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d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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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가장 세종답지 못했던 순간

태종 PTSD ㄷㄷㄷㄷ
얼마나 태종 트라우마가 무서웠으면
태종 DNA의 각성이 두려워서 다 짜졌을까요 ㄷㄷ

킹갓제네럴세종대왕님 한글 무료배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쿠 무명의더쿠님 펌
hyund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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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세종대왕..항상 감사합니다!
그치...아빠가 그분인데 각성하면 조금 위험했을꺼야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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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농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 선조.jpg
선조 아들들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라고 쳐줄만한 아들은 둘이 있음. 신성군 - 워낙 어려서 요절해서 병크 터트리고 말고도 없음 선조가 물고 빨고 예뻐죽던 아들이라 전쟁 안터지고 명줄 길었으면 얘가 세자 했을지도 모름 광해군 -군왕자 시절에도 클린했고 세자로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애비의 땡조급 갈굼으로 인해 흑화 빼고는 하나같이 가관이었음 그 중 3대장이 1. 임해군 이진 공빈 김씨 소생, 선조 서장자. 광해군 형임에도 인성이 가관이라 그 누구도 세자 후보로 생각 안함, 얘라면 물고 빨고 했던 선조도 세자는 쫌하면서 신성군과 광해군 사이에서 저울질;;; 확인되는 범죄 행위들만 따져도 구타, 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은 기본에 공물 약탈, 기록에 의하면 임해군은 궁노를 풀어 토지를 멋대로 차지하고 궁노의 입을 막기위해 남의 지아비를 죽이고 그의 처를 궁노에게 짝지어줬다함. 심지어는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하기 까지 함. 이때 선조는 크게 질책했다고 하지만 지 아들새끼라고 싸고 돌아서 처벌은 안 받음 사람을 죽였는데 참고로 세종대왕때는 공주의 남편인 부마가 종을 때려죽였다가 귀양까지 갔음 임진왜란때도 동생 광해군이 피땀흘려 의병들 독려하고 전투할때, 기생끼고 놀고 갑질해대다가 참다참다 백성들이 얘랑 얘 이복 동생 세트로다가 왜한테 넘겨버림. 광해군은 이런 형을 극도로 증오했다고 함, 기록상 신하들이, 서인,동인 할것 없이 당파를 조월해서 쟤 죽이라고 상소를 올려댔는데 광해군이 상당히 미온적으고 동정적인 태도로 나왔음, 그러나 이런 광해군의 행동이 그냥 동복형제를 죽이기에는 쫌 그러니까 못이기는 척 하려고 했다는게 학계의 정설 (태종이 잘했던 짓 분위기 만들어 놓고 빼는 척 하다가 킬) 심지어 반정이후에도 영창대군 죽인 것만 문제삼고 얘 죽인건 아무도 문제 안 삼음. 2.정원군 인조 애비, 얘도 임해군이랑 하는 행동거지가 똑같았음. 후술할 순화군의 졸기에 정원군이나 임해군보다는 행동거지가 나았다고 서술했을 정도로 개 막장.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과거 시험에 처남을 합격시켜 사헌부에 탄핵당하거나 군적 회피자를 돈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거나 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정도고.. 선조 35년 9월 13일조를 보면 정원군의 가노들이 선조의 형수이자 덕흥대원군 봉사손이었던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하는 강력 범죄도 저질렀다고 함. 노복들과 창기(娼妓) 대여섯명이 하원군 집 앞을 지나다가 하원군의 노비와 싸우게 되었는데 하원군 부인이 나와서 말리려다가 도리어 집이 습격당하고 노비들한테 끌려가 감금된거임 하원군의 부인은 참고로 큰어머니뻘인데ㅋㅋ 유교의 나라에서 참ㅋㅋㅋ가지 가지 이새끼 아들이 인조임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원종으로 추존됨...... 콩콩 팥팥ㅋㅋㅋㅋ 3. 순화군 역대 최고의 사이코패스 사이코들이 늘상 그렇듯 동물을 잔혹히 죽이는 걸 꼬꼬마 시절부터 즐겼다는 기록이 있음. 포로 생활 1년만에 안그래도 개 막장이었던 인성이 완전 찌그러져버려서는 ㅋㅋㅋ 인성자체가 소멸되서 사람들 막 죽이고 댕김. 저 임해군이 야..나도 나지만 너 쫌 심하다..했을 정도. 어러서부터 쌩트집을 잡아서 자기한테 인사할때 허리를 너무 조금 굽혔다거나 덜 굽혔다거나 등 말도 안되는 진짜 말그래도 쌩트집 잡아서 잔혹하게 형장을 치는걸 즐겨했다고 함ㅋㅋㅋ 참고로 이때 대략 14~15살ㅋㅋㅋ중2병 개 지랄 맞게 왔음ㅋㅋ 참다 못한 신하들이 처벌을 주청해서 삭탈관직 몇년 받고 끝ㅋㅋ 그러다 10대 후반에는 이미 얘 손에 죽은 피해자만 양손에는 꼽지도 못할만큼ㅋㅋ 쌓이고 완벽한 사이코패스겸 연쇄살인마가 됨. 1년에 10명씩은 죽이고 다닌다는 소리가 돌았고. 백성들은 호환마마보다 순화군을 더 무서워했음. 그러거나 말거나 선조새끼는 어화둥둥 내 새끼 ^^ 처벌도 조또 안하고 사람만 계속 죽어감ㅋ 그러다가 법모이자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강간하는 일이 생김, 심지어 왕후의 관이 모셔진 곳 앞에서 벌어진 범죄임. 이는 아부지인 선조도 절대 쉴드 못쳐주는 극대죄였음. 효를 버린 폐륜적 행동이었기 때문임. 드디어 귀양길에 오르는데 귀양지 가서도 지 왕자라고 고개 쳐 들고 갑질하고 사람 죽이고 다님ㅋㅋㅋㅋ 그래서 다시 서울로 잡혀 올라오는데 다시 그지랄하고 다님 그래도 꿋꿋하게 자가 아들 부둥부둥하는 선조.. 그러다가 더는 지도 안되겠다 했던지 가택연금시켰는데 그러다 풍 맞아 뒤짐ㅋㅋㅋ 선조-정원군-인조는 조선왕조에서 다른 의미로 역대급 3대임 출처
조선 임금들의 사망 원인
초대: 태조 이성계 향년 72세 재위 기간: 6년 2개월 사인: 중풍 자식들이 내란 벌여서 스트레스 쌓이고 이로 인해 중풍에 걸렸는데 악화 되어 붕어 2대: 정종 이경 향년 62세 재위 기간: 2년 1개월 사인: 노환 꼭두각시 노릇하다 동생한테 왕위 주고 천수를 누리다 자연사함 3대: 태종 이방원 향년 54세 재위 기간: 17년 9개월 사인: 폐렴 사냥 갔다가 열이랑 혼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 급성 감염성 폐렴으로 붕어함 4대: 세종 이도 향년 52세 재위 기간: 31년 6개월 사인: 당뇨, 풍질, 부종, 임질 , 허리 디스크, 비뇨 장애 등등 복합적인 합병증 원래부터 온갖 병을 달고 있었음 시력 저하나 편식으로부터 온 비만, 하루종일 앉아서 책만 읽다 온 성인병 때문에 붕어함 5대: 문종 이향 향년 37세 재위 기간: 2년 사인: 등창 어머니 죽어서 3년상 치뤘는데 곧바로 세종이 죽어서 같은 짓을 또함 이로 인해 약해진 몸 등에 난 종기로 붕어함 세자 노릇 35년 왕 노릇 2년 6대: 단종 이홍위 향년 16세 제위 기간 3년 사인 독살 or 타살 왕위에 오를 때 주변의 어른이 없었던 탓에 종친을 제어 할 존재가 전무했음 곧바로 세조의 쿠데타로 이어지고 복위운동까지 실패하자 영월로 유배 보내져 독약을 받음 7대: 세조 이유 향년 50세 재위 기간: 13년 2개월 사인: 문둥병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이후 정신 질환과 불면증 갖가지 피부병에 걸림 죽을 때까지 시달리다가 붕어함 8대: 예종 이황 향년 19세 재위 기간: 1년 3개월 사인: 급사 