전쟁이다!!!! 그렇게 시작된 천상계vs마계 전쟁ㄷㄷ 여기서 갑자기 소설의 장르가 바뀜ㅋㅋㅋㅋㅋㅋㅋ 여주 한명 때문에 이게 뭔 일이래ㅋㅋㅋㅋㅋ 향랑 : 헐...일이 너무 커졌네요.. 그냥 저 환생 안하고 저승으로 가야할 것같은데... 후토부인 : ㄴㄴ그냥 있어ㅋㅋㅋ액땜 치른다 생각해 이 때 천상계 전사들 김유신 항우.... 여포..... 제갈량...... 마왕 : 시발 치트키 그만써 개새기들아ㅠㅠㅠ 마모(마왕 부인) : 여보!!! 내가 도와줄게!!!! 필살기!!!!!! 치마 공격!!!!! 갑자기 그녀의 치마가 거대해지더니 천만명의 천상계 군인들을 덮었다 천상계 군인들은 치마폭 속에서 여색에 빠져 정신 못차리게되고.. 석가여래 : 떼잉쯧.... 내 저것들을 저렇게 가르치진않았건만.. 세상이 말세로구나 그때 등장한 석가여래 석가여래 : 무욕의 삶이 진리이니라. 마왕군 : 으윽...너무 성스러워서 공격할수가 없군 석가여래 덕분에 다시 전세가 천상계쪽으로 돌아간다 마왕 : ㅅㅂ 이러다 지겠는데... 지원군이 더 필요해.... 그렇게 마왕은 다른 마왕에게 찾아간다 나는 저 새끼가 제일 쎄서 마왕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마왕이 여러 명이었음.... 이 때 좀 실망함 여러 마왕들 중에서 제일 쎈 애는 찰마공주였음 마왕 : 찰마공주여, 당신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오.... 찰마공주 : 존나 쓸데없는걸로 전쟁하네 그깟 여자애 하나가 행복해지는게 그리 꼴보기싫디? 찰마공주는 그딴 쓸데없는 전쟁에 참가안한다며 거절해버린다 존나 쎈데 쿨하기까지한 찰마공주; 세계관 최종보스인 찰마공주가 안도와주면서 결국 전쟁은 천상계의 승리로 끝나게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모든건 여주 하나 때문에 생긴 일이다. 신들의 전쟁은 끝났지만 인간들의 전쟁은 계속됐는데, 신라군은 백제군을 처치하지 못해서 곤란이었다. 왜냐하면 백제는 적룡이 지키고있었기 때문임 신라군 : 헐 어쩌죠?ㅠ 향랑 : 제가 방법 가르쳐드림^^ 백마를 미끼로 잡아서 죽이시면 됩니다^^ 이미 한번 죽은 짬밥도 있는 향랑은 세상 모든 이치를 통달해버렸다. 신라군 : 헐 이게되네?? 향랑의 말대로했더니 진짜 적룡이 잡혔음 적룡도 잡고 전쟁에서도 이겨서 기분좋았던 군인들은 적룡을 구워 먹어버림 근데 알고보니 적룡은 독이 있는 용이었음 딱봐도 빨간색인데 독있을거라는 생각을 못했나 신라군 : 용고기 먹은 애들 다 맛갔는데 어떡함?ㅠ 향랑 : 어이쿠 그걸 왜 드셨대;; 지렁이즙 드시면 다시 괜찮아집니다. 그렇게 군인들은 다시 살아났고 그 힘으로 삼국통일을 이뤄냈다고한다 ~해피엔딩~ 참고로 향랑 효렴 부부는 잘 살다가 죽어서 하늘로 승천함
19살 연상의 유모를 사랑했던 명나라 황제 이야기.jpg
때는 명나라 당시 왕실이나 황가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건 궁녀들의 역할이었음. 10살의 태자 주견심도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살아 있었지만 주로 궁녀들 손에 키워짐. 그 중 한 명이 만정아 라는 궁녀였음. 만정아는 황자보다 19살 많았음. 지금도 물론 나이차이가 많은 거지만 이 때는 15세기 중반임. 10대 초반에 혼인하던 시기기 때문에 만정아는 황자에게 그냥 어머니 뻘임. 실제로 황자의 생모인 귀비가 만정아보다 어림. 친어머니와 거의 보지 못하고 태자 교육을 받던 어린 주견심은 매일 곁에서 자길 돌봐주는 만정아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고, 그게 연모로 발전함. (.....?) 