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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때 미해군 수병들은 무엇을 먹었는지 알아보자

이 글은 2차대전 시기만 다룸,

미해군 수병들은 평균적으로 4,000칼로리를 하루에 소비하는데
이런 폭발적인 열랑의 소모를 메꾸기 위해서 미해군은 새로운 직별을 1900년대에 창설함,

조리병에서 시작해서 제빵사, 요리사, 도축업자, 그리고 조리최선임 담당관이였음,
최선임 담당관은 함선의 식량 수량을 확인하고 조리병들한테 재료를 배분하고,

또한 주방에선 주방장을 도와 식단을 짜기도 함, 대부분의 배는 조리장, 빵집,
그리고 정육소가 있었음, 대부분의 장구류는 수백명의 수병들의 수요를 맞춰서 거대했음,
(BB-35 텍사스의 조리실)

조리실은 오븐과 구이용 팬, 그리고 사람만한 찜통이 있었음(위 사진에서 보이는 흰색의 통들),

제빵사는 사람만한 혼합기와 도축업자는 소고기를 한번에 썰수 있는 톱을 배당받았음,

(BB-55 노스캐롤라이나의 제빵소)
요리책은 수준급의 식사와 효율성을 위한 조리법으로 구성되었음,
조리법은 기본이 100인분이였음,

조리법에는 가끔가다 비엔나 소시지와 고구마같은 괴식이 나오기도 했지만
영양학적으론 필요한 식단이였음,
(BB-55 노스캐롤라이나의 감자 깎기실)
감자 깎기는 매체에서 흔한 처벌 수단으로 나타나지만 의외로 효율성이 영 좋지 않아서
나중에는 기계식 감자 깎기 기계를 도입했음(사진 왼쪽의 흰색 기구)

전투배치 상황에서도 조리병들은 수병들을 위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비하며 일했음,

2차대전 미해군의 식단 예시는 다음과 같았음,

봄, 금요일의 식단으로는

아침

반으로 자른 자몽, 밀로 만들어진 시리얼, 구운 콘밀 무쉬,
메이플 시럽, 바삭한 베이컨, 버터, 토스트, 우유, 커피

점심

토마토 주스, 연어 구이,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자요리, 버터랑 같이 볶은 당근,
견과류와 포도를 넣고 섞은 샐러드, 스펀지 케이크, 빵, 버터, 커피

저녁

양배추와 함께 구운 소고기, 웨지감자 비슷한 구운 감자, 양상추 심지 샐러드와
1000드레싱, 반으로 자른 배, 코코넛 버터 쿠키, 빵, 버터, 코코아

이외에도 아침, 점심, 저녁의 구성은 다음을 따라야 했음,



아침

과일:신선한, 동결된, 가루형, 건조, 혹은 통조림 과일은 에피타이저와 영양학적 이유로
포함되지만 굳이 아침에 제공될 필요는 없고 식단에 따라 조정될수 있음,

시리얼:시리얼은 힘의 근원이며 또한 우유와 함께 먹을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상황에 따라 뜨거운 혹은 차가운 우유와 배식됨,

주식:주식은 햄이나, 베이컨, 계란, 소시지, 크림 건조된 소고기, 구운 무쉬,
프렌치 토스트, 핫케이크, 아니면 다른 음식이 올라갈수 있음,

프렌치 토스트나 구운 무쉬가 올라간다면 잼이나 시럽, 젤리도 같이 배식되었음,

빵:빵은 토스트나 롤케이크, 옥수수빵, 비스킷, 혹은 커피 케이크 형태로 배식됨,
도넛이나 팬에 구운 빵도 배식될수 있음,

잼과 젤리:잼과 젤리는 버터를 대체하여 배식될수 있음,

음료류:음료는 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가 배식되었음,

점심

수프:수프는 아침이나 저녁식사라도 배식받을수 있음, 만약에 야채수프가 배식된다면
샐러드도 같이 배식되었음, 수프는 수병들의 주된 야채 섭취원중 하나임,

고기:고기는 언제나 가장 선호되는 음식임, 해군에서 구매되는 고기는 최상급이지만
부주의한 요리 방식으로 많은 양이 낭비될수 있음, 과조리를 삼가하며 배식됨,

