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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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시편生涯詩篇 23

아무래도 비극은 공포와 잘 어울리지 않는가.

매서운 불행이 휩쓸고 간 자리의 폐허.
그런 흉흉함과.

나와 마주친 사람들이 겁에 질려 발버둥 치거나
소리 지르며 달아나는 그런 지옥을 상상한다.

가령
조금 지나친 불행을 걸쳤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두터운 불행 뒤에는
반드시 어떤 섬뜩함이 깃든다는 듯이.
아니 그것은 이미
한 몸이나 다름없다는 듯이.

어떤 비극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대체로 무서워서 자꾸만 눈을 돌린다.

일견 평온해 보일 만큼 고요한 집에
불도 켜지 않고 누워 있으면
내가 살았던 흔적 같은 것이
이미 사라지고 난 뒤 같다.

작고 오목한 집에 언젠가
흰쌀밥처럼 고슬고슬한 비극이 굴러와
정확하게 담긴다면
나는 지금 폐가를 지나 흉가라는 오명을 쓴
집 한 채의 전사(前史)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린애처럼 울면서 통화하는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다.

그의 울음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한줄기 굉음이 들려오는 철공소로
고개를 돌린다.

철근을 자르는 사람 주위로
가루 되어 날리는 불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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