급사하기 전날 ''이제 좀 종기 나아진 것 같다'' 이러다가 다음날 바로 급사함 9대: 성종 이혈 향년 37세 재위 기간: 25년 사인: 폐결핵, 합병증 조선 최고 성군이지만 세종과 유사하게 종기, 설사, 두통, 요통 등등의 질병괴 씨름하다 폐결핵과 합병증으로 붕어함 10대: 연산군 이융 향년 29세 재위 기간: 11년 사인: 역질, 화병 조선 최고 폭군이지만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되자 미쳐 날뛰며 신하들을 죽여댔음 이어서 전국에서 미녀들을 모아 합방만 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이후 강화도로 유배가서  아들의 시사 소식을 듣고 식음 전폐 하다가 죽음 11대: 중종 이역 향년 56세 재위 기간: 38년 사인: 노환 신하들에게 휘둘리다 노환으로 붕어함 12대: 인종 이호 향년 30세 재위 기간: 9개월 사인: 거식증, 합병증 즉위 부터 병약했고 문정왕후의 도를 넘은 압박에서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음 여기에 세자시절 중종이 앓아 눕자 5개월 동안 예법을 행하다 거식증까지 걸려 붕어함 13대: 명종 이호 향년 33세 재위 기간: 21년 사인: 울화병, 급사 문정왕후 치맛폭에서 20년간 살다가 문정왕후가 죽자 드디어 기 펴고 윤원형등 일파를 대거 숙청했으나 급사함 기록에는 울화병도 있다고 되어있음 (선조 추정 어진) 14대: 선조 이연 향년 55세 재위 기간: 40년 사인: 울화병, 자연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기존의 울화병이 악화되고 실어증까지 걸려서 허약해진 몸 이끌고 가다가 붕어함 15대: 광해군 이혼 향년 66세 재위 기간: 15년 사인: 노환 왕세자 시절엔 명군의 자질이 있었지만 막상 왕위에 오르고 보니 무리한 토목 공사로 민심을 잃고 적장자였던 이복 동생 죽이고 대비까지 감금 시키며 패륜을 함 이때 제주도로 유배 보내져 병자호란 터진 줄도 모르면서 살다가 사망 16대: 인조, 이종 향년 53세 재위 기간: 26년 사인: 화병, 노환 삼전도 굴욕으로 유명한데 실제로는 여러 미디어에 나오는 것처럼 삼배구고두래가 머리를 땅에 힘껏 빻는게 아니므로 피가 났다는 기록은 없음 이후 소현세자에게 열등감 느끼고 스트레스와 홧병에 시달리다 붕어함 17대: 효종 이호 향년 39세 재위 기간: 10년 사인: 어의의 실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두고 침을 놓자와 놓지 말자라는 의견이 대립하던 와중 어의인 신가귀가 침을 놓았는데 수전증 때문에 혈관을 잘못 찔러 과다 출혈로 붕어 18대: 현종 이현 향년 33세 재위 기간: 15년 사인: 등창 및 합병증 안질과 피부병이 고질병이었는데 재위 기간 내내 온천을 달고 살았다함 호전 되지도 않았고 폐혈증으로 붕어함 (숙종 추정 어진) 19대: 숙종 이순 향년 58세 재위 기간: 45년 사인: 심화증, 등창, 안질 등등 강한 왕권과 더불어 성격도 강해서 심화증 안증 포만증 노인병 등등에 걸리며 붕어함 20대: 경종 이문 향년 35세 재위 기간: 4년 사인: 급사 날 때부터 쇠약한 몸과 심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이후 영조가 올린 생감과 게장을 먹고 급사함 이때문에 영조는 선왕의 독살이라는 의혹에 시달리게 됨 21대: 영조 이금 향년: 81세 재위 기간: 51년 사인: 자연사 조선 왕조에서 가장 오래산 인물로 소식을 하고 잡곡밥을 즐겼으며 영약식을 했다고 함 1년에 먹은 인삼 수만해도 20개가 넘는다고 ㄷㄷ 22대: 정조 이산 향년 47세 재위 기간: 24년 사인: 등창, 홧병 실록에는 공식적으로 등창이라 적혀있지만 사망 사인이 독살이냐 등창이냐 왈가왈부가 굉장히 많음 (순조 익선관 추정 어진) 23대: 순조 이공 향년 44세 재위 기간: 34년 사인: 폐혈증, 변비 소화 기관이 불량이라 고생 꽤나 한 왕임 순조 34년에 두통과 변비가 찾아오자 그대로 붕어함 (헌종 추정 어진) 24대: 헌종 이환 향년 21세 재위 기간: 14년 사인: 폐결핵 역대 왕들 중에서 미남이라고 손꼽히는 왕으로 어려서부터 궁녀들과 합방으로 폐결핵을 얻었음 그렇게 붕어함 25대: 철종 이변 향년 32세 재위 기간: 14년 사인: 폐결핵 안동 김씨의 훼방질에 말려들어 술과 여자를 탐하다 폐결핵에 걸려 붕어함 26대: 고종 이희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이희 향년 67세 재위 기간: 43년 사인: 뇌일혈 고종의 붕어는 독살설이 가장 많이 제기됨 이완용의 명령으로 식혜를 전달했던 나인이 의문사 했고 그 식혜를 받아 마신 고종도 돌연 붕어하였음 당시 고종은 비밀리에 독립 운동을 위해 해외 망명을 준비 중이어서 독살설에 힘이 실림 아직까지도 정확한 경위는 불명임 27대: 순종 이척 2대 황제: 순종 이척 향년 52세 재위 기간: 3년 사인: 심장병 일제의 탄압 속에서 허수아비로 앉게된 군주인지라 무기력 속에서 살다 말년에 심장병을 얻고 붕어함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율곡이이가 23살 때 쓴 과거시험 답안지
과거에서 9번 장원급제하신 율곡이이 쓰앵님 23세에 응시한 별시에서 제출한 답안지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 논술아님? 나 논술 배웠는뎅ㅎㅎ 문(問) : 천도는 알기도 어렵고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한 번은 낮이 되고 한 번은 밤이 되는데, 더디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간혹 해와 달이 함께 나와서 서로는 겹쳐서 일식과 월식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오성(五星)은 씨[緯]가 되고 여러 별은 날[經]이 되는 것을 또한 상세하게 말할 수 있는가? 경성(景星 상서로운 별)은 어느 때에 나타나며 혜발(彗孛 상서롭지 못한 별 이름)이 나오는 것은 역시 어느 때 있는 것인가? 혹자가 말하기를, “만물의 정기(精氣)가 올라가서 여러 별이 된다.” 하는데, 이 말은 또한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바람은 어느 곳에서 일어나 어디로 들어가는가? 어떤 때에는 불어도 나무가 울리지 아니하는데, 어떤 때에는 나무를 꺾고 집을 허물어뜨리며, 순풍도 되고, 폭풍도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구름은 어디로부터 일어나며, 흩어져서 오색(五)이 되는 것은 무엇에 감응한 것이며, 간혹 연기 같고 연기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욱욱(郁郁)하고 분분(紛紛)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안개는 무슨 기운이 발한 것이며, 그것이 붉고 푸르게 되는 것은 무슨 징조인가? 누런 안개가 사방을 막기도 하고, 낮에 많은 안개가 끼어 어둡기도 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우레와 벼락은 누가 이를 주재하여 그 빛이 번쩍번쩍하고, 그 소리가 두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간혹 사람이나 물건이 벼락을 맞는 것은 또 무슨 이치인가? 서리는 풀을 죽이고 이슬은 만물을 적시는데, 서리가 되고 이슬이 되는 이유를 들어볼 수 있는가? 남월(南越)은 따뜻한 지방으로 6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은 혹독한 괴변인데,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말할 수 있는가? 비는 구름을 따라 내리는 것인데, 간혹 구름만 자욱하고 비가 오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농씨(神農氏) 때에는 비가 오기를 원하면 비가 오는 태평한 세상이라 36번의 비가 있었으니, 천도(天道)도 사사롭게 후한 것이 있는가? 