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SS
4 years ago100,000+ Views

매국노가 누울 자리는 없다: 친일파 이완용의 무덤

이완용이 죽은 후 동아일보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사설로, 그의 삶을 비판한다. 그럼에도 이완용은 당당하게 무덤을 잡는다. 그의 묘자리가 사라진 건 증손자에 의해서 간이화장을 치르면서였다. 치욕을 감내하기도 힘들고, 관리도 귀찮아 겸사겸사 없애자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철저한 실리와 현실을 추구하던 이완용의 후손다운 판단이다. http://ppss.kr/archives/31805
1 comment
Suggested
Recent
친일역사를 정당화하려고 교과서 개정을 하는 사람들 혹은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일백번 고쳐죽어 일백번 아카시아 뿌리에 휘감겨라.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탐정 손수호] "삼청교육대, 성고문, 수지 김.. 그때가 좋았다고?"
마구 잡아다 가혹행위 했던 삼청교육대 성고문 하고도 피해자에 실형, 부천서 사건 살해 피해자를 간첩으로 둔갑시킨 수지김 사건 가족이 이런 일 당하고도 '그때가 좋았다' 할까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손수호(변호사) 탐정의 눈으로 사건을 들여다봅니다. 탐정 손수호. 우리 사회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사건을 보다 자시히 들여다보는 시간 탐정 손수호. 오늘도 손수호 변호사 나오셨어요. 어서 오십시오. ◆ 손수호> 안녕하세요. ◇ 김현정> 요즘 법정을 둘러싼 뉴스가 참 많죠? ◆ 손수호> 최근에 법조계 기자들이 바빠요. 이명박 전 대통령 보석 결정 후 첫 재판, 고 장자연씨 보도 관련해서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가 MBC 상대로 제기한 손배소송 첫 변론기일, 드루킹 김동원 항소심 첫 공판, 여기에 사법농단 재판개입 관련 수사와 재판도 많아요. 게다가 전두환 재판도 있었죠. 이번 광주 재판은 5.18 민주화 운동 관련된 거잖아요. 그런데 그 외에도 전두환 집권 기간에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정말 너무 많지만 그중에 몇 개를 좀 골라봤어요. ◇ 김현정> 내란죄, 반란수괴죄 이런거 말고 집권 기간에 발생한 일들 말씀이죠? 이쯤에서 한번 떠올려보죠. 그때 그 시절 그 사건. 어떤 것부터 볼까요? ◆ 손수호> 먼저 삼청교육대. ◇ 김현정> 삼청교육대. 사회 정화한다는 명목 하에 사람들을 마구 잡아다 가두고 때리고 막 이랬던 거 아닙니까? ◆ 손수호> 그렇습니다. 전두환씨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줄여서 국보위 위원장일 때 ‘삼청계획 5호’에 따라 만든 보호감호시설이 삼청교육대였는데요. 국보위 사무실이 서울 삼청동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범죄자, 불량배 모아서 훈련 통해 교화시킨다고 설립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기준이 이게 애매모호했어요. ◇ 김현정> 기준이 모호해요? ◆ 손수호> 네, 그러다 보니까 원래는 현행범, 재범 우려자, 깡패, 도둑, 강도, 매춘업자. 이런 사람들이 주요 교화 대상이었죠. 그게 옳은지 그른지는 둘째로 치고. 그런데 한번 들어보시죠. 불건전 생활 영위자, 개전의 정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사람, 사회 풍토 문란 사범. 이렇게 이런 기준을 적용하면 저도 잡혀갈 수 있을 것 같다를 이런 생각이 듭니다. ◇ 김현정>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에요. ◆ 손수호> 사실상 누구든 잡아 가둘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건데요. 결국 중고등학생 중에서도 약간 문제아 취급 받는 사람들, 은둔형 외톨이, 우울증 환자, 지적장애인 또는 연고 없는 사람까지 다 잡아갔어요. 게다가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언론인, 종교인, 야당 인사, 지지자, 노동운동가, 전두환 비방하거나 집권 민정당에 반대하는 학생도 잡혀갔고요. 할당량 정해놓고 인원 채우다 보니까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사람을 교도소 정문 앞에서 바로 잡아가기도 했습니다. ◇ 김현정> 그 안에서 가혹 행위도 있지 않았습니까? ◆ 손수호> 그렇습니다. 폭행은 물론이고 성폭력까지 빈곤했고 또 심지어 배가 너무 고파서 땅에 떨어진 밥알 주워 먹었는데 그 이후로 조교들한테 맞아 죽은 사건도 있었고요. ◇ 김현정> 총 통계, 정확한 통계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통계 같은 게 나온 게 있어요? ◆ 손수호> 사망자가 총 54명. 그리고 후유증으로 인해서 나중에 사망한 사람은 397명. 정신 장애를 입거나 또는 기타 상해를 입은 사람이 무려 2678명이 공식적인 통계고요. 