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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다구리 한과 모음

유과 (油果)
''한과'' 하면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나는 것

매우 소복소복하고 바삭한 식감을 가지고 있다

조청이 들어가서인지 치아에 굉장히 잘 붙는다



유밀과 (油蜜果)
반죽에 꿀을 섞거나 바른 다음

기름에 튀겨내 만든다

꾸덕진 식감이 일품인 과자인데

투게더 같은 바닐라 아이스크림류에

곁들여 먹으면 이게 정말 끝장난다



강정 (羌飣)
밀가루에 꿀과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썰어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 만든다

중국 한나라의 한구(寒具) 라는 과자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군대에서도 이게 나온다는데

맛은 분필 내지는 흙 맛이 난다고 한다

필자는 아직 미필이라

아는 사람은 댓글로 알려줘라



다식 (茶食)
계피나 녹차, 콩 등의 재료로 가루를 내고

그 가루에 꿀을 섞어 반죽하여

틀에 찍어내 만든다

이름에 걸맞게 차와 함께 먹는 과자인데

저걸 그냥 먹은 필자의 옛 기억에 따르면

외관은 작아도 ㅈㄴ 달았다

꼭 차와 함께 먹자




숙실과 (熟實果)
과일을 익혀 만든 과자로, 이름에 걸맞게

대추와 밤을 꿀에 졸여서 만든다

통째로 졸이면 초(炒)

다지거나 으깨면 란(卵) 이라 한다고

열매가 많으면서도 실하게 열리는

대추와 밤을 먹으면서

다산을 기원하기도 했다고






정과 (正果)
과일이나 연근, 생강 등의 여러 약초를

설탕이나 꿀에 졸여서 만든 과자

위 사진처럼 오늘날에는

낑깡으로 만든 정과가 가장 보편적인 듯 하다

굉장히 쫠깃거리는 식감이 일품이다




과편 (果片)
과실편 (果實片) 이라고도 하는데

과일 즙에 녹말 가루를 섞거나

꿀을 넣어 굳혀 만든다

쫄깃쫄깃 할 것 같지만

의외로 묵 같은 식감이 난다고 한다




(飴, 糖)
고두밥을 엿기름 물에 삭힌 뒤

자루에 넣어 짜낸 즙을

고아서 굳혀 만든다

바리에이션이 굉장히 많은데

졸이기 전의 즙은 식혜

굳기 전의 상태는 물엿

조금 졸이면 조청

바로 굳히면 갱엿이라 한다

딱딱하지만 고소하고 달달하니

여러분도 맛있는 엿이나 먹는게 어떻겠는가?