그래이비:그래이비 소스는 고기와 함께 배식됨, 좋은 그레이비는 부드럽고 간이 잘되있으며
느끼하지 않음, 뜨겁게 배식할것,

채소:감자를 제외한 초록색 혹은 노랑색의 채소는 맛과 비타민적인 요소로 필요함,

절임:절임은 샐러드를 대체하여 나올수 있음, 주로 당근 절임과 양파, 무, 순무,
양배추 절임이 배식됨, 피클이나 비트도 배식될수 있음,

샐러드:고기나 초록색 채소, 과일로 만들어진 샐러드는 차갑고 아삭한 상태로 배식됨,

디저트:디저트는 행복감을 위해 필요함, 대부분은 단 디저트를 선호함,
무거운 식사에는 가벼운 디저트가 배식됨,

음료류: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 그리고 과일음료가 배식됨,

저녁

주식:고기는 보급품 현황에 따라 쓰일수도 안쓰일수도 있음,
저녁은 대부분 점심보다 가벼웠음, 하지만 수병들의 일과에 따라 변동됨,

고기와 쌀, 마카로니와 치즈, 찹 수이, 크림 소고기, 걸쭉한 차우더, 베이크드 빈즈,
그리고 비슷한 요리들이 배식됨, 또한 점심으로부터 남은 재료들이 재활용됨,

샐러드:채소와 과일로 만든 샐러드, 혹은 주방장이 만든 샐러드는
주식과 함께 배식되며 영양학적으로 중요함,

디저트:디저트는 저녁의 양과 칼로리 수준에 따라 변동됨,

음료류: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 그리고 과일음료가 배식됨, 날씨에 따라
냉차나 차가운 과일음료가 배식되었음,

이런 식단들은 함의 보급품 현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었음,
미해군 수병이 배식이 권장된 음식의 수량은 다음과 같은

우유:470ml

계란:1알

육식류:1번 이상의 배식

콩류(땅콩버터 포함):주마다 1~2번

버터:20~50g

시리얼과 빵:2번 이상의 배식

과일:2번 이상의 배식, 귤류는 자주 배식할것,

채소:감자를 제외해서 2번 이상의 배식, 초록색 혹은 노랑색 채소는 날마다 샐러드 형태로 배식
(이오지마로 항해하는 배 안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수병들)
(미해군 바지선 Quartz에서 아이스크림 배식을 받는 수병들)
(해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인 조세프 클린턴 클리프턴 대령이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퍼먹는 모습)
아이스크림은 미해군의 거의 모든 함정, 심지어 잠수함에도 제조기가 달렸을정도록
아이스크림 보급에 열정적이였음,

육군만해도 3척의 아이스크림(그리고 냉동식품)보관용 바지선을 건조해서 운영했을 정도로
미군 전체가 아이스크림에 열광함,

미해군은 구축함 선원들한테 추락한 조종사 1명마다
일정량의 아이스크림 보급을 약속함,

USS Hancock의 선원이던 Daniel W. Klohs가
2005년 사망하기전 쓴 회고록에 따르면,

조종사 1명당 25갤런의 아이스크림과 함장과 부장한테는 2병의 위스키를 보급하는게 맞지만
아이스크림은 10갤런씩 포장되어 왔기 때문에 총 30갤런을 보급받음,

또다른 선원인 Tom Kocurko의 회고에 따르면 조종사 1명당 10갤런의 아이스크림을
배급받았기 때문에 그 당시 농담으로 하나 격추시키진 말이 나왔다고함,

다만 조종사들은 자신이 고작 아이스크림에 비교당하는게 좀 아나꼬왔음,
미해군 조종사인 중령 Norman P. Stark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해군 구축함인 USS Yarnall에 구조당했을땐
수병들이 잃어버린 형제라도 찾은듯 반겨줬다고함,

그 당시엔 몰랐지만 조종사 1명당 10갤런 아이스크림의 가치가 있다는걸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함,

항모로 복귀하고 USS Yarnall의 수병들이 떠나면서 던진 말에 비로소
자기가 10갤런의 아이스크림의 가치를 가진걸 알고 불쾌한 표정을 지음,

또다른 유명한 이야기로 1942년 렉싱턴이 침몰하던중
수병들은 조리실 냉장고로 뛰어가 빠루를 가지고 냉장고를 따기 시작함,

그렇게 따인 냉장고에선 수병들이 주변에 잡히던
모든것을 동원해서 아이스크림을 주워 담음,

심지어 땀범벅인 헬멧에다가 담아서 깨끗이 핣아먹은 수병도 있었다고 전해짐,

미해군 공식 페북 계정 피셜론 미해군 수병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스크림 보급선에서
2명의 장교가 끼어들자 뒤에서 뒷통수에 쌍욕을 갈김,

