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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두 달에 한번 꼴로 아들에게 지랄을 떠는 경우

임진왜란 때 광해군이 분조를 맡아 일을 잘 해나감
명나라 황제까지 선조를 질책하자
선조는 본격적으로 아들에게 지랄을 떨기 시작하는데...

1592~1598년 까지는 임진왜란 전쟁 중이고
1597년은 정유재란이 있던 해임

특히 저 1593년 한해는 아주 제대로 지랄병이 나서 2달에 한번 꼴로 지랄을 떤 거
선조가 언제 선위를 하겠다고 난리를 치는가 하면
천재지변이 있다거나 명나라에서 선조의 잘못을 질책한다거나
왕의 권위에 위협이 느껴진다 싶으면 무조건 선위한다 선언

조선 왕 최다 기록임
영조도 선위한다 쇼 많이 했지만 쨉도 안됨

신하들이 다 오케이 해도 선위가 이뤄질 수 없는 상황에서만 선위를 고집함
광해군이 외지에 나가 있어서 당장 올 수 없는 상황이라던지
왕이 선위 하겠다는데 그래 하세요~ 이러면 그건 역모임

선위 전교가 내려오면 광해군이 어디에 있든
일단 궁으로 달려 와야함
밖에 엎드려서 식사도 거르고 아니되옵니다 하고
선위 전교를 거둘 때까지 빌어야 하는 거임
그냥 빌면 안됨
나중에 또 꼬투리 잡힐 수도 있음
그러니 열과 성을 다해서 빌어야함
확실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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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농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 선조.jpg
선조 아들들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라고 쳐줄만한 아들은 둘이 있음. 신성군 - 워낙 어려서 요절해서 병크 터트리고 말고도 없음 선조가 물고 빨고 예뻐죽던 아들이라 전쟁 안터지고 명줄 길었으면 얘가 세자 했을지도 모름 광해군 -군왕자 시절에도 클린했고 세자로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애비의 땡조급 갈굼으로 인해 흑화 빼고는 하나같이 가관이었음 그 중 3대장이 1. 임해군 이진 공빈 김씨 소생, 선조 서장자. 광해군 형임에도 인성이 가관이라 그 누구도 세자 후보로 생각 안함, 얘라면 물고 빨고 했던 선조도 세자는 쫌하면서 신성군과 광해군 사이에서 저울질;;; 확인되는 범죄 행위들만 따져도 구타, 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은 기본에 공물 약탈, 기록에 의하면 임해군은 궁노를 풀어 토지를 멋대로 차지하고 궁노의 입을 막기위해 남의 지아비를 죽이고 그의 처를 궁노에게 짝지어줬다함. 심지어는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하기 까지 함. 이때 선조는 크게 질책했다고 하지만 지 아들새끼라고 싸고 돌아서 처벌은 안 받음 사람을 죽였는데 참고로 세종대왕때는 공주의 남편인 부마가 종을 때려죽였다가 귀양까지 갔음 임진왜란때도 동생 광해군이 피땀흘려 의병들 독려하고 전투할때, 기생끼고 놀고 갑질해대다가 참다참다 백성들이 얘랑 얘 이복 동생 세트로다가 왜한테 넘겨버림. 광해군은 이런 형을 극도로 증오했다고 함, 기록상 신하들이, 서인,동인 할것 없이 당파를 조월해서 쟤 죽이라고 상소를 올려댔는데 광해군이 상당히 미온적으고 동정적인 태도로 나왔음, 그러나 이런 광해군의 행동이 그냥 동복형제를 죽이기에는 쫌 그러니까 못이기는 척 하려고 했다는게 학계의 정설 (태종이 잘했던 짓 분위기 만들어 놓고 빼는 척 하다가 킬) 심지어 반정이후에도 영창대군 죽인 것만 문제삼고 얘 죽인건 아무도 문제 안 삼음. 2.정원군 인조 애비, 얘도 임해군이랑 하는 행동거지가 똑같았음. 후술할 순화군의 졸기에 정원군이나 임해군보다는 행동거지가 나았다고 서술했을 정도로 개 막장.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과거 시험에 처남을 합격시켜 사헌부에 탄핵당하거나 군적 회피자를 돈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거나 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정도고.. 선조 35년 9월 13일조를 보면 정원군의 가노들이 선조의 형수이자 덕흥대원군 봉사손이었던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하는 강력 범죄도 저질렀다고 함. 노복들과 창기(娼妓) 대여섯명이 하원군 집 앞을 지나다가 하원군의 노비와 싸우게 되었는데 하원군 부인이 나와서 말리려다가 도리어 집이 습격당하고 노비들한테 끌려가 감금된거임 하원군의 부인은 참고로 큰어머니뻘인데ㅋㅋ 유교의 나라에서 참ㅋㅋㅋ가지 가지 이새끼 아들이 인조임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원종으로 추존됨...... 콩콩 팥팥ㅋㅋㅋㅋ 3. 순화군 역대 최고의 사이코패스 사이코들이 늘상 그렇듯 동물을 잔혹히 죽이는 걸 꼬꼬마 시절부터 즐겼다는 기록이 있음. 포로 생활 1년만에 안그래도 개 막장이었던 인성이 완전 찌그러져버려서는 ㅋㅋㅋ 인성자체가 소멸되서 사람들 막 죽이고 댕김. 저 임해군이 야..나도 나지만 너 쫌 심하다..했을 정도. 어러서부터 쌩트집을 잡아서 자기한테 인사할때 허리를 너무 조금 굽혔다거나 덜 굽혔다거나 등 말도 안되는 진짜 말그래도 쌩트집 잡아서 잔혹하게 형장을 치는걸 즐겨했다고 함ㅋㅋㅋ 참고로 이때 대략 14~15살ㅋㅋㅋ중2병 개 지랄 맞게 왔음ㅋㅋ 참다 못한 신하들이 처벌을 주청해서 삭탈관직 몇년 받고 끝ㅋㅋ 그러다 10대 후반에는 이미 얘 손에 죽은 피해자만 양손에는 꼽지도 못할만큼ㅋㅋ 쌓이고 완벽한 사이코패스겸 연쇄살인마가 됨. 1년에 10명씩은 죽이고 다닌다는 소리가 돌았고. 백성들은 호환마마보다 순화군을 더 무서워했음. 그러거나 말거나 선조새끼는 어화둥둥 내 새끼 ^^ 처벌도 조또 안하고 사람만 계속 죽어감ㅋ 그러다가 법모이자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강간하는 일이 생김, 심지어 왕후의 관이 모셔진 곳 앞에서 벌어진 범죄임. 이는 아부지인 선조도 절대 쉴드 못쳐주는 극대죄였음. 효를 버린 폐륜적 행동이었기 때문임. 드디어 귀양길에 오르는데 귀양지 가서도 지 왕자라고 고개 쳐 들고 갑질하고 사람 죽이고 다님ㅋㅋㅋㅋ 그래서 다시 서울로 잡혀 올라오는데 다시 그지랄하고 다님 그래도 꿋꿋하게 자가 아들 부둥부둥하는 선조.. 그러다가 더는 지도 안되겠다 했던지 가택연금시켰는데 그러다 풍 맞아 뒤짐ㅋㅋㅋ 선조-정원군-인조는 조선왕조에서 다른 의미로 역대급 3대임 출처
조선 임금들의 사망 원인
초대: 태조 이성계 향년 72세 재위 기간: 6년 2개월 사인: 중풍 자식들이 내란 벌여서 스트레스 쌓이고 이로 인해 중풍에 걸렸는데 악화 되어 붕어 2대: 정종 이경 향년 62세 재위 기간: 2년 1개월 사인: 노환 꼭두각시 노릇하다 동생한테 왕위 주고 천수를 누리다 자연사함 3대: 태종 이방원 향년 54세 재위 기간: 17년 9개월 사인: 폐렴 사냥 갔다가 열이랑 혼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 급성 감염성 폐렴으로 붕어함 4대: 세종 이도 향년 52세 재위 기간: 31년 6개월 사인: 당뇨, 풍질, 부종, 임질 , 허리 디스크, 비뇨 장애 등등 복합적인 합병증 원래부터 온갖 병을 달고 있었음 시력 저하나 편식으로부터 온 비만, 하루종일 앉아서 책만 읽다 온 성인병 때문에 붕어함 5대: 문종 이향 향년 37세 재위 기간: 2년 사인: 등창 어머니 죽어서 3년상 치뤘는데 곧바로 세종이 죽어서 같은 짓을 또함 이로 인해 약해진 몸 등에 난 종기로 붕어함 세자 노릇 35년 왕 노릇 2년 6대: 단종 이홍위 향년 16세 제위 기간 3년 사인 독살 or 타살 왕위에 오를 때 주변의 어른이 없었던 탓에 종친을 제어 할 존재가 전무했음 곧바로 세조의 쿠데타로 이어지고 복위운동까지 실패하자 영월로 유배 보내져 독약을 받음 7대: 세조 이유 향년 50세 재위 기간: 13년 2개월 사인: 문둥병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이후 정신 질환과 불면증 갖가지 피부병에 걸림 죽을 때까지 시달리다가 붕어함 8대: 예종 이황 향년 19세 재위 기간: 1년 3개월 사인: 급사 급사하기 전날 ''이제 좀 종기 나아진 것 같다'' 이러다가 다음날 바로 급사함 9대: 성종 이혈 향년 37세 재위 기간: 25년 사인: 폐결핵, 합병증 조선 최고 성군이지만 세종과 유사하게 종기, 설사, 두통, 요통 등등의 질병괴 씨름하다 폐결핵과 합병증으로 붕어함 10대: 연산군 이융 향년 29세 재위 기간: 11년 사인: 역질, 화병 조선 최고 폭군이지만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되자 미쳐 날뛰며 신하들을 죽여댔음 이어서 전국에서 미녀들을 모아 합방만 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이후 강화도로 유배가서  아들의 시사 소식을 듣고 식음 전폐 하다가 죽음 11대: 중종 이역 향년 56세 재위 기간: 38년 사인: 노환 신하들에게 휘둘리다 노환으로 붕어함 12대: 인종 이호 향년 30세 재위 기간: 9개월 사인: 거식증, 합병증 즉위 부터 병약했고 문정왕후의 도를 넘은 압박에서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음 여기에 세자시절 중종이 앓아 눕자 5개월 동안 예법을 행하다 거식증까지 걸려 붕어함 13대: 명종 이호 향년 33세 재위 기간: 21년 사인: 울화병, 급사 문정왕후 치맛폭에서 20년간 살다가 문정왕후가 죽자 드디어 기 펴고 윤원형등 일파를 대거 숙청했으나 급사함 기록에는 울화병도 있다고 되어있음 (선조 추정 어진) 14대: 선조 이연 향년 55세 재위 기간: 40년 사인: 울화병, 자연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기존의 울화병이 악화되고 실어증까지 걸려서 허약해진 몸 이끌고 가다가 붕어함 15대: 광해군 이혼 향년 66세 재위 기간: 15년 사인: 노환 왕세자 시절엔 명군의 자질이 있었지만 막상 왕위에 오르고 보니 무리한 토목 공사로 민심을 잃고 적장자였던 이복 동생 죽이고 대비까지 감금 시키며 패륜을 함 이때 제주도로 유배 보내져 병자호란 터진 줄도 모르면서 살다가 사망 16대: 인조, 이종 향년 53세 재위 기간: 26년 사인: 화병, 노환 삼전도 굴욕으로 유명한데 실제로는 여러 미디어에 나오는 것처럼 삼배구고두래가 머리를 땅에 힘껏 빻는게 아니므로 피가 났다는 기록은 없음 이후 소현세자에게 열등감 느끼고 스트레스와 홧병에 시달리다 붕어함 17대: 효종 이호 향년 39세 재위 기간: 10년 사인: 어의의 실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두고 침을 놓자와 놓지 말자라는 의견이 대립하던 와중 어의인 신가귀가 침을 놓았는데 수전증 때문에 혈관을 잘못 찔러 과다 출혈로 붕어 18대: 현종 이현 향년 33세 재위 기간: 15년 사인: 등창 및 합병증 안질과 피부병이 고질병이었는데 재위 기간 내내 온천을 달고 살았다함 호전 되지도 않았고 폐혈증으로 붕어함 (숙종 추정 어진) 19대: 숙종 이순 향년 58세 재위 기간: 45년 사인: 심화증, 등창, 안질 등등 강한 왕권과 더불어 성격도 강해서 심화증 안증 포만증 노인병 등등에 걸리며 붕어함 20대: 경종 이문 향년 35세 재위 기간: 4년 사인: 급사 날 때부터 쇠약한 몸과 심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이후 영조가 올린 생감과 게장을 먹고 급사함 이때문에 영조는 선왕의 독살이라는 의혹에 시달리게 됨 21대: 영조 이금 향년: 81세 재위 기간: 51년 사인: 자연사 조선 왕조에서 가장 오래산 인물로 소식을 하고 잡곡밥을 즐겼으며 영약식을 했다고 함 1년에 먹은 인삼 수만해도 20개가 넘는다고 ㄷㄷ 22대: 정조 이산 향년 47세 재위 기간: 24년 사인: 등창, 홧병 실록에는 공식적으로 등창이라 적혀있지만 사망 사인이 독살이냐 등창이냐 왈가왈부가 굉장히 많음 (순조 익선관 추정 어진) 23대: 순조 이공 향년 44세 재위 기간: 34년 사인: 폐혈증, 변비 소화 기관이 불량이라 고생 꽤나 한 왕임 순조 34년에 두통과 변비가 찾아오자 그대로 붕어함 (헌종 추정 어진) 24대: 헌종 이환 향년 21세 재위 기간: 14년 사인: 폐결핵 역대 왕들 중에서 미남이라고 손꼽히는 왕으로 어려서부터 궁녀들과 합방으로 폐결핵을 얻었음 그렇게 붕어함 25대: 철종 이변 향년 32세 재위 기간: 14년 사인: 폐결핵 안동 김씨의 훼방질에 말려들어 술과 여자를 탐하다 폐결핵에 걸려 붕어함 26대: 고종 이희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이희 향년 67세 재위 기간: 43년 사인: 뇌일혈 고종의 붕어는 독살설이 가장 많이 제기됨 이완용의 명령으로 식혜를 전달했던 나인이 의문사 했고 그 식혜를 받아 마신 고종도 돌연 붕어하였음 당시 고종은 비밀리에 독립 운동을 위해 해외 망명을 준비 중이어서 독살설에 힘이 실림 아직까지도 정확한 경위는 불명임 27대: 순종 이척 2대 황제: 순종 이척 향년 52세 재위 기간: 3년 사인: 심장병 일제의 탄압 속에서 허수아비로 앉게된 군주인지라 무기력 속에서 살다 말년에 심장병을 얻고 붕어함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덕만, 천명, 선화 신라시대 세 여자 이야기