혹은 군사를 일으킬 적에 비가 오고, 혹은 옥사(獄事)를 판결할 적에 비가 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초목의 꽃술은 다섯 잎으로 된 것이 많은데, 눈꽃[雪花]은 유독 여섯 잎으로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눈 위에 눕고 눈 속에 서는 것과, 손님을 영접하고 벗을 방문하는 일들도 다 말할 수 있는가? 우박[雹]은 서리도 아니고 눈도 아닌데, 무슨 기운이 모인 것인가? 어떤 것은 말의 머리만큼 크고, 어떤 것은 달걀만큼 커서, 사람과 새와 짐승들을 죽인 것은 어느 때에 있었는가? 천지가 만상(萬象)에게 각각 그 기운을 두어서 이루었는가, 아니면 한 기운이 유행하여 흩어져서 만상이 되었는가? 간혹 보통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하늘의 기운이 어그러진 때문인가, 사람의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을 것이며, 별이 제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며,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을 것이며,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않을 것이며, 눈이 너무 많이 내리지 아니하며, 우박이 재앙이 되지 아니하며, 풍해와 수해가 없이 각각 그 질서에 순응하여, 마침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육성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그 도는 어떤 것에서 말미암는가? 여러 선비들은 널리 경사(經史)에 통하여 능히 이런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각각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헥헥 여기까지가 문제임;;; 저기요;;;; 대(對) :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그 이(理)는 지극히 미묘하고, 그 상(象)은 지극히 드러났으니, 이 말을 아는 이라야 더불어 천도(天道)를 논할 것입니다. 이제 집사(執事) 선생께서 지극히 미묘하고, 지극히 현저한 도로써 문목(問目)을 내어 궁구하고 연구한[窮格] 논설을 듣고자 하니, 진실로 학문이 천(天)ㆍ인(人)을 다한 이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것을 논하겠습니까? 청컨대, 어리석은 저는 평상시에 선각자에게 들은 바로써 밝은 물음에 만의 한 가지라도 답하고자 합니다. 그윽이 이르건대, 만화(萬化)의 근본은 오직 음양뿐입니다. 이 氣가 동하면 양이 되고 정하면 음이 됩니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한 것은 기요, 동하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이(理)입니다. 대개 형상이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혹은 오행의 바른 기가 모인 것도 있고, 혹은 천지의 괴이한 기를 받은 것도 있습니다. 혹은 음양이 서로 부딪치는 데서 나기도 하고, 혹은 두 기[二氣]의 발산하는 데서 나기도 하기 때문에 해ㆍ달ㆍ별은 하늘에 걸렸고, 비ㆍ눈ㆍ서리ㆍ이슬은 땅으로 내립니다.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고,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는 것은 이 기(氣)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하늘에 걸리게 하고 땅에 내리게 하며,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게 하고,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게 하는 것은 이 이(理)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음ㆍ양이 진실로 조화하면 저 하늘에 걸린 것은 그 절도를 잃지 아니하고, 땅에 내리는 것은 다 때에 순응하여, 바람ㆍ구름ㆍ우레ㆍ번개가 다 화한 기운 속에 있을 것이니, 이는 이의 떳떳한 것입니다. 음ㆍ양이 조화하지 않으면 그 행하는 것이 절도를 잃고, 그 발산하는 것이 때를 잃어서, 바람ㆍ구름ㆍ우레ㆍ번개는 다 괴이한 기에서 나옵니다. 이는 이의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천ㆍ지의 마음이라,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ㆍ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ㆍ지의기도 순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의 떳떳하고, 변하는 것을 일체 천도에만 맡겨야 되겠습니까? 저는 이것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홍몽(鴻濛 어둡고 아득한 모양)이 처음으로 갈라져서 해와 달이 교대로 밝으니 해는 태양의 정(精)이 되고, 달은 태음의 정이 됩니다. 양정(陽精)은 빠르게 운행하기 때문에 하루에 하늘을 한 바퀴 돌고, 음정(陰精)은 더디게 운행하기 때문에 하루에 다 돌지 못합니다. 양이 속하고 음이 더딘 것은 기요, 음이 더디게 되는 것과 양이 빠르게 되는 것은 이입니다. 저는 누가 그렇게 하는지를 알지 못하겠으나,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해는 임금의 상징이요. 달은 신하의 상징입니다. 그 운행하는 궤도를 같이 하고, 그 모이는 데 절도를 같이 하기 때문에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이 되고, 해가 달을 가리면 월식이 되는 것입니다. 저 달이 희미한 것은 오히려 변괴가 되지 아니하나, 이 해가 희미한 것은 음이 성하고 양이 미약한 까닭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깔보고 신하가 임금을 거역하는 형상입니다. 하물며 두 해가 한꺼번에 나오거나 두 달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은 비상한 괴변이니, 다 괴이한 기로 인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일찍이 옛 일을 탐구해 보니, 재앙과 변괴는 덕을 닦는 치세(治世)에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박식(薄蝕)의 변은 다 말세의 쇠한 정치에서 나왔으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합하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늘이 푸른 것은 기가 쌓여 있는 것이요, 바른 색은 아닙니다. 만약 별이 찬란하게 기강이 되지 않는다면 천기(天機)의 운행은 아마도 구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 별의 반짝반짝하고 가물가물하는 것은 각각 자리와 차례가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모두 원기(元氣)의 운행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뭇별들은 하늘을 따라 운행하고, 스스로 운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날[經]이라 하고, 오성(五星)은 때를 따라 각각 나타나고, 하늘을 따라 행하지 않기 때문에 씨[緯]라고 합니다. 하나는 정한 차례가 있고 하나는 일정한 절도가 없습니다. 그 대개를 말하면, 하늘은 날[經]이 되고 오성은 씨[緯]가 됩니다. 