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gun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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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들의 사망 원인

초대: 태조 이성계

향년 72세

재위 기간: 6년 2개월

사인: 중풍


자식들이 내란 벌여서 스트레스 쌓이고

이로 인해 중풍에 걸렸는데 악화 되어 붕어
2대: 정종 이경

향년 62세

재위 기간: 2년 1개월

사인: 노환


꼭두각시 노릇하다

동생한테 왕위 주고

천수를 누리다 자연사함
3대: 태종 이방원

향년 54세

재위 기간: 17년 9개월

사인: 폐렴


사냥 갔다가 열이랑 혼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 급성 감염성 폐렴으로 붕어함
4대: 세종 이도

향년 52세

재위 기간: 31년 6개월

사인: 당뇨, 풍질, 부종, 임질 , 허리 디스크, 비뇨 장애 등등
복합적인 합병증


원래부터 온갖 병을 달고 있었음

시력 저하나 편식으로부터 온 비만,

하루종일 앉아서 책만 읽다 온 성인병 때문에 붕어함
5대: 문종 이향

향년 37세

재위 기간: 2년

사인: 등창


어머니 죽어서 3년상 치뤘는데

곧바로 세종이 죽어서 같은 짓을 또함

이로 인해 약해진 몸 등에 난 종기로 붕어함

세자 노릇 35년 왕 노릇 2년
6대: 단종 이홍위

향년 16세

제위 기간 3년

사인 독살 or 타살


왕위에 오를 때

주변의 어른이 없었던 탓에

종친을 제어 할 존재가 전무했음

곧바로 세조의 쿠데타로 이어지고

복위운동까지 실패하자

영월로 유배 보내져 독약을 받음
7대: 세조 이유

향년 50세

재위 기간: 13년 2개월

사인: 문둥병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이후

정신 질환과 불면증 갖가지 피부병에 걸림

죽을 때까지 시달리다가 붕어함
8대: 예종 이황

향년 19세

재위 기간: 1년 3개월

사인: 급사


급사하기 전날

''이제 좀 종기 나아진 것 같다'' 이러다가

다음날 바로 급사함
9대: 성종 이혈

향년 37세

재위 기간: 25년

사인: 폐결핵, 합병증


조선 최고 성군이지만 세종과 유사하게

종기, 설사, 두통, 요통 등등의 질병괴 씨름하다

폐결핵과 합병증으로 붕어함
10대: 연산군 이융

향년 29세

재위 기간: 11년

사인: 역질, 화병


조선 최고 폭군이지만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되자

미쳐 날뛰며 신하들을 죽여댔음

이어서 전국에서 미녀들을 모아 합방만 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이후 강화도로 유배가서  아들의 시사 소식을 듣고

식음 전폐 하다가 죽음
11대: 중종 이역

향년 56세

재위 기간: 38년

사인: 노환


신하들에게 휘둘리다

노환으로 붕어함
12대: 인종 이호

향년 30세

재위 기간: 9개월

사인: 거식증, 합병증


즉위 부터 병약했고

문정왕후의 도를 넘은 압박에서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음

여기에 세자시절 중종이 앓아 눕자

5개월 동안 예법을 행하다

거식증까지 걸려 붕어함
13대: 명종 이호

향년 33세

재위 기간: 21년

사인: 울화병, 급사


문정왕후 치맛폭에서 20년간 살다가

문정왕후가 죽자 드디어 기 펴고

윤원형등 일파를 대거 숙청했으나 급사함

기록에는 울화병도 있다고 되어있음
(선조 추정 어진)

14대: 선조 이연

향년 55세

재위 기간: 40년

사인: 울화병, 자연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기존의 울화병이 악화되고

실어증까지 걸려서

허약해진 몸 이끌고 가다가 붕어함

15대: 광해군 이혼

향년 66세

재위 기간: 15년

사인: 노환


왕세자 시절엔 명군의 자질이 있었지만

막상 왕위에 오르고 보니

무리한 토목 공사로 민심을 잃고

적장자였던 이복 동생 죽이고

대비까지 감금 시키며 패륜을 함

이때 제주도로 유배 보내져

병자호란 터진 줄도 모르면서 살다가 사망
16대: 인조, 이종

향년 53세

재위 기간: 26년

사인: 화병, 노환


삼전도 굴욕으로 유명한데

실제로는 여러 미디어에 나오는 것처럼

삼배구고두래가 머리를 땅에 힘껏 빻는게 아니므로

피가 났다는 기록은 없음

이후 소현세자에게 열등감 느끼고

스트레스와 홧병에 시달리다 붕어함
17대: 효종 이호

향년 39세

재위 기간: 10년

사인: 어의의 실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두고

침을 놓자와 놓지 말자라는 의견이 대립하던 와중

어의인 신가귀가 침을 놓았는데

수전증 때문에 혈관을 잘못 찔러 과다 출혈로 붕어
18대: 현종 이현

향년 33세

재위 기간: 15년

사인: 등창 및 합병증


안질과 피부병이 고질병이었는데

재위 기간 내내 온천을 달고 살았다함

호전 되지도 않았고 폐혈증으로 붕어함
(숙종 추정 어진)

19대: 숙종 이순

향년 58세

재위 기간: 45년

사인: 심화증, 등창, 안질 등등


강한 왕권과 더불어 성격도 강해서

심화증 안증 포만증 노인병 등등에 걸리며 붕어함
20대: 경종 이문

향년 35세

재위 기간: 4년

사인: 급사



날 때부터 쇠약한 몸과 심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이후 영조가 올린 생감과 게장을 먹고 급사함