한반도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둘러싼 전쟁이 치열했던 시대. 어린 시절 즉위해서 오랫동안 신라를 다스렸던 진평왕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왕위를 이을 왕자, 즉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끝내 아들을 얻진 못했지만, 그에게는 역사에 기록된 세 딸이 있었다. 바로 덕만, 천명, 선화가 그들이다. 덕만(德曼) 진평왕의 큰 딸이자 신라의 27대왕인 선덕여왕. 그녀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여성이 단 한 번도 왕위에 오른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평왕의 큰 딸인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632년 1월, 선덕여왕은 국가 중대사를 정하는 화백회의를 통해 왕위에 오른다.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말은 성스러운 조상을 가진 황실여성이라는 뜻으로 성골, 즉 성스러운 조상을 가지고 있는 혈통으로서 황제가 될 수 있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선덕여왕의 어린 시절 뛰어난 예지력을 모란꽃 일화로 전한다. 진평왕이 당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덕만에게 보여주자 덕만은 벌과 나비가 함께 있지 않으니 모란꽃의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이 직접 확인해보자 덕만의 말과 같았다는 이야기는 총명했던 공주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 모란은 종류가 굉장히 많으며 그에 따라 향기의 강도도 제각기 다르다. 또 향기가 없는 꽃에 곤충이 들지 않는다는 추측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선덕여왕의 모란도 일화는 여왕에게 남편이 없음을 조롱하기 위해 향기없는 꽃그림을 보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허나 당시 당태종이 신라에 이를 선물한 것은 왕의 부귀를 축원하는 의미로 보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그림과 함께 씨앗을 함께 보낸 것은 조롱이나 비하의 의미가 아닌 중국에서 모란꽃을 선물하는 풍속에 따랐음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이는 최초 여왕이 남성들과는 다른 특별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든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4대 임금 탈해이사금과 13대 미추 이사금과 같이 신라에는 왕의 사위가 왕위를 잇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진평왕은 왜 사위가 아닌 딸에게 왕위를 잇게 했을까? 삼국유사 왕력편은 성골남진, 즉 성골에 더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라는 왕족과 육두품의 신분 구별에 따라 사회생활 전반이 규제되었다. 왕족은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성골과 그렇지 않은 진골로 나뉘는데 그 기준은 명확치 않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54년 동안 재위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고, 자신의 가족만을 성골로 한정지었다.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은 진평왕의 동생 백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신의 삼촌과 혼인한 것이다.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불륜이 아닌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관행이었다. (다른 기록에서는 음갈문왕을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라고 하기도 한답니다. 하여간 다들 친족 관계인건 변함없죠.) 성골은 출생과 더불어 고정되는 신분은 아니었다. 성골이었던 진지왕의 아들 용춘은 진지왕의 폐위로 진골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김춘추도 진골이 되었다. 여왕 즉위 당시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다는 건 자신만의 강력한 왕권을 만들었던 진평왕이 자신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명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평왕은 왜 이렇게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신라 왕실 사람들의 불교적 이름 신라 국토를 석가의 국토인 불국토로 여겼던 신라 왕실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석가모니만큼 강력한 왕이 태어나길 바랐던 것이다. 진평왕은 비록 아들은 얻지 못했지만 그의 혈육이 석가모니와 같은 신성한 왕이 될 거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덕만공주가 왕이 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덕만공주는 전쟁의 시대에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는 여왕으로서 다른 왕들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진평왕 재위 53년, 귀족인 이천 칠숙과 아천 석품이 왕실을 향해 반란을 시도한다. 왕권을 향한 귀족의 반란, 이는 진평왕이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진평왕은 여왕 즉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데 단호했다. 칠숙과 석품의 목을 베고 구족을 멸했다. 이후로도 여왕의 지세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백제 침공이 잦아지면서 수세에 몰린 여왕은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당태종은 신라의 사신에게 여인이 나라를 다스리기 어려우니 신하를 보내주겠다며 대놓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전쟁에 직접 나가지 못했던 선덕여왕은 내부 귀족들의 반발과 대외적인 약점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여왕은 수십여개의 사찰과 대규모 불사로 국력을 모았다. 그리고 신라 최대 규모인 황룡사 9층목탑을 조성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높이가 82m에 달해 서라벌 어디에서도 보였다는 황룡사 9층목탑은 국토 수호에 대한 여왕의 굳은 의지를 온 천하에 알렸을 것이다. 황룡사 9층목탑은 각 층마다 신라가 극복해야 할 적들을 의미한다. 삼국유사에는 겨울철에 나타난 개구리떼를 본 여왕이 백제군 매복을 직감해 알천 장군을 여근곡으로 보냈다는 작전이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의 명을 받은 알천은 이곳에 잠복해 있던 백제군 수백명을 무찌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행간에서도 역시 여왕의 약점을 읽을 수 있다. 경주의 아주 가까운 지역까지 백제군이 매복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국방력과 군사 체계가 허물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왕은 폭넓게 인재를 등용해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견제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전통 귀족 알천과 멸망한 가야계 귀족 유신을, 외교적인 면에서는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를 등용한다. 특히 귀족사회의 비주류였던 김춘추와 김유신이 전쟁에서 거둔 놀라운 성과는 여왕에게 큰 버팀목이 된다. 하지만 곧 위기가 찾아왔다. 642년 백제의 젊은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이 대야성에서 벌어진 전투는 선덕여왕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당시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끝까지 싸우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해버린 것이다. 대야성은 신라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요충지로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땅이었다. 귀족들은 대야성 싸움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한 죽죽에게 벼슬을 내려 그의 공적을 높이 샀지만 거꾸로 그것은 선덕여왕에 대한 비난이기도 했다. 김춘추를 비롯한 여왕의 지지 세력은 크게 힘을 잃어갔다. 대야성 패배 이후 수세에 몰린 여왕은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비담은 여왕의 반대 세력. 상대등 비담은 선덕여왕 16년, 반란을 일으킨다. 그 명분은 여주불능선리. 즉, 여성 군주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647년 정월, 비담의 난은 상당한 규모로 진행됐다. 그만큼 여왕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강경해졌던 것이다. 왕실을 방어하던 명활산성은 왕실 반대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월성 신라 왕궁에 별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비담은 힘을 얻어갔다. 하지만 이를 반전시킨 것은 김유신. 연에 불을 붙여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떠오르는 모습을 연출하여 민심을 수습했던 것이다. 비담의 난으로 벼랑 끝까지 몰렸던 선덕여왕. 우연이었을까? 여왕은 비담이 난을 일으킨 다음 날 승하한다. 중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던 선덕여왕은 반란의 와중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칠숙의 난을 겪고 즉위한 후,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누구보다 공을 들였던 선덕여왕에게 최고 지위인 상대등의 반란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수많은 전쟁과 정치적 갈등, 자식을 낳지 못하는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군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내야 했던 여왕은 많은 사찰을 지으며 불교의 힘을 빌어 민심을 수습코자 했다. 포항의 천곡사. 이곳의 비석에는 선덕여왕이 천곡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평소 피부병이 심했던 선덕여왕이 천곡연의 물로 목욕을 하자 어떠한 방법으로도 낫지 않았던 병세가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덕여왕 때에 만들어진 첨성대. 첨성대를 이루고 있는 27단의 층은 달의 공전주기기와 같으면서 동시에 제27대 선덕왕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이는 수학적으로도 여왕의 천문대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늘에서 바라본 첨성대는 마치 우물과 같은 모양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나 그의 비인 알영은 각각 나정과 알영정에서 탄생했다. 신라의 우물이라는 것은 거룩한 인물이 탄생하는 곳이며, 다른 세계와 신라를 연결해 주는 통로의 구실을 한 것이다. 신라 왕궁인 월성을 바라보며 우물과 같은 모양을 가진 첨성대. 천상의 세계인 도리천에서 강력한 왕으로 환생하고 싶은 선덕여왕의 바람이 가득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 천명(天明) 삼국사기에는 태종무열왕에 대해 이름은 춘추요,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명공주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선덕여왕이 머리가 좋고 지도력있는 미인이었다고 하니 천명공주도 그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명공주는 진평왕의 삼촌으로 즉위한 지 4년만에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결혼한다. 왜 천명공주는 폐위된 왕의 아들과 결혼했을까? 아들이 없던 진평왕은 폐위된 전왕의 아들을 사위삼아 왕권을 물려주려 했을 지도 모른다. 사료가치에 있어 논란이 있지만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에 대한 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천명의 남편인 용춘 또는 용수가 화랑세기에서는 형제로 등장한다.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용수는 진평왕에 의해 거두어져 월성궁에서 공주들과 함께 자랐다. 천명공주는 동생 용춘을 흠모하게 되고,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자신은 용숙(龍叔-용 삼촌)이 좋다고 마음을 알리게 된다. 그런데 마야부인은 용춘을 의미했던 용숙을 용수로 오해하여 천명공주를 용춘의 형 용수와 결혼시킨다. 당시에도 장자를 선호하는 것이 왕실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순종적인 천명공주는 용수와 결혼하지만 용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어머니 마야부인의 적극적인 중재에 의해 용춘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어찌됐든 진평왕이 과거의 선례처럼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천명공주는 왕비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평왕은 사위보다는 자신의 딸에게 왕권을 이어줄 결심을 한다. 