그 상세한 것을 말하자면, 한 장의 종이에다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상서로운 별도 상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변괴로운 별도 상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경성(景星)은 반드시 밝은 세상에 나타나고, 혜발(彗孛)은 반드시 쇠한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니, 우순(虞舜)의 학문이 밝은 세상에는 경성이 나타났고, 춘추 전국 시대에는 혜발이 나타났습니다. 우순같이 다스린 시대가 한 번 뿐이 아니며, 춘추와 같이 어지러운 시대도 한 번만이 아닌데, 어찌 일일이 들어 진술하겠습니까? 만물의 정기(精氣)가 위로 올라가 별이 된다고 하는 따위는 저는 삼가 의혹을 가집니다. 별이 하늘에 있는 것은 오행의 정(精)이요, 자연의 기입니다. 저는 어떤 물(物)의 정기가 어떤 별이 되었다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팔준(八駿)이 방성(房星)의 정기가 되었고, 부열(傅說)이 죽어서 별이 된 것과 같은 따위는 산과 물이 있는 큰 땅이 그림자를 푸른 하늘에 보낸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는 선비가 믿을 바가 아닙니다. 별의 기운이 된 것은 기가 허하여 엉긴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음기가 맺히지 못하여 간혹 떨어져서 돌이 되기도 하고, 언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제가 소자(邵子)에게 들었으나, 물의 정기가 별이 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대개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것은 다 기입니다. 음기가 엉기고 모여서, 밖에 있는 양기가 들어가지 못하면 돌고 돌아서 바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물의 기운은 비록 말하기를, “간방(艮方)에서 나와서 곤방(坤方)으로 들어간다.”고 하나, 그 음의 모이는 것이 정(定)한 곳이 없으므로 양의 흩어지는 것도 방향이 없는 것입니다. 큰 땅덩이가 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찌 한 방위에서만 얽매일 것이겠습니까? 동쪽에서 일어나는 것이 만물을 기르는 바람이지만, 그렇다고 동쪽에서 처음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서쪽에서 일어나는 것이 숙살(肅殺)하는 바람이지만, 그렇다고 서쪽에서 처음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가시나무에 새 집을 짓고 빈 구멍에 바람이 불지만, 그렇다고 빈 구멍에서 처음 시작된다고 할 것입니까? 정자의 말에, “올해의 우레는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난다.” 하였으니, 저로서는 바람이 흔들흔들하고 살랑살랑하는 것은 기가 부딪치면 일어나고, 기가 쉬면 그치는 것으로, 당초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치세(治世)는 음ㆍ양의 기가 펴져서 맺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흩어지더라도 반드시 화하여 불어도 나뭇가지가 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도(世道)가 이미 쇠하면 음ㆍ양의 기운이 서리어 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흩어질 적에 반드시 격동하여 나무를 꺾고 집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순풍[少女]은 화하게 흩어지는 것이요, 폭풍[颶母]은 격동해서 흩어지는 것입니다. 성왕(成王)이 한 번 생각을 잘못하자 큰 바람이 벼를 쓰러뜨렸고, 주공이 수년(數年) 동안 덕화(德化)를 펴자 바다에는 풍파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기운이 그렇게 된 것은 역시 인간의 일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만약 산천의 기운이 올라가서 구름이 되는 것이라면, 좋고 나쁜 징조를 그를 통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왕(先王)은 영대(靈臺)를 설치하고, 기상을 살펴서 길ㆍ흉의 징조를 고찰하였습니다. 대개 좋고 나쁜 징조는 일어나는 그 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전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희면 반드시 흩어지는 백성이 있고, 구름이 푸르면 반드시 곡식을 해하는 벌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검은 구름이 어찌 수재(水災)의 징조가 되지 않으며, 붉은 구름이 어찌 전쟁의 징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누런 구름만이 풍년이 들 상서로운 징조이니, 이는 곧 기운이 먼저 나타난 것입니다. 연기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것이 분분하게 빛나고, 맑게 흩어져 유독 지극히 화한 기운을 얻어서, 성왕(聖王)의 상서로운 것이 되는 것은, 오직 경사로운 구름[慶雲]입니다. 진실로 백성의 재물을 살지게 하고, 노여움을 풀어 주는 덕이 없으면 이것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어찌 수(水)ㆍ토(土)의 맑고 가벼운 기운이 한갓 백의 청구(白衣靑狗)가 되는 데 비할 것이겠습니까? 안개는 음기(陰氣)가 새지 못하여 김[蒸]이 막혀서[鬱] 된 것입니다. 물체의 음기가 모인 것도 능히 안개를 낼 수 있으니, 대개 산천의 나쁜 기운입니다. 그 붉은 것은 병상(兵象)이 되고, 푸른 것은 재얼(災孽)이 되는 것은 다 음이 성한 징조입니다. 역적 왕망(王莽)이 한(漢)나라를 참위(僭位)했을 때에는 누런 안개가 사방에 쌓였고, 천보(天寶)의 난 때에는 큰 안개가 낮에 끼어 어두웠으며, 한 고조(漢高祖)가 백등(白登)에서 포위되었을 때나, 문산(文山 문천상(文天祥))이 시시(柴市)에서 죽을 때에는 다 흙먼지가 일어났습니다. 혹시 신하가 임금을 반역한다거나 혹시 오랑캐가 중국을 침략한다거나 하면, 이런 것은 다 가히 그 비유로써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기가 발산한 뒤에 음기가 양기를 싸서, 양기가 나오지 못하면, 떨치고 쳐서 우레와 번개가 됩니다. 우레는 반드시 봄과 여름에 일어나니, 이는 천지의 노한 기운입니다. 빛이 번쩍이는 것은 양기가 발하여 번개가 된 것이요, 소리가 두려운 것은 두 기[二氣]가 부닥쳐서 우레가 된 것입니다. 예전 선비들이 말하기를, “우레와 번개는 음ㆍ양의 정기(正氣)라 벌레를 놀라게 하기도 하고, 간사한 사람을 치기도 한다.” 하였습니다. 사람도 진실로 사기(邪氣)가 모인 것이 있고, 물(物)도 역시 사기가 붙어 있으니, 정기가 사기를 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입니다. 공자께서 심한 천둥이 칠 때면 반드시 얼굴빛이 변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물며 마땅히 벼락이 쳐야 할 곳에 친 경우이겠습니까? 상(商)의 무을(武乙)과 노(魯)의 이백(夷伯)의 사당에 벼락이 친 것은, 이런 이치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반드시 어떤 주체가 그 벼락 치는 권한[柄]을 잡고 주관하는 것이다.” 한다면, 이는 천착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또 양기가 펴질 때에 이슬로써 만물을 적시는 것은 구름의 젖은 기운이요, 음기가 혹독할 때에 서리로써 풀을 죽이는 것은, 이슬이 맺힌 것입니다. 《시경》에, “갈대는 푸르고 푸르른데, 흰 이슬은 서리가 된다.”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입니다. 