이때문에 영조는 선왕의 독살이라는 의혹에 시달리게 됨
21대: 영조 이금

향년: 81세

재위 기간: 51년

사인: 자연사


조선 왕조에서 가장 오래산 인물로

소식을 하고 잡곡밥을 즐겼으며 영약식을 했다고 함

1년에 먹은 인삼 수만해도 20개가 넘는다고 ㄷㄷ
22대: 정조 이산

향년 47세

재위 기간: 24년

사인: 등창, 홧병


실록에는 공식적으로 등창이라 적혀있지만

사망 사인이 독살이냐 등창이냐

왈가왈부가 굉장히 많음


(순조 익선관 추정 어진)

23대: 순조 이공

향년 44세

재위 기간: 34년

사인: 폐혈증, 변비


소화 기관이 불량이라 고생 꽤나 한 왕임

순조 34년에 두통과 변비가 찾아오자 그대로 붕어함
(헌종 추정 어진)

24대: 헌종 이환

향년 21세

재위 기간: 14년

사인: 폐결핵


역대 왕들 중에서 미남이라고 손꼽히는 왕으로

어려서부터 궁녀들과 합방으로 폐결핵을 얻었음

그렇게 붕어함
25대: 철종 이변

향년 32세

재위 기간: 14년

사인: 폐결핵


안동 김씨의 훼방질에 말려들어

술과 여자를 탐하다 폐결핵에 걸려 붕어함
26대: 고종 이희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이희