당 (糖)
그냥 사탕이랑 똑같다

각설탕, 옥춘사탕 같은걸 생각하면 된다

제사상이나 불교 쪽 관련해서 많이 쓰인다고 한다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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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과를 아이스크림이랑 먹으면 넘 달텐데.. 난 너무 달면 입 안이 얼얼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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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장 간지나는 대학
그것은 바로 홋카이도대학 1876년 설립된 명문국립대학으로 5번째 제국대학으로 편입 (참고로 6번째는 한국의 경성제국대학, 서울대학교임)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그 이외에 독일인 베냐민 리스트가 2021년 홋카이도 대학에 재직중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무려 1926년에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뻔 했으나 요하네스 피비게르의 손을 들어주었고 사실 요하네스 피비게르의 연구는 틀린 것으로 밝혀졌으나 이미 준 것을 뺏을 수는 없었기에 유야무야되었다.. 당시 노벨위원회에서 동양인에게 노벨상은 아직 이르다고 주장하였음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는 1949년의 교토대학 유카와히데키가 최초. 표어는 무려 Boys, be ambitious !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 초대 교두(敎頭), 윌리엄 S. 클라크 일본 내에서도 간지나는 캠퍼스 + 대학표어로 뽑힘 세계적인 치즈와 우유의 생산지인 홋카이도 개척의 중심이 된 대학답게 농학부가 강하다 번외) 일본 최고의 대학인 도쿄대학의 표어는 Discover Excellence. 志 あ る 卓 越 。 志(こころざし)뜻 있는 卓越(たくえつ) 탁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정교수를 배출한 해외대학임 2-5위는 모두 미국대학인데 1위가 일본대학인 도쿄대학 18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4명의 프리츠커상 수상자 (하버드 대학에 이은 전세계 2위) 2명의 필즈상 수상자와 18명의 일본 총리를 배출함 일본의 두번째 명문대학인 교토대학의 슬로건은 Freedom of academic culture. 自由の学風 (자유의 학풍)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1949년)을 배출함 그 외에도 일본에서 간지난다고 평가받는 대학은 일본 내 최고의 사립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学 로고도 멋있고 일본 내에서 부잣집 도련님 + 인싸가 다니는 이미지에 슬로건도 Calamvs Gladio Fortio 펜은 칼보다 강하다 ㄷㄷ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
성수동 문츠
2월은 매주 기념일이라 🤩 신나 신나요~ ㅋㅋㅋㅋㅋ 요즘 핫플 성수동 남편 마지막 회사가 성수동이었는데 그때와 지금은 너무나 달라졌어요 ㅎ 토욜에 날씨도 춥지 않아 사람이 더 많은것 같았어요 디올부티끄 바로 앞에 문츠 매장이 있습니다 디올 앞에 사람이 버글버글 하서;; ㅎㅎㅎ 잘찾을수 있습니다 캐치테이블에서 미리 예약했구여 워크인으로 오실경우 1층 키오스크에서 예약 걸어 놓으면 됩니다 워크인은 대기가 엄청나여 ㅜㅜ 유튜브 실버버튼? 이 있네요 박찬호 박세리 님의 사인도 있어요 👍 1층에 진열되있던 바베큐 그릴들과 문츠 소스들 고기들 .... 고기가 안보이신다구여?? ㅋㅋㅋㅋ 저 안에 다 고기입니다 사진을 금동이가 찍어서 높이가 이래요 🤣🤣🤣🤣🤣 시그니처 비프립 플래터를 예약안하면 못먹는대서 캐치테이블로 예약하면서 같이 예약해두었어요 포트벨라 버섯, 감자튀김(금동이 오더) 꿀꺽라거, 보스턴라거 요로케 주문했습니다 보스턴라거 를 주문했는데 사무엘아담스가 나오더라구여;;; 사무엘아담스가 보스턴라거인줄 첨알았어여..... 그동안 맥주 핫마셨어여 😱 보통 맥주이름을 사무엘아담스라고 부르지 않나여??? ㅋㅋㅋ 남편이 주문했던 꿀꺽라거 깔끔하고 맛남 하우스 와인도 괜찮다던데 와인도 마셔볼껄 금동이가 찍은 장난감... 요즘 나 이거 좋아 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어놔요 이런 장난감 사진이 몇백개씩 찍혀있답니다 😅😅😅😅😅 냠냠 비프립플래터 2-3인분이라고 했던거 같은데.... 양이 좀 모자라서 추가주문한 포르게타 훈연한 삼겹살에 메이플 시럽... 메이플시럽 ?? 읭?? 했는데 묘하게 잘어울려요 ! 고기가 생각보다 짜지 않습니다 입맛에따라서는 조금 싱겁다고 느끼실수도 있을듯해요 따로 씨겨자 소스가 나오는데 소스를 먹지 않는 금동이는 케찹찍어달라고 하더라구여 저도 고기만 먹을때는 약간 간이 안맞는다고 생각이들었어요 비프립 고기가 굉장히 부드럽습니다 (이가 없어도 드실수있을거같음) 금동이도 몇조각 해치울만큼 부드러워요 포르게타는 역시 부드럽고 약간의 탄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코울슬로, 할라피뇨, 피클, 겨자소스들이 맛있어요! 공산품 할라피뇨 절임 특유의 시큼함이 없이 깔끔한맛이에요 직접 만드시나?? 와인콜키지 2만원 주차 가능이라고 표시되는데 주차장이 따로 없어서 근처 유료주차장 이용해야하고 주차비 지원은 하지 않습니다 추가주문하거 싶은데 고기가 남는다묜 포장이 가능하냐고 물어보고서는 (포장 가능하다고 합니다) 싹싹 다 먹은 금동이네 😆😆 배불리 먹고 나왔더니 디올앞에 사진찍는 사람들이 ..... 더 늘었네요 금동이가 자동차 멋있네 라고 하며 찍은 사진들..... 디올은 모르지만 자동차는 좋은가봅니다 ㅎㅎ 성수에 사람이 워낙 많아 커피숍까지 줄서기 싫어서 택시타고 집근처 커피숍에 내리려고 했는데 금동이가 택시에서 잠이들고 말았어요 ㅎㅎㅎ 어쩔수없이 집으로 직행 아빠 생일 축하 노래 불러주겠다며 (케이크 먹겠다며 ) 벼르고 있었는데 잠이 들었어요 🤣