진평왕은 선덕을 왕위계승자로 선정하고 용수와 천명공주를 출궁시킨다. 천명공주는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남편을 왕위에 올릴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순순히 왕궁을 떠난다. 천명공주는 604년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춘추라고 짓는다. 신라왕실이 철저히 불교식으로 이름을 지어주던 것과는 달리, 공자의 저서 춘추(春秋)와 같은 유교식 이름이었다. 이 아이는 커서 선덕여왕을 보필하고 이후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에 즉위하게 된다. 춘추는 즉위 후 어머니인 천명공주에게 문정태후라는 시호를 올린다. 왕권 안정을 위해 폐위된 왕의 아들과 결혼한 천명공주는 죽어서 태후의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선화(善花) 백제 청년 서동과 신라 공주 선화의 만남 이야기는 천년을 넘어 현대인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백제의 무왕과 결혼해 왕비가 된다는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삼국유사 무왕편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서동요를 퍼뜨린 서동은 쫓겨난 선화공주를 만나 결혼한 후 훗날 백제 무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무왕은 연못에서 미륵삼존의 출현을 본 선화공주의 발언으로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를 창건한다. 서동이 말을 키우며 살았다고 전해지는 마룡지. 어린 시절 백제의 수도 부여가 아니라 이곳 익산 지역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통해 무왕은 왕실의 적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자인 서동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신라 선화공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을 것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지는 백제 무왕이 건설한 왕궁의 터로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고자 했던 무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곳이다.  신라를 떠나 백제의 왕비가 되었던 선화공주 역시 이곳을 기반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 이면에는 가혹한 역사적 현실이 이어진다. 서동은 무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신라를 거세게 공격한다. 고구려의 견제에 무왕의 공격이 더해져 신라는 사면초가의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된다. 무왕에겐 분열되어 있는 귀족사회를 통합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강력한 축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기 위해선 공공의 적이 필요했고, 신라만큼 적합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처가인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지배 세력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남편인 무왕과 아버지인 진평왕이 서로에게 창을 겨누는 상황에 처한 선화공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이 결혼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의 압박으로 수세에 몰리자 백제와 신라는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다. 이후 양국은 적대국이지만 전쟁 상황에 따라 종종 왕실간의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화공주와 무왕의 결혼도 국가간의 이익을 고려한 정략결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선화공주의 발언으로 창건된 미륵사지의 세 개의 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탑은 일제강점기 보수를 거치면서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석탑을 해체 복원하던 중 놀라운 비밀이 세상에 드러났다. 금으로 만든 사리호와 더불어 사리호를 모신 내력이 쓰인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됐다. 이 사리봉안기는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의 귀족 사택적덕녀라고 적고 있다. 기록에 확인되는 무왕의 왕비는 3~4명 정도로 거론된다. 선화공주의 존재 여부는 현재 학계에서도 큰 쟁점이 되고 있다. 서동요 속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그 실존여부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익산의 무왕릉 인근에 자그마한 능이 자리잡고 있다. 익산 주민들은 이 능을 선화공주의 능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넘는 사랑 이야기는 삼국전쟁 시기 평화를 갈구했던 백성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지도 모른다.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자매로 자랐지만 최초의 여왕으로, 통일제국을 이룬 왕의 어머니로, 또 적국의 왕비로 서로 각기 다른 운명을 걸었던 세 여인의 삶. 이들의 이야기는 고대 사회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보다 정치적 결정을 따라야만 했던 왕실 여인의 숙명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 덕만의 남편 음갈문왕이 누구인가,용수와 용춘은 동일인물인가 각기 다른 형제인가에 대해선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 역사스페셜에서는 음갈문왕을 삼촌 백반으로 보고 있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용춘으로 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음을 덧붙입니다.
고려청자 '매병'의 반전쩌는 사용 용도.jpg
일단 아래 사진을 보자 이건 "梅甁"이야 '매병'이라고 읽어 매병은 정의상 "아가리(도자기는 입구를 이렇게 표현함 ; 혹은 '구연부(口緣部)')가 좁고 어깨(구연부에서 몸통으로 내려가는 부분)가 넓고 풍만하며, 동체(몸통)가 저부(바닥부분)로 갈 수록 홀쭉해지는 형태" 를 말해 (아휴 길기도 해라) 우리가 아주 잘 아는 학 무늬의 청자야 이건 알다시피 국보🤩야 (정확히는 국보 제86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개인적으로 '매병'은 영화로 치자면 떡밥회수가 매우 잘 된 스릴러라고 생각하는데 입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은 완만한데에 비해 어깨에서 바닥으로 흘러가는 선은 매우 과감해서 활자로만 보면 균형감이 없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실제 도자기는 그 균형이 정말 잘 잡혀있잖아? 👍 완전 굳이지 굳 (마쟈 내 취향이야 그니까 굳임😋) ㅋㅋㅋ 문제는 "이게 실제로는 어떻게 쓰였을까🤔?" 야 우리가 문화재를 잘 이해하는 혹은 잘 감상하는? 그런 방향 중에 하나는 '이 유물이 그때는 어떻게 쓰였을까?'를 상상해보는거야 우리가 지금 '문화재'로 감상하는 대부분의 유물이 최초로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실용품'이었다는 것을 알면 꽤 재밌어 그래서 '매병'도 "실제로는 어떤 쓰임이었을까🧐?" 라고 상상해보는거야 우리가 이런 도자기를 '매병'이라고 부르지만 이 "매병"이라는 이름은 사실 18세기 중국 문헌에서나 확인할 수 있어 그런데 우리가 아는 '고려'청자의 고려는 918년. 그러니까 10세기에 건국되었는데!? 18세기면 1700년대 조선이잖아😮?! (임진-병자전쟁도 끝난 뒤임) 😊 그래서 우리가 "고려청자 운학문매병"이라고 부르는 도자기가 사실은 "매병"이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사실 이런 도자기는 중국 '당唐' 때부터 등장하는 형태야 (이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더 덧붙일 수 있겠는데 일단 스킵하쟝) 어쨌든 매병의 '梅'는 '매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화병花甁(꽃병) 아니었을까? 괜히 그런 이름을 후대에 덧붙였겠어?" 라는 의견이 있었고 "술병일 수도 있지! 대부분의 그릇들이 술그릇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잖아?" 라는 의견도 있었고 "뭔 소리야. 야, 딱 봐라. 저걸 누가 썼겠냐? 딱 봐도 사치품인데, 귀족들의 관상용일 수도 있지!" 라는 의견도 있었어 사실 각 의견마다 충분히 납득될 만한 증거들이 있었어 매병 형태의 도자기가 등장하는 그림이나 비슷한 형태의 쓰임새, 그에 대한 기록 등등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 (사실 술병일 것이라는 의견이 좀더 컸음) 일대의 사건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는데... 태안 앞바다에서'옛날 배'가 발견된 거임😮 이 배는고려시대의 무역선혹은조운선(세금운송선)으로 생각되는데 우리가 주의깊게 봐야할 보물선은  2010년에 수중발굴된 "태안 마도 2호선"임 이 보물선에서 다름아닌 '매병'이 발견되는데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부속품'이 함께 발견됨 그게 바로 "목간木簡"임 이 '목간'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상품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음 이 상품이 무엇이다~ 라고 설명해주는 거임 (발견 당시에는 '목간'이라고 기사가 많이 났으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죽찰竹札'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이하 '죽찰') 그러니 이 말이 무슨 말? 이 도자기가 무슨 도자기인지 알 수 있다는 말!!!!!!!!! 태안마도 2호선에서 이런 죽찰이 발견된 매병은 두 개인데 놀랍게도 이 두 개에는 매병의 정체가 적혀있음 딱 봐도 위의 도자기와 함께 있는 죽찰과 밑의 죽찰에 써있는 글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텐데 앞 뒤로 다른 글자가 써있어서 그럼 하나는 重房都將校吳文富 宅上眞盛樽封 앞면 : 중방도장교오문부 뒷면 : 택상진성준봉 요렇게 쓰여있고 다른 하나는 重房都將校吳文富 宅上精蜜盛樽封 앞면 : 중방도장교오문부 뒷면 : 택상정밀성준봉 이렇게 쓰여있음 두 죽찰에서 "重房都將校吳文富(중방도장교오문부)"라는 글자가 겹치는데 '어라?'하는 부분이 있을 거임 "중방重房" ㅇㅇ 맞음 그 '중방'의 중방임 고려시대 무신들의 합좌기구이자 무신정변 이후에는 고려 최고의결기구가 된 그 중방을 말하는 거임 그 뒤의 "도장교都將校"는 당시 정8품의 무관직을 말하는 거임 그 다음의 "오문부吳文富"는 그냥... 그냥 사람 이름임😊! (오늘날로 치면 옥뮤다 같은 곳으로 택배가 빠져서 영영~ 못 받게 되신 분임) 그러니까 두 죽찰의 앞면에 써진 글자는 '회사-직책-이름' 순으로 일종의 수취인을 쓴 거임 "중방에서 근무하시는 오문부 도장교 귀하께" 정도 되는거임 그럼 뒤에 써진 "宅上眞盛樽封" "宅上精蜜盛樽封" 은 무엇일까 "택상宅上" = 받들어 올리다 "진眞" / "정밀精蜜" = 참기름 / 꿀 "성준봉盛樽封" = 준(樽)에 담아(성盛) 봉(封)하여 참...기름??? 꿀이요????????? 녜... 참기름 & 꿀단지였던 거임ㅇㅇ 세상에서_가장_비싼_포장용기.jpg 앙대ㅠㅠㅠ 이렇게 이쁜 내 고려청자가 고작 포장용기일리가 없어!!! 실제로 죽찰의 발견 당시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해보지 못한 쓰임새라서 학계에 일대의 파란...까지는 아니고 놀라움?을 선사해주었고 지금도 대학교 한국미술사 or 한국도자사 수업을 들으러 가면 교수님과 강사님들이 아주 재미있게 말해주는 일화 중에 하나😉 ^^ 어케 끝내 이거... 처음 썼을 때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망설였엉 +덧 죽찰의 발견으로 우리가 '매병'이라고 부르는 것이 고려 당시에는 "준(樽)"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덧2 "도장교都將校"는 정8품의 '하급'무관직임 하급무관이 저런 도자기를 선물(혹은 뇌물?) 받았을만큼 당시 무신들의 위세(혹은 오문부吳文富 아저씨의 위세?)가 컸음을 알 수 있음 +덧3 설마 포장용기로만 썼겠..썼을까? 다 쓰고 꽃병으로든 술병으로든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쨌든 '참기름&꿀단지'로 쓰인 실사용례를 아주 정확하게 알게 된 사례😊... 자, 마지막으로 죽찰과 발견된 매병을 보자! 둘다 보물로 지정되었음 참기름단지 국보 제1783호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꿀단지 국보 제1784호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ㅎㅎㅎ 안녕!