향년 67세

재위 기간: 43년

사인: 뇌일혈


고종의 붕어는 독살설이 가장 많이 제기됨

이완용의 명령으로 식혜를 전달했던 나인이 의문사 했고

그 식혜를 받아 마신 고종도 돌연 붕어하였음

당시 고종은 비밀리에 독립 운동을 위해 해외 망명을

준비 중이어서 독살설에 힘이 실림

아직까지도 정확한 경위는 불명임
27대: 순종 이척

2대 황제: 순종 이척

향년 52세

재위 기간: 3년

사인: 심장병


일제의 탄압 속에서

허수아비로 앉게된 군주인지라

무기력 속에서 살다

말년에 심장병을 얻고 붕어함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shingun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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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내용 이네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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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농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 선조.jpg
선조 아들들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라고 쳐줄만한 아들은 둘이 있음. 신성군 - 워낙 어려서 요절해서 병크 터트리고 말고도 없음 선조가 물고 빨고 예뻐죽던 아들이라 전쟁 안터지고 명줄 길었으면 얘가 세자 했을지도 모름 광해군 -군왕자 시절에도 클린했고 세자로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애비의 땡조급 갈굼으로 인해 흑화 빼고는 하나같이 가관이었음 그 중 3대장이 1. 임해군 이진 공빈 김씨 소생, 선조 서장자. 광해군 형임에도 인성이 가관이라 그 누구도 세자 후보로 생각 안함, 얘라면 물고 빨고 했던 선조도 세자는 쫌하면서 신성군과 광해군 사이에서 저울질;;; 확인되는 범죄 행위들만 따져도 구타, 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은 기본에 공물 약탈, 기록에 의하면 임해군은 궁노를 풀어 토지를 멋대로 차지하고 궁노의 입을 막기위해 남의 지아비를 죽이고 그의 처를 궁노에게 짝지어줬다함. 심지어는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하기 까지 함. 이때 선조는 크게 질책했다고 하지만 지 아들새끼라고 싸고 돌아서 처벌은 안 받음 사람을 죽였는데 참고로 세종대왕때는 공주의 남편인 부마가 종을 때려죽였다가 귀양까지 갔음 임진왜란때도 동생 광해군이 피땀흘려 의병들 독려하고 전투할때, 기생끼고 놀고 갑질해대다가 참다참다 백성들이 얘랑 얘 이복 동생 세트로다가 왜한테 넘겨버림. 광해군은 이런 형을 극도로 증오했다고 함, 기록상 신하들이, 서인,동인 할것 없이 당파를 조월해서 쟤 죽이라고 상소를 올려댔는데 광해군이 상당히 미온적으고 동정적인 태도로 나왔음, 그러나 이런 광해군의 행동이 그냥 동복형제를 죽이기에는 쫌 그러니까 못이기는 척 하려고 했다는게 학계의 정설 (태종이 잘했던 짓 분위기 만들어 놓고 빼는 척 하다가 킬) 심지어 반정이후에도 영창대군 죽인 것만 문제삼고 얘 죽인건 아무도 문제 안 삼음. 2.정원군 인조 애비, 얘도 임해군이랑 하는 행동거지가 똑같았음. 후술할 순화군의 졸기에 정원군이나 임해군보다는 행동거지가 나았다고 서술했을 정도로 개 막장.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과거 시험에 처남을 합격시켜 사헌부에 탄핵당하거나 군적 회피자를 돈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거나 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정도고.. 선조 35년 9월 13일조를 보면 정원군의 가노들이 선조의 형수이자 덕흥대원군 봉사손이었던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하는 강력 범죄도 저질렀다고 함. 노복들과 창기(娼妓) 대여섯명이 하원군 집 앞을 지나다가 하원군의 노비와 싸우게 되었는데 하원군 부인이 나와서 말리려다가 도리어 집이 습격당하고 노비들한테 끌려가 감금된거임 하원군의 부인은 참고로 큰어머니뻘인데ㅋㅋ 유교의 나라에서 참ㅋㅋㅋ가지 가지 이새끼 아들이 인조임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원종으로 추존됨...... 콩콩 팥팥ㅋㅋㅋㅋ 3. 순화군 역대 최고의 사이코패스 사이코들이 늘상 그렇듯 동물을 잔혹히 죽이는 걸 꼬꼬마 시절부터 즐겼다는 기록이 있음. 포로 생활 1년만에 안그래도 개 막장이었던 인성이 완전 찌그러져버려서는 ㅋㅋㅋ 인성자체가 소멸되서 사람들 막 죽이고 댕김. 저 임해군이 야..나도 나지만 너 쫌 심하다..했을 정도. 어러서부터 쌩트집을 잡아서 자기한테 인사할때 허리를 너무 조금 굽혔다거나 덜 굽혔다거나 등 말도 안되는 진짜 말그래도 쌩트집 잡아서 잔혹하게 형장을 치는걸 즐겨했다고 함ㅋㅋㅋ 참고로 이때 대략 14~15살ㅋㅋㅋ중2병 개 지랄 맞게 왔음ㅋㅋ 참다 못한 신하들이 처벌을 주청해서 삭탈관직 몇년 받고 끝ㅋㅋ 그러다 10대 후반에는 이미 얘 손에 죽은 피해자만 양손에는 꼽지도 못할만큼ㅋㅋ 쌓이고 완벽한 사이코패스겸 연쇄살인마가 됨. 1년에 10명씩은 죽이고 다닌다는 소리가 돌았고. 백성들은 호환마마보다 순화군을 더 무서워했음. 그러거나 말거나 선조새끼는 어화둥둥 내 새끼 ^^ 처벌도 조또 안하고 사람만 계속 죽어감ㅋ 그러다가 법모이자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강간하는 일이 생김, 심지어 왕후의 관이 모셔진 곳 앞에서 벌어진 범죄임. 이는 아부지인 선조도 절대 쉴드 못쳐주는 극대죄였음. 효를 버린 폐륜적 행동이었기 때문임. 드디어 귀양길에 오르는데 귀양지 가서도 지 왕자라고 고개 쳐 들고 갑질하고 사람 죽이고 다님ㅋㅋㅋㅋ 그래서 다시 서울로 잡혀 올라오는데 다시 그지랄하고 다님 그래도 꿋꿋하게 자가 아들 부둥부둥하는 선조.. 그러다가 더는 지도 안되겠다 했던지 가택연금시켰는데 그러다 풍 맞아 뒤짐ㅋㅋㅋ 선조-정원군-인조는 조선왕조에서 다른 의미로 역대급 3대임 출처
덕만, 천명, 선화 신라시대 세 여자 이야기
한반도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둘러싼 전쟁이 치열했던 시대. 어린 시절 즉위해서 오랫동안 신라를 다스렸던 진평왕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왕위를 이을 왕자, 즉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끝내 아들을 얻진 못했지만, 그에게는 역사에 기록된 세 딸이 있었다. 바로 덕만, 천명, 선화가 그들이다. 덕만(德曼) 진평왕의 큰 딸이자 신라의 27대왕인 선덕여왕. 그녀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여성이 단 한 번도 왕위에 오른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평왕의 큰 딸인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632년 1월, 선덕여왕은 국가 중대사를 정하는 화백회의를 통해 왕위에 오른다.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말은 성스러운 조상을 가진 황실여성이라는 뜻으로 성골, 즉 성스러운 조상을 가지고 있는 혈통으로서 황제가 될 수 있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선덕여왕의 어린 시절 뛰어난 예지력을 모란꽃 일화로 전한다. 