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yLow
10,000+ Views

#

날씨가 갑자기 쌀쌀 해 지고 옷깃을 여미게 되면서 하게 된 집 정리. 오늘 드디어 네 면도기를 치우고 내 공간에 남아있던 네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이제 네가 정말 없어지는 것 같아서 내 공간에 네가 정말 없어지는 것 같아서 정말 하기 싫었는데 있지 말이야. 씁쓸하고 버거운 과정이었지만. 이렇게 하는게 널 위해 맞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버팅겨보고 부정 해 봐도 이제 두번다시 네가 다시 올 일은 없다는거 잘 알면서 아니라고 부정했는데. 이젠.. 인정 해야겠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 이런 면도기. 옷을 치운다고 해서 네가 내게서 지워지거나 잊혀지진 않겠지만..
14 Comments
Suggested
Recent
이리저리 버거워도 나름 잘 버텨내고있어요 :-)
^^...그쵸...저도 다 치우진 못했는데 근 1년 처음부터 쌓인 흔적들을 치우는게 아직 전부다..하기엔 버거네요 ^^; 힘내자구요 힘힘 !!!
공감되네요.....저도 얼마전 치우던 그의 면도기와 옷가지를 버리면서 많이 울었던 경험이 있어요... 아직 그의 넷북을 정리하지 못한채 탁상에 있네요... 내노트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쓸모도 없는 넷북을 지니고 있어서 뭐한다고......ㅎ
@MowgliMarvin 그쵸 그저 면도기하나 옷가지 몇개 뿐인데 말이죠.. ^-^;
@ham2ham2 요샌 맞춤법 틀린거도 모르는게 많아서 영 집중해야될것같더라구요 :-) 화이팅 입니다 ^-^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341
등록한 피티샵에서의 운동 첫날이었다. 몸이 건강해지는 것 같고,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것 같고, 뭐 이런 생각들도 당연히 들었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분이 꽤 좋았다. 피트니스 센터를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아주 가벼운 개인 운동에 불과했었고, 체계적으로 개인 트레이닝을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라, 무척 신이 났다. 한 시간이 어떻게 간 줄도 모르게 지나갔다. 코로나 사태로 샤워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좀 고역에 가까웠지만, 정부의 다음 조치를 기대해보는 수밖에.   3개월 가량의 시간 동안 식단 관리부터 성실한 출석도 쉽지는 않겠지만, 이 시간들을 계기로 이후의 관리를 잘 설계해 나갈 수 있을지가 더 걱정이다. 날이 풀리면 등산을 좀 해볼까 한다. 어떻게든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방탕하게도 살아봤고, 젊음만을 믿고 잔뜩 몸을 망가뜨리면서도 살아봤다. 이제는 반대 지점에서 내 몸이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하는지, 그로 인해 내 정신은 몸과 어떤 조화를 이룰지 지켜봐야겠다. 퇴근 후 운동을 마치고 와서 씻고 보니 오후 10시가 넘어있었다. 사실 오늘은 어제 인상 깊게 본 영화에 대해 몇 가지 생각들을 적어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이제 주 4일은 이렇게 하루가 저무는 무렵에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조율을 잘 해봐야겠다. 운동을 시작해서 즐겁지만, 이게 운동 일지는 아니니까.
342
어제 조금 늦게 잔 탓도 있지만 오늘은 어찌나 잠이 자도 자도 쏟아지는지 중간에 두세 번을 깼으면서도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고, 거의 정오까지 계속해서 잤다. 언제나 그랬듯 자는 동안 쉬지 않고 꿈을 꾼 듯한 느낌이다. 그 모든 것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 중 둘은 그것이다. 하나는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아주 오래된 느낌의 남루하고 촌스러운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이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그는 나보다 한참 젊은데도 불구하고 고루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데, 그에 대한 내 생각이 옷차림에 반영된 것은 아닌가 싶다. 또 하나는 최근에 어떠한 이유로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있는 친구의 등장이었는데, 평소 나는 그가 별일 없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꿈에서는 그에게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친구에 대한 양가적인 마음 중 내가 애써 숨기고 있는 감정이 꿈에서 드러난 것일 테다. 특히 첫 번째, 옷차림으로 발현된 그에 대한 내 평가의 반영을 떠올리면서 이건 거의 프로이트의 연구 사례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잠이 계속해서 쏟아지는 이유는 이처럼 계속되는 꿈으로 인한 숙면의 불능 때문일 텐데, 이렇듯 나는 꿈 없는 잠을 자본 기억이 거의 없다. 