이 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참다 못해 항의한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때 항의한다고 기관총, 소총 난사해서 죽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김현정> 도대체 이런 곳을, 삼청교육대 같은 걸 왜 만든 거예요? ◆ 손수호> 일단 분위기를 공포스럽게 조성하려는 목적도 있었고요. ◇ 김현정> 공포 정치. ◆ 손수호> 그리고 또 필요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활용. 특히 좀 정적 등을 수용하는 그런 수단으로 활용하는 그런 목적도 있었겠죠. ◇ 김현정> 이른다 데모하다 잡혀간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거기 가서 죽고 이런 사람들 많잖아요. ◆ 손수호> 그렇죠. ◇ 김현정> 삼청교육대가 떠오르고. 또 전두환 집권 당시 어떤 거 기억나세요? ◆ 손수호> 사실 이 사건만 해도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중요한 사건인데 바로 부천서 성고문 사건입니다. ◇ 김현정> 권인숙 씨 사건. ◆ 손수호> 86년 부천서 경찰관 문귀동이 학생 운동가 권인숙을 성폭행한 사건인데요. 2년 동안 재판 끝에 처벌은 받았어요. 하지만 극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고 그 과정에서 참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떠올리면서 치를 떨고 있습니다. ◇ 김현정> 순탄치 않았다는 건 뭐였습니까? ◆ 손수호> 처음에 문귀동을 조사한 검찰은 실제로 성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사건 당시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고 발표했고, 기소유예 처분을 내려요. 그리고 “성적모욕의 허위사실 유포는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쓴다는 증거”라면서 언론에 보도지침을 내려서 ‘부천서 성폭행 사건’이라고 하지 말고 ‘부천서 사건’이라고 쓰도록 강요합니다.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그 유명한 장세동의 지시에 따른 거죠. ◇ 김현정> 사건을 덮기 위해서 안기부장, 지금의 국정원장까지 나선 거예요. ◆ 손수호> 그렇기 때문에 문기동은 오히려 처벌받지 않았고 피해자 권인숙에게 오히려 징역 1년 6개월형이 선고됐었죠. 하지만 그 후에 민주화 과정에서 재정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이면서 재판이 이루어졌고요. 이렇게 재판을 한 끝에 결국 가해자 문귀동에게 징역 5년형이 선고됐습니다. ◇ 김현정> 전두환 집권 시절의 사건들 하나하나 떠올립니다. 세 번째는 뭔가요? ◆ 손수호> 수지김 사건. ◇ 김현정> 수지김 사건. ◆ 손수호> 간첩 조작 사건입니다. 87년 홍콩에서 사업하던 윤태식이 아내 김옥분과 말다툼하다가 살해했어요, 아내를. 그런데 처벌을 피하려고요. 싱가포르에 가서 북한 대사관에 망명 신청합니다, 월북하겠다고. 그런데 북한 대사관에서 안 받아줬어요. 그러자 미국 대사관으로 갔어요. 그런데 미국 대사관에서도 쫓겨놨습니다. 오히려 미국 대사관에서는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했습니다. "이상한 사람 왔다." 결국 한국 대사관에 끌려갔거든요. 거기서 살인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 아내가 간첩이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한 거예요. ◇ 김현정> 그런데 아내가 간첩이었다고 하면 살인 혐의를 피할 수 있는 거예요? ◆ 손수호> 국가보안법. 87년 당시 국가보안법 21조 3항에 이런 규정이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의 죄를 범한 사람을 체포할 때 반항하거나 또는 교전 상태에서 부득이한 사유로 살해하거나 자살하게 한 경우에는 체포한 경우에 준해서 상금을 지급할 수 있다." 간첩을 살해하면 처벌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금 받는 거예요. ◇ 김현정> 간첩이면 사살해도 괜찮다. 죽여도 된다. ◆ 손수호> 이 규정은 지금도 있습니다. ◇ 김현정> 그런데 그걸 입증해야 될 거 아니에요. 이 사람이 간첩, 아내가 간첩이었다는 걸. ◆ 손수호> 윤태식이 첩보영화 마니아였다고 하는데요. 일단 시나리오를 만들었습니다. ◇ 김현정> 어떻게요? ◆ 손수호> "아내가 수지김이라는 북한 간첩이었고 빚쟁이들한테 잡혀 있다면서 싱가포르로 나를 불러냈다. 그래서 북한 대사관으로 끌고 와서 납치하려고 했고 내가 어렵게 탈출했다." 이런 걸 만들어낸 거예요. 사실 지금 들으면 이게 무슨 말이야라고 하겠지만. ◇ 김현정> 이거 어떻게 속아요, 여기에? ◆ 손수호> 당시 87년도였거든요.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 돌리기 위해서 정말 윤태식의 시나리오를 이용해서 '납북 사건'으로 조작을 한 거죠. ◇ 김현정> 우리 사회에 간첩이 있다라는 걸 그 당시는 이용하고 싶은 정권이었으니까. ◆ 손수호> 이거 역시 안기부장 장세동의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 김현정> 반공을 강조하던 정권에서 진짜 월북하려던 사람은 봐주고 억울하게 살해된 사람은 간첩으로 만들어버리고 이랬던 것들인데. ◆ 손수호> 사실 안기부가 윤태식을 고문까지 했거든요. 