진평왕이 당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덕만에게 보여주자 덕만은 벌과 나비가 함께 있지 않으니 모란꽃의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이 직접 확인해보자 덕만의 말과 같았다는 이야기는 총명했던 공주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 모란은 종류가 굉장히 많으며 그에 따라 향기의 강도도 제각기 다르다. 또 향기가 없는 꽃에 곤충이 들지 않는다는 추측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선덕여왕의 모란도 일화는 여왕에게 남편이 없음을 조롱하기 위해 향기없는 꽃그림을 보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허나 당시 당태종이 신라에 이를 선물한 것은 왕의 부귀를 축원하는 의미로 보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그림과 함께 씨앗을 함께 보낸 것은 조롱이나 비하의 의미가 아닌 중국에서 모란꽃을 선물하는 풍속에 따랐음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이는 최초 여왕이 남성들과는 다른 특별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든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4대 임금 탈해이사금과 13대 미추 이사금과 같이 신라에는 왕의 사위가 왕위를 잇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진평왕은 왜 사위가 아닌 딸에게 왕위를 잇게 했을까? 삼국유사 왕력편은 성골남진, 즉 성골에 더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라는 왕족과 육두품의 신분 구별에 따라 사회생활 전반이 규제되었다. 왕족은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성골과 그렇지 않은 진골로 나뉘는데 그 기준은 명확치 않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54년 동안 재위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고, 자신의 가족만을 성골로 한정지었다.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은 진평왕의 동생 백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신의 삼촌과 혼인한 것이다.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불륜이 아닌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관행이었다. (다른 기록에서는 음갈문왕을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라고 하기도 한답니다. 하여간 다들 친족 관계인건 변함없죠.) 성골은 출생과 더불어 고정되는 신분은 아니었다. 성골이었던 진지왕의 아들 용춘은 진지왕의 폐위로 진골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김춘추도 진골이 되었다. 여왕 즉위 당시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다는 건 자신만의 강력한 왕권을 만들었던 진평왕이 자신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명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평왕은 왜 이렇게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신라 왕실 사람들의 불교적 이름 신라 국토를 석가의 국토인 불국토로 여겼던 신라 왕실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석가모니만큼 강력한 왕이 태어나길 바랐던 것이다. 진평왕은 비록 아들은 얻지 못했지만 그의 혈육이 석가모니와 같은 신성한 왕이 될 거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덕만공주가 왕이 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덕만공주는 전쟁의 시대에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는 여왕으로서 다른 왕들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진평왕 재위 53년, 귀족인 이천 칠숙과 아천 석품이 왕실을 향해 반란을 시도한다. 왕권을 향한 귀족의 반란, 이는 진평왕이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진평왕은 여왕 즉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데 단호했다. 칠숙과 석품의 목을 베고 구족을 멸했다. 이후로도 여왕의 지세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백제 침공이 잦아지면서 수세에 몰린 여왕은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당태종은 신라의 사신에게 여인이 나라를 다스리기 어려우니 신하를 보내주겠다며 대놓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전쟁에 직접 나가지 못했던 선덕여왕은 내부 귀족들의 반발과 대외적인 약점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여왕은 수십여개의 사찰과 대규모 불사로 국력을 모았다. 그리고 신라 최대 규모인 황룡사 9층목탑을 조성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높이가 82m에 달해 서라벌 어디에서도 보였다는 황룡사 9층목탑은 국토 수호에 대한 여왕의 굳은 의지를 온 천하에 알렸을 것이다. 황룡사 9층목탑은 각 층마다 신라가 극복해야 할 적들을 의미한다. 삼국유사에는 겨울철에 나타난 개구리떼를 본 여왕이 백제군 매복을 직감해 알천 장군을 여근곡으로 보냈다는 작전이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의 명을 받은 알천은 이곳에 잠복해 있던 백제군 수백명을 무찌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행간에서도 역시 여왕의 약점을 읽을 수 있다. 경주의 아주 가까운 지역까지 백제군이 매복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국방력과 군사 체계가 허물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왕은 폭넓게 인재를 등용해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견제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전통 귀족 알천과 멸망한 가야계 귀족 유신을, 외교적인 면에서는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를 등용한다. 특히 귀족사회의 비주류였던 김춘추와 김유신이 전쟁에서 거둔 놀라운 성과는 여왕에게 큰 버팀목이 된다. 하지만 곧 위기가 찾아왔다. 642년 백제의 젊은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이 대야성에서 벌어진 전투는 선덕여왕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당시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끝까지 싸우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해버린 것이다. 