이건 아마 지나치게 걱정이 많고 고민이 많고 생각이 많은 성향 때문이겠지만, 요즘은 종종 그러한 꿈의 범람이 성가시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꿈을 꾸는 것은 즐겁기도 하다. 특별히 악몽을 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도 꿈을 꾸는 통에 새벽녘에 일어나면 그 사이에 꿈이 휘발돼버릴까 싶어 곧바로 인터넷 창을 켜고 그 꿈의 해몽을 검색해보기도 한다. 그 해몽들이 들어맞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꿈을 통해 요근래 나의 강박이 무엇인지를 되짚어보기도 한다. 내가 애써 숨기고 있는 고민과 욕망들이 대개 꿈으로 나타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동안 참 여러 가지 양상의 꿈들을 경험해 본 것 같다.  물론 착각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꿈을 꾸면서 오감을 다 느껴보고자 했고 느껴본 적이 있다. 현재까지 나는 오감 중 미각을 빼고는 모두 경험해 보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이 촉각과 미각이었다. 시각적인 꿈은 대개 총천연색으로 나타나지는 않고 한 지점만 명확히 컬러를 드러내는 경우다. 그러니까 흑백이라고 정의하기도 사실상 힘들지만, 가령 흑백에 가깝다고 인지되는 풍경 가운데 누군가의 티셔츠만이 빨간색으로 드러나는 경우이다. 후각적인 꿈의 경우는 기억하기로는 두 번인데, 둘 다 탄 냄새였다. 선잠에 들어있는 경우였는데, 나는 그것이 분명 현실의 냄새라고 생각했지만, 잠에서 깨자 냄새가 바로 사라졌다. 두 번의 경우 모두 그렇다. 내 인지의 불명확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두 번이나 있었던 일이다. 청각의 경우는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누군가 불러준 문장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읽은 것이 아니다. 분명히 누군가의 목소리로 발음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메모장에 적어놓고 맨 정신으로 읽어보면 건질 만한 것이 없다. 촉각은 꽤 힘들었지만, 어떤 물건의 테두리를 꼭 움켜쥐고 그 감각을 기억한 것인데, 일어났을 때 내 주위에 꿈 속의 물건으로 착각을 했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내가 어떠한 물건을 잠결에 잡았을 경우, 꿈 속에서 그것이 다른 물건으로 발현되어 촉각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럴 만한 물건은 내가 누워 있는 곳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꿈속에서 온전히 현실의 어떤 도움 없이 내 의식이 만들어 낸 촉각을 경험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온전히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미각은 사실 최근에 경험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아직 미각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가위는 아주 어릴 때 한 번 그리고 청소년기에 한 번, 그리고 요즘은 아주 피곤할 때 가끔씩 한 번 눌린다. 대개 가위에 잘 눌리는 사람들은 악몽을 동반한다고 하는데, 내 경우  가위가 특별히 악몽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그 상황보다 더한 공포는 사실 없다. 꿈을 꾸면서 이것이 꿈이라고 인지하는 자각몽 역시 두어 번 정도 꿨고, 역시 어릴 때 꿨다. 최근에는 전혀 꿔본 적이 없다. 이처럼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꿈에 대한 비슷비슷하면서도 특별한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작년에는 어떤 잡지에 시 세 편과 산문 한 편을 발표했는데, 그 중 한 편은 실제로 경험한 일을 꿈을 꾼 것처럼 각색한 것이고, 한 편은 꿈에서 경험한 일을 실제 겪은 것처럼 각색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산문에 썼다. 이토록 꿈을 많이 꾸는 삶이라면 차라리 꿈이라는 것이 생시와 동일한 지분을 갖고, 하나의 견고한 세계로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그때 우리는 어느 쪽을 꿈으로, 생시로 불러야 할까. 그런 경계가 모호해진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에서 좋지 않은 일을 겪었을 때 꿈에 가서 이 한 마디를 하면 그만 아니겠냐고. "참 나쁜 꿈을 꾸었군." 꿈이 마치 생시와 평행세계처럼 흘러간다면, 그래서 내가 같은 꿈을 계속 이어서 꾼다면 어떨까. 꿈에 가면 생시처럼 내가 사는 집도 있고, 내가 다니는 직장도 있고, 또 그쪽 세계의 내 부모가 다르고, 내 친구들이 다르다면. 우리는 남루한 일상을 반대쪽 세계를 통해 상쇄시킬 수도 있을까. 우리는 실제로 현실처럼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기도 하고, 꿈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놀라운 일을 현실에서 마주하기도 한다. 우리의 감각 체계가 너무나 무딜 뿐 어쩌면 그런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나는 무척 높은 확률로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내게 알은 체를 하며 다가오는 이가 있다면 물어봐야겠다. 우리 집이 어디냐고.