한국역사의 특수성
추가 :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중에 일부라네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 여기서부턴 수학에 관한 내용인데, 관심있는분만 읽어보셔요 ------------------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100001956502129/posts/pfbid0piDSfXGUx1vRRpXndpJL3yfvGz6PANJw9jT25QZeyHuW2iF8zp3y3e39bwtjgEWSl/?mibextid=cr9u03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 10
10위 데카음원사는 비틀즈와 계약하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앨범이 잘 안 팔릴것 같아서 9위 나사는 화성궤도 탐사선을 잃어 버렸는데 팀의 반(외국인)은 미터단위를 사용하고 다른 반(미국인)은 인치를 사용해서. 8위 조지벨 exite ceo 는 1999년에 구글이 750,000$ 우리돈으로 약 7억5천만원 제의 했을 때 인수 하지 않았다. (현재 구글 약 190조 8142억원) 7위 나폴레옹은 겨울에 러시아를 침공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6위 히틀러는 자기가 나폴레옹처럼 할 수있다고 생각했다. (겨울에 러시아 침공) 5위 독일은 영국보다 100년전에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했는데 쓸모없는 사막이라고 생각해서 무시했다. 4위 소련이 미국에게 알레스카를 1 에이커당 (1224평) 23원에 판 것, 총 720 만 달러 (한화 약 72억원) 3위 12개 출판사가 해리포터 출판 거부 2위 일본의 진주만 공습 1위 2300년 전 그리스, 이집트관련 역사상 최대규모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누가 태웠는지 모르지만 보존했다면 지금 문명의 지식수준이 더 높았을것으로 추정, 또한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의 관한 문제도 풀수있었을거라 생각됨. 약 70만개 문서 , 10만게 넘는 책 그 증거로 아리스타르코스- 기원전3세기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는것을 발견함 에라토스테네스 - 기원전2세기 지구가 둥글다는걸 콜로버스보다 1700년 빠르게 알아냄 히파르쿠스 - 기원전1세기 신성과 혜성을 관측하였고, 1,080개의 항성에 대하여 그 밝기를 6등급으로 분류하여 항성목록 작성을 시도하였고 그리고 성표(성도)를 만들어 1080개의 별의 위치와 밝기를 표현했다. 또한 세차운동의 발견하여 태양년과 항성년을 더욱 정확하게 구할 수 있게 하였다. 칼리마코스- 기원전 2세기 고대 그리스의 학자이자 시인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정주하면서 도서관의 사서로 활약하였다. 그리스의 문학사 라고도 할 수 있는 《피나케스》를 저술하였고 《아이티아》를 비롯한 많은 시작품을 남겼다. 유클리드 - 기원전 3세기 기하학자 그의 연구자료가 지금도 전세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음. 히로피러스 - 기원전 3세기 뇌가 장이나 신체를 조종하다는것을 밝혀내고 약을 만들기 시작함. 그 밖에 학문에 관한 자료가 엄청남 출처 인류는 정말 단 한순간의 선택으로 많은 것이 달라지는군요...
끝이 보이는 관계에 마음을 쏟는 이유
유월에 좋아하는 친구 두 명이 회사를 떠났다. 2년간 함께 일했던 ㅎ은 오랜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했고, 6개월간 내 앞자리에서 반짝이던 ㅇ는 계약이 만료되어 학교로 돌아갔다. 예정된 이별이었지만, 나는 사람에 큰 의미를 두는 인간이므로 당분간 빈자리를 볼 때마다 적적해할 계획이다. 때마침 장마도 시작됐으니 바야흐로 센티멘털해지기 좋은 계절이다. 상황과 계절 핑계를 앞세웠지만, 실은 매 순간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일정량 이상 껴안고 지낸다. 본격적으로 관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때는 아마도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넘어가던 겨울이 아니었나 싶다. 수능 끝난 수험생이었던 우리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있는 동산을 산책 삼아 오르내리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주로 미지의 영역인 대학 생활에 대한 상상이었다. “대학 가면 진짜 친구 사귀기가 어렵대. 거의 다 겉 친구래.” “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가 오래간다더라” 같은 소리를 하며 이상한 의리를 쌓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막상 고등학교를 벗어나 만난 관계에서 생긴 말썽은 예상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운 좋게도 내가 속한 집단마다 성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친구가 되는 자유로운 문화가 있었다. 덕분에 나는 놀랄 만큼 쉽고 깊게 새 친구들을 좋아하게 됐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관계의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거. 급하게 가까워진 친구는 여름날의 반찬처럼 쉽게 상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은 이십 대 초반에는 일상의 중심이 자주 바뀌는 법이니까. 일정표를 채운 단어가 ‘동아리’에서 ‘아르바이트’로 바뀌었다는 이유로, 서로를 소울 메이트라고 불렀던 친구와 별일 없이 멀어졌을 때. 봉사 활동을 하며 한 달 동안 동고동락했던 이들이 하나둘 인사도 없이 메신저 단체방을 나갔을 때. 나는 놀이터에 홀로 남은 아이처럼 처량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그때 손에 꼭 쥐고 있었던 주인 없는 마음은 미처 식지 못해 아직 따뜻한 상태였는데…. 비슷한 일을 몇 번 겪고는 매사에 계산적으로 굴고 싶어졌다. 스쳐 지나가는 관계에 연연하는 촌스러운 애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상처받지 않을 것인가’하고 머리를 굴리는 일이 늘었다. 언젠가는 모두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채로 지내기도 했다. 누군가 좋아진다 싶으면 혼자 지레 겁을 먹고 뾰족한 말로 선을 그었다. 그렇게 애를 써도 역시나 마음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좋아하는 사람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일은 어려운 수학 문제 푸는 것처럼 매번 어려웠다. 어쩌다 한 번 정답을 맞춘 뒤에도 비슷한 유형의 다른 문제에서는 또 헤매야 했다. 그 방황을 끝내준 사람은 뜻밖에도 스물셋 겨울 함께 토익 공부를 하던 언니 오빠들이었다. 보통 토익 스터디에서 만난 이들과는 지극히 사무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마련인데, 그때 만난 사람들과는 예외적으로 합이 좋았다. 수업 전후 짧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다정한 기운이 깃들어서, 머리로는 ‘어차피 곧 다시 못 볼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그들을 좋아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던 날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회식은 육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날 나는 언제라도 다시 만날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어쩐지 야속해서 내내 꽁해 있었다. 그리고 비뚤어진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어차피 오늘 지나면 만나지도 않을 거잖아요.” 흥이 깨질 것을 각오하고 뱉은 말이었으나, 과연 좋은 사람이었던 언니 오빠들은 어른스럽게 나를 달랬다. “꼭 자주 봐야만 인연인가? 길 가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연이지!”그건 찰나의 대화였지만 이제껏 관계가 변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상처받았던 느린 마음을 위로하기에 충분한 온기였다. 아, 현재진행형이 아니라고 해서 좋아했던 마음까지 깎아내릴 필요는 없는 것이구나. 그동안 오늘 손에 쥔 관계까지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가난했던 거구나. 예상했던 대로 우리의 관계는 그날로 끝났다. 대신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의 술자리는 기억 속에 잠겨 있다가, 내가 관계에 회의감을 느낄 때면 슬그머니 떠오른다. 그리고 다정했던 언니 오빠들처럼 내가 너무 인색해지지 않게 다독여준다. ‘지속되지 않아도 설령 끝이 나쁘더라도 한때 좋았던 관계를 깎아내리진 말자.’ 다시 유월에 했던 두 사람과의 이별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분명 매일 사무실에서 얼굴을 부딪칠 때보다는 멀어질 것이다. 곧 무언가 일상의 가운데를 차지할 테고 지나간 이는 자리를 내주어야겠지. 그래도 우리가 주고받은 다정한 쪽지나 사진 같은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괜찮다. 마음을 쏟길 잘했다. 마음을 홀가분하게 해주는 주문 현재진행형이 아니라고 해서 좋아했던 마음까지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출처
글 하나로 초한지 속성 마스터하기 (feat. 패왕별희).jpg
때는 기원전 2세기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라고 해서 한반도의 삼국시대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음. 이 중국을 통일하고 최초로 황제가 된 사람이 등장하니 그 유명한 진시황 되겠음. 불로초 찾고 병마용갱 지은 그 할배 맞음ㅇㅇ그러나 진시황의 폭정으로 인해 진나라는 통일과 동시에 망테크를 타고 있었음. 이때 등장하는 초한지의 주인공 1이 항우임. 사실 항우는 중국의 전통적인 영웅관에 완전히 어긋나는 인물임. 중국은 한반도보다 땅이 훨씬 넓고 다민족 국가잖아? 그래서 중국의 이상적인 군주라 하면 (본인의 지력이나 무력이 좀 딸리더라도) 능력 있는 신하를 알아보고 적절하게 등용할 줄 알며 포용력과 너그러움을 갖춘 군주임. 한국인에게 조금 더 익숙한 삼국지를 예로 들자면, 유비는 지 능력 조또 없음. 싸움은 관우랑 장비가 다 하고 지혜는 제갈량이 냄. 하지만 유비는 그들을 이끄는 인덕이 있는 사람임ㅇㅇ 항우를 냉정하게 평가하면 지휘관으로서는 정말 말하는 게 입 아픈 명장이지만 그거 빼면 무력과 카리스마에 스탯 몰빵한 망캐임. 대가리 멍청하고, 군주로서의 자질은 바닥이고, 성격 더럽고, 백성을 사랑하는 너그러움 따위 눈을 씻고 봐도 없음. 하지만 항우는 중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영웅 중 하나임.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함께 알아보겠음. 항우는 초나라 명장 집안의 후손이었음. 초록색이 초나라인데, 중국이 여러 제후국으로 갈라져있던 춘추전국시대 때 진나라와 더불어 가장 강력하던 국가임. 항우는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루무렵 태어났지만 삼촌 항량이 지역의 유지였기 때문에 모자람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냄. 간단히 말해서 귀족 도련님이었음ㅇㅇ 항량은 조카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치지만 항우 존나 건성건성함. 