대야성은 신라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요충지로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땅이었다. 귀족들은 대야성 싸움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한 죽죽에게 벼슬을 내려 그의 공적을 높이 샀지만 거꾸로 그것은 선덕여왕에 대한 비난이기도 했다. 김춘추를 비롯한 여왕의 지지 세력은 크게 힘을 잃어갔다. 대야성 패배 이후 수세에 몰린 여왕은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비담은 여왕의 반대 세력. 상대등 비담은 선덕여왕 16년, 반란을 일으킨다. 그 명분은 여주불능선리. 즉, 여성 군주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647년 정월, 비담의 난은 상당한 규모로 진행됐다. 그만큼 여왕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강경해졌던 것이다. 왕실을 방어하던 명활산성은 왕실 반대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월성 신라 왕궁에 별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비담은 힘을 얻어갔다. 하지만 이를 반전시킨 것은 김유신. 연에 불을 붙여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떠오르는 모습을 연출하여 민심을 수습했던 것이다. 비담의 난으로 벼랑 끝까지 몰렸던 선덕여왕. 우연이었을까? 여왕은 비담이 난을 일으킨 다음 날 승하한다. 중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던 선덕여왕은 반란의 와중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칠숙의 난을 겪고 즉위한 후,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누구보다 공을 들였던 선덕여왕에게 최고 지위인 상대등의 반란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수많은 전쟁과 정치적 갈등, 자식을 낳지 못하는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군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내야 했던 여왕은 많은 사찰을 지으며 불교의 힘을 빌어 민심을 수습코자 했다. 포항의 천곡사. 이곳의 비석에는 선덕여왕이 천곡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평소 피부병이 심했던 선덕여왕이 천곡연의 물로 목욕을 하자 어떠한 방법으로도 낫지 않았던 병세가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덕여왕 때에 만들어진 첨성대. 첨성대를 이루고 있는 27단의 층은 달의 공전주기기와 같으면서 동시에 제27대 선덕왕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이는 수학적으로도 여왕의 천문대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늘에서 바라본 첨성대는 마치 우물과 같은 모양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나 그의 비인 알영은 각각 나정과 알영정에서 탄생했다. 신라의 우물이라는 것은 거룩한 인물이 탄생하는 곳이며, 다른 세계와 신라를 연결해 주는 통로의 구실을 한 것이다. 신라 왕궁인 월성을 바라보며 우물과 같은 모양을 가진 첨성대. 천상의 세계인 도리천에서 강력한 왕으로 환생하고 싶은 선덕여왕의 바람이 가득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 천명(天明) 삼국사기에는 태종무열왕에 대해 이름은 춘추요,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명공주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선덕여왕이 머리가 좋고 지도력있는 미인이었다고 하니 천명공주도 그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명공주는 진평왕의 삼촌으로 즉위한 지 4년만에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결혼한다. 왜 천명공주는 폐위된 왕의 아들과 결혼했을까? 아들이 없던 진평왕은 폐위된 전왕의 아들을 사위삼아 왕권을 물려주려 했을 지도 모른다. 사료가치에 있어 논란이 있지만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에 대한 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천명의 남편인 용춘 또는 용수가 화랑세기에서는 형제로 등장한다.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용수는 진평왕에 의해 거두어져 월성궁에서 공주들과 함께 자랐다. 천명공주는 동생 용춘을 흠모하게 되고,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자신은 용숙(龍叔-용 삼촌)이 좋다고 마음을 알리게 된다. 그런데 마야부인은 용춘을 의미했던 용숙을 용수로 오해하여 천명공주를 용춘의 형 용수와 결혼시킨다. 당시에도 장자를 선호하는 것이 왕실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순종적인 천명공주는 용수와 결혼하지만 용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어머니 마야부인의 적극적인 중재에 의해 용춘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어찌됐든 진평왕이 과거의 선례처럼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천명공주는 왕비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평왕은 사위보다는 자신의 딸에게 왕권을 이어줄 결심을 한다. 진평왕은 선덕을 왕위계승자로 선정하고 용수와 천명공주를 출궁시킨다. 천명공주는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남편을 왕위에 올릴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순순히 왕궁을 떠난다. 천명공주는 604년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춘추라고 짓는다. 신라왕실이 철저히 불교식으로 이름을 지어주던 것과는 달리, 공자의 저서 춘추(春秋)와 같은 유교식 이름이었다. 이 아이는 커서 선덕여왕을 보필하고 이후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에 즉위하게 된다. 춘추는 즉위 후 어머니인 천명공주에게 문정태후라는 시호를 올린다. 왕권 안정을 위해 폐위된 왕의 아들과 결혼한 천명공주는 죽어서 태후의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선화(善花) 백제 청년 서동과 신라 공주 선화의 만남 이야기는 천년을 넘어 현대인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백제의 무왕과 결혼해 왕비가 된다는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삼국유사 무왕편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서동요를 퍼뜨린 서동은 쫓겨난 선화공주를 만나 결혼한 후 훗날 백제 무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무왕은 연못에서 미륵삼존의 출현을 본 선화공주의 발언으로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를 창건한다. 