340
그젯밤에는 주말의 끝무렵을 장률의 최신작 <후쿠오카>로 달랬다. 원래 그의 영화들을 아주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은 유독 인상적이었다. 그의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이번에는 유독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지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판타지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가령 극 중 남자가 한 서점에서 주인에게 할아버지 사장님은 어디에 가셨냐고 묻는다. 젊은 서점 주인은 할아버지는 2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전한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가 젊은 서점 주인에게 며칠 전에도 그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고 받아친다. 그는 서점을 나와서 저 여자 뭔가 이상하다고 흉을 본다. 이런 장면들뿐 아니라 두 중년 남자와 동행하는 젊은 여자는 계속해서 묘한 분위기를 펼쳐보인다. 앞서 서점에서의 에피소드는 사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지극히 현실일 수도 있고, 판타지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서점에서의 대화는 여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젊은 서점 주인이 잔혹한 농담을 한 것이거나, 아니면 미쳤거나, 그도 아니라면 남자의 착각일 수도 있다. 할아버지 사장님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전혀 다른 인물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하나의 가능성은 그 할아버지 사장님이 정말로 귀신이라도 되거나. 실제로 젊은 서점 주인은 남자가 할아버지 사장님과 며칠 전에 대화를 나눴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가 이곳을 아직 못 떠나고 계신가보다,라고 답한다. 젊은 서점 주인은 일종의 영적인 인물이기라도 할까. 아니면, 다소 엉뚱한 사람일 뿐인 걸까. 감독은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사실 이와 비슷한 유의 방식을 예전에 홍상수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도 느낀 적이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 무렵부터 사실 거의 비슷비슷해서 특별히 감흥을 주거나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바로 그 영화에서만큼은 독특한 인상을 받았다. 바로 장률의 <후쿠오카>처럼 판타지를 다루는 방식이 꽤 영리했기 때문이다. 그 작품에서는 한 쌍의 오래된 연인이 등장하는데, 남자에게 지칠대로 지친 여자가 어느날 사라진다. 그러다 얼마 후 다시 남자 앞에 나타나는데, 분명 얼마 전 사라진 그 여자친구가 맞건만, 여자는 황당하게도 자신은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툼 일색이던 관계가 이상하게 호전된다. 왜냐, 다시 나타난 여자의 말대로라면 이 여자는 여자친구와 닮았을 뿐 전혀 새로운 사람이고, 이제 막 호감을 가지게 된 사이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얼떨떨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대하듯 다소간 조심스러워하며, 둘 사이에서는 전혀 다른 국면의 관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역시 감독은 이에 대한 해명을 전혀 하지 않는다. 남자친구에게 지칠대로 지친 여자가 특단의 조치로 완벽한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웃기지만 정말로 여자친구와 완벽하게 닮았을 뿐 제 3의 인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전자일 경우 엉뚱하지만 현실적인 이야기이고, 후자일 경우 현실에서 벌어진 판타지가 된다. 역시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사실 여기에는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정말 필요한 지점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기법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의 아니게 그 모호함이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게 드러나버리면 결국 고루한 현실만 의미 없이 남게 된다.  서사 장르에서는 사실 판타지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가 관건이다. 특히 동화의 경우, 많은 습작생들이 실컷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비현실적인 얘기들을 잔뜩 늘어놓다가 수습하지 못하고 꿈으로 처리해버리기 마련이다. 그럴 경우 작품의 질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러한 일례로 15년 전쯤 방영됐던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있다. 이 드라마는 김은숙 작가의 초기작이자, 지금의 김은숙을 있게 한 작품이지만 결말을 다루는 방식이 무척 실망스러운 데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공감했지만, 평범한 인물이 재벌과의 달콤한 연애를 이어가다가 그게 결국 꿈이었다는 식으로 끝내버리는 설정은 이제까지 본 그 달달한 얘기들이 전부 다 허무해지는 기분을 선사한다. 이런 방식은 심지어 작가에 대한 배신을 느끼게 한다. 이제껏 쌓아올린 성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판타지를 다룰 때는 아예 비현실적인 공간을 전제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현실적인 공간에서 판타지를 자연스럽게 녹여야 하는데 그게 사실 굉장히 어렵다. 자연스러움을 담보하지 않으면 바로 유치해지기 일쑤이며, 황당하고 엉성한 서사가 돼버리기 마련이다. 현실에서 판타지를 활용하려면 관객이나 독자를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실 판타지를 그리는 것보다 판타지의 근거를 엮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앞서의 장률과 홍상수의 판타지는 착오의 가능성과 생략으로 엮는 방식이다. 그들의 영화 공간은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들이다. 일본의 한 도시, 그리고 서울의 어느 동네. 이곳에서 판타지를 엮으려면 가장 영리한 방식은 뭘까. 바로 인물들의 착오를 위한 상황들을 부려놓고, 관객들에게 최대한 불친절해지는 것이다. 영화는 관객의 선택에 따라 현실이 될 수도 있고, 판타지가 될 수도 있다. 또는 현실과 비현실이 교묘하게 겹치는 장면들이 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느쪽을 택해도 황홀했다.