야사에 따르면 만정아는 미래의 황제인 태자의 환심을 사면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해 주견심의 애정 공세를 받아주고 더 나아가 유혹했다는데 정말 그게 전부였는지, 아님 만정아도 주견심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음. 타임머신 개발되면 가서 알아보겠음. 이후 1464년, 정태제가 죽자 주견심은 19살의 나이로 황제가 됨. 젊은 황제는 제일 먼저 만정아를 황후로 책봉하려고 하지만 주변의 반대가 심했음. 결국 황제는 만정아를 귀비로 책봉하는데 만족해야했음. 물론 황제가 만귀비를 총애했기 때문에 황궁 실세는 만귀비였음. 만귀비는 다른 후궁들 괴롭히는 건 물론이요 자기보다 윗 사람인 황후까지 무시함. 황후 입장에서는 존나 자존심 상할 일임. 보다 못한 오 황후는 만귀비를 불러 군기를 잡음. 뺨을 때렸다는 썰도 있고 채찍을 들었다는 썰도 있음. 수모를 당한 만귀비는 엉엉 울며 황제를 찾아가고, 황제는 극대노하며 바로 황후를 폐위시켜 내쫓아버림. 황후 책봉 한 달만에 일어난 일이었음. 이후 새로운 황후가 된 왕 황후는 만귀비한테 찍 소리도 못하고 설설 기었기 때문에 만귀비는 완전히 비선실세가 됨. 그러던 중 만귀비가 황제의 아들을 낳음. 황제의 첫 아이기도 했음. 황제는 뛸 듯이 기뻐하며 온 중국 명산에 사람을 보내 황자의 건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게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아기는 요절함. 황자가 요절했을 때 만귀비의 나이는 39살이었음. 지금 기준으로도 노산인데 저 시대는 어떻겠음. 만귀비가 건강한 아이를 또 낳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 보였음. 하나 뿐인 아이를 잃고 절망한 만귀비는 흑화해서 온 후궁이란 후궁은 다 괴롭힘. 그러다 현비가 황제의 차남인 주우극을 낳고 주우극이 태자가 되자 네 살짜리 태자와 현비를 독살해버림(.......) 당시 황궁에는 기씨 성을 가진 말단 후궁이 있었음. 요족이라는 소수 민족 출신으로 요족의 반란이 진압 당한 후 황궁으로 끌려와 서고를 관리하는 사람이었음. 황제는 어느 날 우연히 기씨를 보고 하룻밤을 보내고 이내 까먹는데, 문제는 이 하룻밤 사이에 아이가 생겨버림. 만귀비는 기씨를 유폐 시키고 낙태 약을 먹이려고 했지만 만귀비의 악행에 진절머리가 난 환관이 몰래 약을 버려서 무사히 황자가 태어남. 하지만 만귀비의 악명을 알고 있던 기씨는 장민 이라는 내관을 불러 "(어차피 만귀비가 죽일 테니)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게 낫다" 고 말함. 위에서 말했듯 만귀비가 낳은 장남은 요절했고, 둘째 주우극은 만귀비가 독살해버려서 황실에 후사가 없는 상태였음. 장민은 아이를 숨겨서 6년간 키우다가 어느 날 황제가 "짐도 이제 서른인데 후사가 없으니 큰 일이다..." 한탄하자 사실 기씨가 낳은 황자가 있다고 고백함. 이렇게 해서 기씨의 아들 주우탱은 황자로 인정 받고 태자가 됨. 물론 만귀비는 이 아이도 죽이려고 했지만 보다 못한 태후가 주우탱을 자기 처소로 데려가 보호하고 키워서 아이를 죽일 수 없었음. 분노한 만귀비는 주우탱의 생모인 기씨와 주우탱을 숨겨 키운 장민을 독살해버림(....) 태후의 비호를 받는 주우탱을 해칠 방법이 없단 걸 인정하자 허탈해진 건지 뭔지 그 다음부터는 황제가 다른 후궁에게 잠깐 관심을 보이거나 아이를 낳아도 안 죽였다고 함. 이후에도 만귀비는 황궁의 비선실세로 군림함. 조정의 중신들도 만귀비에게 굽신거렸고, 만귀비의 남동생은 금의위지휘가 되어 황궁 군권을 가지게 됨. 사실 황제가 병신도 아니고 만귀비의 이런 악행을 모를 리 없었음. 