초딩시절 한번은 갖고싶었던 터치 핸드폰들
옛날 초딩시절 2g폰 신기방기한게 많이 나왔을때 한번은 갖고싶었던 핸드폰들ㅋㅋㅋㅋ 1.쿠키폰 닌텐도 게임에있는 쿠킹마마가 들어있어서 인기많았던걸로 기억 쿠킹마마 꿀잼 ㅜㅜㅜㅜ 2.슬림판다 뭔가 판다가 귀엽기도하고 원더걸스가 광고해서 인기많았던 폰 3.부비부비&몽글몽글 하늘나라로간 상근이ㅜㅜ가 광고하던폰 ㅠㅠ 엄청 귀여운느낌 st 팍팍드는 폰 4.초콜릿폰 소시가 광고하던 폰 이거 노래도있었는데? 기억이안낰ㅋㅋ 용화&서현 우결할때까지만해도 서현이들고 다녔던거같은데....★ 언제적이 된거야ㅠㅠ 5.방수폰 이거 기억나는사람들있으려낰ㅋㅋㅋㅋㅋ 이거진짜 나올때 혁명이었는데 금방 사라졌다능☆ 어릴때 서울나들이갔다가 전시해논거 본거같은데 진짜 물속에넣어두고 전시 ㄷㄷ함 ㅋㅋㅋㅋ 이거 좀 사고싶었음ㅋㅋㅋ 6.연아햅틱 ★이게 내 초딩시절 워너비 TOP★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이게처음나올때 진짜 비싸게 팔렸는데 친구한명이 나오자마자 사서 부러움의 대상이 됬었는데 연느 광고도 진짜 이뻤어ㅜㅜㅜㅜㅜ 7. 붐붐폰 붐붐거리는 특별함을 내세워,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했던... 되게 비쌌음 8. 갤럭시 S 찐으로 스마트폰 시대로 넘어간 스맡폰계의 시조새 갤S
1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
(2008년 재보궐선거) 승자독식제 선거법은 단 1표 차이라 할지라도 이긴 사람은 당선, 진 사람은 그냥 아무것도 없이 낙선이라는 잔인한 결과를 부른다 강원 고성군수 1표 차 당선도 이렇게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과연 대통령 선거에서 1표 차이로 지면 그 여파가 어떨까? (1876년 미국 정·부통령 선거 공화당 포스터, 왼쪽 대통령 후보 러더퍼드 B. 헤이스 오른쪽 부통령 후보 윌리엄 A. 휠러) 그런데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 사실 똑똑한 싱붕이들은 알고 있듯이 미국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이기 때문에 한 표 차이로 떨어졌다는 것이 50,000,001표 vs 49,999,999표로 떨어졌다는 뜻은 아니지만, 370명에 달하는 선거인단 중 단 1명을 덜 확보해서 대통령이 되지 못 한 것도 충분히 충격적인 결과긴 하다 (1938년 발행된 우표, 왼쪽부터 에이브러햄 링컨,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1854년 반노예제 휘그당원들을 중심으로 창당된 공화당은 1860년 대통령 선거부터 1872년 대통령 선거까지 대통령 선거 4연승(1860 링컨, 1864 링컨-존슨, 1868 그랜트, 1872 그랜트)을 기록했다 남북전쟁의 영웅인 그랜트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청렴했으며 카리스마와 인품으로 전후 복구를 이끈 대통령이었으나 정치력과 인맥이 부족했다 (선거에서 자기를 찍을 수 있는 줄 몰라서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야당 후보를 찍기도 했다) 그래서 친척과 지인들을 측근으로 기용했는데, 순진한 그랜트 대통령의 신뢰를 등에 업은 측근들이  온갖 비리를 일으키며 그랜트 행정부는 부패로 얼룩졌다 (새뮤얼 J. 틸던) 민주당은 그재앙 심판 여론에 힘입어 남북전쟁 이후 16년 만에 하원 탈환에 성공했고, 부패 킬러로 소문난 뉴욕 주지사 새뮤얼 J. 틸던을 압도적인 지지로 1876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며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을 드높였다. 민주당의 아버지인 앤드루 잭슨 이후 가장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할 정도 한편 공화당에서는 그랜트 대통령의 개인적 인기가 여전했기 때문에 그랜트 대통령의 3선 도전에 대한 여론이 있었으나 연방 하원에서 3선 출마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조지 워싱턴 대통령 이래 전례없는 3선 출마 반대에 대한 여론에 밀려 그랜트 대통령은 출마를 포기한다 그리하여 前 연방 하원 의장 제임스 G. 블레인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7차에 걸친 투표 끝에 청렴하기로 유명한 오하이오 주지사 러더퍼드 B. 헤이스가 역전승을 거두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러더퍼드 B. 