쌍욕을 갈긴건 다름아닌 해군 대장 윌리엄 할시였음,
2명의 장교의 행방은 지금까지 전해지진 소식이 없음,

USS Quartz는 미해군이 바지선을 개조해서 아이스크림 보급함으로 만든 예시임,

2000갤런(7,570리터)의 아이스크림을 수용하고
7분마다 10갤런(37리터)의 아이스크림을 생산했음
(2차대전때 현역이던 USS Quartz와 현재 브리티쉬 컬럼비아에 방치된 USS Quartz)

1945년 추수감사절 당시에 미해군이 소모한 음식의 수량은 약 7,400명이 600마리의 6.8kg짜리 칠면조를 먹어치우고 또한 같이 먹어치운 음식의 수량은 다음과 같음,

1,300kg의 컬리플라워, 680kg의 방울다다기양배추, 907kg의 감자, 90kg의 크랜베리, 450kg의 견과류, 1,580kg의 사탕류, 1,136kg의 아이스크림,

378kg의 홀스레디시 소스, 1,000개의 호박파이, 12,000개의 롤케이크, 378kg의 피클, 그리고 전원한테 공짜 담배 1갑이 배급됨.


군사갤러리 ravdozka님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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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전쟁 최신 근황 (불레다르 전투의 교훈)
3개월째 이어진 불레다르 전투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 같아서  오늘은 불레다르 전투의 교훈으로 글을 쓰려고 함.  아직 소규모 교전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뭐 이 정도 결과면 결말이 나왔다고 봄. 불레다르 전선은 바흐무트, 아브디브카 다음으로 러시아군이 공을 들인 전선임.  러시아 해군 보병대가 이 전선을 담당했으며 대규모 기갑부대로 불레다르를 공격함.  러시아 점령지와 매우 가까운 거리. 지형 장애물이 없는 완벽한 개활지. 도시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불레다르 크기. 압도적으로 많은 러시아군 부대 수.  러시아군이 쉽게 이겼어야 맞는 전투였음.  정상적인 전투였다면 대승, 압승을 거둬야 마땅했음. 그런데 불레다르 전투의 결과는  '우크라이나군의 우주 방어를 도저히 뚫을 수 없다...' 로 진행되는 중임. 러시아군은 3개월째 소규모 정착지를  못 뚫고 고전하고 있음.  어째서 불레다르를 못 뚫었는가? 불레다르는 진짜 작은 동네임.  여긴 너무 작아서 시가전을 오래 할 수 있는 동네가 아님. 불레다르로 가는 길이 먼가? 러시아 점령지와 불레다르 뒷동네 사이의 거리가 3.8km임. 그렇다면 불레다르와 러시아 점령지는 2km, 3km 이 소리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그게 불레다르 전선의 길이임. 불레다르 전투의 기괴한 비밀은  터무니없는 물량의 대전차 지뢰에 있음. 우크라이나군이 불레다르 전선을  무시무시한 지뢰 지대로 만들어 놓은 것. '지뢰밭 그까짓 꺼 공병 부대로 개척해서 통과하면 되지 않냐?' 싶지만 희한하게도 러시아군은 그러지 못했음. 기갑 부대를 지뢰밭에 꼴박해서 터져나가기 일쑤였음. 처음에 꼬라박아 31대의 기갑을 날려 먹고 그다음에 또 꼬라박아 71대 손실을 달성하더니 또 또 또 꼬라박아 총 137대의 기갑을 날려 먹고  그제서야 기갑 꼬라박기의 광기를 멈췄음.  기갑 137대 손실이라는 추태는 조롱거리가 되었고 러시아 오신트들 마저 러시아 국방부를 비판했을 정도임. 지뢰밭 돌격이라는 무모한 작전에 동원된  러시아 병사들이 불쌍해 보일 정도였음.  3월 16일 영국 국방부의 불레다르 전투 평가. 1. 