그래서 사건 전모를 이미 확인을 했어요. 안기부가 속아넘어간 게 아니에요. ◇ 김현정> 다 알면서? ◆ 손수호> 다 알면서도 이렇게 활용을 하고 악용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거죠. 그것 때문에 가족들은 계속 간첩 가족으로 결국 손가락질받고 누명 쓰고. 형제, 자매 5명도 다 고초를 겪었는데요. 언니는 연좌제로 해고된 다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서 타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고 오빠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었고 여동생 3명 다 이혼당하고 심지어 중학생인 조카도요, 간첩 식구라면서 집단 따돌림을 당한 끝에 자퇴했습니다. ◇ 김현정> 중학생도요? ◆ 손수호> 그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거죠. ◇ 김현정> 그러면 살해자는, 살해자 윤태식은 아무 처벌 안 받았어요? ◆ 손수호> 살인죄로는 당시에 처벌 안 받았어요. 다른 사기로 2년 6개월형을 받기는 했는데 그 후에 출소해서 지문 인식 기술 벤처사업을 합니다. 승승장구했어요. 정치권과 연줄도 있었고. 그런데 그 후에 주변에서 볼 때 좀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언론이 붙고 피해자 가족들이 나서고 해서 수사가 이루어집니다. 나중에 공소시효 완성 50일 남겨놓고 결국 구속됐고요, 결국 징역 15년 6개월형이 선고됐습니다. ◇ 김현정> 사건을 조작한 사람들도 처벌 받았나요? ◆ 손수호> 그 사람들은 이미 공소시효 완성돼서 처벌을 면했어요. 하지만 법원은 한 집안 사람들의 인생을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음을 인정해서, 국가가 유족들에게 총 42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고요. 배상 후에 국가가 당시 안기부 간부들과 윤태식에게 구상권 행사해서 법원이 장세동 9억 원, 윤태식 4억5천만 원을 국가에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 김현정> 이렇게 해서 무너진 인생이 보상이 되겠냐마는 어쨌든 일부라도 과거의 잘못이 바로잡혔다는데 의미가 있겠네요. 오늘 손 탐정이 5공 시절 사건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뭡니까? ◆ 손수호> 오늘 얘기한 사건들, 전두환 정권 때는 덮여 있다가 나중에 민주화가 되면서 결국 드러나고 관련자들을 단죄할 수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전통 때가 좋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있거든요. "살기 편했다, 경제 호황이었다, 나라에 기강이 있었다, 전교조 민노총 없었다." 이런 이유들로요. 그런데 내가, 혹은 내 가족이 오늘 얘기한 사건을 당했다면 어떨까. 내 아이가 학교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삼청 교육대에 끌려가 가혹 행위를 당하고 항의하다가 기관총 맞아 죽었다면? 또 내 딸이 경찰서에 끌려가서 고문 성폭행 당했는데 가해자는 처벌 안받고 오히려 내 딸이 감옥가면? 또 내 누나가 억울하게 살해당했는데 이상하게 간첩으로 몰리고 온 가족이 손가락질을 받고 인생 망치게 된다면? ‘그래도 경제는 호황이니까 괜찮다’,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은 몇 명 안되니까 참을만한 세상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 김현정> 전두환 씨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이런 망언이 나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 당시 저질러졌던 만행들. 세 가지 굵직한 것들 가지고, 탐정 손수호. 손수호 변호사가 짚어주셨습니다. 손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사진=한국스마트속기협회)
[펌][역사툰]백정의 사위가 된 이장곤 이야기.jpg