혹시 음기가 지극히 성하면 서리가 제 시기에 내리지 아니합니다. 위주(僞周)가 조정에 임하자, 음ㆍ양의 위치가 바뀌어 남월(南越)은 지극히 따뜻한 지방인데도 6월에 서리가 내렸으니, 생각건대, 이는 필시 온 세상이 온통 몹쓸 음기(陰氣) 속에 갇혀 있어서인 듯합니다. 무씨(武氏)의 일은 말할 수 있지만 말하려면 길어집니다. 비와 이슬은 다 구름에서 나오는 것인데, 젖은 기운이 성한 것은 비가 되고, 젖은 기운이 적은 것은 이슬이 됩니다. 음양이 서로 합하면 이에 비가 내리는데, 간혹 구름만이 자욱하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아래위가 서로 합하지 못해서입니다. 《홍범전(洪範傳)》에 이르기를, “황제가 지극하지 못하면 그 벌(罰)은 항상 음(陰)하다.”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입니다. 또 양이 지극히 성하면 가물고, 음이 성하면 장마가 지는데, 반드시 음양이 조화하여야 비로소 비 오거나 맑은 날씨가 때를 맞춥니다. 대개 신농씨 같은 성인의 순박하고 밝은 시대에 있어서, 맑은 날씨를 바라면 맑고, 비를 바라면 비가 온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이치입니다. 성왕(聖王)이 백성을 다스릴 때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5일에 한 번씩 바람이 불고, 10일에 한 번씩 비가 내린 것도 역시 그 떳떳한 이치입니다. 이같은 덕이 있으면 반드시 이 같은 보응이 있는 것이니, 어찌 천도(天道)가 사사로이 후하게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대개 억울한 기운은 한재(旱災)를 부르기 때문에 한 여자가 억울함을 품어도 오히려 흉년을 이룹니다.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긴 것이 족히 천하의 억울한 기운을 해소하기에 충분하였고, 안진경(顔眞卿)이 옥사를 판결한 것이 한 지방의 억울한 기운을 해소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알맞게 비가 내린 것이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태평한 세상에는 본래 한 사내나 한 아녀자조차도 그 은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으니, 어찌 비와 바람이 순조롭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추울 때에는 하늘과 땅이 비록 닫히고 막혔으나, 음양이 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비가 엉겨서 눈이 되는데, 이는 대개 음기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초목의 꽃은 양의 기운을 받았기 때문에 꽃술이 다섯 잎이 난 것이 많은데, 5는 양의 수(數)입니다. 눈꽃[雪花]은 음의 기운을 받았기 때문에 유독 여섯 잎이 되었으니, 6은 음의 수입니다. 이 역시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원안(袁安)이 문을 닫고 눈 위에 누운 것과 구산(龜山)이 뜰에 선 것과 왕원보(王元寶)의 난한회(暖寒會)와 왕자유(王子猷)의 산음(山陰)의 흥(興)과 같은 것은, 혹은 고요한 것을 지키는 낙이 있고, 혹은 도(道) 있는 이를 찾는 정성이 있어서이며, 혹은 호사하던지 혹은 방종한 데서 나온 것으로서, 다 천도와 관계되지 않는 것이니 어찌 오늘 말할 거리가 되겠습니까? 또 우박은 어그러진 기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음기가 양기를 협박하기 때문에 그 발할 때는 물을 해칩니다. 옛 일을 상고하면 우박이 큰 것은 말 머리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여, 사람을 상하게 하고 짐승을 죽였던 일이, 혹은 전란이 심한 세상에 일어나기도 하였고, 혹은 화를 일으킨 임금을 경고하기 위하여 일어나기도 하였으니, 그것이 역대의 경계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반드시 여러 번 진술하지 않더라도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아, 한 기운이 운행하고 조화하여 흩어져서 만 가지 형상이 되는 것이니, 나누어 말하면 천지와 만 가지 형상이 각각 한 기운이나, 합하여 말하면 천지와 만 가지 형상이 모두 같은 한 기[一氣]입니다. 오행의 바른 기운이 모인 것은 해와 달과 별이요, 천지의 어그러진 기운을 받는 것은 혼무ㆍ흙비, 안개ㆍ우박이 됩니다. 천둥과 번개는 두 기[二氣]가 서로 부닥치는 데서 생기고, 바람ㆍ구름ㆍ비ㆍ이슬은 두 기가 서로 합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그 구분은 비록 다르나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집사(執事)께서 편(篇)의 끝에서 또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육성되는 것은 그 도가 무엇에 말미암은 것인가?” 하였는데, 어리석은 저는 이 말에 깊은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듣건대, “임금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사방을 바르게 하여야 하니, 사방이 바르면 천지의 기운도 바르다.” 하였고, 또 듣건대, “마음이 화하면 몸이 화하고, 몸이 화하면 기운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면 천지의 환한 기운이 응한다.” 하였으니, 천지의 기운이 이미 바르면 해와 달이 어찌 서로 침해하며 별이 어찌 그 자리를 잃는 일이 있겠습니까? 천지의 기운이 이미 화하면 천둥ㆍ번개ㆍ벼락이 어찌 그 위력을 내며, 바람ㆍ구름ㆍ서리ㆍ눈이 어찌 그 때를 잃으며, 흙비가 내리는 어그러진 기운이 어찌 그 재앙을 만들겠습니까? 하늘은 비ㆍ볕ㆍ더운 것ㆍ추운 것과 바람으로써 만물을 생성하고, 임금은 엄숙함과 다스림과 슬기와 계획, 신성함[聖]으로써, 위로 천도에 응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제때에 비를 내리는 것은 엄숙함에 응한 것이며, 제때에 볕이 나는 것은 다스림에 응한 것이며, 제때에 더운 것은 슬기에 응한 것이며, 제때에 추운 것은 계획에 응한 것이며, 제때에 바람 부는 것은 신성함에 응한 것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육성하는 것은 어찌 임금 한 사람이 덕(德)을 닦는 데 달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사(子思)가 이르기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 능히 화육(化育)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양양(洋洋 넓고 큰 모양)히 만물을 발육하여 높이 하늘에 닿았다.” 하였으며, 정자가 이르기를,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요령은 다만 홀로 삼가는 데 있다.” 하였습니다. 아, 지금 우리 동방의 동물과 식물이 모두 자연의 화육(化育) 속에 고무(鼓舞)되는 것이 어찌 성상의 홀로 삼가는 데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집사께서 미천한 자의 어리석은 말을 임금께 상달하신다면, 가난한 선비는 움막 속에서도 유한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대답합니다. 참고로 난 읽진 않음^^.... 출처
덕만, 천명, 선화 신라시대 세 여자 이야기