헤이스) 남북전쟁 반역자당의 이미지를 안고도 4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선전하고,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은 이번에야말로 정권 탈환을 노리고 있었고, 1876년 대통령 선거 본선 투표 결과 428만 표 vs 403만 표로 전체 득표수에서 앞서나가게 된다 이로 인해 민주당의 새뮤얼 틸던은 선거인단 전체 369명 중 184명을 확보하며  단 1명만 더 확보하면 과반으로 승리를 확정지을 수 있었고 공화당의 러더퍼드 헤이스는 166명을 확보하여 18명을 뒤처지고 있었지만 아직 개표가 끝나지 않은 사우스캐롤라이나(7명), 플로리다(4명), 루이지애나(8명)의 선거인단 총원이 19명이어서 만약 이 3개 주에서 모두 이기면 1표 차이로 역전승을 할 수 있었고 반대로 3개 주 중 한 곳에서라도 지면 패배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재개표, 검표를 진행해도 이 3개 주의 결과가 계속 오차범위 안에서 다르게 나오고 취임식이 다가오는데도 결론이 나지 않자 양당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논리를 펼치며 승리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헤이스가 승리한 오리건에서는 오리건 공화당이 지명한 선거인단 중 한 명이 공무원(우체국장)으로 밝혀져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야 했는데, 교체 권한을 가진 오리건 주지사는 민주당 소속이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논란도 있었다 결국 선거특위가 설치되어 문제 해결에 나섰고 민주당, 공화당 각 7명씩 위원을 맡고  위원장에 무소속 데이비드 데이비스 연방 대법관이 취임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데이비스) 데이비드 데이비스 대법관은 "데이비스 본인도 그가 어떤 후보를 선호하는지 알지 못 한다"고 할 정도로 중립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위원장에 위촉될 수 있었는데, 민주당은 데이비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를 일리노이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민주당의 상원의원직을 받아들이는 대신 특위에서 빠지기로 했고, 공석이 된 위원장 자리는 남은 대법관이 모두 공화당원인데다 상원 다수당이 공화당이었기 때문에 공화당원인 조셉 P. 브래들리가 들어가게 되며 특위는 공화당 8명, 민주당 7명이 된다 (1876년 대통령 선거 결과) 선거특위는 당연하게도 사우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루이지애나에서 공화당의 승리를 선언했고, 문제의 오리건 주 선거인단 1명은 오리건 주지사가 아닌 오리건 공화당 위원장이 교체하게 하며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러더퍼드 B. 헤이스가 185 vs 184로 대역전승을 거두게 되었다 당연히 민주당을 지지한 남부는 폭발하여 폭동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자 양당은 '남부 군정 종료, 민주당원에게 일정한 수의 각료 배정, 남부인의 연방 공직 임명 허용,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의 재선 출마 포기'를 내용으로 하는 타협(1877년 타협)을 통해 선거특위의 결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모든 일이 끝난 건 대통령 취임식 이틀 전이었다 사실 민주당 입장에서 다 이긴 선거를 협잡질로 빼앗긴 느낌일 순 있겠으나, 공화당도 할 말이 있는 것이 새뮤얼 틸던의 높은 득표율은 남부에서 백인들이흑인들의 투표를 폭력을 통해 방해한 결과(흑인들은 그랜트 대통령 시기 투표권을 얻었다)이며 흑인들이 정당하게 표를 행사했을 경우 공화당의 러더퍼드 헤이스가 득표수, 선거인단 양면에서 논란없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기 때문 (그로버 클리블랜드) 결국 민주당은 이번에도 정권교체에 실패했으며,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은 약속대로 재선에 출마하지 않았으나 4년 후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공화당의 제임스 A. 가필드가 당선된다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은 임기 중 총격을 당해 투병 끝에 사망하고, 체스터 A. 아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민주당은 체스터 아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는 4년 뒤에야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당선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하는데 민주당의 마지막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이 퇴임한 1861년 이후 무려 24년 만에 선거로 선출된 민주당 대통령이 나온 것이었다 지구촌갤러리 여하님 펌
바닥 쿠션 & 먹부림