조선 시대에는 천인은 아니었지만 천인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 있었다.  조례(皂隷)⋅나장(羅將)⋅일수(日守)⋅조졸(漕卒)⋅봉수군⋅역졸(驛卒) 등 이른바 ‘신량역천(身良役賤)’층이 그들이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하는 일이 천하다고 하여 천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천하게 여겨진 부류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백정(白丁)이다. 백정은 본래 고려 시대의 여진족 출신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을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에 하나로 합쳐서 부른 이름이다. 고려 시대의 재인과 화척은 유목 생활을 하던 여진족의 후예로 천인 취급을 받았다.  세종대왕께서는 이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통합하기 위해 천하게 불리던 재인이나 화척 대신에 고려 시대의 일반 백성을 뜻하는 백정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울러 백정들에게 호적을 만들어 주고 평민과 섞여 살게 하는 등의 조치도 취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정은 호적을 갖게 되었고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조치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들을 ‘신백정(新白丁)’이라 부르며 계속 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반이나 관료들은 노비처럼 멋대로 부리기까지 하였다. 한편 화척의 후예인 백정들은 재인들과는 달리 마을에 거주하며 도살이나 유기(柳器) 제조 등에 종사하였다. 유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유기의 우리말인 ‘고리’를 붙여 ‘고리백정(古里白丁)’이라고도 불렀다.  이들 백정은 다른 마을 사람들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았다.  1809년(순조 9) 개성부의 한 백정이 혼인을 하면서 관복(冠服)을 입고 일산(日傘)을 받쳤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관복을 빌려 준 사람을 난타하고 백정의 집을 부순 후 개성부에 호소한 사건은 백정들의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잘 보여 준다.  마을 사람들은 심지어 관청에서 그 죄를 엄히 다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성부 건물에 돌을 던지며 소란을 피우기까지 하였다. 성대중의 아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에 따르면 백정 가운데 고리백정이 소를 잡는 백정보다 더 천시받았고 그 때문에 주현에서 사형시킬 죄수가 있으면 그들에게 형 집행을 맡기기도 하였다고 한다.(『연경재집』 권59, 「楊禾尺」) 자료에 나오는 백정이 고리백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부당한 처사에 맞섰던 데서 백정들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백정들의 그러한 모습은 다음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한 자는 백정이다. 그렇지만 가장 두려워할 만한 자도 백정이니, 그들이 가장 천하기 때문이다. 문경의 공고(工庫)에 소속된 종이 백정을 구타하였는데, 백정이 죽자 재판을 하여 그를 사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관아에서 종의 편을 들까 염려한 나머지 온 군내의 백정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칼날을 세우고 몰려와서는 마치 자신들의 원수를 갚듯이 하여, 기어이 직접 그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 버리겠다고 관문에서 시끄럽게 굴었다. 이에 관아에서 간곡히 타이르니 그제야 돌아갔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지방 관아에 소속된 종이 백정이 구타를 당해 죽이는 일이 발생하자 백정들이 억울하게 죽은 동료를 위해 집단행동까지 불사했던 것이다. 관노비에게 맞아 죽을 만큼 백정의 처지는 열악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백정들의 의식이 변화했다고 해서 당장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결국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자유의 신분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사회적 차별은 여전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여 나가야 했다. 조선 시대에 백정은 가장 긴 고난의 길을 걸었던 부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전체 출처] 디시인사이드 카툰-연재 갤러리 [역사툰] 백정의 사위가 된 이장곤 이야기.jpg
서울나들이 ㅡ 경복궁에서