빡친 항량이 항우를 꾸짖자 항우의 대답이 "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할 뿐입니다. 검술 역시 한 사람과 싸워 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둘 다 배우기는 충분치 못하니, 만인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겠습니다." 였음. 만인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은 병법을 뜻함. 군대를 이끌고 배치하고 전투하는 전술 ㅇㅇ 당시 진시황은 툭하면 전국을 순례했는데, 그 웅장한 행차를 지켜보던 항우는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해야지!!" 라고 포부를 드러냄. 항우는 키가 180이 넘었음. 지금도 큰 키인데 기원전인 저 때는 그냥 존나 거인임. 거기에 힘도 쎄서, 삼촌 항량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도 내심 조카의 미래를 기대하게 됨. 이렇게 항우가 성장하던 중 진시황이 불로초 찾기에 실패하고 뒤짐ㅋㅋ.. 진시황이 죽고 아들 호해가 즉위하는데, 호해의 곁에는 조고라는 환관이 있었음. 조고는 간신배의 조상 같은 사람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긴 했지만 아직 국가로서 완벽하게 자리 잡지는 못했음. 이전까지 각자 다른 나라였잖아?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서로 다른 나라였고, 반란이 끊이질 않음. 예를 들어 삼국시대가 끝나고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했을 때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부흥 운동을 한 것처럼ㅇㅇ 진시황부터 만리장성 건설, 불로초 찾기 등 온갖 대건축과 사치를 부리느라 가혹한 세금을 매기고 엄벌주의를 앞세운 정치를 해서 불만이 많은 상태였음. 근데 호해가 즉위하고 지 애비보다 더한 사치와 방탕 행보를 보이니 사람들이 가만 있겠음? 전국시대 6국을 재건하려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남. 항량은 조국 초나라 왕의 후손인 웅심 이라는 양치기를 찾아 왕으로 옹립하고 전쟁에 뛰어듬. 항우는 당연히 삼촌의 진영에서 종군함. 이 때 초한지의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니..... 유방임. 유방은 항우보다 15살 많은데, 원래 패현이라는 마을의 동네 건달 백수였음. 소하, 번쾌 등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움박질하고 똥 폼 잡는 삼류 양아치 같은 인간이었지만 주인공의 자질인 패기 하나는 제대로 있어서, 시황제의 행차를 보고 "오호! 대장부라면 모름지기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고 함. 항우가 비슷한 멘트를 쳤을 때 삼촌 항량이 기겁한 걸 생각하면 저런 무모한 패기가 초한지 주인공의 필수조건인가 싶음. 여튼 이렇게 백수짓하며 사고 치고 말단 벼슬이나 하던 유방은 어느 날 여공이라는 사람의 집들이에 가게 됨. 여공은 다른 지방 사람인데 패현으로 이사온 거였음. 여공이 패현의 현령과 아는 사람이다 보니 다들 잘 보이려고 하례금을 바치고 있었음. 거기 등장한 유방은 대뜸 하례금 일만전 < 이라고 적은 어음을 내밈. 물론 땡전 한 푼 없는 채로(....) 패현의 서기 겸 유방의 친구였던 소하는 여기가 무슨 외상 술집인 줄 아냐고 기 막혀 하지만 관상 보길 좋아하던 여공은 유방의 관상과 기세에서 비범한 기운을 느끼곤 귀히 대접함. 여공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유방을 따로 불러 자기 둘째 딸 여치를 소개시키며 결혼을 주선함. 여공의 부인은 "동네 건달 따위를 사위 삼다니 님 미침???" 했지만 여공이 강력하게 혼사를 밀어붙여서 유방과 여치는 결국 결혼하게 됨. 진짜 관상에 뭐가 있었나 봄. 한편 이 시기 진나라는 진시황릉을 만드느라 온갖 사람을 동원해 일을 시키고 있었음. 말단 벼슬을 하던 유방은 패현의 죄수들을 공사 현장으로 데리고 가는 업무를 맡게 되는데, 공사 현장이 원체 시궁창이다 보니 죄수들이 하나둘 도망침. 그걸 지켜보던 유방은 대뜸 행렬을 멈추더니 "가고 싶은대로 가라. 나도 튈 거임ㅋㅋ" 이러고 속 편하게 술을 진탕 마심(....) 죄수들은 대부분 도망쳤지만 그 중 몇은 유방을 따르고 싶어했고, 유방은 그들과 함께 도피생활을 하다 진시황이 죽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날 무렵 친구 번쾌의 연락을 받고 패현으로 돌아와 마찬가지로 거병함. 하지만 패현의 젊은이들이라고 해봤자 고작 몇 천임. 유방은 몇 번의 전투를 겪고 항우가 모시는 초 회왕의 아래로 들어가게 됨. 물론 진나라가 괜히 통일 국가가 아니라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 진나라 최후의 명장인 장한은 부활한 위나라를 멸망 시킨 후 초나라 군대를 역습하고, 항량은 전사함. 항우와 유방이 이끄는 초나라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후퇴함. 한편 초 회왕은 먼저 관중에 입성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공표한 상태였음. 지도에 표시된 땅이 진나라의 중심인 관중인데, 생산력이 좋아 당나라 시대까지 대부분 국가의 수도였던 중요한 땅임. 관중의 제후가 되는 건 당연히 누구나 혹할 제안이었음. 아버지 같은 삼촌을 진나라 군대에 잃은 항우는 당연히 서쪽의 진나라 땅으로 가고 싶었음. 하지만 항우는 얼마 전 양성이란 곳을 공격할 때 결사항전하는 주민들 때문에 자기 예상보다 힘든 싸움을 하자 분노해 함락한 양성 주민 5천명을 전부 죽여버린 전적이 있었음. 다시 말하지만 이건 기원전 시대임. 지금처럼 인구가 많지 않기에 백성 하나하나가 곧 국력일 때임. 항우가 얼마나 잔인하며 군주로서 자질이 없는지 보여주는 예시임. 더군다나 관중 땅은 가장 중요한 요충지임. 회왕의 측근들은 항우를 보내면 저 잔혹한 성격 때문에 민심이 돌아설 거라며 항우보다 군사적 역량은 좀 떨어지더라도 유방을 보내는 게 낫다고 조언함. 한편 항량을 죽인 장한은 북으로 진군해 부활한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었음. 이대로 진나라 군대가 제후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면 초나라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움. 회왕은 결국 유방을 서쪽, 관중으로 보내고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도와주게 하면서 항우를 송의의 차장으로 임명함. 서쪽에 못 가는 것도 짜증 나는데 별 공적도 없는 송의 휘하에서 진군하라니 항우는 빡쳐 돌아가실 지경이었음. 항우는 간신히 화를 참고 송의와 함께 조나라로 가지만 송의는 장한을 공격할 생각은 않고 마냥 시간만 보냄. 폭발한 항우는 송의를 죽여버린 후 회왕에게 "송의가 초나라를 배신하려고 해서 처단했음ㅇㅇ" 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함. 초나라를 재건 시킨 주축이 항우의 삼촌인 항량인데다 앞서 말했듯 무관으로서의 자질은 정말 킹왕짱인 항우였기에 회왕은 하는 수 없이 항우의 쿠데타를 승인하고 항우에게 상장군 직을 넘겨줌. 항우는 곧장 출정해 진나라 군대를 박살 내고, 장한에게서 항복을 받은 후 말을 돌려 진나라 수도로 감. 근데 여기서 역대급 병크를 또 터뜨려버림(....) 신안대학살임. 항우가 장한의 항복을 받고 서쪽으로 진격하던 시기, 자영이라는 진나라 황족이 조고를 처단하고 진나라의 왕이 됨. 하지만 진나라의 국운은 이미 다 한 상태였음. 자영은 스스로 성문을 열고 유방에게 항복의 의사를 표함. 몇몇 장수들은 자영을 죽이자고 했지만 유방은 "회왕이 나를 관중으로 보낸 건 내가 관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항복을 한 사람을 죽이는 건 옳지 않다." 며 자영을 살려주고 법삼장을 약속함. 살인을 한 자는 죽이고, 남을 다치게 한 자는 중죄로 처벌하고, 물건을 훔친 자는 감옥에 가둔다. 이 세가지 법 외에 나머지 법은 전부 없앤다는 뜻이었음. 진나라의 가혹한 엄벌주의 정치와 세금에 고통 받던 백성들은 유방을 환영하며 유방이 황제가 되기만을 바라게 됨. 문제는 유방이 진나라의 멸망 소식을 항우에게 안 전했다는 거였음(.....)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 인해 항우 진영 분위기는 개판이었음. 그도 그럴 게 초나라 군사들은 진시황릉 공사에 끌려가 개고생을 했거나, 가족이 만리장성 건설 현장에서 죽었다는 식으로 진나라에 원한을 가져 초나라 부흥군에 합류한 경우가 많았음. 아무리 장한이 항복했다지만 초나라 군사들 눈에 진나라 군사들이 곱게 보일 리 없음. 반대로 진나라 군사들도 불안했음. 초나라 군사는 자기들을 노예 취급하며 괴롭혀대니 "이러다 우리 죽는 거 아님....?" 걱정이 저절로 나옴. 양쪽이 다 이러니 자연히 진영 분위기는 개판이 됨. 하루라도 빨리 관중으로 가야했던 항우는 포로들의 존재가 점점 거슬렸음. 군대 분위기는 엉망이지, 행군 속도는 느려지지, 군량도 부족하지. 군량 문제가 제일 컸음. 송의가 조나라 땅에서 지체한 탓에 안 그래도 군량이 부족한데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송의&유방을 기용한 회왕이 항우의 군대를 제대로 지원해 줄 리 넚었음. 참다 지친 항우는 야심한 밤 포로들을 전부 죽여버림. 무려 20만명을 ㅇㅇ...이게 신안성에서 일었나기 때문에 신안대학살이라고 부름. 항우의 선택은 인간된 도리를 떠나 군주로서 정말 멍청한 짓이었음. 유방은 관중 땅에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잖아? 애초에 진나라 군사들도 진시황의 건축 사랑 때문에 많이 고생한 사람들임. 좋게 말로 설득해서 자기 사람으로 회유하거나, 정 감당이 안 되면 그냥 풀어주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되는 거였음. 이렇듯 항우는 업보를 적립하며 관중으로 진격하는데..... 엥....이미 유방이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상태였음. 이러다간 중원의 알짜배기 땅인 관중이 유방의 소유가 되게 생김. 게다가 유방은 관중 땅이 욕심 나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함곡관을 독단적으로 막아버리는 실책을 저지른 후였음. 또 빡친(....) 항우는 함곡관을 단숨에 박살 내버리곤 유방을 죽일 결심으로 홍문이라는 곳에 진영을 침. 항우의 또다른 삼촌인 항백은 유방의 책사인 장량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항우의 성격에 다 죽일 게 뻔해 보이자 몰래 장량을 찾아가 항우의 계획을 전해주며 너라도 도망치라고 충고함. 유방이 관중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다곤 하지만 항우랑 비빌 처지는 아니었음. 더군다나 전쟁으로는 더더욱. 어이가 털린 장량은 유방에게 항우가 빡쳤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너 제정신임??? 함곡관을 왜 쳐막고 지랄임 미친새끼야!!!!" 라고 지랄하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유방은 장량에게 빌디시피 조언을 청함. 장량은 일단 항백을 소개 시켜주고, 유방은 자존심 다 버리고 항백에게 술과 식사를 대접하며 싹싹 빔. 요지인 즉 "저는 항우 장군 오시기만 기다릴 뿐 사사로운 욕심은 조금도 없습니다ㅠㅠㅠ 함곡관을 막은 건 도적들을 막기 위해서일 뿐입니다ㅠㅠㅠㅠ하...저는 항상 항우 장군을 위해 충성했는데 이렇게 죽는 군요.....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항우 장군과 이렇게 틀어지는 건 너무 안타깝고 슬픕니다....하이고......." 라며 개쩌는 감성팔이를(.....) 시전함. 사실 함곡관은 입구가 좁아 적은 병력만 배치해도 도적떼를 막을 수 있음. 유방의 변명은 당연히 개소리임. 저딴 개소리로 항우&항백을 속여먹을 생각을 한 유방이 대단한 건지 저딴 개소리에 속은 항우&항백이 대단한 건지(........) 물론 항우에게도 책사는 있었음. 