아이있는 집은 언제나 층간 소음 .... 걱정이죠 어른들도 발망치 소리 만만찮다는데 애들은 머 금방 말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 이전에 금동이 걷기 시작 할때부터 썼던 매트가 이제 너무 상해서 이번에 바꾸기로 했어요 그 매트는 울아부지가 라디오에 시를 써보내 월장원인가를 해서 받으신 상품이었어요 👍 매트도 굉장히 비싸서 ㅜㅜ 두꺼운게 한장에 20만원 정도 하다군여 ;; 여러가지 알아봤는데 롤매트, 시공 .... 다 돈이 문제였어요 😭😭😭 여러가지 매트를 알아본 후 TPU매트로 결정했어요 리퍼브로 주문했는데 그래도 거실만 까는데 50만원대 😵‍💫 금동이 미끄럼틀 당근으로 팔고 .... 금동이가 삼일정도 미끄럼틀 자리보며 울었어요 ㅜㅜ 미끄럼틀 이제 빠빠이 라고 설명해줄때는 괜찮다고 하더니 막상 없어지니 울더라구여 ㅜㅜ 짜투리공간은 이전에 쓰던 매트조각 잘라서;; 좀 더 넓어진 .... 계산을 잘못해서 몇장 더 시켰어요 한두장씩 더 주문할수 있다는게 장점 리퍼브 제품이라 이정도 찍힘은 있는데 대체적으로 깔끔했어요 다 깔구 힘들어서 고기먹기 ㅋㅋㅋㅋㅋㅋㅋ 족발 맛남 다음날 올림픽공원~ 연도 날리고 비누방울도 불고 비누방울이 바람타고 날면 근처 아이들이 와~ 하고 잡으러 뛰어가는게 너무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어요 😍 다 놀고 가면서 신당동 아이러브떡볶이 닭발포장~ 닭발만 포장하고 햄버거 먹을려구 떡볶이는 안샀는데 남편이 짜장떡볶이 간만에 먹자해서 ㅋㅋㅋㅋㅋㅋ 결국 짜장떡볶이는 다른 가게에서 주문 🤣🤣🤣 주말이 이렇게 갑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음식 문화
1. 고대 그리스는  초기에는 포도나 무화과, 대추야자 등의 건조과일,견과류를 먹었다. 과일은 그대로 먹게 되면 수분이 많아 필요한 칼로리를 얻기 전에 배탈이 나기 때문에 건조해서 먹었다 중기는 곡물을 입수하면서 콩이나 깨, 대맥을 빻아 만든 죽을 먹었다. 밀죽은 그리스인들에게 사랑받아 후대에도 계속 먹게 되었다 기원전 5세기 이후는 각종 밀로 더욱더 맛있는 빵이 만들어 졌다.  약 70종류 이상이 확인되고 있디 고기는 어패류를 즐겨먹었고, 짐승고기는 방목을 할 여유가 없어  가축이 있어도 소는 노동력,양은 털을 깍는데 사용하기 때문에 거의 먹지 않았다. 짐승고기는 의식 때 제물로서 죽인 동물을 먹는 것이 한계였던 것 같다. 그리스는 땅덩이가 좁은 데다가 땅도 척박하여 주식이 되는 밀류는 수입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교역이 발전하였고 기원전 1000년전 부터는 올리브나 와인을 수출하게 된다. 덕분에 풍요로워져서 고기를 먹게 되는 등 생활습관이 바뀌게 되었다. 2. 수학자,철학자로 유명한 피타고라스는 채식주의를 제창했디. 하루에 두끼만 먹었고, 그 메뉴는 검은 빵, 야채, 과일 벌꿀 등이었다. 그가 좋아했던 건 양상추였다. 피타고라스는 고기 뿐만 아니라 콩도 절대 먹지 말라는 규율을 세웠다.  이유는 콩 알레르기, 콩으로 인한 사망, 콩을 숫자를 세는데 썼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피타고라스가 인간과 콩의 근본이 같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콩을 진흙 속에 묻어 몇주 동안 두었다가 회수하는 등  과학 실험도 수차례  시행했다고 한다.  그에게 콩은 인간의 태아와 닮았다.  3. 스파르타 남성들의 독특한 풍습 가운데 하나가 공동 식사다.  경제적 여건이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 15명이 한 조를 이루어 식사를 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식사조가 아니라 함께 싸우는 전투조이기도 했다.  스파르타 남성들은 20세에 아고게를 졸업하면 30세까지 군대에 복무해야 했다.  30세가 지나면 가정을 이룰 권리가 주어지지만  그래도 저녁식사는 꼭 부대에서 해야 했다.  스파르타 남성들은 50세까지 전투에 참가해야 했다. 스파르타인들은 평소에는 형편없는 빵과  담즙이 들어간 쓴 검은 수프를 먹으며 가혹한 환경에서 단련했다. 스파르타의 왕일지라도 일반 시민들과 똑같은 식사를 했다. 워낙에 맛이 없기로 유명했는데 어느 아테네인이 먹어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테네의 돼지가 먹는 것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스파르타인이 왜 이리 용감한 줄 알겠다! 이런 걸 먹고 사느니 죽겠다고 싸우지!" 평소에는 맛없는 식사들만 먹다가 전쟁에 나가게 되면 오히려 살아있는 산양과 닭 등을 끌고 가서 매일 직접 도살해 신선한 고기를 공급해 줬다고 한다.  곧 전장에 나갈 사람의 사기와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한 특식이라고 볼 수 있다. 전시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전쟁을 기다렸으며, 평화는 불쾌하다는 자기암시를 걸었다. 4. 고대 로마인들은 생선으로 만든 피쉬소스인 가룸(Garum)을 음식에 조미료로 사용했다. 소금에 절인 생선을 태양 아래에서 부패시키면 내장에 포함된 소화효소가 생선의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한다. 암모니아 등의 악취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주정이나 향신료 등을 더한다. 커다란 항아리에 허브, 생선, 소금을 켜켜이 쌓아 8개월 정도 숙성시켜 마지막에 걸러낸 액체가 가름이 되었다. 만드는 중에 지독한 악취가 났기 때문에 시내외곽 지역에서 만들었다. 로마의 음식 문화에 익숙치 않았던 이방인들이 먹기에는 다소 생경한 음식이었던 듯 하다. 예컨대 968년,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오토 1세의 사절로서  동로마 제국에 파견되었던 크레모나 주교 리우트프란트는 니키포로스 2세로부터 만찬을 대접받았는데,  음식에서 풍기는 가룸의 비린내를 견디고 품위를 지키느라 몹시 힘들어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결국 리우트프란트는 모든 음식마다 잔뜩 뿌린  가룸의 비린내가 너무 역겨워서 음식을 거의 못 먹고 굶었다고 한다 5. 