서동이 말을 키우며 살았다고 전해지는 마룡지. 어린 시절 백제의 수도 부여가 아니라 이곳 익산 지역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통해 무왕은 왕실의 적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자인 서동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신라 선화공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을 것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지는 백제 무왕이 건설한 왕궁의 터로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고자 했던 무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곳이다.  신라를 떠나 백제의 왕비가 되었던 선화공주 역시 이곳을 기반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 이면에는 가혹한 역사적 현실이 이어진다. 서동은 무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신라를 거세게 공격한다. 고구려의 견제에 무왕의 공격이 더해져 신라는 사면초가의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된다. 무왕에겐 분열되어 있는 귀족사회를 통합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강력한 축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기 위해선 공공의 적이 필요했고, 신라만큼 적합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처가인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지배 세력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남편인 무왕과 아버지인 진평왕이 서로에게 창을 겨누는 상황에 처한 선화공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이 결혼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의 압박으로 수세에 몰리자 백제와 신라는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다. 이후 양국은 적대국이지만 전쟁 상황에 따라 종종 왕실간의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화공주와 무왕의 결혼도 국가간의 이익을 고려한 정략결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선화공주의 발언으로 창건된 미륵사지의 세 개의 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탑은 일제강점기 보수를 거치면서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석탑을 해체 복원하던 중 놀라운 비밀이 세상에 드러났다. 금으로 만든 사리호와 더불어 사리호를 모신 내력이 쓰인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됐다. 이 사리봉안기는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의 귀족 사택적덕녀라고 적고 있다. 기록에 확인되는 무왕의 왕비는 3~4명 정도로 거론된다. 선화공주의 존재 여부는 현재 학계에서도 큰 쟁점이 되고 있다. 서동요 속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그 실존여부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익산의 무왕릉 인근에 자그마한 능이 자리잡고 있다. 익산 주민들은 이 능을 선화공주의 능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넘는 사랑 이야기는 삼국전쟁 시기 평화를 갈구했던 백성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지도 모른다.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자매로 자랐지만 최초의 여왕으로, 통일제국을 이룬 왕의 어머니로, 또 적국의 왕비로 서로 각기 다른 운명을 걸었던 세 여인의 삶. 이들의 이야기는 고대 사회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보다 정치적 결정을 따라야만 했던 왕실 여인의 숙명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 덕만의 남편 음갈문왕이 누구인가,용수와 용춘은 동일인물인가 각기 다른 형제인가에 대해선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 역사스페셜에서는 음갈문왕을 삼촌 백반으로 보고 있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용춘으로 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음을 덧붙입니다.
9,500년 전 인류 역사 최초의 도시 차탈회위크
BC 7500~BC 5700년경 (수메르 문명보다 오래됨) 신석기 시대에 세워진 인류 최초의 도시 차탈회위크, 오늘날 터키에 위치해 있어! 이때 밀, 보리 농사와 양, 염소, 소를 가축으로 삼아 살았대 (농사와 가축 모두 인류 최초로 본대) 당시 이 유적 발굴로 고고학계는 충격이었다고 해.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도 훨씬 이전에 존재하는 문명이라서! 수메르 문명보다 오래되었고, 인구수는 약 6천 명으로 추정한대. 발굴 현장을 보면, 비슷한 진흙집들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집과 집 사이에 지나다닐만한 거리나 골목이 없대. 차탈회위크 주민들은 지붕 위로 걸어 다녔고, 지붕에 마련된 구멍에서 사다리를 내려 방으로 들어가는 가옥구조를 유지했을거래. 지붕이 집을 드나드는 통로이자 길이었던 셈이래. 이 가옥들은 평균 70년가량 수명을 유지했고, 다음 세대가 이 가옥들을 지반으로 삼아 그 위에 다시 가옥을 지었다고 해. 9,500년 전 당시 가옥 내부 복원도 가옥마다 창고와 부엌, 거실이 있고, 정교한 벽화와 부조, 조각으로 꾸며져 있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집마다 북쪽 벽에 뿔달린 황소의 머리를 걸고 흙벽을 채색해 장식했다는 점이래. 벽에는 별과 태양계, 사람과 여신, 사냥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어 황소머리와 함께 자연의 섭리를 숭상하는 초기 자연주의 신앙을 엿볼 수 있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지진 대처 체계가 잡힌 나라