한반도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둘러싼 전쟁이 치열했던 시대. 어린 시절 즉위해서 오랫동안 신라를 다스렸던 진평왕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왕위를 이을 왕자, 즉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끝내 아들을 얻진 못했지만, 그에게는 역사에 기록된 세 딸이 있었다. 바로 덕만, 천명, 선화가 그들이다. 덕만(德曼) 진평왕의 큰 딸이자 신라의 27대왕인 선덕여왕. 그녀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여성이 단 한 번도 왕위에 오른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평왕의 큰 딸인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632년 1월, 선덕여왕은 국가 중대사를 정하는 화백회의를 통해 왕위에 오른다.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말은 성스러운 조상을 가진 황실여성이라는 뜻으로 성골, 즉 성스러운 조상을 가지고 있는 혈통으로서 황제가 될 수 있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선덕여왕의 어린 시절 뛰어난 예지력을 모란꽃 일화로 전한다. 진평왕이 당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덕만에게 보여주자 덕만은 벌과 나비가 함께 있지 않으니 모란꽃의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이 직접 확인해보자 덕만의 말과 같았다는 이야기는 총명했던 공주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 모란은 종류가 굉장히 많으며 그에 따라 향기의 강도도 제각기 다르다. 또 향기가 없는 꽃에 곤충이 들지 않는다는 추측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선덕여왕의 모란도 일화는 여왕에게 남편이 없음을 조롱하기 위해 향기없는 꽃그림을 보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허나 당시 당태종이 신라에 이를 선물한 것은 왕의 부귀를 축원하는 의미로 보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그림과 함께 씨앗을 함께 보낸 것은 조롱이나 비하의 의미가 아닌 중국에서 모란꽃을 선물하는 풍속에 따랐음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이는 최초 여왕이 남성들과는 다른 특별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든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4대 임금 탈해이사금과 13대 미추 이사금과 같이 신라에는 왕의 사위가 왕위를 잇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진평왕은 왜 사위가 아닌 딸에게 왕위를 잇게 했을까? 삼국유사 왕력편은 성골남진, 즉 성골에 더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라는 왕족과 육두품의 신분 구별에 따라 사회생활 전반이 규제되었다. 왕족은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성골과 그렇지 않은 진골로 나뉘는데 그 기준은 명확치 않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54년 동안 재위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고, 자신의 가족만을 성골로 한정지었다.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은 진평왕의 동생 백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신의 삼촌과 혼인한 것이다.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불륜이 아닌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관행이었다. (다른 기록에서는 음갈문왕을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라고 하기도 한답니다. 하여간 다들 친족 관계인건 변함없죠.) 성골은 출생과 더불어 고정되는 신분은 아니었다. 성골이었던 진지왕의 아들 용춘은 진지왕의 폐위로 진골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김춘추도 진골이 되었다. 여왕 즉위 당시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다는 건 자신만의 강력한 왕권을 만들었던 진평왕이 자신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명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평왕은 왜 이렇게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신라 왕실 사람들의 불교적 이름 신라 국토를 석가의 국토인 불국토로 여겼던 신라 왕실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석가모니만큼 강력한 왕이 태어나길 바랐던 것이다. 진평왕은 비록 아들은 얻지 못했지만 그의 혈육이 석가모니와 같은 신성한 왕이 될 거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덕만공주가 왕이 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덕만공주는 전쟁의 시대에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는 여왕으로서 다른 왕들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진평왕 재위 53년, 귀족인 이천 칠숙과 아천 석품이 왕실을 향해 반란을 시도한다. 왕권을 향한 귀족의 반란, 이는 진평왕이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진평왕은 여왕 즉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데 단호했다. 칠숙과 석품의 목을 베고 구족을 멸했다. 이후로도 여왕의 지세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백제 침공이 잦아지면서 수세에 몰린 여왕은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당태종은 신라의 사신에게 여인이 나라를 다스리기 어려우니 신하를 보내주겠다며 대놓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전쟁에 직접 나가지 못했던 선덕여왕은 내부 귀족들의 반발과 대외적인 약점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여왕은 수십여개의 사찰과 대규모 불사로 국력을 모았다. 그리고 신라 최대 규모인 황룡사 9층목탑을 조성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높이가 82m에 달해 서라벌 어디에서도 보였다는 황룡사 9층목탑은 국토 수호에 대한 여왕의 굳은 의지를 온 천하에 알렸을 것이다. 황룡사 9층목탑은 각 층마다 신라가 극복해야 할 적들을 의미한다. 삼국유사에는 겨울철에 나타난 개구리떼를 본 여왕이 백제군 매복을 직감해 알천 장군을 여근곡으로 보냈다는 작전이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의 명을 받은 알천은 이곳에 잠복해 있던 백제군 수백명을 무찌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행간에서도 역시 여왕의 약점을 읽을 수 있다. 경주의 아주 가까운 지역까지 백제군이 매복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국방력과 군사 체계가 허물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왕은 폭넓게 인재를 등용해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견제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전통 귀족 알천과 멸망한 가야계 귀족 유신을, 외교적인 면에서는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를 등용한다. 