로마인들은 아침을 매우 가볍게 먹었다. 아침을 푸짐하게 먹는 사람들은 교양이 없다고 여겼다. 먹기 전에 같은 음식을 제단에 올려 아침의 기도를 올렸다. 내용물은 빵과 치즈, 그리고 과일 약간이었다. 우유나 와인에 빵을 적셔 먹기도 했다. 집에서 먹지 않는 사람들은 식당에서 먹거나 노점에서 사먹었다 서민들이라면 직장에 가거나 '파트로누스'의 집에가면  아침식사가 든 바구니를 받았다. '파트로누스'는 평민을 보호하는 귀족을 말한다. 많은 백성들은 가족이나 노예를 부양하고 있었지만, 그 시민들도 또한 고용자인 귀족에게 부양되는 게 로마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중 한 예가 이러한 아침의 선물이었다. 아이들은 새벽부터 학교 수업이 있었다. 그들은 등교 도중에 거리에서 파는 과자를 사서 먹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벌꿀이나 나무열매, 치즈가 들어간 롤빵과 파이가 잘 팔렸다. 아이들은 점심 때 집에 가서 식사를 한 뒤 다시 학교에 돌아갔다. 정해진 것은 아니었고 아침이나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였다, 6. 로마인의 식사횟수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3회 정도였다. 그중 하루에 한 번은 '케나(정찬)'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였다. 케나는 처음에는 점심식사였지만  점심때는 더위로 식욕이 없어지기 때문에 저녁에 하게 되었다. 케나 이외의 식사는 가벼운 식사나 간식을 의미했다. 7. 로마의 시민들은 오후에 '시에스타'라고 하여 낮잠을 났고 일어나면 공중목욕탕에 갔다. 공중목욕탕에는 욕탕이 있는 게 당연하지만  그 외에 마사지나 게임, 운동설비 등이 마련돼 있었다. 현대의 찜질방 같은 것으로, 독서나 대화로 시간을 때우는 사람도 있었다. 공중목욕탕에는 비스켓,기름에 튀긴 스낵,야채 마리내, 과일이나 말린 과일, 고기완자나 생선 파테, 소시지 등을 팔았디. 시민들은 목욕탕에서 부자들과 알게 되어 케나에 초대받는 걸 기대했다. 공짜로 귀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받을 때까지 목욕탕에 드나드는 사람도 있었다. 8. 로마의 부유층은 전용의 긴 의자 '트리크리니움'에 누워서  식사를 하는 특이한 습관이 있었다, '트리크리니움'의 재질은 목재, 청동, 상아, 은 등으로 위에 쿠션이나 깔개를 깔아 사용했다. 긴 의자 하나는 3인용으로 테이블을 ㄷ자로 감싸는 것처럼 3대를 놓았다. 그렇게 때문에 케나의 출석자수는 9명, 조금씩 붙어 누워도 10명 전후였다. 좌석에는 상석과 하석이 있어서 사회적 지위에 따라 앉는 위치가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주빈은 '집정관의 자리'라고 하는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만일 여자가 손님으로 참석하는 경우에는 눕지 않고 앉았다. 로마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비스듬한 자세로 연회에 참석한 것은 로마 중반기가 넘어서이다. 또한 케나의 참석자들은 정장을 입어야 했다. 그것이 '토가'라고 하는 하얗고 가느란 털실로 짠 옷이다. 로마의 원로원들이 입었던 천을 둘둘 감은 것 같은 의상이다. 토가는 고가였기 때문에 가지고 있지 않은 손님은  초대한 사람에게 빌렸다. 9. 기본적으로 로마의 연회는 계란으로 시작해 고기를 메인으로 하고 사과로 마무리 하였다. 그래서 로마의 이런 풀코스 요리를 '계란에서 사과까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계란에 의아해 할 수 있지만 당시의 닭과 계란은 굉장히 귀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연회에선 삶은 계란을 통째로 주는게 아니라 슬라이스 해서 아주 조금씩 주었다. 연회의 기본은 식전주, 전채2종, 메인 요리인 생선, 고기, 그리고 디저트 였다. 빵은 언제나 테이블에 있었고 요리와 함께 먹거나 요리 사이사이에 먹었다. 먼저 대야에 손을 씻고 자리에 앉으면 놓인 신상에 짧게 기도한다. 식전주는 와인이거나 허브가 들어간 와인 또는 벌꿀주였다. 이것을 참석자들이 돌려마시면 처음에 나오는 것이 가름을 뿌린 삶은 계란이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첫 번째 전채는 문어나 굴, 야채의 마리네였다. 그외에도 양파, 컬리플라워, 버섯, 아스파라거스, 성게나 식용달팽이가 조리되어 나오기도 했다. 두 번째 전채는 그리스인이 좋아하던 산쥐의 벌꿀구이였다. 또한 올리브열매와 석류이거나, 아니면  게나 새우, 후추가 뿌려진 가재로 만든 경단이 니오기도 했다. 후추는 인도에서 수입되어 굉장히 비쌌다. 케나의 첫 번째 메인요리는 생선이었다.  광어, 숭어, 철값상어, 굴, 문어 등의 어패류가 나왔다. 로마에서는 고기와 생선이 동급으로 취급받았고, 생선은 신선하고 간단한 요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고기요리가 나온다. 멧돼지 통구이가 많았고, 어린 양이나 어린 염소가 나오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았고, 기원전 3세기까지는 소를 죽이는 게 금지돼 있었다. 메인이 끝나면 일단 식사가 끝나 손을 씻는다. 