근데 황제는 만귀비를 너무 사랑한 건지 뭔지 다 묵인했다고 함;;;; 하지만 이런 만귀비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월이었음. 1487년 봄, 만귀비는 60세의 나이로 사망함. 썰에 따르면 만귀비는 젊어서부터 뚱뚱하고 혈압이 높았는데 노령의 나이에 궁녀 붙잡고 화내다가 쓰러져 죽었다고 함(;;;) 슬픔에 빠진 황제는 법도를 어기고 7일 동안 조정 회의를 취소하고, 대신들이 뭐라하는 거 다 씹어버리고 천수산에 만귀비의 무덤을 만듬. 천수산은 원래 황제만 묻힐 수 있는 곳인데 거기서도 가장 터가 좋은 자리를 골라 묻었다고 함. 물론 지금은 도굴 당해 몇몇 부장품만 전해지고 전부 폐허가 됐지만 극도로 호화로운 무덤이었다고... 만귀비의 무덤에 함께 들어갔던 부장품 중 하나인 '황후의' 봉관. 이후 황제는 슬픔에 빠져 "만귀비가 세상에 없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 하겠냐...." 라며 시름시름 앓다가 그 해를 못 넘기고 죽음. 성화제의 뒤를 이어 주우탱이 즉위하는데, 얘가 홍치제임. 사실 홍치제는 만귀비를 부관참시해도 모자랄 처지였음. 어머니를 만귀비 손에 잃은데다 본인도 죽을 뻔 했으니까 ㅇㅇ 하지만 홍차제는 아버지를 생각해 만귀비에 대한 일을 전부 불문에 부침. 성화제와 만귀비가 트라우마가 된 건지 당대 군주로서는 드물게 후궁을 하나도 들이지 않았음. 동시대 조선을 봐도 양반 이상은 첩을 들이는 게 당연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평생 황후만 보고 살았으니 아주아주 드문 일임. 당연히 자식도 황후에게서 낳은 2남 1녀가 전부. 명나라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 받는 홍치제답게 나라 잘 다스리다 갔다고 함. 출처 존잼.. 역사이야기가 젤 잼써 역시
너무 아름다운 고구려, 고려, 신라, 조선 복식들.jpg
고구려, 고려, 신라 조선 시대 복식 실물복원한 사진들이에요 문양이며 색감이며 넘 아름다우니 꼭 봐보세요 !! (특히 중간에 체커보드랑 땡땡이 무늬 .. !! 대충격) 관경변상도’에 나온 고려 여인의 날렵한 자태는 붉은 색의 ‘라’를 이용해 재현했다. 또 ‘수월관음도’에 그려진 고려 여인은 옅은 도토리색 ‘금’ 저고리 차림으로 21세기에 나타났다. 수산리 고분벽화를 근거로 5세기 고구려 여성의 A라인 주름치마를 되살려냈다. 저고리는 베이지색 가죽으로 제작했는데, 저고리의 깃과 섶, 소맷부리 등은 까실까실한 쇠털 느낌을 주는 고동색 송치 가죽으로 처리했다. “당시 고구려인들의 가죽 다루는 솜씨가 좋았다는 문헌에서 힌트를 얻었다” 통일신라 복식. 짧은 저고리 위에 긴 치마를 입고 어깨에 표를 두른 모습은 당시 당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던 옷차림이다. 아름지기 사옥에 전시된 조선시대 복식들. 왼쪽부터 16세기 복식, 19세기 복식, 18세기 복식(신윤복의 ‘미인도’ 재현), 18세기 복식(신윤복의 ‘야금모행’속 여인 복식 재현). 조선시대 고구려 이거 체커보드잔아요 ㄷㄷ 땡땡이 대박.. 겁나 힙해요 경주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바지 고려 옆트임 바지 조선 이전 남자 의복은 더 찾아내기가 어려워서 조선시대 의복을 가져옴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예쁘니까ㅋㅋ 출처 https://mnews.joins.com/amparticle/20728620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arumjigi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