러시아 국방부는 전공 욕심에 조급하게 공격했다. 2. 우크라이나 포병의 지뢰살포탄에 러시아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로 생각됨. 우크라이나 포병이 발사하는 서방제 대전차지뢰 살포탄은  예상치 못한 위치, 이미 개척했던 도로 등에 지뢰를 깔아버려 공병 부대가 부실한 러시아군을 농락했음.  공병 부대가 부족했던 러시아군은  고작 3km의 지뢰밭을 못 뚫고 돈좌되었던 것임.  이게 불레다르 전투의 전말이라고 생각함. 러시아군은 보기 좋고 멋있는 전투 부대는 잘 꾸몄으나, 지원 부대를 등한시해서 군대 밸런스를 망쳤음.   보급, 통신, 의료, 공병 이런 부대도  부실해선 절대 안 될 중요한 부대임. 러시아군은 무모한 기갑 꼴박은 멈췄으나  여전히 산발적인 공세를 하고는 있음.  대전차지뢰에 면역인 이족 보행 병기 인간과  포병을 통한 전통적인 시가전에 들어갔다고 봄.  다만 불레다르 전투의 포격은 그렇게 많지 않음. 무슨 이유인지 포격이 미비함.  불레다르의 협소한 크기를 고려하면 각 잡고 포격하면 3일이면 초토화 가능한데 러시아군은 그러질 못하고 있음. 귀하디 귀한 공격헬기를 불레다르 전선에 투입했다가 쥐포로 만드는 등 추태를 반복하고 있음.  '우크라이나군의 우주 방어를 러시아군이 뚫지 못한다.' 이게 우러전이 끝없는 교착상태로 진행되는 이유라고 생각함. 불레다르 전투는 현장 지휘관의 판단보다 '3km 거리? 그까짓 꺼 전차로 밀어버려.'라는  사령부의 책상머리 작전으로 생각되며  (개인적 추측. 지도만 보면 그게 또 맞음.) 공병부대 부족, 포병 부족으로  작은 소도시를 3개월째 밀지 못했다는 게  흥미롭고 신기한 교훈이라고 생각됨.  3줄 요약 1. 러시아군은 고작 3km의 지뢰밭을 뚫지 못해 불레다르 점령에 실패함. 2. 기갑 부대의 지뢰밭 돌격은 기갑 137대 손실이라는 대참사로 끝남.  3. '지원 부대가 부실하면 전투 부대가 힘을 못 쓴다.'가 이 전투의 교훈이라 생각됨. 군사갤러리 후지토라님 펌
장윤정 도경완 첫만남 당시 도경완 눈빛.jpg
2012년 도경완이 아침마당 MC를 보는데 장윤정이 게스트로 나옴. 이 날 처음 정식으로 둘이 만남. 장윤정 나온다니까 도경완이 향수를 엄청 뿌리고 왔다고 말하는 동료 아나운서. 마음 같아서는 향수를 마시고 오고 싶었어요!! 그리고 전하는 진심의 눈빛.gif 그리고 이제 장윤정 무대를 볼 차례 노래 소개를 하는데.. 무대 볼 생각하니 벌써 입꼬리가 주체가 안되는 도책바가지.gif 장윤정이 노래하는데 헤벌쭉.gif 그렇게 사랑에 퐁당~💘 그리고 장윤정 무대 감상평 남기며 또 도책바가지 모드 처음 본 사이에 당황하는 장윤정 ㅋㅋ 그리고 전 출연진 다 무대에 나와있는데 둘만 속닥거리는 것이 포착됨 ㅋㅋ 저때 둘이서 무슨 말 하고 있었냐는 질문에 술 사달라고 했다는 도경완 도경완 이 fox...🦊🤟🏻 그렇게 번호 하사 받고 지금의 도장부부가 되었다고 한다. 도경완 피셜 원래 아침마당 출연 전에 배우 김원희 결혼식에서 축가 부르러 온 장윤정을 보고 반해서 팬이 됨. (이때 아나운서 되기 전이라고 함.) 그래서 아나운서가 되면 꼭 성덕이 되리라 다짐을 했었고 아침마당 장윤정 출연 소식에 매우 설레어함. 그러나 장윤정은 대기실에서 도경완이 팬이여서 엄청 떨려하고 있다고 전하는 제작진 말 듣고 그냥 무심하게 생각했다고 함 ㅋㅋㅋ 자기 좋아한다는 남팬들은 대부분 유부남이라 도경완이 유부남인줄 알아서 ㅋㅋㅋ 나중에 인터넷 검색해보고 미혼에 심지어 두살 연하인거 알고 깜놀했다고 ㅋㅋㅋ + 본인 전화번호 알려 준 것은 사실 도경완이 부모님 디너쇼 티켓 수작으로 매니저 번호 알려달라고 했는데 장윤정이 매니저 번호를 못외우고 있어서 ㅋㅋㅋㅋ 얼결에 자기 번호 준거라고 함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