하지만 디저트를 위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마지막의 디저트는 사과인 경우가 많았다. 사과가 아닌 경우에는 석류, 자두, 대추야자 등의 과일 또는  소맥분을 우유와 올리브유에 반죽해 바른 포카치아 같은 과자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10. 케나에서 요리는 커다란 접시에 담긴 걸 각자 덜어서 먹는 형식이었다. 접시는 은이나 금,청동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것으로 동물이나 꽃, 신들이 그려져 있었다. 국물이 있는 음식은 조리한 냄비째로 가져왔다. 덜어먹는 접시는 저렴한 질그릇으로 1~2번 사용하고 버렸다. 납작한 무발효빵을 접시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맨손으로 식사를 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방에는 향수가 들어간 대야가 놓여 있었다. 일일이 일어나서 손을 씻는 게 불편한 경우에는 테이블보나 냅킨으로 손을 닦았다. 냅킨은 각자가 가지고 오는 게 당연한 것으로 사용할 일이 없어도 언제나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초대 손님은 더러워진 손을 노예의 머리카락으로 닦는 경우도 있었다. 그걸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른 나이 어린 노예가 배치됐다. 빵으로 손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11. 연회는 보통 밤 9시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짧으면 3시간,길면 9시간이나 계속 되었다. 먹다가 피곤하면 코스 사이의 공백을 이용해 소파에서 잠깐 잠을 자기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너무 배가 부르면 일부러 토해서 다음 코스를 먹기 위해 배를 비우기도 했다. 연회 참가자들은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필요하면 노예가 오줌 받는 통을 가져왔고 거기에 볼 일을 보았다 12. 음식 찌꺼기는 바닥에 그대로 버렸다. 바닥에 버려진 음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었다. 초기 로마에는 죽은 가족은 집의 마루 밑 지하에 묻었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어 먹으면 귀신이 붙는다고 하여 노예조차 이를 기피하였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바닥을 음식 찌꺼기 모양의 모자이크로 장식하기도 했다. 13. 케나(정찬)에 초대된 손님들이 돌아갈 때 주인은 '아포포레타'라는 선물을 손님들에게 지급한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의 가족들은 선물을 고대했다고 한다. 손님이 받는 것은 음식, 일용잡화, 장난감 등이지만 사람마다 받는 게 달랐다. 우선 용기에서 제비를 뽑는데  거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시나 말장난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문장에 대응하는 물건을 받았다.  마치 오늘날의 빙고게임 같다. 14. 그리스,로마에서는 와인을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대로 마시는 건 야만적이라고 여겼다. 와인에 물을 타는 것이 예법으로, 물에 와인을 넣지는 않았다. 그 비율은 2:1, 5:2, 3:1, 4:1 중 하나로 비율에 따라 도수가 달라졌다. 와인은 발효작용을 이용하는 술이기 때문에 언제나 정상적으로 숙성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대로 보관하지 않으면 변질돼서 시큼해진다. 로마시대에는 장기 보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변질을 늦추고, 맛을 속이기 위해 여러가지 첨가물을 넣었다. 탁한 느낌을 내기 위해 계란 흰자나 석회를 넣었고 색을 내기 위해 알로에, 사프란을 넣었다. 달콤한 와인을 만들려고 물을 섞은 과즙을 넣기도 했다. 향을 내는 용으로는 허브나 향신료가 사용되었다. 벌꿀, 수지, 바닷물, 눈 등은 그리스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첨가물로 양조과정에서 첨가물을 섞기도 했다. 와인에 첨가물을 넣는 것은 로마시대 뿐만 아닌 중세 말기까지 이어졌다. 15. 로마에서 와인 다음가는 술은 '아쿠아 무루사'라고 하는 벌꿀주였다. 이것은 물과 벌꿀과 이스트균을 섞어 발효시켜 만든다. 와인은 포도가 자라는 따뜻한 지방이 아니면 만들 수 없지만 벌꿀주는 북방에서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북유럽에서는 인기가 있었다. 로마에서 맥주는 제일 하찮은 술이었다. 노예용의 와인인 '로라' 보다도 질이 낮은 음료로 가격은 로라의 절반이었다. 로마에서는 '아리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메르카'는 양이나 염소젖으로 만든 요구르트다. 소화를 돕는다고 여겨져 건강식품으로 이용되었다. 후추나 가름을 뿌리거나, 코리앤더와 소금을 넣어 먹었다. '테후루툼'은 과즙을 졸여 만든 시럽으로 로마 어린이들의 음료였다. 물이나 식초에 타서 마셨다. '포스카'는 물을 탄 식초로 향신료나 벌꿀을 넣기도 했다. 특히 여행 시에 이용되었다. 