범증이라는 사람인데 얘가 그나마 항우 진영의 머리 역할을 함. 범증은 당연히 안 속았고, 유방을 살려두면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될 테니 죽이자고 설득함. 어쨌든 유방은 꼬리를 내렸고, 다음날 장량과 번쾌 등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홍문의 항우 진영으로 감. 홍문에서 열린 연회라고 해서 홍문연이라고 부르는데 초한지의 명장면으로 손 꼽히는 장명임. 유방은 당연히 항우 앞에서도 온갖 아부를 했음. 범증이 유방을 죽이자고 신호를 보냈지만 항우는 껄껄 웃으며 술을 마실 뿐 무시했고, 보다 못한 범증은 항우의 친척 동생을 불러내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재촉함. 친척 동생이 "술자리에 즐길 만한 게 별로 없으니 제가 검무를 춰서 흥을 돋워보겠음ㅇㅇ" 하고 칼을 빼들지만 눈치를 챈 항백이 함께 추자며 칼을 막은 덕에 유방은 죽지 않음. 이쯤 되면 항백이 존나 스파이임ㅋㅋㅋㅋㅋ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단 걸 눈치 챈 장량은 슬쩍 빠져나가 번쾌를 부름. 번쾌는 패현에서부터 유방과 알고 지낸 동생 겸 부하 장수인데, 여공의 막내딸과 결혼해 유방과 인척 관계기도 했음. 모시는 유방의 목숨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번쾌는 연회장에 난입해 "남의 장수들은 밥을 안 주니 배고프고 추워 들어왔슴다!!!" 라며(....) 이상한 패기를 시전함. 근데 그게 항우의 마음에 들었음(......) 역시 이 새끼는 그냥 전장에서 평생 굴렀어야 함. 항우는 번쾌의 호탕한 모습이 재밌었는지 술과 고기를 내렸고, 장량은 이 틈을 타 유방을 피신 시킨 후 유방이 만취해 먼저 돌아갔다고 인사하고 준비한 선물을 바침. 단순무식한 항우는 유방이 자기한테 쫄았단 거에 흡족해하지만 범증은 극대노함. 범증은 "이래서 어린애와 대사를 도모하면 안 된다니까 ㅅㅂ 우리 이제 나중에 유방한데 다 뒤질거임 십새끼야" 라고 갈궜다구 함.... 이렇게 관중 땅에 입성한 항우는 항복했던 자영을 죽이고 진나라 황궁을 약탈하고 불태우는 또다른 병크를 저지름. 앞서 말했든 관중 땅은 매우 풍족한 요충지였고, 항우의 책사는 항우에게 관중을 거점으로 삼으라고 조언하지만 이미 관중은 불탄 폐허였고 항우는 고향에 돌아 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음. 초 회왕을 황제로 높여 의제로 칭한 항우는 고향인 팽성 땅을 차지한 후 자기를 '서초패왕'이라고 부르고, 유방을 포함한 나머지 장군들을 각지의 제후로 삼음. 아직 의제가 살아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항우라고 할 수 있겠음ㅇㅇ 물론 항우도 아주 바보는 아니라 유방을 경계했고, 가장 외진 땅인 파촉 땅을 줌. 파촉 땅은 산골짜기 벽지라 대대로 유배지로나 쓰이는 땅이었음. 한반도로 치면 저어기 연평도나 남해안의 섬 정도? 관중에 가장 먼저 입성한 유방은 당연히 분노함. 유방은 "ㅅㅂ 싸우다 뒤지더라도 항우랑 함 싸워봐?" 했지만 유방의 오랜 친구이자 책사인 소하가 뜯어말림. 소하는 은거하며 힘을 기르다 보면 언젠가 전세가 바뀔 거라고 유방을 설득했고, 유방은 결국 파촉으로 향함. 이게 기원전 206년의 일임. 이제 초한지의 하이라이트인 팽성대전임. 앞서 말했듯 항우는 초 회왕을 의제로 삼고 여러 제후에게 땅을 나눠줬는데, 부활한 제나라의 전씨 일족은 만족하지 못했음. 우리가 제나라를 부활할 때 너네한테 딱히 도움 받은 게 없는데 왜 우리가 초의 제후국이 돼서 내정간섭을 받아야함?ㅡㅡ 이 정도. (항씨랑 전씨는 이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건 너무 길고 재미 없으니까 생략) 제나라의 전영은 반란을 일으키는 동시에 다른 제후들도 이간질하고, 항우는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됨. 그 과정에서 의제가 전영이나 유방에게 붙을 게 걱정 됐는지 의제도 죽여버림. 물론 무력과 카리스마 스탯 하나는 풀인 항우라 한방에 전영의 군대를 박살내고 전영을 죽이지만, 문제는 위치였음. 항우는 제나라와 전쟁하느라 자기 본거지인 팽성을 떠나 제나라 깊숙한 곳에 있었고, 이 틈을 탄 유방이 파촉을 떠나 팽성을 향해 진군함. 여기서 항우는 자기의 잔인한 행보에 발목을 잡힘. 잔인하기로 유명한 징기즈칸도 "저항하는 새끼는 죽이지만 깔끔하게 항복한 놈은 살려준다ㅋ 항복해라ㅋ"는 스탠스를 취한데 반면, 항우는 전영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내기 위해 제나라 땅을 누비며 모든 성과 가옥을 불태우고 항복하든 말든 전영의 군사는 다 죽여버림. 여자와 노인만 살려 포로로 삼을 뿐 남자는 싹 생매장해버림. 항우가 왜 이랬는지 정확히는 모름. 항우는 이렇게 잔인한 성격과 별개로 자기 사람과 자기 가족에게는 정말 신의 있고 관대했는데, 항우에게 아버지나 다름 없던 삼촌 항량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압박할 때 교전하다 역습 당해 전사함. 항량의 죽음을 제나라 탓이라고 생각해 보복한 걸 수도 있고 두 번 다시는 자기한테 반기를 들지 못하게 본보기를 세우려던 걸 수도 있음. 이유야 어쨌든 항우의 이런 선택은 자충수였음. 싸우다 져도 뒤지고 항복해도 뒤지는데 누가 항복함ㅠ 전영의 동생인 전횡이 남은 제나라 군사들을 모아 성양 땅에서 죽기 살기로 항전하기 시작하면서 항우는 성양에 발목이 묶임. 이 틈을 탄 유방은 의제를 시해한 항우를 처단하자는 명분으로 근처의 제후들을 연합하고, 제후 연합군은 쉽게 팽성을 점령함. 항우를 포함한 병력이 거의 제나라에 가 있으니 당연히 쉬움ㅇㅇ 소식을 들은 항우는 나머지 군사들은 성양에 그대로 두고 최정예 군사 3만을 데리고 팽성으로 내려감. 당시 팽성에 있던 유방 연합군은 57만 명이었음. 항우가 이기면 기적인 수준이었음. 근데 항우가 이김. 일단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음. - 유방은 항우의 군대가 습격할 길은 북쪽 뿐이라고 생각해 북쪽을 위주로 막고 대비했음. 하지만 팽성은 항우의 본거지였고, 누구보다 팽성의 지형을 잘 알고 있던 항우는 팽성을 빙 둘러 서쪽으로 우회한 후 동쪽으로 밀고 들어가는 전략을 취함. 항우 군대 >>>>>> 유방 진영 이런식으로 - 3만 VS 57만. 아무리 초나라 군대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도 격파한 정예병이라고 해도 전면전으로는 가망이 없는 숫자임. 항우는 야심한 밤에 기습하는 전략을 선택했고, 아무런 대비 없이 습격 당한 유방의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감. 항우의 3만 군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유방의 군대는 57만 중 절반 이상이 몰살 당함. 얼마나 피해 규모가 컸는지 시신이 너무 쌓여 강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함. 이 과정에서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는 항우의 포로가 됨. 여담으로 유방은 도망치는 길에 고향 패현에 들러 자식들을 챙겼는데, 마찬가지로 유방의 가족을 사로 잡으려던 항우의 군대가 쫓아오자 수레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지 새끼들을 버림(.....) 부하 장수 하후영이 도로 아이들을 챙기며 "한낱 짐승도 자기 새끼 귀한 것은 아는데 니는 뭐하는 새끼임 대체 ㅅㅂ" 라고 갈구자 그제야 부끄러움을 느껴 아닥했다고. 또 한편 유방의 아내인 여치는 측천무후&서태후와 함께 중국 3대 악녀로 손 꼽히는 사람인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포로로 잡힌 후에도 겁 먹기는 커녕 항우 면전에 대고 "그래봤자 너는 내 남편 상대가 안 되니 어디 죽여볼 테면 죽여봐라"고 당당하게 소리 쳐서 그 항우조차 말을 잃었음. 이때부터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한신임. 소하&장량과 더불어 한삼걸로 불리는 명장임. 간신히 도망친 유방이 전력을 재정비하는 사이 한신은 3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차근차근 북쪽 땅을 정벌함. 또한 유방도 형양 땅을 본거지 삼아 죽을 기세로 버텼음. 항우가 제나라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관중 땅을 점령한 덕에 사전적 재기할 여력이 충분했음. 게다가 지속적으로 말해왔던 항우의 능력 부족이 서서히 본인의 발목을 잡기 시작함. 항우의 중요한 책사였던 범증도 죽었고ㅇㅇ 항우와 유방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음. 항우는 장군 내지는 전략가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대신 큰 그림을 보고 정치하며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이 없고 지나치게 잔인함. 반대로 유방은 사람은 좀 찌질하고(...) 멋 없을지언정 주변의 충고를 듣고 인망을 쌓는 건 항우보다 훨씬 나았음. 유방의 지휘관 스탯이 항우에 비해 좀 딸릴 뿐 없는 것도 아니었고. 지지부진하던 초한전쟁은 항우의 부하인 용저가 유수 전투에서 한신에게 패배하며 기울기 시작하고........ 해하 전투가 벌어짐. 유수 전투에서 진 후 항우는 포로였던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를 돌려보내며 자기가 이끄는 초나라가 동쪽 땅을,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가 서쪽 땅을 다스리는 협약을 맺음. 협약이 성사된 후 항우는 팽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이번 기회에 항우를 끝장내야한다는 참모들의 설득을 들은 유방은 항우의 군대를 공격함. 이게 초한전쟁 최후의 전투인 해하 전투임. 항우와 맞붙은 한신은 밀리는 척 후퇴하며 항우를 깊숙이 유인하고, 한나라의 나머지 병력이 좌우에서 초나라 군대를 공격함. 초나라 군사 10만명 중 8만이 전사하고, 항우를 포함한 나머지 2만도 포위당함. 이때 한나라 군사들이 초나라 군대의 사기를 완전히 꺾기 위해 초나라 고향 노래를 부른데서 나온 사자성어가 사면초가. 여담으로 자기가 선봉으로 나선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 해하 전투에서 딱 한 번 패배함. 항우는 결혼하지 않았고, 대신 사랑하는 여자 한 명이 있어 어딜 가든 항상 함께함. 원체 옛날이다 보니 출신에 대한 기록은 없고 성이 우씨라는 것만 남아 우희 혹은 우미인이라고 불림. 역사 속에선 패자인 항우가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우미인임. 한 때 패왕으로 군림하며 엄청난 권력을 누렸던 항우인데 평생 한 여자만 만났다니 로맨스 소설이 안 나올 수가 없음ㅇㅇ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항우는 늦은 밤, 자신의 군막으로 연인 우희를 불러 술을 마시며 해하가라는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림.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도다. 時不利兮骓不逝 시운이 불리하니 추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는 항우가 아끼는 명마. 삼국지의 적토마 같은ㅇㅇ) 骓不逝兮可奈何추 추마저 나아가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하는가. 虞兮虞兮奈若何 우희(虞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은가. 여기에 우희가 부른 답가가 화화왕가 漢兵已略地 한군이 이미 천하를 다 빼았으매 四面楚歌聲 성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大王義氣盡 대왕의 의기가 다하셨다면 賤妾何聊生 천첩이 살아서 무엇하리요. 한 때 전국을 호령했던 영웅이 자기 최후를 예감하고 사랑하던 연인을 걱정하며 눈물 흘린다는 게 참 드라마틱한 소재잖음? 저기서 파생된 작품이 장국영의 패왕별희 ㅇㅇ 패왕별희 뜻 자체가 패왕 항우와 우미인의 이별임. 장국영이 맡은 청뎨이는 동명 경극에서 우미인 역, 샬로는 패왕 역. 