놀랍게도 대지진이랑은 별 상관 없어보이는 포르투갈임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기도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판이 맞물리는 곳이라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임 각설하고 1755년 11월 1일 9시 40분경 포르투갈의 수도였던 리스본에 세계 역사를 뒤바꾼 지진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1755 리스본 대지진 지진의 진도만 8.5~9 정도로 추측되며  포르투갈은 물론 인접한 에스파냐, 지중해 건너 모로코까지 엄청난 피해를 줬고 멀리는 러시아와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까지도 지진이 감지되고 해일이 일었다고 함 지진이 발생한 11월 1일은 만성절로 모든 성인의 대축날이었기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성당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지진이 발생하면서 성당 건물이 무너져 내려 수많은 사람이 매몰되었고, 매몰된 상태에서 생존한 사람들도 곧 성당 내부를 밝힐때 쓰던 촛불로 인한 화재로 사망했음.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붕괴와 화재로부터 안전해보이는 탁 트인 해안가로 도망쳤지만 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바다로 쓸려가며 최소 3만명에서 많게는 10만명의 인구가 이 지진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함 당시 리스본의 인구가 20만명이었던걸 감안하면 못해도 4분의 1, 많게는 절반의 인구가 하루아침에 사망하게 되버린 것 때문에 목조 건물이 많았던 리스본은 그대로 불타고 쓸려나가서 도시의 85%가 완전히 없어져버렸고  석조건물의 일부만이 남았는데 사진의 카르모 수도원이 그 예 지붕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없어지고 가장 튼튼한 뼈대 일부만 남아 지진의 참혹함을 알려주고 있음 하지만 거대한 본진이 발생한 이후에도 거대한 여진이 몇번이고 쓰나미를 이끌고 들이닥쳤고 5일 밤낮으로 화재가 발생해  도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리스본은 폐허도 아닌 잿가루만 남은 잿더미가 되버림 근데 이 지진이 왜 포르투갈 뿐만 아닌 세계의 역사를 바꿨냐 말했듯이 만성절에 발생한 사고기 때문... 저땐 아직 기독교적 사상이 유럽 전체에 널리 퍼져있어서 하느님께서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굽어살핀다... 신앙심이 깊을 수록 행복한 삶을 산다가 가톨릭 국가의 기본적인 사상이었는데 유럽에서도 가장 신앙심이 깊다고 알려진 포르투갈에서도 가장 신앙심이 깊은 도시인 리스본에서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미사를 드리러 온 가톨릭 교도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 때문에 가톨릭 국가 뿐만 아니라 전 기독교 국가가 크게 충격을 받고 염세주의로 돌아서는 계기가 됨 재밌게도 언덕에 위치한 알파마 지구는 피해가 적었는데, 바위 언덕 위에 위치해있어 지진으로부터 안전했고 고지대였기 때문에 쓰나미로도 안전했을뿐더러 당시 알파마 지구는 집창촌과 빈민가였기에 높은 건물이 없어 매몰과 화재로부터도 안전했기 때문. 근데 역설적으로 가장 타락했다고 여겨지는 매춘부와 잡배들의 피해가 가장 적었기 때문에 교황도 이 사건에 대해서 뭐라 말하지 못했고, 리스본 대지진은 계몽주의가 폭발적으로 퍼지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됨 어쨌거나 재해는 발생헀고 이제 그 뒷수습을 해야하는데  다행히 왕이었던 주제 1세와 왕가, 귀족들은 공주 한명의 부탁으로 해돋이를 보러 리스본을 떠나있어 안전했는데, 지진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온 주제 1세의 앞에 펼쳐진건 불타는 잿더미가 된 리스본과 각종 범죄가 판치는 생지옥 그 자체였음 이 상황에서 주제 1세는 신의 한 수를 두었는데 가장 신뢰하는 신하이자 수상이었던 폼발 후작에게 리스본 사태에 대한 모든 전권을 넘긴 것 폼발 후작은 전권을 이양받음과 동시에 범죄를 즉결 처분하고 지방의 군인들을 불러들여 치안을 유지시켰고 대주교의 허가를 받아내 시신들을 수습하고 리스본 바깥으로 처리해 전염병의 창궐을 막아냄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귀족들은 리스본의 시민들에게 식사와 깨끗한 물, 잠자리를 제공해주어 동요를 진정시키고 살아남은 시민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리스본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도왔음 그리고 지진이 발생한지 한달이 지났을때 왕가는 리스본을 재건할때 여러가지 방안 중 도시의 폐허를 싹 치우고 완전히 새로 짓는 것으로 결정했는데 이것도 신의 한 수로 새로 짓는 리스본은 도로를 넓게 깔아서 화재가 크게 번지는 것을 막았고  4층 이상 건물 짓는것을 금지함과 동시에 가이올라라는 지진에 안전한 새로운 공법을 도입해 지진이 발생해도 무너지는것을 지연시켜 시민들이 빨리 대피할 수 있게끔 했음. 그리고 다음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지진에 대한 광범위한 설문조사도 실시했는데 이게 지진에 대한 세계 최초의 객관적 설문 조사였다고함 1700년대에 일어난 일이지만 굉장히 현대적으로 대책을 세워서 일을 처리했던 것 근데 안타까운건 당시 국왕이었던 주제 1세는 이 지진에 대한 공포심과 국민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폐쇄공포증에 걸려 아주다 언덕에 천막과 정자를 세우고 그 곳에서 평생을 살았다고함 지금 리스본에 있는 궁전이 재건된건 주제 1세의 딸이자 다음 국왕이었던 마리아 1세때의 일 주제 1세가 평생을 지냈던 천막이 있던 자리 위에 궁궐을 지어서 이름도 아주다 궁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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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이후, 베르샤유 조약은 독일을 짓누르고 있었으며, 독일인들은 절망에 허덕이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강력히 주장했던 '독일에게 굴욕을 줄 정도로 가혹할 정도의 채무'에 반대했으나 프랑스-벨기에는 채무 불이행을 근거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 서부 최대 공업지역 루르 지역을 침공하여 강제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루르 점령'(Ruhrbesetzung) 사건이다. 1923년 3월 독일 루르, 프랑스 군의 행렬.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지 않는 독일인들이 프랑스 장교로부터 폭행당하고 있다. 2년에 걸친 강제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 군대는 130여 명의 독일인을 총살했다. 군대를 제한당한 독일은 변변찮은 항의를 할 수가 없었으며, 2년의 점령기간 동안 9억 달러의 차익을 남긴 프랑스 군은 25년 철수했지만 이를 계기로 독일 민중 사이에선 베르사유 조약과 승전국에 대한 적개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 때, 히틀러와 나치가 등장했다. 