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흑인을 위해 테러리스트가 된 백인.jpg
존 브라운 1800년 5월 9일 ~ 1859년 12월 2일  그의 아버지는 가죽공장을 운영하던 사람으로 노예해방사상을 품고 흑인 노예들을 숨겨주거나 탈출 시켜줬는데 존 브라운 역시 이러한 환경에서 아버지의 성향을 물려받아 노예해방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나이가 들었을 무렵 캔자스로 이주하게 되는데... "유혈의 캔자스" 뒷배경을 잠시 설명하자면 캔자스가 캔자스 주로 승격되면서 과거 미주리 협정의 "위도 36도 30분선 아래로 노예주"에 따라 노예찬성주가 될 예정이었으나 캔자스의 정착민들은 대부분 북부 출신 또는 남부 출신이나 노예제를 반대하던 사람으로 그대로 노예주가 되기엔 곤란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투표로 결정하자는 결론이 나왔지만 해방자들은 자유주로 만들기 위해, 농장주들은 노예주로 만들기 위해 무장한 채 캔자스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다. 결국 온갖 부정선거 끝에 캔자스는 노예찬성주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노예찬성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노예 지지자들의 분풀이로 정착민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로렌스 약탈) 존 브라운은 캔자스에서 무장충돌과 유혈사태를 겪으면서 미쳐버린 나머지 완전히 과격파로 전향하게 되어버린다. 그는 미국 길리애드 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창설하여 이들을 주축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혁명활동에 선을 넘어버리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예시 이미지) 어느날 존 브라운은 노예제를 옹호하던 백인 5명을 유족들이 보는 앞에서 브로드소드로 무참하게 살해한다. 그는 피해자의 시신을 찢어발긴 뒤 그들의 사지를 캔자스 주 경계에 뿌려 노예찬성주의자들에게 강력하게 경고 했는데 이를 계기로 전미의 해방주의자에 대한 인식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 : 저 이 사람 모릅니다. 진짜로"  이 사건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에 링컨을 비롯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정치인들은 황급하게 존 브라운과의 어떠한 관계도 없다고 해명해야했다.  더불어 분노한 노예찬성주의자들은 민병대를 끌고 캔자스 주에 처들어가기까지 했는데, 존 브라운의 비밀결사들이 저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 선전을 거둬 존 브라운의 명성이 좋든 나쁘든 북미 전역에 떨치게 되었고 특히 남부 노예주 사이에선 악마의 화신 그 자체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1859년 그는 노예 해방 나라의 주춧돌로 삼고자 버지니아 주 하퍼스 페리의 정부군 무기고를 기습점령하였으나 머지않아 출동한 연방군에 의해 패배 당하고 사로잡힌다 그는 그 해 12월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나 존 브라운은 이 죄악의 땅의 범죄를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피 뿐이라고 이제 확신한다." - 그의 유언 그리고 그의 사형 집행 4개월 뒤 남북전쟁이 터진다 그러자 북부군은 그를 상징으로 삼아 추앙하게 되는데, 그를 주제로한 군가가 바로 "존 브라운스 바디" 찬양가, 옛날 군가 때로는 광고 노래에도 흘러 나오는 음율의 원조 되는 곡이다. - 플로리다 주에서 백인들 불편하지 않게 인종차별역사 교육방침 바꾼다는 기사 읽고 옛날에 쓴 글 끌어다가 렉카해봄 차라리 그 시대에 백인들이 했던 선한 일을 알리던지 인종차별 과거사 비호는 역시 좀 그렇지 않나 출처 : 루리웹 인종차별과 남북전쟁하면 저 사람을 빼놓을 수 없죠 링컨과 함께 미국의 역사를 바꾼 인물이라.. 하지만 호불호가 굉장히 강한..
두 천재의 박사논문 심사 과정
1. 막스 베버 사회학자로 유명한 막스 베버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의외로 중세의 무역 회사에 대한 역사학 연구였음 (사실 그때는 대학에 사회학과가 있지도 않았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독일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논문 주제에 관해 심사위원들과 토론을 하고 자신의 논지를 지켜내야 했는데 이 과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외부 청중들도 많이 참석했고, 토론은 무사히 끝남 베버: ㅎㅎ 더 논박하실 분 있으신가요? 당연히 베버가 정말로 더 논박할 사람을 찾는 건 아니었고, 이 멘트는 그냥 전통이었기 때문에 독일어도 아니고 라틴어로 말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함 그런데 청중 중 누군가가 진짜로 손을 들어버림 "저요" 어떤 병신이 진짜 논박하라는 줄 알고 손드냐? 손을 든 사람은 베버보다 47세 많은 테오도르 몸젠 몸젠은 평생 로마사 관련 연구를 1500편 (150편의 오타 아님) 이상 발표했으며 나중에는 로마사 집필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는 거물로 학계의 교황이라고 평가받기도 함 (위 그림은 젊을적이고 이건 늙은 사진) 몸젠: 로마 식민도시에 대한 의견이 나랑 좀 다른 거 같은데? 해명해봐 어쩔 수 없이 베버와 몸젠은 현실에서 키배를 뜨게 되고 누가 봐도 베버가 개좆된 상황 그리고 수십분간 토론하다가 몸젠이 토론을 중단시킴 (아쉽게도 자세한 토론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것같음) 몸젠: 베버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수험자의 앞길을 막을 생각이 없고 사실 젊은이들은 틀딱들이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하는데 이번이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몸젠: 내가 무덤으로 갈 때가 되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들아, 내 창을 받아다오. 이젠 내 팔에는 너무 무겁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아주 존중하는 막스 베버에게 말입니다. 몸젠의 급발진 후 역주행으로 논문 심사는 훈훈하게 끝남 2. 비트겐슈타인 사실 진짜로 일개 대학원생이었던 베버와 달리 박사학위를 받을 당시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유명한 철학자였고 그냥 과거에 출판한 논리철학논고를 박사학위 논문 대신으로 제출함 마찬가지로 구술 시험이 있었고 심사위원은 천재 철학자 G.E. 무어와 천재 철학자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버트런드 러셀 시험이 끝난 후 비트겐슈타인은 심사위원들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함 "너무 걱정 마십쇼. 나는 당신들이 절대 이해 못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Don't worry, I know you'll never understand it.) 그러나 무어는 이 지랄을 당하고도 심사 보고서에 "나는 이것 (논리철학논고)이 천재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박사학위에 필요한 기준을 훨씬 능가합니다." 라고 적고 통과시킴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