이후 우희가 어떻게 됐는지는 사서에 안 나옴. 항우에게 짐이 되기 싫어 자결했다는 말도 있고, 난전 중에 죽었다는 말도 있고, 항우가 죽음 앞에 목숨을 걸고 우희를 피신 시켜 조용한 곳에 숨어 여생을 보냈다는 썰도 있고. 보통의 작품에서는 자결을 택하는데 난 후자였으면 좋겠넴. 고향 노래를 들은 초나라 군사들은 하나둘 탈영하기 시작함. 항우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도망치지만 유방이 보낸 5천 명의 기병대가 항우를 추격하고, 100명의 군사로 5천명을 뚫는(....) 기적을 일으켜 동성에 도착하지만 항우의 곁에 남은 건 28명 뿐이었음. 이제 여기부터는 거의 뭐 드라마임. 참고로 연의처럼 소설적 허구가 섞인 기록 아니고 사마천이 지은 사기임....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그 동안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어 죽였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하였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 없이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겠다." 라고 외친 항우는 남은 28명의 군사를 사방으로 뛰게 만든 후 앞으로 말을 달려 한나라 장수를 죽이고 100명이 넘는 병사들을 죽임. 이 과정에서 죽은 초나라 병사는 딱 두 명. 미친놈임. 남은 26명을 데리고 계속 도망친 항우는 오강 이라는 강에 도착함. 오강을 관리하던 말단 관리는 항우를 맞이하며 "강동(江東)의 땅은 비록 협소하다고 하나 사방 천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숫자는 수십만에 이르고 있어 가히 그곳을 다스릴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속히 배에 오르시어 강을 건너시기 바랍니다. 이 강 안에는 오직 이 배밖에 없어, 비록 한군이 쫓아오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함. 이에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강을 건너서 무엇하겠는가? 또한 옛날 내가 저곳 강동의 자제 8천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왔다가 모두 전사하고 오늘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준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비록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항우 혼자만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답하고 그대가 충신임을 알겠다며 이 관리에게 자기의 명마, 오추마를 넘김. 이때 항우를 따른 26명의 군사들은 탈영하지 않고 항우를 따라 죽을 각오를 한 장병들이었음. 이들이 항우와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는 썰도 있고, 항우가 "지금 주군의 명령을 어길 셈이냐? 어서 배에 타라." 라고 윽박 질러 그들은 피신 시켰다고 하는 책도 있음. 이후 항우는 혈혈단신으로 한나라 기병대 5천에 맞서 수백명을 죽이고(....?......)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 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노라." 라는 유언과 함께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고 함. 이 때 항우의 나이 31세. 항우의 시신은 유방이 건 상금에 눈이 나간 한나라 군사들이 달려들며 수십조각이 났고, 유방은 그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뤄주고 노공으로 봉함. 썰에 따르면 본인도 그 장례식에 와서 울다 갔다나 뭐라나. 이렇게 해서 초한지는 유방의 승리로 끝남. 유방은 한나라의 황제가 되는데,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통일 제국임. 이 한나라가 망해갈 즈음 벌어지는 이야기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장면으로 유명한 삼국지ㅇㅇ 이제 밑으로는 여담 타임 + 여치 이야기 여담 1 장기 판에 적힌 게 초나라 한나라임. 빨간 색이 한나라 / 파랑이나 초록이 초나라 여담2 유방의 승리에 가장 크게 기여한 한신은 이후 반란 혐의로 유방에게 제거 되는데, (소하나 장량은 천수 누리다 감) 여기서 유명해진 사자성어가 토사구팽.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 이전부터 있었던 말인데 한신의 일화로 유명해져 널리 쓰이게 됨. 여담 3 유방이 황제가 되면서 아내인 여치는 황후가 되어 여후라고 불리게 됨. 여후는 유방이 사고 치고 다니던 건달 시절 유방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유방이 거병한 후 묵묵히 내조를 해준, 말 그대로 조강지처였음. 더군다나 팽성 대전의 패배 이후 항우 진영에서 포로 생활도 함. 황제가 된 유방은 여러 후궁을 두고 총애했음. 뭐 여기까지는 괜찮을 수 있었음. 정치에 간섭하는 여후가 거슬렸던 건지 뭔지, 갑자기 여후 소생의 태자 유영을 '성정이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하고 가장 총애하는 척 부인 소생의 아들 유여의를 태자 삼으려고 함. 진나라의 처참한 말로를 아는 대신들이 적통인 유영을 폐위하면 안 된다고 기를 쓰고 말려 수포로 돌아갔지만... 여후는 이 원한을 간직하다 유방이 죽자 본색을 드러냄. 원래 다정한 성격이었는데 결혼 후 고생하면서 성격이 점점 변해 독해졌다고 하니 만악의 근원은 유방이지만, 여후가 중국 3대 악녀로 손 꼽히는 이유가 있긴 함....이하 잔인함 주의. 유방이 죽고 여후와 유방의 아들 혜제가 황제가 된 직후, 여후는 척 부인을 연금 시키고 아들인 유여의를 황궁으로 부른. 어머니와 달리 심약하고 정이 많은 혜제는 어머니가 유여의를 죽이지 못하게 동생과 함께 먹고 자며 보살핌. 하지만 어느 날 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을 가자 어린 유여의는 혼자 남겨지고, 여후는 곧장 12살의 유여의를 죽인 다음 척 부인에게 데려가 아들의 시신을 보여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척 부인의 눈을 뽑은 후 귀, 혀, 손, 발을 자르고 돼지 우리에 넣어 인간 돼지라고 부르며 아들 혜제를 불러 그걸 보게 함. 유여의와 척 부인을 잔인하게 죽인 거야 그렇다 치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혜제한테 보여준 건진 모르겠음. 이복 동생을 지키려고 그렇게 노력한 사람한테 굳이....? 심지어 이때 혜제도 고작 16살이었음. 얼마나 심하게 훼손 됐던지 처음에는 누군지도 못 알아보다가 뒤늦게 척 부인이란 걸 알고 충격 받은 혜제는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태후마마의 아들인 저 또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비난한 후 앓아눕고, 이후 실의에 빠져 술만 마시다 23살의 나이로 요절함. 여후는 혜제가 죽었을 때 눈물 한 방울 안 흘렸고, 혜제 사후 멋대로 황제를 세우고 섭정하며 나라를 주무르다 노환으로 사망함. 이 횡포가 나중에 독이 되어 여후의 여동생을 포함한 여씨 일족 사람들은 맞아죽었다고,,,, 이때가 남존여비 시대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권리는 있어서, 첩이 정실 부인을 무시하고 방자하게 군다면 어느 정도의 처벌은 용인 됨. 중국 사극에서 황후가 건방진 후궁 꿇어 앉히거나 화내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 것도 이래서ㅇㅇ. 다만 여후는 혜제 사후 나라를 망칠 뻔 하기도 했고, 척 부인에게 한 보복이 정말 듣도 보도 못할 수준으로 잔인해서 악녀 소리 듣는 것. 힘들었다. -끗- 출처
세계에서 가장 오묘한 지역 감정을 지닌 장소
아즈텍인들과 틀락스칼텍인들은 비록 원수 사이이긴 했지만 문화, 인종적인 차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서로 언어도 통했던 사이 (코르테스가 검증) 심지어 식인 문화도 닮아있어서, 아즈텍이 무너진 뒤에는 틀락스칼텍인들이 보복성으로 포로로 잡힌 아즈텍 전사를 먹어치워서 코르테스가 기겁하고 말린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죠 두 지역이 사이가 나쁘긴 해도, 그래도 한 나라로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관계를 무시할 수 있을만큼 문화적으로 가깝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옛날 백제랑 신라가 원수 사이처럼 치고 박았지만 막상 통일 후엔 빠르게 통합된 거랑 비슷합니다) 윤리적으로 보면 멕시코 시티 출신들이 기가 죽어야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멕시코라는 나라 자체가 아즈텍의 후신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중앙 아메리카를 통합한 위대한 아즈텍 제국! 뭐 일단 식인 의식이 나쁜 건 맞는데, 그런건 대충 무시하고 거대한 피라미드랑 독수리 전사나 구경하자구!" 이정도입니다 멕시코의 국장인, 뱀을 물고 있는 선인장 위의 독수리 또한 "독수리가 뱀을 물고 있는 땅 위에 위대한 국가를 세우라"는 테노치티틀란의 건국 전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출처)
100명의 작가들이 쓴 100개의 문장
잡지 ARENA에서 2014년에 기획했음 각자 부여받은 숫자로 한 문장을 완성하는 것 백 명의 작가가 한 문장씩, 모두 백 문장을 썼다. 전대미문(前代未聞), 전대미문(前代未文). 01. 주로 자정에서 새벽 1시 사이, 마음속으로 작은 조종을 울리며, 하루를 매장하고, 성호를 긋는 것으로 하루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날들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정영문(소설가) 02. 항상 2명씩 짝지어 다녀야 했던 소녀 시절 교실은 간혹 홀수 총원이었기에 귀신처럼 남는 애가 꼭 있었다. 박민정(소설가) 03. 3(삼)촌은 찬물에서 건진 물고기를 입속에 흘려 넣어주는 것이었다. 박상수(시인) 04. 4층에서 이륙하는 절망. 안현미(시인) 05. 사실 손가락이 반드시 5개씩 달려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장은정(평론가) 06. 저녁 6시, 빛의 날개가 접히는 시간. 이영주(시인) 07. 베티, 블루한 7과 카페 ‘르’에서 파삭파삭한 뽀뽀를. 장수진(시인) 08. 무한이 기립하는 순간, 눈사람 같은 8자의 눈을 보았다. 강정(시인) 09. 구인회의 미스터리, 도대체 9번째 멤버는 누구였을까? 안웅선(시인) 10. 10일 그 후 코펜하겐 소년과 자주 항구를 걸었다. 주하림(시인) 11. 잊는다는 건 곁에 두고 만나지 못한다는 것, 저 멀리 사라지는 11자 기찻길처럼. 임경섭(시인) 12. 한 사람은 12명을 새롭게 하고, 12명이 한 사람을 영원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이혜연(시인) 13. 13번째 연필을 깎아 13번째 네 얼굴을 그린다. 김근(시인) 14. 우리 집 작은 고무나무는 어느 날 14번째 잎을 피웠으나 그 잎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고 어느새 잎이 무성해진 고무나무에게 오늘은 물을 주었다. 김나영(평론가) 15. 보름 후에라도 이 사태의 최종 책임자가 물러나면 좋겠지만, 사실은 15초도 견딜 수 없어, 젠장. 송종원(평론가) 16. 키스를 해보기로 마음먹은 16세의 우리는 나란히 양치를 하고 돌아와 입을 맞추었다.이수진(소설가) 17. 17p. 이제 그만 이곳을 나가고 싶다. - [굿바이 줄리]. 몰인정과 무책임이 17들을 수장했다. 여기선 지금 죽음이 제일 젊다. 이현승(시인) 18. 18세-살아 있었다면 너는 더 먼 곳으로 여행을 갔겠지, 별을 세었겠지, 초여름의 신록을 입었겠지, 바닷물로 짠 수의 같은 건 절대로 입지 않았을 거야. 