나치 독일, 베르사유 조약의 무효를 외치며 '라인란트 재무장' 선포 대독일의 통일을 외치며 오스트리아, 체코 주데텐란트 지역 합병, 폴란드 침공 이를 본 영국-프랑스-벨기에 3국 연합군 결성 영국-프랑스-벨기에 대 독일 동맹,  나치 독일에 공식 선전포고 독일이 영국-프랑스 동맹과 정면으로 싸워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 아무리 독일이 발빠른 경제성장을 일궈내 막강한 공업능력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들, 상대는 로마 제국 이후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인류 역사상 최강국인 대영제국과, 그 대영제국을 상대로 수백년을 나란히 경쟁한 프랑스 식민제국이었다. (중략) ... ' 1939년 프랑스 식민지담당장관 폴 레노의 모병 연설과 1940년 독일 국방군 모병 포스터의 문구 1940년 5월 독일 군수참모 요한 폰 킬만제크 준장, 제국화학청으로부터 각성제 용도의 '페르비틴' (메스암페타민, 필로폰) 30,000정 인수완료. "마스강 도착까지 3일! 4일 째 마스강을 건넌다! 필요시, 본인은 귀관들에게 3일 정도는 취침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제19기갑군단 하인츠 구데리안 기갑대장- 제1기갑사단 프리드리히 키리히너 소장 및 전투병력 전원 제7기갑사단 에르빈 롬멜 소장 및 전투병력 전원 각성제 페르비틴 (메스암페타민) 복용.  프랑스전 개전, 독일군 진격 시작 진격하는 독일 제1기갑사단 "조국의 모든 전우들이 우리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 뚫어내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 우리가 길을 연다. 우리는 대 독일의 선봉사단이다. 죽더라도 달리다가 죽자!"  -1940년 5월 9일, 제 1기갑사단장 프리드리히 키르히너 소장-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선전포고에  프랑스 본토로 치고 들어가는 독일군 141개 사단의 진격속도.   벨기에군 50만 궤멸, 네덜란드군 15만 궤멸, 프랑스군 250만 궤멸, 수세에 몰린 영국의 30만 대륙원정군 독일 15기갑군단 제7기갑사단 에르빈 롬멜 소장, 프랑스 최정예 프랑스 제1기갑사단, 제4기갑사단 격파. 독일군 프랑스 마스강 도하 덩케르크에 포위된 영국 대륙원정군 30만 '독일의 형제들이여! 우리가 마침내 해냈다!' - 나치 독일 기관지 '검은 방패'의 당시 1면 헤드라인 -  대서양과 맞닿은 프랑스의 서쪽 끝, 브리타뉴를 점령한 독일군 프랑스 수도,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는 독일군 보병사단 휘날리는 나치깃발 파리 입성 선봉부대의 사열을 받으며 항복 서명장에 도착한 히틀러. 항복 서명은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것과 같이,  똑같은 기차칸에서 이루어졌다.  6주만에 프랑스를 정복한 독일군 귀국열차를 향한 환영인파  독일 장병들이 탑승한 열차가 역을 지나갈 때, 모든 일반 열차는 운행을 멈추었다. 독일 장병들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독일인들. 1940년 독일 베를린, 라디오에서 격앙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장병들이 도착했다는 긴급 보도를 송출했다.  히틀러와 귀환한 군인들을 보기위해 생업을 멈추고 몰려드는 독일인들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고 귀국한 히틀러 시가행진 인산인해를 이룬 베를린 프랑스에 대한 복수심으로, 부작용은 전부 씹고 필로폰 30,000정을 투약하고 개전선포하던 시절 독일 ... 출처 : 이종격투기
요즘 알아두면 좋은 미세먼지 해독음식 6가지.jpg
황사나 미세먼지는 인체에 닿아 피부, 눈에 병을 유발하기도 하고 호흡기를 통해 인체 세포 내로 침투하여 여러 장기에 염증 반응을 유발할 수 있음!! 특히 미세먼지는 폐암의 발생 위험도를 증가시키고 만성폐쇄성폐질환, 천식, 기관지염, 폐렴 발생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 함!!!! 1. 해조류 (다시마 김 미역 등) 해조류에는 '알긴산'이라는 성분이 많음! 알긴산은 체내에서 중금속, 농약, 발암물질 등 해로운 성분들을 흡착해 체외로 배출하는 역할을 함 2. 녹차 미세먼지나 황사를 타고 체내로 들어온 중금속은 우리 몸에 쌓이기만 하고 배출이 잘 안됨ㅠ 그런데 녹차에 많이 들어있는 탄닌이라는 성분은 이렇게 우리 몸속에 쌓여 있는 중금속들을 체외로 배출시키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함!! 3.브로콜리 브로콜리에는 '설포라페인'이라는 성분이 있음 이 성분은 우리 몸의 기도 속 항산화 효소를 증가시켜 활성산소를 낮추고, 미세먼지나 꽃가루, 배기가스 등으로 부터 지켜줌 4. 미나리 미나리도 미세먼지에 좋은 음식임 각종 비타민, 무기질, 식이섬유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는 알칼리성 채소로 혈액을 맑게 해주며, 체내에 쌓인 중금속을 몸 밖으로 배출해주는 효능이 탁월함 5. 시금치 시금치에는 피로회복을 돕는 철분이나 비타민 등이 굉장히 풍부함 특히나 풍부한 비타민a는 눈 건강에 아주 좋음 미세먼지 등이 심할 때 알게 모르게 손상되는 것이 바로 눈 비타민a는 눈건강에 아주 아주 좋을 뿐만아니라, 피부와 점막을 생성하는데도 아주 좋음! 6. 물 우리 몸의 70%가 물임 물은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주고 체내 노폐물을 배출하는데 최고 또 물을 마시게 되면 기관지가 촉촉하게 유지되어 해로운 물질을 흡착, 배출하는데 아주 좋음 다들 마스크도 꼭 하고 음식으로 건강 챙기자고!! 그럼 이만 초장에 브로콜리 찍어 먹으러 감 +추가 고기 없다고 실망들 말어~ 삼겹살이랑 미나리 최고의 궁합임~
50억 유혹을 뿌리치고 독일 수도원이 한국으로 반환한 화첩
겸재 정선 화첩 - 금강내산전도 한국 문화를 좋아했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는 1925년 한국에서 겸재 정선 화첩을 수집해 독일로 가져갔음 이후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소장하고 있었음 근데 이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우리나라의 성 베니딕도회 왜관 수도원과 형제 같은 우호 관계였는데.. 선지훈 신부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화첩이 발견된 후, 성 베니딕도회 왜관 소속의 선지훈 신부가 이 화첩을 한국으로 찾아오겠다고 마음 먹음 그리고 이 선지훈 신부에겐 절친한 친구인 예레미아스 슈뢰더 신부가 있었는데.. 왼쪽 예레미아스 슈뢰더 신부 예레미아스 슈뢰더 신부가 오틸리엔 수도원의 원장이 됨! 선지훈 신부는 때가 왔다 싶어서 원장을 설득하고 반환을 요청했음! 뉴욕 크리스티 경매회사 근데 이 타이밍에 화첩을 극찬하는 논문이 미국에서 발표되면서 화첩이 국제적으로 유명해짐..... 크리스티 경매회사는 50억원대는 나올 거 같으니 경매에 붙여보라고 몇 번이나 권유함 오틸리엔 수도원 하지만 수도원 장로회는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유산을 돈으로 거래할 수 없다' 라고 경매를 거부하고 만장일치로 한국 반환을 결정함! 겸재 정선 화첩 - 고산방학도 우리 꺼니까 당연히 돌려줘야하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님 약탈 문화재는 당연히 돌려줘야하지만, 이 화첩은 베버 신부가 합법적으로 수집한 것이기 때문에 수도원은 화첩을 돌려줘야할 의무가 없음 화첩을 돌려준 건 오틸리엔 수도원의 큰 결단임 선지훈 신부 선지훈 신부는 문화재 환수의 공을 인정 받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음 이 일은 바람직한 문화재 환수 사례로 손꼽힘 오틸리엔 수도원은 이후에도 100년 전 한국에서 채집한 희귀한 식물 표본, 양봉요지, 면피갑 등 한국 문화재를 꾸준히 한국으로 반환하고 있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