특히 귀족사회의 비주류였던 김춘추와 김유신이 전쟁에서 거둔 놀라운 성과는 여왕에게 큰 버팀목이 된다. 하지만 곧 위기가 찾아왔다. 642년 백제의 젊은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이 대야성에서 벌어진 전투는 선덕여왕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당시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끝까지 싸우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해버린 것이다. 대야성은 신라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요충지로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땅이었다. 귀족들은 대야성 싸움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한 죽죽에게 벼슬을 내려 그의 공적을 높이 샀지만 거꾸로 그것은 선덕여왕에 대한 비난이기도 했다. 김춘추를 비롯한 여왕의 지지 세력은 크게 힘을 잃어갔다. 대야성 패배 이후 수세에 몰린 여왕은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비담은 여왕의 반대 세력. 상대등 비담은 선덕여왕 16년, 반란을 일으킨다. 그 명분은 여주불능선리. 즉, 여성 군주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647년 정월, 비담의 난은 상당한 규모로 진행됐다. 그만큼 여왕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강경해졌던 것이다. 왕실을 방어하던 명활산성은 왕실 반대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월성 신라 왕궁에 별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비담은 힘을 얻어갔다. 하지만 이를 반전시킨 것은 김유신. 연에 불을 붙여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떠오르는 모습을 연출하여 민심을 수습했던 것이다. 비담의 난으로 벼랑 끝까지 몰렸던 선덕여왕. 우연이었을까? 여왕은 비담이 난을 일으킨 다음 날 승하한다. 중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던 선덕여왕은 반란의 와중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칠숙의 난을 겪고 즉위한 후,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누구보다 공을 들였던 선덕여왕에게 최고 지위인 상대등의 반란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수많은 전쟁과 정치적 갈등, 자식을 낳지 못하는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군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내야 했던 여왕은 많은 사찰을 지으며 불교의 힘을 빌어 민심을 수습코자 했다. 포항의 천곡사. 이곳의 비석에는 선덕여왕이 천곡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평소 피부병이 심했던 선덕여왕이 천곡연의 물로 목욕을 하자 어떠한 방법으로도 낫지 않았던 병세가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덕여왕 때에 만들어진 첨성대. 첨성대를 이루고 있는 27단의 층은 달의 공전주기기와 같으면서 동시에 제27대 선덕왕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이는 수학적으로도 여왕의 천문대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늘에서 바라본 첨성대는 마치 우물과 같은 모양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나 그의 비인 알영은 각각 나정과 알영정에서 탄생했다. 신라의 우물이라는 것은 거룩한 인물이 탄생하는 곳이며, 다른 세계와 신라를 연결해 주는 통로의 구실을 한 것이다. 신라 왕궁인 월성을 바라보며 우물과 같은 모양을 가진 첨성대. 천상의 세계인 도리천에서 강력한 왕으로 환생하고 싶은 선덕여왕의 바람이 가득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 천명(天明) 삼국사기에는 태종무열왕에 대해 이름은 춘추요,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명공주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선덕여왕이 머리가 좋고 지도력있는 미인이었다고 하니 천명공주도 그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명공주는 진평왕의 삼촌으로 즉위한 지 4년만에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결혼한다. 왜 천명공주는 폐위된 왕의 아들과 결혼했을까? 아들이 없던 진평왕은 폐위된 전왕의 아들을 사위삼아 왕권을 물려주려 했을 지도 모른다. 사료가치에 있어 논란이 있지만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에 대한 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천명의 남편인 용춘 또는 용수가 화랑세기에서는 형제로 등장한다.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용수는 진평왕에 의해 거두어져 월성궁에서 공주들과 함께 자랐다. 천명공주는 동생 용춘을 흠모하게 되고,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자신은 용숙(龍叔-용 삼촌)이 좋다고 마음을 알리게 된다. 그런데 마야부인은 용춘을 의미했던 용숙을 용수로 오해하여 천명공주를 용춘의 형 용수와 결혼시킨다. 당시에도 장자를 선호하는 것이 왕실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순종적인 천명공주는 용수와 결혼하지만 용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어머니 마야부인의 적극적인 중재에 의해 용춘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어찌됐든 진평왕이 과거의 선례처럼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천명공주는 왕비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평왕은 사위보다는 자신의 딸에게 왕권을 이어줄 결심을 한다. 진평왕은 선덕을 왕위계승자로 선정하고 용수와 천명공주를 출궁시킨다. 천명공주는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남편을 왕위에 올릴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순순히 왕궁을 떠난다. 천명공주는 604년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춘추라고 짓는다. 신라왕실이 철저히 불교식으로 이름을 지어주던 것과는 달리, 공자의 저서 춘추(春秋)와 같은 유교식 이름이었다. 이 아이는 커서 선덕여왕을 보필하고 이후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에 즉위하게 된다. 춘추는 즉위 후 어머니인 천명공주에게 문정태후라는 시호를 올린다. 