김은경(시인) 19. 정오까지는 19분 전, 한낮의 햇빛이 있었고,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니(시인) 20. 담배 한 갑 안에는 20개비가 들었습니다. 이강진(평론가) 21. 토요일 잠에서 깨어나, 21로 끝나는 제목의 주간지를 집어 든 여자는 지난밤 자신이 살고 있는 건 이 세기가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라고 노래하던 남자가 떠올라 그 터무니없는 야심에 실소가 터졌다가 문득 그가 무사히 집에 들어갔을지 궁금해졌다. 황예인(평론가) 22. 애타는 여름의 초입에서 ‘대한민국 헌법 제 22조 1항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는 한 줄, 오랫동안 쓰다듬는다. 강지혜(시인) 23. 어느 날 나는 FM 방송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동시에 장파로 뉴스를 들을 경우 쇤베르크의 작품 제 23번의 어려운 피아노 악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셸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민구(시인) 24. 24시간이 모자라, [아레나]를 읽기엔…. 석지연(시인) 25. 세상에서 가장 긴 잠옷인 악몽의 25개째 단추를 채운다. 이용임(시인) 26. 26세에 요절한 단 한 명의 가수가 26년 동안이나 우리를 슬프게 만들었다면, 올해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수많은 희망들을 우리가 26년이 훨씬 넘어서도 기억하는 일은 당연하다. 김상혁(시인) 27. 27명의 증인들이 문을 닫자 27마리의 새가 떨어졌다. 김선재(시인) 28. 동양 천문의 28수(宿)는 별자리를 28개 구역으로 나눈 것, 28수는 온누리 별들의 각축장, 빛을 뽐내는 별들의 [아레나]! 이현호(시인) 29. ‘사물의 의미를 파악하고 모호이자 비밀인 삼라만상의 지식을 구하는 정확한 계산법. - 오래전 상하 이집트 왕 니마트르 시대에 제작된 판본을 상하 이집트 폐하 오세르 치하 서른세 번째 해 아크헤트 네 번째 달에 서기 아메스가 필경하다.’ - [린드 수학 파피루스] (BC 1650년경, 대영박물관 소장), 소수 개념을 밝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윤경희(평론가) 30. 30세의 첫날 밤, 나는 어둠을 향해 눈을 뭉쳐 던졌다, 손바닥이 아릴 때까지. 혹은 나는 30대의 전반을 이명박 정부 밑에서, 후반을 박근혜 정부 밑에서 보내고 있다. 신철규(시인) 31. 31은 11번째 소수, 11은 5번째 소수, 나눌 수 없는 수로서 나눌 수 없는 자리에 놓여 있으니 발을 쭉 뻗고 자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신해욱(시인) 32. 내가 한 달의 32번째 날을 발견한다면 여분의 나는 다른 숨을 쉬고 있겠지. 하재연(시인) 33. 33, 하고 적으면 늘어선 그것들이 하나는 안고, 하나는 안긴 것 같고, 또 멀리 날아갈 것 같았다. 김소희(시인) 34. 34명의 아이가 사라졌다. 김소형(시인) 35. 너의 체온은 35 ℃, 언제나 조금 차갑고 불안하다. 유연(소설가) 36. 우리는 36개의 아름다운 손가락 중 일부만을 겨우 펼치거나 꼽으며 살아가다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모든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펼치는지 모른다. 이진희(시인) 37. 37세의 생일에는 중소형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고급 세단을 주차시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당신과 당신이 모여 지금의 우리가 되어버렸네. 서효인(시인) 38. 어렸을 때는 광땡인 줄로만 알았고 커서는 여성의 날로 가까워진 38, 작년에 내 두 번째 시집의 번호가 되었다. 오은(시인) 39. 일본어로 39는 하츠네미쿠를 뜻한다고 한다. 송승언(시인) 40. 40수 코튼의 감촉이나 40도 술의 향기로움, 40대 오빠들의 팽팽함과 40주년 한정판 스니커즈의 착화감처럼 일찍 알수록 좋은 디테일들이 40가지쯤 된다. 정세랑(소설가) 41. 우리 반은 41명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그저 41명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애는 한 번도 나에게 41분의 1이었던 적이 없다. 전삼혜(소설가) 42. 바람 한번 불었는데 42명이 죽었다, 는 문장은 바람이 불어 한 명이 죽었다 혹은 백 명이 죽었다보다 훨씬 그럴듯하다. 특성 없는 애매한 숫자는 가상의 세계에서 환영받지. 정용준(소설가) 43. 네이버에서 43을 검색하니 being three more than forty라고 한다. 한유주(소설가) 44. 잘라라, 44로운 그 감정을! 양경언(평론가) 45. 안녕 나의 외계 45호. 강성은(시인) 46. 그는 46호로 들어간다. 박지혜(시인) 47. 그는 47호로 들어간다. 이준규(시인) 48. 48시간, 그들이, 우리들이, 죽지 않는 죽음이 되어간 시간. 박시하(시인) 49. 49일이 지나자 그는 비로소 여자가 되었고 시간의 생식기는 기능을 잃었다. 김현(시인) 50. 어린 나는 부모 앞에서 “오, 십 (50)” 천천히 발음했고 그들은 망설이며 거무스름한 손을 감췄다. 최지인(시인) 51. 절반이 반절로 바뀌는 카운트다운, 51. 서윤후(시인) 52. 52번 버스를 타고 남한산성 계곡으로 가자, 평상을 하나 빌려 세상 모르게 취해보자. 박준(시인) 53. 53만원이 생기면 빚을 더 갚을 수 있어 좋겠구나. 백상웅(시인) 54. 54, 성에 낀 버스 유리창에 누군가 적어두고 내렸다. 유계영(시인) 55. 희망 몸무게 55. 성동혁(시인) 56. 56년 뒤에 안락사할 것이다. 이이체(시인) 57. 57명의 여자와 교접했다. 박희수(시인) 58. 58처럼 두 자리가 아닌, 한 자리 숫자는 야하다. 최정진(시인) 59. 59번 버스가 터널을 빠져나오면 나는 그 사람이 울고 있었을 어느 오후의 뒷좌석을 생각한다. 박성준(시인) 60. 나는 60세에 은퇴하고 요양원 차려서 친구랑 살려고 하는데 요즘은 그린란드에 차릴까 생각한다. 김승일(시인) 61. 내가 탄 61번 버스의 종점은 항구와 항구가 끝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지만 종점에 닿기 전에 나는 이미 많은 것들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영효(시인) 62. 그의 62번째 영화 속 주인공은 바로 나인데, 영화는 “왜 떠나지 않냐”는 물음에 “그가 좋아서요”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끝이 나고, 결국 그것은 내게 일종의 자해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황현진(소설가) 63. 그는 그녀의 숨결까지도 잊은 적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미소를 보고서야 그는 63년 전의 희미한 무엇이 겨우 떠올랐다. 백가흠(소설가) 64. 그녀는 자신이 한 시간 전에 차를 세워둔 64구역으로 천천히 걸어갔고, 차에 타기 전 그 옆에 주저앉아 아주 잠시 동안만 울었다. 손보미(소설가) 65. 온난화에 관심 있어요? - 북위 65도 알래스카에 사는 갈색 곰으로부터. 김은주(시인) 66. “몇 시냐”는 물음에 6시 6분을 66분이라고 대답한 날, 나는 종일 시간의 형상에 대해 생각했다. 류성훈(시인) 67. 당신이 던진 67개의 날카로운 쉼표가 소화되지 않는다. 최호빈(소설가) 68. 68개 문 중에 출구는 하나뿐인데 도무지 모르겠고 잘못 열면 괴물이 나온다. 김덕희(소설가) 69. 69에 관한 상형문자적 레테르: 내가 물구나무를 섰을 때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세정(시인) 70. 70가지 색의 알약들이 빛 속에서 흔들릴 때 문을 열고 그가 걸어 들어왔다. 백은선(시인) 71. 오늘 아침 느닷없이 71번째 생일을 선고받은 당신은 자신의 조카뻘 되는 어린 여자와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은 노란 종이배 안에서 세상이 모두 얼굴을 돌린 위태로운 사랑을 나누다가 문득 비 맞은 창밖의 세월을 바라보고 길고 긴 한숨을 쉬었다. 최창근(극작가) 72. 나로부터 72걸음 밖에는 죽은 아이들이 매달려 노는 큰 나무가 있다. 안희연(시인) 73. 73번씩 마음을 바꾸고 돌아누워도, 우리는 여전히 방법을 모른다. 안미옥(시인) 74. 74개의 낱말로 이어 붙인 밤의 내부로부터 우리들은 시작되었다. 박찬세(시인) 75. 75 B? 최진영(소설가) 76. 76년 후,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혜성이 돌아올 거라 예견했던 핼리처럼 현존을 넘어선 확신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를. 문자영(시나리오 작가) 77. 77을 거침없이 아래로 잡아당기자 11이 되었다. 안주철(시인) 78. 화성에 쏘아 올린 78마리의 실험 동물 중 오직 나만이 살아남았다. 김성중(소설가) 79. 이 문장이 79번째 비문이다. 김태용(소설가) 80. 그들 중 80명은 사기꾼이거나 얼간이다. 윤민우(소설가) 81. 경험상, 81년생 여자들은 무척 아름답지만 고집이 엄청나게 셌는데, 중성자탄이 생산되던 해에 태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영훈(소설가) 82. 나는 미몽, 혹은 무한한 가능성의 82번째 원자, 납의 어둠에 있다. 함성호(시인) 83. 왜 그토록 키에 집착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각설하고, 키가 한 83cm쯤 되는 남자라면 함께 누웠을 때 그의 발톱이나 엄지발가락에 난 털을 지그시 내려다볼 수 있겠다는 상상을 했더랬다. 김민정(시인) 84.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는 자신의 84번째 생일을 잊어버리고 아기와 같은 형태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김혜나(소설가) 85. 85국가 번호가 85인 나라는 아직 없다. 그 나라가 어딜까? 김언 86. 86년에는 대학 새내기였다. 모두를 가졌으므로 모두에게 승리한 봄날이었다. 이병률 87. 권력14. 타고난 걸까 만들어진 걸까, 그 일종의 병 불행, 나와 여러분들의 세상과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 2013년 11월 정태춘 시집 [노독일처] 중에서 87p. 박송이(시인) 88. 미지근한 봄날, 친구의 결혼식, 방콕행 비행기표, 먼 나라에 살고 있을 여전히 88한 너를 만나러. 강효미(동화작가) 89. 89마리 토끼들이 흰 언덕으로 가려면 열한 걸음. 이성미(시인) 90. 90개의 땀구멍에서 땀방울들이 일제히 솟구쳤다. 정이현(소설가) 91. 오늘의 문제 91번은 답이 없다는 게 문제다. 김지녀(시인) 92. 92번째 어둠에서 기다릴 것. 이원(시인) 93. 그의 100m 달리기 기록은 93초로 그리 빠르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윤고은(소설가) 94. 그는 94번째 A매치에서 패배한 후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했다. 김지훈(시인) 95. 그가 95(구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9월 5일에 태어났기 때문이었는데 그건 8월 8일이나 7월 7일에 태어났을 경우보다 훨씬 나았으므로 그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김금희(소설가) 96. 엄마, 나는 96번째 양을 셀 때마다 더러워져요. 이성민(소설가) 97. 나에게 부여된 숫자가 97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조수경(소설가) 98. 처음으로 사람을 보고 가슴 뛰었던 때는 98년의 여름,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황인찬(시인) 99. 네가 99번째 여자야. 이우성(시인) 100. 나무에 난 상처를 쓰다듬어주니 가지가 100개나 되는 팔을 흔들어주네. 김기택(시인) 출처ㅣ더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