#서울나들이 #경복궁 오랫만의 서울나들이 다녀왔네요. 서울구경차 다녀온건 아니구요, 서울에 업무차 다녀오면서 잠시 짬을 내어 경복궁엘 들렸네요. 보통 사적지들은 월요일엔 휴관하는 곳이 많은데 경복궁은 월요일에도 입장이 가능하더군요. 경복궁에 가보니 의외로 아주많은 외국인들이 한복입고 다니는 모습을 볼수가 있더군요. 아마도 여행사측에서 제공하는 한복입기체험이 아닐까 싶더군요. 우리도 여행사통해서 외국여행가면 해보는것처럼 우리나리여해온 외국관광객들도 마찬가지 일듯하네요. 개설 사적 제117호.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리었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연생전(延生殿) 3칸, 경성전(慶成殿) 3칸, 왕의 평상시 집무처인 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簡儀臺)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강녕전 외에 교태전(交泰殿)·연생전·흠경각·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며 만류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 경복궁에서 단종이 쫓겨난 일이 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정전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에 이어 사약을 받은 일 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해군도 한때 경복궁성을 수축케 하고 중건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전각은 융문당(隆文堂)을 포함하여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含元殿)·만경전(萬慶殿)·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인(日人)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가, 1971년에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지어진 목조기와건물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박물관이, 1986년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이 건물로 이건되었다. 구 총독부청사는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 원래 있던 흥례문 권역이 2001년 10월 복원·낙성되었다. 한편, 일제에 의해 건물이 훼철되는 피해를 입은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내용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建春)·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萬春殿)·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서쪽에 함광각(含光閣)·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흥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廡)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밖에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며, 복원된 건물은 강녕전·자선당·태원전·광화문 등이다. 근정전(국보 제223호)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근정문(보물 제812호)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보물 제809호)은 침전건물의 하나인데, 이 건물에는 후원의 담장과 굴뚝에 묘사된 십장생(十長生)무늬가 특히 주목된다(경복궁자경전십장생굴뚝, 보물 제810호). 사정전 북쪽에 있는 아미산은 여러 단의 화계(花階)와 그 사이의 나무·괴석 등이 눈길을 끌며 전체적으로 사철의 변화에 따른 조화를 보여 주는 한국식 정원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도 봉황·귀면·당초문 등을 새긴 육각 화문(花文) 장식의 굴뚝(경복궁아미산의굴뚝, 보물 제811호)이 있다. 이밖에 18세기에 만든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기기인 풍기대(風旗臺)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보물 제847호).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경천사십층석탑을 비롯한 국보·보물로 지정된 석조물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용산에 새로 지어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대부분 옮겨져서 현재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 일부만 남아 있다. 특징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의의와 평가 경복궁은 비록 궁내의 건물들 대부분이 없어져서 근정전과 경회루를 제외한 많은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창건 때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 조선왕조 정궁의 면모를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2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