여행자들은 식초를 가지고 다니며 생수에 섞어 마셨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생수를 마시는 것보다 배탈이 잘 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병사가 마시게 했던 것이 포스카라고 한다. 우유는 아이들의 음료로 어른들은 좋아하지 않고 의사들이 약으로 처방하는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허브를 섞기도 했다. 16. 로마에서는 귀중한 식재료는 사육이나 양식을 통해 구했다. 제일 유명한 것은 산쥐일 것이다. 산쥐를 벌꿀에 절여 구운 요리는 전채의 기본이었다. 이 작은 동물은 '그리라리움'이라고 하는  안이 나선형으로 돼 있는 항아리에 가둬서 길렀다. 푸아그라를 먹기 위해서 거위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사육되어 로마에서도 널리 퍼져 살을 찌우게 하였다. 인도가 원산인 공작은 맛은 없자먼 그 모습이 아름다워 연회에 사용되었다. 식용달팽이는 기원전 50년 전부터 양식기록이 있었다. 굴, 장어, 도미, 곰치 등의 해산물도 양식을 했다. 시장에는 수도도 있었고, 내륙지방에서는 어패류가 고급품이었다. 17. 똑같은 조리에 질린 로마의 부유층들은 진미를 찾게 되었다. 비록 맛이 없어도 신기하거나 귀하고 비싼 것이라면 좋았고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음식과 진미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 인기 있던 진미로는 우유에 끓인 돼지 유방, 무화과로 살찌운 돼지간이나 푸아그라, 우유로 살찌운 식용 달팽이, 낙타의 발굽, 살아있는 닭에게서 자른 볏, 플라밍고의 혀, 공작새, 두루미, 잉꼬,종달새의 혀, 거북이, 철갑상어의 알, 성게, 해파리 등이 있었다. 18. 번영기의 로마에서는 사치가 횡행했다. 국민의 낭비벽을 고치고자 때로는 '낭비금지법'이 발효되기도 하였다. 서민 대상의 법령은 바르(스낵바)에서 나오는 메뉴의 제한,  부유층에 대해서는 값비싼 식재료에 대한 금지 등이 있었다. 하지만 부유층은 금지품이나 바다의 진미를 밀수로 손에 널었다. 하루 식사에 들어가는 비용에 제한된 적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법에서는  '중요한 축제일의 요리에 노예 한 명분 이상의 돈을 들이면 안된다'라는 것이 있다. 당시의 노예 한 명은 현대로 따지면 자동차 한 대 분의 가격이다. 이러한 제재가 있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저녁 식사 한 번에 2~3천만원의 돈을 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행으로 유명한 황제 엘라가발루스(재위 218~222)는 도를 넘는 요리로 신하와 손님을 대접했다. 10일간 계속해서 1일 30마리의 돼지고기요리(진미로 여기는 유방과 자궁이 딸린 고기), 금가루와 보석가루가 뿌려진 콩요리 진주가루가 뿌려진 버섯요리를 대접하거나, 한 번의 식사에 600여마리의 타조의 뇌를 제공하기도 했다. 진주가 들어간 밥이 나왔을 때는 손님의 그릇에 진주가 들어 있으면 집으로 가져가도 되었다. 이런 식으로 돈을 너무 낭비한 것이 재앙이 되어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불과 수년만에 암살당했다. 19. 서민들이 자주 이용했던 바르(스낵바) 앞에는  돌이나 시멘트로 만든 L자 형의 카운터가 있었다. 여기에는 도자기로 만든 항아리가 묻혀 있었는데 벽돌이 단열재 역할을 해 안의 음식들이 보온이나 보냉이 되었다. 가게 안에 공간이 있으면 테이블이나 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없으면 손님들은 음식을 서서 먹었다. 대표적인 음식들로는 옛날부터 먹었던 콩이 들어간 '프로스(소맥으로 만든 죽)'다. 그 외에 인기가 있던 것은 삶은 돼지고기, 장어, 올리브, 무화과, 소시지, 고기경단 닭고기, 야채 마리네, 치즈, 계란 오믈렛 등이 있었다. 그 외에 와인을 제공하는 가게나 뜨거운 물을 내오는 가게도 있었다. 20. 로마는 시민들에게 빵을 배급했다. 정부는 시민의 생활을 보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고 후기에는 의원이나 황제가 인기를 얻기 위해서나 수도의 치안을 안정 시키기 위해 배급이 이루어졌다. 배급제가 있었기 때문에 곡물의 가격이 변동 된다거나 곡물 생산이나 매매로 돈을 벌거나 잃는 일은 없었다. 물론 배급은 식민지에서 막대한 세금을 걷었기 때문에 가능한 제도이다. 로마는 풍요로운 사회였으나 노예가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게 되자 자유시민은 일자리를 잃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어떻게든 자급자족을 하고 있는 농원주라도 빈곤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배급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는 비참하게 여겨졌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부유층은 시민이나 노예에게도 은혜를 베풀었으나 세월이 지나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면서 로마는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결국 쇠락의 길을 걸었다. 지구촌갤러리 eyetoy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