왕권 안정을 위해 폐위된 왕의 아들과 결혼한 천명공주는 죽어서 태후의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선화(善花) 백제 청년 서동과 신라 공주 선화의 만남 이야기는 천년을 넘어 현대인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백제의 무왕과 결혼해 왕비가 된다는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삼국유사 무왕편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서동요를 퍼뜨린 서동은 쫓겨난 선화공주를 만나 결혼한 후 훗날 백제 무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무왕은 연못에서 미륵삼존의 출현을 본 선화공주의 발언으로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를 창건한다. 서동이 말을 키우며 살았다고 전해지는 마룡지. 어린 시절 백제의 수도 부여가 아니라 이곳 익산 지역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통해 무왕은 왕실의 적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자인 서동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신라 선화공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을 것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지는 백제 무왕이 건설한 왕궁의 터로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고자 했던 무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곳이다.  신라를 떠나 백제의 왕비가 되었던 선화공주 역시 이곳을 기반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 이면에는 가혹한 역사적 현실이 이어진다. 서동은 무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신라를 거세게 공격한다. 고구려의 견제에 무왕의 공격이 더해져 신라는 사면초가의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된다. 무왕에겐 분열되어 있는 귀족사회를 통합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강력한 축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기 위해선 공공의 적이 필요했고, 신라만큼 적합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처가인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지배 세력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남편인 무왕과 아버지인 진평왕이 서로에게 창을 겨누는 상황에 처한 선화공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이 결혼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의 압박으로 수세에 몰리자 백제와 신라는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다. 이후 양국은 적대국이지만 전쟁 상황에 따라 종종 왕실간의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화공주와 무왕의 결혼도 국가간의 이익을 고려한 정략결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선화공주의 발언으로 창건된 미륵사지의 세 개의 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탑은 일제강점기 보수를 거치면서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석탑을 해체 복원하던 중 놀라운 비밀이 세상에 드러났다. 금으로 만든 사리호와 더불어 사리호를 모신 내력이 쓰인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됐다. 이 사리봉안기는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의 귀족 사택적덕녀라고 적고 있다. 기록에 확인되는 무왕의 왕비는 3~4명 정도로 거론된다. 선화공주의 존재 여부는 현재 학계에서도 큰 쟁점이 되고 있다. 서동요 속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그 실존여부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익산의 무왕릉 인근에 자그마한 능이 자리잡고 있다. 익산 주민들은 이 능을 선화공주의 능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넘는 사랑 이야기는 삼국전쟁 시기 평화를 갈구했던 백성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지도 모른다.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자매로 자랐지만 최초의 여왕으로, 통일제국을 이룬 왕의 어머니로, 또 적국의 왕비로 서로 각기 다른 운명을 걸었던 세 여인의 삶. 이들의 이야기는 고대 사회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보다 정치적 결정을 따라야만 했던 왕실 여인의 숙명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 덕만의 남편 음갈문왕이 누구인가,용수와 용춘은 동일인물인가 각기 다른 형제인가에 대해선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 역사스페셜에서는 음갈문왕을 삼촌 백반으로 보고 있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용춘으로 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음을 덧붙입니다.
터키경제 완전히 조져놓고 호화궁전 지은 에르도안 대통령
독재 20년 동안 터키는 경제가 망해버리고 사람들이 너무 살기 힘들어졌는데 기존의 대통령궁을 총리관저(현 부통령관저)로 바꿔버리고 새로운 대통령궁을 지음 이게 아주 초호화여서 논란이 되었음 이 대통령궁은 방만 천개가 넘는 초대형 건물로 백악관보다 수십배 크고 베르사유 궁전보다도 큰 세계 최대 크기의 대통령관저임 건물 내부터 화려한 아방궁 그 자체인데 화장실 벽지는 한롤당 300만원짜리 실크 벽지이고 카펫을 까는데만 100억원 이상을 씀 터키산 자재만을 이용해 짓겠다고 입털었지만 독일에선 지붕을 인도에선 대리석을 사오고 정원은 이탈리아와 덴마크에서 사온 나무들로 꾸밈 총 건설비는 7천억원을 넘는데 이것도 터키의 저렴한 인건비+저렴한 부지 가격 덕분에 겨우(?) 7천억원 정도였다고 봐야 함 왜냐하면 이 부지는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터키 정부에 기증한 농용림임 터키의 건국자이자 국부로 존경받는 초대 대통령이 좋은 의도로 나라에 기부했던 녹지에 지가 살 아방궁 지은거 에르도안의 '공식' 연봉은 한화로 2억도 안되는 수준이지만 실제로는 매년 600억원 이상을 인마이포켓하는 것으로 추정 미국 포브스지에서 아예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지도자로 선정되었음 영부인 에민 에르도안 역시 부창부수로 사치스러운 인물 1kg에 수백만원하는 홍차를 황금 찻잔에 따라 마시는 걸로 유명 또 외국 순방이나 여행을 갈 때마다 고급 쇼핑몰과 백화점을 통째로 전세내 쇼핑하는 걸로 악명높음 만약 외국 영부인이 방한해서 종로나 강남 압구정 백화점들 전세내서 쇼핑한답시고 그일대 전체가 몇시간 동안 차 한대 못다니게 통제한다고 생각해보면 저 악명이 이해될거 터키는 이전에 의원내각제 총리국가였는데 에르도안이 2003년부터 총리해먹고 헌법 바꿔서 대통령이 실권가지게 만든 다음에 2014년부터 다시 대통령으로 20년째 해쳐먹고있음 ㄷㄷㄷ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